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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데네브, 베가 /3

중간고사가 끝난 직후인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김독자는 한 손에 손바닥만 한 종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테이프와 가위를 든 채 잠시 고민에 빠졌다. 좀 더 높은 데에 붙이고 싶은데. 그리고 좀 깔끔하게……. 천문부실의 문 앞에 서서 위치를 가늠하는 사이 저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긴 다리를 움직이며 걸어오는…… 유중혁이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중혁아. 또 왔네.”
너 완전 천문부 붙박이 다 됐다. 놀리는 듯한 어조에 유중혁이 심기가 불편한 듯 잠시 미간을 좁혔으나 곧 어깨에 걸친 가방을 고쳐 메며 대꾸했다.
“너 보려고 온 거 아니니까 걱정 마라.”
“뭔 개소리야.”
김독자가 아연실색하며 입을 뻐끔거리자 유중혁은 보일듯 말듯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더니 김독자의 손에 들려 있는 것들을 들여다봤다. 그건 뭐지? 김독자는 아, 소리를 내고는 문에서 반쯤 떨어져 나간 종이를 가리켰다. Polaris.
“저거 너무 너덜너덜해져서. 바꿔 붙이려고.”
유중혁은 문에 붙은 종이와 김독자의 손에 들린 종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폴라리스. 북극성이지. 무슨 의미로 붙여놓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종이를 가볍게 빼앗아 들은 유중혁이 문 위에 올려보며 높이를 조절했다.
“어디에 붙일 거지? 원래 자리에 붙일 건가?”
“어? 아,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위……”
“여기?”
손을 뻗어 조금 더 위쪽으로 향했다. 거기서 약간 오른쪽으로. 조금 비뚤어졌어, 왼쪽을 올려봐. 응. 됐다. 김독자가 잘라 주는 테이프로 깔끔하게 종이를 붙인 유중혁은 두어 발짝 물러서서 문을 바라보았다. 위치는 괜찮은 것 같군. 슬쩍 옆을 돌아보니 김독자도 제법 만족한 얼굴이었다.
“들어갈 거지?”
“응.”
부실 문을 열려던 김독자가 문득 유중혁을 돌아보더니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밖에 있다가 왔어?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자 흰 손이 뻗어왔다. 유중혁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손을 바라보았다.
“봐, 여기……”
김독자가 유중혁의 어깨에 묻어 있던 벚꽃잎을 잡아냈다. 그 손길의 무게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조금 어깨를 뒤로 빼자 김독자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어, 미안. 그냥 떼어 주려고……”
“……아니. 괜찮다.”
공중에서 잠시 어색한 시선이 맞부딪혔다. 입을 조금 벌린 채 눈을 굴리던 김독자가 먼저 부실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드, 들어가자! 벌컥 열어젖힌 문으로 김독자가 먼저 들어가고 유중혁도 잠시 망설이다가 그 뒤를 따랐다.
언제나처럼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유중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젠장. 여긴 왜 쓸데없이 어두운 거지……. 물론 어제까지는 어두워서 좋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자 늘 앉는 자리에 가방을 풀어놓는 김독자가 보였다.
“…….”
“…….”
미치겠군. 이래서야 점점 더 어색해지기만 할 뿐이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나. 짧게 머리를 굴리며 흘긋 김독자를 바라보자 또 시선이 마주쳤다. 아, 정말이지…….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한참이나 말없이 손가락으로 애꿎은 책상을 만지작거리던 유중혁이 결국 먼저 침묵을 깼다.
“그거……”
“어, 으응?”
“문에 붙인 종이. 무슨 뜻이지.”
그제야 조금 긴장한 기색을 늦춘 김독자가 옅게 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폴라리스 알지?”
“북극성 아닌가.”
“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무슨 소리지. 유중혁이 눈썹을 들썩거리자 김독자가 살짝 웃으며 빔 프로젝터에 연결된 컴퓨터 쪽으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북극성이랑 폴라리스는 다른 거야, 중혁아. 유중혁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그거 말하는 건가? 북극성은 북쪽에 가장 가까운 별을 부르는 말이고, 폴라리스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별의 이름이라는.”
“어, 알고 있네? 어떻게 알았어?”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 네가 읽던 책이 궁금해서 빌려 봤는데 거기에 쓰여 있었다, 고 말하기엔 어쩐지…… 민망했다. 김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말했다.
“지구가 세차 운동을 하잖아. 사실 난 문과라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닌데. 어쨌든 그래서 자전축이 계속 움직이니까…….”
말하다가 멈추더니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그냥 보여줄 테니까 봐봐. 내가 설명해주는 것보다 그게 낫겠다. 너 이과 간다고 했지. 유중혁은 묵묵히 빔 프로젝터를 바라보고 영상을 보기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리모컨을 들어 빔 프로젝터의 전원을 켠 김독자는 익숙하게 세팅을 마치고는 영상을 재생했다. 다큐멘터리였다. 유중혁은 옆자리에 와서 앉는 김독자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북극성을 찾아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찾아보려고 하면 북극성은 생각보다 보잘것없습니다. 눈에 확 뜨일 정도로 밝은 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변에 위치한 카시오페이아나 북두칠성이 더 밝게 느껴지죠……」
그렇게 시작한 다큐멘터리는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이미 많이 본 영상인지 김독자는 여유롭게 턱을 괴고선 이런저런 사족을 붙이기도 했다. 유중혁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두운 천문부실 내부에 별하늘을 촬영한 영상이 비춰지자 마치 작은 플라네타륨이라도 된 듯했다. 이래서 늘 어둡게 하고 있는 거였군,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아, 맞다.”
자기도 모르는 새 집중해서 영상을 보고 있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 종이가 무슨 뜻이냐고 했지, 그거……”
우리 동아리 이름이…… 폴라리스, 인……. 김독자는 말하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설명을 하면서 무의식중에 신이 나기라도 했던 것인지 유중혁 쪽으로 몸이 기울어져 있던 탓에, 서로 고개를 돌려 마주보게 되자……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은 거리감에 호흡이 정지했다. 유중혁의 짙은 눈썹과 그 아래 시원하게 뻗은 서늘한 눈매, 곧은 눈동자, 그런 것들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유중혁 또한 그대로 못 박힌 채 김독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 자식, 왜 이래…… 쿵. 쿵. 심박이 빨라졌다. 너무 빠르게 뛰어서 목으로 튀어나올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야, 김독자 여기 있……”
냐……. 문을 벌컥 연 한수영이 말꼬리를 흐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뒤로 정희원과 유상아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이어졌으나 곧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뚝 그쳤다.
“……너네 뭐 하냐?”
뭐야? 뭔데? 기웃거리며 한수영을 넘어 부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정희원을 보고 화들짝 놀란 김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중혁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는 가방을 집어 들고 부실을 빠져나갔다. 그 쏜살같은 뒷모습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본 정희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자식은 뭔 인사도 없이 가냐?”
김독자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한수영의 시선을 슬슬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미치겠네, 진짜. 이게 뭐냐. 난 절대 이상한 짓 한 적 없다고…….
잠깐, 무슨 이상한 짓? 김독자 미쳤냐? 김독자는 속절없이 뻗어나간 생각의 줄기에 속으로 욕설을 지껄이며 눈가를 마구 문질렀다. 정말이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계속 이어지고 있는 영상의 내레이션 탓에 더욱 죽을 맛이었고. 황급히 부실을 빠져나가던 유중혁의 얼굴을 유일하게 목격한 유상아만이 작게 웃으며 김독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적지근한 날씨였다. 썩 좋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정도. 적당히 맑은 하늘을 바라본 김독자는 한숨을 푹푹 쉬며 팔짱을 꼈다.
오늘은 체육대회 날이다. 물론 김독자와는 하등 상관이 없는 날이다. 그는 언제나 몸으로 하는 일은 젬병이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김독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긴, 내가 뭐 운동을 잘 했어도…… 반대표로 출전하는 일이 있기는 했을까.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러니까 차라리 운동을 못 한다는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적어도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는 데에 다른 이유를 가져다 붙일 수 있으니까.
고개를 들어 보니 운동장 한가운데에서는 기마전에 출전한 이현성과 정희원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물론 이현성은 말 역할이고 정희원은 기수 역할이었지만. 그리고 결정적으로 둘은 다른 편이었지만……. 이현성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울상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잔뜩 신이 나 상대편 기수의 등에 달려 있는 풍선을 터뜨리려 손을 뻗는 정희원의 모습에 김독자는 작게 웃었다. 둘 다 워낙 운동을 잘 하는 녀석들이니 오늘 출전 종목들만 해도 한 손가락을 훌쩍 넘어갈 것이었다.
1학년 자리를 둘러보니 긴 머리를 올려 묶고 인원을 통솔하고 있는 이설화가 보였다. 이설화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천문부에 입부하고 싶다며 찾아온 1학년이었는데…… 상당히 싹싹한 데다 별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고 열심히 어필을 하는 모습이 귀여워 모두의 동의하에 프리패스로 합격하게 되었다. (유중혁은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았으나 애초에 1학년의 의견은 반영하지 않는다며 묵살되었다.) 막상 부원으로 받아놓고 보니 발표된 중간고사 결과에서 이설화가 1학년 1등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가 기절초풍하긴 했지만.
다른 쪽을 조금 돌아보자 막대사탕을 쪽쪽 빨며 같은 반 친구들과 시시덕거리고 있는 한수영도 보였다. 저거 또 레몬사탕 먹네. 그러고 보니까 아침에 나한테도 하나 주고 갔던가. 김독자는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포장지를 벗기고 입속에 넣었다. 시큼한 맛에 기분 탓이겠지만 더위가 조금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운동장 외곽 트랙에서는 사람 찾기 달리기가 한창이었다. 쪽지에 쓰인 내용과 일치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종목. 마침 쪽지를 집어 들어 펼치더니 관중석을 주르르 훑는 유상아가 보였다. 뭘 찾는 거지? 가만히 지켜보던 김독자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유상아는 눈을 크게 뜨고선 반가운 얼굴로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오려는 듯 몸을 틀었다가 이내 멈춰 섰다. 뭐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유상아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들어 다시 관중석을 훑는다. 그리고는…… 한수영을 발견하고 얼른 그녀의 손을 붙잡아 끌어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미친! 유상아 뭐야! 나 안 간다고!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으나 금방 사라졌다.
김독자는 묵묵히 사탕을 깨물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분이, 조금. 아니. 아니다. 얼른 고개를 휘저으며 입에 물린 막대를 손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상아가 그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할 리 없었다. 무언가 생각이 있었겠지. 그럴 것이다. 애써 생각을 흩어 버리려고 노력하며 김독자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 빨리 점심시간이나 됐으면 좋겠다.



“김독자! 한참 찾았네. 여기 있었냐.”
전화도 안 받고, 어? 어깨를 턱 붙잡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정희원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뒤로 이현성과 한수영, 유상아, 이설화의 모습까지 줄줄이 보였고. 김독자는 애써 하하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무음이라 몰랐나봐.”
“점심 다 같이 먹기로 해놓고 이러기냐? 연락 좀 제때 받아라.”
볼을 꾸욱 꼬집는 한수영의 손길에 아야, 소리를 내며 울상을 짓자 그제야 조금 속이 풀리는지 인상을 편다. 김독자는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각자의 손에는 학교에서 나눠준 도시락이나 집에서 싸온 듯한 도시락 통들이 들려 있었고. 어디 가서 먹을래? 저기 그늘로 가자. 재잘재잘 떠드는 그들의 뒤를 따라 커다란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유중혁은 안 온대?”
“걔가 오겠냐? 부활동도 못 나온다고 했던 놈인데.”
“근데 걔 부활동 빠진 적 있어? 없지 않아?”
“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엊그제는 부활동도 없는 날인데 천문부실에 있지 않았냐? 그렇게 말하며 저를 향하는 눈길에 뜨끔한 김독자는 슬 고개를 돌렸다. 사실 유중혁은 천문부실에 종종, 아니, 제법 자주 왔다. 다른 부원들은 동아리를 두세 개씩 하거나 기타 다른 이유들로 부실을 그다지 자주 찾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작년 한 해 동안 천문부실은 김독자만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공간에 유중혁이 불쑥불쑥 찾아오는 것은, 김독자로서는 썩 반갑지만은 않으면서도…… 글쎄. 애매한 기분에 눈만 꿈뻑거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 무언가를 턱 얹어놓는 손길이 있었다. 뭐야?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뻗어 머리 위에 놓인 것을 붙잡자 누군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엥? 유중혁?”
“헐, 뭐야. 여기 어떻게 알고 왔냐?”
“아. 내가 카톡 보냈는데.”
유중혁은 이현성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고 머리를 살짝 털어냈다. 마지막 잎새처럼 붙어 있던 벚꽃잎 몇 장이 떨어져 내렸다. 김독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에 쥔 것을 바라보았다. 도시락 통이었다.
“뭐야, 이건?”
“좀 남아서 그냥 싸왔다. 다 같이 먹지.”
뭔 소리야 이게. 달칵 하고 맨 위의 도시락 통을 열자 그 안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괜찮게 차려진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다른 통에는 과일도 들어 있었고. 놀란 건 김독자만이 아니었는지 다른 부원들도 입을 쩍 벌렸다.
“와. 유중혁 너희 어머니 솜씨 좋으신가보다.”
“내가 한 거다.”
모두가 다시 한 번 입을 뻐끔거렸다. 내가 방금 뭔 소릴 들었냐, 라며 귀를 후비는 한수영과, 놀란 듯 입을 가리고 눈을 깜빡거리는 유상아와 이설화. 와, 시발 유중혁…… 하며 깜짝 놀란 얼굴을 하는 정희원이나 빛나는 시선으로 유중혁을 바라보는 이현성까지. 정작 말을 꺼낸 유중혁은 별 감흥이 없는 듯 나무젓가락을 뜯고 있었다.
“유중혁 너 요리가 취미냐?”
“취미까진 아니고.”
“그럼 뭔데? 뭐가 이렇게 화려해?”
“난 원래 못하는 게 없어서.”
저, 저 미친 새끼. 한수영이 어이없다는 듯 말을 더듬었으나 정희원은 대단히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었다.
“나도 먹어도 되지? 잘 먹을게?”
아, 나도! 유중혁이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하자 너도나도 젓가락을 들고 유중혁의 음식을 시식했다. 미친, 맛있어.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넣은 김독자도 이게 정말 자신이 알던 계란말이라는 음식이 맞는지 의심하는 중이었다. 뭔데 이거? 약이라도 탔어? 맛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지 한수영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도 유중혁은 눈썹만 까딱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야, 이 정도면 너희 집에서 부모님 말고 네가 밥해야 되겠는데.”
감탄하듯 나온 누군가의 칭찬에 유중혁이 여상히 대답했다.
“원래도 내가 다 해. 부모님 안 계셔서.”
일순 모두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시선이 일제히 꽂혀들었으나 폭탄선언을 한 녀석은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이 밥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야, 미안, 내가 말실수를……. 아니, 별로. 그런 대화들이 오가는 것을 들으며 김독자는 유중혁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폭탄이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김독자는 마음 속 깊은 곳 어딘가에서 반가움을 느끼는 자신을 깨닫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김독자 미친 새끼. 네가 양심이 있어?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 남의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데 네가 왜 좋아해?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아냐, 좋아한 적 없어. 이건 나도 모르게 그냥……
그냥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세상에 혼자인 게 나 뿐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속으로 변명을 주워섬겨봤자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자괴감에 젖어 이를 악물고 있자 유상아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가까이 해 왔다.
“왜 그래? 괜찮아?”
그 상냥한 물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던 김독자의 머릿속에 문득, 조금 전 유상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망설이고는, 자신 대신 한수영을 데려간 그녀의 모습이.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모르겠다.
대답이 없자 더욱 걱정이 되었는지 유상아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파? 양호실이라도 갈래? 김독자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괜찮아요. 갑작스레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기에 나무젓가락을 갈무리해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다 먹었으면 정리할까?”
식사를 마치고 주섬주섬 뒷정리를 한 일행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서 돗자리까지 회수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정을 울렸다. 아, 나 계주 첫 주자인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달려가는 정희원과, 그 뒤를 따라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김독자는 느릿하게 관중석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마지막 종목이니까 구경이나 열심히 하자.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깨에 얹어지는 손길이 있었다.
“……왜?”
돌아보니 유중혁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광에도 쉬이 바래지 않는 잘생긴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나 계주 마지막 주자다.”
“……?”
그래서? 라고 물으려다가 햇살이 눈부셔서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김독자를 조금 더 바라보던 유중혁이 어깨에 얹었던 손을 떼고 그의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보고 있으라고.”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 계주는 학년별로 한 팀인데. 나는 2학년 팀을 응원하는 게 맞지 않냐?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지만, 김독자는 그저 빠르게 사라지는 그 넓은 등짝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일단은…… 지켜보지 뭐.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니까. 어쩐지 조금, 기대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아, 선두 경쟁이 치열합니다! 2학년 앞서 나가는데요!」
이마와 손목에 2학년의 상징 색인 붉은색 밴드를 한 정희원이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1학년과 3학년을 제법 큰 차이로 따돌려 놓은 뒤 다음 사람에게 바톤을 넘긴다. 계주 주자는 팀마다 일곱 명. 한 사람당 운동장 트랙 반 바퀴씩을 돌고, 마지막 주자가 한 바퀴를 돌아 결승선을 넘는 구조였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2학년! 2학년! 소리를 높여 외치는 주변 애들에게 휩쓸려 하마터면 함께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엎치락뒤치락 하더니 결국 3학년이 제일 끝으로 뒤쳐졌다. 선두인 2학년과 1학년 사이에는 꽤 큰 차이가 있었다. 2학년의 마지막 주자가 바톤을 넘겨받고 달려 나갔다.
「2학년이 선두를 유지합니다! 1학년, 마지막 주자에게 바톤을 넘깁니다!」
노란 바톤을 넘겨받은 유중혁이 치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운동화가 흙바닥을 차며 모래가 튀었다. 눈에 띄게 빠른 속도였다. 미친, 저 새끼 진짜 못하는 게 뭐야.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한 김독자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1학년 마지막 주자 엄청 빠른데요! 굉장합니다! 설마 따라잡나요?」
해설하는 사람도 깜짝 놀란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1학년 관중석 쪽에서 비명 같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따라잡기 어려울 것처럼 보였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그와 함께 해설자의 목소리와 환호 소리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김독자는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목소리들에 파묻힌 채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저 녀석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이상한 걸까.
「아! 결국 따라잡습니다! 놀랍습니다, 이걸 잡네요!」
1학년 우승! 우승입니다! 흰 끈을 끊어내며 결승선에 도달한 유중혁이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멈춰 섰다. 운동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 소리가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지만 김독자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멈춰선 유중혁이 저를 향해 달려오는 학생들을 잠시 바라봤다가 고개를 들어 관중석을 훑었다. 무언가를 찾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유중혁을 향해 달려온 학생들이 와락 달려들어 그를 껴안고 헹가래를 하겠다며 난리를 피웠다. 하지만 김독자는 시간이 멈춰버리기라도 한 듯 여전히 그 순간에 붙잡혀 있었다. 쿵. 쿵. 귓가에서 심장 소리가 들렸다. 손끝이 저릿해지고 얼굴이 뜨거워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미친놈. 유중혁, 미친 새끼……. 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유중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김독자는…… 아프도록 빠르게 뛰는 심장께를 손으로 꾸욱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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