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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 나의 행복을 바라는 너에게
네 행복이 아닌, 내 행복을 원하는 나를 용서해줘.

2019.06
트위터 썰로 시작해서 책으로 엮은 글입니다.
원본 썰 링크: (1) Link URL (2) Link URL











그것도 이것도 로맨스인 거라면 나쁘지 않네
영원도 약속도 없다 해도




    김독자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자리를 잡은 제 생활에 내심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유중혁에게서 떠나야겠다 결심했을 때,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정리한 줄 알았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대부분을 정리했었고…….
    “근데, 이걸 정리를 못 했단 말이지.”
    버릇처럼 나온 혼잣말에 유중혁이 흘긋 뒤를 돌아봤다. 김독자는 하하 웃고선 계속해, 말하며 손을 내저었다. 영 석연찮은 표정이었지만 인덕션 위의 찌개가 끓자 다시 고개를 돌린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래, 다른 건 다 어떻게 모른 척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녀석의 요리 솜씨만큼은 정말이지 잊기가 힘들었다. 집 나간 사람도 돌아오게 하는 그런 맛이라고 하나…….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핀잔주듯 얹어지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턱을 괸 손을 살짝 풀며 고개를 들었다. 뜨겁다, 조심해라. 슬쩍 몸을 물리자 식탁 위로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가 놓였다. 오랜만이네, 생각하며 주변에 차례차례 놓이는 찬을 바라보았다. 요리라면 국적도 안 가리고 다 잘하는 놈. 그렇게 생각하며 쳐다보니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유중혁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 표정은 뭐지.”
    “내 표정이 뭐?”
    “…….”
    답지 않게 입을 어물거린다. 엥, 저러는 건 또 처음 보는데. 이 녀석을 그렇게 오래 봤는데도 종종 이렇게 모르는 모습이 나올 때가 있다. 글로 읽은 시간까지 합치면 족히 20년은 될 터인데. 20년이라, 새삼스럽게 몹시도 길게 느껴진다.
    “별생각 안 했어. 그냥, 너 요리 잘한다고.”
    “칭찬인가?”
    “그럼 욕이냐?”
    이렇게 꼬인 건 여전하지만. 칭찬해 줘도 뭐래, 투덜거리며 숟가락을 들려는 찰나 시야에 얼핏 유중혁의 올라간 입꼬리가 스쳤다. 뭐야? 잘못 봤나? 놀라서 다시 보니 여느 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이다. 무심하고…… 잘생긴 얼굴. 아, 젠장. 김독자는 갑작스레 그 사실을 자각하며 얼굴이 달아오를까 얼른 숟가락을 움직였다. 잘 먹겠습니다. 늘 하는 인사를 건네고 바삐 찌개를 떠서 입에 넣었다.
    “앗, 뜨거워…….”
    뜨거웠다. 당연하지, 조금 전까지 팔팔 끓고 있는 걸 눈으로 보고서도 홀랑 입에 넣은 제 탓이었다. 김독자. 이름을 부른 유중혁이 표정을 흐리며 휴지를 뽑아 건넸다. 괜찮나? 어, 괜찮아……. 물을 찾으니 물컵도 손에 쥐여준다. 정말이지…… 안 보는 듯하면서도 전부 보고 있는 녀석이다. 내가 뜨겁다고 말하지 않았나, 혀를 차며 덧붙이는 말만 아니었어도 조금은 더 두근거렸을 텐데. 아니, 지금도 충분히 곤란하니까 그럴 필요는 없지만. 김독자는 얼른 시원한 물을 몇 모금 들이켰다. 하지만 이미 혀는 조금 데인 후였다. 얼얼한 감각에 혀를 내두르자 잠시 저를 바라보던 유중혁이 손을 뻗어왔다.
    “……?”
    얼떨결에 뺨을 붙잡힌 김독자는 눈을 껌뻑거리며 유중혁을 쳐다봤다. 유중혁은 그대로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엄지로 턱을 눌러 입을 벌리더니 고개를 가까이한다. 김독자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유중혁의 손가락이 아랫입술에 닿아오는 통에 정신이 없어 미처 그러진 못했지만.
    “……뭐, 뭐 하는…….”
    발음이 뭉개졌다. 하지만 유중혁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혀 내밀어 봐라.”
    아, 그래, 그러니까, 얼마나 데였는지 살펴보려고……. 뒤늦게 상황을 이해했지만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해 이미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잠시 입을 뻐끔거리자 유중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묘한 표정. 김독자는 망설이다가 혀를 조금 빼물었다. 김독자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살핀 유중혁이 손을 떼어냈다. 심하진 않은 것 같군. 김독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유중혁을 쳐다봤다. 원래 이렇게까지 친절한 놈이었나, 유중혁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만 해도 휴지에 물컵까지 바로 쥐여주지 않았나……. 김독자는 천천히 식사를 하며 유중혁의 행동거지를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 보기 시작했다. 최근에 부쩍 김독자의 몸 상태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기는 했다. 조금만 잔기침을 해도 이마며 뺨, 목덜미를 짚어보질 않나. 유중혁의 손은 늘 뜨끈해서 제 살갗에 닿으면 열이 가라앉기는커녕 되레 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 감각이 얼마나 간지러운지. 유중혁의 손이 닿을 때마다 자신이 태연한 척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이놈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조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자식,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스킨십이 자유로워진 거지. 분명히……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덕분에 곤란해진 건 자신뿐이지 않은가. 이 자식아, 너는 아무렇지도 않을지 모르겠지만…….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 가능하면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유중혁과 함께 사는 생활은 너무나도 안락했고, 또 어떤 부분들에서는 김독자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행복한 집의 모습에 가까웠지만, 그와 동시에 참기 어려울 정도로 간지럽고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야……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한 지붕 아래에 사는데, 어떻게 긴장되지 않을 수 있을까.
젓가락을 깨작대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유중혁이 갑작스럽게 김독자의 입에 콩자반 한 알을 밀어 넣었다.
    “?”
    그야말로 물음표를 띄울 정도로 깜짝 놀란 김독자가 황망한 얼굴로 쳐다보자 유중혁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딴 생각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라.”
    아니 지금 그게 아니라……. 유중혁 미친놈아, 김독자의 비명에 짙은 눈썹이 역팔자로 모였다. 그렇게 쳐다본다고 해도 없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 이 자식이 지금 내 입에 자기 젓가락을 밀어 넣은 거 아니냐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녀석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내가 너무 의식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묻는 것도 우스운 꼴이고……. 잠시 김독자 컴퍼니의 멤버들-한수영이라거나, 정희원이라거나-에게 유중혁이 저한테 음식을 먹여주는데요, 라는 상담 따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김독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지어 보일 미쳤냐?, 미쳤어요? 의 표정에 몸이 떨린 거지만. 그래. 미친 게 틀림없었다. 시발, 유중혁이 미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격식이 없고 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지(애초에 친한 사이가 맞긴 한 건가?)…….
    “으웁.”
    “밥이나 먹으라고 했다.”
    또다시 제 입으로 가차 없이 쑤셔 넣어진 반찬에 김독자는 속으로 눈물을 쏟았다. 유중혁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니까…….”
    “저거…….”
    “그거지?”
    “그런 듯…….”
    “진짜냐…….”
    정희원과 한수영은 흡사 티벳여우와 같은 얼굴을 한 채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여대는 유중혁과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가 다시 유중혁과 살던 집으로 들어가겠다 나선 뒤로 첫 방문이었다. 곁에 앉은 유상아도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 모두는 몇 달 전, 다짜고짜 김독자 컴퍼니 사옥으로 이사를 온 김독자의 얼굴이 묘하게 수척했던 것을 빤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래? 유중혁이랑 싸웠냐? 그렇게 물었지만 김독자는 여느 때와 같이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런 거 아냐. 그래서 대부분의 김독자 컴퍼니 멤버들은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거 분명히 뭔가 있다.’
    물어봐봤자 대답해 줄 놈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무슨 일 나지만 않도록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세 달 가량이다. 일단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했고, 만약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면 이제 자신들에게도 털어놓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방치 아닌 방치였다.
    그동안 김독자는 참으로 다양한 감정 기복을 보였다. 말라비틀어진 오징어마냥 흐느적대다가도 물 먹은 꼴뚜기처럼 생기 있는 얼굴을 하기도하고. 유료화가 시작되고 끝난 이래 가장 다채로운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되레 정말로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오히려 보기 좋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물론 김독자 컴퍼니의 멤버들도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온 뒤 김독자에게 씌워져 있던 벽 같은 것이 한 꺼풀 내려갔다는 느낌은 받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변화가 심할 일인가. 맑은 눈으로 주방을 바라보던 유상아가 생긋 웃었다.
    “보기 좋은데요?”
    “미쳤냐?”
    “미쳤어요?”
    한수영과 정희원의 목소리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물론 유상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중혁 씨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독자 씨는 얼굴 편 것 같은데요.”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억울했다. 주방에서 돌아다니는 희멀건 얼굴에는 분명한 생기가 어려 있었다. 그것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비로소 있을 자리를 찾은 사람의 얼굴 같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저건 좀 보기 싫네…….”
    거기 넓은 그릇 좀 꺼내라.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여기? 유중혁의 말에 찬장을 연 김독자가 손을 뻗었다. 누구의 키에 맞춘 것인지 상당히 높은 찬장 중에서도 위쪽에 위치한 그릇에 김독자의 손이 아슬하게 못 미쳤다. 의자를 가져오려는 듯 몸을 돌리는 김독자의 앞을 턱 하니 막아선 유중혁이 그대로 몸을 기울여 그릇을 꺼냈다. 그와 함께 김독자의 허리도 뒤로 꺾였다. 이 각도에선 안 보이지만…… 거의 몸이 밀착한 수준인데, 정희원은 생각했다. 저거 둘이 키 차이도 별로 안 나지 않아? 어, 그럴걸. 체격 차이는 좀 심하긴 한데. 그릇을 꺼내 간 유중혁이 떨어지자 김독자의 몸도 다시 싱크대를 향해 돌아갔다. 아, 얼굴 안 보이네. 어떤 표정일지 몹시도 궁금했지만 볼 방법이 없었다. 입안에서 막대사탕을 깨작대던 한수영이 팍 인상을 썼다.
    “저런 구닥다리 클리셰는 10년도 더 전에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알만하다. 잘은 몰라도 저 둘 사이에 뭔가 있기는 있다. 그게 정확히 딱 떨어지는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혀를 끌끌 찬 정희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좋을 때지, 뭐. (곧바로 농담인 거 알죠, 하고 덧붙였다.)
    곧이어 거실에 펼친 넓은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날라졌다(세 사람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싹 입을 씻었다). 메뉴는 훠궈였다. 반으로 갈라진 큼지막한 냄비에서 빨갛고 매콤한 국물과 말갛고 뽀얀 국물이 함께 끓기 시작했다. 아, 배고파. 잘 먹겠습니다. 다섯 사람은 취향대로 식사를 시작했다.
    “독자 씨 아직도 뜨거운 거 못 먹어요?”
    “아, 네.”
    “조심하세요.”
    하하 웃은 김독자는 영 미덥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때에는 그만큼 믿음직스러운 이가 없었건만, 이상하게도 일상생활에서는 못 미더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팔팔 끓던 국물이 퐁 솟아 김독자의 손등에 튀었다. 그리고 그 국물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유중혁의 손에 들린 휴지에 닦여나갔다.
    “…….”
    정희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시선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는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수저를 움직였다. 저, 저거…….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누가 유중혁보고 철혈의 패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던가. 철혈이요? 별들의 공포? 너무 미지근해서 기가 막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가 막힌 것은 그러한 유중혁의 행동을 익숙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김독자였다. 저 인간도 정말이지 미지근해졌네. 거기까지 생각한 정희원은 문득 아,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유중혁이 불 같은 놈이고 김독자가 얼음 같은 놈이었으니 둘이 딱 중간으로 맞춰져서…….
    아니, 이게 다 무슨 생각이야. 생각을 털어내려 흘긋 유상아와 한수영을 바라보았으나 두 사람도 그다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희원은 속으로 한숨을 폭 쉬었다. 뭐, 둘이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하겠지. 인간관계에는 개입이 필요한 상황도 있지만, 이 두 사람의 경우라면 괜히 끼어들었다간 더 틀어지는 상황이 올 것 같았다. 본능적인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이나 수다를 떨던 네 사람(유중혁은 거의 말이 없었으므로 네 사람이었다) 중 세 사람은 밤이 깊을 무렵이 되어서야 현관을 나섰다. 다음에 또 올게요, 손을 흔드는 사람들을 배웅한 뒤 유중혁과 김독자는 뒷정리를 마쳤다. 다시금 깔끔해진 집안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씻어야겠다, 말하고는 욕실로 향했다. 여느 넓은 집이 그러하듯 두 사람이 사는 집도 침실에 딸린 작은 욕실이 있었고, 명목상의 침실을 자신의 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유중혁이었다. 달칵, 닫히는 욕실 문을 바라본 유중혁은 제 방으로 향했다.
    몸을 씻고 바지만 입은 채 머리에 수건을 얹고 거실로 나오자 저보다 먼저 나온 김독자가 가운을 걸치고선 활짝 열린 베란다에 서 있었다. 난간을 짚은 흰 팔목이 가운 아래 희미하게 드러났다. 미적지근한 여름 밤바람이 부드럽게 거실을 휘저었다. 김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간 유중혁은 그의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수건을 붙잡아 젖은 머리를 털어주기 시작했다. 어? 언제 나왔어? 잠깐만, 내가 할게……. 곧 의미 없는 저항임을 깨달은 김독자가 포기하고선 난간에 팔을 걸치고 눈을 감았다. 유중혁은 말없이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김독자의 머리칼을 세심히 말리기 시작했다. 이 녀석은 샤워를 한 뒤 머리를 말리지 않고 나오는 버릇이 있었고, 그래서 늘 새로 갈아입은 옷의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있기 일쑤였다. 머리를 말리고 나오든가 가운을 입든가 해라. 그렇게 말했더니 가운 같은 거 입어본 적이 없어서 낯설다는 대답을 했던가. 그랬던 김독자가 이제 드디어 샤워 후에 가운을 걸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긍정적인 변화라고 해도 좋을 듯했다.
    한참이나 물기를 털어내 거의 다 말랐다 싶을 무렵이 되어서야 유중혁은 수건을 거실 바닥에 내려두었다. 김독자가 개운한 얼굴로 유중혁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여전히 유중혁의 머리에 얹어져 있는 수건을 보고는 장난스런 미소와 함께 말려줄까? 묻는다. 유중혁은 됐다, 하고 답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고개를 끄덕이자 김독자가 의외라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맨날 됐다고 하는 놈이라서 예의상 물어본 거였는데, 그런 표정이군. 유중혁은 뻔뻔한 얼굴로 김독자를 향해 고개를 조금 숙여주었다. 머뭇거리던 김독자가 두 손을 들어 수건을 붙잡았다. 털어내는 손동작이 어설펐다. 과연, 몸으로 하는 것은 모조리 못하는 녀석답군.
    유중혁은 잠자코 김독자의 손에 제 머리카락을 맡겼다. 김독자의 팔이 움직임과 동시에 여며져 있던 가운 앞자락이 설핏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얼굴만큼이나 흰 가슴팍이 슬며시 드러났다가, 팔을 더 움직이자 그보다 안쪽의……. 유중혁은 눈길을 돌렸다. 민망해서가 아니었다. 더 보고 있었다간 무언가가 속에서 끊어질 것 같아서였다.
    이 정도면 됐나? 유중혁의 목에 젖은 수건을 걸어준 김독자가 손을 내렸다. 머리칼은 여전히 촉촉했다. 아직 덜 마른 상태였지만 유중혁은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유중혁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옷 좀 다 입고 나오면 안 되냐.”
    또 그 소리였다. 이렇게 사는 걸 1년도 넘게 봤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그래서 유중혁은 언제나와 같이 대답 대신 난간에 손을 짚었다. 자연스레 몸이 앞으로 조금 기울어지며 거리가 가까워졌다. 고작 30센티미터 정도 될까 말까. 뒤늦게 가깝다는 걸 인지하기라도 한 것인지 김독자가 몸을 휙 뒤로 돌렸다. 난간을 꾹 붙잡는 손등이 하얬다. 유중혁은 반쯤은 충동적으로, 반쯤은 계산적으로 김독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가운 한 겹 너머에 있을 얇은 몸이 한 팔에 들어왔다. 야, 잠깐만, 왜 이래? 벗어나려 하기에 태연하게 답했다.
    “떨어질까봐.”
    “…….”
    답이 없는 걸 보니 개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도 개소리가 맞았다. 그냥 껴안고 싶어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내 빠져나가길 포기했는지 김독자가 몸에 힘을 풀었다. 유중혁은 속으로 조금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해도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기적적으로 둔감한 녀석임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억울해해야 하는 건지 쉽사리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정말이지 웃기는 놈이다. 김독자, 넌 마치 사랑받아본 적이 없는 놈처럼 구는군.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해도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거겠지. 김독자에게서는 누군가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는 일종의 단단한 벽과 같은 믿음이 느껴졌다. 이쯤 되면 유중혁이 제 마음을 고백해도 몰래카메라 아니냐며 주위를 두리번거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군.
    미지근한 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김독자의 가느다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유중혁은 손을 들어 김독자의 등, 정확히는 날갯죽지에 가져다 댔다.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쳐왔다.
    “아픈 건 좀 어떻지?”
    “……괜찮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다.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바라보자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말해라.”
    “네 손이 닿으면 덜 아픈 것 같아.”
    진짜 따뜻해서 그런 건가? 찜질이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글쎄, 그건 아닐 것이다. 심리적인 요인으로 겪는 환상통과 같은 것이라면, 단순히 따뜻하게 만든다 해서 증상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유중혁은 말없이 손으로 김독자의 어깻죽지를 마사지하듯 꾹꾹 눌렀다. 아으, 야, 아파. 근데 시원하다. 킥킥 웃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한참이나 주무른 뒤 놓아주자 김독자가 하아, 긴 숨을 뱉었다. 거실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불빛이 귓가에 닿아 흩어졌다.
    유중혁은 손을 들어 그의 귀를 매만졌다. 유중혁? 손끝으로 말랑한 귓불을 스치고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김독자가 움찔 몸을 떨며 제 허리에 감긴 팔을 풀려는 듯 손을 뻗었다. 물론, 유중혁은 전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숙여 김독자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마른 탓인지 가운의 천 위로도 어깨뼈가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잠시 몸을 굳히고 있던 김독자가 천천히 손을 들어 유중혁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제법, 기분이 좋았다.
    유중혁은 다시 고개를 드는 충동을 내려두려 애쓰며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머리칼을 만지던 김독자의 손가락이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아래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이마와 관자놀이를 스친 손끝이 귓바퀴를 가볍게 문질렀다. 분명 서늘할 터인 체온이 어쩐지 뜨겁게 느껴져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김독자, 네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아마도 모르겠지. 자각이라곤 전혀 없는 놈이다. 그것이 지금은 몹시도 억울했다.
    그래서 결국 유중혁은, 잠시 충동에 몸을 내어주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눈이 마주친 김독자가 머쓱한 얼굴로 손을 물렸다. 유중혁은 다시 고개를 숙여 김독자의 희게 드러난 뒷목으로 향했다. 그 위에 낙인을 찍듯 입술을 내리누르고 입을 벌려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혀끝으로 매끈한 살갗을 살짝 스쳤다. 이렇게나 명백한 함의를 담은 행동에도 너는, 여전히 그렇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일 건가.
    팔 안에 붙잡혀 있는 김독자의 몸이 뻣뻣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은 모양이지. 그런 심술궂은 생각을 하는 찰나 김독자가 황급히 제 허리를 감은 유중혁의 팔을 풀어냈다. 유중혁은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손이 뻗어와 유중혁의 어깨를 밀어내다가 그가 상의를 탈의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바로 떨어져 나갔다.
    “나, 잠깐, 그…….”
    “…….”
    말조차 제대로 끝맺지 못한 김독자가 휙 몸을 빼내 베란다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제 방으로 사라지는 흰 가운 자락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쾅, 경황없이 닫히는 문소리. 난간에 등을 기댄 유중혁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조금 전 김독자의 표정은……. 하, 웃음을 터뜨리며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김독자는 제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묻지 않았다. 하지 말라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를 쳐다봤을 뿐이다. 어쩌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닌지도 모르겠군. 유중혁의 감각이 어떠한 확신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기분이 좋아본 적이 언제였던지.
    맑은 여름밤이었다. 모처럼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날갯죽지의 통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 여기려 했다.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다. 김독자는 늘 아픔을 참는 것에 익숙한 인간이었으므로 진심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
    통증 때문에 컵을 깨뜨릴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김독자는 손에서 떨어져 박살 난 유리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네. 어깻죽지로부터 팔을 타고 흘러드는 찌르르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굳은 탓이다. 유중혁 자식 있었으면 난리 났겠네, 다행히도 그는 지금 집을 비운 상태였다. 매일 하는 저녁 운동 타임이었다. 그 자식 오기 전에 얼른 치워야지……. 장갑을 끼고 조각을 주워 담은 김독자는 비질까지 마쳤다. 유리 조각이 담긴 봉투를 묶어 쓰레기 분리수거장에 내놓았다. 그 눈치 빠른 놈이 알아채기라도 하면 번거로워진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뭔가 빠진 건 없나 꼼꼼히 살폈다.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당장에 그 많은 컵 중 하나가 없어진 걸 깨닫진 못할 것이다. 내일이나 모레쯤 똑같은 걸 구해다가 가져다 두면……. 그런 생각을 하며 팔짱을 끼고 있자니 삐리릭, 도어락이 열렸다.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유중혁이 걸어 들어오며 김독자를 일별했다.
    “왔냐.”
    여상히 인사를 건네자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독자를 그대로 지나쳐 욕실을 향해 걸어가……
    “김독자.”
    ……지 않았다. 젠장. 뭐가 문제야. 김독자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중혁을 보며 빙긋 웃었다.
    “왜?”
    “컵이라도 깼나?”
    “…….”
    이 새끼 집에 CCTV라도 달아둔 거 아냐? 김독자는 순간 돋아난 소름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하하 웃었다.
    “뭔 개소리야, 인마.”
    “웃는 게 수상하다.”
    네놈이 언제부터 그렇게 웃었지.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뭐, 이 자식아. 웃어도 난리야. 하지만 김독자는 지금 제 얼굴이 어떤지 정확히 알 길이 없었다. 평소랑 다른가?
    “헛소리하지 말고 씻기나 해.”
    “…….”
    유중혁은 여전히 못 미더운 얼굴이었지만 운동 직후의 찝찝함이 더 못마땅했는지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달칵, 닫히는 문을 보며 김독자는 다시 집안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뭐 이상한 거 없겠지. 유리 조각이 있나 확인하려 허리를 숙임과 동시에 아릿한 통증이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조금 침음한 김독자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통증은 천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일상생활 중에 간헐적으로 찔러오는 탓에 도저히 대비하기가 어려웠다. 병원을 가봐야 하는 걸까, 하지만 정말로 병이 있는 거라면 모두가 알게 될 터였다. 그건 싫은데. 설화 씨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하면……. 근데 애초에 그 뭐냐, 환자 병력 같은 거 누설하면 안 되는 그런 법 있지 않나? 하기야 산전수전 다 겪은 세상에서 법 같은 게 얼마나 의미를 가지겠느냐만.
    고민하며 소파에 앉아 어깨를 통통 두드리고 있자니 유중혁이 나왔다. 또 웃옷을 안 입고 있다. 김독자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TV를 바라보았다. 최근에 계속 이어지고 있는 저 자식의 이상행동에는 제법 적응했다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직접적인…… 시각 자극은 좀. 괜히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리자 유중혁이 제 옆에 다가와 털썩 앉았다. 깜짝이야. 반사적으로 옆을 돌아본 김독자는 유중혁의 목 아래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TV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9시 뉴스가 한창이었다.
    “김독자.”
    “……왜.”
    또 아까 일을 추궁하려는 건가. 그만해라, 이 자식아. 그렇게 생각하며 쳐다보자 유중혁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곧게 뻗은 콧날과 정수리를 본 김독자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유중혁이 시선을 들어 맞춰왔다.
    “……왜?”
    설핏 유중혁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놈을 보는 것 같은 눈빛과 동시에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자괴감이 섞인 듯한 기묘한 표정이었다. 이 자식이 왜 이래. 김독자가 여전히 눈을 깜빡거리고만 있자 유중혁이 말했다.
    “말려라.”
    “…….”
    이 새끼가……. 말려주세요, 하다못해 말려줘도 아니고 말려라? 김독자는 어이없는 얼굴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흰 수건 아래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칼이 살짝 젖어 있었다. 뭐, 못 해줄 것도 없긴 하지만…….
    “말려주세요, 해봐.”
    “죽고 싶나?”
    “싫으면 말고.”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어서는 유중혁을 보며 되레 일말의 아쉬움을 느낀 김독자가 그의 손을 턱 붙잡았다. 멈칫한 유중혁이 내려다보자 김독자가 다시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앉아봐. 말려줄게.”
    “…….”
    뭐라 더 대꾸할 줄 알았던 유중혁은 의외로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속으로 조금 웃은 김독자는 이제 조금 익숙해진 손길로 유중혁의 머리에 얹어진 수건을 붙잡았다. 탈탈 털어내자 물방울들이 가볍게 비산했다. 제법 꼼꼼히 말려낸 김독자가 수건을 내리고 유중혁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뭐 하는 거지. 가만 있어 봐. 김독자는 유중혁의 머리를 한데 모아 장난치듯 쓸어 넘기며 킥킥 웃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중혁 이 자식이 이렇게 말랑할 때 아니면 언제 또 이런 짓을 해보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도 봤지만 도대체가 못생길 줄을 모르는 얼굴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수려한 낯짝을 쳐다보고 있자니 유중혁의 몹시도 빡친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다 놀았나.”
    “아니, 미친. 중혁아. 잠시만.”
    말랑하단 말은 취소다. 어째 가만히 있더라. 김독자가 기겁하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하자 어림도 없다는 듯 유중혁이 손을 낚아챘다. 악력이고 자시고 체급에서부터 상대가 안 되는 김독자는 하릴없이 끌려갔다. 하마터면 풀썩 유중혁의 품으로 쓰러질 뻔한 것을 간신히 소파를 짚어 피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려고 했더니 시야에는 무려 에덴도 공인한 풍기문란한 가슴이 있었다…… 시발, 뭐야, 이 상황은! 김독자는 파드득 몸을 뒤틀며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이 자식은 왜 코인빨이 빠져도 가슴은 그대로야. 미친 건가.
    은근슬쩍 도망가려 하자 유중혁이 다시 손을 끌어당겼다. 그제야 제 손이 유중혁에게 잡혀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식한 김독자는 더더욱 황망한 심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시선이 유중혁의 어깨너머 허공 언저리를 헤맸다. 뺨이 뜨거운 것 같은데…….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뺨을 문지르듯 가리자 유중혁이 그 손마저 잡아 왔다.
    “야, 너, 왜 이래…….”
    누가 들어도 나 당황했소, 하고 광고하듯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젠장. 김독자는 어떻게든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유중혁은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죽일 기세더니 왜? 간신히 심장을 진정시킨 김독자가 슬쩍 얼굴을 들자 저를 빤히 보고 있던 유중혁과 시선이 탁 마주쳤다.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 뜨겁게 쳐다보는 시선에 김독자는 가라앉히느라 애쓴 보람도 없이 다시 심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유중혁? 그렇게 불러보고도 싶었지만 입술이 딱 붙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쿵. 쿵. 심장 소리가 귓가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아,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유중혁의 얼굴은 도무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이 잡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이 몹시도 그리웠다. 물론, 스킬이 있었다 해도…… 유중혁에겐 사용할 수 없었겠지만. 나는, 더 이상 이 녀석을 읽지 않기로 결심했으니까.
    한참이나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먼저 떼어낸 것은 유중혁이었다. 정확히는, 강제로 떨어져 나간 것에 가까웠다. 또다시 어깻죽지를 찔러오는 통증에 김독자가 윽, 하며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었다. 유중혁은 제가 손아귀에 힘을 너무 많이 주고 있었는지 걱정되기라도 한 듯 김독자의 손부터 살폈다. 그쪽이 문제가 아님을 확인하자마자 어깨를 붙잡아 돌려세우더니 등 위를 문지른다. 아, 김독자가 엷은 신음을 내뱉자 유중혁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많이 아픈 건가?”
    “아니.”
    곧바로 튀어나오는 거짓말에 유중혁이 미간을 사정없이 좁히며 살벌한 얼굴을 했다.
    “김독자. 똑바로 말해.”
    “…….”
    “심하게 아프냐고 물었다.”
    김독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덧붙였다. 계속 아픈 건 아냐. 그냥 가끔가다……. 100퍼센트 사실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미미하게 우리한 통증이 머무르다가 갑작스레 크게 아플 때가 있을 뿐. 정확히 어떤 감각으로 아픈 거지. 유중혁의 물음에 김독자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답했다.
    “……날개가, 돋아날 때처럼 아파.”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지? 그런 게 있어. 부러 가볍게 말해봤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천천히 문질러지는 따뜻한 손바닥의 감각에 통증이 거짓말처럼 줄어들었다.
    김독자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으며 생각했다. 역시, 물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날개가 돋아나듯 아픈 이유는 무엇이며, 유중혁의 손이 닿으면 통증이 사그라드는 이유는 무엇인지. 사실, 김독자는 그 답을 알 것도 같았다. 다만 그 진실과 제대로 마주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김독자는 자신이 느끼는 통증이 흔히 의학적으로 규명하는 환상통이라는 것과는 다른 종류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통증은 어떠한 그리움과 비슷한 것이었다. 되찾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실감, 돌아갈 곳을 찾는 향수병. 시나리오가 끝난 세계에서, 김독자는 시나리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세계의 멸망만을 오래도록 바라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을 홀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에 이따금 절망했고,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친 밤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런 그의 삶을 지탱했던 것은 하나의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멸망한 세계가 현실이 된 순간, 김독자는 되레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멸망한 세계를 벗어나, 다시 원래의 현실에 발을 들인 김독자는…… 기묘한 유리감에 시달렸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마치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은 유료화 이전 김독자가 늘 생각하던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여기에 있어선 안 돼.
    누구도 나를 원하지 않는다. 김독자, 28세, 게임 회사의 계약직. 살인자의 아들. 저 사람이? 쉿, 듣겠어요. 들으면 좀 어때요, 거짓말한 것도 아닌데. 익숙한 이야기들이었다. 김독자는 빤히 듣고도 모른 척했다. 매번 같은 레퍼토리. 당신들도 똑같은 소릴 20년 정도 들으면 시큰둥해질걸요. 김독자의 그런 반응에 사람들은 되레 더 입방아를 찧었다. 역시 살인자 아들이라서 저 사람도……. 쉿, 그만하라니까.
    김독자는 이해받기를 포기했다. 사랑받기를 포기한 지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스스로를 중히 여기지 않기 시작한 건, 그보다도 더 오래 된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소중히 대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그럴 수 있지?
    시나리오가 없는 현실의 김독자는 그런 인간이었다. 살아 주세요, 그 말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가장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에게는 그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툭, 투둑, 물방울이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눈가가 축축한 느낌에 김독자는 정신을 차렸다.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황급히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눈물은 쉬이 그치기 어려웠다. 통증의 이유? 그런 것은 뻔하지 않은가. 나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목숨의 고비를 몇 번이고 넘을지언정, 저를 사랑해주고 필요로해주는 이들이 있던 그 지옥 같은 세계로.
    김독자는 눈을 들어 제 앞에 있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녀석을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음에도 그치지 않는 눈물이 억울했다. 김독자가 느끼는 유리감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긴 시간 동안 철저히 몸에 새겨진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 내 쓸모는 뭐지?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변변찮은 인간이다. 이런 세계에서,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거나 이해해줄 리 없다. 그런 뿌리 깊은 상처.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익숙해져서 아프지 않을 줄 알았는데. 하지만 상처받는 데 익숙하다고 해서 그것이 아프지 않은 이는 없다. 유중혁이 고독에 익숙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 것처럼.
    문득 따뜻한 손가락이 눈가를 쓸었다. 말없이 김독자의 눈물을 닦아준 유중혁이 천천히 뺨을 쓰다듬었다. 김독자는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검은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니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유중혁, 갈라진 목소리가 입술 틈새로 새어 나오자 그의 팔이 제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몹시도 안온한 감각이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조금 더 서러워졌다. 지금껏, 저를 이렇게 껴안아 준 사람이 있었던가. 유중혁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아버지였고, 형이었으며, 오랜 친구였고, 그리고……. 김독자는 유중혁의 넓은 등에 팔을 둘렀다. 그대로 있는 힘껏 마주 안았다. 이기적인 바람인 것은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자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 해서, 유중혁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바라는 것은 명백히 그것이었다.
    유중혁, 나는 역시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리고 너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말도 안 되는 바람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냥 상상해 보는 것까진 허락해주면 안 되냐. 절대 내색하지 않을 테니까. 생각만 할 테니까, 그러니까…….
    네 행복이 아닌, 내 행복을 원하는 나를 용서해줘.



    유중혁은 잠든 김독자를 안아 들었다. 한참이나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제품에 고개를 파묻더니 결국엔 지쳐 잠들었다. 방문을 어깨로 밀어 열고 침대 위에 가벼운 몸을 뉘였다. 잠시 눈가를 움찔하는 것 같더니 다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유중혁은 그 옆에 걸터앉았다. 손을 들어 이마 위로 흩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반듯하고 흰 이마, 가지런한 눈썹. 단정한 이목구비에는 눈물 자욱 비슷한 것이 남아 있었다. 잠시 몸을 일으킨 유중혁은 물수건으로 가볍게 그 자국들을 닦아주었다. 하얀 뺨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늘 자신보다 조금 낮은 체온이 전해졌다.
    김독자의 눈물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아니었으므로. 김독자가 자신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듯, 자신도 김독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사랑할 수는 있다. 타인과 나누는 감정이 으레 그러하듯이,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사랑한다. 그래서, 더 이상은 숨기지 않기로 결심했다. 네 슬픔의 이유를 내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좋다. 다만, 네가 울면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네가 눈물을 흘릴 일을 하나씩 줄여나갈 수 있도록, 곁에서 계속 함께하고 싶다. 노력하겠다. 그 누구보다도 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할 자신이 있다. 이 평화롭고 안온한 세계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김독자, 네가 나의 행복을 위해 그토록 많은 것을 버려왔듯이.
    김독자의 입술이 엷게 벌어졌다.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통증이 있는 건가. 유중혁은 김독자가 깨지 않도록 움직임을 제한하며 그의 곁에 누웠다. 그대로 팔을 뻗어 마른 몸을 품에 안았다. 천천히, 찌푸려졌던 김독자의 미간이 풀렸다. 턱과 목을 간질이는 옅은 숨결.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뿐이겠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의 머리칼에 고개를 묻었다. 그대로,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날 이후로, 김독자는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었다. 아무 장애물도 없는 길바닥에서 휘청거렸다. 멀쩡히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종종 떨어뜨렸다. 김독자 컴퍼니의 멤버들을 만나고 온 날은 그런 증세가 더 심해졌다. 걱정이 턱 끝까지 차오른 사람들은 유중혁에게 문자를 쏟아냈다.

중혁 씨 요즘 독자 씨 왜그러는거예요?

김독자 괜찮냐?

아저씨 몸 괜찮아요?ㅠㅠ


    불필요한 메시지 답은 하지 않는 유중혁이었지만 이들의 걱정은 합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짧은 답장을 보냈다.

지켜보고 알려주겠다.


    김독자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병원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몇 번이나 묻고 얼러도 요지부동이었다. 김독자는 전보다 확실히 수척해진 얼굴로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원인을 알아. 유중혁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원인을 안다면, 해결하면 될 것이 아닌가. 제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놈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시나리오가 있던 시절에는 다시 살아날 방법이 있기에 그랬겠거니 여겼지만, 이건…… 심하지 않은가.
    유중혁은 집을 비우는 일을 대폭 줄였다. 늘 시야 안에 김독자를 두려 애썼다. 이전이라면 감시라도 하는 거냐고 성질을 냈을 놈이 힘없이 웃기만 하는 걸 보니 정말이지 사태가 심각했다. 슬슬 스스로도 증상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김독자는 최근 며칠간 유중혁에게 함께 자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위안인 것이 있다면, 품에 넣고 가만히 등을 쓸어내릴 때, 고통이 덜어지기라도 하는 듯 풀어지는 얼굴 정도일까.
    그즈음이었다. 모르는 연락처로부터 메시지가 온 것은. 마침 유중혁은 오늘이야말로 김독자를 다그치든 화를 내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원에 데려가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유중혁은 휴대폰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유중혁 군. 잠깐 만나줬으면 좋겠구나.


    제 연락처를 알만한 이들 중 저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한 명뿐이었으므로, 발신자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유중혁은 이수경에게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가늠하며 집을 나섰다.
    김독자를 혼자 두자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신유승과 이길영을 불렀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걱정 마세요, 답하는 두 아이의 믿음직스런 눈을 바라본 유중혁은 이수경을 만나기로 한 카페로 향했다.
    이수경은 시나리오를 진행할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여전히, 김독자의 어머니뻘이라고 여기기엔 젊어 보이는 얼굴. 얇게 다물린 입매. 이목구비는 그다지 닮지 않았건만, 물끄러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은 김독자와 유사한 구석이 있었다. 유중혁은 이수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를 대라면 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수경은 김독자의 어머니였다.
    유중혁을 앞에 둔 이수경은 한참이나 말없이 차만 마셨다. 유중혁은 참을성 있게 그녀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자신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반 이상 비워진 찻잔을 내려다보던 이수경이 천천히 말했다.
    “독자가 아프다고 하더구나.”
    “…….”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에 어린 감정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이수경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애가 좀 비실거리긴 해도 허약한 애는 아니야. 어렸을 때는 그 흔한 감기도 걸린 횟수가 손에 꼽았지.”
    유중혁은 이수경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김독자는 절대로 약한 인간이 아니다. 이수경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곁에 있어 주지 못했을 때도 그 애는 잘 해냈어. 당연하지, 내 아들이니까.”
    잠시 다물렸던 입술이 다시 떨어졌다.
    “이제 와서 그 애를 가장 잘 아는 건 어미인 나라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란다.”
    “알고 있다.”
    이수경이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여전히 맹랑하구나. 칭찬으로 듣지. 가만히 유중혁의 눈을 들여다 본 이수경이 손가락 끝으로 찻잔 테두리를 빙 둘러 만지작거렸다.
    “알고 있겠지만, 독자는…… 내 면회를 와서도 늘 ‘멸살법’ 얘기를 했단다.”
    “…….”
    “내가 무슨 얘길 하는지 알지?”
    그래, 알 것도 같았다. 김독자에게 있어 ‘멸살법’이란 삶이란 말과 동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세계는 ‘멸살법’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 어느 페이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야기. 이제 와서 제게 ‘멸살법’ 얘기를 하는 정확한 저의가 무엇인가.
    “우리 독자를 사랑하니?”
    고요한 시선이 와닿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새삼스러운 질문이다. 유중혁은 묵연한 눈빛으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엷은 미소를 지은 이수경의 말간 눈동자가 언젠가를 더듬듯 잠시 허공을 헤맸다. 유중혁으로서는 쉬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정이 흰 얼굴 위를 스쳤다.
    “그 애가 발붙일 곳이 되어주렴.”
    예전처럼 원치도 않는 날개를 달고 멀리 떠날 일이 없게 해줘. 독자한테 알려주렴.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라고. 그건 아마,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야.
이수경의 말로부터 유중혁은 비로소 해답을 얻었다. 계속해서 날갯죽지의 통증을 호소하던 이유도,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언제나 훌쩍 날아가 버릴 것처럼 굴던 이유가, 사실은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는 것을. 창공을 주회하는 새들도 평생을 하늘에서 보낼 수는 없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어떨까.
드르륵,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중혁이 이수경을 돌아봤다.
    “먼저 일어나보겠다.”
    이수경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김독자와 똑 닮은 미소였다. 카페의 문을 열고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유중혁의 뒷모습을 보며 이수경은 생각했다. 행복해야 한다.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어.



    유중혁이 집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신유승과 이길영이 도도도도 달려 나왔다.
    “김독자는?”
    “잠들었어요.”
    아저씨 진짜 아픈가 봐요, 막 힘이 없구, 저희 보고도 꼭 안아주기만 하고 아무 말도 안 하고……. 거의 울먹이는 신유승과 이길영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유중혁은 겉옷을 벗으며 집안으로 향했다. 김독자는 소파에 엎드리듯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그의 몸을 돌려 똑바로 눕혀주고는 늦은 점심을 만들었다. 식사를 마친 신유승과 이길영은 독자 아저씨를, 독자 형을 잘 부탁한다 신신당부를 하고선 돌아갔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깨어날 때까지 가만히 곁에 앉아 그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 갈 무렵, 김독자가 반짝 눈을 떴다. 느리게 돌아간 고개가 저를 바라보고 있던 유중혁을 발견하고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며 눈매가 부드러이 접혔다.
    “유중혁.”
    “깼나.”
    “꿈을 꿨어.”
    몸을 일으켜 앉은 김독자는 잠을 깨려는 듯 눈을 깜빡거리더니 소파 아래로 두 발을 내렸다. 바닥을 짚은 발이 천천히 움직여 베란다로 향했다. 문을 밀어 열려는 듯 손을 얹었지만 열리지 않았다. 유중혁이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싶어 잠금장치를 걸어둔 탓이었다. 김독자가 행여 넘어지기라도 할까 일어나서 지켜보던 유중혁이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을 연 김독자가 하아, 숨을 들이켰다. 손을 붙잡자 빙긋 웃는다.
    “나갔다 왔어?”
    오랜만이었겠네. 그동안 나 때문에 못 나갔잖아. 잠이 거의 다 깬 듯 제법 명징한 목소리였다. 유중혁은 말없이 김독자를 따라 베란다에 나란히 섰다. 여전히 손을 잡은 채였지만 김독자는 별달리 빼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해가 기울었다. 김독자는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고, 유중혁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입술이 노을 탓인지 유난히 붉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김독자가 유중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보냐?”
    여느 때처럼 조금은 장난스런 목소리. 유중혁은 김독자의 등에 손을 얹고 쓸어내렸다. 흠칫 놀란 김독자가 슬쩍 몸을 돌렸다.
    “갑자기 뭐야.”
    “오늘은 제법 멀쩡해 보이는군.”
    “원래도 멀쩡했어.”
    “믿어주길 바란다면 조금 더 그럴싸한 소리를 해 봐라.”
    유중혁 개자식…….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몹시 괜찮아 보였다. 아니, 너무나도 평소와 같았다.
    “무슨 꿈을 꾼 거지?”
    “응?”
    씩 웃은 김독자는 난간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그냥, 옛날 꿈.”
    “…….”
    “나는 읽고, 너는 행동하고, 그랬던 때 꿈. 활자가 내 인생의 전부였던 시절.”
    그때만 해도 이렇게 살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유중혁, 이렇게 네가 내 눈앞에 있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네. 유중혁은 미간을 슬쩍 좁혔다.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꿈이 아니다.”
    “…….”
    “환상도 아니야.”
    “알아.”
    눈매를 휘어 웃은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 며칠 날개가 너무 아팠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왜 그런지 알겠어, 유중혁? 대답하지 않고 바라보자 김독자가 다시 웃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던 때…… 너는 직접 말로 한 적은 없지만. 아니, 그래. 사실 다른 사람들도 직접 말로 한 적은 없지만……. 늘 내게 전하려 했던 얘기가 있었잖아?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제발, 사라지지 말고 거기 있어 주기만 하라고.”
    “…….”
    그런 이야기들, 잘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러면 나는 언제까지나 김독자일 뿐인데. 홀로 독, 아들 자. 자조적인 웃음소리가 흘렀다.
    “한 번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 평화로운 세계가 너무 낯선 거야. 이런 세계에서 나는 늘 혼자였는데. 아직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나는 이제 구원의 마왕도 아니고, 예언자도 성좌도 아닌데. 그 사람들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이유 없는 호의라는 게 너무 낯설어서……. 차라리, 이유라도 있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어. 내가 그 사람들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던 그때라면, 적어도 이런 부담감은 느껴지지 않겠지, 싶어서.
    “그래서 그렇게 아팠던 거야. 이제 알겠어.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아프지 않을 방법을 알겠어.”
    김독자의 흰 손이 뻗어왔다. 제 뺨에 닿는 조금 서늘한 손가락의 감촉을 느끼며 유중혁이 눈을 깜빡였다. 김독자가 말갛게 웃었다.
    “유중혁. 모든 게 마무리된 뒤에도…… 나랑 함께 있어 줘서 고맙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몹시도 머쓱하고 쑥스럽다는 듯 애매한 웃음기였다. 잠시 눈을 굴리던 김독자가 엄지로 유중혁의 뺨을 쓸더니 금방 손을 떼어냈다.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다시 입을 연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마찬가지고. 이제 더는 도망 안 갈게. 여기 있어도 된다는 걸 알았으니까……. 아, 그래도 이제 다들 각자 살길 찾으면 좀 뜸해지려나. 그건 좀 아쉽네.”
    주절주절 말하며 웃는 얼굴. 유중혁은 이를 꾹 물었다. 김독자가 어떨 때 이렇게 중얼거리듯 여러 말을 늘어놓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은…… 제 행동에 자신이 없을 때 이런 식으로 굴곤 한다. 겨우 정신을 좀 차린 줄 알았더니, 아직 멀었군.
    그렇다면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너 혼자서는 깨닫지 못하겠다면…… 내가 직접 가르쳐주지.
    “김독자.”
    유중혁은 김독자의 손을 끌어당겼다. 저항 없이 끌려온 김독자가 한 뼘 거리에서 눈을 깜빡이며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넌 그것보다 좀 더 바라도 된다. 고작 다른 사람들의 애정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겠다고?”
    “……유중혁?”
    누군가 저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조차 낯설게 느끼는 놈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이래서야, 김독자. 어느 세월에 행복해질 건가.
    “똑바로 원하는 바를 얘기해. 행복해지고 싶으면 행복해지고 싶다고,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받고 싶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유중혁. 어떻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소린 집어치워라.”
    김독자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설핏 날카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대체 무슨 소릴……”
    “언제까지 스스로를 독자(讀者)라고 생각하며 살 거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인정했으면, 더 이상 독자(獨子)가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라.”
    김독자의 얼굴에 미미한 균열이 번졌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 당황으로 조금 벌어진 입술이 뻐끔거렸다. 유중혁은 붙잡고 있던 김독자의 손을 들어 올렸다. 흰 손끝에 입을 맞추자 잠시 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껌뻑거리던 김독자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유, 유중혁, 너, 지금 뭐 하는…….”
    유중혁은 멈추지 않고 그의 손가락 마디에, 손등에, 그리고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김독자가 순식간에 노을만큼이나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빼내려는 듯 비틀었지만 놔줄 리가 없었다. 한 손에 붙잡히고도 한참 남는 손목에 입술을 내리누른 뒤 시선을 마주하자 김독자는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인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굳어 있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숙였다. 눈가에 입을 맞추고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까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빠르게 굴러갔다.
    “이래도 모르겠나?”
    뺨과 턱선에 키스를 남긴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김독자의 얼굴은 그보다 더 붉어질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김독자, 그만 인정해라. 너는 나를 사랑한다.”
    김독자의 얼굴에 짧게 당혹감이 스쳤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것을 막듯 유중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도 너를 사랑한다.”
    “……뭐?”
    이번에야말로 김독자는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몇 번이든 말할 테니까 부정할 생각은 관둬라. 너를 사랑한다.”
    “……미쳤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미쳤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이없는 일인가?”
    김독자의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유중혁, 나는 구원의 마왕이 아냐.”
    “안다.”
    “예언자도 아니고, 성좌도 아니고, 왕이 없는 세계의 왕도……”
    “알고 있다. 김독자. 스물여덟 살이었고, 게임 회사의 직원이었지. 취미는 웹소설 읽기.”
    “…….”
    할 말을 잃은 듯 김독자가 눈을 흐렸다. 어느 날인가 나눴던, 몹시 늦은 감이 있는 자기소개였다.
    “……그런데도 나를 사랑한다고? 왜?”
    왜냐고? 조목조목 이유를 댈 수 있었다면, 굳이 이렇게 먼 길을 빙 돌아서 오지도 않았겠지. 유중혁은 김독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체온에 김독자가 허둥거렸다. 네게 정확한 이유를 속삭여줄 수는 없다. 하지만.
    “몇 번이고 말해주겠다. 사랑한다고. 네가 그 사실에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게 될 때까지.”
    “…….”
    눈꺼풀이 빠르게 들썩였다. 긴 속눈썹이 함께 팔랑거렸다. 유중혁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둥그렇게 떠진 눈이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인내심 있게 김독자를 기다려주었다. 천천히, 말간 눈동자에 다른 감정이 섞여들었다. 깜빡이던 눈꺼풀이 가만히 내려앉았다. 이내 조금 젖은 눈을 한 김독자가 가지런한 눈썹을 찌푸렸다.
    “……유중혁 나쁜 자식.”
    “고백에 대한 답이 욕인가?”
    “조용히 좀 해봐.”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노력이라도 하는지 김독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훌쩍이더니 손을 들어 유중혁의 뺨을 쓰다듬는다.
    “얼굴이 너무 잘나서 현실감이 없어.”
    “그거 안됐군. 못생겨질 생각은 없으니 네가 포기해라.”
    “못생겨지면 안 받아줄 거거든.”
    비로소 김독자가 환하게 웃었다. 고개를 조금 들어선 쪽, 하고 유중혁의 입술에 스치듯 입을 맞춘 김독자가 귓가를 빨갛게 붉힌 채 멋쩍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대답은?”
    얼굴을 가까이했다. 코끝이 맞닿았다. 숨결의 열기가 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머뭇거리던 김독자가 우물거렸다. 꼭 말로 해야 돼? 대답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김독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유중혁, ……사랑해.”
    속삭이듯 작아진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 있었다. 유중혁은 나직이 웃었다. 눈을 꼭 감은 사랑스러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따뜻하고 말캉한 감각에 가슴이 간지러웠다. 천천히 입술을 벌리고 혀를 얽었다. 이내 호흡이 모자라졌는지 김독자가 고개를 조금 떼어내며 숨을 뱉었다. 유중혁, 잠깐, 잠깐만……. 물론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김독자, 내가 너의 현실이 되어주겠다. 모든 것이 낯설어지면 나를 보고 현실감을 되찾아. 얼마든지 곁에 있어 줄 테니.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제 목에 팔을 둘러오는 김독자의 허리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으며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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