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05
어린이날 기념 육아물 (날조)
* 성마대전 편까지의 아주 미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농담이겠지.”
김독자는 얼떨떨한 얼굴로 시스템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손안에 감겨오는 온기와 공중을 떠도는 글씨의 파편들은 변하지 않았다. 으응? 응? 이게 무슨 일인지 두 눈을 몇 번이고 의심했지만 야속하게도 시력은 몹시 정상이었다. 그러니까, 김독자가 보고 있는 것은 이런 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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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시나리오 ─ 가정의 달>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어린이날을 맞이하여 아이를 돌보세요.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
실패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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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게 틀림없다. 이게 뭔 시나리오야? 멀거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자 팔에 안겨 있던 작은 생명체가 꿈지럭거리며 움직였다.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손을 놓칠 뻔한 김독자를 바라보며 혀를 찬 정희원이 팔을 뻗어 아이를 데려갔다. 그렇다. 아이였다. 고작해야 너덧 살 쯤 되었을까. 옅은 잠에 빠져 살짝 감긴 눈꺼풀과 토실한 뺨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물론, 김독자가 아닌 정희원의 감상이었다.
“귀여워라. 어디서 이런 애가 튀어나왔지.”
“시나리오 대단하네. 이런 생명체도 만들 수 있는 거야?”
“그런 얘긴 들어본 적 없는데. 역시 부모 잃은 아이가 아닐까?”
일행들은 신기하다는 듯 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이어지는 손길에도 아이는 계속해서 잠에 빠져 있었다. 시나리오의 영향인지, 혹은 그저 어린아이답지 않은 무심함인지는 모르겠지만. 퍼뜩 정신을 차린 김독자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대체 누가 시나리오 수락한 겁니까?”
[화신, ‘유상아’가 손을 듭니다.]
[화신, ‘이지혜’가 히죽 웃으며 손을 듭니다.]
[화신, ‘한수영’이 킥킥대며 웃습니다.]
[화신, ‘이현성’이 머쓱한 얼굴로 손을 듭니다.]
[화신, ‘신유승’이……]
젠장. 다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보아하니 ‘김독자 컴퍼니’ 전체를 대상으로 내려온 시나리오인 듯했고,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수락된 모양이었다. 메인 시나리오가 100번 대에 가까워진 지금 상황에 갑자기 이런 히든 시나리오가 튀어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만…… ‘멸살법’의 완독자인 자신도 처음 보는 시나리오라는 것이 김독자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푹 쉰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난이도는 A니까 그다지 어렵지는 않겠군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들 어쩌자고 덜컥 수락한 겁니까? 보상도 제대로 안 떠있는데.”
“엥.”
이지혜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김독자를 돌아봤다. 뭐냐, 그 표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으나 다른 이들의 표정도 이지혜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독자를 올려다보던 신유승이 말했다.
“아저씨. 보상이 안 보여요?”
“응?”
김독자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에게는 빤히 보이는 이 ‘보상’이 사장님에게는 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잠시 눈을 굴리던 정희원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잘됐네. 어차피 다음 시나리오 발생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쉬어두려고 했었잖아요. 이참에 휴식한다고 생각하죠.”
“흐음. 아이를 키우는 게 휴식일 것 같지는 않은데요…….”
유상아의 말에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니들 육아가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아냐?”
“꼭 해본 사람처럼 말하네, 한수영?”
“뭐. 해봤으면 어쩔 건데?”
당연히 안 해봤지만! 맞부딪힌 정희원과 한수영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하하……. 이지혜가 난처하게 웃으며 뺨을 긁었고 이현성은 우왕좌왕하며 정희원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언니들, 싸우지 마세요……. 신유승이 양손에 주먹을 꼭 쥔 채 동동거렸으나 두 사람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한숨을 쉰 김독자가 나설까 고민하는 찰나 소란이 멎었다. 뒤쪽에서 다가오는 흉흉한 낌새 때문이었다.
“누가 이런 시나리오를 수락했나?”
넘실거리는 기운에 맞춰 검은 코트자락이 춤을 추듯 흩날렸다. 한껏 찌푸려진 잘생긴 미간이 그의 기분이 영 좋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 것처럼 검집을 붙잡고 있는 유중혁의 살기가 모두의 몸을 따갑게 찔렀다.
[화신, ‘이지혜’가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말합니다.]
[화신, ‘정희원’이 모른 척 고개를 돌립니다.]
[화신, ‘한수영’이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내뺍니다.]
이 사람들이. 김독자는 눈을 부라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딴청뿐이었다. 싸늘한 얼굴로 문책이라도 하려는 듯 열린 유중혁의 입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아닌, 바로 그 시나리오였다.
“으흑, 으, 아앙…….”
정희원의 품에 얌전히 안겨서 잠들어 있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의 당황한 시선이 자그마한 생명체에게 꽂혀들었다. 아무래도 유중혁의 살기에 놀라 깬 것이 틀림없었다.
일행들이 다급히 여러 방법을 시도했으나 한번 터진 울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가 정희원에게서 유상아의 품으로, 다시 이현성의 품으로 옮겨갔으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통통한 뺨으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일행은 모두 아연해졌다.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 중 누구도 어린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는 탓이었다.
그 때였다. 유중혁이 눈을 꾹 감고 땅이 무너질 듯 한숨을 쉬더니, 이현성에게로 팔을 뻗었다.
“……이리 와라.”
얼떨결에 유중혁에게 아이를 넘겨준 이현성은 곧 깜짝 놀란 듯 입을 쩍 벌렸다. 아이를 안아드는 유중혁의 품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넓은 품안에 안정적으로 아이를 안은 유중혁이 작은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쉬이, 착하지. 울지 마라.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거짓말처럼 울음이 멈췄다.
“……헐…….”
“내가 방금 뭘 본거냐…….”
“너 뭐야? 스킬이라도 썼어?”
유중혁이 그들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쏘아보냈다. 네놈들 때문에 이 꼴이 난 게 아닌가? 명백히 그런 시선이었기에 일행은 다시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아.”
정희원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곧이어 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이 모든 상황을 황망히 바라보고만 있는 김독자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독자 씨. 이 참에 사원들 복지 좀 해주세요.”
“……예?”
정희원의 의도를 곧바로 알아들은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김독자에게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래, 아저씨! 솔직히 우리 회사 너무 복지가 엉망인 거 아니야?”
“맞는 말이지. 역시 한수영 코퍼레이션으로 바꾸자.”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래요.”
유상아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김독자가 기억하는 얼굴은 아니었으나, 그 미소만은 이전과 꼭 같았다. 이현성과 신유승마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김독자가 조금 찔린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무슨 복지를 원하시는 겁니까?”
“이 시나리오 클리어 해주세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정희원의 뻔뻔한 말에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니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이게 뭔 상황이지?
“우리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요! 그러니까 좀 쉬고 올게요. 그 동안 독자 씨가 아이 데리고 돌보면서 시나리오 클리어 좀 해주세요.”
“아니, 이 시나리오는 제가 수락한 게 아닌……”
“어허! 사장님 지금 갑질하는 겁니까!”
“노조라도 만들어야지 안 되겠네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김독자는 정희원의 흰 머리칼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현성의 무뚝뚝한 표정도, 유상아의 낯선 얼굴도, 한수영의 손목에 둘둘 감긴 붕대도. 처음 기억하는 것보다 훌쩍 자란 신유승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은 김독자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신은 없습니다만, 노력해보죠.”
“와! 사장님 최고다!”
이지혜의 방긋거림을 무시한 김독자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유중혁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와봐, 아저씨랑 놀자.”
어색한 듯 머뭇거리는 어조에 일행들은 피식 웃었다. 김독자는 그들을 향해 눈을 홉떴고, 그리고……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러…….”
“……응?”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김독자가 눈을 껌뻑거렸다. 곧이어 아이가 제법 명정한 말음으로 말했다.
“안 갈래요.”
고개까지 젓는다. 김독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뻗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제 품에 다시 파고드는 아이를 바라보는 유중혁의 시선이 미묘했다.
“이게 웬일이래…….”
“중혁 씨 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요.”
“그럼 사부랑 아저씨랑 같이 하면 되는 거 아냐?”
유중혁과 김독자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이지혜가 찔끔하며 유상아의 뒤로 몸을 숨겼다. 하하 웃은 유상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쩔 수 없겠는데요. 아이가 중혁 씨를 좋아하니까, 독자 씨랑 같이 돌보는 방향으로 하죠.”
“헛소리 하지 마라, 유상아.”
“그럼요? 이 시나리오 그만둘 건가요, 중혁 씨?”
유상아가 빙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시나리오의 ‘보상’이 적힌 방향이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한참이나 글자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마침내 말했다.
“……쉬기로 했으면 얼른 꺼져 있어라. 거슬린다.”
“와아. 고마워요.”
일행들은 왁자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남겨두고 걸어갔다. 모처럼인데 뭐 하고 쉴까요? 공단 밖으로 나들이라도 갈까요? 난 늘어지게 좀 자고 싶은데……. 우리끼리 다과회라도 할까? 설화 씨도 불러서? 조잘거리며 걷다가 유중혁과 김독자로부터 충분히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 때쯤 정희원이 비밀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요. 저 아이…… 닮지 않았어요?”
누구를? 같은 질문은 당연하게도 따라오지 않았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덩달아서 목소리를 낮춘 이지혜가 속닥거렸다.
“그치? 그치? 눈썹이 사부랑 똑같다니까.”
“눈 반짝거리는 건 독자 씨 닮았어요.”
“얼굴 하얀 것도.”
“인상이 안 흐릿하고 또렷하게 예쁜 건 역시 중혁 씨를…….”
수군거리던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유중혁과 김독자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유중혁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와 그 옆에 난처한 듯 서 있는 김독자. 신유승이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걸까요?”
“역시 그건가? 그, 한명오 씨처럼……”
“독자 씨가 아이를 낳았다는 얘긴 금시초문인데요.”
“그럼 뭐 설화를 섞어서 어떻게 한 거 아냐? 애초에 시나리오 시작되고 갑자기 나타난 애니까.”
어깨를 으쓱한 한수영이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알 게 뭐냐, 어차피 오늘 지나면 다시 사라질 애일 걸. 우린 약속한 대로 푹 쉬러 가자고.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공단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이 시나리오는 김독자가 해야만 하는 게 맞으니까.
김독자는 머뭇거리며 유중혁의 곁을 맴돌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에 얽힌 여러 감정들을 유중혁은 눈치채고 있었으나 딱히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저 몸을 돌리며 흘긋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뭐 하고 있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바깥 공기는 어린 화신체에게 치명적이다.”
“어? 어어, 그래…… 그렇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둥거리며 따라온다. 유중혁의 목덜미를 끌어안은 아이가 뒤를 따라오는 김독자를 빤히 쳐다봤다. 아이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김독자가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넌 어째 아이 돌보는 것도 잘 하냐?”
“…….”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걸어갔다. 김독자도 딱히 대답을 바라지는 않은 듯 조금 빠르게 걸어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넘겨보는 손길이 몹시도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간지러운 듯 몸을 뒤척였다.
“……유미아를 내가 돌봤으니까.”
“응?”
“그래서 익숙한 거다.”
짧게 말하고는 다시 입을 닫는다. 무뚝뚝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깃든 오랜 기억을 김독자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래, 그게 유중혁의 ‘설정값’이었지…….
문득 가슴이 짓눌리듯 무거워졌다.
얼마쯤 더 걸어 공단 안쪽의 빈 방들 중 하나에 들어선 유중혁은 의자 위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얌전히 앉은 아이가 다리를 통통 튀겼다. 잠시 고민하던 김독자가 아이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이 뭐니?”
아이는 눈을 깜빡이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다리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말똥말똥히 쳐다보는 시선. 다시 눈을 흐리는 김독자를 돌아보고 쯧, 혀를 찬 유중혁이 아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스스럼 없는 동작에 깜짝 놀라는 김독자를 가벼이 무시하곤 아이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이름이 뭔가. 알아야 우리가 널 부를 때 편하다.”
조금 더 말이 없던 아이는 이내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했다. 이름, 없어……. 유중혁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김독자도 마음을 다잡은 듯 아이를 향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이름이 없다고?”
“응.”
“그럼…….”
잠시 눈을 굴린 김독자가 말했다.
“우리가 이름 지어줘도 돼?”
“……응.”
위아래로 끄덕거리는 고개에 김독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이름으로 하지. 중얼거리는 김독자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들으며 유중혁은 아이가 보기보다 조숙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시나리오의 부산물인 탓인가.
“은유.”
“……?”
“오늘부터 네 이름은 은유야.”
기가 막힌 네이밍 센스에 유중혁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김독자는 특유의 뻔뻔한 얼굴을 하더니 씩 웃었다. 그렇게나 당황하고 있더니 겨우 제 페이스를 찾은 모양이었다. 유중혁이 인상을 구겼다.
“작명 센스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군.”
“뭐. 왜.”
고개를 치켜들며 대답하고선 아이를 향해 방긋 웃는다. 은유야. 마음에 들어? 아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지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김독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은유야. 우리가 누군지는 알아?”
아이가 커다란 눈을 깜빡거렸다. 유중혁과 김독자를 번갈아서 바라보던 은유가 손을 들어 유중혁을 가리키며 말했다.
“패왕.”
그렇지. 김독자가 웃으며 아이를 쳐다봤다. 나는? 이윽고 아이의 손가락이 김독자를 향했다.
“……가장 못생긴 왕?”
아니, 이게 뭔 소리야. 황당한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고 있자니 시야 안에 들어와 있는 유중혁의 어깨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이 자식이……. 아니 근데 이 애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거야. 언제적 이름인데. 애매해진 김독자의 얼굴을 본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몹시도 맑아서 유중혁도, 김독자도 희고 토실한 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포기한 김독자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다시 소리 내서 웃은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칭얼거렸다. 기복이 생각보다 다채로운 것이 역시 어린아이이긴 한가 싶었다. 은유야, 왜? 아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묻자 무릎을 끌어모으고는 답한다.
“배고파…….”
김독자의 얼굴에 멍한 기색이 다시 스쳤다. 그렇지, 뭔가 먹여야 하는구나……. 낯설다는 듯한 태도. 성좌가 된 뒤로 김독자는 음식을 섭취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성좌의 섭식은 이야기를 통해 충족되었으므로. 그 얼굴을 바라본 유중혁이 미간을 찡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들어 오겠다.”
“엉? 네가?”
“그럼 네놈이 만들기라도 할 셈인가.”
김독자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주방 쪽으로 가려는 듯 문고리를 붙잡은 유중혁이 나가기 전 김독자를 흘끗 돌아봤다.
“사고치지 말고 있어라.”
“뭔 소리야.”
“어디 도망갈 생각도 하지 말고.”
서슬 퍼런 시선에 김독자가 하하,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김독자의 입술이 천천히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어디 안 가.”
“…….”
“알잖아, 유중혁.”
유중혁은 그 빛나는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이만큼이나 흰 뺨, 가느다란 머리칼. 흩어진 설화 파편을 주워 모으던 손끝의 감각이 다시 느껴지는 듯해 주먹을 말아쥐었다가 이내 휙 문을 열고 나갔다. 닫힌 문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빙긋 웃는 얼굴로 은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우리 뭐 하고 놀까?”
30여 분이 지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유중혁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는 김독자와, 그 위에 엎어져 있는 은유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김독자의 가슴께에 턱을 괸 채 킥킥거리며 다리를 위아래로 튀기는 아이의 낯은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반면 그 아래 깔려 있는 김독자는 기진맥진한 듯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뭘 했길래 30분 만에 이 꼴이 된 거지?”
“야, 중혁아…….”
육아 장난 아니다. 노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김독자를 바라보며 코웃음을 친 유중혁은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았다. 맛있는 냄새에 고개를 번쩍 든 아이가 몸을 일으켜 쪼르르 테이블을 향해 걸어왔다. 김독자도 상체를 일으키고선 유중혁 쪽을 바라봤다.
“뭐 만들었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한입 크기로 만들어진 쿠키들과 으깬 감자 샐러드, 그리고 수프 같은 것들이었다. 김독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유중혁을 쳐다봤다.
“재료는 어디서 났어?”
“새삼스러운 질문을 하는군.”
아, 그렇군. 도깨비들이 코인으로 팔기 시작했나. 이 땅은 더 이상 농작물을 키울 수 없을만치 황폐해졌다. 한가롭게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 또한 없었음은 물론이다. 작물이 씨가 마르길 기다린 도깨비들이 이제사 물품들을 팔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래, 옛날에 먹던 음식들이 그리워서 못 견딜 때도 됐으니까. 소파에 올라가려 버둥거리는 은유를 훌쩍 안아 앉힌 김독자가 아이의 곁에 앉아선 쿠키 하나를 집었다.
“은유야, 아.”
“아-.”
아이는 순순히 입을 벌려 김독자가 내미는 쿠키를 답싹답싹 받아 먹었다. 맛있어? 물음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답한다. 정말 맛있는 모양이었다. 그치? 유중혁이 요리 하나는 잘 해. 유중혁은 눈썹을 들썩였다.
“먹어보지도 않고 잘도 말하는군.”
“응? 그야…… 너 요리 잘하는 건 맞잖아? 피스랜드에서 먹어보기도 했었고…….”
“너도 먹어라.”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나 음식 안 먹어도 되는 거 알잖아, 유중혁. 하지만 유중혁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제대로 안 먹으니 아이랑 고작 30분 놀아주고도 비실대는 것 아닌가?”
“뭔 말을 그렇게 해.”
애초에 화신이나 성좌의 체력은 이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김독자는 유중혁의 표정을 보고선 말을 멈추고 얌전히 쿠키를 입에 집어넣었다. 오도독, 표면이 입안에서 부서지며 적당히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맛이 맴돌았다. 맛의 균형이 기가 막혔다.
“……맛있네.”
가볍게 눈썹을 들썩인 유중혁이 숟가락을 들어 은유에게 수프를 먹이기 시작했다. 그 동작이 또 물흐르듯 자연스러워 김독자는 조금 감탄했다. 납죽납죽 받아먹는 아이의 눈이 살갑게 접혔다. 문득 그 모습에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빈사 상태인 유중혁의 입에 수프를 흘려넣던 때가……
“읍.”
김독자는 제 입에 쑤셔넣어진 수저를 얼떨결에 물고선 수프를 꿀꺽 삼켰다. 뭐야, 미친. 유중혁을 향해 눈을 부라리자 되레 싸늘한 표정이 돌아왔다.
“기분 나쁜 얼굴을 하고 있더군. 그거 먹고 입 다물어라.”
“…….”
이 자식이 진짜. 김독자는 입에서 수저를 빼내며 정신 사납게 주변에 떠오르는 우리엘의 간접 메시지를 귀찮다는 듯 치워냈다. 어느새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운 은유가 소파에 늘어졌다.
“다 먹었나?”
“응…….”
몸을 일으켜 그릇들을 갈무리한 유중혁이 잠시 팔짱을 끼고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덩달아서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가 눈을 빛냈다.
유중혁의 가지런한 눈썹이 조금 휘어졌다. 그의 오른쪽 눈동자가 짧게 금빛으로 빛났다가 꺼졌다. 역시, 제대로 된 화신체는 아닌 것인가. 예상은 했지만. 아이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설화 파편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몸을 움직였다.
“나가지.”
아이의 작은 손을 붙잡은 유중혁이 문을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은유의 발걸음 속도에 맞춘 움직임이었다. 종종거리며 걷는 은유를 바라본 김독자는 가까이 다가가 아이의 다른 쪽 손을 잡았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올려다보기에 빙긋 웃어주었더니 아이도 좋다고 함께 웃었다. 고개를 돌리니 드물게 조금 풀어진 얼굴을 한 유중혁이 보였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김독자는 주먹으로 제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육아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어쩐다 이야기야 무성하게 들었지만 역시 실전은 이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은유는 정말이지, 그 또래 아이들 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하고 조숙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힘든 것은 힘든 것이다. 어쨌든 아이니까, 갑자기 변덕을 부리기도 했고……. 김독자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그마한 동화책을 뒤적거리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글씨 읽을 줄 알아?”
“응.”
대단하네. 김독자는 진심으로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걸터앉아 있던 유중혁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 공단 안에서 유미아를 만나 쓰다듬어주었을 때와 비슷한 손길이었다. 형, 나도 쓰다듬어 줘요! 옆에서 함께 보채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던 김독자의 서툰 손길과는, 사뭇 다른. 김독자는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지만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독자 씨! 드디어, 드디어……!”
한명오였다. 젠장. 김독자는 이마를 짚었다. 공단 입구 근처에 걸터앉아 있던 공필두가 산책을 나온 세 사람을 보고 허어, 하며 기막힌 표정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김독자의 얼굴에서 지친 기색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인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했으나…… 한명오의 주책보다야 그런 눈빛이 훨씬 나았다. 은유와 유중혁, 김독자를 번갈아서 바라보던 한명오가 입을 떡 벌린 채 김독자의 어깨를 붙들고 앞뒤로 흔들었다.
“아니, 출산을 했으면 진작 나한테 조언을 구하러 왔어야지!”
“제가 낳은 게 아닙니다.”
딱 잘라 말했으나 한명오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란 눈빛으로 김독자를 쳐다봤다.
“거짓말 하지 말게.”
“진짭니다.”
“자네랑 꼭 닮았는데 어디서 발뺌을!”
뭐라고. 김독자는 조금 전 한명오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는 그를 쳐다봤다. 무슨 헛소립니까. 그렇게 말하자 허리를 숙이더니 아이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본다. 아이가 동그란 눈을 껌뻑이며 한명오를 쳐다봤다.
“보게! 눈이 자네랑 똑같지 않은가!”
“모르겠는데요.”
“얼굴 하얀 것도……!”
“아이들이 다 하얗지 그럼 시꺼멓답니까.”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쥐어뜯은 한명오가 도움을 구하듯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이 아이 독자 씨랑 닮지 않았나?”
유중혁은 말없이 한명오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팔짱을 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한명오는 되레 그를 바라보고선 무언가 깨달은 듯 턱을 매만졌다.
“가만. 이제 보니 이 아이, 유중혁 자네와도…… 읍.”
“헛소리 말고 나가세요. 은유 자야 합니다.”
“으웁! 읍! 으읍!”
김독자는 한명오의 입을 틀어막은 채 방 밖으로 밀어내고선 문을 찰칵 걸어 잠갔다. 후우, 한숨을 쉬고선 돌아와 다시 침대에 걸터앉는다. 살짝 가라앉는 침대 매트리스에 유중혁이 눈길만 돌려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애매한 얼굴로 아이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책장을 넘기던 은유가 작게 하품을 했다.
“하아암…….”
“은유야. 졸려?”
작은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진다. 김독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우리 은유 이제 코 잘까? 유중혁은 침대에 아이를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는 김독자를 지켜보았다. 낮까지만 해도 아이한테 말 거는 것조차 어려워하더니 이젠 제법 능숙한 태도다. 자장, 자장. 하며 토닥이는 손길은 여직 조금 서툴었지만. 눈을 깜빡거리던 아이가 김독자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
토닥이던 손이 우뚝 멈췄다. 하지만 무던한 아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이내 색색 고른 숨소리를 냈다. 감긴 눈꺼풀 아래 기다랗고 촘촘한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김독자는 조금 굳은 얼굴을 간신히 풀어내며 숨을 내쉬었다.
“후우…….”
눈을 지그시 감고 무언가 생각하듯 말이 없더니, 얇은 눈꺼풀이 다시 들어올려졌을 때는 원래의 김독자였다. 늘씬한 몸이 기지개를 펴며 그리는 곡선을 지켜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너도 좀 자둬라.”
“아냐. 일해야지.”
“좋은 말로 할 때 누워라.”
서늘한 목소리에 김독자가 어이없다는 듯 유중혁을 바라봤다. 안 졸려. 거짓말 하지 마라. 유중혁은 김독자의 눈밑에 진 그늘을 일별했다. 늘 저랬지만, 오늘은 더욱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쉬라고 했다, 김독자.”
“……쉬기는.”
픽, 자조적인 웃음을 흘린 김독자가 시선을 돌려 은유를 바라보았다. 흰 손가락이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김독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쉴 틈이 어디 있겠어.”
“…….”
유중혁은 손을 뻗어 김독자의 어깨를 꾹 밀었다. 어, 야, 잠깐만…… 은유 옆에 강제로 눕혀진 김독자가 눈을 껌뻑이며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안 쉬면 죽이겠다.”
“……미쳤냐?”
유중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은유를 사이에 둔 채 제 몸도 침대에 뉘였다. 그 바람에 저 혼자 일어나기 머쓱해진 김독자는 결국 포기하고 몸을 옆으로 뒤척였다. 손을 들어 아이의 말랑한 뺨을 쓰다듬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이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게 그렇게 이상했나.”
“뭐?”
김독자는 흠칫 놀라 유중혁을 쳐다봤다. 검은 눈동자가 묵연했다. 이 자식, 진짜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건가. 슬 시선을 피한 김독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그럼.”
“뭐가 이상한가.”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뭐가, 이상하냐고. 질문에 댈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나는 이 아이의 진짜 아빠도 아니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도깨비인 비유도 제게 아바앗, 하고 불렀던 것을 기억한다. 신유승이 저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일 때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김독자는 문득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눈을 꾹 감았다. 팔 안에 감겨 있는 작은 아이의 안온한 체온조차 소용이 없었다.
“김독자.”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김독자는 눈을 뜨지 않았다. 유중혁이 움직이는 듯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곧, 몹시도 따뜻한 손이 눈 위에 내려앉았다. 그 온기에 순간 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김독자가 가만히 있자 유중혁이 말했다.
“무서운 건가.”
“…….”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김독자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은 여전히 그의 눈가를 덮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치, 너를 이해한다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럴 리가 없는데도, ‘등장인물’인 유중혁이 ‘독자’인 저를 이해할 리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런데도…… 어렴풋한 기대를 하게 되어버리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김독자는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이라도 있는 것마냥 제 속내를 읽어내던 최근의 유중혁을 떠올렸다. 그간 몇 번인가 이해도가 부족해 그의 생각을 읽지 못했던 일들도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김독자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서두를 꺼냈을 뿐인데 입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어렵게 침을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랑 어머니를…… 많이 때렸거든. 아니, 정확히는 어머니를. 나 대신…… 맞으시는 일이 많았어.”
감은 눈꺼풀 너머로 이제는 기억도 흐릿한 아버지의 얼굴이 스쳤다. 음주, 폭력, 도박, 보증……. 가정을 박살내는 일이란 일은 모조리 행하던, 아버지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아까운 인간. 김독자는 그를 혐오했다. 비록 사고였을지라도 제 손으로 아버지를 찔렀다는 것을 기억해 낸 뒤로도 그다지 후회를 한 적은 없었다. 그가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그 뒤로 어머니와 제대로 대화를 하려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호흡이 가빠졌다. 가슴이 꾹 조여들고,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유중혁. 나는…… 무서워.”
내가, 아버지같은 사람이 될까봐. 결국은 나도 그 인간의 자식이라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될까봐. 나는 절대 좋은 아버지가 못될 것 같아……. 김독자에게 있어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일은 공포와 트라우마였다. 그에게 있어 ‘아빠’라는 이름은, 그런 것이었다. 유중혁은 조금 축축하게 젖어드는 손바닥을 여전히 떼지 않은 채 가만히 생각했다. 그는 김독자를 아주 잘 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제법 긴 시간을 함께 했고,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며 몇 번이고 등을 맡기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박고 새카만 활자의 벽 내부를 들여다보기도 했었다. 때문에 김독자의 불우했던 유년도, 현재도 상당 부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김독자를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오만이고 기만일 것이었으므로.
김독자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유중혁은 손을 살짝 떼어냈다. 손가락으로 엷게 감긴 눈가에 물든 눈물을 닦아내주었다. 김독자는 눈을 꾹 감은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김독자.”
“……응.”
“너는 그런 인간은 되지 않을 거다. 내가 장담하지.”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이 들어올려졌다. 틈새로 드러난 유리알 같은 검은 눈동자가 유중혁을 응시했다. 그를 똑바로 마주보며 유중혁은 담담히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김독자는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이며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의 입가에 어쩌면, 미소와 비슷한 것이 걸렸는지는 그걸 바라본 김독자만이 알 수 있을 터였다.
유중혁이 시선을 떼어내 둘 사이에서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응?”
“이 아이는, 너와 닮은 게 맞다.”
김독자의 입이 뻐끔거렸다. 중혁아. 미친 거 아니지.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뜨자 금방 딴청을 피우기는 했지만.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닌데, 이 아이는…… 나보다는 유중혁을 더 많이 닮았는데. 분명히 그랬다. 아이의 오똑한 콧대와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던 김독자는 어느새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문득 찾아온 깨달음이 가슴을 적셨다. 김독자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한 적은 없었다. 어린 시절 사랑받고 자란 기억이 없는 탓에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자식을 갖고 싶다는 생각조차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 그래. 이건 그러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과 자신을 닮은 아이라면, 만약 그런 아이가 정말로 있을 수 있다면, 어쩌면 조금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이는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유중혁의 품 대신 김독자에게 안겨 있던 아이는 처음으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배시시 웃는 사랑스러운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을 때, 아이는 이미 그 곳에 없었다. 김독자는 비어버린 팔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히든 시나리오 ─ 가정의 달이 종료되었습니다.]
[클리어 보상이 정산 중입니다.]
“……끝났네.”
유중혁을 돌아보는 김독자의 얼굴에는 시원섭섭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보니 시나리오 이름이 이게 뭐냐, 속으로 생각한 김독자는 속으로 잠시 계획을 세웠다. 가정의 달, 5월에는…… 어버이날도 있었지. 내일은……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
유중혁은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나리오 클리어 창이 그에게도 떠올라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손을 두어 번 쥐었다폈다 한 김독자가 숨을 뱉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곧, 여느 때와 같이 조금은 뻔뻔한 미소를 띤 얼굴이 되돌아왔다.
“근데…… 그래서 보상은 뭐였던 거지? 나는 아무 것도 못 받았는데.”
독자 씨, 시나리오 끝났어요? 저 멀리서 손나팔을 하며 팔을 흔드는 일행들이 보였다. 그들을 흘긋 돌아본 유중혁은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야, 유중혁, 어디 가! 너는 보상 받았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허공을 밟으며 사라지는 유중혁의 신형을 바라본 김독자는 결국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야지.
유중혁은 손가락을 움직여 시나리오 클리어 창을 밀어냈다. 가지런한 글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