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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한번 더
내게 인사를 건네줘. 지난해처럼, 꼭 어제처럼

2019.12.13
크리스마스 기념 쓸모없는 선물 교환식 하는 김컴
* 완결(516화)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쾅쾅쾅쾅.
    방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미친, 뭐야. 몇 시지? 커튼을 쳐두고 잔 탓에 방안은 조금 어두컴컴했다. 침대맡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한 번 문이 흔들렸다. 쾅쾅쾅. 덜컹덜컹. 잠에 취해 아직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정신으로 멍하니 몸을 일으키는데 문 밖에서 잔뜩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아직 주무시는 거 아니죠?”

    아, 그렇군. 낭랑히 울려퍼지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가를 문지르고 이불을 들쳤다. 문을 열어서 일어났다는 걸 보여주는 게 좋겠지, 싶어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놓으려다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닫고 멈췄다. 시발, 유중혁.

    “일어났어, 유승아. 금방 나갈게.”
    “네!”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하자 흔쾌히 대답한 아이가 도도도, 계단을 다시 내려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야, 방문을 막 그렇게 두드리면 어떡하냐? 버릇없게? 뭐가, 이길영. 투닥거리는 소리가 멀어져갔다. 간신히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스마트폰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묵직한 팔이 허리를 끌어당겼다.

    “야, 유중혁. 이거 놔.”
    “더 자라.”
    “미쳤냐? 방금 유승이랑 길영이 왔다 갔잖아. 우리 늦었다고.”
    “아직 7시다.”
    “……?”

    어리둥절한 눈으로 스마트폰을 두드리자 과연 녀석의 말대로였다. 검은 액정 위에 7시 2분을 그리고 있는 하얀 숫자를 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데 허리에 감긴 팔에 더욱 힘이 가해졌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몸이 무력하게 휙 끌려갔다. 하마터면 등으로 유중혁의 몸 위를 깔아뭉갤 뻔한 것을 침대를 짚어 간신히 피했다. 이 무식하게 힘만 센 자식. 몸을 반쯤 돌려 쏘듯이 내려다봤지만 정말로 더 자기로 한 모양인지 녀석의 눈은 꾹 감긴 채였다. 그제야 뒤늦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유승이가 정말 많이 들뜬 모양이었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찾아와서 나를 억지로 깨우거나 할 애가 아닌데. 아침 7시라니, 유중혁 이 자식이 나보다 늦잠을 자고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12월 25일의 이른 아침이었다. 계절을 되찾은 서울의 하늘은 서늘할 것이 틀림없건만 방안의 공기는 거짓말처럼 따스했다. 흘긋 시선을 돌려 벽 위에 무심히 떠올라 있는 작은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현재 기온 26℃. 습도 40%. 맨몸을 감싼 안락한 공기는 물리법칙도 원리도 무시한 근본 없는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나는 잠시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사유하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눈내린 설원처럼 온 사위가 고요했다. 무엇도 제대로 된 것이 없는 불합리한 공간에서 오직 낮고 고른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등을 간지럽혔다. 그것이 현실의 무게추처럼 나를 제자리로 끌어내렸다.
    더운 숨을 느끼고 있자니 문득 생각하는 것이 부질없어졌다. 나도 잠이나 더 잘까. 하지만 이미 화들짝 놀라 깨어나 버린 탓에 졸음이 날아간 뒤였다. 유승이한테 금방 나간다고 말하기도 했고……

    “아.”
    “더 자라고 했다.”

    미친놈이. 나는 녀석이 콱 깨문 허리께를 매만지며 인상을 썼다. 희미하게 난 잇자국이 곧 불그스레하게 달아올랐다. 야, 무슨 입질하는 개도 아니고 왜 이렇게 깨물어대? 물론 항변해봤자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잇자국이 난 몸으로는 소용없었다. 강제로 나를 제 품에 처넣고 두 팔로 감아 묶은 유중혁은 내 어깨와 목 사이에 고개를 묻고선 다시 잠들었다. 하, 시발, 유중혁. 나는 결국 포기하고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내가 풀어낼 수 있는 악력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도 이 녀석이 이렇게 늦잠을 자려 하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맞닿은 살갗이 뜨뜻했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닐 텐데 등으로 뜨끈한 마력이 흘러들듯 넘실거렸다. 그렇게 잠시 가만히 있자니…… 조금…….



    “내가 일정 있는 날에는 작작 하랬지.”
    “아, 좀 닥쳐.”

    아침부터 뭔 망발이야 이게. 혀를 끌끌 차면서 동시에 낄낄 웃는 한수영의 얼굴을 밀어내고선 거울을 살피며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밀어내지고도 눈을 가늘게 접으며 고양이처럼 웃은 한수영은 내 주위를 빙글 돌았다. 허리는 안 아프냐? 걸어다닐 수는 있고? 유중혁이 업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더 놀려대는 것을 노려보며 반박할 말을 찾아봤지만 쉬이 떠오르질 않았다.

    [성좌, ‘가장 오래된 해방자’가 심드렁하게 귀를 후빕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숨길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은 다 봤다고 말하며 콧김을 뿜습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나는 혀를 쯧, 차며 창을 밀어내고 고개를 내렸다. 제발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 보긴 뭘 봐? 채널도 꺼놨는데. 젠장. 나라고 늦잠을 자고 싶어서 늦잠을 잔 건 아니다. 유중혁 이 자식이 다시 재우지만 않았어도. 아니, 하다못해 어젯밤에 그렇게……. 생각을 얼른 멈추고 원망 섞인 눈으로 내 뒤에 태연하게 서 있는 놈을 쏘아봤지만 내가 늦잠을 자게 만든 장본인은 역시나 말도 못하게 잘생긴 얼굴로 입김이나 내뱉었다. 저, 저, 또 이럴 때만 저러지. 내가 황당함에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한수영도 질렸다는 표정을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옆에 서 있던 유상아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더니 한수영의 맨손을 붙잡아 장갑을 끼워줬다.
    나도 다시 허공에 띄워진 거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코트 위에 유승이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얼기설기 어설픈 솜씨로 떠준 흰 목도리를 두르고, 길영이가 직접 골랐다며 내민 귀마개를 썼다(디자인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복슬거리는 털뭉치들을 만지작거리자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겨울에 목도리는 둘러 봤어도 귀마개나 모자 같은 건 써본 적이 없는 탓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직접 만들어준 목도리를 두르는 것도 처음이었다. 고맙다, 빙긋 웃으며 훌쩍 키가 자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좋다고 웃는다.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은 조금 더 있다가 주기로 하고선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모였죠?”
    “지각한 사람이 아주 당당하게 말하네요.”

    정희원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인상을 쓰듯이 웃었다. 더 뻔뻔하게 굴 수야 있지만 일단 나(와 유중혁) 때문에 이들이 조금 기다리고 있던 건 사실이기 때문에 그냥 담담히 한번 더 사과를 했다. 사과에 진심이 한 줌도 안 담겨 있어요, 독자 씨. 핀잔을 주는 목소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넘겼다. 눈을 들어 사람들을 살폈다. 하나, 둘, 셋, 넷…… 열하나, 열둘. 오기로 한 사람들은 다 왔네. 새삼스럽게도, 한데 모여 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제법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새삼스럽게도.

    “그럼, 갈까요?”

    씩 웃으며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레 양팔에 매달려 오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김독자 컴퍼니>의 사옥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불광역, 가지런한 세 글자가 익숙하게 모두를 맞이했다. 시나리오가 진행되던 내내 서울 일대가 심각하게 부서지고 무너졌었던 사실이 무색하리만치 말끔한 표지판이었다. 한산한 플랫폼은 우리 일행이 들어서며 조금 시끌해졌다. 슬쩍 목을 길게 빼서 둘러보니 우리를 제외하면 사람 한둘 서 있는 게 다였다. 우리를 알아보고 흘끔거리는 눈치기는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당장 귀찮은 일에 휘말릴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거짓말처럼 깨끗한 스크린도어 앞에 서서 가만히 열차를 기다렸다. 문득 몇년 전에 봤던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이 느리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그 기차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지는 몰라.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니까.’
    지하철에 올라 노선도를 간단히 살폈다. 명동역까지 가려면 충무로역에서 내려서 한 번만 갈아타면 된다. 갑자기 웬 명동이냐 싶지만 세상이 이렇게 망하기 전까지는 크리스마스 하면 명동이라는 소리도 있지 않았던가. 물론 유료화 이전의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이야기였고, 그런 것에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 몇몇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독자 씨 크리스마스에 명동도 안 가봤어요?” 내지는 “나도 안 가봤는데, 가보고 싶어.” 같은 말을 한 이들 덕분에 <김독자 컴퍼니>의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 장소는 명동이 되었다. 어느 장소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그런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엔가 유승이와 길영이가 바랐듯이, 날씨 좋은 날 한강에 돗자리를 펴고 피자와 치킨, 그리고 콜라를 먹을 때처럼. 그렇게 부러 익숙한 양, 가벼이 산책하듯 나선 길이었다.
    충무로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타는데 누군가가 지나가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옛날 생각 나네.” 나는 그저 조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른편에 매달려 있던 길영이가 불쑥 말했다.

    “그때 독자 형 죽을까봐 엄청 무서웠는데…….”

    살풋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표정을 풀었다. 그린 존이었던가. 곧이어 유중혁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는 이길영을 보며 나는 가만 어깨를 으쓱했다. 유중혁이 뭘 보냐는 얼굴로 되갚아왔지만 길영이도 지지 않는 것 같았다. 녀석, 많이 컸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크리스마스의 명동 거리에 처음 나선 소감은, ‘하얗다’는 것이었다. 사옥을 나설 때만 해도 하늘은 맑았는데 그새 눈이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눈발은 제법 굵어 내린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생각보다도 더 사람이 없네요.”

    뒤편에서 이설화가 신기하다는 듯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별로 없는 건가? 나는 고개를 슬 갸웃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인파가 제법 되었던 까닭이다. 주로 남녀 한 쌍인 경우가 많았고 우리와 같은 대규모 인원은 거의 없었지만. 내가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유상아가 눈을 깜빡였다.

    “옛날에는 발디딜 틈도 없었어요. 조금 과장 보태자면 만원 지하철 같은 느낌.”
    “그 정도입니까?”
    “크리스마스 특수였지만요.”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 건물들을 돌아보는 것이 조금은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 몇 걸음 돌아다니던 이지혜가 이설화와 함께 재잘거렸다. 여기 이X스프리 건물은 그대로 있네. 그러게요, 무너지긴 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중혁의 손을 잡고 있던 유미아도 그들과 합류해 있었다. 생정이라도 공유하는 태도였다. 흘긋 반대편을 돌아보니 정희원이 이현성을 쿡 찌르며 “크리스마스에 명동 와본 적 있어요?” 따위의 질문을 하고 있었다. 현성 씨, 뭘 굳고 있습니까. 희원 씨가 그런 거 신경쓸 사람도 아닌데. 이길영과 신유승은 누가 먼저 시작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패딩 안쪽에 눈뭉치를 집어넣으며 투닥대고 있었고, 곁에 서 있던 장하영은 눈을 껌뻑거리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불이 켜진 가게 안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많이 불지 않는 편이었지만 과연 겨울은 겨울인지라 금세 코끝이 차가워졌다. 코를 문지르고 있자니 옆에 서 있던 유중혁이 손바닥으로 내 뺨을 문질렀다. 이 자식은 맨손인데도 늘 따뜻하단 말이지. 기초대사량이 높아서 그런가. 흘긋 올려다보니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길래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길거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일단 이 인원이 다 함께 들어가서 앉을 만한 데로 어디가 좋을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곧 어렵지 않게 상당히 넓은 카페 비슷한 가게를 발견했고, 딸랑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서자 훈훈한 공기가 얼굴로 훅 끼쳐왔다.

    “어서오세…… 헉.”

    사무적으로 인사를 하던 알바생이 숨을 들이켜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우리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긴, 여기까지 오는데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많이 부풀려진 부분도 있고, 사실보다 위축되거나 왜곡된 부분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김독자 컴퍼니>는 마지막 시나리오를 끝내고 살아 돌아온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씩 웃으며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건넸다.

    “저희가 인원이 좀 많은데. 열두 명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습니까?”
    “아, 저기, 그, 잠깐만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외치듯 말한 알바생이 카운터 안쪽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무슨 말을 한 건지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뛰쳐나오듯 우리들 앞에 섰다.

    “기, 김독자 대표님!”

    저놈의 대표님 소리는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영 어색하네. 주인의 목소리가 조금 컸던 탓에 안쪽 테이블에 있던 사람 두어 명이 고개를 들어 우리들 쪽을 바라보고선 헉, 하며 입을 가렸다. 구원의 마왕이니 패왕이니 흑염마황이니 하는 소리가 수군거리듯 들려왔다. 이거 참. 뒤쪽에서 “유명인은 피곤하다다더니. 그래도 넌 기분 좋겠다? 흑염마황님?”, “뭐? 뒈질래 정희원?”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흘려듣고선 조금 전 알바생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자 주인이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거렸다.

    “그럼요. 없어도 만들어야죠.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게 말하며 열어준 자리는 과연 상석이었다. 들어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룸카페였는지 파티션과 커튼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었다. 제법 널찍한 공간 안에 놓인, 꼭 중국집의 회전 테이블처럼 크고 둥근 테이블을 보고 장하영이 오, 하는 소리를 냈다.

    “마침 잘 됐네. 우리 선물 교환식 하는 데 딱이겠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동감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자리를 찾아 앉는 사이 내 옆에서 알짱거리던 주인이 저기, 하고 나를 슬쩍 불렀다. 무슨 의도인지는 뻔했지만 나는 짐짓 상쾌한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왜 그러시죠?”
    “저희 집에 와주신 것도 영광인데. 사진이라도 한 장…….”

    시나리오가 끝나고 반 년이었다. 우리가 어딜 가든 따라오는 유명인 대접(?)의 일환이 역시나 또 나왔고, 나는 일찌감치 포기한 채 그러시든가요, 하고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곧이어 처음의 그 알바생이 스마트폰으로 우리들의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저 사진은 곧 대문짝만하게 출력되어 가게에 걸릴 것이다. 참으로 묘한 일이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나 내 사진이 걸리는 걸 싫어했었는데.
    이런저런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간신히 모두가 빙 둘러 앉았다. 곧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져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 제 앞에 올려놓고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짧게 긴장감 어린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가 “애들 선물부터 줄까?” 하고 말하고서야 다들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실 이제 아이들이라고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벌써 이렇게나 커버렸으니. 이길영은 여전히 스냅백을 돌려 쓴 채 짐짓 불퉁한 척 앉아 있었으나 눈빛에서만큼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고, 신유승은 얌전히 무릎 위에 손을 얹고 광선이라도 나올 듯 반짝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눈부셔. 그 옆에 앉은 유미아는 평소의 쿨한 표정 그대로였다. 당장이라도 “어디 내놔보세요.” 하고 말할 것 같다. 누가 유중혁 동생 아니랄까봐.
    한바탕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아이들은 각자 쇼핑백을 한아름씩 갖게 됐다. 집에 가면 신나게 풀어보겠군. 그리고 진짜 무대는 이제부터였다. 모두의 앞에는 이제 내용물을 알 수 없게 꽁꽁 싸매듯 포장된 무언가만이 놓여 있었다. 요란하게 테이블을 탕, 내려친 한수영이 씨익 웃으며 운을 뗐다.

    “그럼 어디 시작해보자고.”

    인벤토리를 연 한수영이 랜덤 박스를 꺼냈다. 대충 랜덤 박스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정확한 용도는 물건을 크기에 상관없이 자유로이 넣을 수 있는 아공간 박스에 가까웠다. 물론 그것 뿐이라면 이름을 ‘랜덤 박스’라고 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물건의 진정한 가치는…… 내장된 물건을 꺼내려 할 때 안에 있는 것 중 랜덤한 것이 나오게 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선물 교환 이벤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선물을 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고, 받는 사람도 뭘 받을지 전혀 알 수 없는 랜덤 선물 교환이었다. 중요한 것은 ‘쓸모없는 선물 교환 이벤트’라는 점이지만. 크으, 누가 이런 기가 막힌 이벤트를 생각했을까? 옆에서 장하영이 자뻑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모른 척했다. 한수영이 팔을 쭉 뻗어 랜덤 박스를 테이블 중간에 올려놓자 너나할 것 없이 박스 안에 가져온 물건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박스를 닫고 가벼이 흔들자 모두의 시선에 긴장이 흘렀다. 이게 뭐라고 시나리오를 할 때만큼 긴장되는지. 정말이지 어이가 없지만 나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어이없네.
    미리 정해둔 순서대로 박스 안에서 각자 물건을 꺼내 가졌다. 아직 포장된 상태임에도 물건들의 크기가 아주 제각각이었다. 손바닥 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4, 50센티미터는 될 법한 큰 물건도 있었다. 대체 뭐지? 궁금증만 커져갈 무렵, 나는 뜸을 들이다가 자, 이제 풀어보죠, 하고 선물 개봉을 시작했다. 곧이어 온갖 곳에서 비명 소리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니. 이게 뭐야.”

    나는 황당해서 헛웃음을 흘리며 꾸러미에서 나온 것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하, 시발. 정말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받은 선물은…… 복면이었다. 당연히 그냥 복면이 아니다. 턱 아래로 길게 연체동물의 다리가 10개 늘어진 분홍색 오징어 복면이었다.

    “…….”
    “아핰, 그거 진짜 김독자한테 갔냐? 미친, 존나 웃겨.”

    할말을 잃고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한수영이 뒤집어지듯 웃어댔다. 이거 설마 니가 준비했냐? 그렇게 물었지만 한수영은 내가 왜 그런 걸 준비하냐? 라며 되려 역정을 냈다. 알고보니 유승이가 준비한 거라고 한다. 유승아…….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자 신유승이 멋쩍게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랑 닮은 것 같아서 생각났거든요.”

    정말이지 할 말이 없다. 하…… 시발……. 대체 무슨 수로 이게 하필이면 나한테 온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옛날에 있던 어떤 일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확률 극악의 랜덤박스에서 유승이가 0.00001%의 확률을 뚫고 SSS급 아이템을 얻었던 일 말이다. 그 아이템이 뭐였더라. 잠시 생각하다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냥 고개나 내저었다. 나는 일단 팔랑거리는 복면을 내려놓고 신나게 웃어댄 한수영이 선물을 까는 모습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시발, 이게 뭐냐.”

    생선이었다. 생선. 등푸른 생선. 엥? 진짠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니 등줄기를 타고 길게 지퍼가 있었다. 아, 저런. 은빛으로 번쩍이는 생선 모양 필통인지 파우치인지를 손아귀에 쥐어짜듯 잡은 한수영이 손을 떨었다.

    “야! 이걸 어디다 써! 누가 선물했냐!”
    “완전 주인 찾아갔네. 너 글쓸 때 쓰는 펜 넣고 다니면 되겠다.”
    “죽을래? 나 손으로 안 쓰는거 니들 다 알잖아!”

    부들부들 떠는 한수영을 보고 마찬가지로 실컷 웃어주고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선물들도 살폈다. 옆자리에 앉은 장하영이 캐스터네츠를 손에 들고선 딸깍거리며 허망한듯 웃었다. 딸깍. 딸깍딸깍. 약간 정신을 놓은 것 같은데. 그 옆에는 정희원이 길쭉한 막대기 같은 것을 들고선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건 뭡니까? 하고 물어보니 장구채란다. 장구채. 참나, 초등학교 시절 이후로 처음 듣고 보는 물건이다. 별게 다 나오네 진짜. 가느다란 나무 막대를 손가락으로 쓸어본 정희원이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했다.

    “잘하면 무기로도 쓸 수 있겠는데…….”

    ……못 들은 척 하기로 했다. 나는 얼른 그 옆의 이현성을 바라보았다. 이현성의 손에는 손바닥만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제목을 살피니…… <앗! 배꼽 조심! 오늘의 깔깔 유머 50선>이었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군. 크, 어릴 때 서점에 저런 책 제법 많았는데. 나도 어렵게 구한 물건이었다.

    “오…… 이건……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니…… 안 괜찮습니다. 정신 차리세요. 분명 쓸모없는 선물로 준비했는데 이현성의 손에 들어간 덕분에 쓸모있는 선물이 될 위기에 처했다. 홀린 듯이 집중하며 커다란 손으로 책장을 넘기는 이현성을 보고 혀를 조금 찼다가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길영은 갈색 포대 자루를 들고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신유승은 화려한 붉은 꽃무늬 양봉모자를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조심스럽게 머리에 눌러 썼다. 제법 귀여운데. 괜찮은 선물 아냐? 생각하다가 이내 저런 걸 언제 쓰고 다니겠냐는 데 생각이 미쳐 정색했다. 정말 쓸모 없는 선물 맞다.
    유미아의 손에는 유아용 비니모자가 들려 있었다. 저런. 아무리 유미아가 유중혁을 닮아 머리가 작아도 저건 안 들어갈 거다. 눈을 가늘게 뜬 유미아가 입을 커다랗게 열어 비니모자를 자기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왠지 못볼 꼴을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들이 받은 선물을 보고 깔깔 웃던 이지혜가 제 선물 포장을 풀더니 그 안에서 나온 에어팟 한 짝을 보고선 분노로 몸을 떨었다. 와, 저건 솔직히 심했다. 나도 인정하고 말았다. 그 옆의 이설화는 시뻘건 색으로 번쩍거리는 LED 경광봉을 손에 들고선 화사하게 웃으며 허공에 훙 소리가 나도록 휘둘렀다.

    “이거 좋은데요? 말 안 듣는 환자가 있으면…….”

    ……선생님? 죄송한데 조금 무섭거든요? 아무래도 당분간 사옥 내의 의무실은 피하는 게 좋겠다. 마침 유상아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기에 대체 뭘 받았나 했더니 노란색 폴리스 라인 한 롤이었다. 아니…… 대체 저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거냐고.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닌 유상아가 받을 건 또 뭔가. 끈과 띠를 다루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 아니던가. 유상아가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독자 씨, 하고 화사하게 부르는 것 같기에 얼른 눈을 돌려버렸다. 이제 도망 안 간다고요…….
    마지막으로 옆자리에 앉은 유중혁을 살폈다. 이 녀석은 뭘 받았으려나. 그런데 유중혁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으응?

    “너는 왜 없냐?”
    “쓰레기를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다.”

    ……넌 또 대체 뭘 받았던 건데. 이제보니 녀석의 앞에는 까만 재가 조금 흩날리고 있었다. 태워버렸냐고. 이 성깔 더러운 자식아. 덕분에 삼일 밤낮으로 놀려주려던 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젠장, 눈치 빠른 녀석.
    하지만 이대로 보내긴 아쉬워서 나는 내 앞에 놓인 분홍색 오징어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틈만 잘 노리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나, 둘…… 지금이다. 나는 손아귀에 [바람의 길]을 얹어 가속하고선 순식간에 유중혁의 머리부터 분홍색 오징어 복면을 착 씌웠다. 그리고 곧바로 돌아올 응징을 대비해 팔을 들어올리며 마력을 집중하고 가드를 취하자…… 아니나다를까 전광석화같은 속도로 유중혁의 손이 날아왔다. 으악. 직격타는 피했지만 역시나 곧바로 팔목을 붙잡혔다. 으스러지도록 꽉 쥔 것이 아주 빡친 모양이었다.

    “죽인다, 김독자.”
    “야, 중혁아. 잘 어울린다.”

    키득거리며 녀석의 얼굴을 구경하며 일단 놀리는 말부터 뱉었지만 나는 웃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일단 주변에서도 터져나오는 웃음 따위는 없었다. 시발…… 이 자식은 왜 이걸 쓰고도 잘생겼지? 복면 위로 드러난 흉흉한 눈매는 날카로웠지만 분명히 말도 못하게 잘생겼다. 천으로도 가릴 수 없는 날렵한 콧날 따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턱에 털실 촉수가 늘어져 있는데도 잘생긴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불합리한 현실에 억울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 씨발. 역시 주인공…….”

    낯익은 말을 뱉는 한수영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곧바로 돌아오는 유중혁의 보복을 감당해야 했다. ……오징어 살결빛의 분홍색 복면을 내가 쓰게 됐다는 소리다. 여기저기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시발, 유중혁.



    겨울의 해는 금세 저물었다. 신나는 선물 교환식을 마치고 적당히 식사도 하고 음료도 마신 우리는 어둑해져 가로등이 점등된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니며 구경했다. 붉고 푸르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리스들과 전구들, 트리들이 색색으로 빛났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휴일이었다. 간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성좌들이 뭐라 떠들어대는 소리도 들려오곤 했다. 나는 어깨 위에서 잠든 비유의 뿔에 둥근 고리 장식을 걸어주고선 부드러운 털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비유야, 메리 크리스마스. 작게 속삭이고선 “우리 비유는 언제 유승이만큼 크려나……” 하고 혼잣말을 했더니 옆에서 정희원과 유중혁이 미묘한 시선을 보냈다. 왜요. 우리 애가 말은 좀 청산유수로 해도 아직 아기 도깨빕니다.
    잠시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눈을 흐리며 올려다보자니 해가 지고 금세 검푸르게 물든 하늘에서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렸다.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반짝임이었다. 시야에 하늘과 별들이 온통 들어찼다. 그 순간, 마치 넓은 하늘 속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 사방을 아우르는 적막함.

    “김독자.”

    어깨를 짚은 손의 무게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손을 들어 거의 풀리다시피 한 내 목도리를 다시 정돈해주었다. 의외로 녀석은 이런 걸 꼼꼼히 신경쓰는 편이었다. 나도 세상이 평화로워지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뭐라 말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저 씩 웃었다. 유중혁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것 같았다면 내 착각일까.
    하지만 곧 녀석의 눈에 애매한 기색이 어렸다. 조금은 낯선 얼굴이었다.

    “……왜 그래?”
    “김독자.”

    묵연한 시선이 닿아왔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내 눈을 꿰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일순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기분이 몹시도 이상했다.

    “야, 왜 그러냐. 갑자기 분위기 잡고.”
    “…….”

    부러 손을 밀어내며 말해봤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열더니 이내 다시 닫아버린다. 유중혁의 이런 모습은 정말 흔치 않은 것이었다. 녀석은 보통 아예 말을 하지 않으면 않았지 할 말을 참는 성정은 아니었으니까. 침묵이 길어졌다. 무어라 한 마디로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유중혁을 바라보다가, 내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의미 모를 떨림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
    “기다리고 있다. 다들.”

    방금 내가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유중혁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얼떨떨한 심정으로 바라보는데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다문 유중혁이 내 손을 휙 붙잡고선 일행들이 모인 곳으로 이끌었다. 독자 씨! 얼른 와요. 집에 가야죠. 멀리서 손을 흔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발견하고 나는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또 늦은 모양이었다.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갈게요. 지금.



    나는 눈을 떴다.
    스킬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핑 돌았다.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바닥도 벽도 없는 공허한 공간일 뿐이었다. 주변은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이었고, 우주였고, 지하철이었다.

    「김 독자 또 보 고왔 지」
    “…….”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냥 털썩 앉아버렸다. 여전히 머리가 핑글핑글 도는 탓이었다.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아 아예 등을 대고 눕자 들썩거리듯 웃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후 회 할거 라 고했 잖 아」

    ‘「후 회 하 게 될 거 야 너 는 그 들을 다시 는 만날 수 없어」’
    ‘”하지만 볼 수는 있잖아.”’


    나는 쓰게 웃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라 말한 적은 없다. 그저, 지금의 나는 그거면 된다고 말했을 뿐. 손을 들어 눈가를 덮자 ‘제4의 벽’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김 독자 차 라 리 기억 동 기화 하는 게 어 때」
    “안 돼.”

    아바타 ‘김독자’와 나는 분리된 세계선에 존재한다. 때문에 내 기억의 49%를 가진 아바타는 늘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분리된 ‘나’는 종종 기억의 부재로 혼란을 느꼈지만 크게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나’가 자신이 아바타임을 깨닫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억의 분배를 신중하게 마쳤으니까.
    아바타를 내게서 분리한 후로 나는 계속해서 ‘나’와 일행들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독자 시점으로 지켜보았지만, 곧 나는 내가 스스로 아바타 1인칭 시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오래된 꿈’으로서의 힘인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고, 사실 알 필요도 없었다. 내게는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1 인 칭 으로 그 냥 몰입 해 버리 면 될 텐 데」
    “안 된다니까.”

    고개를 저으며 손을 떼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할 때처럼 아바타인 ‘나’의 몸에 빙의하듯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셈이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현재 당신이 보존한 기억은 ‘51.00%’입니다.]
    “……이미 내가 녀석에게서 1%를 빼앗아서 더 가졌어.”

    그러니까, 더 뺏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 1퍼센트로 만족해야 했다.

    「김 독자 멍 청이」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끝도 없이 펼쳐진 허공만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보던 유중혁의 시선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잠식했다. 녀석은 마치, 아바타 너머의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말을 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몰아낼 길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이 체온을 낮췄다. 그것은 어쩌면 질투심이었고, 후회였고, 원망이었고.
    혹은, 아주 깊은 그리움이었다. 모두를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었다. 나를 봐줬으면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아닌 ‘나’를 봐줬으면 해서.
    이렇게 될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후회할 것임을 추호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나는 버텨낼 자신도 있었다.
    눈꺼풀이 다시금 파르르 떨려왔다. 나는 유중혁의 입술이 움직이던 모양을 다시 곱씹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렇게, 닿지 않을 인사를, 닿기를 바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전하던 모습을.
    내게 인사를 건네줘. 지난해처럼, 꼭 어제처럼.
    그렇게 바라는 마음만큼은 죄가 아닐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래야만 아주 오래도록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닿지 않을 인사로 화답하며, 나는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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