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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행복을 바라는 너에게
김독자. 당분간 나랑 같이 살아라.

2019.06
트위터 썰로 시작해서 책으로 엮은 글입니다.
원본 썰 링크: (1) Link URL (2) Link URL











    그러니까, 시작은 정말 별것 아니었다.
    - 김독자.
    - 왜, 유중혁.
    - 앞으로 어떻게 살 건가.
    갑작스레 던져진 현학적인 질문에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 개복치 자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지만 유중혁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고, 그래서 김독자는 밖으로 내쉬려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유중혁이 삶과 죽음을 누구보다도 많이 겪은 인간이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김독자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들이 지금까지는 그에게 별다른 의미가 되지 않았다는 것도.
    김독자는 발치에 펼쳐진 처량한 풍경을 바라보았다. 부서지고 찢긴 상흔이 가득한 대지. 그럼에도 이 땅은 유료화가 시작된 몇 년 전의 어느 날 이래로 가장 빛나고 있었다.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고 ‘스타 스트림’이 멸망한 세계였다. 어둑한 밤하늘에선 별 한 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반파된 도시의 점멸하는 가로등만이 빛을 흩뿌리고 있을 뿐. 김독자는 눈을 깜빡이며 그 빛을 바라보았다. 정말, 모든 것이 끝난 세계다. 무의식적으로 시스템 창을 불러보아도 눈앞에는 무엇도 떠오르지 않는, 습관적으로 이 높은 절벽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리려 했다가는 그대로 목숨을 잃어버릴. 문득 아찔한 높이에 몸을 떨자 유중혁이 팔을 턱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 위험하게 무슨 짓이냐.
    - 하, 하하…….
    김독자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유중혁의 손아귀에서 팔목을 빼냈다. 몸을 돌려 바라보자 잠시 침묵하던 유중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 혼자서 살 생각인가?
    - 아마도?
    - 유료화 이전처럼 살 생각은 아니겠지.
    정곡을 찌르는 말에 김독자는 움찔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유중혁 이 새끼, 나에 대해서 읽었지……. 김독자는 소리 내어 웃으며 유중혁의 어깨를 툭툭 치고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신경 쓰지 마, 유중혁. 어떻게든 살겠지 뭐. 하지만 유중혁은 이대로 그를 보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다시 제 팔을 붙잡아 오는 억센 손길에 김독자는 기어이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 왜, 유중혁. 뭐가 문젠데.
    세계를 구한 축하 인사 같은 건 다 나눴잖아. 우리는, 모두와 함께 원하는 결말을 봤다. 그 언젠가 별 생각 없이 뱉었던 ‘우리는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라는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유중혁의 눈가에 어렸던 무언가를 김독자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 김독자.
    - 왜.
    - 당분간 나랑 같이 살아라.
    - ……?
    김독자는 제가 뭘 잘못 들었나 싶어 붙잡히지 않은 쪽 손을 들어 귓가를 툭툭 두드렸다. 그 행동에 유중혁이 무시무시한 얼굴을 했지만 그때의 김독자는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 방금 뭐랬어? 내가 잘못 들었나?
    - 잘못 들은 게 아니다.
    - 그럼 유중혁 네 머리가 이상해진 거겠네?
    - 헛소리 하지 마라. 당분간 나랑 같이 살라고 분명히 말했다.
    하, 참내. 다시 들어도 어이가 없네. 이 개복치 녀석이 시나리오 클리어 후유증으로 돌아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터져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지 않았다. 유중혁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그의 팔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 그게 싫으면 최소한 옆집 정도로 해라.
    - 유중혁. 너 대체…….
    그제야 유중혁의 눈을 읽어낸 김독자는 숨을 멈췄다.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하기 위해 명계로 가려던 찰나 제 어깨를 붙잡고 따라왔던 유중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더 네임리스 미스트 속에서 부서져 가던 자신을 향해 확실하게 뻗어지던 손도. 씨발! 개소리하지마!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목이 터져라 저를 부르던 정희원의 목소리와, 유상아의 얼굴과, 한수영의 상처받은 표정과……. 전지적 독자 시점을 잃은 김독자는, 뒤늦게나마 유중혁이 이러는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 말하자면…… 분리불안 비슷한 것일까.
    김독자는 가만히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에는 세계 제일의 권위자였을 사내의 얼굴. 그 잘생긴 얼굴에는 답지 않게도 초조함 비슷한 것이 어려 있었다.
    - 같이 살면 뭘 어쩔 건데?
    무던히 던진 질문에 유중혁 또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이전처럼 황금빛을 뿌릴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검은 눈동자가 김독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 일단 네 녀석 먹는 걸 좀 어떻게 해야겠군.
    - 뭐, 인마. 내 식습관이 어때서.
    - 직접 말해줘야 하나?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무한 차원의 아공간’ 기능을 잃은 흰 코트의 한참 남는 어깨 자락을 콱 쥐어 오기에 김독자가 울컥 화를 냈다. 이 자식이, 내가 90 입는 데 뭐 보태준 거라도 있냐. 90을 입는다고? 생각보다 더 말랐군. 제 무덤을 판 꼴이 된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 시발. 실수했네. 역시 ‘제4의 벽’이 없으니까 감정이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아서 말이 먼저 나와 버린다. 조금 아쉬운가 싶기도 하고. 쩝 입맛을 다시다가 제 몸을 스캔하듯 훑는 시선에 김독자가 코트 앞자락을 여몄다.
    - 뭘 그렇게 쳐다봐?
    - 일단 대답부터 해라.
    그러면서 고개를 조금 치켜드는 것이, 한껏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비록 전지적 독자 시점은 잃었지만 유중혁의 습관 하나하나를 꿰고 있는 김독자로서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행동이었다. 이 자식…… 자기 요리가 맛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문득 허기가 밀려오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성좌가 된 뒤로 무언가를 제대로 먹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가장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이 뭐였더라, 기억을 더듬자니 우습게도 피스랜드에서 유중혁이 만들었던 꼬치 요리가 제일 먼저 생각났다. 그건 진짜…… 더럽게 맛있었다. 젠장. 갑자기 너무 배가 고팠다.
    - 알겠어.
    - 뭐?
    - 같이 살자고, 유중혁. 요리는 네가 하는 거 맞지?
    그래서였을 것이다. 유중혁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씩 웃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것은.
    그게 벌써 3개월 전 일이다. 김독자는 소파에 앉아서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만지작거리다가 주방을 흘긋 살폈다. 잿빛 앞치마를 한 유중혁의 뒷모습이 냉장고에 가려 보였다 나타났다 했다. 오늘은 무슨 메뉴일까. 어느새 유중혁의 요리를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으나…… 너희는 유중혁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잖아. 누군가가 읽으면 세상에 둘도 없을 최애 악개 같은 발언이라며 웃을 생각을 한 김독자는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옅게 풍기는 냄새로 미루어 보아 살짝 매콤한 요리 같기도 하고, 간장…… 아니 굴소스인가? 볶음요리?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난 김독자는 흐느적거리며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중혁아. 부름에 유중혁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앉아 있어라. 조금 더 걸린다. 김독자는 소리 없이 웃으며 식탁에 턱을 괸 채 유중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동안에도 김독자는 몇 번이나 생각했었다. 유중혁과 자신은 그다지 잘 맞지 않는다. 성격도 다르고 생활 패턴도 다르며 입맛도 달랐다. 동거 초기에 우여곡절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분란은 생각보다 오래가지는 않았다. 둘 모두 서로를 오래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영역으로 그어둔 ‘선’이 명확히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것을 침범하지 않으면 된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김독자는 그다지 소음을 많이 내는 인간이 아니었다. 생활 패턴이 몹시 다르기는 했으나 유중혁의 잠을 방해할 정도로 시끄럽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되레 유중혁은 김독자가 너무 소리를 내지 않고 생활하기에 혹시 사라진 것은 아닌가 자다가도 일어나서 찾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동거를 3개월간 지속한 결과, 지금의 김독자는…… 유중혁과 함께 사는 생활이 생각보다 너무 안락해서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중혁의 요리 솜씨는 가타부타 첨언할 것도 없이 최상급이었고, 일단 본인부터가 남이 만든 요리는 별로 입에 대려 하지 않으니 늘 먼저 주방을 찾았다. 김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먹기 위해 요리를 했다는 뜻이다. 하는 김에 2인분을 만드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은 듯했고……. 그렇게 3개월간 유중혁의 요리에 길들여진 김독자는 이제 웬만한 음식점에 가서도 음식 맛을 평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여긴 유중혁 요리보다 맛없네, 아 여긴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식이었지만. 어쨌든 매일 매일 맛있는 요리를 먹는다는 건 김독자로서는 정말로 수십 년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기에 유중혁의 잔소리 정도는 조금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식탁을 두드리고 있자니 유중혁이 인덕션을 껐다. 곧이어 넓적한 그릇에 동그랗고 예쁜 모양으로 얹어진 볶음밥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오동통한 새우와 홍합, 오징어와 버섯 등이 들어간 해물 볶음밥이었다. 얼핏 보기엔 단순해 보여도 유중혁의 요리에는 굳이 토를 달 필요가 없다. 김독자는 익숙하게 수저를 꺼내 유중혁과 제 자리에 놓고 컵에 물을 따랐다. 잘 먹겠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도 잊지 않았다. 유중혁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주억이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김독자는 입안에서 구르는 밥알을 씹으며 또 한 번 감탄했다. 이 자식 진짜 요리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단 말이야……. 무림에서 오래 지낸 영향인지 유중혁의 요리는 중화풍이 많았다. 어렴풋하게 매콤한 맛을 느끼며 김독자는 슬 웃었다. 제가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맵기까지 섬세하게 조절하고 있는 유중혁이었다. 김독자는 속으로 3개월 전의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김독자 너 인마 유중혁이랑 같이 살기로 결정한 거 엄청 잘 했다.
    통통한 새우살을 씹다가 김독자가 문득 물었다.
    “일부러 덜 맵게 한 거야?”
    흘긋 시선을 마주친 유중혁이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역시 조금은 좋은 놈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만들면 네 입맛엔 안 맞는 거 아냐?”
    “별로 상관없다. 매우면 매운 대로, 안 매우면 안 매운 대로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 있으니까.”
    으음. 그렇긴 하겠지 뭐……. 김독자는 묵묵히 식사를 마쳤다. 오늘의 설거지는 김독자의 몫이었다. 집안일은 반반 정도로 나눠서 하고 있었으니까(그래봤자 유중혁이 더 깔끔하게 살아서 자발적으로 청소를 해대기는 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막 그릇을 집어 들려는 찰나였다. 따뜻한 무언가가 손등에 닿았다가 빠르게 떨어져 나갔다. 흠칫 놀란 김독자는 제 손과 겹쳐졌던 유중혁의 손이 금방 다른 식기를 집어 싱크대에 넣는 것을 바라보았다. 금방 떨어진 걸 보니 실수였던 모양이다. 제 손등에 잠시 닿았던 뜨끈한 살갗의 여운에 김독자는 설핏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시나리오를 한참 클리어하던 때에는…… 제가 유중혁을 업고 달리기도 하고, 유중혁이 저를 껴안고 있기도 하고. (물론, 절대로, 이상한 의미로 껴안은 건 아니다. 필요에 의한 동작이었다.) 그런 식의 접촉을 할 때마다 유중혁으로부터 전해지던 열기는 체온이 낮은 편인 김독자에게 늘 기묘한 느낌을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중혁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는 그런 식으로 닿은 적이 없었던가…….
    아니 시발 이게 무슨 생각이야. 김독자는 얼른 상념을 지워내려 고개를 흔들곤 고무장갑을 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 팍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나리오 같은 게 없는 요즘은, 유중혁과 신체적인 접촉이 전혀 없었다는 소리다. 조금 전에 닿은 게 정말로 두 달, 아니 세 달 만에 처음인 건가? 수세미에 세제를 짜고 거품을 내며 김독자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대로 그릇을 집어 들고 수세미질을 하다가 실수로 수도를 건드려 얼굴 쪽으로 물이 훅 튀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막은 김독자의 손에서 그릇이 미끄러졌다.
    쨍.
    제법 비싼 그릇이 값을 하는지,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았으나 네 조각으로 갈라져 파편이 튀었다. 아, 젠장. 이런 실수는 안 하는 편인데. 혼자 살던 시절, 김독자는 물건을 한번 사면 상당히 오래 사용하는 편이었다. 가뜩이나 없는 계약직 월급에 가재도구를 깨먹으면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으므로. 김독자, 무슨 일이지? 금방 나타난 유중혁이 바로 상황을 파악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머쓱한 마음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중혁이 검은색 비닐봉지를 가져와 깨진 그릇 조각을 집어넣었다. 그 탓에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유중혁은 이내 서늘한 눈으로 김독자의 맨발과 조금 드러난 다리를 훑었다. 다친 덴 없는 것 같군. 그릇이 비싸서 값을 하나 보지 뭐. 실없이 웃자 유중혁이 혀를 찼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굳이 비싼 그릇을 고집하는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죽일 기세이길래 김독자는 유중혁이 비질을 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정리를 마친 유중혁이 허리를 펴다가 다시 인상을 썼다. 커다란 손이 뻗어와 김독자의 발목을 쥐었다. 흠칫 놀라 쳐다보자 유중혁이 얼굴을 들었다.
    “여기 긁혔다.”
    “응?”
    고개를 내려 살펴보자 발목 조금 위쪽에 길게 긁힌 자국이 있었다.
    “몰랐나?”
    “어, 안 아픈데…….”
    아니, 안 아팠는데. 깨닫고 나니 갑자기 아프기 시작한다. 깊지는 않았으나 가로로 길게 찢어져 몽글몽글 피가 배어 있었다. 옅은 한숨을 쉰 유중혁이 몸을 일으키고는 거실로 향했다. 이쪽으로 앉아라. 소파를 가리키기에 얌전히 올라앉았다. TV 아래 서랍장을 열어 구급상자(저런 게 있었나)를 꺼낸 유중혁이 소파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 뭘 구급상자까지…… 그냥 냅두면 나아.”
    하지만 유중혁은 대꾸 없이 서슬 퍼런 눈으로 김독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그 박력에 김독자는 결국 한숨을 푹 쉬고선 다리를 내어주었다. 새끼, 하여간 성질은……. 그런 생각을 하기도 잠시, 낯설기 그지없을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길이 돌아왔다. 김독자의 발을 붙잡은 유중혁은 찬찬히 상처를 살피고는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문질렀다. 앗, 따가워. 움찔했으나 유중혁에게 붙잡힌 다리는 물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참아라. 설거지하던 그릇에 긁힌 거니까 굳이 소독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입을 꾹 다문 채 상처를 살피는 녀석의 심기가 불편해 보여 그냥 참았다. 이윽고 반창고를 꺼내기에 김독자가 손을 뻗었다.
    “내가 붙일게.”
    “됐다. 이제 와서 뭘.”
    적당한 크기의 반창고를 찾아 붙이는 작업까지 완료한 유중혁이 손을 떼어냈다. 떨어져나가는 온기에 김독자는 문득 짧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도록 놀랐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있는데 유중혁이 저를 올려다봤다.
    “웬 멍청한 표정이냐.”
    ……유중혁 이 새끼. 김독자는 유중혁 때문에 말아 쥐었던 주먹이니 이대로 저 잘생긴 낯짝을 한 대 정도는 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되로 주고 말로 받을 보복이 싫어 또 참았다. 시나리오 중이었으면 안 참아도 됐을지도 모르는데. 시발, 과거의 김독자 잘한 거 맞냐. 역시 실수였던 거 아냐? 부글부글 끓는 김독자의 속을 알기라도 한 건지 유중혁이 픽 웃었다. 뭐야? 김독자는 구급상자를 갈무리해 다시 서랍장에 넣어두는 유중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라. 어차피 무리할 일도 없겠지만.”
    그러고는 주방으로 향한다. 아, 유중혁 저 자식 진짜……. 울컥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진 김독자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말 좀 곱게 못 하냐. 속으로 잠시 툴툴대다가 천천히 손을 내려 반창고 위를 손으로 매만졌다. 매끄러운 표면이 아직도 따뜻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솨아아, 주방 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까 설거지를 덜 한 상태였지……. 그래서 김독자는 또 다시 인정해야만 했다. 유중혁은 좋은 놈이었다. 정말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물소리를 배경으로 다리에 감긴 반창고를 만지작거리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을 비롯한 ‘등장인물’이었던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세상에 적응했다. 적응이라는 말이 과연 옳은 것일까는 잘 모르겠지만. 김독자는, 솔직히 말하자면, 유중혁이 세계에 쉽게 녹아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유중혁은 불행한 ‘설정값’을 가진 주인공이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에 대한 모순점도 제대로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수천……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회귀자가 아니던가. 차라리 기억을 덜어내고 잊어버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저 미련한 개복치 놈은 그런 것조차도 하지 못했다. 지독하게 올바르고 좋은 놈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올곧은 놈이었기에, 자신이 언제나 유중혁을 좋아하고 응원해 왔다는 것을.
    그래, 그런 녀석이니까, 이렇게 함께 살 수도 있는 거겠지. 만약 유중혁이 아닌 다른 누군가-정희원이나 한수영, 유상아, 이현성 같은-가 함께 살자는 제안을 했다면 아마도, 거절했을 것이다. 김독자는 더 이상 구원의 마왕이 아니었으며, 김독자 컴퍼니의 사장도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유중혁만큼 자신을 알지는 못한다. 자신만큼 유중혁을 아는 사람이 없듯이.
    김독자는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여전히 나 자신을 내보이는 게 두려운 모양인지도 모르겠다고.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쪽은 어쩌면, 나인지도 모르겠다고.
    순간, 어깻죽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통증에 김독자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였지? 손을 들어 등을 문질렀지만 언제 아팠냐는 듯 통증은 씻은 듯이 사라져있었다. 잠을 잘못 잤나. 어깻죽지까지 손이 미치지 않아 멍하니 허리께를 문지르며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유중혁의 너른 등이 보였다. 뒷모습도 잘생긴 새끼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중혁 인마, 이 형님이 널 얼마나 좋아했는지 네가 알기나 하냐. 물론 본인 앞에서 이 말을 꺼냈다간 경을 치겠지만.
    물소리가 멎었다. 손의 물기를 닦고 거실을 지나쳐 제 방으로 가려던 유중혁이 김독자의 얼굴을 보고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오징어처럼 흐느적대지 말고 침대에 눕든가 해라.”
    그래, 시발, 그래야 우리 중혁이지.







    멸망을 거친 세계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수복된 대한민국은 사계절이 뚜렷해졌다. 멸망 이전보다도 확연해진 계절 변화에 수년간-혹은 십수 년간-날씨나 계절이라곤 신경 써본 적 없이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은 겨울엔 겉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아연해했다. 물론 거기에는 김독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으, 더럽게 춥네…….”
    별생각 없이 베란다 창문을 열었다가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떤 김독자는 황급히 빼꼼 열린 틈새를 닫았다. 짧은 사이에 겨울이라도 삼킨 것처럼 엄청난 추위가 느껴졌다. 그 이유로는 김독자가 고작 얇은 반팔 티셔츠에 헐거운 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겠지만. 엣취. 반사적으로 재채기가 나왔다. 코를 꾹꾹 눌러 문지르며 창문으로부터 돌아서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유중혁이 팔짱을 끼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커먼 옷을 입은 체격 좋은 놈이 갑자기 시야에 들어차 깜짝 놀란 김독자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다녀라.”
    “그건 내가 할 소리다.”
    고개를 모로 조금 기울인 유중혁이 몇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언제 봐도 잘생긴 낯짝이라 어이가 없을 법도 하건만 김독자는 이미 그런 생각을 할 단계를 한참 지나 있었다. 유중혁이 세계의 미의 기준이 될 정도로 잘생긴 놈이라는 건 십여 년, 아니 거의 이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감기라도 걸렸나?”
    “응? 아니.”
    에, 에취. 대답을 배신하기라도 하듯 입에서는 다시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아, 이놈의 몸뚱이는 유료화가 끝나니 원래대로 돌아와서 이 꼴이다. 유중혁이 짙은 눈썹을 역팔자로 좁히며 딱딱하게 말했다.
    “되도 않는 거짓말은 그만 좀 하지.”
    야, 이 새끼야, 아니라고……. 억울했으나 김독자는 유중혁의 서슬 퍼런 시선에서 예전 기억을 읽어내고선 피식 웃어버렸다.
    “유중혁. 내가 언제 너한테 거짓말을 했냐. 사실을 숨긴 적은 있어도.”
    유중혁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럼 깃발 쟁탈전 때 나한테 한 말은 뭐지?”
    아, 젠장. 기억력도 좋은 새끼. 김독자는 실실 웃으며 유중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 건 좀 잊어버려 주면 안 되냐.”
    “네 녀석 같으면 잊겠나.”
    아니, 나 같아도 동생이 납치됐다는 거짓말은 못 잊겠지. 결국 어깨를 으쓱한 김독자는 자박자박 걸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유중혁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옷 좀 더 걸쳐 입어라.”
    “집 안은 따뜻하잖아.”
    “다시 기침하기 전에 말 들어라.”
    또 잔소리 시작이었다. 김독자는 네네, 알겠습니다, 대꾸하며 웃고는 방으로 기어들어가 가디건을 주워 입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유중혁의 잔소리에 응해주는 자신도 우스웠지만, 가장 웃긴 건 저 잔소리가 그다지 귀찮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겠지.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김독자는 소파 위로 두 다리를 끌어올려 모으며 유중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역시 같이 산다는 건 무시할 만한 일이 못 된다. 그 눈치 없는 김독자조차 유중혁의 잔소리 뒤에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김독자는 씩 웃으며 장난스레 소파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서 있지 말고 앉아라, 좀.”
    “굳이?”
    “시커먼 게 돌아다니니까 정신 사납다고.”
    돌아다닌 적 없다. 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을 한 유중혁이었으나 무슨 생각인지 팔짱을 풀고 다가와 김독자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무게에 소파가 쑥 꺼졌다. 김독자는 새삼스럽게 옆에 와 앉은 유중혁의 몸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은 스킬이고 코인이고 다 빠졌는데도 몸이 예전이랑 별로 다르질 않네. 하긴, 초월좌는 시스템의 힘을 빌리지 않으니까……. 생각에 잠긴 사이 유중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뭘 보나.”
    흠칫한 김독자는 얼른 평정을 가장했다. 불순한 생각은 한 톨만큼도 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녀석의 몸을 훑고 있던 걸 들키니 머쓱했다.
    “너도 그날 내 몸 스캔했잖아. 쌤쌤으로 쳐라.”
    “네놈처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 적은 없다.”
    “뭔 개소리야.”
    이상한 눈은 무슨. 김독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유중혁은 눈썹을 까딱이곤 덩달아서 김독자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 자식이, 복수라도 하는 거냐. 하지만 잘생긴 놈이 진지한 얼굴로 제 몸을 쳐다보고 있으니 절로 기분이 묘해졌다.
    “너야말로 뭘 보냐.”
    “도대체 어떻게 된 몸이길래 그렇게 먹였는데도 아직 90을 입는 거지?”
    젠장. 아픈 구석을 푹푹 찔러댄다. 김독자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몰라. 원래 살이 잘 안 붙었어. 키라도 이만큼 큰 게 다행일 수도 있고.”
    “…….”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쩌면, 도서관을 통해 ‘읽은’ 김독자의 과거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김독자는 묵묵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이렇게, 종종……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김독자는 픽 웃으며 유중혁의 팔을 두드렸다.
    “그만 생각해. 나 이제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유료화도 겪었는데 고작 그런 걸로 뭘.”
    하지만 유중혁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하여간 진지한 자식. 느릿하게 미소를 거두며 손을 떼어내다가 문득, 유중혁과 거리가 상당히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붙어 앉았을 뿐인데 유중혁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따뜻한 열기가 살갗에 스미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은 겨울에도 이렇게 체온이 높으려나. 난로로 쓰기 딱 좋을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한 김독자는 몸을 반쯤 돌려 유중혁의 단단한 어깨와 팔에 등을 기대곤 눈을 감았다. 여러 겹의 천 너머로 전도되는 열기가 따끈하니 기분 좋았다. 뒤통수 너머로 유중혁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나.”
    “가만 있어 봐.”
    김독자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등과 목으로 퍼지는 온기에 집중했다. 따끈하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웬일인지 유중혁이 더 이상 말이 없길래 이 자식 혹시 한 대 치려고 하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한 김독자는 곧 제 무릎과 몸 위로 덮어지는 커다란 담요에 살풋 눈을 떴다. 소파 위에 놓여 있던 것이다. 담요가 마법의 양탄자도 아니고 스스로 날아왔을 리는 없으니 유중혁이 덮어준 것이 틀림없을 텐데, 정작 그 마법의 술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개를 위로 한껏 꺾어 그 얼굴을 바라본 김독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유중혁, 좋은 놈. 김독자는 다시 소파와 유중혁, 그리고 담요에 둘러싸여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아, 이대로 잠들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사람의 온기라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고 따뜻한 것일 줄은 몰랐다. 김독자는 아주 오랫동안 혼자였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며 살아왔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삶을 거쳐 왔다. 그 길고 지난한 시간 속에서 이러한 온기를 느껴본 일은, 정말이지 없었다. 시나리오를 헤쳐나가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제4의 벽’의 영향이든 무엇이든, 김독자는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만물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이름의 설화를 가지고서도. 그 모든 것들을 깨달은 게 시나리오가 끝나고 스타 스트림을 부순 뒤라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그 시나리오 속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사랑받았었는데.
    감은 눈꺼풀 아래로 김독자 컴퍼니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에게 힘을 빌려주었던 수많은 이들의 얼굴도. 하지만, 그래. 그때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몸을 맞대고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던 건, 유중혁 이놈 뿐이었던가.
    김독자는 까무룩해지는 정신 속에서 시나리오의 바다를 헤엄쳤다. 천령독에 당해 꼼짝도 하지 못하는 유중혁을 등에 업고 달렸던 기억. 73번째 마왕이 된 뒤 천총운검에 꿰뚫려 목숨을 잃어갈 때 스러지는 제 몸을 붙들던 유중혁의 손. 수르야에 맞서 신체의 골격이 뒤틀리도록 버티던 유중혁의 가벼운 몸을 들쳐 메고 입속에 대환단을 흘려 넣던 기억. 열차에서 떨어져 내리던 자신을 끌어안듯 붙잡아내던 단단한 팔, 무거운 창을 함께 들던 손, 그런 순간마다 온몸으로 흘러들던 마력과 같은 따뜻한 체온. 김독자에게 사람의 체온을 알려준 것은 틀림없는 유중혁이었다. 이렇게 제 눈앞에 나타나기 전, 그저 책 속의 주인공일 뿐이었을 유중혁조차도 김독자의 피와 살을 구성하게 한 부모이자 형제이자 오랜 친구였으므로.
    김독자. 어둑한 시야 너머로 유중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쏟아지는 잠에 취해 김독자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몸만 뒤척였다. 잠시 말이 없던 유중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다.
    그 말은, 어쩌면 내 꿈이었을까. 나는…… 유중혁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안온한 온기 속에서 김독자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결에, 체온만큼이나 따뜻한 무언가가 제 머리칼을 쓰다듬은 것 같기도 했다.



    김독자는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반가운 얼굴들을 맞이했다.
    “독자 씨, 얼굴 좋아 보이네요.”
    “그쵸? 유중혁 씨랑 같이 산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안심되던지.”
    방긋 웃는 유상아와 정희원의 얼굴을 보고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집을 휘 둘러보던 한수영이 키득거렸다.
    “집 엄청 멀끔한데? 유중혁 그 자식 솜씨지?”
    “아니거든.”
    “아니긴 뭘 아니야.”
    내가 널 모를 줄 알고? 한수영의 이죽거림에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절대로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중혁 씨는요?”
    맨 뒤에서 두리번거리던 이현성의 물음에 김독자가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자식 요즘 바빠요. 밖으로 엄청 나다니던데 정확히 뭘 하는진 저도 모릅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프로게이머였던 시절을 알고 있었다(비록 줄글을 통해서지만). 하지만 멸망으로부터 간신히 복구된 세계에 프로게이머와 같은 직종이 있을 리 없었다. 세계는 생각보다 빠르게 수복되는 중이었으니 어쩌면 1, 2년 안에 되살아날 직업일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아니지. 그리고 유중혁 자신도 프로게이머 말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취미로는 계속할 셈인 듯했지만.
    지금의 세계는 유료화 이전처럼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는 세계다. 김독자 컴퍼니의 다른 이들도 ‘제 직업은 무엇입니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유중혁이 무슨 용무로 집을 비우는지까지는 잘 알지 못했다. 구구절절 물어보거나 간섭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말이 귓전을 찔러왔다.
    “엥. 유중혁 오늘 선보러 간다고 했는데?”
    뭐라고. 김독자는 제가 무슨 말을 들었나 싶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말을 꺼낸 한수영은 김독자의 표정을 보고는 아차, 하는 얼굴이 되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유상아한테 들었는데. 유상아 건너건너 지인이랑 맞선 잡혔다고……. 김독자 너 몰랐냐?”
    “……몰랐는데?”
    김독자의 얼떨떨한 얼굴을 본 유상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독자 씨도 당연히 알 줄 알았어요. 그래서 먼저 말 안 한 건데…….”
    “잠깐, 잠깐만요.”
    김독자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띵한 느낌에 잠시 손을 들었다. 그러니까…… 그 유중혁이 여자랑 선을 보러 갔다고? 생각도 못 해본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얼얼함이 가시질 않았다. 내가 아는 유중혁은 절대로 선 같은 걸 볼 성격이 아닌…… 아닌…… 그러니까…… 젠장. 김독자는 미간을 좁히며 다시 생각했다.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유중혁은 ‘멸살법’ 내내 고자 루트를 걸은 적이 더 많았으나-그리고 회귀가 끝 무렵으로 치달을수록 그런 경향이 늘어났지만-어쨌든 그 멸망한 극 아포칼립스 세계에서도 연인을 만들고 아이를 낳았던 전적이 있는 놈이다. 그런 녀석이니 세계를 구한 뒤에 다른 누군가와 가정을 꾸릴 생각을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가 깨끗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러네. 뒤늦게 캐해석을 완전히 납득한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 웃었다.
    “이따 오면 어땠냐고 물어봐야겠다. 일단 들어오세요.”
    김독자의 표정을 본 다른 이들이 묘한 얼굴을 했으나 김독자는 눈치채지 못한 채 그들에게 대접할 마실 것을 찾아 주방으로 향했다. 소파와 바닥에 이리저리 둘러앉은 네 사람이 저들끼리 쑥덕댔다.
    “김독자 저거 좀 이상하지 않냐…….”
    “그러게 말입니다.”
    “유중혁 씨는 왜 말도 안 하고 나갔대요?”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내 김독자가 음료를 들고 오자 언제 떠들었냐는 듯 입을 싹 닦은 이들이 김독자의 안부를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소식 듣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요?”
    카펫이 깔려 푹신한 바닥에 자리를 잡은 김독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비슷합니다. 잘 놀고먹고 있어요.”
    “웹소설 읽으면서요?”
    유상아의 장난스런 말에 김독자가 씩 웃어주었다. 네, 웹소설 읽으면서요. 어쩌면 유중혁만큼이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을, 자신의 이야기를 읽은 유상아의 얼굴을 보며 김독자는 핫초코를 조금 홀짝였다. 한쪽 무릎을 세워 얼굴을 기대고 있던 정희원이 물었다.
    “아직도 밖에는 안 나가요?”
    김독자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잔에서 피어오르는 엷은 김을 바라보았다. 네 사람의 시선이 조용히 제게 꽂혀 드는 것이 느껴졌다. 머그잔의 테두리를 매만진 김독자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예 안 나가지는 않아요. 그래도 역시…… 피곤하니까 멀리는 안 가지만요.”
    정희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독자. ‘구원의 마왕’, 그리고 ‘빛과 어둠의 감시자’로 훨씬 더 잘 알려진 그는 모든 화신체-생존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유명인사였다. 세계를 구한 ‘김독자 컴퍼니’의 사장. 밤하늘에 떠 있던 ‘성좌’. 그럼에도, 스타 스트림이 부서진 세계에서 ‘화신체’로서 살아남은 인간. 모든 별들이 유성우처럼 떨어져 내려 캄캄한 밤하늘에 유일하게 떠 있는 그의 별자리는, 지구의 생존자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모양새였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발을 붙이고 사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가닿았다. 그 시선과 함께 김독자의 불우했던 과거도 낱낱이 파헤쳐졌다. 물론, 고작 ‘그런 일’을 허물 삼을 정도로 녹록한 세계는 아니었기에 김독자를 향한 존경과 선망, 감사의 시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독자는 그 모든 시선들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왜냐고 물으면, 글쎄. 자기 자신조차도 정확한 이유를 댈 수는 없겠으나.
    그래서 김독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집 안에서 오래도록 살고 있었다. 사실 김독자에게는 몹시도 익숙한 생활이었다. 유료화 이전 자신의 삶에서 ‘회사’를 빼놓는다면 지금과 꼭 같은 모양새일 테니까. 어차피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과만 대화를 나눴을 뿐 개인적으로 친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지금의 생활이 그에게는 훨씬 더 행복했다. 따뜻하게 식은 핫초코를 홀짝이는 사이 한수영이 물었다.
    “아직도 너 찾는 사람들 엄청 많은 거 알지?”
    “응, 알지.”
    “그 사람들한테 대답은 하나도 안 해줄 거야?”
    김독자는 묵묵히 고개를 들어 한수영의 짧은 머리칼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봤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에 묻어 있는 생각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했잖아. 시선이 무섭거나 그래서 피하는 거 아냐.”
    “…….”
    “그냥, 굳이 다시 그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는 건 유중혁이랑 여러분이면 충분합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네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그 시선에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지었다. 일부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않는 듯한 애매한 표정. 비록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은 없지만 그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김독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지금이 제일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김독자가 말을 이어붙이며 머그컵을 부드러운 카펫 위에 내려놓았다. 흰 손가락이 천장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일행들의 시선도 하늘을 향했다.
    “하늘을 보면 있잖아요? 제 별자리.”
    빛이 꺼진 밤하늘을 유일하게 밝히는 별.
    그곳에 김독자가 있었다.
    그와 함께 물밀듯이 밀려오는 기억에 일행은 하마터면 몸서리를 칠 뻔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마주하며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공포. 그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내고, 제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내던지며 세계를 구한, 그럼에도 그들 모두에게 살아 달라 말하던 하얀 얼굴. 늘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다른 무언가를 우선하던, 하지만 끝내는 저를 구해 달라 손을 내밀던. 살고 싶다 말하며 ‘생존의지’를 깜빡이던 김독자를,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독자 씨. 정희원이 그를 불렀다. 말간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지금 우리한테 제일 중요한 건 독자 씨가 행복한 거예요.”
    “……압니다.”
    느릿한 대답이 돌아왔다. 천천히 호선을 그리는 입매에서 거짓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김독자는 원래도 표정을 숨기는 데 그다지 능숙하지는 않았다. 무언가에 의해 감정이 차단된 듯 가려져 보일 때는 있었어도. 그래서 정희원은, 유상아는, 한수영은, 이현성은, 웃었다. 김독자 본인이,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날 저녁, 일행이 모두 돌아간 후 뒷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널브러져 있던 김독자의 귀에 현관의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실수 한번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눌러지는 전자음. 덜컹,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김독자는 몸을 일으켰다. 유중혁, 왔냐. 선보러 갔었다며? 하고 조금은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현관에 달린 환한 조명 아래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유중혁은 정말이지 말도 못 하게 잘생긴 꼴이었다. 매일 그 얼굴을 보는 김독자조차도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반만 넘겨 정리한 머리, 몸에 꼭 맞는 세미 정장 차림. 특별히 무늬랄 것도 없는 대단히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워낙 피지컬이 좋은 덕인지 넓은 어깨와 긴 다리가 돋보였다. 올린 머리에 손을 뻗어 편하게 정리하던 유중혁이 김독자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저녁 먹었나?”
    “어, 어?”
    김독자는 제게 향한 질문에 흠칫 놀라 말을 더듬었다. 시발, 거기서 말을 왜 더듬어, 김독자. 간신히 생각을 가다듬고 후광이라도 두른 듯한 유중혁으로부터 시선을 떼어놓은 김독자는 태연한 척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먹었어. 낮에 사람들 왔었거든.”
    “사람들 누구?”
    “상아 씨랑 희원 씨랑 현성 씨랑 한수영.”
    “오랜만에 봤겠군.”
    “너 어디 갔냐고 찾던데.”
    코웃음을 친 유중혁이 자켓을 벗어 팔에 걸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생수병을 꺼내 뚜껑을 딴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을 좇던 김독자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쉬었다. 뭐 하는 거냐. 드르륵, 식탁 의자를 끌어 착석한 김독자가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그래서?”
    “뭐가.”
    “어디 갔었냐고, 오늘.”
    순식간에 병을 절반 정도 비운 유중혁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풀어낸 탓에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거슬리는지 다시 쓸어 넘기고는 생수병 뚜껑을 닫아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대답이 없는 유중혁을 바라보며 김독자가 슬그머니 입매를 휘었다.
    “왜 대답을 안 해?”
    “해야 하나?”
    “어. 해야지. 궁금하거든.”
    “평소에도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많았나.”
    평소에도. 그래, 평소 같았으면 개소리하지 마, 미쳤냐 등의 대답을 했을 김독자였다. 그리고 유중혁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만 올려 웃었겠지. 하지만 김독자는 그러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얼굴로 쳐다보자 눈치 빠르게 알아챈 유중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김독자?”
    “……그래, 관심 많았다 쳐라, 자식아.”
    애써 웃으며 눈썹을 찡그리자 유중혁이 그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을 조금 갸웃거렸다. 이 자식이, 왜 그런 짓을 해. 신경 쓰이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니.”
    후우, 결국 한숨 같은 심호흡을 한 김독자가 운을 떼었다.
    “너 선보러 갔었다며.”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눈을 조금 크게 뜨기는 했으나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제법 읽을 수 있게 된 김독자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등 쓸데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한수영이 말해주던데. 유상아 지인이랑 선보러 갔다고.”
    그 자식, 하고 중얼거린 유중혁이 성큼 걸어와 식탁 의자에 자켓을 걸어두고는 김독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새삼스럽게도 김독자는 그런 행동에서 낯섦을 느꼈다. 그 유중혁이 이렇게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다니. 멸망한 세계에서의 유중혁은 몇 마디 말 한번 제대로 나누기 어려운 놈이었다. 김독자 자신도 대화란 것과는 도통 친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 사이의 대화란, 대부분 몸으로 나눈 것이었다(절대 이상한 의미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검을 맞부딪혔다는 뜻이다-김독자는 재차 생각했다). 그래서 세계가 수복된 후,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사회성을 되찾고 적응해가는 유중혁의 변화에 되레 적응하지 못한 건 김독자였다. 김독자는 맞은편에 앉은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유중혁, 나는 아마도 살아있는 이들 중 너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일 거다.
    하지만, 그게 너를 완전히 안다는 뜻은 아니겠지.
    김독자는 유중혁이 멸망 이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설정값’의 영역이었으므로. 스물여덟 이전의 유중혁에 대해서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들만을 알 뿐이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어 기억이 없고, 유미아와 함께 자랐으며, 프로게이머 활동을 했었다, 고작 그 정도. 그래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의 네 옛날 모습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을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좋은 놈이라는, 그런 모습.
    그런 녀석이라면 아마, 누구라도 좋아하겠지. 거기까지 어렴풋이 생각이 미쳤을 무렵, 유중혁의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김독자.”
    “……어?”
    “어디 아픈 건가? 몇 번을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고.”
    쯧, 혀를 찬 유중혁이 손을 뻗어 김독자의 이마에 얹었다. 뜨끈한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독자는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문 채 유중혁을 쳐다봤다. 금방 손을 떼어낸 유중혁이 팔짱을 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너 체온 높잖아. 고작 그걸로 잴 수 있냐?”
    “날 뭐로 보는 거지.”
    김독자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별반 다름없는 얼굴을 한 유중혁이 지금, 도대체 왜 이렇게 얄밉게 느껴지는지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선보고 온 거 맞아?”
    머릿속을 추스른 김독자의 물음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예뻤냐?”
    “……네 녀석 머릿속엔 그런 생각뿐인가?”
    “아니, 그런 거 아니거든.”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유중혁의 얼굴에 김독자가 되레 인상을 썼다. 이 자식, 너야말로 날 뭐로 보는 거냐. 하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망설이다가 생각을 정리한 김독자가 긴 숨을 뱉었다.
    “……보통 그렇게들 물어보더라고.”
    “보통?”
    “아니 그냥,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어디서든 그러잖아. 누가 선보고 오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게 이런 거 아니냐.”
    엷은 한숨을 쉰 김독자가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식탁 바로 위에 꽂힌 전등빛을 가려 흰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달싹이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너도 알겠지만, 유중혁.”
    “…….”
    “내 주변엔 선보고 오는 사람 같은 거 없었거든.”
    그러니까 너한테 지금 처음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김독자의 얼굴은 애매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 그 표정을 바라보는 유중혁의 눈가에도 묘한 기색이 스치듯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김독자는 그대로 유중혁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눈을 떨궜다. 흰 손가락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까딱였다. 표정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이 자식 앞에서는, 마음의 빗장이 조금 느슨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래, 이게 원래의 자신이었다. ‘제4의 벽’이 없는 내가 ‘유중혁’을 앞에 두고 있는데 그럴 수밖에. 그렇게 생각했다.
    잠시 말이 없던 유중혁이 입술을 뗐다.
    “예뻤다.”
    “……허.”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자 유중혁이 특유의 무신경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그게 나한테 별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그래, 너 잘생겨서 좋겠다, 새끼야.”
    김독자의 험한 호칭에 유중혁이 눈썹을 들썩거렸다. 하지만 김독자는 부러 모른 척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 어땠냐고. 잘 됐어?”
    하아, 미간을 잔뜩 좁히며 한숨을 쉰 유중혁이 몸을 일으키며 옆에 걸어두었던 자켓을 다시 집어 들었다.
    “잘 안 됐다.”
    “……응? 왜?”
    “묻지 마라. 대답하기 귀찮다.”
    그렇게 말하며 유중혁은 제 방으로 향했다. 뭐야? 어쩐지 조금 김이 샌 기분이 된 김독자는 조용히 닫힌 유중혁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이내 솨아아, 하고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샤워하고 있겠네. 김독자는 식탁에 턱을 괸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긴 손가락이 흰 얼굴을 스쳤다가 떨어졌다. 왜 잘 안됐다는 거지? 저 잘난 놈을 마다할 여자가 있을 리 없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라도 그럴 놈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유중혁 자식, 초면이라고 또 무뚝뚝하게 입 다물고 있었던 거 아냐? 아니 근데 그러고 있어도 먹힐 놈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김독자의 손가락이 문득 멎었다.
    유중혁…… 앞으로도 계속 선보러 다니려나.
    이번엔 잘 안됐다지만 저렇게 잘난 놈-심지어 세계를 구한 사람들 중 하나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이 안 팔릴 리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사람이랑 결혼하나?
순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조여드는 듯한 감각이 스쳤다. 흠칫 놀란 김독자는 손을 내려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저린 감각은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뭐지. 건강검진이라도 받아야 하나. 물소리가 멈췄다. 곧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조용한 고요 속에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 그럼 혼자 살게 되겠네.
    그것을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언할 수 있었다. 그는 늘 혼자서 살아온 인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렇게…… 텅 비어버린 듯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인지. 김독자는 눈을 꾹 감았다.



    “축하해요, 독자 씨. 이제 정상 체중 범위에 들어왔네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이설화에게 김독자도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게 축하할 일까진 아니지 않나요, 그런 말을 하자 이설화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당연히, 축하할 일이죠, 하고 답했다.
    “원래도 그렇게 마른 건 아니었는데요.”
    “네에, 그렇죠, 그래도 수치상으로는 정상 체중 아래였으니까요.”
    키에 비해 마른 편이시죠, 독자 씨는. 김독자는 검사 결과지에 수치로 나열된 제 정보들을 가만히 살폈다. 키 176.2cm.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성장기를 보내고 이 정도까지 큰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역시 어머니를 닮은 걸까……. 짧게 생각하는 사이 걸려온 전화를 받은 이설화가 한숨을 쉬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눈 밑에 진 엷은 그늘을 보며 김독자가 물었다.
    “요즘도 많이 바쁩니까?”
    “그럼요, 말도 마세요. 정말이지 잠도 쪼개서 잔다니까요.”
    “본인 건강부터 챙기셔야죠.”
    의사잖아요. 그의 말에 이설화가 조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독자 씨는 여전하네요.”
    흰 손가락을 까딱인 이설화가 흠, 하며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다시 시선을 내려 그를 바라본다.
    “저는 건강해요. 물론 건강이라는 건 몸과 정신 양쪽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고요.”
    “다행이네요.”
    “독자 씨.”
    이설화의 곧은 시선을 받아내며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이설화가 신중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몸의 건강은 제가 관리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정신적인 부분은 아니에요.”
    “…….”
    “저는 봐드릴 수 없지만, 저희 병원에서는 멘탈케어센터도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힘든 부분이 있다면, 꼭 찾아오세요.”
    가령, 환상통이라든가, 악몽이라든가. 그런 증상을 앓는 분들이 아주아주 많답니다. 사실 저희보다 그쪽이 더 바쁜 실정이에요. 김독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둘 중 어느 쪽도 해당 사항이 없는데요.”
    “그럼 정말 다행이구요.”
    마주 웃은 이설화가 김독자의 어깨 너머 벽에 달린 벽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술 일정이 있어서요.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더 얘기 나누지 못해 아쉽네요. 검진 결과는 나오는 데 2주 정도 걸릴 거예요. 고개를 끄덕인 김독자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2주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이설화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띄었다. 잠시 멈칫한 김독자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네?”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실례되는 질문이 아니라면 좋겠는데요. 결혼…… 하십니까?”
    “아.”
    눈치 빠르게 김독자의 시선을 알아챈 이설화가 왼손을 들어 흔들었다. 미소 짓는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아직 계획은 없어요. 너무 바빠서요. 만나는 사람은 있지만요.”
    “그렇군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니에요? 결혼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요.”
    “아, ……그렇죠. 죄송합니다.”
    김독자의 얼굴을 보곤 농담이에요, 말하며 소리 내어 웃은 이설화가 고개를 까딱였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최근에 결혼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무슨 말이냐는 듯 갸웃하는 김독자에게 이설화가 계속해서 말했다.
    “세계는 안정되었지만 인구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죠. 어쩌면 그에 대한 반작용, 혹은 생존본능 같은 걸지도 몰라요. 종족 보존의 욕구,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음…….”
    “그런 거창한 말을 붙이지 않아도,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며 정이 든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때는 살아남기에 급급해서 미처 못 나눈 애정과 행복을 하루라도 빨리 찾고 싶어 하는 심리인지도 모르죠.”
    “…….”
    이설화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별로 대단한 얘기도 아닌데 너무 심각하게 말했나요? 제 개인적인 견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정희원과 이현성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그들도 곧 결혼할 거라고 했던가.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달칵, 문을 닫고 나오며 김독자는 생각을 털어냈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간신히 손에 넣은 행복이 사라질까 두려워 하루라도 빨리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클 수 있겠지. 당연하다. 그렇구나. 결혼이라…… 나한테는 너무 낯선 이야기인데. 온 김에 아일렌도 만나고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 김독자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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