2019.06
트위터 썰로 시작해서 책으로 엮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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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연애를 시작한다고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던 것도 같았다.
김독자는 그 생각을 뼛속까지 철회하며 반쯤 감긴 눈으로 포크를 움직였다. 파스타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잠이 쏟아졌지만 이윽고 혀끝에서 살아난 미각에 정신이 들었다. 맨날 먹는 요리인데 하루 정도 자면서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역시 아깝다. 맛있는 걸 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그런 천인공노할 생각을 하며 냠냠 아침을 먹는 김독자를 본 유중혁이 픽 웃었다.
“또 얼빠진 표정이군.”
이 새끼가. 김독자보다 더 일찍 일어나는 유중혁은 늦은 아침을 먹는 자신과는 식사 시간이 엇갈렸다. 김독자는 물론 그에 대해 전혀 유감 같은 건 없었다. 뭐, 꼭 얼굴 마주하고 밥을 먹어야 하나. 원래는 매일 혼자서도 먹던 밥이다. 그리고 점심이랑 저녁은 같이 먹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벌써부터 점심 준비를 하는 것인지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며 바쁘게 움직이는 유중혁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떡 벌어진 어깨와 등판, 상대적으로 늘씬한 허리와 그 위로 두른 잿빛 앞치마. 손과 팔의 움직임에 따라 옷 너머의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음, 역시 지켜보는 맛이 있는 놈이다. 그러니까 얼빠진 표정 운운한 건 좀 봐줄까. 그나저나 거의 2년 가까이 같이 살았는데 이 녀석은 어디서 요리 레시피를 자꾸 주워오는 거지. 새로운 메뉴가 식탁에 올라올 때마다 김독자는 신기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도 요리 배워볼까.”
야채를 씻던 유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서늘한 시선이 와닿았다. 아니, 그렇게 볼 것까진 없잖아.
“꿈도 꾸지 마라.”
유중혁 이 자식……. 그렇게까지 반대할 일이냐.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보자 다시 한번 눈을 시퍼렇게 뜬 유중혁이 싱크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참내, 왜 저렇게 난리야. 이유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지만.
“……누구한테 배우려는 거지?”
아, 설마 이쪽이었나. 잘생긴 뒤통수가 뱉는 말에 하마터면 소리 내서 웃을 뻔한 김독자는 얼른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뭐 사람이야 많지, 상아 씨도 잘한다고 들었고…….”
일부러 다른 사람들 이름을 줄줄 대자 갑자기 물소리가 뚝, 멎었다. 김독자는 웃음을 삼키며 뻔뻔한 표정을 띄웠다. 손의 물기를 씻은 유중혁이 성큼성큼 걸어와 식탁을 짚었다.
“왜 다른 사람한테서 배우겠다는 거지.”
“그럼 누구한테 배워?”
시치미를 뚝 떼자 유중혁이 미간을 좁히더니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이내 김독자의 맞은편에 자리한 유중혁이 그를 쳐다봤다.
“요리는 잘하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어설프게 길들면 망한다.”
“역시 상아 씨한테 배워야겠는데.”
“내 말을 어디로 들어먹은 거지?”
응? 뭔 소린지 모르겠는데.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하자 유중혁이 말했다.
“배울 거면 나한테 배우라고 말했다.”
예상한 말이 나오자 김독자는 부러 유중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너는 안 가르쳐줄 거잖아?”
“잘 아는군.”
“이 자식이 진짜.”
뻔뻔하게 웃는 얼굴이 얄밉도록 잘생겨서 갑자기 울컥 억울해졌다. 식탁 밑으로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유중혁은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은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네 녀석이 만든 요리는 먹고 싶지 않으니까 관둬라.”
“……너 애인한테 못하는 말이 없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야 물론, 김독자는 약불로 1분은 중불 30초와 같은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진 천부적인 요리치였으며, 본인이 워낙 아무거나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입맛인 탓에 미각도 그리 예민하지 않았으니……. 제가 아무리 회심의 요리에 성공한다 해도 유중혁의 기준엔 털끝만큼도 미치지 못할 것이 훤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자식은 도대체 애인한테까지 이런 소리를 하냐? 뭐…… 그러니까 유중혁인 거지만.
문득 김독자는 발목을 스치고 종아리를 쓸어 올리는 간지러운 감각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굳이 식탁 아래를 내려다볼 것도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만 봐도 답이 나온다. 김독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조금 뒤로 물리며 유중혁을 쳐다봤다. 뺨이 뜨거웠다.
“……아직 대낮이거든. 미쳤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지?”
뻔뻔한 자식. 유중혁 개새끼……. 속으로 욕을 주워섬겨봤지만 은근하게 더듬어오는 감각에 몸은 솔직하게 달아올랐다. 하……, 저도 모르게 입에서 빠져나온 더운 숨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 안 된다. 정신 차려, 김독자. 하마터면 이 체력 괴물 자식의 유혹에 홀랑 넘어갈 뻔했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밀어내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늘은 절대 안 돼.”
“왜지?”
“알면서 물어?”
어이가 없어 쳐다봤으나 유중혁은 정말로 왜 안 되냐는 눈빛이었다. 아, 젠장. 안 그럴 것 같은 놈이 얼굴은 또 왜 저렇게 잘 써먹어. 김독자는 시선을 떼어놓으며 얼른 식탁 위의 그릇을 치웠다. 아무튼 안 돼, 말하며 싱크대로 향하자 유중혁이 조금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저 자식도 양심이 있으면 더 이상 유혹해대진 않을 것이다.
물론, 유중혁은 양심이 없는 놈이었다. 유중혁 개새끼.
김독자는 지옥 같았던(?) 하루를 되새기며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푹푹 쉬었다. 낮의 일이 영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유중혁은 평소보다도 더욱 집요하게 김독자의 몸을 더듬어왔다. 계속해서 모른 척 외면하자 작전을 바꿨는지 슬쩍슬쩍 닿아오는 손길은 애를 태우듯 은근해졌다. 감질나는 입질에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만해, 유중혁, 이 나쁜 자식아. 나라고 하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그렇게 말했다간, 그럼 하면 될 거 아닌가? 라고 답할 게 눈에 선했다.
김독자는 흘긋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떻게 밤까지 잘 버텼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이대로 잠만 무사히 들면……. 달칵,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유중혁이 침실로 들어왔다. 매일매일 꼬박꼬박 샤워 후 상의를 입지 않고 나오는 놈이니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니, 내가 아니어도 저거에 익숙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니까.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하게 짜인 근육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탄탄한 가슴의 감촉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는 김독자는 마인드 컨트롤을 외치며 가져본 적도 없는 삼인(三忍) 스킬을 부르짖었다. 이 자식, 심지어 오늘은 바지를 입은 것도 아니고 허리에 큰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있다. 너무 심한 거 아니냐.
“너 너무 대놓고 유혹하는 거 아냐?”
“억울하군. 네 녀석이 음흉한 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봐라.”
당연히 아니…… 아닌…… 아닌 것……. 김독자는 생각을 미루고 협탁 위에 놓인 드라이플라워를 바라보았다. 오늘 낮에 창고를 정리하다 찾은 것이다. 이걸 받은 게 꼭 1년쯤 전이던가. 희고 붉은 꽃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케는 유중혁의 손을 거쳐 그 모양을 유지한 채 보관되어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자 마른 꽃잎이 버석거렸다.
김독자는 그 부케를 받던 유중혁을 떠올리곤 조금 웃었다. 날아오는 부케를 캐치볼을 하다시피 잡아채고선 자신이 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던가. 이게 왜 내 손에 있지, 그런 표정이었던 것을 사회석에 있던 김독자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그래, 유중혁이 부케를 받았을 때는…… 아, 그래. 네 결혼식이라면…… 사회든 주례든 다 좋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유중혁의 행복을 누구보다도 축하하는 자리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하객석도, 사회도, 주례도 아닌 유중혁의 옆자리에 서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정말이지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은 유중혁이 익숙하게 김독자의 허리에 팔을 감아왔다. 간지러운 감각에 조금 키득거리며 몸을 비틀자 가만히 있으라는 양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다. 야, 간지러워, 하지 마. 넌 간지럼을 너무 많이 탄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떡하라고? 싫다고는 안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그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이 두려워 손으로 턱 막은 김독자를 유중혁이 빤히 쳐다보았다. 곧 다시 허리를 문질러오는 손길에 으악, 하며 도망치려다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지고…… 그 이후는 익숙한 수순이었다. 꼼짝도 못 하고 유중혁의 품에 갇힌 채 침대에 풀썩 눕게 된 김독자는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한 번을 못 이기냐. 이 자식은 코인빨이 있어도 못 이길 것 같다.
유중혁의 시선이 되돌아왔다. 협탁 위에 놓인 스탠드의 등을 반사하는 검은 눈동자가 은은하게 빛났다. 괜히 부끄러워진 김독자는 유중혁의 팔에 갇힌 채 몸을 반대로 뒤집었다. 얼굴을 맞대지 않게 된 건 좋은데 이렇게 하니 뒤에서 껴안긴 자세가 되었다. 실수한 건가? 아니나 다를까 유중혁이 고개를 숙여왔다. 귓가에 닿는 조금 젖은 머리칼에 이어서 목덜미에 부드러운 감촉이 내려앉았다. 곧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허벅지에 움찔 몸을 떤 김독자는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했어.”
“왜 안 되지.”
“난 정상적인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인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요통에 시달리면서 식을 올리고 싶진 않거든.”
뒷목을 지분대던 유중혁이 살갗에 입술을 댄 채 낮게 웃었다. 기분 좋은 울림이 몸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안고 입장하면 될 것 같은데.”
“유중혁 진짜 미쳤나.”
다행히도 거기까진 농담이었는지 재차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를 끌어안은 채 잠시 가만히 있던 유중혁이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곧이어 얇은 천 너머로 날갯죽지를 깨무는 감각이 느껴졌다.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유중혁의 이 행동은, 지금도 아프냐고 묻는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김독자는 조금 웃었다. 유중혁. 그날 이후로 내 날갯죽지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어.
김독자는 다시 몸을 돌려 유중혁을 마주 봤다. 고요한 시선이 맞닿아왔다.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매만진 김독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빨리 보고 싶은데. 네가 흰 턱시도 입은 거.”
유중혁의 눈매가 슬쩍 풀렸다. 유중혁은 물론, 그 모든 일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흰색을 싫어한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가 하얀 옷을 입은 채 식장에 서 있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와 반대로 저는 검은색 턱시도를 입게 되겠지만.
“기대해도 좋다.”
“하여간 말은 잘해.”
물론 무엇을 기대하든 기대 이상이겠지. 김독자는 내일 유중혁의 모습이 얼마나 눈이 부실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유중혁이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유중혁.”
“왜.”
“지금 행복해?”
잠시 입을 다문 유중혁이 제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김독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겨 손바닥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자 김독자가 얼굴을 조금 붉히며 쑥스럽게 웃었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김독자.”
“…….”
“네가 곁에 있으니까.”
김독자의 눈이 둥글게 접혔다.
“유중혁.”
“응.”
“내 행복이 네 행복이랑 같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 슬쩍 떨어져 나가는 뺨을 붙잡으며 유중혁은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꼭 감은 눈꺼풀 아래 긴 속눈썹이 달싹였다. 한참 뒤 입술을 떼어내며 고개를 든 김독자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는데. 역시 일찍 자야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중혁이 김독자의 허리를 훅 끌어당겼다. 몸을 바싹 붙인 채 다시 얼굴을 가까이하자 김독자가 황급히 두 손으로 그의 뺨을 밀어냈다.
“너 오늘 하루 종일 내가 한 말 어디로 들었어?”
“너도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않았나?”
“야, 그거랑 이거랑 같냐? 잠깐, 잠깐만. 유중혁, 야……!”
간지럽다고! 결국 웃음을 터뜨린 김독자가 유중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맑은 웃음소리에 유중혁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김독자, 내일은 너와 내가 앞으로 평생토록 생과 사의 동료일 것을 맹세하는 날이다. 그 아득한 옛날부터 제 행복을 위해 온몸을 던져오던 녀석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김독자, 내가 지금 행복하냐고. 당연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행복을 바라는 너에게도 똑같은 행복을 안겨줄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느릿하게 손가락이 감겨들었다. 절대로 변치 않을 맹세를 선언할 내일을 위해,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맞잡았다.
지금부터 부를 노래의 내용은 내 머릿속의 이야기
주연은 물론 너야, 나는 조연에 감독에 카메라맨
시시하다고 웃어도 괜찮아
어이없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줘 분명 마음에 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