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
트위터 썰로 시작해서 책으로 엮은 글입니다.
원본 썰 링크: (1) Link URL (2) Link URL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끌어안고
‘좋아해’ 같은 무책임한 소릴 했더라면 좋았을걸
유중혁은 무시무시한 얼굴을 한 채 휴대폰을 쥐어 터뜨릴 기세로 꽉 붙잡았다. 또 시작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메신저 화면에 떠올라 있는 웬 여성의 사진을 보고 눈썹을 파르르 떤 유중혁은 이를 갈며 자판을 두드렸다.
김독자 죽고싶나 별로야?
태연하게 돌아오는 답장. 그 뻔뻔한 낯짝이 어떤 식으로 입꼬리를 알랑거리며 웃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답장을 보낼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유중혁은 김독자의 메신저를 차단한 뒤 휴대폰을 소파 한구석에 던져두고 눈을 꾹 감았다. 김독자, 미쳤나.
그날, 네가 해준 토스트가 먹고 싶다는 말에 (전혀 그런 말은 아니었지만 유중혁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옥에 찾아갔다 온 지도 두 달 가까이 되었다. 처음 2주간 김독자는 잠잠했다. 메신저를 통한 연락도 일절 없었다. 일 때문에 사옥을 찾아간 유중혁의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생각했다. 더럽게 눈치 없는 녀석이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을 알아들었겠거니, 하고. 말하자면 그날, 유중혁은 답지 않게 완곡한 거절을 한 셈이었다. 끝까지 함께할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내 삶에 들어오지 마라. 그런 이야기. 자신과 관련된 일이면 온갖 착각을 일삼는 김독자 주제에 이것은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들은 것인지, 그게 고깝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하고. 하지만 유중혁은 좋게 생각하려 애썼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 그런데.
부르르르. 휴대폰이 울었다. 전화였다. 화면에 덩그러니 떠오른 이름 석 자를 보며 유중혁은 빨간 버튼을 끌어당기고 침착하게 연락처를 차단했다. 당분간 연락하지 마라. 죽인다. 그래, 3주차부터 김독자는 은근슬쩍 메신저며 전화를 통해 연락을 시작했다.
중혁아 뭐 하고 지내?
그런 일상적인 안부부터,
이 책 재밌던데 읽어봐
그 영화 봤다고? 난 별로던데;
얘네 신곡 들어봤어? 너 좋아했잖아
함께 살 때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곤 했던 이야기까지.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텍스트로 모든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여겼는지 다짜고짜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유중혁 취향 진짜 이상하네, 이게 재밌냐? 네 녀석이야말로 이게 재미없다고? 보는 눈이 없군. 뭐 인마? 그런 대화들이 심심찮게 오갔다.
비록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김독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이 제법 반복되며, 유중혁은 휴대폰 화면에 김독자의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끌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깨닫고 정색을 할 때가 많아졌다. 본인을 앞에 두고선 이런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그렇게 기분 좋은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친 건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날’을 상기시키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쳐들었다. 더 이상 김독자가 내 삶에 들어오도록 해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 기대해봤자 고통스러운 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느슨해진 마음은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미쳤군.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물러 터졌다. 평화로운 날들이 계속된 지 고작 1년 만에 이런 꼴이라니. 유중혁은 어느새 여유 시간마다 괜히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하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경악했다.
그리고, 딱 그즈음이었다. 김독자가 이 어이없는 짓을 시작한 것이.
(사진)
유중혁 이 사람 어때? 네 취향 아니냐
김독자가 보내온 것은 어떤 여성의 사진이었다.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 있는, 긴 생머리에 흰 얼굴을 한 여자. 유중혁은 이게 무슨 수작인가 싶어 눈썹을 들썩였다.
뭐 하자는 거지? 아니 그냥 왜? 맘에 안드냐?
맘에 안 드냐고? 유중혁은 곧바로 김독자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리고 동시에 뒷목이 뻐근해질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이제 제가 직접 나서서 유중혁한테 소개팅 비슷한 뭔가를 시켜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죽고 싶나 야 왜그래; 그렇게 맘에 안드냐; 아닌데 니 취향 맞는데
물론, 그것은 부정하기 어려웠으나……. 유중혁은 눈을 꾹 감고 손을 떨었다. 김독자, 이 자식…….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죽이겠다 아직도 그 말버릇 안고쳤냐 ㅡ ㅡ
심상찮은 기운을 느꼈는지 그날은 그것을 끝으로 김독자도 더 이상 헛소리를 꺼내지 않았다. 유중혁은 머릿속에 조용히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다. 그리고 김독자가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소개팅을 주선하려는 짓거리를 두 번 더 했을 때 유중혁은 생각했다.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 세 번을 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김독자 응? 허튼짓 하지 말라고 했다
김독자는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게 바로 어제 일이다. 그런데 또, 하루 만에 이런 짓을 해? 이쯤 되면, 처음부터 제게 연락을 한 목적이 이걸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었다. 어차피 얼굴은 못 본지 두 달이 되었지만……. 유중혁은 팔짱을 꼈다. 김독자,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지. 나는 절대 먼저 차단을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유중혁은 일주일 전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동안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이틀 전 김독자 컴퍼니의 대외활동 관련 회의로 사옥을 찾았을 때도 놈은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전원이 참석하는 자리였는데도 말이다.
“김독자 놈은 어디 갔지?”
유중혁의 시퍼런 목소리에 유상아가 하하 웃었고, 정희원이 주먹을 부르르 떨었으며, 한수영은 메모지를 사정없이 찢어대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방에 있기는 한데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에 띄게 시무룩한 얼굴을 한 신유승과 이길영을 일별한 유중혁은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애써 가라앉히며 회의를 시작했다. 물론, 이번 일이 딱히 김독자가 필요한 건은 아니었다. 애초에 대외활동에는 얼굴을 내밀기 싫어하는 놈이니. 사장 놈이 없을 때 제가 대표 비슷한 역할을 한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나 빡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유중혁은 김독자의 방이 있는 계단 방향은 쳐다보지도 않고 쌩하니 문을 나섰다. 감히 나와 시간 싸움을 하겠다는 거냐, 김독자. 자신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았는지 잘 아는 놈이라서 더 기가 막혔다.
오랜만에 속으로 이런저런 욕설을 구상하는 사이 딩동, 하고 벨이 울렸다. 그 소리에 유중혁은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누구지. 누가 사는지 이미 널리 알려진 집이기에 감히 벨을 누를 놈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김독자라면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굳이 벨을 누르지 않아도……. 유중혁은 일단 현관으로 향했다. 덜컥, 잠금장치를 해제하고 문을 열자 머쓱하게 웃는 흰 얼굴이 나타났다.
“어…….”
“…….”
순간 어색한 정적이 둘 사이의 공간을 훑고 지나갔다. 유중혁은 살짝 당황해 입을 다물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죽이고 싶다 생각했던 놈인데,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든 것이 황당해서 벽에 머리라도 박고 싶어졌다. 그러면 좀 정신이 들겠지. 아무 말도 없이 노려본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어설프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김독자가 슬그머니 웃었다.
“오랜만이네, 중혁아.”
“……벨은 왜 눌렀지?”
“어?”
김독자는 잠시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멍청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눈을 껌뻑거린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모르니까?”
이번엔 유중혁이 눈썹을 들썩일 차례였다. 그 사인을 본 김독자가 그제야 깨달았는지 헐, 하는 소리를 냈다.
“비밀번호 안 바꿨어?”
“……안 바꿨다.”
“미친 거 아냐, 유중혁?”
미친 건 네놈 아닌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은 다행히도 삼킬 수 있었다. 눈을 굴리던 김독자가 하하 웃었다.
“계속 문밖에 세워둘 거야? 들여보내주라.”
……삼키지 말 걸 그랬다. 하지만 유중혁이 막아설 새도 없이 김독자가 잽싸게 문 안쪽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딜. 턱, 팔로 앞을 가로막고 현관문을 쾅 닫았다. 순식간에 현관문과 유중혁 사이에 끼인 김독자가 눈에 띄게 허둥거리며 차가운 철문에 등을 딱 붙이고 섰다. 그 꼴을 가만 지켜본 유중혁이 초여름 공기도 얼어붙을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볼일이지? 너무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전 사원이 참석하는 회의에도 못 나왔다는 놈이?”
김독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풀리냐?”
“그럼 무슨 말을 기대했지?”
김독자가 고개를 돌리며 유중혁 개새끼, 하는 입모양을 했다. 그것을 빤히 읽어낸 유중혁은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팔짱을 꼈다.
“일단 들여보내줘. 손님을 현관에 세워두는 건 무슨 법도냐?”
“네놈이 손님인가?”
“손님 아니면 뭔데?”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왠지 배알이 꼴렸다. 하지만 저 오징어처럼 비실대는 놈이 차가운 철문과 하나가 되어 있도록 더 내버려 둔다면 금세 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도 요놈 잡았다, 하며 덥썩 물어갈 만치 비쩍 곯은 모양새인 것이 신경 쓰이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한숨을 쉬며 몸을 물렸다. 김독자가 씩 웃고는 재빨리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어제 왔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걸음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저보다 앞서 집안을 활보하는 김독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함께 살던 어느 날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녁 메뉴를 정하고 함께 장을 보러 갔다가 돌아올 때, 가끔이지만 함께 운동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냥, 그런 기억들. 그 당연했던 일들을 그립다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유중혁은 입을 닫은 채 거실 소파에 주저앉는 김독자를 흘끗 바라본 뒤 주방으로 향했다. 뭐라도 마실 건 내와야겠지. 나 커피로 주라.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되묻자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커피 많이 마셨더니 카페인 내성 생긴 것 같아. 마셔도 잠은 잘 오더라고.”
그 말마저…… 왜 기분이 나쁜 것인지. 저와 함께 살 때는 별로 입에 대지도 않던 커피를 왜 많이 마셨단 말인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김독자가 행했을 모든 일들이 몹시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누구의 영향인가. 한수영? 유상아? 그도 아니면 이수경? ……생각해봤자 쓸데없는 일이었다. 유중혁은 쯧, 혀를 차고는 금방 제 몫의 커피까지 두 잔을 내려 손에 들었다.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했던 건 그대로겠거니 생각해 한 잔은 물 온도를 낮췄다. 적당히 따끈한 머그컵을 받아든 김독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로부터 한 칸 떨어져 앉은 유중혁이 흘긋 쳐다보자 가만히 컵을 들여다보던 김독자가 빙긋 웃었다.
“안 잊어버렸네, 유중혁.”
그럼, 설마, 잊어버리기라도 할 줄 알았단 말인가. 나는 무엇도 잊지 않는다. 네 녀석도 알고 있을 텐데. 대답 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잘 마실게, 대답한 김독자가 머그컵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컵을 감싼 흰 손이 느긋하게 움직였다. 반쯤 내려앉는 눈꺼풀, 흰 뺨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긴 속눈썹. 조금 마른 체구 탓인지 도드라져 보이는 목젖의 움직임. 순간적으로 김독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유중혁은 다급히, 하지만 김독자가 눈치채지는 못할 속도로 고개를 돌려 제 손에 들린 커피를 들이켰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낯설고, 또…….
아니,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유중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독자.”
“응?”
“그래서, 무슨 수작이지.”
콜록, 콜록. 서너 번 기침을 뱉은 김독자가 황당한 얼굴로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말 한번 곱게 하네.”
“대답이나 해라.”
유중혁 개새끼……. 또 그런 입모양이었다. 이번까지 참아주지. 한 번 더 참으면 진짜 참을 인 세 번이다.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김독자가 말했다.
“아니, 뭐…… 별건 아니고…….”
“…….”
입술을 달싹이던 김독자가 유중혁을 홱 돌아보았다.
“유중혁 너 진짜 왜 그러냐?”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남 탓이라니. 싸늘한 유중혁의 시선에도 기가 죽지 않은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 이렇게 계속 혼자 살 거야? 그 망한 세계 속에서도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잘만 살던 놈이 도대체 이번엔 왜 그래?”
“…….”
어이가 없어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또 그 얘긴가. 빈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른 유중혁이 말했다.
“나야말로 묻겠다. 김독자.”
“……?”
“도대체 왜 그렇게 살지?”
뭐, 이 새끼야. 그런 표정이 돌아왔다. 유중혁은 물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결혼하든 말든 도대체 네놈이랑 무슨 상관이지. 왜 그렇게 남의 결혼에 집착하는 거냐.”
“아니, 그…….”
말문이 막힌 듯 우물쭈물하던 김독자가 엉뚱한 대답을 뱉었다.
“너랑 내가 남이냐?”
정말이지 기가 막힌 발언이군. 유중혁은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나쁘지 않은 어감이다. 너랑 내가, 남이냐고. 김독자, 네가 그런 말을 한단 말이지. 그런 말을 들으면 되물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남이 아니면 뭐지?”
“…….”
김독자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스쳤다. 유중혁은 쉽사리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입을 꾹 다문 채 흔들리는 눈빛으로 유중혁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시선을 내렸다. 천천히, 얼굴에서 낯선 표정이 사라졌다. 후우…… 길게 한숨을 뱉더니 다시 숨을 들이켠다. 그대로 컵을 내려놓고 유중혁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린 김독자가 불쑥 고개를 가까이했다.
“남이 아니면 뭐냐고? 이 새끼야, 내가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기시감이 드는 말이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허연 낯짝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인상을 썼다. 김독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미간을 사정없이 좁혔다.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어이가 없군. 이 상황에서 네가 내게 화를 낸단 말인가.
“뭐 때문에……!”
“잘됐군.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다, 김독자.”
말허리를 자르자 김독자가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유중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김독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얇은 살갗이 찢어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화가 나는 와중에도 그것이 신경 쓰인다면 역시, 미친 건가. 잠시 말이 없던 김독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내 행복이 네 녀석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어째서지.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인가? 네 인생을 지탱해 준 소설의? 그렇게 말하니 저절로 자조적인 웃음이 뒤따라왔다. 비뚜름히 말려 올라간 유중혁의 입매를 본 김독자가 주먹을 꽉 쥐었다. 쏘아붙이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와서 이유 같은 건 상관없다. 딱히 듣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해야겠군.”
“…….”
“나는 이번 생에서 결혼 같은 걸 통해서 행복을 찾을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
김독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듯했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되묻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네 녀석이 나를 제법 잘 이해하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게 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도 알고 있을 텐데.”
“…….”
김독자는 유중혁을 읽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를 읽었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김독자의 죄책감과 맞닿은 무언가를 건드리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게 만든 건 네 녀석이다, 김독자.
김독자는 조금 허망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애매한 감정을 담은 채 유중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유중혁은 피하지 않은 채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럼.”
“……?”
“이번 생에서 네 행복은 뭔데?”
혼잣말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눈을 깜빡였다. 김독자의 얼굴에는 무언가가 무너진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유중혁, 넌 지금…… 행복하냐고.”
행복이라.
행복이라는 게 무엇일까. 유중혁은 이미 몇 번이나 그에 대해 생각했었다. 그날, 김독자가 제게 시나리오가 끝난 뒤에 어떻게 살고 싶었냐고 물었던 날부터 계속된 질문이었다. 범람하는 시나리오 속에서 살아가던 때에는 그 끝을 보는 것만이 목적이었으므로 그 이후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어렴풋하게, 평화를 되찾은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그렸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런 상상을 일부러 무너뜨렸다. 그를 약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그렇기에, 희망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상상을 그만뒀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너무 길어서일까. 유중혁은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유중혁은, 행복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것을 생각하며 김독자의 눈을 바라본 순간 유중혁은 깨달았다.
아, 그래.
김독자. 나는…… 네가 내 곁에 없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
깨달음의 충격에 유중혁은 잠시 입을 닫았다. 잠시 굳었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김독자가 필요하다. 행복하기 위해서. 참으로 익숙하고도 쉬운 명제였다. 어째서 이제야 알아챘는지 의아할 정도로. 너랑 내가 남이냐? 김독자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과 김독자가 남이라면, 나는 행복하기 위해 ‘남’이 필요하다는 건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군.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타인을 필요로하는 행복 따위는 어불성설이다. 김독자, 너와 나는 남이 아니지. 우리는 생과 사를 함께한 동료다. 하지만…… 고작 그런 말로 부르기엔, 나는 이 녀석을.
아.
그제야 머릿속이 훅, 하고 맑게 개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남자에겐 관심 없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누군가가 정해둔 고정관념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보이는 해답이었는데.
김독자. 나는, 너를 좋아하는군.
저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하, 한숨 쉬듯 웃자 김독자가 의아한 듯 눈꺼풀을 팔랑였다. 유중혁은 손을 뻗어 한 손에 들어오는 김독자의 팔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깜짝 놀라 움찔 몸을 떨며 손을 빼내려 비트는 것을 놓치지 않은 채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김독자의 얼굴이 삽시간에 당황으로 붉게 물들었다. 유중혁은 느릿하게 말했다.
“김독자.”
“…….”
“내가 지금 행복하냐고.”
김독자는 어쩐지 필사적인 기색으로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의 행동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이 녀석의 감정은…… 별개다. 하지만,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제 마음을 말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녀석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공언했던 놈이니, 유중혁이 마음을 고백해봤자 역효과가 날 것이 뻔했다. 지나치게 놀라 도망을 가버릴지도 모르는 놈이다. 그러므로, 유중혁이 택해야 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김독자. 다시 이 집으로 들어와라.”
“……뭐?”
“그러면 좀 행복해질 것 같군.”
말없이, 그저 김독자를 제 곁에 두고…… 녀석이 행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이 정도면 나름대로 윈윈전략 아닌가. 확실한 승리도 아니지만, 김독자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적어도 패배는 아닐 것이었다. 결혼 생각은 없다고 했던 놈이니, 운이 좋으면 이대로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나이를 먹어갈 수도 있겠지. 자신답지 않은 타협안이었으나 유중혁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어쩌면 김독자만큼이나, 자신도 김독자의 행복을 바라고 있으므로.
김독자의 행복은 무엇일까. 지금은 생각이 없다지만 언젠가는 이 녀석도 다른 사랑하는 이가 생겨, 그와 함께 살고 싶다 말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것이 김독자의 행복이라면. 유중혁은 기꺼이,
아니,
결단코 아니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속을 짓뭉개는 시커먼 감정에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절대로 순순히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행복하게 웃으며 입을 맞추는 김독자의 모습을 봤다간 저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가서 둘을 떼어놓으려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다간 이 녀석이 슬퍼할까. 그럼…… 나는 그 꼴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유중혁은 여전히 제 손에 붙들려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김독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귓가가 불그스름했다. 늘 창백할 정도로 희던 뺨도 조금 붉은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당황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유중혁은 붙잡은 팔목을 제 쪽으로 당겼다. 가벼운 몸이 훅 끌려와 얼굴이 한 뼘 거리로 가까워졌다.
“일단 여기서 자고 가라.”
“……뭐, 무슨…….”
김독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어물거리며 달싹이는 입술을 바라본 유중혁은 그대로 그의 턱을 붙잡고 끌어당겨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눌러 담았다.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드는 생각이 이런 거라니, 예전처럼 속내라도 읽혔다간 기겁해서 도망가겠군.
“미, 미쳤냐!”
지나치게 격한 반응에 유중혁은 하마터면 김독자가 제 생각을 스킬로 읽기라도 한 건가 착각할 뻔했다. 드물게도 목소리를 높인 김독자는 스스로가 더 놀란 듯 고개를 뒤로 뺐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얻은 유중혁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싫은가?”
“아, 아니, 미친…….”
내 집이 여기서 15분 거리인데 왜 굳이 여기서 자냐! 합리적인 질문이었지만 유중혁은 묵살했다.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
이 새끼가 미쳤나…… 그런 표정이 역력했다. 유중혁은 부러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싫으면 지금 가라. 더 붙잡지 않겠다.”
“…….”
뻐끔대던 김독자의 입이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유중혁 개새끼. 세 번째였지만 유중혁은 너그럽게 용서해주기로 했다. 김독자가 자신의 이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녀석이라는 걸 유중혁은 아주 잘 알았다. 그래, 조금쯤은 얼굴에 약한 녀석인 것 같기도 하고. 유중혁은 살면서 이 순간만큼 자신의 얼굴이 잘난 것에 만족했던 적이 없었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쉰 김독자가 슬그머니 힘이 풀린 유중혁의 손에서 손목을 빼냈다. 칫솔이나 꺼내줘. 그렇게 말하며 얼른 몸을 일으킨 김독자는 옛날에 자신의 방이 있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속으로 웃은 유중혁은 그 뒷모습에 대고 말했다. 그 방에 침대 뺐다. 뭐? 입을 쩍 벌리는 허연 얼굴을 본 유중혁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빈방을 어떻게 쓰든 내 맘 아닌가. 김독자는 할 말이 없는지 얼떨떨한 얼굴로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어디서 자고 가라고 한 거야? 설마 소파?”
“내 침대에서 같이 자면 된다.”
“뭐라고.”
유중혁 미쳤냐? 이거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미친 건 네 녀석이겠지. 예전엔 내 침대가 더 편하다고 멋대로 올라와서 책 읽다 잠들고 그러지 않았나. 아니 시발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머리를 쥐어뜯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와서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나?
한참이나 유중혁을 노려보던 김독자가 결국 욕실로 향했다. 그래 시발, 같이 자자, 자. 진짜 미친 거 아냐……. 칫솔 내놔, 말하며 쿵 닫히는 욕실 문을 본 유중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금 웃어버렸다. 한동안은 제법 재밌을 것 같았다.
한 시간 뒤, 유중혁은 이것이 결코 재미있기만 한 길은 아닐 것을 직감했다. 이유는 물론 제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허연 놈 때문이었다. 잠옷이 없으니 옷을 내놓으라는 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옷장에서 아무거나 꺼내입으라 말하고 욕실에 들어간 것이 조금 전이었다. 곧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이 꼴이다. 어깨가 한참 남는 반팔에 반바지 차림. 바지는 사이즈가 큰 탓에 되레 더욱 헐겁게 흘러내려 미끈한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그 상태로 손에 쥔 스마트폰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 웹소설이라도 보고 있는 건지.
달칵, 욕실 문을 닫으며 방으로 들어서자 고개를 치켜든 김독자가 헉하며 눈을 돌렸다. 저건 또 무슨 반응인가. 유중혁은 김독자의 맨살에서 시선을 떼어놓으려 노력하며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끄트머리에 걸터앉으려 했더니 황급히 몸을 반바퀴 굴린 김독자가 이불을 끌어당겨 제 몸을 가렸다.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선 그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지?”
“아니, 그.”
답지 않게 허둥대더니 이내 이불로 제 눈가를 가린 김독자가 웅얼거렸다.
“왜 그렇게 다 벗고 다녀, 이 새끼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게다가 김독자의 말처럼 다 벗은 것도 아니었다. 억울하군. 유중혁은 샤워 후 머리를 말리기 전에는 상의를 입지 않는 버릇이 있을 뿐이다.
“내 집에서 바지만 입고 다니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시발…….”
이불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험한 소리에 유중혁은 눈썹을 들썩였다. 제 습관을 뻔히 아는 놈이 새삼스럽게 저러니 무엇 때문인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중혁이 무언가 더 추궁하기도 전에 김독자는 베개에 머리를 푹 파묻고선 보란 듯이 등을 돌렸다. 얇은 여름 이불이지만 돌돌 말고 있는 것이 더위 먹기 딱 좋은 꼴 같아서 유중혁은 혀를 차며 에어컨을 켰다. 우웅. 시동음을 배경으로 김독자의 목소리가 중얼거리듯 이어졌다.
“나 잔다. 불 꺼줘.”
“…….”
상전이 따로 없군. 하지만 김독자와 달리 유중혁은 염치를 알았다. 자고 가라고 한 건 자신이었으니 이 정도 투정은 받아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순순히 천장 등을 꺼준 뒤 침대 옆 협탁의 작은 불만 밝혔다. 침대에 걸터앉아 조금 젖은 머리를 마저 말리고 윗옷을 걸쳐 입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그새 잠든 것인지 김독자는 조용했다. 이불은 완전히 다 가져갔군. 둘둘 만 것을 깨워서 뺏어올까 하다가 관뒀다. 에어컨의 온도를 조절한 유중혁은 협탁 위의 등도 마저 끄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곁에 누운 이의 새근거리는 작은 숨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퍼져나갔다.
어둠 속에서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던 유중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불에 감싸인 김독자의 등과 뒤통수가 어렴풋이 보였다. 킹사이즈 침대였기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잠버릇이라도 있지 않은 한 각자 위치를 지키며 자기엔 충분했지만……. 유중혁은 몸을 조금 움직여 그 어슴푸레한 실루엣에 가까이 다가갔다. 느릿하게 손을 들어 얇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사락거리며 손가락 틈새를 빠져나가는 머리칼을 잠시 바라보다가 팔을 뻗어 김독자의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내 침대에서 겁도 없이 팔자 좋게 잠든 놈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을까. 제가 무언가 이상한 짓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 듯한 태도에 어쩐지 조금 심술궂게 굴고 싶어진다. 이건, 먼저 잠든 놈이 잘못한 거다.
몇 겹의 얇은 이불 너머로도 몸의 윤곽이 느껴졌다. 이전보다 확연히 마른 몸. 김독자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인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숨소리도 더욱 선연하게 귓가를 간지럽혀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검은 머리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귓바퀴와, 사이즈가 큰 옷이 밀려나며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흰 피부 위에 입을 맞춘 것은 다분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어차피 잠들어 있는 이놈은 모를 일일 테지. 사실 깨어나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둘러댈 말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이를 내어 살짝 깨물었다. 연약한 살갗을 빨아들여 자국을 남기려다가 마지막으로 남은 이성을 짜내 간신히 그만두었다. 하아, 유중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김독자의 뒷목에 고개를 묻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제대로 잠을 자기는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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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독자는 오래지 않아 다시 두 사람이 함께 살던 집으로 들어왔다. 책을 제외하면 여전히 짐은 그다지 없었고, 유중혁은 김독자가 물건을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비어 있던 방이 다시 김독자의 방으로 탈바꿈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익숙한 이의 물건이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휑했던 방에 확연한 생활감이 되살아났다.
유중혁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종종 김독자가 사라진 빈방에서 창틀에 기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빈방에서는 종이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책장을 넘기는 흰 손,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가느다란 머리칼,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 떠올리면서. 그랬으면서도 진작 제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었다.
침대는 다시 두 개가 되었다. 식기도,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두 배가 되었다. 하루 걸려 짐을 다 풀어놓은 김독자는 진지하게 할 얘기가 있다며 유중혁을 불렀다.
“너 지난번처럼 수작 부리지 마.”
“…….”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이딴 거였다. 유중혁은 서늘한 얼굴로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뭔 개소리인지 알아듣게 설명해라. 김독자가 보기엔 아마도 그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실상은, 제 속내를 들킨 기분이 된 유중혁이 일부러 잘생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을 보곤 흠칫하더니 또 시선을 피했다.
“그런 것 좀…… 하지 말라고, 미친놈아.”
“뭘 말이지.”
그렇게 답하며 유중혁은 고개를 슬쩍 모로 기울였다. 미친.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눈을 꾹 감은 김독자가 손을 뻗어 유중혁의 얼굴을 밀어냈다. 무언가 입속으로 읊조리는 꼴이 아마도 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 조금 재밌어서라도 그만두기가 힘들다.
유중혁은 가만히 속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어느 정도까지가 허용선일까. 연인이 아닌 이를 상대로 어디까지 닿아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연인이 아닌 이에게 제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선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걸까.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유중혁은 타고난 ‘유희의 지배자’였고, 줄자로 재듯 수치로 환산된 거리감 같은 것을 애초에 지정해 둘 생각은 없었다. 순간순간의 동물적 판단에 기꺼이 따르기로 했다는 뜻이다.
유중혁은 아직도 제 얼굴에 닿아 있는 김독자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하곤 손끝으로 그의 팔목을 간지럽히듯 문질렀다. 화들짝 놀란 김독자가 얼굴을 붉혔다. 유중혁은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수년을 함께 보냈지만, 당황했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버릇 같은 건 없었는데. 어쨌든, 유중혁은 말했다.
“네 녀석이나 수작 부리지 마라.”
순식간에 개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을 한 김독자가 눈을 부라렸다. 두고 봐, 유중혁.
그리고 유중혁은 지금, 그 말을 해 두길 백번 잘했다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뭐 하자는 거지?”
“…….”
“나한테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언제 그랬냐?”
직접 말로 한 적 없거든, 얼굴로는 했어도……. 중얼대던 김독자가 제 입장을 깨달았는지 후, 한숨을 쉬었다.
“……잠이 안 와.”
유중혁은 짙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1년을 함께 살았지만 처음 듣는 소리로군. 이놈은 잠이 안 오더라도 밤을 새우면 새웠지 저를 찾아올 녀석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유중혁은 신중한 기색으로 제 방문을 연 채 서 있는 김독자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의외로, 그 얼굴은 제법 진지해 보였다. 무언가 문제가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손에 들고 있던 책에 갈피를 끼워 책상 위에 올려두고 안경을 벗었다.
“들어와라. 거기 서 있지 말고.”
김독자는 조금 망설이더니 등 뒤로 문을 닫고 걸어와 책상 의자에 앉았다. 정말로 자려고 했던 건 맞는 모양인지 편한 옷차림이었다. 원래도 집안에서 굳이 옷을 차려입고 다니는 놈은 아니었지만. 그의 움직임에 따라 품이 넉넉한 티셔츠 아래 얇은 몸의 윤곽이 얼핏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슬쩍 눈을 굴려 시선을 떼어낸 유중혁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말했다.
“뭐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배가 고픈 거면 뭐라도 만들어 오지.”
이렇게 순순히 응해줄 줄은 몰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가만 고개를 저은 김독자가 의자 위로 한쪽 무릎을 끌어올려 뺨을 기대고는 말했다. 아니, 그냥 여기 있게 해줘. 너는 할 거 해. 자도 되고. 유중혁은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든가, 적당히 대꾸하고 다시 책과 안경을 집어 들었다. 유중혁의 시력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 비해서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한때 프로게이머였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유료화가 끝난 뒤 초월좌가 아닌 평범한 몸으로 돌아오자 조금의 변화는 있었다. 일상생활에서 안경을 껴야 할 정도로 눈이 나쁘진 않았지만 굳이 끼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해 책을 볼 때면 종종 끼게 되었다.
안경을 걸치고 침대 헤드에 기댄 채 갈피가 끼워진 페이지를 펼쳤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스탠드만이 방 안의 유일한 광원이었다. 그대로 잠시 독서에 집중하던 유중혁은 슬쩍 눈을 들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짧은 순간 시선이 정확히 마주치고, 머쓱한 듯 김독자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쳐다보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정말 계속 보고 있던 건가. 이렇게까지 지켜보고 있으면 신경이 안 쓰이기가 어렵다.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그 주체가 김독자라면. 흘끗 디지털시계를 쳐다보니 시간은 새벽 1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심심하지 않나?”
“……별로.”
눈을 깜빡인 김독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 애매한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중혁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눈을 굴려 활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군. 결국 책을 탁 덮은 유중혁이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자 김독자의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안경 잘 어울리네.”
뜬금없는 칭찬에 유중혁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순순히 칭찬을 할 놈이 아닌데. 뭐 사고라도 쳤나. 무슨 속셈인가 싶어 쳐다봤으나 김독자는 그저 유중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김독자가 손가락으로 유중혁의 손에 들린 책을 가리켰다.
“더 안 읽을 거야?”
“그래.”
“그럼? 이제 잘 거야?”
그렇다고 대답할 셈이었으나, 역시 조금은 궁금했다. 이놈이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그리고 유중혁은 그런 의문을 참지 않는다.
“김독자. 이유를 말해라.”
“뭘?”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지.”
“…….”
짧게 입을 다물더니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답한다. 말했잖아, 잠이 안 온다고. 물론 유중혁에겐 대꾸할 말이 있었다. 네 녀석이 잠이 안 온다고 내 방에서 이러고 있었던 적이 있던가? 김독자가 눈을 굴렸다.
“내가 있으면 불편하냐.”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말투에 유중혁은 픽 웃었다. 이제 와서 불편할 건 또 뭐지. 정확히는, 불편한 것이 아니라 너무 신경 쓰인다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들어줄 테니.”
“…….”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대던 김독자는 아주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유중혁.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냐.”
“어떤 거 말이지.”
“날갯죽지가 간지럽다고 했던 말.”
유중혁은 눈썹을 모았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김독자가 말했다.
“요즘 다시 그래.”
“아픈가?”
“…….”
이전에는, 아프진 않다고 답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김독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은 속으로 쯧, 혀를 차고는 손을 들어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왜? 봐주겠다. 보면 네가 아냐. 그야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겠지. 언젠가 유중혁이 저를 진맥해줬던 기억을 더듬는지 김독자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김독자는 유중혁이 두드린 자리에 앉았다.
“뒤로 돌아라.”
김독자는 쉬이 그렇게 하지 못했다. 완연히 머뭇거리는 기색에 이유를 묻자 아가미로 호흡하듯 뻐끔거리던 입이 꾹 다물렸다가 열렸다.
“……별로 보기 안 좋을 수도 있는데.”
무슨 의미지? 되묻는 대신 유중혁은 잠자코 김독자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한참이나 망설이던 김독자는 이내 마음을 먹었는지 몸을 돌려 유중혁에게 등을 내보였다. 그대로 두 손으로 옷자락을 들어 올려 맨살을 드러냈다.
유중혁은 잠시, 스탠드의 은은한 불빛을 반사하는 흰 피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깻죽지까지 완전히 말려 올라가지 않은 티셔츠 아래로도 수십 차례 찢겼다가 아물기를 반복한 흉터 자국이 선명히 보였다. 유중혁은 손을 뻗어 그의 옷을 더 걷어 올렸다. 날개뼈 위에 세로로 길게 자리 잡은, 마치 난자당한 듯한 모양의 불그스름한 흉터 한 쌍. 그것을 바라보던 유중혁은 가만히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비교적 낮은 체온이 살갗을 타고 전해졌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처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등을 찢고 자라난 검은 날개, 이마 위로 솟은 뿔. 끝내 제 손으로 그를 살해해야 했던 순간까지. 정말 멋진 이야기잖아. 안 그래? 그 순간에도,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웃었다. 몇 번이나 그날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김독자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나약한 자신을 수도 없이 원망했다.
그리고, 김독자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스스로도 원치 않으면서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반복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지금에서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김독자의 목적이, 자신에게 행복한 결말을 주는 것이었음을 알았을 때 유중혁이 느낀 기분을, 김독자는 알고 있을까. 그 누구도 타인을 위해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희생하지는 않는다. 차라리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대의 아래 행해진 일이었다면 납득했을 것이다. 자신도 그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김독자가 선택한 것은 분명 세계가 아닌 유중혁이었다. 자신을 독해한 김독자의 삶을 읽은 유중혁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 사실이 가지는 무게가 지나치게 무거우면서도……. 유중혁은 생각했다. 그 누구도, 애정 없는 상대를 위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행복을 바란다. 그 말인즉슨, 그가 자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최소한 애정 언저리에 다다라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이겠지.
애정과 사랑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감정의 변질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두 감정을, 온전히 외따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 유중혁은 자신에게 있어 애정과 사랑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그에게 있어 애정이란 이설화를 비롯해 시나리오를 함께 클리어해온 다른 동료들에게 갖는 감정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그들이 더 이상 힘들고 괴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모쪼록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 겉으로 내색하지 않을지언정 유중혁이 ‘동료’라 인정한 이들에게 품는 감정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유중혁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도드라진 견갑골과 불그스레한 흉터 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아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김독자가 몸을 움츠렸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더 이상 구원의 마왕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원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위해 원치 않는 희생을 치르지 않고,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며 행복할 수 있는 세계.
그리고, 그 곁에 자신이 있기를 바랐다. 김독자의 평생에 자신이 함께하기를 바랐다. 곁을 지키고, 어깨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 속삭이며 함께 밤을 지새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저와 똑같은 미소를 지어주기를 바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며 사랑한다 답해주길 바랐다. 유중혁에게 있어 사랑은 소유욕을 닮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시에, 김독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먼저 손을 놓아줄 수도 있는, 그런 상충되는 감정을 동반한, 몹시도 복잡한 무언가.
손의 움직임이 멎은 것을 눈치챈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일견 예민해 보이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며 그리는 곡선에 유중혁은 시선을 빼앗겼다.
“이상하다. 네가 손대니까 안 아픈 것 같은데. 따뜻해서 그런가.”
하하, 작게 웃는 소리. 다시 고개가 돌아가며 흰 목덜미가 드러났다. 헐거운 티셔츠 아래 드러난 마른 등과 척추. 다른 쪽 날갯죽지로 손을 옮기며 유중혁은 제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충동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 당장 이 몸을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유중혁? 하고 당황해 제 이름을 부를 입술에 키스하고 뺨을 매만지고 싶었다. 사랑한다, 김독자. 그렇게 속삭이며 영원히 함께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김독자. 내가 그리한다면…… 너는 어떻게 반응할 텐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을 건가. 그대로 날개를 꺼내 내게서 도망칠 건가. 여러 번 그러했듯이.
유중혁은 상실이 두려워졌다. 김독자를 잃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니 이 마음은…… 당분간, 갈 곳이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