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
트위터 썰로 시작해서 책으로 엮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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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네 운명의 사람은 내가 아니야
괴롭지만 부정할 수 없어
저녁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유중혁은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달칵, 켜진 현관 등을 넘어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지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이는 없었다. 제가 돌아올 때면 다른 일을 하다가도 귀신같이 알아채고선 씩 웃으며 왔냐, 인사를 건네던 녀석이 오늘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나갔나? 이 시간에? 그런 적은 없는데. 김독자의 생활패턴쯤은 훤히 꿰고 있는 유중혁이었다. 연락이 온 것이 있나 휴대폰을 꺼내며 조금 더 걸어 들어가는 찰나 김독자의 방문이 빼꼼히 열리며 희멀건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왔냐, 중혁아.”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유중혁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무언가 또 일을 꾸미고 있군. 김독자, 부르며 다가가자 면전에서 문이 쾅 닫혔다. 하, 이건 또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군. 문고리를 붙잡은 유중혁은 안에서 잠긴 문을 덜컥거리며 이를 갈았다.
“김독자. 뭐 하는 거지.”
“중혁아, 나 지금 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서.”
“헛소리 말고 문 열어.”
“바쁘다니까.”
“바쁜 거랑 문을 잠그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덜컹. 문고리를 붙잡고 한 번 더 거세게 흔들자 김독자가 으악, 하는 소리를 냈다.
“야, 이 새끼야! 문 부서지겠다!”
“싫으면 문 열지?”
유중혁 개자식, 어쩌고 하는 욕설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가뿐히 무시한 채 문고리를 붙들고 기다리자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 머쓱한 얼굴을 한 김독자가 문 앞을 가로막고 선 채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비켜라.”
“뭔 소리야. 내 방인데.”
“뭐 하는지 구경이나 좀 하지.”
“구경해서 뭐하게, 야, 잠깐……”
유중혁은 저를 막아서려는 김독자를 가볍게 밀어내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몹시도 어수선한 방의 풍경이었다. 아니, 어수선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무리 대충 사는 녀석이라지만 평소에 이 정도로 어지르고 살지는 않는 놈이다. 그러니까 이건…….
“김독자.”
“…….”
“어딜 가려는 거지?”
정확히, 이삿짐을 싸는 모양새였다. 하하, 웃음을 흘리는 허연 얼굴을 노려보자 김독자가 시선을 피했다. 커다란 종이박스 두 개가 조립되어 바닥에 놓여 있었고, 자잘한 물건들은 이미 절반 이상 안에 들어가 있었다. 뒷목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저절로 이가 바득 갈리며 소리를 내자 김독자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유중혁. 그러니까……”
“…….”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디 설명해 봐라, 그런 시선을 쏘아 보내자 김독자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나 이사 가려고.”
보자마자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순순히 인정하니 또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서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다. 어디로? 왜 말도 없이 갑자기? 그리고…… 여기서 나가면, 누구랑 같이 살려는 거지? 그런 질문까지 연달아서 떠올랐다. 유중혁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김독자가 난감한 얼굴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중혁은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삼인(三忍) 스킬을 발휘하려 애쓰며 김독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매트리스 위에 놓인 흰 손가락이 타닥, 탁,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움직였다. 가지런한 눈썹이 좁혀졌다가 풀렸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표정이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웬만한 버릇들은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늘 속을 종잡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함께 산 지 제법 오래된 이제는 이 흐릿한 녀석에 대해 꽤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가끔, 아주 가끔 베란다에서 멍한 얼굴로 하염없이 땅을 바라보거나 하는 등의 돌발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한참이나 보고 있자 김독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김독자 컴퍼니 사옥으로 들어갈 거야.”
첫 번째로 나온 대답은, 생각보단 안정적이었다. 이 녀석도 그간 함께 지내며 제 성정을 파악한 것이겠지. 물론 전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일단 더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턱을 까딱였다.
“그리고?”
“별로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냐. 너랑 살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좀, 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변화, 변화라.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김독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것이 몹시도 같잖았다. 얼마 전부터 계속 저런 꼴이다. 별로 큰 이유는 없다고? 거짓말하지 마라, 김독자. 그럼 도대체 왜 계속 나를 피하는 거지. 유중혁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김독자가 걸터앉아 있는 침대 시트에 손을 짚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의 무게 탓에 아래로 조금 꺼졌다. 삽시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김독자가 허둥대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래, 확실히 이상한 반응이다. 진작 조치를 취했어야 했는데. 예전 같으면 뭘 보냐, 하며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고 씩 웃었을 놈이다.
“김독자.”
“……왜.”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라.”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는 눈빛이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물려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탓에 희고 마른 목덜미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잘못한 거 없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다시 말했다.
“그럼.”
“…….”
“내가 너한테 뭔가 잘못했나?”
휘둥그렇게 떠진 눈이 다시 저를 향했다. 깜빡거리는 눈꺼풀을 고요히 응시하며 유중혁은 그 안에서 답을 찾아내려 애썼다. 김독자는, 정말로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는 양 입까지 벌렸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가까스로 대답을 뱉은 입이 뻐끔거렸다. 그래서 유중혁은 생각하고 있던 말을 다시 내놓았다.
“그럼 왜 굳이 나가려는 거지. 큰 이유가 있어서 나가려는 게 아니라면, 여기에 계속 있어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
“…….”
다시 입이 꾹 닫힌다. 미치겠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침대 시트 위에 얹은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제 속내를 그다지 많이 표현하는 놈이 아니라는 걸 아주 잘 알았다. 자신과 김독자는 대화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둘 사이에 생겼던 불화는 말 대신 몸으로 풀린 적이 더 많았다. 그리고…… 유중혁은, 자신이 김독자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관계에 있어 누가 우위에 있고 어쩌고,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이 어떤 결정이든 김독자가 고심 끝에 자의로 내린 결론이라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해도 그럴 자격은 없을 터였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든 제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으려는 허튼짓만 아니면, 기꺼이 그에 조력해 줄 마음까지 있었다. 왜냐하면……
왜냐면, 김독자는 그의 소중한 ‘동료’니까. 생과 사의 동료.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동료. 그가 지독한 고독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갈망했던 존재.
어렴풋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런가. 어쩌면……. 결국 유중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유중혁은 말했다.
“김독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
“사옥으로 들어가는 거라면, 알겠다.”
자신만큼이나 김독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들이 바글거리는 곳이다. 허튼 짓이라곤 하려고 기를 써도 절대로 못 할 것이다. 그런데, 알겠다는 대답에도 김독자의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되레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유중혁이 의아해졌다.
“문제가 남았나?”
“아니…….”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떨구더니 이내 번쩍 몸을 일으킨다. 알겠으면 좀 도와줘.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이었다. 안 그래도 책이 많아서 어떻게 옮기나 했는데. 도와줄 거지? 그렇게 여상히 물어오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석연찮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으나…… 캐묻는다고 말해줄 놈이 아니다. 그래서 유중혁은 묵묵히 김독자의 말을 따라 이삿짐을 싸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것도 옮겨줘, 아, 저것도, 하며 부려먹는 꼴을 보아하니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나 의심될 정도였다. 그렇다 해도 저 흐느적거리는 놈이 이삿짐을 싸다가 골병이라도 들면 곤란한 것은 자신이었으므로 도와주게 되었겠지만.
짐 싸기는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1년 가까이 살았는데 의외로 짐이 별로 없군, 말하자 김독자가 말갛게 웃었다. 원래도 별로 없이 살았어서. 유중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래, 그런 녀석이었지. 고작 고등학생 나이에 한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녀석. 박스테이프로 봉한 이삿짐을 보던 김독자가 허리에 손을 짚었다.
“내일 아침에 한수영이 차 큰 거 가지고 온대.”
“다행이군.”
“차에 싣는 것도 도와줄 거지?”
씩 웃는 얄미운 얼굴을 보자니 싫은데, 라고 답하고 싶은 없던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유중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제게 향한 시선을 느낀 유중혁이 돌아보자 김독자는 오랜만에 그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은 채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굴리던 김독자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유중혁.”
“왜.”
“혼자 살면 외롭지 않겠어?”
“헛소리를 다 하는군.”
혼자 살면 외롭지 않겠느냐고? 고작 그런 것에 무너질 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세상에서 혼자인 것에 가장 익숙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그일 것이다. 이제 와서 왜 그런 걸 묻지?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김독자가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왔다. 흰 얼굴이 가까워졌다. 유중혁. 김독자가 나직이 제 이름을 불렀다.
“외롭지 않은 거랑, 외로워도 괜찮은 거랑은 다르잖아.”
“…….”
이 녀석은, 이렇게, 종종 비수 같은 말을 꽂는다.
잠시 말문이 막힌 채 바라보자 김독자가 제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
“그러니까 선보던 거, 관두지 말고 계속해.”
“……뭐?”
생각도 못한 말에 유중혁은 일순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여느 때처럼 씩 웃으며 유중혁의 등을 밀어냈다. 이제 나가. 나 잘 거야. 어안이 벙벙한 채 등을 떠밀려 나오자 뒤로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유중혁은 황당한 얼굴로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뭐지? 방금, 무슨 소리를? 김독자, 부르며 다시 문고리를 돌리려는 찰나 문 너머로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혁아.”
“…….”
“고마워.”
유중혁은 허공에서 손을 멈춘 채 그대로 굳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김독자. 고맙다니? 무엇이? 짐 싸는 걸 도와줘서 고맙다고? 단순히 그런 말이 아님은 두 사람 모두 잘 알았다. 천천히, 허공을 헤매던 손이 떨어졌다. 닫힌 문 위로 흰 얼굴이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김독자. 지금 너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지.
그제야 유중혁은 제 머릿속을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던 예감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김독자 같은 녀석을 언제까지나 제 곁에 묶어둘 수 있을 리 없었다. 처음 나타났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져 버릴 녀석이라고 줄곧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아니,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그리 멀리 가는 것도 아니다. 고작 걸어서 15분 거리로 멀어지는 것뿐. 하지만 그런 생각을 배신하듯 등 뒤로 밀려드는 공허함에 유중혁은 당황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천천히 한 걸음씩, 그보다 더 멀리 갈 김독자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선했다. 그럼에도, 결코 막을 수 없겠지만.
유중혁이 혼자 살게 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창틀 너머로 이름 모를 새가 울음소리를 냈다. 어느새 봄 날씨가 완연한 4월이었다(세계가 수복된 후 각자 달랐던 시간을 수습해 새로 지정한 날짜였다). 그의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계속해서 흘러갔다. 늘 그랬듯 대체로 규칙적인 시간에 눈을 뜬다. 가볍게 집 앞의 산책로를 달리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다. 보통 이 시간이면 김독자는 자고 있으므로 자신이 먹을 몫만 준비하면 되었다. 아,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군. 설거지를 한 뒤 집안 정리를 좀 하고 뉴스 기사를 뒤적인다.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기도 한다. 김독자가 재밌다며 읽어보라고 추천해 준 책을 읽거나…… 아니, 이것도 이제 없는 일이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가므로 점심은 뭘 먹을까, 고민하고 있으면 김독자가 일어난다. 문을 열고 나와 반쯤 감긴 눈으로 잘 잤냐, 인사를 하고…….
젠장. 유중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신경질적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도대체가 그 허여멀건한 자식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온갖 순간마다 떠오른단 말인가. 물론 시나리오를 헤쳐나가는 와중에도 유중혁의 머릿속은 김독자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날이 많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앞으로 어떻게 할지 구상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유중혁은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김독자가 그렇게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줄 알았더라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기나긴 삶을 살며 유중혁은 자신이 무언가를 상실하는 데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실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애초에 상실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지 않으려 부득이 노력해왔다. 그런 삶을 사는 그에게 포기하지 말라고, 이번 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던 녀석이었다. 나를 동료로 삼아. 중혁아, 우리는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그런 말을 하며. 그렇게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로서 존재하던 녀석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유중혁은 어디서부터 일을 바로잡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아직 견딜 수 있다, 외롭지 않다며 자신을 세뇌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유중혁은 지금 제 안에서 확실한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독자, 그 녀석…… 그래서 내게 계속 선보러 다니라는 소릴 한 건가. 가능성 있는 일이다. 녀석이라면, 자신이 이렇게 공허해 할 것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독자. 네놈이 내놓은 대책은 틀렸다. 내가 왜 그 짓을 그만뒀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드르륵거리는 것을 붙잡아 화면을 켰다. 활자를 읽어 내려간 유중혁이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급히 자판을 두드리고는 겉옷 하나만 걸친 채 바람같이 문을 나섰다. 급하게 나간 탓에 그만 깜빡 잊혀진 휴대폰의 액정이 켜진 채 문자메시지 창을 띄워놓고 있었다.
야 너 혹시 예전에 니가 해준 야식 기억나냐? 무슨 토스트? 같은 거였는데 쨈 바르고... 그거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서...
이상한 뜻으로 말하는 거 아니니까 진짜 레시피만 알려주라
가겠다 미친놈아 오긴 뭘 와? 야 왜 답장이 없어? 유중혁;
그래서 유중혁은, 정말이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한 김독자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진짜 왔냐…….”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녀석을 보며 유중혁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옥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랜만에 오는 곳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과 종종 이야기를 나누려 들락거리곤 하는 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김독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비운 상태거나, 반대로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밖으로 일절 고개를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한 달간 유중혁은 김독자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익숙한 걸음으로 주방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제법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내부는 조용했다.
“다른 사람들은?”
“희원 씨랑 현성 씨는 나갔어. 출장. 애들은 자고. 한수영이랑 상아 씨는…… 모르겠는데. 자나?”
어쨌든, 딱히 얼굴을 마주칠 일은 없다는 소리다. 흘긋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 유중혁은 들고 온 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식빵과 크림치즈, 블루베리 잼이 봉투 안에서 굴러 나왔다. 내용물을 눈으로 훑은 김독자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별거 안 들어가네.”
유중혁은 눈썹만 까딱이고는 식빵 봉투를 뜯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토스트기에 빵을 구웠다. 김독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식탁에 앉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에 크림치즈를 펴바르고 블루베리 잼까지 바른 뒤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김독자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별로 안 어렵네. 이제 혼자 해먹을 수 있겠다.”
그 말에 왜인지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하, 속으로 숨을 뱉은 유중혁은 김독자의 앞에 토스트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잘 먹을게.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한 김독자가 토스트를 집어 들며 물었다.
“너는 안 먹어?”
“밤에는 안 먹는다.”
제가 밤에는 웬만해선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 놈이 그리 물어보는 것이 또 고까웠다. 아, 그랬지 참, 하고 덧붙이는 꼴을 보니 더더욱. 무어라 심술궂은 말을 얹으려다 부질없는 것 같아 관뒀다. 유중혁은 묵묵히 맞은편에 앉아 그가 먹는 양을 지켜보았다. 원체 입이 짧은 놈이라 토스트 하나 정도 먹으면 많이 먹는 거겠거니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김독자는 음식을 크게 가리지는 않지만-토마토가 들어간 요리를 제외하면 주는 메뉴대로 넙죽넙죽 잘 먹었다-양이 적었다. 그러니 그렇게 먹였는데도 살이 안 찐 거겠지. 이제 보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말랐나. 어이가 없군. 어떻게 된 몸뚱이가 늘지는 않고 줄기만 한단 말인지.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접시를 비운 김독자가 픽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전보다 말랐군.”
생각하고 있던 게 입으로 그대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김독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냥 웃기만 했다. 일어서서 접시를 싱크대에 담가두더니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한다.
“그냥…… 네가 요리 하나는 진짜 잘하더라.”
당연한 소릴 하는군. 하지만 김독자는 당연한 소리를 새롭게 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새삼스럽게 그 말에 왜 기분이 좋은지, 유중혁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원래 토마토 빼곤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었는데…….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자식아.”
뭐라고. 곧바로 저를 탓하는 말에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너 때문에 입맛 버렸다고, 유중혁. 하여간 요리 좀 작작 잘하지……. 이건 뭐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김독자가 애매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곧 슬그머니 피하는 시선. 아, 이건 여전하군. 금세 유중혁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김독자가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제 갈 거냐?”
“…….”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볼 일은 다 봤으니 가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김독자가 얼른 말을 이었다.
“별일 없으면…… 차나 한잔 하고 가든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냉큼 말하는 것이 영 미심쩍었다. 무슨 속셈이지. 유중혁은 곧바로 의심부터 시작하며 김독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피하는군. 어쩔 수 없나, 언제까지 저러는지 보기 위해서라도 남아 있어야겠다.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래서, 유중혁은 김독자 컴퍼니 사옥에 위치한 김독자의 방을 처음으로 구경하게 되었다. 내부는 자신과 함께 살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책장에 책이 늘어나 있다는 것이 조금 달라진 점일까. 김독자는 침대에, 유중혁은 책상 의자에 앉았다. 머그컵에 우러난 차의 향을 맡으며 유중혁은 짧게 생각했다. 제법 나쁘지 않은데. 유상아의 취향인가. 김독자는 참으로 한결같게도 핫초코를 들고 있었다. 밤에 커피를 마시면 제대로 못 자는 놈이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이해하지만.
그리고, 놀랍게도 김독자는 한참이나 조용했다. 유중혁의 잔이 거의 비워질 때까지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유중혁도 딱히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었으므로 그저 조용한 침묵만이 방을 감돌았다. 유중혁도, 김독자도 침묵을 불편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이윽고 김독자의 잔마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침대 옆 협탁에 잔을 내려놓은 김독자가 하아, 한숨 같은 호흡을 내뱉더니 뒤로 풀썩 드러누웠다. 손님을 불러놓고 예의가 없군. 그런 소리를 굳이 하지는 않았다. 유중혁은 그저 김독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그리고 고개 너머의 창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누운 채로 유중혁을 향해 손짓했다.
“유중혁, 이리 와봐.”
“……?”
손을 들어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린다. 무슨 수작이지. 하지만 유중혁은 순순히 그를 따라 곁에 앉았다. 그러자 김독자가 누워봐, 말하며 유중혁의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등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으며 조금 출렁였다. 김독자가 손을 들어 올렸다. 흰 손가락이 널따란 창 너머의 어둔 하늘을 가리켰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유중혁.”
“…….”
“내 별자리…… 아직도 보여?”
유중혁은 묵묵히 김독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탁 트인 창밖으로 펼쳐진 새카만 밤하늘, 그곳에서 여전히 처연하도록 눈부신 빛을 내는 별자리.
유중혁은 눈을 흐렸다. 보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김독자, 구원의 마왕의 별이 빛나는 자리. 유중혁은 눈을 감고도 그것이 하늘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다. 수십, 수백 번을 헤아린 별이다. 칼을 휘둘러 천공에 박제된 별들을 일제히 땅으로 떨어뜨리면서도 부디 빛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던 유일한 별자리(星座)이기도 했다. 그놈은, 성좌가 아니다. 그냥 인간일 뿐이야. 그렇게 신념을 꺾으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별.
“보인다.”
“그래?”
하하, 힘없는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김독자가 스르르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여전히 김독자의 침대에 누운 채 그의 마른 등과 흰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독자가 손을 들어 어깨너머로 향하고는 자신의 등을 더듬었다.
“요즘…… 날갯죽지가 계속 간지러워.”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유중혁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김독자의 흰 손이 닿지 않는, 까만 날개가 돋아나던 자리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옷 위로도 도드라진 견갑골을 가볍게 쓸어내리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유중혁은 손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픈가?”
“……아니. 아프진 않아.”
“환상통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그런 건 아니야.”
잠시 말이 없던 김독자가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조금 더 돌려 유중혁의 어깨 옆에 손을 짚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가만 바라보고 있자 단정한 얼굴이 조금 기울어지며 입술이 열렸다.
“유중혁.”
“…….”
“너는 어떻게 살고 싶었어?”
시나리오가 전부 끝나고, 원하는 결말을 보고 나면……. 그 얼굴이 어딘가 절박해 보여 유중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신중히 답했다.
“기억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사실을. 김독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고 빛나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흐려졌다.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이 힘없이 무너졌다. 그와 함께 김독자의 가벼운 몸이 유중혁 쪽으로 기울어졌다. 풀썩, 유중혁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김독자가 숨을 고르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유중혁. 중혁아. 힘겹게 부르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손을 내려 그의 등에 얹었다. 서늘한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유중혁, 내가 ‘멸살법’을 읽을 때…… 제일 좋아했던 부분이 어딘지 알아?”
나는…… 네가 웃는 장면이 제일 좋았다. 동료들과 함께 어려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후련하게 웃는 장면도,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서서 미소를 짓는 장면도…… 다 좋았어. 네가 그 잔인한 세계 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게 기뻤거든. 네가 외롭지 않기를 바랐어. 모든 것이 끝났을 때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김독자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진짜 그럴 수 있는 세계가 됐잖아. 유중혁,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행복해질 수 있는 놈이잖아. 할 수 있잖아, 이제. 뭐든…….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그날,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던 날, 김독자에게 직접 묻지 않은 질문의 답을 다시 한번 들었다. 너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그런 포괄적인 질문에 대한 답. 유중혁은 김독자가 바라는 것이 자신의 행복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믿을 수 없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유중혁. 김독자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가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조금 붉었다. 낯선 얼굴.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야?”
원망 비슷한 무언가와, 순수한 의문, 괴로움,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힌 시선이었다. 유중혁은 그 흰 얼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시간이 잡아 늘여진 것처럼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김독자, 어째서 나를 그런 시선으로 보는 거지.
유중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 않은 게 아니다.”
“……?”
“할 수 없었던 거지.”
김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서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 말대로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원상복귀된 세계이니, 어쩌면 나도 누군가와 평생을 맹세하고 남은 삶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유중혁은 가만히 ‘유중혁’이라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외로운 인간이었다. 그 말은, 누구보다도 외로움에 취약하다는 말과 동치일 지도 모른다. 수많은 생애 속에서 그는 저를 이해하며 제 곁에 있어 줄 누군가를 원해 왔다. 그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선을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러한 무의식으로부터 나온 행동이었을지 모른다. 사실 유중혁은 제가 왜 선을 보러 다니는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그답지 않게도. 아마도 시작은, ‘중혁 씨는 만나는 사람 없어요?’ 그런 말이었을 테지만. 그즈음 이설화에게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 정희원과 이현성도 결혼을 하기로 했다. 그런 이들을 보고 있자니, 아, 이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유중혁은 그것이 일종의 구세대적인 고정관념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래전 누군가의 손에 의해 쓰여진 존재임을 알았다. 때문에, 제게 부여된 ‘설정값’들 중 가정에 대한 고전적인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고리타분한 생각. 그것에 휘둘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못처럼 박힌 ‘설정값’은 쉬이 빠지지 않았다.
그것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굳이 다른 누군가와 함께 가정을 꾸려 생애를 마무리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이대로…… 이 희멀건한 녀석과 티격태격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종종 아는 얼굴들을 만나고, 그간 누리지 못한 취미생활을 즐기고, 조금은 취향이 맞지 않더라도 함께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상반된 감상을 나누며, 같은 메뉴로 식사를 함께하고, 한 지붕 아래서 잠을 청하며. 굳이 결혼이나 사랑 같은 것으로 묶어두지 않아도, 세간이 말하는 흔한 형태의 가정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삶이 어쩌면 내게는 제법 괜찮은 엔딩이 아닐까. 이미 남들과는 달리 수없이 긴 세월을 살아왔는데 행복의 형태가 일반적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간신히 이해한 참이었는데.
먼저 그의 곁을 떠난 건 김독자였다. 마치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순식간에.
“김독자. 너는 내게 한 번도 묻지 않았지. 왜 선을 보러 나가느냐고. 누군가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거냐고.”
“…….”
말문이 막힌 듯 김독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유중혁은 물끄러미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마치, 내가 그렇게 제 곁에서 사라져도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것이 못내 분하고, 억울하고, 또…… 서글펐다. 김독자, 내가 잠시나마 생각했던 미래를 너는 한 번도 그려본 적 없는 건가. 서로를 이해하는 친우로서, 때로는 다시없을 악우로서, 그저 나와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건가. 동상이몽이 따로 없었다. 한 지붕 아래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음을 유중혁은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 식으로, 생과 사를 함께 한 동료로서, 너를 내 곁에 묶어두고 싶었던 건…… 나뿐이었던 건가.
유중혁은 생각했다. 정희원과 이현성의 결혼식 날, 결혼 생각이 없다는 김독자의 말에 내심 들떴던 제 모습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거라면.
유중혁은 몸을 일으켰다. 밀려난 김독자가 황망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나 많이 잃어버리고도 도대체 뭘 기대했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에 관한 한, 유중혁은 이 세계 최고의 권위자일 터였다. 자조적인 웃음이 마른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였고, 앞으로도 유일한 이해자일, 세상에 둘은 없을 동료마저…… 내가 먼저 손을 놓아야 한다니, 이건…… 잔인하지 않은가.
“유중혁,”
“자라. 시간이 늦었다.”
유중혁은 돌아보지 않은 채 겉옷을 들고 방을 빠져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건물을 벗어났다. 시작이 어려울 뿐이다. 몇 번이나 겪어온 일이 아닌가. 늘 그랬듯, 그는 괜찮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걸어 나갈 터였다. 하지만, 벌써 그 얄밉도록 하얀 얼굴이 보고 싶어지는 건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