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눈, 기적, 리플레이
시나리오의 끝, 2017년으로 돌아온 김독자

2018.12.11
시나리오의 시작년도가 2018년이라는 가정 하에 쓰여진 글입니다.











    0.

    네 손을 이끄는 그 역할이 내 사명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1.

    눈이 왔다.
    어, 눈이다. 김독자는 반색하며 까만 장갑을 벗어내고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봄날의 꽃잎처럼 팔랑팔랑 떨어져내리던 눈송이가 하얀 손 끝에 닿아 녹아내렸다. 재밌다는 듯 소리내 웃는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유중혁은 물끄러미 그 모양새를 지켜보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야, 중혁아. 이것 봐. 눈 온다.”
    “나도 보인다.”
    “새끼, 쌀쌀맞게.”
    투덜거리더니 한참이나 더 맨손으로 허공을 휘젓는다. 유중혁은 서늘한 공기에 발갛게 물들기 시작하는 손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감기 걸린다.”
    무심하게 말하고는 장갑을 빼앗아들고, 다시 그 흰 손에 끼워준다. 움찔하고 떨리던 손이 빠르게 안정을 찾고선 마음대로 하라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에 다시 장갑이 끼워지자 김독자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방긋 웃었다.
    유중혁은 착한 놈이다. 분하지만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 1년간 지켜본 결과 내린 결론이었고, 처음에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이게 유중혁이라고? 캐붕이다. 말도 안 된다. 내가 아는 유중혁은 이런 놈이 아닌데……. 그게 처음 세달 간의 감상이었고. 하지만…… 이것 봐, 유중혁이 지금 감기 걸린다고 장갑을 다시 끼워주고 있다니까.
    둘 사이가 연인, 하다못해 절친한 친구였다면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김독자와 유중혁은…… 그냥 적당히 얼굴 아는 지인 정도의 사이 아니던가. 그것도 일방적으로 김독자가 접근한 사이. 오히려 이 정도로 묵묵히 받아내주는 유중혁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김독자는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고맙다, 중혁아.”
    유중혁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탄성소리,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목소리. 그런 아이들을 챙기는 부모의 손길.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김독자는 불과 1년 전의 명동 거리를 떠올렸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나뒹굴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계절조차 잊은 세상이었다. 계절이 있다 해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코인으로 강화된 몸은 날씨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하늘에서 눈이 내리든 꽃잎이 떨어지든 비가 쏟아지든 우박이 깨지든 알 바가 아니었다. 촉수 쪼가리나 안 떨어지면 다행이었지. 김독자가 피식 웃었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오직…… 시나리오의 공략, 그리고 생존. 그 두 가지였다. 다른 곳을 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숨가쁜 시간이었고,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살아있다 느꼈던 시간이기도 했다. 김독자는 가방 한구석에 잠들어 있을 사원증의 네모난 모양을 마음 속으로 덧그리듯 만지작거렸다.
    “중혁아. 요즘 바쁘냐?”
    “아니.”
    “그럼 오랜만에 다 같이 만날래? 크리스마스 즈음 해서.”
    씩 웃으며 돌아보자 유중혁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길지 않았고, 이내 흔쾌한 수락의 대답이 돌아왔다. 가지. 김독자는 웃으며 연락할 사람들의 목록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잠시만……. 간단히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였다. 물론 이런 연락처 따위 뒤적이지 않아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이름들이었다. 유상아, 이길영,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한수영, 신유승…….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아, 이 연락처들 얻어내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김독자는 휴대폰에 표시된 날짜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2017년 11월 24일.







    2.

    처음 년도를 확인했을 때는 한참이나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볐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연히 2018년의 그 날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웬 2017년?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더욱 기이한 것은, 액정에 표시된 년도는 2017년이었으나 자신이 타고 있는 열차와 좌석은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마터면 휴대폰이 고장난 것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그래, 옆자리에 유상아가 없고, 맞은편에 이길영이 없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면. 김독자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두 사람이, 없다. 어째서? 2017년이라서?
    황급히 고개를 더 돌렸다. 이현성도, 김남운도 없다. 이 둘은 ‘등장인물’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사실을 자각하는 심장께에서 느껴지는 통증과는 별개였지만. 김독자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앞칸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유중혁. 제발. 손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발……. 정확히 뭘 원하는 지도 모른 채 문을 열자, 검고 긴 코트를 입은 남자의 장신이 한 눈에 보였다. 흘러가는 차창 밖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곧은 콧날, 가라앉은 눈. 심장이 마구 뛰었다. 팔짱을 낀 채 문가에 서 있는 남자에게 비틀비틀 걸어갔다. 유중혁.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목이 갈라져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중혁아. 그리고 남자의 강인한 팔을 붙잡자, 흠칫 놀란 시선이 되돌아왔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얼굴은 김독자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그 이목구비였다.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건.
    “누구시죠?”
    돌아온 대답에 김독자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사고가 정지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김독자, 침착해. 정리해보자. 나는…… 시나리오를 끝냈다. 가장 바라는 걸 이루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바로 지금같은 방식으로……. 씨발! 김독자는 이제야 이해했다. 하지만, 이딴 방식으로 이루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씨발, 이게 뭐야.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호흡이 가빠졌지만 앞에 유중혁이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김독자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시 읽는 거야…….
    유중혁이, 여기에 있다. ‘등장인물’이었던 유중혁이 여기에 있다는 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현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세계의 유료화가 시작됐던 건 2018년. 그러니까 김독자는 지금, 그 일이 일어나기 1년 전으로 돌아온 것인가. 확신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그래서 일단 고개를 들어올리고, 유중혁에게 물었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유중혁 씨 맞죠? 프로게이머…….”
    유중혁은 아, 하는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하나의 질문으로 얻어낸 정보들을 새겨넣었다. 이 세계의 유중혁은 프로게이머다. 그리고 제법 유명한 것 같다. 그다지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자주 있는 일인 것 같으니까. 그럼 하나 더 물어볼까……. 일단은 적당히 말을 좀 얹어놓자. 개복치 자식 표정이 이상해지기 전에.
    “아,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워서 그만……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온다. 김독자는 그 다음 질문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냥 막무가내로 나가기로 했다. 지가 뭐 어쩔 거야.
    “저기, 혹시 나이가 올해…… 스물 일곱?”
    “……예.”
    짙은 눈썹이 꿈틀거린다. 김독자는 이번에도 정보를 머리에 우겨넣었다. 지금은 2017년이 맞는 모양이었다. 휴대폰이 고장난 게 아니다. 그렇다면 아직 취직도 하지 않은 자신이 왜 이 열차에 타고 있으며, 유중혁 이 놈은 왜 앞칸에 타고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하자.
    이제 뭘 물어봐야 하나…….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시선을 떨군 채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자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김독자는, 말을 잃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고 투명한 눈동자가 기울어졌다. 그제야 김독자는 이 위화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유중혁 이 새끼가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김독자는 유중혁의 성질머리를 떠올렸다. 제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팔을 붙잡은 순간부터 인상이 팍 찡그려지며 손을 뿌리쳐냈을 것이었다. 아니, 좋게 봐줘서 뿌리치는 것까진 하지 않더라도 귀찮다는 이유로 다른 칸으로 금세 옮겨가버릴 놈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친절하게 묻는 말에 대답까지 해주고 있단 말인가.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불쾌한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젠장, 전지적 독자 시점이 없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그리고 서서히 차가운 현실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지금은 멸망 이전의 세계이며.
    유중혁은 자신을 모른다.
    냉기가 퍼져 손 끝이 얼어붙었다. 뒤늦게 새어든 겨울바람이 지하철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다. 저릿한 손 끝을 말아쥐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멸망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에서.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무슨 가치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멸망하지 않은 세계의 김독자는 살인자의 아들이었고, 때문에 변변찮은 대학을 나와 취업난에 허덕이는…… 심지어 2017년 지금, 아직 미노소프트에 취직도 하지 못한. 가진 것 하나 없는 백수다. 미래에 대한 정보도 없다. 멸망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유중혁에게…… 뭘 줄 수 있는데?
    화들짝 놀란 김독자가 파드득 뒤로 물러났다. 유중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독자는 도망치듯 몸을 돌려 때마침 열린 문으로 뛰쳐나갔다. 무슨 역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헉, 헉, 그다지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올랐다. 무작정 계단을 올라가다가 벽을 붙잡고 멈춰섰다. 차갑게 식은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멸망 이전의 세계에서, 유중혁을 붙잡아둘 명분이. 내게는…… 없다.
    눈을 질끈 감았다. 짙은 어둠이 몰려들었고, 김독자는 그보다 더 느릴 수 없는 걸음으로 몸을 옮겼다.







    3.

    김독자獨子는 외로움에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인간이었다. 그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걸 알았다. 고민을 나누지 않고, 스스로를 감추며, 받는 법을 모른다. 이기적인 인간이었다면 혼자서 이득을 독점하려 한다 생각했을 테지만 김독자는 꽤나 이타적이었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정했다. 그걸 잘 아는 정희원이 어느 날인가 말한 적이 있었다.
    ‘독자 씨는 외로워 보여요.’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그런가요? 되묻자, 정희원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익숙해지세요.’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에요.
    갑자기 왜 그 말이 생각난 걸까. 김독자는 멍하니 걸어가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익숙해지라고? 희원 씨. 익숙해지라고 했습니까. 김독자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익숙해져선 안 됐다. 그래, 이렇게 다시 혼자가 될 줄 알았더라면.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기분을 알지 못하는 편이 나았다. 김독자는 휴대폰의 연락처 목록을 잠시 떠올렸다. 텅텅 비어있겠지. 2017년의 나라면. 기껏해야 어머니나 친척들, 하나도 친하지 않은 대학 동기들이나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 정도일까……. 유상아도 아직 미노소프트에 입사하지 않았겠군. 그 전에 뭘 하고 살았는지는 모른다.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김독자는 허망한 심정으로 액정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 건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몸에 새겨진 기억은 충실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멸망 이전의 집은 하얗고, 싸늘하고, 추웠다. 분명 어제까지 누가 살고 있었던 듯 물건들은 어지러이 늘어서 있었지만 생활감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살았던가. 김독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겹겹이 쌓여 있는 편의점 도시락 용기는 다행히도 씻어둔 듯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버려야겠네. 몇 년만에 하는 분리수거인지. 이제 그런 건 다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몸이 움직이는 걸 보니 확실히 습관이 무섭기는 한가보다. 어정쩡하게 정리와 청소를 마친 김독자는 소파에 앉았다.
    이제, 혼자서 살아야 해.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자 곰팡이 얼룩이 눈에 띄었다. 저것도 지워야겠는데…… 지워야 하는데.
    어떻게 혼자서 살아야 하는 거지.
    숨이 탁 막혔다. 목덜미가 조여들었다. 산소가 부족해진 것처럼 시야가 흐려졌다. 김독자는 눈가를 열심히 문질러냈다. 혼자서 사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았다. 하나도.
    시발. 애꿎은 소파의 천을 쥐어뜯었다. 분명 그 세계를 현실이라 믿지 않으려 애써왔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조금 안일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고…… 세계가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그리고 그 세계에, 내가 알던 이들, 나를 아는 이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살아 숨쉬며…… 나를 기억해 줄 것이라고. 그런데, 아닌 모양이다. 아니었다. 김독자는 여전히 혼자였다. 그 세계는 꿈처럼 사라졌고, 남은 건 기억 뿐이었다. 손으로 문질러낸 보람도 없이 눈시울이 다시 시큰해졌다.
    김독자는 물기를 닦아내는 것을 포기했다. 일단은 유중혁이 이 세계에 있으니…… 다른 '등장인물'들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떡하란 말인가. 그들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제 와서 어쩌란 말인가.
    김독자는 이제 그들의 구원자일 수 없었다. 하다못해 동료일 수도 없었다. 그런 자신이 무슨 수로 동료들의 마음을 얻어내고 관계를 맺는단 말인가. 차가운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김독자는 무릎을 세워 고개를 묻었다. 그대로, 한참이나 바지를 적시며 울었다.







    4.

    그렇게 꼭 3일이 지났다. 김독자는 부스스한 눈을 떴다. 빛이 새어들어오는 창문에 눈이 부셔 두어 번 깜빡이고.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사람은, 외로움으로도 죽는다.
    외로움에 지나치게 익숙했던 어린 시절에는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하, 씨발. 웃기는 일이다. 김독자. 너 이렇게 나약한 놈이었냐. 그 개같은 시나리오들을 다 끝내고 왔는데도 이것밖에 안 돼? 그럼 그 시간들은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였단 말인가. 그래선 안 됐다. 어떻게 견뎌낸 시간들인데, 이렇게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이제는 나도……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김독자는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깔끔한 옷을 챙겨 입었다. 머리를 쓱쓱 빗어 넘긴 뒤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확인했다. 기억보다 혈색이 조금 없고 마른 듯한 얼굴이었으나 환자처럼 보일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두 손으로 뺨을 톡톡 두드리고 문을 나섰다. 집 밖을 나선 뒤에야 아차 하고 생각이 들었다. 바라면…… 이 시간에 문을 열지 않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 정신을 다 못 차린 모양이다. 그래서 김독자는 단서가 있는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태풍여고의 위치를 검색하고, 확인한 뒤,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하니 마침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운동장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김독자는 먼발치에서 눈을 굴려 아이들의 얼굴을 훑었다. 한참이나 훑다가 드디어, 간신히 이지혜로 보이는 얼굴을 발견했다. 그런데, 젠장. 가까이 갔다간 경비원에게 제지당할 것 같다. 여고 앞에서 서성거리는 스물 여덟…… 아니 일곱의 남성이라니. 누가 어떻게 봐도 수상하다. 무슨 방법이 없으려나? 짧게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 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뭐지? 김독자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시선은 조금 더 늘어났고, 이지혜도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뭐야? 내가 뭘 잘못했나?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교문 밖에서 마주 지켜보는데 이지혜가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왔다.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를 입은…… 조금은 그리운 듯한, 기억하고 있는 얼굴보다 훨씬 앳된 모양새. 금세 걸어와 눈 앞에 서더니 묻는다.
    “아저씨 뭐예요?”
    그 말에, 아. 눈가가 뜨끈해지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아저씨라고 불러주는 말이 이렇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물론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니 이렇게 부르는 거겠지만. 잠시 대답이 없자 이지혜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김독자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너 이지혜 맞지. 2학……”
    말하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2017년이었지. 젠장, 이지혜가 1학년 때 무슨 반인지는 모르는데! 그래서 얼른 말을 돌렸다.
    “……1학년.”
    “어떻게 알아요?”
    이지혜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하지만 김독자는 짧게 숨을 가다듬었다. 김독자, 네가 제일 잘 하는 거 있지 않냐. 세상이 멸망하기 전으로 돌아왔다고 너까지 바뀌는 건 아니잖아?
    김독자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사기꾼의 웃음이었다.







    5.

    해가 져서 어둑해진 시간, 김독자는 바의 문을 열었다. 어슴푸레한 조명이 비추는 실내에 재즈 음악이 흐르고, 옅은 나무 냄새같은 것이 코 끝을 스쳤다.
    “어서오세요.”
    이른 시간에 방문해서인지 내부에는 손님이 없었다. 테이블 위를 닦던 긴 머리 여성이 인사를 건넸고, 김독자는 웃었다. 이지혜를 어렵게 설득해서 전화번호를 얻어낸 뒤, 정희원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시도를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플러팅? 그딴 건 모른다. 쉽게 넘어올 정희원이 아니라고도 생각했고. 김독자는 묵묵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이 얼굴을 보고 귀염상이라고 생각했던가.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자신의 검이 되겠다 말했던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자신을 믿어주었고, 그렇기에 질책도 원망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김독자는 정희원을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믿어주세요, 희원 씨. 이전의 내게 그랬던 것처럼.
    “오랜만입니다. 정희원 씨.”
    그렇게 입을 연 김독자의 눈이 반짝였다.







    6.

    김독자는 카■오톡을 열었다. 맨 위에 고정된 채팅방에 그새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300. 언제 이렇게 많이 쌓였어? 김독자는 설핏 웃으며 유중혁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야, 중혁아. 그새 이렇게 또 쌓였다. 너 읽었냐?”
    “아니.”
    “그치? 그럼 일단 모이자고 얘기부터 해야겠다.”
    채팅창을 열어 밀린 채팅을 치운 뒤 용건부터 전했다.

크리스마스 즈음 주말에 시간 안 되시는 분?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는 거 어떻습니까
이지혜
헐 ㅁㅊ 완전좋음

정희원
주말이요? 좀 곤란한데 시간 내볼게요

이현성
저는 늘 주말 비어있습니다!

한수영
아 귀찮게 또 왜

유상아
토요일 일요일 중에 언제요?

1박 2일 어떨까 생각하는데요.
힘들까요

이지혜
아 그럼 부모님 허락받아야되는데ㅠ

한수영
뭘 거창하게 1박씩이나?

유중혁 온다
이지혜
?????????실화?

정희원
예???진짜요?

이현성
헐 꼭 가겠습니다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일정을 조율했다. 옆에 서서 걷고 있는 유중혁의 의견을 들어가며. 그리고 결과적으로 정해진 날짜는 12월 23일이었다. 크리스마스 직전 주말인데 정말 괜찮냐고 여러 번 물었으나 다들 애인 같은 거 없으니 우리끼리 부어라 마셔라 하자 분위기였다. 정말이지 웃기는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니까
제가 김남운이랑 이설화 씨 연락처가 없는데
이지혜
나한테 시키지 마요 나 김남운번호지움

한수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번호있는거 다알아 빨리연락해
이지혜
아 번호는 있는데 차단했단말이에요ㅡㅡ

정희원
걔 아직도 새벽 두시에 전화하고 그래?

이현성
새벽 두시에 전화를 왜...??

유상아
이참에 아예 두 사람 여기에 초대할까요?

그것도 좋구요
이지혜
시러시러시러

나 걔랑 같은방 늘리고싶지않아


    이지혜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김남운도 카■방에 초대되었다. 이설화는 채팅창을 읽던 유중혁이 초대해서 합류하게 되었고. 다시 한 번 더 일정을 조율한 김독자는 확실히 픽스된 일정을 공지사항으로 등록한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 손시려. 때이른 추위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느라 장갑을 벗어두었던 하얀 손이 굳어 있었다. 손을 쥐락펴락하며 다른 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장갑을 꺼내려는데 유중혁이 손을 잡아챘다.
    “뭐야, 갑자기.”
    맞닿은 피부로부터 뜨끈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이 놈은 겨울인데도 손이 따뜻하네. 체온이 높다는 건 원래 알고 있었지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조금 당황한 김독자가 손을 빼내려 했으나 유중혁은 놔주기는 커녕 다른 손까지 뻗어 그의 하얀 두 손을 붙잡았다.
    “야, 왜 이러는……”
    “손 얼었잖아. 그대로 장갑 껴봤자 차갑기만 하지 않나.”
    하여간 쓸데없이 친절한 새끼였다. 김독자는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지만 손을 빼내려는 시도를 관뒀다. 수족냉증 인간한테 언 손으로 장갑 끼기는 냉동고에 손 넣기나 비슷하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걸로…… 젠장. 정말이지 적응 안 된다. 멸망 이전 유중혁의 상냥함이란. 느릿하게 손등을 문지르는 긴 손가락을 보며 김독자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넌 연애 안 하냐?”
    “연애?”
    “크리스마스 이브날에도 떡하니 이런 약속 잡고. 그래도 괜찮냐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빤히 보는 시선에 김독자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없이 평온해보이는 얼굴. 아, 전지적 독자 시점 정말이지 그립다……. 그래도 멸망 후의 세계에서는 눈빛이나 표정으로 대충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 날, 지하철에서 도망친 뒤로 유중혁에게 다시 접근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때. 김독자는 그답게 온갖 상황을 상정하며 경우의 수마다 반응들을 정해뒀으나…… 유중혁은 첫 마디로 그 모든 것들을 와장창 깨버리지 않았던가. ‘기억합니다. 저번에 지하철에서 만났던 분이시죠.’ 하,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김독자는 그만 머리 위에 떠오른 물음표들에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방금 뭐랬지? 유중혁이 날 기억한다고? 존나 이게 뭔? 그리고 그 후로 김독자는 꾸준히 유중혁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희미하게 곡선을 그리는 모양새 좋은 입술을 보면서.
    멸망 이전의 유중혁은, 믿을 수 없게도 상냥하고 좋은 인간이었다. 물론 언사는 좀 거칠었고, 그다지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지만…… 본질이 그랬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인정하게 되었을 때, 김독자는 가슴을 저미는 듯한 서글픈 감각에 밤을 지샜다. 이렇게 좋은 놈이 세계의 유료화 이후로 ‘그렇게’ 변해버렸다니. 심지어 1863회차에서는……. 김독자는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 사실 알고 있었다. 유중혁 이 놈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놈이었다. 세계를 위해, 곧고 선한 단 하나의 대의를 위해 스스로의 행복을 아낌없이 희생한 인간. 그게 유중혁이었다.
    “그냥 해본 말이야.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사람 없다.”
    “장난하냐. 빈말도 정도가 있지.”
    퉁명스럽게 말하며 손을 빼내자 웬만큼 덥혀졌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놔준다. 김독자는 다시 주머니에서 장갑을 꺼내 손을 밀어넣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목을 타고 퍼져나갔다.







    7.

    “자, 그럼 건배해요.”
    “잔 안 채운 사람 없지?”
    “건배사는 뭘로 합니까?”
    “아, 당연히 정해져 있잖아요?”
    “난 그거 싫은데.”
    투덜거리는 한수영의 말을 뒤로 하고 일행들이 소리내서 웃었다. 펜션 바닥에 술판을 벌여놓고 둥글게 모여 앉은 채였다. 김독자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정희원이 기다렸다는 듯 건배사를 외쳤다.
    “김독자 컴퍼니!”
    “화이팅!”
    째앵. 쨍. 잔들이 맞부딪히고,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김독자는 입 안을 맴도는 씁쓸한 맛을 털어내며 새삼스러운 얼굴로 일행들을 바라봤다. 무릎을 모아 세우고 얘기를 나누고 있는 유상아와 이설화. 술병에 손을 내미는 김남운의 딱밤을 때리는 한수영과 그걸 보고 깔깔 웃는 이지혜.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우고 있는 유중혁,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고 있는 정희원과 이현성. 왁자한 분위기에 고작 술 한 잔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정말이지, 새삼스럽게도. 김독자는 매끄러운 소주잔의 표면을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모두가 다시 모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이지 자신이 없었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김독자는 입을 다물고 잔에 소주를 다시 채웠다. 이지혜는 처음에 사기를 쳐서 꼬여냈으나, 정희원에게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미친놈이라고 뺨을 맞을 각오까지 하지 않았던가. 실제로도 반쯤은 맞을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 정희원은 김독자를 믿어주었다.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만약 <스타 스트림>의 세계였다면, 개연성을 한참이나 쏟아부어야 했을 만한 전개 아닌가. 이딴 헛소리를 믿어요? 정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묻자, 정희원이 난처한 표정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어쩐지 믿고 싶어져요. 당신의 말을 듣고 있으면. 김독자는 그 말을 되새기며 다시 입 안에 술을 털어넣었다.
    그마저도 아마…… 무언가의 ‘개연성’이겠지.
    “김독자 천천히 마셔. 술도 못 하는 게.”
    한수영이 핀잔을 주며 술잔을 뺏어갔다. 그 얼굴을 보며 김독자는 짐짓 서러운 얼굴을 했다.
    “아, 좀 마시고 싶을 수도 있지.”
    “너 꽐라되면 누가 책임지라고? 장난?”
    “내 몸 하나 정도는 챙길 수 있거든.”
    “헐. 방금 얘 말 들은 사람?”
    한수영이 기가 막히단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지난번 술자리에서 금방 곯아떨어져 테이블에 엎어져 있는 걸 간신히 택시 태워 보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 부르르 떤다. 주변 사람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만 주억거렸다. 김독자는 조금, 아니 진심으로 억울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라고 술 못 마시고 싶은 게 아니거든, 인마.
    “알겠어. 천천히 마실 테니까 잔 내놔.”
    “못 믿겠는데. 술도 못 하는 게 왜 빨리 마시는 거야 대체?”
    시발, 니가 뭘 알어. 내가, 어? 네 10년 후 얼굴도 아는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죽기 직전까지 피를 쏟고 사지가 바스라져가던 기억이 다 있는데. 죽음의 문턱까지 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고된 시나리오를 견디다 못해 서로를 향해 내뱉어지던 모진 말과 검격, 불꽃과 파도를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하나가 되어 결말을 맞이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그저 감사했다.
    그러한 모든 일이 없었음에도, 다시 모두가 이렇게 모여 있을 수 있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기적에.
    “……이 새끼 왜 웃어?”
    한수영이 소름 돋는다는 얼굴로 제 팔을 문질렀다. 옆에서 유상아가 소리내서 웃었다.
    “독자 씨는 역시 웃을 때가 보기 좋아요. 회사에서는 늘 무표정이라,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거든요.”
    “맞아요, 독자 씨 웃을 때랑 안 웃을 때랑 갭이 크던데요.”
    “제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역시 웃는 얼굴이 좋죠.”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잽싸게 한수영에게서 잔을 빼앗아 들었다. 어어, 야! 걱정 말라니까. 정 걱정되면 이 놈 옆에 붙어 있을게. 그렇게 말하며 유중혁 옆자리에 앉자 한수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야, 유중혁. 걔 감시 좀 해.”
    “귀찮은데.”
    “좀 해주세요. 중혁 씨 아니면 저 망나니 누가 말려요.”
    뭔데. 내가 망나니 취급 받을 정도로 뭘 잘못했나. 여기서는 아직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진짜로! 김독자가 세상 억울한 얼굴을 했으나 정희원이 절대 안 된다는 듯 엄한 얼굴을 했다. 이설화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맞은편에서는 이현성이 저도 같이 감시하겠습니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웃음소리와 시끌벅적한 대화를 들으며, 김독자는, 아. 그래. 내가 바랐던 행복은, 이런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8.

    “그럼 그렇지. 이 새끼 꽐라됐네.”
    한수영이 끌끌 혀를 찼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머리를 기대고선 꾸벅꾸벅 조는 김독자를 발 끝으로 툭툭 차본다.
    “야, 일어나. 많이 취했냐?”
    “으으응…….”
    뭐라 웅얼거렸지만 도대체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한수영은 한숨을 푹 쉬며 주변에 앉은 놈들을 노려봤다. 아니, 노려볼 놈도 몇 안 남았다. 이미 취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이현성과 그 옆에서 헤롱거리고 있는 김남운(저건 언제 술 처먹었대?). 그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이지혜와 유상아. 유상아도 얼굴이 발간 게 좀 취한 것 같다. 혀를 두어 번 더 차고. 이설화는 언제 병원에서 호출이 올지 모른다며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있더니 기어이 호출을 받고 나간 뒤였다. 그나마 정신이 있어 보이는 건 자신과 정희원, 그리고 유중혁이었다.
    “야, 감시한다며.”
    “이 정도로 약할 줄은 몰랐다.”
    “뭐래. 하여간…….”
    하긴 어차피 여기서 자고 갈건데 별로 걱정은 안 해도 되나. 토하지만 말아라. 한숨을 폭 쉬며 그 옆에 쪼그려 앉자 정희원도 가까이 와서 앉았다. 졸고 있는 김독자를 구경하더니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본다. 진짜 존나 취했나봐요. 안 깨네. 말하고는 정희원이 웃었다. 어느새 유상아와 이지혜도 주변을 둘러쌌다.
    “독자 씨…… 신기한 사람이죠.”
    정희원의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랬다. 김독자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꼭 집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비상했다. 뭐, 얼굴도 예쁘장한 편이고, 언변도 제법 괜찮은 편이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독자 씨를 보면…… 어쩐지 조금 그리운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 말대로였다. 어둑한 조명 아래 흘러내린 김독자의 가느다란 머리카락과 속눈썹을 응시하던 이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어쩐지 믿어주고 싶고, 등을 내어주고 싶었다. 무언가를 빚진 기분?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말하자면 이 감각은…… 그래, 전우애였다.
    “이상하죠?”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놈이다. 아주 이상한 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 명을 따라 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 아니던가. 일행은 새삼스럽게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 눈꺼풀 아래에 잠들어 있을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빛나던 것을 어쩐지 아득하게 기억하며. 정희원만이 뜻모를 미소를 조금 흘렸을 뿐이다.
    “뭐, 그런 거 아니었어도 아마 친하게 지냈을 것 같은데. 재밌는 놈이잖아, 이거.”
    “맞아요. 첨에 나한테 사기 좀 치기는 했는데…… 그래도 그 날은 좀 웃기긴 했다. 학교 앞에 웬 잘생긴 남자 있다고 난리 났었다니까.”
    “잘생……? 누가?”
    “아, 내가 말한 거 아니다! 난 잘생겼다고 안 했어요! 얼굴이야 우리 사부가 훨 낫지.”
    이지혜의 뒤를 따라 너도나도 김독자와의 첫만남을 이야기하며 추억에 잠겼다. 벌써 1년이나 됐네, 그런 이야기들도 오갔다. 어떻게 이런 신기한 조합을 모았는지 모르겠으나 다들 만나게 되어 기쁘다는 조금은 낯간지러운 이야기들도 술기운에 털어놓아졌다.
    툭, 김독자의 고개가 꺾여 유중혁의 어깨에 부딪혔다. 유중혁은 빠르게 손을 뻗어 그 이마를 받쳐들었다. 조금 귀찮은 듯한 기색이 있기는 했으나 순순히 팔을 붙잡고 부축해 일으킨다.
    “눕혀놓고 오지. 침실이 저쪽이던가?”
    “응. 엄한 짓 하면 안 된다?”
    “내가 너인줄 아나.”
    “뭐, 뭐? 저 저 유중혁 나쁜 새끼……”
    장난을 치려 하기에 되갚아주고 욕설은 귓가로 흘리며 김독자의 가벼운 몸을 들쳐메다시피 부축했다. 하여간 너무 가볍다. 뭘 먹고 살길래 이렇게 살이 안 붙는지. 마음같아선 입에 들어가는 것들을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으나……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니까. 짧은 생각을 하며 유중혁은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래에서 김독자가 뭐라 웅얼댔으나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뒀다. 침실 문을 열고, 나란히 놓인 침대 중 하나에 흐느적거리는 몸을 눕혔다. 옷이 좀 불편할 것 같기는 했으나 그것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겠군. 몸을 똑바로 돌려준 뒤 이불을 들어 덮어주려는 찰나 김독자가 부스스 눈을 떴다.
    “으음…….”
    “자라. 김독자.”
    눈가를 손으로 가리며 이불을 덮어주자 김독자가 손을 들어 커다란 손을 치워냈다. 뭐지. 고요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눈을 껌뻑거린다. 그에 맞춰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아, 우리 중혁이 잘생겼네.”
    “……헛소리 그만 하고 자라.”
    “씨이, 칭찬해줘도 뭐래…….”
    평소엔 하지도 않는 소릴 해대는 걸 보니 확실히 취했군. 하지만 그 말의 어감은 나쁘지 않았기에 유중혁은 별다른 핀잔을 더 얹지 않았다. 저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김독자를 보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다급히 팔을 붙잡는다.
    “중혁아. 잠깐만.”
    취한 것 같은데……. 유중혁은 미미한 귀찮음을 느끼면서도 성실하게 붙들려 그의 옆에 앉았다. 김독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 겨울하늘만큼이나 새하얗던 피부가 술기운 탓인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휘어지는 눈꼬리 끝도 조금 붉은 듯했고. 유중혁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웃어라, 김독자. 남의 속도 모르면서. 김독자가 입을 뻐끔거렸다.
    “중혁아아.”
    “왜.”
    “니가 여기 있어서 진짜 다행이다…….”
    무슨 소릴까. 유중혁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열이 올라 뜨끈한 얼굴에 이런저런 표정들이 오갔다. 화가 난 듯 눈살을 찌푸렸다가도, 이내 풀어져서 서글픈 표정을 하고.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워 모두 읽어낼 수가 없었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유중혁은 묵묵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중혁아아. 있잖아. 나느은……”
    “듣고 있다.”
    “나는…… 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빌었거든…….”
    “…….”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의 연속이다. 김독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니가 그냥 적당히 행복한 거 말고. 진짜로, 엄청 행복해졌으면 했거든. 그래서어, 그래서 이렇게 됐나봐.”
    “똑바로 설명해라, 김독자.”
    “설명 못 해애…… 못 해…… 그냥 기다리면 알게 돼…….”
    “기다린다고?”
    “으응……. 조금만 기다리면. 알게 될 거야. 중혁아아.”
    말꼬리가 점점 더 늘어지더니 이내 눈이 가물하게 감기고,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이어졌다. 유중혁은 손가락 끝을 뻗어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공기를 타고 열기가 전해진다. 왜일까, 이 녀석은 언제나…… 무언가 슬픈 미래를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한다. 우스운 이야기인가.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 ‘슬픈 미래’같은 건 너무 거창한 이야기일까.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를 만난 뒤 때때로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가슴이 죄여들 정도로 불안한 무언가의 예감을,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찰나의 통증을. 그것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길이 없었고, 늘 아주 짧고 간헐적이었기에 그다지 신경쓰지도 않았지만. 사실 신경쓰이는 감각은 그것 뿐이 아니었기에 챙길 여유가 없기도 했다.
    유중혁의 긴 손가락이 김독자의 뺨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낯선 감정에 사로잡힌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들 중 누구는 빚진 느낌이라 했고, 누구는 전우애라 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는 달랐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것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그를 따라 이불이 덮인 가느다란 몸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한다. 그 평온한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유중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왔다.







    9.

    네가 어른이 되는 그 계절이 서글픈 노래로 넘쳐흐르지 않도록
    마지막에 무언가를 네게 전해주고 싶어서.*







    10.

    김독자는 생각했다. ‘오늘이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등골을 타고 짜릿한 예감이 솟구쳤다. 제법 불쾌한 감각이었고, 김독자는 감출 길 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억누르며 지하철에 올랐다.
    이 풍경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선명하게 기억한다. 노을져가는 서울의 하늘 아래를 달리는 지하철, 덜컹거리는 소음. 옆자리에 앉은 유상아로부터 흘러나오는 좋은 향기. 채집망 속에서 날개를 떠는 곤충의 소리. 모든 것을 기억한다. 오늘이 그 날이다. 세계의 유료화가 시작되는 날.
    처음 2017년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날, 김독자는 모든 사태의 전말을 알아차렸다. 시나리오의 끝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김독자는 원하는 것을 하나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한 가지를 선택했다.
    나는 유중혁의 행복을 원한다.
    다른 이들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그 곳은 서울이었고, 2017년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래서 김독자는 눈치챘다. 내 바람은 이루어졌다. 그것도 전혀 상상해 보지 못한 형태로.
    수많은 가짓수를 생각했었다. 모두가 기억을 잃고 2018년의 그 날로 돌아간다. 혹은 기억을 모두 가진 채 2018년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나 혼자 ‘등장인물’들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돌아간다. 그것도 아니면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은 채 지금 이 상태에서 지구가 원래대로 복구된다, 등등……. 하지만 그 수많은 예측 중에서도 이런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에 알아챌 수 있었지만.
    유중혁은 이미 많이 지쳤다. ‘3회차’란, 1863회차보다야 아득히 적은 숫자지만…… 이미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비극을 등에 지고 있다. 애초에 기백 년이나 되는 시간을 살지 않았던가. 따라서 세계를 구했더라도 기억을 가진 상태로 돌아간다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런 것은 예상했었다. 그렇다고 기억을 모두 지워 돌려보내자니, 그것까지는 <스타 스트림>의 결말이 가진 힘으로도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중혁은 ‘회귀자’이자 ‘초월좌’이고, 그를 위한 새로운 세계선이 있어야 했을 것이며…… 시발, 자세한 사정같은 건 어찌 되든 좋다. 어쨌든 그들은 돌아온 것이다. 2017년으로.
    멸망을 대비할, 1년의 유예를 얻으며.
    그 좆같은 시나리오를 다시 수행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이것이 그 망할 ‘개연성’의 대가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그저 조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그 유중혁의 행복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바람이었던가.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큰 슬픔을 끌어안고 있는 걸까. 유중혁, 인마. 네가 행복해지는 게 이 정도로 어려울 일이냐.
    다만, 아직까지도 납득되지 않는 것은 있었다. 어째서 김독자의 세계선과 유중혁의 세계선이 합쳐졌는가. 유중혁은 ‘등장인물’이다. 김독자의 원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째서 <스타 스트림>은 둘을 같은 세계선에 두는 어려운 일을 해야 했던 것일까. 김독자는 그저 그것이…… 유중혁이나 다른 사람들의 '소원'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스마트폰의 액정을 켰다. 오후 6시 50분. 10분 후면, 다시 세계의 유료화가 시작된다. 침착하자. 어떻게 해야 할 지 몇 번이나 생각해 왔잖아. 할 수 있다. 가능하다.  이미 준비도 모두 마쳤다.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모두를 구할 것이다. 그리고, 진짜 행복을 찾아줄 것이다. 김독자는 몸을 일으켜 앞 칸으로 움직였다. 자신을 발견한 유중혁의 눈이 조금 커졌다.
    “김독자?”
    “유중혁.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김독자는 조금 긴장한 기색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곧 세계의 유료화가 시작될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의 수행을 위해서 이게 필요할 거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며 미리 준비해뒀던 메뚜기 한 마리를 손에 쥐여주니 유중혁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유중혁. 날 믿어줘. 할 수 있지? 부탁한다.”
    “김독자.”
    “제발.”
    유중혁은 김독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요한 수면처럼 가라앉은 눈동자에 김독자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
    알고 있었구나.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 안에서 김독자는 이미 대답을 얻어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씨발, 그래, 언제는 이해한 적이 있던가. 이 모든 불합리한 일을.
    그저 받아들여 왔을 뿐이지.
    유중혁은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독자.”
    “응?”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오늘은 안 되겠군. 아니, 당분간은…… 인가.”
    무슨 소린가 싶어 미간을 좁혔으나 유중혁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대신 다른 얘기를 해주지.”
    “…….”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더.
    세계를 구하자.
    언젠가의 자신이 했던 말을 아득한 선언처럼 들으며, 김독자는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었다.
    어쩌면, 김독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유중혁. 시나리오의 끝에서 네가 빌었던 소원은…… ‘김독자의 행복’이었을까. 시나리오 안에서 ‘동료들’과 함께 행복을 얻었던 자신을 위해 ‘등장인물’이 세계에 재생되었으며. 그 대가로 시나리오까지 재생되었다. 그리고, 유중혁의 행복을 위해 멸망 이후의 기억이 없을 2017년의 세계선으로 이동했다.
    두 세계선이 합쳐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이 ‘김독자와 유중혁의 행복’이었으니까.
    시발, 개새끼. 하여간 직진밖에 모르는 새끼. 그럴 거였으면, 이렇게 멀리 올 필요 없었잖아. 여기에…… 샛길이 있다고.
    김독자는 유중혁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빠르게 입술을 떼어낸 뒤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동공이 둥그렇게 확장된 그 얼빠지고 잘생긴 얼굴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살아서 보자. 개복치 새끼야.”
    그리고, 등을 돌려 다시 뒷칸으로 향하며.
    김독자는 행복감에 짧게 몸을 떨었다.
 









* 奏 / スキマスイッチ (가사)

  

arrow_upw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