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
트위터 썰로 시작해서 책으로 엮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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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다른 설정으로 좀 더 다른 관계로 만나는 세계선을 골랐더라면 좋았을걸
좀 더 다른 성격으로 좀 더 다른 가치관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렇게 바란대도 소용 없으니까
유중혁과 김독자가 함께 산 지도 반년이 넘었다. 반년이라, 김독자는 자신이 다른 이와 반년이나 함께 살았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랐다.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사실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도. 십 년 이상 혼자서 살아왔는데 고작 6개월 만에 이렇게 익숙해질 수가 있는 건가.
물론 그들의 동거는 담백한 면이 있었다. 동거보다는 셰어하우스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다. 함께 살면서도 데면데면한 거리를 유지했던 3개월 전과 비교하면 달라진 점들이 많았다. 날씨는 눈에 띄게 추워졌고, 해는 점점 짧아졌다. 멋대로 유중혁의 옷장을 뒤져 도톰한 옷을 꺼내 입고 집안을 활보하는 일이 잦아졌다(왜 굳이 내 옷을 입는 거지? 네 옷이 커서 더 따뜻한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그럼 처음부터 네 녀석 사이즈보다 큰 옷을 사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사소한 실랑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넘어가도록 하자). 오랜만에 읽고 싶어져 찾던 책이 김독자의 책장이 아니라 유중혁의 책상에서 발견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야, 왜 말도 없이 꺼내 갔어? 그렇게 물어볼 때 돌아오는 유중혁의 싸늘한 시선에 김독자는 답할 말이 궁했다). 그렇게 유중혁과의 물리적 거리는 놀랄 정도로 줄어들었다. 이제는 잠시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저를 향해 되돌아오는 낮은 목소리가 없으면 몹시도 허전할 것만 같았다.
유중혁은 달에 한 번꼴로 잘생긴 얼굴을 더욱 잘생기게 만들어서는 밖으로 나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또 선을 보러 갔겠거니,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것이 두 번째 만남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유중혁은 그런 식으로 집을 비울 때도 김독자가 먹을 수 있도록 늘 찬거리며 밥 등을 준비해 두고 나갔다. 김독자는 그것이 기꺼우면서도 조금 우스웠다. 나 어린애 아니다, 유중혁. 그럴 때면 유중혁은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밥도 제대로 안 챙겨 먹으면 어린애란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다.
그리고…… 김독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수영이 봤으면 미쳤냐?, 정희원이 봤으면 드디어 정신 차린 거예요? 같은 소리를 했을 일이었다. 김독자 자신도 어쩌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건강 검진 결과가 너무 처참해서 시작한 것일까.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겠으나. 헉, 헉. 김독자는 이길영보다도 못한 달리기 실력을 여실히 발휘하며 멈춰 서서 숨을 들이켰다. 목에 두르고 있던 스포츠 타월로 땀을 닦으며 무릎을 짚자 저만치 앞서갔던 이길영이 뒷걸음질로 돌아왔다.
“독자 형, 많이 힘들어요?”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렇게 답하자 옆에서 보폭을 맞추고 있던 신유승도 허리를 기울여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아저씨,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중학생들한테 걱정 받아야 할 정도의 체력이었다니.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조금 머쓱하다. 김독자는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몸을 일으켰다. 잘 꾸며진 조깅 코스는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처음에는 그것이 꺼려져 망설였으나, 아이들이 함께 가준다는 말에 그럼 해볼까 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 막 운동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한 걸음 갈 때마다 붙잡힐 지경이었다. 허락 없이 찰칵, 셔터를 누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셔터음에 김독자의 몸이 반사적으로 굳는 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아이들이 사람들을 쫓아내길 몇 번이나 했던가.
“몰래 사진 찍지 마요, 이 시퍼런 놈아!”
그래, 지금처럼……. 아니 잠깐만. 김독자는 파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 이길영을 보며 웃음기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막아주는 건 정말 더없이 고맙지만, 저렇게 죽일 기세로 쏘아보며 주먹을 쥐고 있으면…… 이길영의 평판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인터넷상에서 ‘이길영 인성 논란’ 같은 게 돌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사진을 찍히는 게 낫지. 몸을 일으켜 이길영의 곁으로 다가간 김독자가 아이의 어깨를 짚었다.
“길영아. 괜찮아.”
“형, 이 사람이……”
“죄송하지만 사진은 찍지 말아 주세요.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인내심을 발휘해 유하게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진을 지운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리고 김독자는 다시 조깅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5일, 하루에 한 시간. 비록 조깅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운동’에 그 정도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의외로 할 만했다. 하루 치를 마친 김독자는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아저씨, 저희끼리도 갈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신유승의 눈은 반짝거렸고, 김독자 또한 누군가 함부로 이 아이들을 건드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그랬다간 아마도 국제 범죄자 수준으로 매도당할 것이다). 그래도 절대로 만약의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자신에게 일부 책임이라는 것이 있는 아이들이니까. 흐느적거리는 김독자를 보며 낄낄 웃는 이지혜의 손에 아이들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유중혁과 김독자를 제외한 옛 김독자 컴퍼니의 멤버들은 대부분이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도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 모든 것이 끝난 뒤 그에게 먼저 다가와, 자신들은 따로 살아도 괜찮다고 말한 아이들의 마음을 김독자는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이해해주려 애쓰는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종종 가슴이 무거워졌다.
김독자 컴퍼니의 사옥-다른 이들이 그렇게 불러 김독자도 물들었다-으로부터 조금 빠르게 걸어 20분. 김독자는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은 캄캄했다. 아, 이 녀석 오늘 나갔었지 참. 어두우니 어쩐지 공기마저 서늘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초겨울이니 당연한가. 그것이 싫어 얼른 불을 켜고 보일러를 올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집 공기는 딱 알맞게 데워져 있었다. 제 방에 들어서서 침대에 털썩 앉은 김독자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공적인 연락 메일 몇 개를 적당히 읽어 치우고 메신저를 확인했다. +300만큼 이어져 있는 잡담들. 같은 건물에 살면서 도대체 뭘 이렇게 메신저로 말을 많이 하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런 잡담들을 통해 모두의 이야기를 듣는 건 김독자에게 있어 웹소설을 읽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이야기’를 먹는 성좌의 버릇은 고쳐지질 않는 것일까.
이제 보니 문자도 한 통 와있는 것이 보였다. 이설화였다.
다음 주에 위내시경 받기로 한 거 잊지 마세요.
아, 맞다, 그랬지 참. 김독자는 알겠습니다, 답장을 하고선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얼마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났다. 건강검진을 받고 돌아온 날,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중혁의 시선. 이설화의 병원에서 진료받는 건가? 응. 너도 그러잖아.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의아해진 김독자가 왜 그래, 하고 물으려는 순간 유중혁의 입이 열렸다.
“나는 병원을 옮겼다.”
“응? 왜?”
유중혁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가 떠졌다.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유중혁은 더 말하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다시 수저를 든 김독자는 밥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아, 설화 씨한테 만나는 사람이 생겨서…… 그래서 피하는 건가. 어렴풋하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정리했다. 싱크대 앞에 선 유중혁에게 그릇을 넘겨주자 받아들고선 잠시 김독자를 바라본다. 왜? 그렇게 묻자 유중혁이 말했다.
“이설화는 잘 지내나?”
“…….”
유중혁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무심하기도, 고독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 연을 끊어내는 데 도가 튼 녀석이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유중혁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지난 회차에 연인이었던 이설화를 그렇게 끊어내며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독자의 표정 변화를 눈치챘는지 유중혁이 얼굴을 팍 구겼다.
“김독자.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나.”
“……응?”
멍청히 되묻자 유중혁이 코웃음을 쳤다.
“알만하군. 네 녀석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 멋대로 넘겨짚지 마라.”
“아니라고?”
“아니다.”
단호한 대답이었다. 김독자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솨아아, 수도꼭지에서 물이 샜다.
“나는 이설화를 그런 감정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은.”
“……뭔 소리야?”
그릇을 달그락거리다가 물을 뚝 끊은 유중혁이 김독자를 돌아봤다.
“설명해도 네가 이해할지 모르겠군.”
“야, 이 자식아, 나도 알거든.”
전혀 믿지 않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 유중혁이 다시 수도를 틀었다. 나는 이설화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게 내 곁이길 바란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다. 물소리를 배경으로 들려오던 유중혁의 낮은 목소리가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덜 마른 머리칼에서 흐른 물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려 흰 티셔츠를 적셨다. 아. 김독자는 무언가 깨달았다. 그렇구나. 그래서…….
김독자는 갑자기 유중혁의 마음을 2천 퍼센트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어 절로 미소를 지었다. 유중혁이 이설화를 보는 시선은, 내가 유중혁을 보는 시선과 비슷한 거 아닌가? 김독자는 유중혁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그게 자신의 곁이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0년 넘게 ‘멸살법’을 읽던 시절에도, 고된 시나리오를 헤치는 와중에도, 유중혁의 행복은 언제나 김독자의 바람이었으나…… 그의 행복의 풍경에 자신이 포함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그렇게 오랜 세월 지켜보고 함께한 유중혁이 저를 떠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는 건, 어쩐지 조금 가슴이 저리는 일이 아닌가. 뭐라고 정확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유중혁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그래, 이제 알겠다. 유중혁 이 자식아, 책을 읽는다는 건 간접경험이거든. 경험 없다고 무시하지 마라. 픽 웃은 김독자는 침대에 털썩 몸을 묻었다.
유중혁의 행복이라.
김독자는 유중혁의 결혼식장에 하객으로 참석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흰옷을 싫어하는 녀석이니 검은색 턱시도를 입겠지. 신부는 유중혁의 취향대로 희고 예쁜 여자라면, 눈부시게 흰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유중혁과 마주 보고 선 이름도 얼굴도 모를 여자를 상상한 김독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쿡쿡 쑤셨다. 체한 것처럼 속이 묵직해졌다. 뭔가 잘못 먹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한 번 상상을 시작한 머리는 굴러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신부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유중혁의 얼굴(캐붕 아냐? 하지만, 분명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신부의 면사포를 들치고, 고개를 기울여 입을…….
시발. 김독자는 충동적으로 벌떡 일어나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얇은 티셔츠 아래 여린 살을 에듯 지나가는 초겨울 칼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까마득한 아래를 바라보자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직 만나는 사람도 없는 놈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지만 만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러면 내가 상상한 일이 일어나는 건가? 아, 시발. 갑자기 기분이 몹시 좆같아졌다. 추위에 몸을 떨며 난간을 짚고 여전히 조금 젖어 있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아득한 지상이 어쩐지 몹시 가까웠다. 날갯죽지가 간지러웠다. 예전이라면, 훌쩍 날아올라 가볍게 착지했을 땅이다. 근지러운 감각에 두 팔로 몸을 감쌌다. 하염없이 홀린 듯 반짝이는 가로등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제 허리를 확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김독자!”
미처 저항할 틈도 없이 끌려간 김독자는 등과 뒷머리에 닿아오는 단단한 몸에 바로 유중혁임을 알아챘다. 한 팔로 제 허리를 휘어 감고 다른 손으로는 팔목을 꽉 붙잡는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자 몹시도 당황한 얼굴을 한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그만큼 놀란 얼굴의 유중혁은 김독자로서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기에 조금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껌뻑거리며 쳐다보고 있자 유중혁이 으득, 이를 갈며 말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뭐 하냐니?”
“그렇게 몸을 밖으로 기울이고, 위험하게 무슨……”
하지만 김독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어리둥절한 표정뿐임을 곧 알아챈 유중혁이 하, 숨을 뱉었다. 팔목을 붙잡았던 손을 놓아주고선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다. 김독자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이 녀석, 설마 내가 뛰어내리기라도 할 줄 알았나.
“유중혁, 무슨 생각 하는지 아는데……”
“아는데?”
허리를 감은 팔이 풀리기는커녕 더욱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김독자가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 애썼다.
“알잖아, 유중혁, 나 그런 짓 안 해.”
“…….”
“……몰래 사라질 수는 있어도?”
“개소리하지 마라.”
순식간에 서슬 퍼렇게 변하는 얼굴에 김독자는 쯧, 혀를 찼다. 농담도 못 하겠네.
“농담이야.”
“네놈이 하는 농담에는 뼈가 있다.”
틀린 말은 아니네. 조금 소리 내어 웃은 김독자는 다시 유중혁을 밀어내려 손에 힘을 줬다. 하지만 밀어도 밀어도 밀려나지 않는 단단한 어깨 탓에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꼴이 되고 말았다.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포옥 쉬자 유중혁이 그를 뚫어질 듯 쳐다봤다.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목덜미에 간지러운 감각이 느껴졌다. 뭐지? 뺨을 간지럽히는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칼에 김독자는 눈을 껌뻑였다. 유중혁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중얼거리듯 말을 뱉었다.
“내 눈앞에서 사라질 생각 하지 마라.”
그 목소리에 묻은 회한은 아주 오래되고, 또 깊은 것이었다. 김독자는 잠시 숨을 멈췄다. 이 녀석은 어쩌면, 지난 시간 동안 나를 잃었던 여러 순간들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묻은 채로도 그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유중혁이 퍼뜩 얼굴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췄다.
“웃음이 나오나?”
일견 절박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중혁의 눈을 보고도 김독자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유중혁, 너 이러니까 진짜 분리불안이라도 겪는 것 같잖냐.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여기서 웃으면 이 녀석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질 것을 아는 데도 그칠 수가 없었다. 이유 같은 건 모르겠다. 김독자는 반쯤 충동적으로 손을 들어 유중혁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다시 덮였다.
“유중혁.”
“…….”
“이제 정말로 어디 안 가. 나한테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유중혁, 나는 너의 행복을 위해 수차례 너를 떠났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불가피한 상황은 더는 없을 것이다. 이곳은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니까. 나는 네 행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볼 것이다. 그게 나의 행복이니까. 그것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확실했다. 유중혁. 네 덕분에 나는 오랫동안 행복했으니까, 이젠 네가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그것이 ‘독자’의 방식이었다. 행복을 향해 걸어 나가는 주인공의 뒷모습을 향해 박수를 쳐주는 것.
그렇게 생각하며, 김독자는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의문을 애써 무시했다. 유중혁. 넌 나보고 사라지지 말라고 하면서, 왜 내게서 사라지려고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을 만나 내 곁을 떠날 거잖아? 그런 의문은, 가질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이기적인 의문 같은 거, 품는 것조차 상상해본 적 없어. 나는 독자니까, 그게 당연하다.
바람이 서늘했다. 하지만 유중혁의 품은 몹시도 따뜻했다. 그것이 어쩐지 못내 서러워졌다.
✳
겨울의 끝 무렵이었다. 김독자는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일어나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두어 달 전 맞춤으로 제작한 검은색 수트는 그때와 별반 차이 없이 꼭 맞았다. 운동을 한다고 체격이 좋아질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그대로일 일인가. 헛웃음을 흘리며 옷자락을 가볍게 털어내곤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푸른색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이길영과 신유승이 골라준 것이었다. 사락, 손가락 사이를 매끄럽게 스치는 천의 감촉을 느끼며 셔츠 깃 밑으로 넥타이를 집어넣어 둘렀다. 그러니까, 넥타이를 매는 방법이. 워낙 오랜만이라 손이 허공을 방황했다. 면접을 보러 다닐 때야 뻔질나게 매던 넥타이지만, 게임회사에 입사한 뒤로는 거의 맬 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찌저찌 매듭을 지어 고정하고 나니 모양새는 잡혔지만 영 허술해 보였다. 마음에 안 드는데.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다 했나.
“어, 다 했어. 잠시만.”
결국 넥타이 매듭을 당겨 풀어내고 다시 매보려고 하는 찰나 유중혁이 문을 밀며 들어왔다. 내 방인데, 이제 아주 맘대로 들어오는구만. 하지만 김독자는 불만을 토로할 기회를 잃었다. 유중혁 이 자식…… 뭘 이렇게 빼입었어? 아니, 아니다. 이제 보니 그냥 평범한 정장 차림이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더니 그 말이 꼭 들어맞는 꼴이었다. 제기랄, 얼굴이 개연성인 것인가. 김독자는 어이없다는 눈길로 자신과 비슷한 검은색 수트를 입은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크게 손을 댄 것 같지 않은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에도 유중혁은 지나치게 잘생긴 상태였다.
“너 너무 눈에 띄는 거 아니냐.”
코웃음을 치더니 몇 발짝 더 걸어 김독자의 앞에 선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하긴 뭐 얼굴을 못생기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거울을 보려 유중혁의 어깨를 밀어냈다. 비켜봐, 거울 안 보여. 하지만 유중혁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야, 이거 매야 한다고…… 어.”
김독자의 손에서 손쉽게 넥타이를 빼앗아간 유중혁이 그의 목 뒤로 손을 넘겼다. 흰 셔츠 깃 아래로 파고드는 넥타이가 스르륵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완벽한 모양으로 매듭을 매어 준 유중혁이 조금 접힌 셔츠 깃을 정리해주었다. 그 손가락 끝으로부터 전해지는 체온이, 직접 닿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뜨끈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몸에 열이 많은 놈이다. 겨울에 난로처럼 써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이 녀석 어깨에 등 기대고 앉아서 담요 두르고 귤 까먹었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는 무슨 짓이냐고 눈을 부라리더니 생각보다 쉽게 체념하고 소파로 제 몸을 내어준 유중혁이었다. 네가 웬일이냐, 그렇게 물어보고도 싶었으나 물어봤다간 당장이라도 몸을 빼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싱글싱글 웃는 김독자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꾹 꼬집어대긴 했지만. 부드러운 담요, 알맞게 식은 핫초코, 폭신한 소파, 스마트폰, 그리고 유중혁의 체온. 겨울은 생각보다 그리 춥지 않았다.
유중혁이 몸을 조금 물렸다. 시야에 들어온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타인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정리된 옷매무새. 김독자는 눈을 깜빡이고는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넥타이 매는 법은 어디서 배웠냐?”
순순히 고맙다고 말하기엔 어쩐지 민망해 그렇게 말했다. 눈썹을 들썩인 유중혁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보니까 바로 할 줄 알겠던데.”
“…….”
이래서 주인공이란 녀석은. 아니, 뭐…… 이제는 주인공이 아니지만. 김독자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늦겠다. 얼른 가자. 네 녀석이 늑장을 부려서 그렇다. 아니거든. 티격대며 차에 몸을 싣고 식장으로 향했다. 운전은 평소와 같이 유중혁의 몫이었다.
오늘은 정희원과 이현성의 결혼식날이다.
그리 넓은 식장은 아니었다. 매스컴을 일절 거부한, 지인들만이 하객으로 참석하는 작은 결혼식이었다. 가장 먼저 자신에게 주례를 서달라고 부탁했던 정희원과 이현성의 얼굴을 떠올리며 김독자는 조금 웃었다. 사회라면 모를까, 주례는 모양새가 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들은 상관없다고 답했지만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제가 주례를 서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사회를 보겠습니다.
주례를 거부한 이유는 속으로만 삼켰다. 결혼, 사랑하는 이와의 약속, 영원히 곁을 지키겠다는 맹세, 생과 사를 함께 하겠다는 다짐. 그런 것들을 공언하는 자리에, 그런 것들을 아직 완전히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한 자신이 서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결혼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이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험이 없는 자신보다야 나을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주례가 공필두라는 것이 조금 우습다면 우습기도 했으나…… 다들 만족하고 있는 것 같으니 상관없으려나.
미끄러지듯 주차된 차에서 내려 신랑 대기실로 들어서자 흰 턱시도를 입은 이현성이 몹시도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독자 씨, 중혁 씨!”
김독자는 씩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잘 어울리십니다. 이현성이 하하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려다가 손을 내렸다.
“아, 세팅한 거라고 만지지 말라고 하셔서…… 영 신경 쓰이네요.”
웃음으로 답한 김독자가 이현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결혼 축하합니다.”
이현성이 감동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선량한 눈가에 눈물이 글썽해 보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닌가? 조금 당황한 김독자는 그를 말렸다.
“울지 마십시오. 이렇게 좋은 날에 울긴 왜 웁니까.”
“그, 그치만, 독자 씨한테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어쩐지 기분이…….”
시간을 들여 간신히 복받친 감정을 누른 이현성에게 유중혁이 가까이 걸어왔다. 그대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결혼 축하한다. 이현성.”
그 곁에 선 김독자는 문득 유중혁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같이 무심하고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입꼬리가 조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린 건 자신뿐일까, 어쩌면 이현성도 알아줄까. 잠시 입을 벌리고 있다가 힘있게 그의 손을 맞잡은 이현성이 행복한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고맙습니다.
“중혁 씨, 저는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가슴이 미어진 것은 어쩌면 나뿐일까.
목을 가다듬은 김독자는 문으로 향하며 다시 인사를 건넸다. 저는 사회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신부 대기실은 애들이 못 들어오게 하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현성을 바라보고 문을 나섰다. 사회 준비 때문에 일찍 왔더니 아직 하객들은 절반 정도밖에 오지 않은 상태였다. 김독자 컴퍼니 사람들이야 보아하니 다 함께 나서서 온 것 같지만. 한수영이나 유상아, 이지혜, 이설화는 여전히 신부 대기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오랜만에 만나는 얼굴들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한반도의 화신들이나, 외국에서까지 와준 화신들-이제는 화신이 아니지만-이 김독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신랑 하객석 맨 앞자리에 앉은 유중혁은 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내부를 둘러보고 있는 듯했다. 혼자서 화보라도 찍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어딜 가든 주인공 같은 녀석.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이니까 좀 봐줘라. 마이크를 톡톡 두드려 점검하고, 장내를 안내하며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느새 식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하객 여러분께 안내드립니다. 곧 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착석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피커로부터 김독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김독자는 조금 긴장되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주먹을 꾹 쥐었다.
사실,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김독자는 다른 이의 결혼식장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는 지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시피 했고, 군대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나 회사 사람들의 경조사에도 핑계를 대가며 빠지기 일쑤였다. 그런 자리에 자신이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누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유료화 이전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던 꼬리표를 잘 알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들려오는 수군거림. 김독자, 이수경의 아들. 아, 그 사람? ……그래, 그 사람들도 좋은 날 그런 소릴 듣고 앉아있긴 싫었을 것이다. 마지못해 제게 청첩장을 건네주던 사람들도 완곡한 거절에 마음을 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사회 준비를 할 때 애를 많이 먹었다. 인터넷으로 결혼식 영상을 찾아가며 공부 아닌 공부를 했다. 괜히 사회를 맡는다고 한 것인지 후회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김독자는 정희원과 이현성을 축하해주고 싶었다. 그것만은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
장내가 어두워졌다. 단상에 불이 들어왔다. 김독자는 정신을 다잡고 마이크를 붙잡았다. 그래, 그건 다 옛날 일이다. 이제 내게는, 그런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꾹 감았다가 뜬 김독자는 미소를 지었다. 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김독자의 맑은 목소리가 마이크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결혼식은 상당히 유쾌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김독자가 밤새 머리를 짜내며 만든 사회 대본은 그냥저냥 무난한 수준이었지만-애초에 유머나 개그 같은 것은 포기했다-, 주례를 선 공필두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느라 식이 중단되질 않나, 어째서인지 신부 하객석 쪽에 앉아 있던 한명오가 이현성을 향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질 않나(다행히도 그걸 목격한 건 사회자 자리에 있던 김독자뿐인 듯했다). 유상아가 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축가를 부르는 신유승과 이길영의 모습이 얼마나 천사 같고 사랑스러웠는지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것이다(퇴장할 때 서로 팔을 꼬집는 모습도 김독자만 보았다). 김독자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허벅지를 두드려야 할 지경이었다.
파격적이게도 드레스 대신 바지를 포함한 흰색 쓰리피스 양복을 입은 정희원을 번쩍 안아 든 이현성이 퇴장하는 것으로 식이 끝났다. 단출하지만 피로연도 있다고 하니 이동해야겠지, 김독자는 대본을 갈무리하며 밖으로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피로연도 사회가 있어야겠지만, 정희원과 이현성은 피로연만큼은 정말 편한 분위기로 만들고 싶다며 김독자에게 쉬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피로연장으로 향하자 신유승과 이길영이 다가와 그의 두 팔에 매달렸다. 그들과 함께 있던 이지혜도 씩 웃으며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아저씨, 제법 하던데?”
“넌 언제까지 아저씨라고 부를래.”
“뭐 어때? 사부도 아직 사부라고 부르는데.”
사부 어디 갔지? 아! 언제 왔는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유중혁을 찾아낸 이지혜가 손을 붕붕 흔들며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맞은편에 앉고, 양옆으로 아이들이 자리했다. 이윽고 모두 자리를 잡자 나름대로 케이크 커팅까지 마친 정희원과 이현성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희는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저희의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정희원의 농담에 몇몇 하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유중혁과 김독자가 앉은 테이블은 김독자 컴퍼니 멤버들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 한수영이 키득거리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저 대사 써먹을까 말까 고민하길래 쓰라고 했더니 진짜 하네.”
유상아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테이블 사이를 돌던 신랑과 신부가 마지막으로 그들의 테이블에 도착했다. 끄트머리의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정희원이 후우, 한숨을 쉬며 어깨를 털었다.
“결혼도 힘들어서 두 번은 못 해 먹겠어요. 한 번만 해야지.”
김독자는 웃으며 정희원에게 미처 못 건넨 축하 인사를 건넸다.
“결혼 축하합니다, 희원 씨. 근데 조금 전 그거, 설마 퇴사 의지 밝힌 건 아니죠?”
정희원이 짓궂은 미소를 띄웠다.
“마음은 굴뚝같지만요. 노조위원장이 퇴사하면 다른 사원들은 어떡해요? 가뜩이나 사장님이 두문불출인데.”
하하, 김독자가 웃음을 흘리자 정희원의 곁에 서 있던 이현성이 눈을 빛냈다.
“독자 씨는 정말 결혼 생각 없으십니까?”
“네, 저는 별로.”
여러 번 들었던 질문이기에 여상히 답했다. 흠,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눈을 굴리던 정희원이 유중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중혁 씨는요? 결혼 생각 있어요?”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꽂혀 들었다. 젓가락을 움직이던 유중혁이 흘긋 정희원을 돌아보았다.
“쟤 요즘 선보러 다니잖아.”
“아니, 그건 아는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으니까 그렇지. 반년 넘지 않았어?”
눈이 존나 높은가 보지. 한수영의 놀리는 건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 유중혁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김독자는 어쩐지 조금 긴장되는 마음을 내리누르며 청각을 곤두세운 채 그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았다. 곧 잘생긴 낯짝에 뻔뻔한 표정이 어렸다. 그것을 바로 눈치챈 김독자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텄네 텄어.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얼굴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심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결혼 생각이 있든 없든 너희한테 별로 중요한 건 아닐 텐데.”
얼씨구. 유중혁의 결혼 전적-2회차의 이야기지만-을 아는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하긴, 그건 정식 결혼 같은 건 아니었지만.
“결혼 생각도 없으면서 선보러 다닌다는 소리야?”
이 자식 이거 아주 나쁜 놈 아냐? 너랑 선본 사람들 눈만 높여놓고 오는 거 아니냐고? 한수영의 말에도 유중혁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복잡한 심경으로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 정말로 결혼 생각이 없는 건가. 그러면서 선은 왜 보러 다녀? 그럼 진짜 나쁜 놈 아냐?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최애(?)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져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리 중혁이는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놈 아니다. 저래 보여도 유중혁은 몹시 성실한 녀석이다. 그럼, 그럼. 하지만 그렇다고, 유중혁이 결혼 생각이 있어서 선을 보러 다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니…… 도대체 왜 이렇게 속이 쓰린지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들도 김독자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이미 화제는 유중혁의 결혼 및 선으로 넘어가 있었다.
“중혁 씨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에요?”
“물어봐봤자 소용없어요. 저도 처음에 물어봤었는데 제대로 대답 안 해주던데요.”
유상아의 말에 이지혜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저씨랑 비슷하네. 독자 아저씨도 이상형 같은 거 생각해 본 적 없다고 막 그랬잖아. 그 뭐냐, 암흑성에서…….”
이지혜의 입에서 나온 세 글자에 모두의 얼굴 위로 옛날 기억이 스쳐 가듯 흘렀다. 삽시간에 제게 쏠린 시선에 김독자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턱을 괴고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김독자를 바라보던 정희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요즘은 얌전히 잘 살고 있으니까요. 감금할 일은 없어서 좋네.”
“흐음. 그건 됐고. 김독자 이상형은 그때 정해진 거 아니었어? 차이나드레스에 가터벨트?”
“하지 마라, 한수영.”
이를 갈며 답했으나 모두가 김독자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신나게 웃어제꼈다. 그 차림으로 최고점을 취득 당한(?) 유상아마저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젠장. 그런 건 왜 다들 기가 막히게 기억하고 있냐고. 한수영 저건 그때 심지어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잖아. 한참 낄낄대던 이지혜가 눈가를 닦아내며 눈을 빛냈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사부만 호감도 측정 안 해봤지. 사부도 차이나드레스 딱 입고 함 재줬어야 했는데.”
“죽고 싶나, 이지혜.”
서슬 퍼런 목소리에도 이지혜는 기가 죽지 않았다. 유료화가 끝났다고 아주 살맛 난 모양이었다. 그걸 아는지 유중혁도 혀를 차며 미간만 좁힐 뿐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저 녀석도 성격 많이 죽었다, 진짜.
일행들은 그 후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겼다. 김독자 컴퍼니 다음 결혼식은 역시 유중혁? 그러고 보니까 아까 부케도 중혁 씨가 받지 않았어요? 뭐가 날아오길래 반사적으로 잡은 것뿐이다. 반사적으로 잡은 거든 뭐든 어쨌든 부케 받은 거 맞잖아요?
왁자하게 오가는 목소리들을 들으며 김독자는, 문득 물속에 잠긴 마냥 귓가가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새 풀어진 유중혁의 입가가 그리는 호선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쉬이 보여주지 않는 얼굴이다. 몹시도 편안해 보이는 얼굴.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조금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유중혁의 저 얼굴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며 세계를 구하고, 제 손안에는 남은 것 하나 없이 홀로 우주를 주유하다가, 끝내는 지독한 고독 속에 침잠하며 죽어가는…… 그런 엔딩을 맞이하도록 절대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유중혁,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유중혁의 검은 수트가 갑작스레 결혼식용 턱시도처럼 보였다. 배경이 이래서 그런 걸까. 김독자는 결혼을 통해 행복을 쟁취하는 흔해빠진 이야기와는 억만 광년 정도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온갖 이야기들을 탐독한 김독자는 분명 결말에서 그런 식으로 행복에 이르는 수많은 주인공들을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그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저 녀석도…… 어딘가의 에필로그에서는 결혼 엔딩이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왜 굳이 선을 보러 다니겠어.
역시 김독자 컴퍼니의 다음 결혼식은 유중혁 차례일까……. 이 녀석 결혼식도 내가 사회를 봐줄까. 아니, 이 녀석이라면, 주례를 서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 괜찮아?
불쑥 고개를 치켜든 생각에 김독자는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4의 벽’이 말을 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깨닫고 간신히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을 파고든 생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짧게 스쳐지나간 상상의 선명한 잔상들이 눈꺼풀 위를 뒤덮었다.
김독자는 다른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영원을 맹세하는 유중혁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 순간 김독자는 제 몸을 휘감은 파괴적인 충동을 인지하고 말았다. 그것은 우습게도, 이 결혼은 무효입니다, 주례석에 서서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고. 혹은, 신부의 손을 놓고 대신 제 손을 잡아 오는 유중혁의 커다란 손이기도 했다.
아. 그래. 김독자는 생각을 정정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유중혁의 곁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한결같은 취향대로 검은 턱시도를 입은 유중혁과, 마찬가지로 제 취향에 맞춰 흰 턱시도를 입은 채 유중혁의 손을 잡고 단상에 서는 자신. 고개를 돌리면 자연스레 마주쳐오는 시선, 저를 바라보며 한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유중혁. 허리를 감아오는 팔, 뺨을 감싸는 따뜻한 손, 평생에 걸쳐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속삭이는 유중혁. 그리고…… 유중혁만큼이나 행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의 모습까지.
아. 머리가 핑 돌았다. 속이 메슥거렸다. 김독자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테이블을 짚었다.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그다지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휘청거리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덩달아서 몸을 일으켰다. 독자 씨! 왜 그래요? 가뜩이나 흰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든 꼴을 한 김독자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잠시, 화장실 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섰다. 따라오려는 사람들의 팔을 뿌리쳐내고 문을 쾅 닫았다. 다행히도 화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헉, 헉. 호흡이 가빴다. 세면대를 짚으며 숨을 몰아쉰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희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슴이 꾹 죄어왔다. 머릿속에 산재한 이미지들이 물밀듯이 흘러들었다. 입을 막아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말도 안 된다. 그럴 리가 없다. 김독자, 미쳤어? 두 손으로 세면대를 부서져라 쥔 채 눈을 꾹 감았다. 김독자. 다시 생각해 봐. 그냥, 우연히 떠오른 거겠지…… 결혼식을 보고 와서, 그러니까, 그래서…….
하지만 아니었다. 김독자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은 줄곧 유중혁을 좋아했다. 어쩌면, 검은색 활자로 적힌 그 이름 석 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이코패스 새끼, 피도 눈물도 없는 놈, 그렇게 욕을 할지언정 무엇도 진심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언제나 유중혁의 팬이었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좋아하는 감정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수도에 손을 가져다 댔다. 미온수로 얼굴을 적셨다. 머리카락까지 적신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럼에도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선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랑이란 손가락으로 막을 수 없는 파도이기에.
천천히, 김독자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쪼그려 앉은 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귓가가 뜨거웠다. 하얗게 질렸던 얼굴이 이제는 터질 듯 달아올라 있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울렸다. 나는, 유중혁. 나는…… 그러니까, 너를. 오랫동안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지 못한 가슴이, 뒤늦은 깨달음에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두근거림이 온몸을 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찢어지도록 아픈 걸까. 누가 사랑을 설렘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괴롭기만 한데…….
유중혁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그것만은 눈치 없는 김독자라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감정일 리가 없었다. 그것 또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것을 인정하는 게 이렇게 아픈 일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피가 나도록 깨문 입술의 통증보다도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이 배는 더 아릿했다. 하지만 김독자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더욱, 훨씬 더 많이 아플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걸 기억해야 해.
그리고 설령, 만에 하나, 유중혁이 저와 같은 마음이라 해도…… 그의 곁에 있을 사람은 내가 아니다. 유중혁, 네 곁에 설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똑똑하고, 좋은, 사람이어야만 한다. 그렇잖아. 유중혁이 내 곁에서 행복할 리가 없잖아. 김독자. 28세. 살인자의 아들이라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제 손이 저지른 일이었고, 더는 구원의 마왕도 무엇도 아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변변찮은 인간.
유중혁, 나는 오직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굳이 행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처음부터 내가 바란 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할 수 있어. 모른 척 묻어둘 수 있다, 이런 감정쯤은. 지금까지 늘 해왔던 일이나 다름없으니까.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서늘하게 굳은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집에 돌아가면, 유중혁이 받은 부케를 화병에 꽂아둘 것이다. 다음은 네 결혼식 차례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네며, 그 아름다운 꽃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유중혁이 행복한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일 테니까. 그러니까 괜찮았다. 나는, 네가 결혼한다고 해도 축하해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
김독자는 생각했다. ‘사 는게 ■같 다.’
‘제4의 벽’이 아직 있었다면 분명 이러한 독백을 해댔을 것이다. 시발. 김독자는 한숨을 푹푹 쉬며 연신 머리를 쓸어 올렸다. 선선한 바람이 이미 흐트러진 머리칼을 재차 쓰다듬고 지나갔다. 햇살이 좋은 어느 오후였다. 평소 같으면 여유롭게 뒹굴고 있을 시간. 어깨에 걸친 품이 큰 가디건이 자꾸 흘러내렸다. 귀찮아. 유중혁의 옷이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소매를 다시 끌어올리려는 찰나 저보다 먼저 옷을 정돈해주는 손길이 있었다.
“땅 꺼지겠군.”
김독자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덜컥, 난간에 등이 닿았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김독자의 팔을 붙잡은 유중혁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손을 놓아주었다. 이 자식, 반사 신경 하나는 무지 좋네. 순간 강한 악력에 붙잡힌 손목이 얼얼하게 아팠다. 무의식중에 다른 손으로 문지르자 유중혁이 그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붙잡았다. 뭐야, 왜 그래, 그렇게 말할 새도 없이 소매를 밀어 걷어 올린다. 흰 피부에 옅게 남은 붉은 자욱이 천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손을 놓아준 유중혁이 김독자를 빤히 바라봤다.
“뭐, 뭘 봐…….”
김독자는 얼떨결에 말을 더듬으며 슬슬 고개를 돌렸다. 시발, 진짜…… 너무 가깝다.
유중혁과의 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가까웠을까. 김독자는 지난 2주간 유중혁과 함께 지낸 1년가량을 열심히 후회했다. 분명 처음 같이 살기 시작할 땐 이렇지 않았는데. 한 3개월 차 정도까지만 해도 서로 신체적인 접촉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아, 그 날인가…… 접시 깨뜨린 날? 생각해 보면 그 이후로 유중혁은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망설이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그 전에는 일부러 피하고 있었나? 그건 또 이상한데…….
어쨌든, 문제는 그거다. 유중혁이 이상했다.
아니. 아니지. 정정하자면…… 김독자가 이상해졌다.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뒤로, 김독자는 유중혁을 은근슬쩍 피해 다녔다. 어쩔 수 없었다. 예전처럼 지내기에는 김독자의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유중혁의 얼굴은 지나치게 잘생겼고, 몸은 지나치게 좋았으며, 목소리도…… 아, 시발. 이제야 인정하는 것도 우습지만, 유중혁은 그야말로 김독자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되기라도 한 듯 완벽한 이상형에 가까웠다. 애초에 저한테 그런 취향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갑자기 눈앞에 취향의 집합체가 나타난 꼴이었다. 내가 남자를 좋아했던가, 그런 고민 따위는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
한 번 자각하고 나니 그 뒤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과 얼굴을 마주할 때, 유중혁의 손이 닿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달아오르는 뺨과 귓가에 정말이지 아, 좆됐다……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러다간 은근슬쩍 도망치기도 전에 들키겠다 싶어 아예 얼굴을 마주하는 일을 피하고 있었다. 물론 유중혁 저 자식은 눈치도 빠른 놈이니 곧 알아채겠지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김독자.”
시발. 김독자는 눈을 꾹 감았다. 올 것이 왔구나. 며칠 전부터 계속 제게 말을 걸려 하는 걸 일부러 피하고 있었는데. 김독자는 지금 베란다 난간과 문을 막고 서 있는 유중혁의 몸 사이에 껴서 도망칠 구석이 없는 상태였다.
“중혁아. 나 급하게 할 일이 생각나서…….”
되도 않는 말을 주워섬기며 몸을 빼내려 하자 유중혁이 턱, 난간을 짚었다.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려 했더니 그쪽마저 막힌다. 시발, 이건 아까보다 더 답이 없잖아……! 유중혁의 팔 사이에 갇힌 꼴이 된 김독자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지껄이며 시선을 떨궜다. 베란다 바닥 타일의 무늬를 헤아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유중혁의 팔과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열기에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이상한 생각을 해버릴 것 같았다. 그래. 여기에 집중하자. 타일이 하나, 타일이 둘…….
“도대체 왜 자꾸 피하는 거지.”
아. 고개를 숙인 탓에 바닥을 긁듯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정수리를 찌르르하게 울렸다.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가 눈치도 없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좀 있어. 입을 꾹 닫은 채 묵묵히 있자 유중혁이 하, 한숨을 뱉으며 몸을 더 기울여왔다. 베란다 난간과 바짝 밀착해 한 몸이 된 김독자는 벼랑 끝에 몰렸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잠시 생각했다. 김독자의 몸이 저를 피해 뒤로 기울어지자 유중혁이 기어코 등을 받쳐왔다.
“위험하다고 말했지.”
천 너머로 닿은 커다란 손의 윤곽까지 느껴질 정도로 예민한 감각에 환장할 노릇이었다. 유중혁의 손이 닿은 부분부터 간질거리는 느낌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유중혁 이 자식 진짜……. 속절없이 물러날 수도 없게 된 김독자가 결국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은 정말로 몹시도 화가 난 모양인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섬연한 눈매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래, 딱 거기까지만 알았으면 좋았을걸. 김독자는 이제 급기야 유중혁에게 더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 날을 후회하고 있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며 제법 긴 시간 동안 스킬 없이 유중혁의 의사를 파악하려 해온 탓에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을 읽어낼 수 있게 되고 말았다.
유중혁의 서늘한 눈동자 뒤에 어린 것은, 틀림없는 애정이었다. 그것을 애정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것으로 이름 붙일 수 없음을 김독자는 빌어먹게도 아주 잘 알았다.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고, 다치길 원하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감정은 틀림없는 애정이다.
그리고 애정은, 사랑과는 다르지.
쿵. 쿵. 심장이 뛰었다. 그 박자에 맞추어 가슴이 조여들고, 온몸이 저릿하게 쓰라렸다. 유중혁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는다.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또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전히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중혁이 답지 않게 망설이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열기를 품은 긴 손가락이 이마를 가린 머리칼을 쓸어내고 그 자리에 얹어졌다. 살갗이 맞닿는 순간의 아찔한 감각은 어째서 이렇게 괴로운 건지.
“어디 아픈 거면 지금 당장 말해라. 저번처럼 입 다물고 있지 말고.”
저번? 아, 그래, 감기에 걸렸을 때 말인가……. 더 이상 화신체가 아닌 몸은 감기와 같은 자잘한 병에도 쉽게 노출되었다. 그때 김독자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일부러 유중혁을 슬슬 피했었다.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해봤자 귓등으로도 안 들을 놈이라는 것을 알기에 굳이 말하지 않았었다. 이유를 듣지 못해 열이 뻗친 유중혁을 구경하는 게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결과적으로는 이틀 만에 붙잡혀서 사유를 털어놓긴 했지만.
어쩌면 그때 깨달았던 것도 같다. 이 녀석이 생각보다 더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아픈 데 없어.”
“그런 것 같군.”
이마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손을 보며 김독자는 아쉬운 마음을 눌러 참았다. 미쳤냐, 김독자. 그만 생각해.
“그럼 대답해라.”
“……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젠장, 이 노 빠꾸 직진맨. 결국 김독자는 2주간 짜낸 엉성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제 봄이잖아.”
“……?”
“너 체온 높아서 가까이 있으면 더워.”
유중혁이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말을 들은 사람 같은 표정을 했다. 그렇게 보지 마, 이 새끼야. 나도 어이없는 거 알거든. 김독자는 괜스레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다시 시선을 피했다. 더 추궁하겠지. 진짜 할 말이 없는데. 모르쇠로 일관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때, 유중혁이 그를 가두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갑자기 왜? 얼떨떨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그대로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하던 유중혁이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동작으로 김독자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아, 미친…….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실수였다. 역시, 어디 나갈 때 이 자식이 옷매무새 다듬어 주던 걸 못하게 막았어야 했다. 그게 버릇이 들어서 이렇게 된 거야.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냐, 김독자……. 머리카락을 만져오는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또 기분 좋아서 김독자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유중혁이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김독자.”
“…….”
“네 녀석이 비밀이 많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다.”
욕하는 거야, 뭐야. 하지만 유중혁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유중혁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 내게 모두 말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도. 하지만.”
드물게도 길게 말하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눈을 흐렸다.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고민이 있으면 말해라. 혼자 끌어안고 끙끙대지 말고. 그게 더 신경 쓰인다.”
머리카락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그새 다시 흘러내린 가디건으로 향했다. 끌어올려 어깨에 걸쳐주고, 앞 단추를 여며주는 손길을 받으며 김독자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자연스러운 손놀림. 유미아를 돌본 경험 탓일까, 아니면, 다른 사랑했던 이에게도 이런 것들을 해줬을까…….
유중혁, 너는 어째서 이렇게 좋은 놈인 거야.
처음부터 모든 게 실수였던 것 같다. 그래, 이 녀석과 함께 살기로 한 게 잘못이었다. 이렇게 가까워지지 않았더라면 다정한 손길에 가슴이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유중혁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어떤 습관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전부 모른 채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의외로 독서를 좋아한다는 것도, 붕어빵을 싫어한다는 것도, 음악을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SF영화를 지독하게 싫어한다는 것도, 그 모든 걸 모른 채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 녀석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지도 모르는데. 기분이 좋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자잘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어떤 식으로 눈동자를 굴리는지, 요리를 할 때 손가락이 움직이는 방식, 동선, 그런 사소한 버릇들. 활자로는 온전히 읽어낼 수 없었던 것들. 유중혁이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몰랐더라면,
아니, 김독자는 생각했다. 설령 그랬다 해도, 나는.
유중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감히. 깨달음의 시기가 달라질 뿐이었을 터다. 언젠가는 깨달았을 것이다. 유중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몸을 물려 돌아서는 유중혁의 옷자락을 충동적으로 잡아챘다. 묵연한 시선이 돌아왔다. 오롯이 제게 꽂혀 드는 시선을 느끼며 김독자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묻기엔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유중혁.”
“왜.”
“……지난달에는 왜 선보러 안 나갔어?”
얼핏 의아하다는 표정이 스쳤다. 그 표정에 김독자는 또 한 번 가슴이 아파졌다. 그걸 네가 왜 신경 쓰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얼굴.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중혁은 그걸 왜 묻느냐고 질문으로 답하지는 않았다. 반듯하게 다물렸던 입술이 열렸다.
“이제 그만뒀다.”
“……뭐?”
김독자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런 대답은……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김독자의 표정을 본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 놀라지?”
“아, 아니…….”
눈꺼풀을 연신 깜빡인 김독자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다시 질문을 내놓았다.
“왜 그만뒀는데?”
“…….”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김독자를 바라봤다. 이번만큼은 김독자도 그 시선을 읽어낼 수 없었다. 이해도가 부족하여 스킬을 발동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스템창이 떠오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 질문이 네 고민과 연결되어 있나?”
김독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이 녀석이 내 마음을 눈치챌까. 아니, 그렇지는 않을 터다. 늘 스트레이트인 녀석이니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곤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남자에겐 관심 없다고 공언한 녀석이니까……. 하지만 망설임을 대답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유중혁이 천천히 말했다.
“네 녀석을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다.”
“…….”
폭탄처럼 떨어진 대답에 김독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잠깐, 잠깐만……. 무슨 소리야?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한 질문이 튀어 나가기 전에 유중혁이 다시 등을 돌렸다. 궁금한 건 해결됐나? 손에 힘이 풀린 김독자가 쥐고 있던 그의 옷자락을 놓아주자 유중혁이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베란다를 빠져나갔다.
김독자는 천천히 난간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았다.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유중혁이 정리해 준 보람도 없이 가느다란 머리칼이 다시 흐트러졌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왜? 유중혁이 결혼하면 내가 다시 혼자 살게 되니까? 그게 싫어서 그만뒀다고? 말이 되는 소리야? 저 녀석은 아직도 내가 혼자 있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쯤 되면 정말 분리불안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김독자 컴퍼니의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는 아니다. 멘탈케어센터에 가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인 것 같은데.
혼자 두지 않기 위해서.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들떴던 머리가 이내 찬물을 맞은 듯 가라앉았다. 치솟았던 심박이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유중혁은 자신의 행복과 김독자의 행복 중 후자를 택했다는 소리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유중혁,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녀석이 나를 위해 스스로의 행복을 던지면 안 되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설마 내게 부채감 같은 것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래, 알고 있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도움 덕분에 ‘결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1년여 전 그 날이 떠올랐다. 까마득한 절벽 위로 불어오는 바람에 검고 흰 코트자락을 휘날리며 유중혁은 말했었다. 김독자. 왜. 너는 정말 배신하지 않는 동료였군.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그걸 아직까지도 못 믿고 있었냐. 하여간 신중한 새끼. 유중혁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 낯선 얼굴에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저 멀리, 서녘으로 지는 황혼이 유중혁의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반듯한 입술이 열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네 녀석이 몇 번이나 죽었는지 알고 있나. 야, 새삼스럽게 그건 왜. 이제 다 끝났으니까 됐잖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네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정말로 깜짝 놀란 김독자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유중혁은, 몹시도 후련한 얼굴로, 김독자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던 그 날만큼이나 눈부신 미소였다. 네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하지만 대답은 이미 들은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유중혁은 고개를 돌려 저무는 해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하늘이 어두컴컴하게 물들어가고, 모든 별들이 낙하해 텅 빈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반짝이는 별…… 구원의 마왕의 별자리가 깜빡이듯 빛을 냈다. 그 별을 헤아리는 시선으로 유중혁은 분명하게 말했다. 고맙다, 김독자.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평생이 가도 잊을 수 없는 말일 것이다.
유중혁. 나는 그냥…… 독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내가 너를 위해 목숨을 던지고 성좌가 되며 죽음을 감내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제발, 그렇게 생각하지 마. 나는 네게 빚을 지우고 싶었던 게 아냐. 그걸 빌미로 네가 내게 빚을 갚는 생애를 살아가길 바랐던 게 아냐. 난 그저 허무하게 끝나버린 소설에, 제대로 된 결말을 주고 싶어서…….
내 삶을 지탱해 준 네가, 행복해지는 에필로그를 보고 싶어서.
지난 기억들이 머릿속을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래,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겠어. 두 번째로 찾아온 늦은 깨달음에 하,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진작 해야 했던 일은…… 네게서 떠나주는 거였다.
사이즈가 커 손등을 덮는 가디건의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 춥다, 감기 걸린다. 그렇게 말하며 걸쳐줬던 가디건이었다. 고개를 묻자 빌어먹게도 유중혁의 체취가 느껴졌다.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손을 놓아야 할 때였다. 갑자기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면 걱정할 게 틀림없으니 일단 이 집을 나가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김독자 컴퍼니 사옥으로 들어가면 되겠지. 유중혁, 넌 네 행복을 찾아. 내 행복을 위해 네가 희생할 필요는 없어. 나는 독자니까, 이제 책장을 덮을 때다. 더 이상 네 이야기만을 읽으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 독립의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