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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all
김독자 생일 축하해

2024.02.15
2024년 김독자 생일 기념글
* 전독시 본편 완결, 외전 135화 언저리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었는데
요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 설정 오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Re:call [rɪˈkɔːl] 기억해 내다, 기억, 소환



    ‘혹자는 자신의 R이 Respect(경의)라고 했다. 어떤 이는 Reach(도달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Remain(남아있다)라고도. 그렇다면 이 소설을 쓴 작가의 R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크으……. 윤대유는 마우스 휠을 돌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만족스러운 글줄을 읽었을 때의 벅차오르는 고양감. 그녀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을 조금 더 음미했다.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덕에 얼굴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잠시 그대로 열기를 식힌 윤대유는 고개를 들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어둑한 방 안에서 그녀를 향해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화면에는 어떤 블로그 창이 떠올라 있었다.
    얼핏 보기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블로그였다. 그 흔한 블로그 스킨 하나 적용되어 있지 않은, 투박하기 짝이 없는 블로그.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이■루스마냥, 때로는 심플 이즈 베스트임을 그녀는 이 블로그를 찾아내고 깨닫게 되었다.
    ‘■■■ 보실 분’. 블로그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뭐 이딴 이름의 블로그가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윤대유는 그 당시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이었다. 어떤 웹소설을 읽고 더할 나위 없이 큰 감회에 젖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 긴 소설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특별한 내용도 없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오래된 클리셰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망한 삼류 웹소설. 하지만 웹소설-장르소설-은 글의 완성도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이 평소 윤대유의 지론이었다. 그 망소설은 분명 그녀의 심장 어느께를 건드렸다. 그런 소설을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이 20여년 가까이 된 미완결 웹소설이었다는 것은 분명 큰 불운이었다.

    ‘그래서, 완결은 어떻게 되는 건데!’

    윤대유는 내적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완결이 나지 않은 거지? 심지어 이야기는 거의 마무리되고 에필로그에 가까운 최종장만이 남아 있었는데……. 물론 이유는 뻔했다. 팔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연재가 중단된 거다. 프로의 세계가 잔혹한 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그 소설의 제목을 기억하는 사람도, 작가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상황이지만 윤대유는 급한 대로 검색 엔진에 소설의 제목을 써 넣었다.
    그렇게 그녀는 이 ‘리뷰 블로그’를 만났다.
    새 창에서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윤대유는 직업병처럼 블로그의 ui를 빠르게 훑었다. 블로그 이름, ‘■■■ 보실 분’. 분류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단일 카테고리. 전체 글 갯수(91). 그 밑에는 최신 글 목록. 그녀의 눈은 빠르게 움직이며 최신 글 목록 열 개를 읽어내렸다. 전부 소설 리뷰인지 [제목-작가] 순서대로 제목이 붙여져 있었다. 하지만 목록 열 개 중 그녀가 아는 작품은 하나도 없었다.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사람인가? 웹소설 깨나 읽은 그녀가 아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니. 하긴,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인가. 그녀도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이 블로그에 들어올 일은 아마 평생 없었을 것이다. 검색 결과가 몇 되지 않았고, 그 중 하나가 이 블로그라는 절망적인 상황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결코 눌러볼 일 없었을 링크.
    그녀는 그다지 큰 기대감 없이 포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블로그는 숨은 보석함이었다.
    고작 리뷰글이 소설이나 영화 같은 작품보다 읽는 이의 가슴을 울릴 수는 없는 법이다. 윤대유가 방금 읽은 포스트도 분명 그녀가 읽은 소설과 같은 감동을 그녀에게 전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리뷰에는 진실됨이 있었다. 미사여구 없이 간결한 문체로 소설의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어느 부분이 아쉬웠는지가 적혀 있었다. 아주 빼곡하게.
    리뷰어는 소설의 장면 장면을 꼽아가며 이 부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왜 좋았는지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그것을 읽은 순간의 감상도 고스란히 여백에 담아 넣었다. 윤대유의 손이 옅게 떨렸다. 그녀는 리뷰어의 건조한 문장에서 그가 느꼈던 감동과 경탄을 읽었다. 동시에 그 장면을 읽었던 그녀의 감상이 되살아나 다시 가슴을 울렸다.
    리뷰글을 다 읽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 블로그의 주인은, 분명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윤대유는 그 소설이 그녀에게 준 벅찬 감동을 공유하는 상대가 존재함에 감사했고 또 기뻤다. 이 사람이 쓴 다른 리뷰글도 읽어보고 싶었다. 분명 또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마우스를 움직여 ‘전체 글 보기’를 눌렀다. 최신 글 목록 열 개 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그보다 오래된 포스트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다행히도 그녀가 아는 작품이 몇 개 보였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리뷰글들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날밤을 새가며 블로그를 탐방한 윤대유는 결심했다.
    월간 잡지, <다시 읽기> 이번호 특별 기획에…… 이 사람과의 인터뷰를 실어야겠다.



    “안녕하세요.”

    의자에 앉아 인터뷰 자료를 점검하고 있던 윤대유는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히 일어나는 바람에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막듯이 서 있는, 문틀에 닿을 만큼 키가 큰 사내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일을 하면서 연예인도 제법 많이 만나 보았지만, 단언하건대 윤대유는 살면서 그만큼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 짙은 눈썹과 심유한 눈동자. 높은 콧날과 굳게 닫힌 입술, 단단한 턱선과 목울대가 불거진 목을 지나 잘 재단된 블랙 스트라이프 쓰리 피스 수트. 그 아래에는 분명 잘 단련된 탄탄한 몸이 있을 것이다. 남자는 일견 무심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오시하듯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가 위치한 스튜디오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몇 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윤대유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말도 못 하게 잘생긴 사내였지만 도저히 더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특히나 저, 왼눈 아래를 긋고 지나간 듯한 흉터자국이 더더욱 그녀의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면 저런 흉터가 남는단 말인가? 물론 외양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머릿속을 울리는 본능적인 경고음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설마 저 사람이 ‘ehrwk1863’인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앞으로 계속 눈을 맞추고 인터뷰를 해야 할 텐데.
    애써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프로였다. 인터뷰어로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인터뷰이를 앞에 두고 당황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윤대유는 제게 가장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ehrwk1863’님이신가요?”
    “…….”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짧은 순간 윤대유는 자신이 혹시 무엇을 잘못했는지 빠르게 회상했다. 빤히 쳐다본 것 때문에 그러시나? 금방 눈 돌렸는데……. 하지만 주마등이 지나가기도 전에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남자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ehrwk1863’은 접니다.”
    “네?”

    다시 보아도 남자의 입은 닫혀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자 문짝만한 사내 뒤에서 웬 허여멀건 남자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평론가님. 김독자라고 합니다. 닉네임으로 ‘ehrwk1863’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을 ‘김독자’라고 소개한 안경 쓴 남자는 얼굴에 흉터가 있는 남자 앞으로 걸어나왔다. 뒤에 서 있으니 체구 차이 때문에 잘 안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윤대유를 향해 빙긋 웃어주고선 키 큰 남자와 시선을 교환했다. 특별한 말이 오가지는 않았다. 그저 하얀 손이 사내의 어깨를 한 번 짚자, 남자는 몸을 돌려 스튜디오를 나갔을 뿐이다.
    남자가 주던 위압감이 사라지자 윤대유는 저도 모르게 멈췄던 숨을 뱉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독자’가 옅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제 보호자가 워낙 말이 없어서.”
    “보호자……요.”

    겉보기에 나이는 엇비슷해 보였는데……. 역시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윤대유는 금세 원래 페이스를 되찾고는 마주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웹소설 평론가 윤대유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다행히도 김독자는 아까 그 남자보다는 사회성이 있는 듯싶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김독자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스튜디오 안에 비치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카메라가 돌기 전 그녀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인터뷰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놀라셨을 것 같은데.”
    “네, 조금요. 처음에 댓글 알림을 봤을 때는 혹시 신종 사기인가 싶었습니다.”
    “아하하. 댓글 외에는 연락을 드릴 방법이 없었어요. 하지만 꼭 모시고 싶어서 저도 조금 용기를 냈습니다.”
    “덕분에 저도 평론가님을 다 뵙네요.”

    윤대유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웹소설이 본격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대, ‘웹소설 평론가’라는 직업 자체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선두주자로 나선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덕분에 이름을 알리게 되기도 했고.

    “<다시 읽기>를 구독하고 계셨다니 아마 아시겠지만, 이 코너는 원래 작가님들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독자인 김독자 씨를 모신 건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죠.”
    “예, 그래서 사실 나올까 말까 고민을 좀 했습니다.”
    “혹시 인터뷰에 응해 주시기로 한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까요?”
    “그건…….”

    김독자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영문 모를 시선에 윤대유가 머릿속으로 물음표를 띄울 무렵, 그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인터뷰가 끝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이런. 인터뷰 내용에 이 질문을 넣을 걸 그랬네요.”
    “궁금하셔도 조금 참으세요.”

    능청스런 말투에 윤대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예정된 대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인터뷰는 대체로 협의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사전에 이미 질문지를 만들어 그에게 전달했고, 그는 답변을 준비해 그녀에게 답신을 보냈다. 그 질답지의 내용 그대로 화기애애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윤대유도 금방 마음을 놓았다. 작가는 그래도 작품을 쓰다 보면 이런 인터뷰를 할 일이 제법 생기기 때문에 인터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김독자는 말하자면 그저 변방의 블로거, 평범한 독자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민간인일 김독자가 카메라가 돌고 있는 이 상황을 혹시 낯설어하거나 거부감을 가지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그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독자 님의 블로그가 사실은 꽤 유명하던걸요? 구독자 수도 상당히 많고요.”
    “그래봤자 변방의 블로거일 뿐입니다.”
    “새 글이 올라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요?”

    윤대유는 장난스레 웃으며 미리 준비한 패널을 꺼내 들었다.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과 어떤 커뮤니티의 캡쳐본. 모두 김독자의 새 리뷰글을 기다리는 아우성들이었다.

    “뭐…… 아무래도 제가 마이너한 작품들의 리뷰를 많이 썼으니까요. 저와 비슷한 취향이신 분들이 함께 해주시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마이너할수록 같은 감상을 공유하는 사람을 더욱 찾아 다니게 되니까요?”
    “그렇죠.”
    “저도 평론가 일을 하면서 마이너한 작품들을 깨나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는데, 독자 님의 블로그에 올라온 작품 라인업은 정말 놀랍더라고요.”

    윤대유의 말에 김독자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웃었다.

    “놀라셨죠? 전부 연재 중단된 작품들이라서.”
    “네, 맞아요.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제가 아는 작품이 너무 적다 싶었는데, 전부 연재 중단 아니면 무기한 연재중에 머무르고 있는 작품이던데요. 하마터면 평론가란 직업 그만둬야 하나 생각할 뻔했어요.”
    “세상에 웹소설이 얼마나 많은데요. 평론가님도 그 모든 이야기를 다 읽으실 수는 없죠.”
    “하긴, 저도 어떤 작품을 읽지 않았으면 아마 독자 님의 블로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떤 작품이었나요? 혹시 댓글을 달아주셨던 그 리뷰?”

    김독자가 흥미롭다는 듯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윤대유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전■적 ■자 시■>이요. 아직 연재중이라고 떠 있기는 한데 업데이트가 안 된지 십수 년이나 됐잖아요.”

    츠츠츳.

    “좋은 소설이었죠.”
    “맞아요.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좋은 소설이 왜 유명해지지 못한 걸까? 싶을 정도로요.”

    김독자는 다시금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미를 짐작할 수 없는 시선. 윤대유는 잠시 그 시선을 받아내다가 고개를 갸웃하곤 말을 이었다.

    “물론 좋은 소설이 꼭 유명해지고 성공하라는 법은 없지만요.”
    “그렇죠. 평론가님이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맞다. 그녀는 평론가다. 작가와 독자, 그 사이의 간극을 메꾸는 존재. 평론가는 쓰는 사람의 입장과 읽는 사람의 입장을 모두 공유한다. 하지만 오늘의 인터뷰이는 작가가 아닌 독자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더 솔직하게 그녀의 ‘독자’로서의 입장을 내비쳤다.

    “네, 하지만 저는 웹소설, 장르소설은 절대적으로 취향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다른 예술과는 구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하고요. 잘 썼다, 못 썼다, 혹은 좋다 나쁘다만으로는 절대로 평가할 수 없죠.”
    “‘누군가에게는 망한 작품이어도 나에게는 인생작이 될 수도 있고요.’”

    윤대유는 멈칫,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하려던 말을 김독자가 대신 했기 때문이었다. 미묘한 기시감에 굳어 있기도 잠시, 그녀는 프로답게 금방 대화를 이어갔다.
    “어쩜, 저랑 똑같은 생각을 하시네요. 역시 웹소설 독자는 다들 비슷한 마음인가봐요.”
    “그렇겠죠. 다들 ‘독자’니까요.”

    미묘한 침묵. 지금까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다른 서늘한 느낌에 윤대유는 잠시 머뭇거렸다가 얼른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음, 블로그 닉네임이 ‘ehrwk1863’인데요. 앞의 영어는 ‘독자’겠고, 뒤의 숫자는 혹시 의미하는 바가 있을까요?”

    김독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1863은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한 해입니다.”
    “지하철…… 이요?”

    윤대유는 눈에 띄지 않게 흘끗 질답지를 내려다보았다. 김독자가 보내온 답변과 내용이 다르다. 그녀가 받은 답신에는 ‘별 의미 없이 지은 숫자’라고 쓰여 있었는데.

    “돌고 도는 지하철 속에서 유■혁의 ■귀가 반복된다는 것을 상징하죠.”
    “어…….”

    츠츠츠츳.
    천하의 윤대유도 이 황당한 답변에 순간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애초에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제대로 못 들은 단어가 있는데……. 하지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혹시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못 들었는데, 다시 한 번 말해 주실 수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녀는 웃음으로 상황을 얼버무렸다.
    “그렇군요. 멋진 상징이네요. 음, 그럼 다음 질문인데요. 독자 님이 포스트 마무리에 꼭 적으시는 문장이 있잖아요?”
    김독자는 살짝 웃었다. 마치 좋아하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네, 있죠.”
    “‘■■■ 보실 분’. 블로그 이름이기도 하잖아요. 무슨 뜻인가요?”
    “평론가님은 ■■■이 보이십니까?”

    윤대유는 다시금 고개를 갸웃했다. 예정에 없던 질문이었다.

    “■■■이잖아요?”

    츠츠츠츠츳.

    “그렇군요. 보이시면 됐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제발 동문서답 좀 그만 했으면 싶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인데?
    하지만 어쩐지, 다시 물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은 그녀는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제 모습이 제발 자연스러워 보이길 바라며 말했다.

    “벌써 블로그에 올라 온 포스트가 98개가 되었더라고요. 곧 100개째를 맞이하실 텐데, 혹시 백 번째 포스트는 뭔가 특별한 작품을 다루실 예정이 있을까요?”
    지금껏 망설임 없이 청산유수로 대답하던 김독자가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얇게 다물린 가지런한 입술을 바라보던 윤대유가 다른 말을 꺼내야 할까 생각한 찰나 김독자의 입이 열렸다.
    “백 번째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99든, 51이든, 49든, 다 나름의 의미가 있겠죠.”
    “아…….”

    또다. 질답지와 다른 답변. 윤대유는 슬슬 당혹감을 넘어 화가 날 것 같았다. 질답지와 다른 대답을 할 거면 좀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게 답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자기만 아는 소리를 늘어놓으면 어떡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포커페이스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능숙하게 마지막 질문으로 그를 유도했다.
    “네, 지금까지 긴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독자 님. 혹시 마지막으로 월간 <다시 읽기> 구독자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김독자는 윤대유를 바라봤다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앞으로도 이야기를 많이 쓰고, 많이 읽어 주세요. 저희는 누구나 ‘독자’로 시작하니까요.”



    카메라에 들어왔던 빨간 불이 꺼졌다. 윤대유는 막바지로 접어들어 급격하게 피곤해진 인터뷰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겨우 숨을 내쉬었다. 물론 금방 정신을 차리고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마찬가지로 몸을 일으키고 있는 김독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생 많으셨어요, 독자 씨.”
    “별 말씀을요. 평론가님이 고생하셨죠.”

그래. 진짜 고생했다. 사실 마음 같아선 그를 이대로 얼른 배웅해버리고 이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여러 궁금한 것들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잡지에 싣지 않고 카메라에 녹화하지 않을 개인적인 질문들.

    “독자 씨. 인터뷰는 끝났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을까요?”

    스튜디오는 카메라 감독과 스탭들이 뒷정리를 하느라 부산했다. 주변을 둘러본 김독자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금 한적한 곳으로 옮길까요?”
    “네, 좋아요.”

    두 사람은 인적이 드문 어느 하얀 복도로 함께 이동했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윤대유는 새삼스럽게 김독자를 다시금 관찰했다. 마른 체구, 하얗고 단정한 인상에 나긋한 목소리. 특징 없는 검은색 뿔테 안경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했던 곳에 도착한 윤대유는 멈춰 서며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묻고 싶으신 게 뭐죠?”
    “그…….”

    <전■적 ■자 시■>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분명 그렇게 말했건만 그녀는 자신이 말한 단어의 발음이 불분명하게 부서진다고 느꼈다.

    “혹시 독자 씨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해서요. 그 작품이 왜 유명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세요?”

    김독자는 천천히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복도 벽에 가볍게 기대어 섰다. 입술이 열리며 가지런한 치열이 드러났다.

    “이곳에선 유명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네?”
    “아니, 정확히는 ‘유명해지길 바라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누가요?”
    “제 보호자가요.”

    윤대유는 할 말을 잃고 허연 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혹시 미친 사람 아닐까? 그냥 집에 갈 걸. 괜히 호기심을 못 참아서……. 속으로 한숨을 쉰 그녀는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남은 질문을 털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럼 그, ‘작품’이…… 외전 연재 공지만 있고, 아직도 ‘진짜 완결’이 안 났잖아요. 독자 씨는 어떤 식으로 완결이 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말이지 개인적인 호기심이다. 굳이 잡지에 실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 작품은 그녀가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고, 그걸 통해서 눈앞의 이 사람을 만났으니까. 그녀에겐 그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후기를 공유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물은 질문이다. 그냥, 그래서.
    김독자는 한참이나 답하지 않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팔짱을 낀 팔 위로 올라온 길고 하얀 손가락이 톡, 톡, 팔을 몇 번 두드리길 반복한 뒤에 그가 말했다.

    “제가 왜 이 인터뷰에 응했냐고 물어보셨죠.”
    “네? 네, 그랬죠…….”

    또 동문서답인가? 어디 들어나 보자. 그렇게 결심한 순간, 까딱거리는 김독자의 왼손 손가락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약지는 다른 손가락들보다 가늘었고, 하얗게 눌린 듯한 자국이 있었다. 윤대유는 저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반지. 같은 반지를 몇 년 동안 끼면 저렇게 된다.

    “저는 당신을 만나려고 인터뷰에 응했습니다.”
    “……네?”

    멍청한 물음소리만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말이 성대를, 입술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 왼손 약지는 왜 비어 있죠? 혹시 결혼하셨나요?”

    윤대유는 김독자가 제 왼손 약지의 흔적을 매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그가 기대 선 벽 옆의 불투명한 창문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거기에 어떤 새카만 남자의 그림자가 거울처럼 비쳐 보였다.
    그리고 세상이 암전되었다.



    김독자는 한숨을 쉬며 맥없이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조심해. 대리석 바닥이라 잘못 넘어지면 뒤통수 깨져서 죽는다고.”
    “안 죽는다.”

    은밀한 모략가-‘유중혁’은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제 손에 들린 유리조각 같은 것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거울 파편이다. 하지만 그 거울에 자신은 비치지 않는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 그 조각을 만지며 더 살펴보려는 찰나, 하얀 손이 그것을 낚아채 갔다.

    “내가 가지고 있을게.”
    “……손 베인다.”
    맨손으로 거울 조각을 움켜쥔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알잖아? ‘이건’ 날 해치지 못해.”
    “만약의 경우라는 게……”
    “괜찮대도.”

    유중혁은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김독자는 조각을 제 코트 주머니 속에 넣고선 복도 벽에 기대 앉혀 놓은 ‘윤대유’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괜찮은 거 맞지?”
    “멀쩡할 거다. 자신이 ‘김독자의 파편’이었단 것도 전혀 인지하지 못할 거고.”
    “하긴, 애초에 이 사람은 ‘전지적 독자 시점’의 외전을 보지도 못 했으니까.”

    중얼거리곤 무언가 고민하는 듯 생각에 잠긴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말했다.

    “곧 다른 사람들이 여길 지나갈 거다. 두고 가지.”

    발소리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유중혁이 하는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다. 김독자는 수긍하고선 그와 함께 자리를 떴다.

    “인터뷰는 어떻게 처리되려나. 나 중간부턴 그냥 하고 싶은 말 했는데.”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그거 과보호예요. 아저씨.”
    “네놈이 그걸 원하지 않나?”
    “날 이렇게 키운 게 누군데?”

    하여간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는 놈. 유중혁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건만,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물론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의 호들갑도 한몫 했겠지만.

    “김독자. 그 파편은 어떻게―”
    유중혁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우뚝 멈춰 섰다.
    김독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거지? 여기는?
    고개를 휘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설원인가? 하지만 눈을 깜빡인 순간 설원이었던 공간은 무저갱의 어둠처럼 변했다. 깜빡. 깜빡깜빡. 그리고 다시 설원이 되었다.
    나는 뭘 하고 있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어떤 건물의 전면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거…… 천인호의 모습이었던가? ……아니면 ‘김독자’였나?
    떠올려 보려 해도 머리만 깨질 듯이 아파올 뿐이었다. 결국 김독자는 혼란 속에서 일단 일어나 자리에 섰다. 걷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하얀 활자들이 눈발처럼 흩날렸다가, 다시금 심해 밑으로 가라앉았다.
    길 없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눈밭-무저갱-을 보며 걷던 김독자는 앞을 가로막은 신발코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잘 닦인 검은 구두, 검은 정장 바지. 흩날리는 하얀 코트 자락. 굳이 고개를 들어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지금 저를 발견한다면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겠지.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안녕. 오랜만이야.”
    “……안녕.”

    마주 답하자 ‘김독자’-‘가장 오래된 꿈’이 입가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네?”
    “……면목 없게 됐다.”

    김독자는 머쓱한 심정으로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이렇게 ‘가장 오래된 꿈’과 대화를 하는 것이 사실 조금 어색했다. 애초에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야, 이 세계의 ‘가장 오래된 꿈’은 잘게 찢어져서――
    김독자는 멈칫, 몸을 굳혔다. 그제야 생각이 났다.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는지.

    [현재 당신의 화신체가 불안정합니다.]
    [5분 안에 ‘김독자 파편’을 획득하십시오.]
    [새로운 ‘김독자 파편’을 획득하지 못할 시, 당신은 사망합니다.]
    [사망까지 남은 시간: 0:05]


    당황하며 타이머를 바라봤지만 다행히도 시간은 더 이상 줄어들지 않았다. 이곳이 시스템 권외 지역이란 뜻인가? 어쨌든 시간은 번 셈이다. 그럼 이제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가장 오래된 꿈’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이 ‘가장 오래된 꿈’은 자신이 있던 세계선의 ‘가장 오래된 꿈’이 아니다. 둘은 갈라졌고,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며,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야 좋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화, ‘영원한 이름의 계승자’가 입맛을 다십니다.]

    그들은 분명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다.
    길은 갈라졌더라도, 그 또한 여전히 ‘김독자’다.
    김독자는 정신을 집중해 설화를 억누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꿈’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김독자를, 그리고 ‘설화’를 바라봤다. 저벅저벅, 몇 걸음을 걸어오자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설화가 때맞춰 몸을 일으켰다. 김독자는 황급히 외쳤다.

    “김독자, 피해!”
    “아니. ‘나’는 그럴 필요 없어.”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돈 것 같았다. 김독자의 시선이 자석처럼 끌려가듯 ‘가장 오래된 꿈’의 왼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또한 발견했다. 다른 손가락들보다 가늘어진 약지를 휘감은 채, 소용돌이치는 황금빛 고리.
    ‘가장 오래된 꿈’은 고개를 기울여 설화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명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두근, 황금빛 고리가 일렁임과 동시에 설화, ‘영원한 이름의 계승자’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김독자는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잠시 안도했다.
    ‘가장 오래된 꿈’은 허리를 펴고선 김독자가 보고 있는 상태창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5초 밖에 안 남았네. 어쩐지 빨리 오고 싶더라.”
    “……방법이 있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은 ‘가장 오래된 꿈’은 코트 주머니에서 유리조각 같은 것을 꺼냈다. 김독자는 한눈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동시에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네가 있는 세계선에도…… ‘김독자의 파편’이 있었어?”
    그 파편 또한 환생하여 다른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회수했는지도. 환생한 이는 무사할까? 하지만 동시에 이 ‘가장 오래된 꿈’은 결코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가장 오래된 꿈’은 쥐고 있던 손을 펼쳤다. 반짝이는 거울 조각이 천천히 허공을 날아 김독자에게 향했다. 두려움에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설화, ‘영원한 이름의 계승자’가 냉큼 입을 벌려 그것을 삼켰다.

    [설화, ‘영원한 이름의 계승자’가 포식에 성공하였습니다.]
    [설화, ‘영원한 이름의 계승자’의 격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설화, ‘영원한 이름의 계승자’가 약간 만족합니다.]
    [제한 시간 1일이 추가되었습니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은 ‘가장 오래된 꿈’은 눈을 돌려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도와주고 싶기도 한데…… 그러면 안 되겠지.”
    왜 안 된단 말인가? 하지만 김독자는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방법은 네가 찾아. ‘김독자’.”
    왜냐하면, 너 또한 김독자니까.
    ‘가장 오래된 꿈’이 하얀 활자로 변해 흩어졌다. 황금빛 고리의 잔상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김독자!”

    귓가를 치고 지나가는 낮은 목소리. 김독자는 눈꺼풀을 반짝 들어올렸다. 잠시 흐릿했던 시야가 제자리를 찾자, 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김독자! 나…… 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울상을 한 우리엘.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로요…….”
    눈물을 글썽이는 이현성.
    “진짜 사람 놀래키는 데 재주 있다니까! 간 떨어질 뻔했잖아!”
    타박하면서도 눈가가 벌게진 이지혜.
    “거봐, 내가 죽은 척일 거라고 했지?”
    코웃음을 치고 있지만 말꼬리가 떨리는 김남운.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들 놀라 그를 부축해주려 하기에 괜찮다고 손을 내젓고 일어나자, 지금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나가 있어라.”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다른 이들은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보니 여기는 내 방이네.
    김독자는 마치 응원하듯 저를 한 번씩 바라본 일행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고도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자, 침대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남자가 소리도 없이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김독자.”
    “…….”
    “김독자.”
    “이거 과보호라니까요, 아저씨.”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굳은 얼굴의 유중혁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쿠,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네. 김독자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사히 돌아왔잖아.”
    “미리 말하고 가면 죽기라도 하나?”
    “아니, 뭐…….”
    김독자는 시간이 별로 없음을 감지했다고 변명을 늘어놓진 않았다. 어차피 유중혁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제게 화를 내고 있는 건…….
    커다란 손이 뻗어와 김독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지고, 유중혁은 으르렁거리듯 진언을 내뱉었다.
    【네 목숨은 내 것이다.】
    “…….”
    【멋대로 죽을 생각 따위는 하지 마라.】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잇새로 새어나온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 그는 제 뺨을 유중혁의 뺨과 맞대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그 반대야, 유중혁.】
    나는 너의 ■■니까.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김독자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 세게 끌어안았다. 김독자는 잠시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다가,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문득, 왼손 약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품에 안긴 채 고개만 빼꼼 들어 제 왼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약지를 휘감고 있는 금빛 고리를.
    김독자는 유중혁이 제 손에 이것을 끼워주던 날을 기억했다. 아직 어렸고, 또래보다 체구도 작았던, 몸이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시절의 자신.
    김독자는 가만히 제 손가락에 끼워진 그것을 바라보았다. 반지 같기도, 광휘의 고리 같기도 한 그것.
    ‘이게 뭐예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제 작은 손을 뒤집어 보며 잘 맞는지 확인할 뿐이었다.
    ‘반지예요?’
    ‘…….’
    ‘크면 안 맞을 것 같은데…….’
    ‘아니. 맞을 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독자는 순진하게, 그것이 제 손에 맞춰 크기가 커지는 ‘아이템’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반지-고리-는 제 손을 그 시절 그대로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김독자의 왼손 약지는 가늘어졌고, 그 자리에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하얀 흔적이 남게 되었다.
    아마도 다른 이들에겐 이것이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오직 그와 자신만이 알아보면 된다.
    이건,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을 절대적인 연결의 상징이니까.
    김독자는 저를 강하게 끌어안고 있던 팔이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유중혁은 그를 다시 침대에 누이고선, 손을 짚고 빤히 내려다봤다. 김독자는 그 눈동자가 마치 제 손가락에 걸린 물건처럼 황금빛으로 이글거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의 ■■라면, 유중혁. 나의 ■■는 너겠지.
    하지만 그들 사이에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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