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5
두 번째 김독자 생일 축하글
* 완결 및 에필로그까지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Interaction(상호작용, 相互作用)
: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서 다른 사람이나 사물과 서로 관계를 맺는 모든 과정과 방식.
추워.
패딩 속까지 엄습하는 한기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실내로 들어섰다. 몇 발짝 들어서고서야 뺨에 훈기가 감돌아 후, 한숨을 내쉬고선 겉옷을 벗어낼 수 있었다. 이번 주에 안 춥다고 했던 놈 누구냐. 이놈의 일기예보는 어째 점점 더 정확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유는 안다. ‘시스템’의 힘이 오락가락하면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시스템’이 소멸하면서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하던 신문명이 무너지는가 싶더니, 다시 그 힘이 고장 난 전등처럼 어정쩡하게 들어왔다가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니 사회가 조금 혼란스러워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 사실 오랜만에 눈을 뜬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시스템’이라는 힘이 영원히 유지될 거라 믿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이걸 적응이 빠르다고 해야 할지, 느리다고 해야 할지. 그나마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이 발발하지 않는 것은 <김독자 컴퍼니>의 사람들이 발 빠르게 대처한 덕분이었다.
익숙하게 바닥을 보고 걸으며 내 방을 향해 가다가 길쭉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통에 멈춰서서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이었다.
“어딜 갔다 이제 오지?”
이 자식은 이 날씨에 춥지도 않은지 검은색 반팔 차림이었다. 미쳤나? 어이가 없어 녀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느라 답을 못하고 있자니 그걸 어떻게 오해한 건지 그의 미간에 팬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무언가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나는 얼른 씩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유중혁의 미간을 꾹꾹 눌러주었다.
“표정 풀어, 인마. 그냥 잠깐 마실 좀 갔다 왔어.”
“무슨 마실.”
“왜, 난 마실도 못 가냐?”
“네놈한테 마실을 갈 만한 이웃이 있었나? 금시초문이군.”
이 자식이. 하지만 썩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내 인간관계가 협소한 거야 공공연한 비밀이지.
“그냥 요 앞 편의점 좀 갔다 왔다고.”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검은색 비닐봉지를 들어 올리자 그제야 유중혁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하여간 의심 많은 놈.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심이라기보단 걱정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 유중혁이 남 걱정을 한다니, 그리고 누군가가 나 같은 걸 걱정한다니. 그런 두 가지 측면에서 아직도 익숙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조금 머쓱해져 손가락을 꿈질거린 나는 이내 고개를 들고 다시 평소처럼 웃었다.
“뭐 사왔는지 아냐?”
“맥주.”
“……어떻게 알았어?”
“네놈 하는 게 뻔하지.”
젠장.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중혁에게 읽히다니. 나는 조금 투덜거리며 주방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냉장고 두 대 중 하나의 문짝을 열어 캔맥주를 자리에 착착 꽂아 넣었다. 칸에 딱 맞게 쏙 들어가는 알루미늄 캔들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사실 이런 정리정돈도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들 중 하나였다. 혼자서 살 때와는 몹시도 다른 규칙들. 십 년 이상 몸에 밴 버릇들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으나 나는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새로이 배워가야 할 것들이고, 적응해야 할 습관들이다.
내 뒤를 굳이 따라온 유중혁은 내가 맥주를 넣어두는 사이 옆 냉장고를 열고선 식자재의 현황을 점검하는 듯했다. 사실 이 사옥(?)에 이런 대형 냉장고가 두 대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유중혁의 영향이었다. 함께 사는 사람이 많기는 하지만 출장이 잦은 사람들이었으므로 실제 거주 인구는 유동적으로 변할 때가 많았고, 보통 너덧 명 정도가 한 공간에 있게 됐다. ‘시스템’이 건재하던 때에는 지역 간 이동이 지금보다 훨씬 빨랐으니 이보다는 더 많았지만.
어쨌든, 그렇기에 냉장고가 굳이 두 대나 있을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의 요리에 대한 집착은 나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컸다. 녀석은 본인이 요리를 잘할뿐더러 미식가 기질도 있기 때문인지 나름대로 희귀한 식자재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던 것이다(유중혁 본인은 아니라고 했지만 요리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는 그것을 ‘수집’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산물이 바로 이 대형 냉장고 두 대였다.
슬쩍 눈으로 내부를 훑은 유중혁은 별다른 이상이 없는 듯 금세 문을 닫았다. 그러더니 냉장고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내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냉장고 본체와 맞먹는 큰 키라서인지 아니면 얼굴 때문인지, 아무튼 녀석은 대충 서 있는 모습도 광고지에 나올 법한 모양새였다. 내가 슬쩍 곁눈질을 거두자 제법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뭘 봐, 인마. 그렇게 말해주려다가 그냥 모른 척했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설 때까지도 시선이 계속되어 나는 결국 녀석의 얼굴을 밀어냈다.
“왜 그렇게 자꾸 쳐다봐? 부담스럽게.”
하지만 유중혁은 불쾌한 얼굴을 하기는커녕 제 얼굴을 밀어내는 내 손을 붙잡았다. 뜨끈한 체온이 흘러들듯 전해져왔다.
“손이 차갑군.”
“……아니, 뭐. 밖에 있다가 왔으니까.”
“평소에도 차갑다.”
그래, 인마. 너는 평소에도 뜨겁고. 대충 대꾸해주고 돌아서려 했는데 유중혁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또 왜 이러냐, 중혁아.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가 어려워졌다. 이런 식으로 타인과 살갗이 닿고 몸이 닿는 것은, 아주 낯설고,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내가 의도치 않은 상황이라면 더더욱.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분명, 내가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텐데도 여전히 내 손을 잡은 채였다.
천천히 눈을 들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깎은 듯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 섬연한 눈매. 그의 본질은 내가 알던 시절과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나이가 든 얼굴인 것은 사실이었다. 희끗하게 새치가 조금 올라온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고개 들어라.”
표정을 감출 새도 없이 유중혁이 다른 손으로 내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손을 붙잡힌 탓에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이 새끼는 왜 시스템이 없는데도, 나이를 먹었는데도 이렇게 강인한 건지. 답은 알고 있지만 조금 분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가 내가 눈동자를 굴려 피하자 유중혁이 다시 다그치듯 말했다.
“눈 피하지 말고.”
시발,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여전히 그를 바라보지 않자 유중혁이 깊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턱, 하고 손이 풀려나갔다. 그 반동에 잠시 휘청거리다가 냉장고 손잡이를 붙잡고 중심을 유지했다. 시선의 끝에 유중혁이 뻗었던 팔이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나를 부축하려 한 듯했지만, 이내 손은 거두어졌다.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한 유중혁은 내게 ‘자라’, 한 마디를 남기더니 자리를 떠 버렸다. 새끼, 이럴 거면 뭐 때문에 날 따라온 건데.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냉장고에 기대어 스르르 미끄러지듯 주저앉자 등이 서늘해져 왔다. 마른세수를 하곤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유중혁이 내게 신경을 쓴다. 유중혁이 나를 걱정한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비단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이들. 나와 함께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사람들, 시나리오 이전부터 나와 안면이 있던 사람들, 혹은 그저 나를 일방적으로 아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두 나의 귀환을 환영했고 기뻐했다. 순식간에 매스컴으로 속보가 전해지고 그날 서울 한복판에서는 축제 비슷한 것까지 열렸다.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하얀 종이가 흩어지는 사이로 눈을 뜬 순간을 기억한다. 울음을 터뜨리던 사람들, 내 손과 팔을 으스러져라 붙잡던 사람들, 무어라 떠드는 소리, 따뜻한 시선들. 나는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직도 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계선은 어디지.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누구지.
기이한 부유감은 금세 가라앉았다. 몸을 일으켜 땅에 발을 디디자 현실감이 천천히 찾아들었다. 혼선이 왔던 기억은 제자리를 찾았고, 그제야 비로소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 순간 나는 분명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어색해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기어이 눈을 떴고, 그래서 모두가 그것을 기적이라고 불렀다. 나는 나 같은 녀석에게 기적이 찾아왔다는 것이 낯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나’는 사라졌어야 했다. 그렇게 이 우주는 섭리대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오직 나 하나를 구하겠답시고 말도 안 되는 짓을 계속해서 벌여온 사람들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해야 했고, 아마도 그냥, 다시 살아난 것을 기뻐하면 됐을 것이다.
그럴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내가 그런 인간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 기억은 거의 흩어졌지만, 분명 아주 오랜 시간을 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살고 수많은 일을 경험했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인 것을 보면.
문득 유중혁에게 다시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면 그놈도 그렇게 오래…… 나보다 오래 살아놓고도, 언제나 유중혁이었지. 나는 유중혁의 그런 한결같은 점을 좋아했지만, 그건 녀석이 사실은 괜찮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변변찮은 사람이 한결같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몸을 일으켜서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조금 전 꽂아 넣었던 캔맥주 두 캔을 다시 꺼내 양손에 들고선 내 방으로 향했다. 그냥, 조금 취한 채로 억지로라도 잠들고 싶었다.
마음껏 취해서 잠들려던 내 계획은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취기와 수마에 빠져들기 직전 무심코 쳐다본 디지털시계의 날짜가 2월 14일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곤함이 확 달아났다. 2월 14일. 오늘이 2월 14일인가? 물론 밸런타인 데이라서 잠이 깬 것은 아니었다. 그 다음 날이……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생일. 태어난 날. 모두에게 축하받는 날. 하지만 내 생일은 아주 어릴 때를 빼고는 한 번도 특별해본 적이 없는 날이었다. 그래서 나조차 잊고 살았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어울려본 기억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교실 구석 책걸상에 앉아 있으면 곧 제 생일이라며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거나 놀러 갈 계획을 세우는 녀석들이 부지기수였다. 친구 생일을 챙긴답시고 학교에 케이크며 선물을 들고 오는 녀석들도 많았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부러웠고,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져 나는 아예 내 생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척을 했다. 그러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나는 정말로 무감해졌고, 세상이 유료화를 맞이하기 얼마 전까지는 정말로 생일 같은 날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렴풋이 이유를 짐작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병실에서 눈을 뜬 순간. 나를 둘러싸고 기뻐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 생일이라는 게, 어쩌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런, 생각을.
잠을 조금 설친 탓에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오늘은 금요일이었고, 금요일은 아이들과 함께 아침 운동을 하기로 약속한 요일이다. 나는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시계를 잠재우며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몸은 일으켰지만 눈이 절로 감겼다. 그렇게 또 까무룩 졸음에 빠지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아저씨!”
“형!”
아이들이 도도도 뛰어 들어와 내 침대에 풀쩍 올라앉았다. 매트리스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감각에 느리게 정신이 돌아왔다. 이길영이 내 팔을 붙들고 흔들었다.
“형, 어제 늦잠 잤어요? 또 소설 보다 잔 거예요?”
“아저씨…….”
내 눈가가 어지간히 퀭했는지 신유승도 함께 눈을 흐렸다. 모자란 체력을 연민하는 시선에 호소해서 오늘 아침 운동은 빠지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또 어른이 돼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미약한 숙취와 잠에 취해 멀어지려는 이성을 붙들어 매고 이불을 들쳤다.
아이들과 공원을 몇 바퀴 뛰고 오니 찌뿌둥한 기운은 많이 가셨다. 대신 체력이 고갈되어 몸이 지친 채로 돌아오게 됐지만. 아저씨는 몇 년 동안 누워있기만 했으니까 운동 안 하면 진짜 픽 쓰러질 거예요! 형, 저희만 믿으세요! 오늘도 아이들은 그런 말을 했다. 기특하고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런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내 코끝에 낯선 냄새가 스쳤다.
“응?”
“초콜릿 냄새 나요!”
아이들은 먼저 신발을 벗고 쪼르르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보다 한 발짝 늦게 뒤를 따라가면서 주방 안쪽을 흘끔 바라보자 유중혁의 널찍한 등짝과 유상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상아 씨는 언제 온 거지? 어젯밤까진 없었는데. 더 안쪽을 들여다보니 한수영과 이지혜도 있었다. 나는 신기한 눈을 하고선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언제 왔습니까, 다들?”
“언제 오긴. 조금 전에 왔지.”
“어서 오세요, 독자 씨.”
손을 크게 흔들어 나를 반긴 이지혜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음, 착실히 운동을 하고 온 것이 틀림없군.”
“왜 갑자기 어르신처럼 말해. 성좌한테서 말투 옮았어?”
이지혜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선 쌩하니 몸을 돌렸다가 이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이었다. 달착지근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아저씨, 이거 마셔.”
“……방금 운동하고 왔는데 이런 거 먹어도 되나?”
“아저씨 핫초코 좋아하잖아? ‘멸살법’ 읽을 때 자주 마셨다며?”
나는 약간 뜨끔한 심정으로 눈가를 움찔했다. 이 녀석이 알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건데. 언제부터 내 취향이 이렇게까지 공공연하게 퍼졌나. 나는 범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찾아 눈을 가늘게 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두가 의심스러웠다. 젠장, 다들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게 되어버렸다. 한숨을 내쉬려다가 들이마시고 일단 이지혜가 내민 컵을 받아들었다. 아직 온도는 뜨거웠다.
“너무 뜨거운데.”
“아, 일부러 뜨겁게 한 거래. 아저씨 씻고 나와서 마시면 딱일 거라는데.”
그러면서 이지혜는 유중혁 쪽을 흘끔거렸다. 내가 돌아왔는데도 돌아보지도 않던 놈은 여전히 내게 등짝만을 보여주고 있는 채였다. 나는 속으로 조금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유중혁, 정말이지 이상한 새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순순히 컵을 내려놓고 욕실로 먼저 향했다.
오늘 오후는 어이없게도 모두가 모여 초콜릿을 만드는 시간이 되었다. 밸런타인 데이 같은 걸 챙길 사람들이라곤 생각지 않았었는데, 어느새 하나둘씩 사옥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팔까지 걷어붙이고 제법 열심이었다.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무언가 변한 것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몇 시간을 할애한 끝에 우리의 앞에는 초콜릿이 그야말로 무더기로 쌓이게 되었다.
“어…….”
“너무 많이 만들었나?”
“이거 언제 다 먹죠.”
“단 거 좋아하는 사람?”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왜. 뭐요.
“아무리 저라도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그리고 애초에 단 걸 그렇게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자 몇몇이 에이, 하는 소리를 냈지만 어쨌든 내가 이 많은걸 다 먹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결국 초콜릿은 각각의 앞에 일정량씩 소분되고 남은 것들은 냉동실로 들어갔다. 한숨을 돌리고 있자니 창문이 활짝 열렸다. 집안에서 단내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싸늘한 겨울바람을 피해 이동하며 나는 팔을 들어 팔꿈치 부근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옷에까지 초콜릿 냄새가 배어든 것 같았다.
몇몇은 초콜릿을 전해줄 사람이 있다며 문을 나서고 몇몇은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소파에 앉아 거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사실 조금 의아했다. 아무리 오늘이 나름의 기념일 같은 날이라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전부 모일 줄은 몰랐다. 사옥에 잘 나타나지 않는 장하영이나 공필두까지 보이는 것이 신기해 잠시 시선을 주자 뭘 봐, 하는 시선이 돌아와 피식 웃어버렸다.
“독자 씨. 저녁엔 뭐 할 거예요?”
근처에 앉아 있던 정희원이 불쑥 말을 걸어왔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별 일정 없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요. 독자 씨는 어디 나다니지 말고 좀 쉴 필요가 있죠.”
“……따지자면 이미 몇 년이나 쉰 거 아닙니까?”
“어허! 그게 무슨 쉰 거예요!”
정희원은 여전히 매서웠다. 물론 그는 말은 거칠게 할지라도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타오르던 불꽃처럼. 나는 그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그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독자 씨, 별 일정 없으면 저녁 산책이라도 나가는 건 어때요?”
저녁 산책? 나는 이미 아침에도 운동을 하고 온 몸이다. 이설화의 제안에 눈을 깜빡이자 정희원이 갑작스레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그것도 좋겠네. 오늘 어제보다 안 추워요.”
“아니, 방금은 어디 나다니지 말고 쉬라고 했잖아요.”
“우리랑 같이 나가면 괜찮죠.”
그런 게 어디 있나. 어이없다는 눈을 하는데 유상아와 한수영까지 합세하기 시작했다.
“다 같이 나갔다 와요. 독자 씨는 몸을 더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그래, 야. 바깥바람도 좀 쐬고 그래라. 모니터에만 얼굴 처박고 있지 말고.”
꼭 개라도 산책시키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당신들이 잘 몰라서 그런데 저는 어젯밤에도 바람 쐬러 나갔다 왔거든요. 이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나. 묘한 느낌이 들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굳이 거절할 만큼 싫은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패딩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의 태도는 더 이상하게 변했다. 그들은 나를 끌고 도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번화가에서는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상점들을 모조리 들어가 보질 않나, 갑자기 구시대 기념관을 한 바퀴 돌아보질 않나. 이쯤 되면 나도 이들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수작이 내가 집에 얼른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란 사실도.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대놓고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이들이 내게 이유를 말하지 않고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건…… 역시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건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내 생일은 아마도 이들 모두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나는 이들이 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안다. 고작 나 하나 구하자고 ‘집단 회귀’나 그보다 더한 정신 나간 짓들도 벌여온 사람들이니……. 그러니 어쩌면 내가 다시 눈을 뜬 뒤 처음 맞이하는 생일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파티 같은 걸 원하지 않았다. 부담스러웠으니까. 내가 그런 걸 받아도 좋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으니까.
어느새 밖에 나온 지 두 시간쯤이 흘러 있었다. 해는 겨울답게 빠르게 저물어갔고 날씨는 조금 더 추워졌다. 눈을 깜빡이며 어둑해진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유상아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독자 씨.”
나는 고개를 내려 그의 말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 유상아 또한, 참 한결같은 사람이다. 나는 상냥한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내가 그를 보며, 이 세상이 소설이라면 이런 사람이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해버렸을 정도로. 유상아는 수많은 것을 짊어지고도 여전히 다정했고 강했다. 하지만 내 짧은 상념은 그만 그 자리에서 뚝 끊겨버리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조금 이르지만, 생일 축하해요.”
나는 약간 당황해 입을 벌리고 눈만 깜빡거렸다. 이렇게 갑자기? 내 표정을 본 유상아가 작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너무 일찍 말했죠?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요. 저는 다시 일하러 내려가 봐야 하거든요.”
“아…….”
잠시 어물거리느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빙그레 미소짓고선 손을 흔들었다.
“다음 주에 봐요. 일 끝내고 올게요.”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마주 인사를 했다. 멀어지는 실루엣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턱 짚었다.
“독자 씨. 생일 축하해요.”
나는 그만 또 당황하고 말았다. 이번엔 정희원이었다. 옆에 서 있던 이현성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독자 씨. 아직 몇 시간 남았습니다만…….”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한 게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럼 왜 나를 굳이 끌고 나와서 몇 시간이나 돌아다닌 거지?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뒤늦게 나는 당황을 수습하고 제대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빙긋 웃었다. 왜인지 아주 흐뭇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행복한 하루 되길 바랄게요.”
그렇게 말한 두 사람도 일하러 가야 한다며 훌쩍 가버렸다. 그렇게 나와 함께 나왔던 사람들이 내게 이른 생일 축하를 건네고선 제 할 일을 하러 가버리는 걸 몇 번 응대한 나는 천천히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일부러 내게 이렇게 간단한 축하만 해준 거다. 내가 부담스러워 할 것을 알고.
문득 눈시울이 시큰해져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기뻤다. 몇 년 만에 받아보는 생일 축하일까. 이십 년도 넘은 것 같다. 조금은 감상적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축하에만 그치지 않고 일부러 나를 생각해 주기까지 하다니. 그 마음들이 너무나도 기껍고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나도 쓰렸다. 아직도 나는 내게 이런 과분한 일이 일어나도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데 내 팔을 툭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수영이었다. 패딩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그는 나를 올려다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하냐? 날씨 추워진다. 얼른 들어가자.”
또 의외의 사태였다. 나는 그 외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한수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집 앞에 거의 다 도착했을 즈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김독자.”
“왜.”
“생일 축하해.”
나는 눈을 껌뻑이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연이은 축하를 받은 덕분에 이제 놀라지 않고 답할 여유 정도는 생겨 있었다.
“오래 살다 보니 작가님한테 축하를 다 받네.”
“알면 잘 해라. 알겠냐.”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키득거린 한수영은 현관문을 열자 냉큼 안으로 들어서더니 후다닥 제 방으로 사라졌다. 야, 나 갑자기 글 쓸 내용 생각났어. 먼저 간다. 그런 말을 남기고. 영감이 떠올랐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정말로 다급한 모습이었다. 나는 찰랑거리며 멀어지는 검은 머리칼을 잠시 응시하다가, 한수영에 대해 생각했다.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깨어나던 날, 답지 않게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한수영의 얼굴이 기억났다. 왜 이제야 일어났냐며 몇 대 때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평소처럼 나를 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만큼 지치고 간절했던 것일 터다.
그 마음의 무게를 안다. 나는 그에게 삶을 빚졌다. 물론 한수영뿐만이 아니라,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넨 사람들 모두에게 빚을 진 것이지만. 나의 호흡 하나 하나는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바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어제까지, 참으로 무겁다고 생각했었다. 이따금씩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런데 왜일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그들의 기원이 내 생과 맞닿아있다는 것이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신발을 벗어두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역시 서프라이즈 파티 같은 건 준비하지 않은 모양이었고, 그것이 또 고맙고 내심 기뻤다. 따뜻한 공기에 차게 식었던 뺨이 녹아내렸다. 어쩌면 그와 함께 내 마음도 조금 녹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녀왔습니다…….”
어쩐지 오늘은 그렇게 말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공간에 흩어지는 내 목소리에 조금 웃고 나는 다음 할 일을 고민했다. 저녁을 먹을까. 그러고 보니 무언가 요리를 한 것인지 음식 냄새가 어렴풋이 났다. 그리고 나는 곧 그것이 미역국 냄새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홀린 듯이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인덕션 위에 놓인 커다란 냄비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슬쩍 뚜껑을 열어보니 역시나 미역국이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냄비 안을 바라보았다. 이건 누가 만든 것일까. 설마 유중혁? 내 생일이라서 끓인 건가? 그런데…… 생일날 미역국을 먹어본 게 언제 적이더라.
그 때, 또 다시 어제처럼 내 앞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그 주인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여상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끓인 게 아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유중혁은 어제처럼 팔짱을 낀 채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조금 불퉁한 얼굴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끓인 거 아니라고? 그럼?”
“네 어머니가 다녀갔다.”
“…….”
나는 그만 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왜 나를 끌고 몇 시간이나 밖으로 돌아다녔는지를 깨닫고 말았으니까.
한참이나 냄비 안을 들여다보다가 뚜껑을 닫았다. 내일 아침으로 먹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일렁이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유중혁을 돌아보며 부러 씩 웃어 보였다.
“또 어디 다녀왔냐고 물을 건 아니지? 아까 나 사람들이랑 나가는 거 봤잖아.”
“……그래.”
대답은 의외로 한참 만에 나왔다. 나는 그저 다시 웃어주고 걸음을 떼려고 했다. 그 찰나 유중혁에게 팔을 붙잡혔다.
“왜.”
하지만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손까지 뻗어 여전히 조금 차가운 내 손가락을 감싸 쥐었을 뿐이다.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녀석의 크고 단단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타인의 호의에 익숙하지 않다. 자기객관화에 능하다고 생각해왔는데, 우습게도 그걸 정확히 깨달은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오래도록 혼자였다. 그냥 곁에 아무도 없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혼자인 데다가, 다른 이들로부터 멸시당하고 기피당해왔다. 그런 내게 사람의 온기란 참으로 낯선 것이었다. 나와 어쩌다 손끝만 스쳐도 비명을 지르거나 불쾌해하던 수많은 아이들을 기억한다.
누가 내 손을 이렇게 잡아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빼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제의 나였다면 이런 일들이 불편해서 자리를 피했을 터다. 하지만 오늘, 내게 조심스럽게 건네지는 축하의 말들을 받으며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 변했음을 느꼈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한참이나 서 있었다. 체온이 나눠지고, 유중혁의 뜨끈한 손이 내 차가운 손을 덥히느라 조금 서늘해지고, 내 손이 평소보다 훨씬 따뜻한 온도까지 올라가는 내내. 서로의 온도가 같아진 뒤에도 유중혁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뒤늦게 조금 머쓱해진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냐.”
하지만 유중혁은 뻔뻔한 대답을 내놓았다.
“하면 안 되나?”
아니, 저렇게 당당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놈이 뻔뻔한 녀석이라는 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그만 놔도 돼. 이제 손 안 시리니까.”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는데 유중혁이 오히려 더욱 꽉 쥐어왔다. 그 탓에 몸이 조금 끌려가버려서 시선이 더욱 가까워졌다. 유중혁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고선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김독자.”
“…….”
나는 직감적으로 녀석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직감이 아니더라도 눈썹의 움직임으로도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실, 나는 다시 눈을 뜬 뒤로 유중혁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물론 유중혁과 언제는 대화를 많이 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그다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몇 년 만에 깨어나 다른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전해 들을 동안, 유중혁과는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나는 유중혁을 줄곧 피해 다녔다. 녀석의 얼굴에 어렴풋이 남은 시간의 흔적을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유중혁은 시간에 강한 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나를 위해 그 긴 시간을 견뎌야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미처 염색물이 들지 않은 흰 머리카락을 발견할 때마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위해서, 유중혁이 그렇게까지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랬었는데.
“네가 그 이야기를 어디까지 읽었는지, 그리고 그 기억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면, 나는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낯익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기묘한 감각에 나는 잠시 되묻는 것을 미루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내가 되물어줄 필요도 없이 유중혁은 말을 이어갔다.
“나는 네게…… 앞으로 내가 무엇으로 살면 좋겠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 말에 나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유중혁, 정신차려라. 몇 번을 반복하면 나아질 거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 회차를 버린다고 다음 회차가 좋아질거라고 착각하지마. 어쩌면 네가 버리려고 하는 이 회차가, ‘인간’으로서 이 세계의 끝을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회차’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말을 늘어놓을 때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하지만 유중혁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은 내 말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회귀자‘였던’ 유중혁이 되고자 했다. 1863번이나 회귀하던 놈이, 더 이상의 회귀를 하지 않으려 했다. 고작 내가 녀석의 정신건강 상태를 끌어올리고자 던졌던 몇 마디 말로.
그리고, 그렇게 결심하고서도…… 녀석은 나를 살리기 위해 다시 한 번 회귀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유중혁에게 그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녀석의 0회차를 목도하고,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 유중혁이 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너는 어쩌면 나 자신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놈이니, 이 질문에도 답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묵묵히 유중혁의 말을 들었다. 어쩌면 예상 범위 안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내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내가, 유중혁에게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한다 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한참이나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할 말을 고르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이전처럼 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조금씩 인정하고 있으니까.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나의 행복을 바라기도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럼에도.
“유중혁.”
“…….”
“너도 알잖아.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어.”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아차린 듯했다.
“네 삶은 네 거니까.”
“…….”
“아니야?”
유중혁이 내 아버지이자 형제이자 친구로서 삶의 지침이 될 수는 있어도.
내가 녀석에게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손을 쥔 녀석의 손에 악력이 더해졌다. 살풋 눈살을 찌푸렸지만 유중혁은 풀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검은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일렁였다. 시스템이 사라진 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일 텐데도.
“김독자.”
“…….”
“나는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피식 웃었지. 당연하지, 새끼야. 그럼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냐. 그렇게 대답하려 했지만 말할 틈이 없었다. 유중혁이 멈추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을 읽고 생을 지탱한다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른 이의 삶으로 연명하고, 함께 힘을 내고. 누군가를 대신해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다른 이가 되어주고자 하는 것을.”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조금 떨궜다. 유중혁은 지금, 독자(讀者)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나의 본질이었다. 김독자라는 인간의 본질.
그래, 그렇겠지. 너는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들었다. 유중혁의 눈동자 안에서 넘실거리는 기운이 똑바로 전해져왔다.
“나는 네 삶을 읽었다.”
“……뭐?”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네 이야기를 읽으며 목숨을 부지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이, 나를 구하기 위한 여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이, 나의, 독자(讀者)가 되었다고.
“김독자. 너는 알고 있나? 나의 ■■는…….”
녀석은 굳이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리고 나 또한 굳이 그것을 맺어주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어찌할 바 모르는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으므로.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눈꺼풀이 내 의지와 다르게 수차례 깜빡거렸다. 나는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도, 막을 생각도 없었다.
나는 유중혁을 좋아했다. 혼자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많은 일을 겪으며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감정은 늘 일방통행이었다. 쌍방향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독자니까. 등장인물과 상호작용을 할 수 없는. 그저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응원할 뿐인.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틀은 깨어졌다.
나는 내가 그랬듯이, 다른 누군가도 나의 독자일 수 있다는 것을,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왜 지금껏 깨닫지 못했을까. 어쩌면 당연한 것인데. 나는 너를 읽고, 너는 나를 읽는다. 이 세상이 더 이상 소설이 아니게 된 지금, 네가 더 이상 등장인물이 아니게 된 지금. 나는 너와 이렇게 손을 맞잡고 대화를 나누는 상호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물이 턱 끝으로 굴러떨어졌다. 차가운 감각에 흠칫하기도 잠시, 유중혁의 손가락이 내 얼굴을 타고 흐른 눈물자국을 쓸었다. 그 손은 나와 온기를 양분하고도 여전히 따뜻했다. 그것이 못내 기껍고 또 소중해서 나는 녀석이 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꼴사납게 녀석의 품에 안긴 꼴이 되고서도.
눈물이 잦아들 즈음,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일이었다. 나는 내 방 책상 서랍에 잠들어 있는 회중시계를 떠올렸다. 내 손을 떠나 유중혁에게 건네졌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와 버린 그 쓰린 물건을.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쓰라려할 일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유중혁이 내게 준 물건이 되었으므로.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내가 원하는 대로, 원래 주인의 손에 돌려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숨을 고르며 유중혁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나는 그의 눈 안에서 일렁이던 빛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것은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마치 성좌(聖座)들처럼…… 수없이 많았고, 반짝거렸다.
“생일 축하한다.”
그래서 유중혁이 내게 그 말을 건넸을 때. 나는 마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그것이 전에 없이 기뻐서. 또 솔직하게 행복해서.
나는 믿을 수 없게도, 내 뺨에 닿아오는 유중혁의 입술에도 그만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