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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데네브, 베가 /6

유중혁이 없는 여름방학은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천문부의 여름 합숙이 끝나자마자 바로 팀 합숙에 들어간 유중혁은 얼굴을 보기는커녕 연락이 닿기조차 어려워졌다. 아마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지. 김독자는 이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네가 사라진 나의 시간은 빨리 흐를까, 느리게 흐를까.
김독자는, 그 대답이 후자라는 것을 하릴없이 확인하며 마우스를 달칵거렸다. 유중혁의 경기 영상이 켜져 있던 인터넷 창이 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학이 이렇게 재미가 없었던가. 예전엔 어떻게 보냈더라. 책도 실컷 읽고, 게임 영상도 실컷 보고…… 그랬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재미가 없는지 모를 일이다. 옆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메신저를 확인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여름자율학습에 끌려 들어간 부원들의 단체 카톡방이 터져나가고 있었다. ‘수업 존나 재미없어’, ‘나 3교시 내내 잤음;’ 같은 이야기들을 확인하며 피식 웃은 김독자는 침대에 몸을 뉘였다. 선생님들이 자신을 대하기 꺼려한다는 것이 이런 때는 제법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시한폭탄(처럼 보이는) 김독자를 같은 교실에 그다지 두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꽤 상쾌한 기분까지 느끼던 김독자의 손이 멎었다.



이틀 전 저녁에 온 메시지였다. 합숙에 들어간 뒤로도 짧게나마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이 닿았었는데, 어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설마 그렇겠냐 싶기도 했다. 먼저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도 바쁜 데 방해하는 것 같아 꺼려지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저 녀석이 나중에 다시 연락한다고 했는데 내가 먼저 연락하는 건 좀……. 조금 심란한 기분이 되어 유중혁과의 대화창에 들어가 이리저리 스크롤을 움직이던 김독자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씨, 깜짝이야…….”
이 자식은 맨날 예고도 없이……. 물론 예고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니 갑작스럽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이래, 미친 거 아냐.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대화창을 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친, 1 바로 없어졌을 거 아냐. 그리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이어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야? 그 순간, 손안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악, 시발……! 깜짝 놀라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한 김독자는 황급히 액정에 뜬 이름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유중혁. 뭐야? 갑자기 웬 전화야? 갑작스런 상황에 한참이나 망설였지만 몸은 솔직했다. 결국 통화 버튼을 누른 김독자가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바쁜데 전화한 건가?]
아니. 아니야. 칼같이 대답한 김독자는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져 입을 꾹 다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유중혁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또…… 정말이지 좋았다. 젠장. 빈 손으로 눈가를 꾹 누르는 사이 유중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참 안 받길래 끊으려고 했다.]
“……뭐 좀 하느라.”
적당히 둘러대고선 천천히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 귀를 기울여 보니 유중혁이 있는 곳도 제법 시끄러운 것 같았다.
“바쁜 거 아냐? 웬일로 전화를 다 했냐?”
[점심시간이라. 조금 틈이 났다.]
하긴, 이 자식 성격이면 밥 먹는 시간이랑 자는 시간 빼고는 연습만 줄창 해댈 것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심히 사는 놈이니까. 그런 생각에 픽 웃은 김독자는 다시 말했다.
“연습은? 잘 돼가?”
[그럭저럭.]
경기는 봤나? 그 말에 김독자는 당연하지, 라고 대답했다. 유중혁이 속한 팀은 그를 비롯한 다른 팀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4강까지 손쉽게 진출해 있었다. 4강전은 리그전으로 진행되고 가장 점수 합산이 높은 두 팀이 결승전에서 맞붙는 형태였다. 두 팀이랑은 이미 경기를 했으니 이제 한 팀 남았네. 그 다음은 결승전이다.
“근데 결승전 9월 아냐? 합숙은 그때까지 계속해?”
[아마도.]
“그럼 개학해도 학교는 못 나오겠네?”
유중혁이 작게 웃었다.
[왜? 보고 싶기라도 한 건가?]
“미친.”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은 김독자가 헙, 하고 입을 가렸다. 물론 험한 말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미친 새끼. 유중혁 진짜 미친놈……. 그를 만난 뒤로 이 생각만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저런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애써 억누른 김독자가 간신히 말했다.
“개소리 하지 말고 이기기나 해.”
[걱정 마. 우승할 테니까.]
지켜보고 있어라. 그 목소리가 또, 왜 그렇게 믿음직스럽게 들리는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김독자는 이내 통화중이라는 것을 깨닫고 응, 이라 대답했다.
[잘 보고 있어. 그 날, 내가 카메라 보고 인사하면 너한테 하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또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오지, 유중혁 미친 자식아…….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고 있자 유중혁이 조금 웃은 것 같았다. 그 때, 중혁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갈게요. 멀리에 대답한 유중혁이 다시 김독자를 향해 말했다.
[가봐야겠다. 다시 연락하지.]
“어, 어어, 그래. 얼른 가봐.”
[밥 챙겨 먹어라.]
그 말이 조금 우스워 김독자는 하하 웃었다. 그래, 인마. 걱정 마라. 너도 연습 잘 하고. 그대로 통화를 끊은 김독자는 잠시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손안의 온도. 그 온기가 꼭 다른 이의 체온인 것만 같았다. 멀리 있지만, 곁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면…… 이상한 걸까. 김독자는 짧은 통화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했다.
밥 챙겨 먹어라.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그게 왜 이렇게…… 가슴이 저릿하도록 괴로운지 모르겠다. 무릎을 세워 고개를 파묻었다. 손에 들려 있던 스마트폰이 힘없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 자식은 어떻게 안 걸까. 내가 혼자 있으면 식사를 잘 챙기지 않는다는 걸. 어쩌면…… 경험담 같은 걸까.
갑작스럽게 목이 메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이 있던가, 가물했다. 어른들이 모두 집에 계시지 않을 때는 늘 편의점 도시락을 사다가 적당히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돈이 부족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다행인가. 하지만 어른들이 집에 계신다고 해서 식사를 제대로 하느냐 하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을 꺼렸다. 어쩌면 어머니를 많이 닮은 그의 얼굴이 보기 싫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마지막 온정이 있기는 한 건지 식탁에는 차려진 반찬들이 남아 있었으나, 어른들을 피하려다 보면 늘상 밤늦은 시간에 차게 식은 상태로 먹어야하기 일쑤였다.
문득, 유중혁의 집에서 먹었던 팬케이크가 떠올랐다. 그거…… 진짜 맛있었는데. 김독자는 멍하니 그 때를 생각했다. 팬케이크는 따뜻하고, 폭신했으며, 달았다. 그 맛이 못내 괴로웠고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았다. 내가 만들어 볼까?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김독자는 요리 역시 젬병이었다. 하긴 요리를 잘 했어도 밥을 해먹을 수나 있었겠느냐만은. 흐린 눈빛이 눈꺼풀 뒤 어둠 속을 헤맸다.
내 삶에는 왜 빛나는 것이 없느냐고 원망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빛나는 것들 곁에 있게 되자 더욱 괴로워졌다. 별을 곁에 둔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빛나야만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김독자는 답을 몰랐고, 방법을 몰랐고,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해 온 탓에 때문에 손에 쥔 것조차 별로 없었다. 세계의 멸망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염없이 흘려보냈던 수많은 날들이 그를 무디게 했고 동시에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래야만 간신히 살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것밖에.
무릎이 차가웠다. 여름날의 더운 공기가 무색하게도.



새 학기는 별다를 것 없었다. 3월은 추웠다면, 8월은 덥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김독자에게는 그랬다. 매일 매일이 무사평안하게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유중혁이 속한 팀은 승점 1위로 결승에 진출했고, 9월 초에는 결승전 경기가 있었다. 김독자는 그 날 처음으로 경기가 실제로 열리는 스타디움에 갔다. 어쩐지 쑥스러워서 유중혁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쏟아지는 불빛과 환호성 사이에, 환하게 빛나는 유중혁이 있었다. 팀원들과 함께 우승컵을 거머쥐고 카메라를 향해 환히 웃는 얼굴. 체육대회 날 보여줬던 미소가 그 위로 겹쳐졌다. 유중혁, 정말로 날 향해서 웃는 거냐. 미친놈. 하지만 그 미소 덕분에 김독자도 함께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타디움을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며, 김독자는 싱숭생숭한 마음 끝자락을 창틀에 이리저리 굴렸다.
유중혁에 대한 김독자의 감정은 복잡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닿지 않을 것처럼 멀게만 느껴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별. 김독자는 그 가까운 거리감의 원인이 동질감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감정인지도.
조금 헛웃음이 나왔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비극을 저와 가깝게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를 가까이 할 수 없었다. 슬픔을 공유해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슬픔은 나누면 절반이 된다는 건 개소리였다. 설령 그 상대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에게 자신의 고통을 굳이 전달할 필요는 없지 않나……. 그래봤자 남는 건 동정과 싸구려 위로뿐일 텐데 말이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유중혁은, 나와는 달리 스스로 일어서서 빛을 내고 있는 녀석이다. 내가 그런 녀석의 곁에 있는다면…… 결국은 녀석을 좀먹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유중혁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고.
네가 양심이라는 게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거라고.
부르르르. 손에 쥔 휴대폰이 울었다.



메시지를 읽은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유중혁. 알고 있냐. 너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빛이 나서…… 어디서 바라봐도 아주 잘 보일 거다. 북극성처럼 말이야. 그래, 나는 북극성 옆에서 나란히 빛나는 별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네가 거기서 빛나고 있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멀리서 너를 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냥 땅 위에 발붙이고 살면서, 가끔 넘어지고 길을 잃더라도, 네가 그 자리에 있어주기만 한다면, 나는.
그러니까, 그런 너를 땅 위로 끌어내릴 수는 없는 거잖아.
김독자는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휴대폰을 집어넣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딩동. 낯선 소리에 김독자는 옅은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켰다. 집의 초인종이 울릴 일이라곤 좀처럼 없었기에 김독자는 그 소리가 초인종 소리라는 걸 깨닫기 까지 몇 초간 고민해야만 했다. 조금 당황한 채 이불을 걷어내고 현관으로 걸어가서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김독자. 집에 있는 거 다 알거든. 문 열어.”
“다 같이 왔으니까 문 열어, 얼른.”
한수영과 정희원의 목소리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거기다가 다 같이 왔다니……. 김독자는 얼떨결에 현관문의 잠금을 풀었다. 그와 동시에 문이 휙, 밖으로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니, 들어오려다가 멈췄다.
“……너 얼굴.”
한수영이 말문이 막힌 듯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뒤쪽에 서 있던 유상아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독자야, 집에 반창고 있어? 연고는? 멍하니 유상아와 시선이 마주친 김독자는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깨문 유상아가 이설화와 함께 몸을 돌려 황급히 어디론가 향했다. 반창고? 약국이라도 가는 건가. 잠이 덜 깬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현성이 눈물이 그렁해져서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 이렇게 심할 줄…… 알았으면…….”
어깨를 붙든 손에 가해지는 힘에 저도 모르게 아얏, 소리를 내자 이현성이 황급히 손을 떼어냈다. 미안, 아직 많이 아프지. 뒤늦게 조금 정신이 돌아온 김독자는 긴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눈가를 짚었다. 괜찮아. 그렇게 답했지만 물론 괜찮지 않았다. 아, 문을 열어주면 안 됐는데. 이 자식들은 왜 뜬금없이 집까지 찾아와서 난리야……. 정희원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 새끼, 진짜로 조져놔야겠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인 것을 이현성이 간신히 붙들어 두고.
“……일단 들어와.”
김독자의 말에 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와본 적이 있으니 처음 보는 공간은 아닐 터였다. 사람의 손이 많이 닿지 않아 삭막한 집 안에서 애써 시선을 떼어놓으며 한수영이 잔뜩 인상을 썼다.
“송민우 그 새끼 진짜.”
씨발, 개새끼, 어쩌구 하며 한참이나 욕설을 내뱉어댄다. 그대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김독자에게도 앉으라는 듯 손짓을 하고. 여기가 너희 집이냐, 그렇게 물을 뻔했지만 김독자는 일단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야, 그래도 그 새끼 사고친 거 많아서 강제전학 될지도 모른다더라. 걔 꺼지고 나면 좀 나아지지 않겠냐.”
사나운 목소리였지만 명백하게 걱정이 묻어 있는 말투였다. 그 마음이 조금 기꺼워서 김독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정희원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쩌라고. 김독자는 어제 송민우와 죽도록 싸운 뒤-거의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웠지만-3일 정학을 먹어 학교에 나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담임 새끼 진짜 뭐냐? 맨날 송민우 그 새끼가 먼저 시비 터는데 왜 둘 다 정학을 먹이냐고? 정희원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사이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이내 집 안으로 들어온 유상아와 이설화가 김독자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많이 아프지.”
연고를 얼굴에 살살 바르더니 반창고를 붙이고. 반창고도 무슨 종류가 그렇게 가지가지인지 모르겠다. 김독자는 가만히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대충 끝났는지 몸을 일으킨 유상아가 물었다.
“얼굴 말고 어디 더 다친 덴 없고?”
“이 자식 이거 있어도 얘기 안 할걸. 벗겨봐야 되는 거 아니냐.”
“미친, 뭔 말을 그렇게 해?”
근데 좀 맞말 같기도 하고. 김독자가 무슨 헛소리냐는 의미로 눈을 부라렸으나 그들은 굴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빨리 솔직히 말해. 어디 더 다친 데 있는지.”
“……없어.”
“거봐, 내가 말 안할 거라고 했지.”
“아니, 진짜 없거든.”
어제 병원 갔다 왔어. 외삼촌이 하도 가보라고 해서. 그 말에 의외였는지 일행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니네 외삼촌이?”
“웬일이래. 너한텐 신경도 안 쓰는 줄 알았더니.”
“몰라. 빌빌대는 게 꼴 보기 싫었나보지.”
서늘하게 내뱉은 말에 그들이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레 가라앉은 공기에 모두가 어색하게 침묵했다. 김독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한수영이 김독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무슨 이상한 생각?”
“아, 너 맨날 하는 거 있잖아. 너네가 신경 쓸 일 아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뭐 그딴 거.”
“…….”
김독자가 입을 다물자 한수영이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야.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어? 얼굴이 이 꼴이 되어 있는데? 완전 곧 죽을 놈처럼 돼가지고.”
“……괜찮으니까 됐어.”
“또, 또.”
한수영이 김독자의 뺨에 붙은 반창고를 쿡 찔렀다. 아, 하고 미약한 신음을 흘린 김독자가 날카롭게 그 손을 쳐냈다.
“괜찮다고 했잖아, 나 좀 냅둬.”
“……너 진짜.”
그를 둘러싸고 서 있던 정희원이 허리에 손을 짚고는 화난 얼굴을 했다.
“김독자.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니까 우리도 계속 걱정하잖아.”
“그러니까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한수영이 한 말 그대로 해 준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하냐?”
“…….”
김독자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말했지. 제발 걱정 좀 그만 하라고.”
“김독자,”
“너희가 뭘 알아?”
울컥,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너희가 뭘 아냐고. 어? 난 평생 날 불쌍하게 보는 사람, 아니면 무서워하는 사람. 그도 아니면, 괴롭히는 사람들 틈새에서 지냈어. 당연히 괴롭히는 사람도 싫지만, 불쌍하게 보는 사람은 더 싫어. 왠지 알아? 괴롭히는 놈들은 그래도 법이든 뭐든 처벌을 할 수가 있거든. 근데 불쌍하게 보는 사람한텐 그러지도 못하잖아!”
소리를 내지르니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천천히, 정희원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우리가 널 불쌍하게 본다고?”
“…….”
“너야말로 네 맘대로 생각하고 있잖아, 김독자! 뭐? 우리가 널 불쌍하게……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정희원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한수영이 사나운 얼굴로 씹어뱉듯 말했다.
“개자식아, 넌 맨날 그딴 식이야. 니 맘대로 생각하고선 우리한텐 절대로 기회조차 안 주잖아. 기다리면 언젠가는 속내를 털어놓겠거니 싶었어. 근데 씨발, 이딴 식으로 나오기냐?”
그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향한다. 정희원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듣기 싫게 울렸다. 제가 가볼게요, 라며 일어선 이설화가 이현성을 데리고 다시 현관을 나섰다. 그 속에서 김독자는 대단히 비참해졌다. 시발, 좆같다…….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자신을 걱정해준 사람들에게 고작 그딴 소리밖에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다.
조용히 김독자를 바라보던 유상아가 곁에 다가와 앉았다. 독자야. 부드러운 목소리에 김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유상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의 손에 얹어졌다.
“괜찮아. 일단 진정하자. 응?”
김독자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울컥 눈물이 날 뻔한 것이 느릿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아직도 떠오르는, 체육대회 날의 유상아.
“그 날.”
“응?”
“왜 그랬어요? 체육대회 날.”
나대신 한수영 데려간 거죠. 봤어요. 그 말에 유상아는 잠시 난처한 얼굴을 했다.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자 유상아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미안해. 절대 나쁜 의미로 그런 거 아니야.”
“그럼요?”
“…….”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눈을 굴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널 데리고 가면, 트랙을 달리는 사이에 다들 널 쳐다볼 것 같았어. 그럼 네가 더 힘들 거라고 생각했고. 혹시 잘못 짚은 거라면 미안해. 그 날 바로 사과했어야 했는데.”
너는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말끝을 흐리는 유상아의 목소리에 김독자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상아니까. 하지만 막상 이유를 들으니 스스로가 더욱 쓰레기처럼 느껴진다. 백 프로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 괴로웠다. 가만히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상아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조곤조곤 말했다.
“독자야. 네가 힘든 거 알아. 우리는 이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힘들었겠지.”
“…….”
“그치만 너도 알잖아. 우리가 널 불쌍하게 생각해서 같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 응?”
물론 알고 있었다. 고작 불쌍하다는 이유로 같이 다니기엔 자신은 너무나도 메리트가 없는 사람 아닌가. 오랜 시간동안 혼자였던 탓에 김독자는 다른 이들이 보이는 호의를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보낸 일 년 반 동안 김독자는 어렵게 납득해갔다. 이런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해버리고 만 것일까. 김독자는, 그 이유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큼 불행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 괴로움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멋대로 생각한 거다.
넌 우리한텐 절대로 기회조차 안 주잖아. 한수영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까득, 소파를 움켜쥐는 손가락을 유상아가 부드럽게 풀어냈다.
“우리가 널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 거야. 그건 나도 알아. 다른 애들도 알 거고. 그치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친구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응? 우리한테도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는 관계 같은 건 허상임을 김독자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차오르는 지독한 외로움에 이렇게 모질고 허튼 소리를 내뱉어버리는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옆에서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유상아와, 조금 전 문을 박차고 나간 다른 이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너희는 어째서 이런 나랑 함께 있어주는 걸까. 이런 식으로 좆같이 굴어대는 것도 참아내면서.
아니, 이유 같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힘겹게 인정했다. 인정해야만 했다. 계속 이렇게 지내봤자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김독자, 멍청한 새끼. 제발 함께 있어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고슴도치마냥 가시를 세워봤자…… 영원히 혼자가 될 뿐인데. 이미 혼자인 것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왕이면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러니까…….
손을 들어 눈가를 꾹 눌렀다가 문질렀다. 그대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유상아는 그저 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음 날, 김독자는 모두가 있는 카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까지 멋대로 굴어서 미안했다. 어제 와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잘 부탁해.’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알면 잘 해라. 알겠냐.’ 김독자는 조금 웃어버렸다.



정학 기간이 끝나 김독자가 다시 등교하던 날, 유중혁도 학교로 돌아왔다. 연달아서 우승을 거머쥔 덕에 완전히 유명인이 되어버린 유중혁은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모양인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와중에도 김독자에게 어디 있느냐고 두어 번 메시지가 왔으나 김독자는 여상히 답장했다. 수업 끝나고 천문부실로 와. 거기 있을 테니까.
김독자는 조금 개운한 기분으로 창틀에 걸터앉아 있었다. 검도부 대련 시작까지 잠시 시간이 남는다며 천문부실에 올라온 정희원과 함께 시시덕거리고. 정희원이 나가자 곧 한수영과 이현성이 함께 들어왔다. 아픈 덴 좀 어때? 묻는 이현성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몸을 움직여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현성에게는 삐걱거리는 것으로 보였는지 갑자기 김독자를 붙잡고 이런저런 스트레칭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움직이는 김독자를 보며 한수영이 낄낄 웃고. 고작 십여 분 스트레칭을 했을 뿐인데 온몸이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김독자가 허리를 두드렸다.
“거봐. 평소에 운동 좀 하랬지.”
“그러게. 운동했으면 송민우 그 새끼 낯짝에도 한 방 먹여줄 수 있었을 텐데.”
모두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눌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마음의 짐을 덜어낸 기분을 느낀 김독자의 얼굴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야, 너 지금 표정이 훨씬 좋다. 앞으로도 그러고 살어. 응? 그 때 천문부실의 문이 열리고 한쪽 어깨에 백팩을 걸친 유중혁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데도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야, 유중혁 오랜만이다? 너 완전 유명인 다 됐더만?”
“별로.”
“별로는 무슨, 오늘 아주 하루 종일 난리더만.”
“나도 들었어. 대단하더라.”
한수영과 이현성과 짧은 인사를 나눈 유중혁이 김독자를 돌아보고는 멈칫했다. 김독자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오랜만이네, 중혁아.”
“……김독자.”
유중혁이 미간을 좁히더니 성큼성큼 가까이 걸어왔다. 그대로 허리를 조금 숙여 김독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얼굴이 왜 그러지.”
“하하…….”
김독자가 머쓱하게 웃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이현성과 한수영이 자초지종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유중혁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가는 것을 본 김독자가 황급히 말했다.
“야, 괜찮으니까 진정해. 그 새끼 곧 강제전학 간대.”
“…….”
강제전학으로 되나? 그 말에 한수영과 이현성도 기겁하고. 야, 미친 새끼야! 뭘 하려고! 그렇게 말하며 등짝을 내리치는 한수영을 유중혁이 싸늘하게 쳐다봤다. 김독자는 그만 조금 웃어버렸다. 걔 손이 좀 맵지.
“어쨌든 난 가본다. 내일 봐.”
“나도 갈게.”
안녕, 인사를 남기고는 문 너머로 두 사람이 사라졌다. 부실 안에 둘만 남게 되자 잠시 침묵이 흘렀으나 곧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너 얼굴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음…… 두 달 정도 됐나?”
“한 달 반이지.”
묵묵히 답한 유중혁이 가방을 내려놓고 김독자 옆 창틀에 함께 걸터앉았다.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여주는 얼굴이 이런 꼴이라 미안하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않나?”
정석적인 답변을 내놓더니 손을 들어 김독자의 뺨으로 향한다. 반창고를 붙인 상처 위에 가만히 닿은 손바닥에서 온기가 전해져왔다.
“많이 아팠을 것 같은데.”
“이제 괜찮아.”
따뜻한 체온이 기분 좋아 김독자는 살짝 눈을 감았다. 슬 손바닥에 얼굴을 묻자 잠시 가만히 있던 유중혁이 엄지로 천천히 뺨을 쓸었다. 얼마 후 눈을 뜬 김독자가 고개를 들고 미소 지었다.
“너 경기하는 거 봤어.”
“전부?”
“당연하지. 본다고 약속했잖아.”
사실 약속 안 했어도 다 봤겠지만. 그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조금 풀어진 얼굴을 한 유중혁이 눈을 깜빡였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조금 억울한데.”
“뭐가?”
“너는 내 얼굴을 계속 봤을 텐데…… 나는 한 달 반이나 못 봤다는 게.”
뭐냐, 그게. 김독자는 소리 내서 웃었으나 유중혁은 농담이 아닌 듯했다. 영상통화라도 했어야 했나. 아니면 사진……. 그 말에 김독자가 뭔 소리냐며 웃고 있자니 유중혁이 고개를 가까이 기울였다.
“너는 보고 싶지 않았나?”
“으, 응?”
“나 보고 싶지 않았냐고.”
뭐, 뭔…… 미친……. 김독자는 멍하니 입을 뻐끔거렸다.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얼굴을 바라보던 유중혁이 픽 웃고는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얼굴은 여전해서 다행이군. 당황한 탓에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있던 김독자가 뒤늦게 울컥했다. 이 자식이.
“너 언제나 돼야 나 선배 대접 해줄래.”
“선배다워야 선배라고 하지 않나?”
“네 기준에 선배다운 사람이 있긴 하냐? 너 전부 다 반말하잖아.”
글쎄. 별로 없겠군. 그렇게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아, 이 새끼는 왜 잘생겨가지고……. 반박할 말 없게 만드네. 툴툴대고 있자니 유중혁이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깜빡이지도 않고 오로지 저를 향해 내리꽂히는 시선.
“……왜 그렇게 쳐다봐?”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왜, 그러는……. 갑작스럽게 어두컴컴한 천문부실 내부가 신경 쓰였다. 여기는 왜 이렇게 어두워? 괜히…… 긴장되게…….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창틀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여전히 시선은 서로를 향한 채였다. 마치 붙잡혀 버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문득, 따뜻한 온기가 손가락에 감겨왔다. 유중혁의 손가락이 그의 손을 얽어 잡았다. 김독자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쿵, 쿵, 심장이 뛰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닿아 있는 손으로부터 전기가 오르듯 등골마저 저릿하게 달아올랐다.
“선배.”
유중혁의 목소리에 김독자가 온 몸을 굳혔다. 방금 뭐라고……. 맞잡은 손에 힘이 가해졌다. 김독자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지금, 이건…… 나는……. 문득 김독자는 손을 뻗어 유중혁을 껴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대로 허리를 끌어안고, 발돋움을 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지금까지 한 번도 인지하지 못했던 충동.
“자, 잠깐만……!”
김독자는 유중혁의 어깨를 밀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순순히 밀려난 유중혁은 제 손 안에서 빠져나가는 가느다란 손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황급히 몸을 돌린 김독자는 무작정 문을 향해 걸어갔다. 나, 나 먼저 갈게! 그렇게 횡설수설하고 문을 열고 나가서 등 뒤로 쾅 닫았다. 얼굴에 화악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떠올려버린 생각에 낯부끄러워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정신없이 복도를 뛰어가다가 화장실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를 짚고 가빠진 숨을 골랐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새빨갰다. 김독자는 뒤늦게 자신이 유중혁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손을 잡고, 껴안고 싶은, 그리고 입술을 겹치고 싶은, 그런 의미. 아찔한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암막 커튼을 내려 어두운 천문부실에서, 허리를 숙여 제게 입을 맞추는 유중혁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혀를 얽는, 그런 생각들……. 막아보려 애썼으나 쉽사리 막아지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김독자, 네가 어떻게. 바로 얼마 전, 그저 멀리서 빛나는 걸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도대체 이 감정은.
아, 어쩌면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유중혁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정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감정을 숨기고, 죽이고, 떼어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내가 유중혁을 좋아하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는다.
설령, 하늘이 뒤집히는 일이 일어나, 유중혁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은 아주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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