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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ck or Trust
10월 31일 할로윈데이 기념글

2019.10,21
10월 31일 할로윈데이 기념글
* 심적으로 약간 타격이 있을 수 있는 엔딩 주의해주세요.











    “짠!”

    앗, 깜짝이야. 갑작스레 눈앞에 불쑥 나타난 하얗고 까만 뭉텅이들에 흠칫 놀라 하마터면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김독자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의 가슴께까지 오는 크기의 유령들이 우─ 하는 소리를 내며 그를 둘러싸고 빙글빙글 돌았다.

    “우우─. 우리는 유령이다.”
    “사탕 주면 안 잡아먹지.”
    “야, 그거 아니라니까! 아까 가르쳐줬잖아!”
    “뭐! 이것도 맞잖아!”
    “그건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거든 멍청아.”

    유령들은 저들끼리 의견 합일이 되지 않았는지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서 서로를 향해 속닥대며 성질을 냈다. 그 모습마저 참으로 보기 좋다고 느껴진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김독자는 당장 ‘잡았다, 요 녀석들.’ 하며 유령 거죽을 홀랑 뒤집어 놀려줄까, 아니면 짐짓 속아주는 척을 할까 짧게 고민했다.

    “야, 아무튼 다시 해. 알겠어? Trick or treat이야.”
    “이씨. 신유승 진짜 빡쳐…….”
    “쉿!”

    하얀 유령이 까만 유령의 어깨를 꿍 내리쳤다. 까만 유령은 궁시렁대면서도 다시 김독자를 돌아보고 똑바로 섰다.

    “아저씨. Trick or treat!”
    “Trick or treat이에요, 형!”

    김독자는 다시 한 번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호칭을 그대로 유지하면 유령 거죽을 뒤집어 쓴 의미도 없어지지 않느냐고 반박할 뻔한 것을 꾹 눌러참았다. 이래서 외국 문화란. 김독자는 허리를 굽혀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사탕 주면 안 괴롭히는 거 맞지?”
    “응!”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게 시키고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움큼씩 꺼내 각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쩐지 아까 유상아가 와서 주머니에 사탕을 왕창 넣어주고 가더라니 이렇게 쓰라고 한 모양이었다. 사탕을 받아들고 와, 하는 소리를 내며 기뻐한 아이들은 펄쩍펄쩍 뛰며 다른 어른들을 찾아 조르르 뛰어갔다. 귀여운 녀석들. 이제 처음 봤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 훌쩍 자라버렸다. 예전에는 허리께를 붙잡으며 매달려오곤 했는데, 이제는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릴 정도로 키가 컸지. 물론 김독자는 이길영은 커녕 신유승 한 명도 매달고 있을 힘이 없었다.

    “할로윈 데이 유령인가.”
    “아, 깜짝이야. 언제 왔냐.”

    두 번째로 놀란 김독자는 아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어버리고선 어느새 곁에 와서 서 있는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여느 때처럼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녀석. 김독자는 그 시선을 따라 그새 축제 분위기를 한껏 내고 있는 제 집의 환골탈태를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감상했다. 역시 유상아와 정희원은 손재주가 좋다. 보아하니 한수영은 종이 쪼가리만 잔뜩 만들어 낸 모양이지만……. 천장으로부터 주렁주렁 늘어진 박쥐 모양 장식들과 주황색 풍선, 그리고 아기자기한 호박 장식이 그야말로 할로윈 축제의 현장이었다. 김독자는 오색빛을 내는 꼬마 전구 장식에 가까이 다가갔다. 신기하다는 듯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자 유중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직도 새삼스러운 모양이지.”
    “……뭐, 그렇지. 어쨌든 나는 이런 축제랑은 거리가 먼 채로 살았으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째 바글바글하거나 소란스러워야 할 집안이 너무 조용했다. 이렇게 조용할 사람들이 아닌데. 애초에 이 정도 인원이 모이면 조용할래야 조용할 수가 없다. 흠, 다들 뭐 하고 있지. 구경하러 가볼까. 팔짱을 끼고 어느 방부터 습격할까 곰곰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발목을 확 잡아챘다.

    “악! 뭐야!”
    “그어… 나는 좀비다…… 그워워어…….”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하고 머리는 산발을 한 이지혜(라는 것을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가 김독자의 발목을 사냥하고선 좀비처럼 삐걱거리며 일어섰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자니 유중혁이 비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이 자식이. 김독자는 이지혜에게 또 다른 부위를 사냥당할까 싶어 한 발짝 물러났다.

    “너 진짜 좀비구나. 꼭 처음부터 좀비였던 사람 같아.”
    “무슨 소린지… 모른다……. 좀비… 어려운 거 이해 못해……”
    “그것도 원래 너랑 같은데…… 으악!”

    괜히 한번 더 태클을 걸었다가 또 사냥당할 뻔한 김독자는 간신히 몸을 내빼 옆방으로 쏙 들어갔다. 성난 이지혜가 아저씨잌!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유중혁이 있으니 어떻게든 막아주지 않을까 싶어 얼른 문을 잠갔다. 음…… 잠깐. 오히려 더 부추기는 거 아냐? 아니나다를까 그워어거리던 이지혜가 쿵쿵 문을 두드려대기에 야, 문 부서지면 수리비 너한테 청구할거야! 라고 외쳤더니 잠잠해졌다. 녀석, 돈 벌기가 쉽지 않지. 이해한다.
    뒤늦게 문으로부터 몸을 돌리고 방 안의 상황을 확인한 김독자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설화와 유상아를 바라보았다. 어째 불빛이 환한 것 같더라니……. 그의 서재(?)는 어느새 분장실로 탈바꿈해 있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커다란 거울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에는 분장용 옷더미가 널부러져 있었다. 이설화와 유상아의 손길을 받던 한수영이 김독자를 발견하곤 씩 웃으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보였다.

    “야, 김독자. 나 다음엔 너 차례야.”
    “뭔 소리야.”

    가까이 다가가보니 한수영은 마녀 분장을 하는 모양이었다. 치렁한 망토를 몸에 두른 채 눈물점이 있던 자리를 덮으며 별무늬를 그려넣고, 뾰족하게 뻗치도록 세팅한 단발머리 위로 까만 마녀모자를 눌러쓰자 영락없는 할로윈 위치였다.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 하며 인조 송곳니를 확인한 한수영이 손에 기다란 마법봉 같은 걸 들고선 만족스럽게 물러났다. 멀거니 서 있는 김독자를 향해 하얀 소복을 입은 이설화가 사르르 웃으며 손짓했다.

    “독자 씨. 이리 와서 앉아요.”
    “예? 저는 별로……”
    “안 돼요. 독자 씨도 해야 돼요.”

    유상아의 손에 질질 끌려가 의자에 앉혀졌다. 상아 씨…… 역시 나보다 체근민 합이 높았던 게 맞다. 김독자는 구미호 분장을 한 이설화와 수녀복을 입은 유상아를 차례로 돌아보고선 말했다.

    “저는 뭘로 해주실 겁니까?”
    “글쎄요. 뭐 하고 싶어요? 골라보세요.”

    강시도 있고, 미라도 있고. 음…… 근데 독자 씨는 이게 좋을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한 이설화가 집어든 것은 새카만 망토와 날카로운 인조 송곳니였다. 잠시만요.

    “뱀파이어 말하시는 겁니까?”
    “네. 독자 씨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유상아도 동의한다는 듯 끄덕댔다. 나한테 뱀파이어가 어울리나? 이제 예전처럼 뿔이나 날개도 없는데. 하지만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어느새 얼굴 위로 새하얀 파운데이션이 펴발라지고 있었다. 김독자는 제 얼굴을 꼼꼼히 살피는 이설화를 일별하고선 옷걸이에 걸린 새카만 수단을 가리켰다.

    “사제는 누가 합니까?”
    “아. 저건 중혁 씨 거예요.”
    “…….”

    수단을 입은 사제 유중혁이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릴 것 같기는 했다. 금욕의 상징같은 놈이니까. 물론 김독자는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뭐. 별로 상관 없겠지.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던 유상아와 이설화가 다 됐어요, 하고선 거울을 가리켰다. 김독자는 스르르 일어나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허여멀겋던 얼굴을 더 하얗게 칠해놓으니 이제는 거의 백짓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독자 씨는 원래 하얘서 굳이 안 발라도 될 것 같았지만……. 이설화가 그리 말하며 웃었다. 입술은 방금 전에 피를 빨아먹기라도 한 듯 붉게 칠하고선 일부러 손으로 문질러 번지게 했는데 그것이 또 오묘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입 안에 끼운 인조 송곳니 끝을 혀로 슬 문질러보니 제법 날카로웠다. 조심해야겠는데.
    간이 탈의실(욕실)에 들어가 정장 비슷한 것을 입고 나와서 검게 펄럭이는 망토까지 걸치자니 정말 그럴싸한 뱀파이어 같았다. 김독자는 이게…… 나? 같은 심정이 되어 저도 모르게 한참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옆에 나란히 서 있던 한수영이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씩 웃으며 어깨를 퍽 내리쳤다.

    “야, 제법 봐줄만해졌다?”
    “아파.”
    “어이구. 약골 다 됐지 참. 아무튼 나가봐. 가서 애들이랑 좀 놀아줘. 아, 유중혁 보이면 이 방에 좀 밀어넣고.”

    세 사람의 손에 등을 떠밀려 방 밖으로 던져졌다. 이거 참……. 김독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제 차림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았다. 몹시도 낯설었지만…… 기분이 썩 좋았다. 그때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뭘 쪼개고 있어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김독자는 털이 부숭한 짐승의 손을 발견하고선 딱 멈췄다. 이건 뭐지? 어리둥절해 있는데 두 앞발(?)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이가 스르르 팔을 내렸다. 늑대인간 분장을 한 정희원이었다. 김독자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빙긋 웃었다.

    “희원 씨.”
    “그래요. 저예요.”

    의기양양하게 답한 정희원이 김독자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었다.

    “오늘 독자 씨는 뱀파이어인가?”
    “예. 희원 씨는? 라이칸스로프?”
    “라이칸…… 뭐요? 보통 늑대인간이라고 하지 않아요?”
    “아.”

    김독자는 다시금 머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판소를 너무 많이 봐서 그만. 정희원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장난스레 두 앞발을 다시 들어올렸다.

    “어때요? 겁나죠? 크와앙.”

    으르렁거리듯 두 손을 위협적으로 쥐었다폈다 하기에 순간 식은땀이 날 뻔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지지 않고 입을 벌려 송곳니를 보여줘봤지만 그보다 더 날카롭고 커다란 짐승의 송곳니를 장착한 정희원의 모습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젠장. 낄낄거리며 웃은 정희원이 김독자를 향해 걸어오는 유중혁을 발견하고선 아, 하고 반색했다.

    “중혁 씨도 얼른 들어가요.”
    “무슨……”
    “맞다. 유중혁, 너도 들어갔다가 와. 아마 네가 마지막인 것 같던데.”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인 녀석을 정희원과 합심해서 분장실로 밀어넣었다. 이 다음은 유상아랑 이설화랑 한수영이 알아서 해줄 것이다. 어디보자. 아직까지 못 만난 사람이…….

    “아. 독자 씨!”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은 붕대인간이 양팔에 유령 두 마리를 매달고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얼굴까지 절반 이상 붕대로 덮어둔 미라 분장이었지만 보나마나 이현성이다. 김독자는 픽 웃으며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게 말하자 이현성이 붕대 아래로 사람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단단한 팔에서 뛰어내린 꼬마 유령들이 김독자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와아! 뱀파이어다!”

    아이들을 향해 씩 웃어주고선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이를 드러내어 보여주며 왕, 하고 무는 시늉을 하자 아이들이 까르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이윽고 나타난 좀비와 마녀까지 가세하니 어느 삼류 할로윈 영화를 테마로 한 극장 던전에라도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분장실 문이 열리고 그로부터 걸어나오는 유중혁을 본 순간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굳었다.

    “헐…….”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도 정확히 같은 심정이었다. 검고 긴 수단의 단추를 목끝까지 채운 유중혁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목덜미를 조이는 흰 칼라를 당겨 살짝 느슨하게 풀어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체구를 여과없이 드러내며 서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여기 모인 요물들에게 퇴마(물리)를 시전할 것처럼 당당했다. 와중에도 기묘하게 금욕적으로 잘생긴 얼굴이라는 게 어이가 없다. 그냥 서있기만 할 뿐인데 무슨 후광이라도 나는 것 같다.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에서 있을 리가 없는 일이건만…… 정말로 얼굴이 패션의 완성이다. 이 영화는 이제 삼류가 아니라 일류다.
    얕은 한숨을 쉰 유중혁은 손에 들고 있던 성경책(저건 또 언제 준비했대)을 소파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김독자는 정신을 차리고선 몸을 일으켰다. 새끼, 성격 더러운 건 여전하구만. 씩 웃으며 그의 곁에 다가가 서자 유중혁이 수상쩍다는 시선을 보냈다.

    “우리 중혁이 개 풀렸네? 그렇게 막 헐렁하게 칼라 풀어내고, 그래도 돼? 원래 수단은 불편하라고 입는 거라며.”

    알랑거리는 목소리에 유중혁이 사납게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김독자는 실실 웃으며 가볍게 발돋움을 해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표정 풀어. 속닥이듯 말하며 꾹 다물린 입매를 문지르자 유중혁이 간신히 표정을 조금 풀어냈다. 자식, 그럴 거면서. 곧 정희원과 유상아가 손뼉을 치며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보아하니 요리 팀과 보드게임 팀으로 나눈다는 것 같았다. 흥미 없다는 듯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유중혁은 곧 양배추와 호박을 엉망으로 만들 기세인 사람들을 보고선 이를 갈았다. 먹을 걸로 장난치지 마라, 그런 소리를 하더니 결국 요리 팀에 합류하는 것을 보고 김독자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김독자는 양쪽에 신유승과 이길영을 낀 채 보드게임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런 건 또 누가 가져온 건지 할로윈 테마로 꾸며진 보드게임과 트럼프 카드가 줄줄이 나타났다. 게임은 누가 잘 하려나. 결과는 머지 않아 드러났다. 계속해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한수영과 달리 도둑잡기를 하는 내내 꼴찌를 해 3연속 벌칙을 받는 중인 이현성을 번갈아 바라보며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현성 씨, 아무래도 게임은 하시면 안 되겠습니다.
    문득 왼쪽 팔을 잡아당기는 감각에 돌아보니 신유승이 그를 올려다보며 아, 하고 입을 벌리라는 시늉을 했다. 순순히 아─ 해주자 입속으로 사탕 하나가 쏙 들어왔다. 사과맛 사탕이었다.

    “맛있죠?”

    빙긋 웃으며 끄덕여 주었더니 아이가 해맑게 웃었다. 혀끝으로 녹아드는 달콤한 맛에 문득 눈가가 시큰해졌다. 김독자가 몹시도 그리워했던 미소였다. 정말로 오랫동안 보고 싶어했던 모습.
    질 수 없다는 듯 이길영도 사탕을 내밀어 김독자는 양 볼에 사탕을 하나씩 문 채 우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요리도 거의 끝나가는 듯했다. 김독자는 식탁 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바라보며 입을 조금 벌렸다. 역시나 요리 실력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는 놈이다. 커다란 호박 파이 여러 개와 양배추 고기찜, 으깬 감자 요리 따위가 데코까지 완벽한 상태로 올라와 있었다. 요리를 하느라 불편했는지 수단을 벗고 있던 유중혁은 얼른 다시 분장을 갖춰 입으라는 주변 이들의 성화에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하면서도 옷을 입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그저 조용히 웃었다. 유중혁이 왜 순순히 이들의 말에 따라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늦은 식사를 마치고 느긋한 잡담 시간이 이어졌다. 정희원과 이현성의 안부를 묻고, 다른 이들과 한참이나 대화를 나누던 김독자는 두리번거리며 한동안 보이지 않는 유중혁의 모습을 찾았다. 집은 그리 넓지 않았기에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베란다에 서서 먼 하늘을 보고 있는 유중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여기 혼자 있냐.”

    뒤를 돌아본 유중혁은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김독자의 어깨를 감쌌다. 김독자는 옅게 웃고선 그에게 몸을 붙였다. 10월의 마지막 날, 서늘한 공기에 추위를 느낄 법도 하건만 유중혁의 곁에 붙어 있으면 그럴 걱정은 별로 없었다. 유중혁이 바라보던 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던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그의 차림새를 다시 훑었다.

    “수단도 잘 어울리네.”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은 없다.”
    “아, 그러셔.”

    내년엔 늑대인간 해봐. 그것도 어울리나 보게. 그리 말했더니 유중혁은 대답 없이 눈을 돌렸다. 냉랭한 반응이었지만 김독자는 그가 들어줄 것을 알고 있었다. 음. 늑대라……. 김독자는 문득 먼 어느 날, 어떤 유중혁이 스스로를 늑대에 비유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게 벌써 언제적 일이더라. 눈이 흐려질 것 같아 김독자는 얼른 다른 말을 꺼냈다.

    “난 오늘 뱀파이어다, 유중혁.”
    “그래서?”
    “그래서라니.”

    김독자는 손을 뻗어 수단으로 꽉 가려진 유중혁의 목을 가볍게 매만졌다. 까슬하게 닿아오는 옷깃을 더듬다가 흰 칼라를 빼내고 단추를 몇 개 풀어냈다. 검은 천 아래로 드러나는 탄탄하고 곧은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쓸자 유중혁은 어디 해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입꼬리를 올려 웃은 김독자는 발돋움을 해 그의 목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선 이를 세웠다. 날카로운 인조 송곳니가 단단한 피부에 작은 자국을 남겼다. 이윽고 고개를 떼어낸 김독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넌 진짜 뱀파이어가 와도 피 한 방울도 못 빨아먹겠다. 뭐가 이렇게 딱딱해?”

    코웃음을 친 유중혁은 곧바로 김독자의 망토 자락을 붙잡아왔다. 어, 야, 잠깐만. 하릴없이 끌려간 김독자는 제 셔츠 사이를 헤집는 뜨거운 손길에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순식간에 타이가 끌러지고 셔츠 단추가 가슴팍까지 풀어졌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뒷덜미를 단단히 감싼 유중혁이 고개를 숙였다. 더운 숨결이 피부에 닿아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유중혁, 잠, 깐. 흐으…….”

    목을 깨무는 아릿한 감각에 김독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중혁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김독자의 하얀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온통 붉은 잇자국을 내놓았다. 유중혁 개자식. 이거 분명히 며칠은 갈 텐데. 흔적이 남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면 내일이 더 힘들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김독자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되려 팔을 뻗어 머리를 감싸안자 유중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이 마주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잇새로 들어온 혀가 입안을 가볍게 훑고 송곳니 끝을 스치자 엷게 비릿한 피맛이 났다. 유중혁. 이거 빼고 하자, 다치겠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유중혁은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대로 한참이나 숨이 막히도록 입을 맞춘 뒤에야 유중혁은 그를 놓아주었다. 김독자는 열에 달뜬 숨을 길게 내뱉으며 피가 맺힌 유중혁의 아랫입술을 매만졌다.

    “다친다고 했잖아.”
    “상관없다. 오히려 이 편이 좋으니까.”

    낯부끄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괴로운 말이었다. 김독자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하염없이 그의 입매와 얼굴을 쓰다듬었다. 유중혁이 눈가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또 우는군. 그런 소리를 하기에 김독자는 그의 어깨를 퍽 내리쳤다. 아니거든, 이 자식아. 물론 유중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득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김독자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집안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베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독자 씨. 우린 이제 가볼게요.”
    “오늘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김독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서늘한 공기로 폐를 가득 채우자 비로소 침착하게 말을 꺼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둘러보며 김독자는 빙긋 웃었다.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었다.

    “조심히 가세요.”

    좁은 현관에 사람이 몰려들어 더욱 비좁아졌다. 휙, 현관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공기가 휑해졌다.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던 신유승이 문고리를 붙잡고선 머뭇거리며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이제 많이 자랐다. 내년이면 벌써 고등학생이던가. 김독자는 살아서 아이가 학교를 가고, 졸업을 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하지만, 나는 이 아이의 졸업식을 직접 볼 수는 없겠지. 노란 꽃다발을 안겨줄 수도, 함께 사진을 찍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 유승아. 너와 나의 세계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
    이미 훌쩍 커버린 아이였다. 그럼에도 김독자는 버릇처럼 작은 아이를 대하듯 한쪽 무릎을 꿇고 신유승을 향해 팔을 벌렸다. 아이는 입술을 꾹 깨물고선 몸을 숙여 그에게 안겨들었다.

    “아저씨. 아저씨…….”
    “그래, 유승아.”

    괜찮아.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들썩이는 아이의 등을 하염없이 토닥였다. 어느새 다가와 곁에 선 이길영도 눈가에 눈물을 그렁하게 매달고선 주먹을 꽉 쥐었다. 문 밖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어깻죽지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유승은 이를 악물고선 울음소리를 참았다.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유승아. 내년에 또 보자.”
    “아저씨…….”
    “졸업 미리 축하해.”

    그렇게 말하며 몸을 떼어놓고 아이의 얼룩진 뺨과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필사적으로 미소를 짓자 아이도 애써 눈물젖은 얼굴로 웃어보였다. 이길영이 신유승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가자. 이제 제법 어른스러워진 목소리였다. 신유승보다 더 커진 키. 내년에 또 만나요. 문 너머 누군가의 목소리에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 다시.
    천천히 문이 닫혔다. 김독자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하나의 세계가 닫혔다. 1년에 한 번만 열리는 문이었다. 10월 31일, 할로윈 데이. 죽은 자들이 되살아나 돌아온다는 날.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들 중 누구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김독자.”

    낮은 부름에 김독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걸음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힘없이 발을 내딛다가 쓰러질 뻔한 것을 유중혁이 붙들어 안았다. 그 단단한 팔이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꽉 붙잡으며 김독자는 이를 악물었다. 손끝이 새하얘지도록 쥐어 아플 법도 하건만 유중혁은 내색 하나 하지 않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뺨을 감쌌다.

    “얼굴이 엉망이군.”
    “…….”
    “매년 그랬지.”

    김독자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마주보았다. 눈앞이 흐려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조금은 거친 듯한 손가락이 눈가를 쓸어내어 겨우 시야가 트였다.

    “유중혁.”
    “…….”
    “유중혁, 개자식아.”

    너는 진짜 나쁜 새끼야. 왜……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데? 왜, 사라지는 모습을 나한테 꼭 보여주는데. 개새끼. 빌어먹을 자식아. 김독자가 아무리 욕을 쏟아내어도 유중혁의 대답은 매년 변하지 않았다. 올해도 그럴 터였다.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으니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유중혁이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에 당황해 눈물조차 그쳤었다. 하지만 질리지도 않고 같은 대답을 하는 유중혁을 보는 게…… 이제는 몹시도 괴로웠다.
    다른 이들은 김독자에게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항상 조금 이른 시간에 이 집을 떠났다. 김독자는 유중혁도 차라리 그래주기를 바랐다. 차라리 저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새긴다면. 그렇다면, 그저 조금 먼 곳에 살아서, 1년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거짓말처럼 이 집 안에서, 내 눈앞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면, 그럼,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닫게 되지 않는가. 너와 나의 세계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그에게, 사라지기 전에 그냥, 저 문을 열고 나가라고 말하려고 했다.

    “유중혁.”

    묵연한 시선이 와닿았다. 그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눈빛이었다.

    “가지 마.”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럴 수 없어, 유중혁. 내가 어떻게.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중혁이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김독자는 황급히 그로부터 몸을 떼어놓았다. 손에 잡히지 않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이렇게, 너는 여기에 있는데. 그런데도. 유중혁은 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듯 애써 거리를 좁혀오지 않았다. 그것이 더 괴로웠다.
    유중혁. 차라리 믿게 해줘. 여기는 내 세계가 아니라고 나를 속여줘. 나는,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알고 있다. 삶은 이야기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삶이 차라리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김독자.”

    몇 번이고 그렇게 생각했다.
    매년 10월 31일이면,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다음 날도. 하루도 빠짐없이. 김독자는 유중혁을 불렀고, 신유승을, 정희원을, 이현성을, 이설화를, 장하영을, 키리오스를, 파천검성을.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디오니소스를, 심연의 흑염룡을, 제천대성을, 그리고 우리엘을 불렀다. 그의 삶을 구성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한 사람의 생이 단 하나의 설화라고 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김독자의 일부였다.
    유중혁의 손이 뻗어왔다. 김독자는 두려움에 떨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은 김독자의 뺨 주변을 쓰다듬듯 움직였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닿아오는 감각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유중혁의 얼굴이 흐려지고 있었다. 손가락 끝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예년보다 빠른 속도였다. 알고 있었다. 매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짧아져 간다는 건.

    “버텨라. 다음 해까지.”
    “…….”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한 달을 버티고, 한 해를 버텨, 그것들을 모아, 기어이 살아나갈 수 있게 될 거라고. 너는 내가 없어도, 우리가 없어도 살아남을 거라고. 유중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젠가의 김독자가, ‘멸살법’이 끝나도 어떻게든 살아나갔으리라 생각했던 것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라져가는 유중혁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렇구나. 김독자는 문득 깨달았다. 유중혁이, 저 잘 웃지도 않는 놈이, 어째서 이 순간에만 그렇게 미소짓는지를.
    어쩌면 너도 나와 같았구나. 마지막으로 내게 웃는 모습을 남겨주고 싶었구나.
    내년에 다시 만나자.
    그렇게 말하며 사라지는 이를 향해, 김독자는 온 힘을 다해 활짝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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