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는 살풋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제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는 팔의 무게가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니 저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유중혁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다. 웬일로 아직까지 자고 있네. 내가 일찍 깬 건가? 아침잠이 많아 알람을 여러 번 들은 뒤에야 몸을 일으키는 김독자와 달리 유중혁은 상당히 규칙적으로 기상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까지 이렇게 잠들어 있다는 것은, 역시 내가 일찍 일어났다는 얘기겠지. 시간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몸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야 했다. 모처럼 유중혁의 잠든 얼굴을 구경할 기회가 생겼는데 놓치고 싶지 않았던 김독자는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깜빡였다. 어슴푸레한 여명이 창틀을 타고 넘어와 유중혁의 얼굴 윤곽에 고여 들었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반듯한 이마 위에 조금 곱슬거리는 듯한 검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모습도 잘생긴 건 사기 아니냐. 물론 유중혁이라면 물에 쫄딱 젖은 머리를 해도 잘생겼겠지만. 그 아래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이나 선명하게 결이 진 겹쌍꺼풀, 촘촘한 속눈썹과 오똑한 콧날 따위도 말도 못할 만큼 잘생겼다. 다물린 입술이 그리는 호선과 강인한 턱선을 빤히 바라보던 김독자가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어 쪽, 입을 맞췄다. 아차, 깼으려나. 제법 예민한 녀석인데……. 다행히도 유중혁은 여전히 조용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누구 애인이길래 이렇게 잘생겼을까. 응? 유중혁.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과감하게 손을 들어 만져보려는 찰나, 유중혁이 눈꺼풀을 반짝 들어올렸다.
“다 구경했나?”
“어? 으응?”
유중혁은 허리를 감은 팔을 인정사정없이 제 쪽으로 더욱 끌어당겼다. 하릴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야, 일어나 있었으면 말을 하지……! 유중혁은 코웃음을 치며 김독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맨 살갗에 닿는 체온이 몹시 안온했다. 따뜻해서 봐준다. 문득 그의 팔에 눌린 허리로부터 찌르르, 지난밤의 여파가 올라와 김독자는 흠칫 떨었다. 기민하게 눈치 챈 유중혁이 손바닥으로 그의 꼬리뼈 근처를 마사지하듯 뭉근하게 문질렀다. 아으으, 아파……. 저도 모르게 우는 소리를 내자 유중혁이 말없이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미안하다는 뜻이군, 이건.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성 따위는 없을 것임을 김독자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한참이나 김독자의 몸 이곳저곳을 마사지하듯 주무르던 유중혁이 여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독자. 휴가가 언제라고 했지.”
“다다음 주.”
“일주일?”
“응. 일주일.”
“여행 가자.”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말에 김독자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어디로? 그리고 이어지는 유중혁의 대답에 김독자는 아, 올 것이 온 것인가, 직감했다.
“허얼…….”
대박. 쩔어. 와. 헐. 연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저를 이리저리 돌아보는 시선에 김독자가 하하 웃었다. 노골적으로 관찰당하는 시선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약간 서늘한 목소리가 나갔다.
“뭐가 그렇게 이상합니까?”
“앗.”
그제야 자신이 초면에 실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손으로 입을 헙 가린다. 김독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유중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 눌린 것 같기도 하고. 중국 TF팀 소속 고등학생 프로게이머, 이지혜가 뒤늦게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지혜예요.”
“김독자입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슬쩍 유중혁을 쳐다본 이지혜가 김독자를 향해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었다.
“사부랑 동갑이시라고 들었는데.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거리낌 없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말 반갑다는 듯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원체 붙임성이 좋은 성격인가 싶었다. 딱히 격식을 차리고 싶은 것이 아니었던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말 편하게 하고 좋지 뭐. 이지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와! 다행이다.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
뭔가 속은 기분인데. 김독자는 착잡한 얼굴로 저와 열 살 차이나는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긴, 고등학생한테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면 아저씨가 맞나……. 서글퍼지려는 찰나 이지혜가 조잘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저씨 좋은 사람 같네요. 나는 또 사부 애인이라길래 막 사부처럼 무뚝뚝하고 무서운 사람이면 어쩌나 했는데……”
“이지혜.”
“으악.”
유중혁의 낮은 목소리에 이지혜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면서도 입가를 가리는 시늉을 하며 김독자에게, 봤죠? 사부 완전 무서운 거? 라고 입을 뻐끔거리는 게 참. 김독자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빙긋 웃자 이지혜도 따라 웃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이제 김남운밖에 안 남아 있어서 좀 아쉽네. 다른 사람들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다들 다른 팀으로 가버려서.”
“일일이 찾아갈 순 없으니까. 너랑 김남운이면 충분하다.”
“오, 웬일로 사부가 감동적인 말도 다 해주네.”
키득거린 이지혜가 문을 밀어서 열자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 쪽으로 쏠렸다. 이지혜의 얼굴을 보곤 시큰둥하게 다시 고개를 돌리려던 사람들이 그 뒤에 선 유중혁을 보고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허겁지겁 다가와서 빠른 어조로 묻는다. 물론 김독자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중국어였으니까. 하지만 정황상 정말 유중혁이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폴라리스’라는 단어도 들리는 것 같고. 몇 발짝 떨어져 서서 히죽거리던 이지혜가 김독자를 향해 손짓했다.
“아저씨, 이쪽으로 와요.”
가도 되나? 흘끗 유중혁을 돌아보니 그가 커다란 손으로 김독자의 어깨를 짚었다가 놓아주었다. 금방 가겠다. 그 말에 씩 웃으며 끄덕여주고는 이지혜를 따라갔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지혜와 김남운의 플레이를 좋아하던 김독자였기에 이번 기회에 사인이라도 받아두고 싶었다. 곧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손을 바삐 움직이는 한 남학생이 보였다. 트레이드마크인 흰 머리카락이 하늘거렸다.
“야! 김남운, 그만하고 일어나!”
“아 시발, 누구…… 헐.”
제 의자를 발로 찬 사람이 이지혜라는 것을 알아챈 김남운은 바로 판을 던지고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혜야. 네가 웬일로 날 먼저 찾아?”
……어째 좀 불쌍한 물음인데. 하지만 이지혜는 허리에 손을 얹고선 꼿꼿하게 말했다.
“그래서 불만이냐?”
“아니요.”
얌전히 대답한 김남운이 그제야 김독자를 발견하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사람은 누군데? 우리 사부 애인. 여섯 글자로 돌아온 대답에 김남운의 눈동자가 뒤집어질 듯 커졌다.
“미친! 씨발! 말도 안 돼!”
“말 돼.”
“그렇죠, 되죠, 지혜 님. 아, 아니 시발 이게 아니고!”
유중혁한테 애인이 있다고? 머리를 쥐어뜯은 김남운이 다시 한 번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김독자를 쳐다봤다. 이쯤 되니 이들에게 유중혁의 이미지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재고해 볼 필요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하하 웃은 김독자가 이번에는 먼저 악수를 청했다.
“김독자입니다.”
“헐, 씨발…….”
“김남운.”
“안녕하세요. 김남운입니다.”
이지혜의 말에 꼼짝 못한다더니 진짜였다. 김독자는 속으로 조금 웃어버리고선 이지혜와 마찬가지로 김남운과 말을 텄다.
“유중혁한테 애인이 있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아니 시발 당연하죠. 이 아저씨 이상한 소릴 하네.”
어이없다는 시선이 돌아와 김독자는 정말로 심각해졌다. 유중혁 너 대체 뭘 어쩌고 다닌 거냐. 다시 입을 열어 그 이유를 물어보려는 찰나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바닥을 긁었다.
“김남운.”
“헉. 시발. 유중혁…… 형.”
어째 마지막 글자는 마지못해 붙인 것 같은데.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제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 풀어진 얼굴을 한 유중혁이 가까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쌌다.
“헐…… 진짜 패왕 애인인가 봄…….”
“무슨 소리지.”
유중혁의 눈썹이 들썩이자 김남운이 얼빠진 얼굴을 수습하며 툴툴거렸다. 아니, 시발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있냐? 눈으로 봐도 못 믿겠네……. 그 옆에 선 이지혜는 그새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은근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주 반응이 극과 극이구만. 그래서 김독자는 곧바로 물었다.
“유중혁한테 애인이 있는 게 이상한 거야? 아니면 그 상대가 나인 게 이상한 거야?”
“당연 전자 아님?”
김남운의 말에 이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저씨에 대해서 뭘 안다고 상대가 아저씨인 게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사부한테 애인이 있다는 게 이상한 거지.”
“……왜 이상한데?”
“그야…….”
대답은 이지혜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난 유중혁 고자인 줄 알았어서…….”
김남운의 중얼거림에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김독자는 안쓰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운아, 초면에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너 좆된 것 같아.
“아윽…….”
김남운이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입을 비죽였다. 옆에서 배를 잡고 낄낄대던 이지혜가 눈물 고인 눈가를 닦아냈다.
“그렇게 웃기냐, 이지혜……”
“어. 존나 웃겨.”
“많이 웃으세요…….”
네가 웃으면 나는 좋아……. 그 또래 녀석들은 절대 모를 것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김남운을 보고 피식 웃은 김독자는 눈을 반짝였다.
“하던 얘기 마저 해봐. 유중혁이 왜 고자 같았는데?”
“김독자. 죽고 싶나?”
서슬 퍼런 유중혁의 목소리에도 김독자는 물론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씩 웃는 김독자의 얼굴을 보고 바로 둘의 우열(?)을 알아챈 이지혜가 거리낌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저씨도 알겠지만 우리 사부가 좀 잘생겼잖아요?”
“그렇지.”
이 녀석, 방금 말 잘 했네. 모두가 기분 좋아지는 말을 했다. 유중혁의 기세가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 김독자가 웃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으로 봤을 때 얻어걸린 것 같기는 하지만. 이지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거기다 실력도 완전 탑이었으니까 엄청 인기 많았단 말이에요.”
그랬겠지. 김독자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글쎄! 그 누가 고백을 해도 절대 안 받아주더라니까요!”
같은 프로게이머가 와도! 아이돌이 와도! 저 세상 여신이라는 배우가 와도! 심지어는 남자가 와도…… 으읍. 입이 틀어 막힌 이지혜가 울상을 지었다. 인상을 팍 쓴 유중혁이 매섭게 노려본 뒤 놓아주자 입을 꾹 다물고선 쳐다보기만 한다. 하지만 이미 김독자는 들을 건 다 들어버린 뒤였다.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쳐다본 김독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중혁아.”
“…….”
“왜 하나도 안 받아줬냐?”
유중혁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나름대로 유중혁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이지혜는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캐치해 냈다. 저건…… 죽일까 하는 마음 절반, 하지만 좋아하니까 참아주겠다는 마음 절반이다. 물론 유중혁이 누굴 좋아할 때의 표정 같은 건 전혀 본 적 없지만.
음, 아냐, 본 것 같기도 하고……? 이지혜는 가끔 마주치곤 했던 유중혁의 어두운 얼굴을 떠올렸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숙소 베란다 난간에 팔을 걸치고 하염없이 휴대폰을 들여다 볼 때의 표정이라든가, 한겨울에 외투도 걸치지 않고 무작정 건물 밖으로 나가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의 표정이라든가. 그야말로 돌아버린 게 아닌가 싶은 기행을 벌일 때면, 그의 시선 끝에는 언제나 틀림없이 누군가가 있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이지혜라도 그 정도는 알았다. 그 얼굴에 어린 깊은 감정들은 그녀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랬구나, 사부가 돌아버린 건 다 저 사람 때문이었구나……. 이지혜는 제 옆구리를 찔러대는 김독자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면서도,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다루듯 명백히 힘을 조절하고 있는 유중혁을 바라봤다. 잘생긴 얼굴에 어리는 미소 비슷한 것에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 내서 웃자, 김남운을 포함한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거 마저 하세요.”
당연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한숨을 내쉬는 김독자의 허리를 유중혁이 가볍게 끌어안았다. 땅 꺼지겠군. 피식 웃은 김독자는 손으로 난간을 짚은 채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야, 중혁아. 갑자기 거기서 그런 폭탄선언을 하면 어떡하냐?”
하긴, 생각해 보면 유중혁은 늘 그런 식이긴 했다. 옛날에도……. 수면을 스치는 물보라처럼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추억에 잠길 새도 없이 유중혁이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무슨 말이지.”
“알면서 뭘 물어봐?”
걔들 앞에서 결혼 얘기한 거 말이야, 인마. 심지어는 나한테도 처음 말한 거잖아? 김독자는 몇 시간 전 유중혁의 말에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던 그 기분을 떠올렸다. 발이 땅에 닿지 않은 것처럼 붕 뜬 감각이었으나, 그것은 예전에 곧잘 느끼곤 했던 고독한 부유감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쩌면 잔뜩 부푼 헬륨 풍선처럼, 행복이라는 게 가득 담긴 풍선에 몸을 맡기고 날아오르는 기분이 이럴까.
황푸강을 느긋하게 가로지르는 유람선이 위아래로 둥실거렸다. 짙은 어둠을 화려하게 수놓는 상해의 야경,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동방명주가 색색으로 아름다운 빛을 깜빡였다. 강물로부터 올라오는 촉촉한 공기가 피부를 적셔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말이 없던 유중혁이 김독자의 왼손을 붙잡아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약지에 끼워진 은색 반지가 수면에 비친 야경을 반사하듯 은은하게 빛을 냈다. 그 희고 가는 손을 붙잡은 유중혁의 왼손 약지에도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이걸 본 이상 다들 눈치 채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그냥 커플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래서, 싫은가?”
아니.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빙긋 웃는 입매가 그리는 부드러운 곡선에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입을 맞췄다. 키득거린 김독자가 짐짓 몸을 물렸다. 다른 사람들 많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지? 하여간 유중혁 어디서든 당당한 놈이야.
“너 중국에서도 유명하잖아. 아까도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 꽤 있었고. 응? 폴라리스 유중혁 씨.”
그 부름에 이번에는 유중혁이 피식 웃었다. 여전히 붙잡고 있던 왼손을 입가에 가까이 가져가 반지 위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듯 움츠러드는 손에 제 손가락을 얽어 잡은 유중혁은 다른 손도 뻗어 난간 위에 얹어진 김독자의 손에 겹쳤다. 강물을 가르는 옅은 물소리를 배경음으로 삼아 유중혁이 말했다.
“그 이름은 이제 너한테 줬다, 김독자. 알고 있잖아.”
눈을 커다랗게 뜬 김독자가 이내 어깨를 잘게 떨며 웃었다. 중혁아. 너 진짜……. 김독자는 몸을 완전히 돌려 유중혁과 마주보고 섰다. 눈을 가만히 응시하자 유중혁은 김독자를 가두는 듯한 모양새로 두 팔을 난간에 짚었다.
“이제 와서 반납은 안 된다.”
“반납할 생각 요만큼도 없거든.”
그 대답에 유중혁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런 얼굴은 제게만 보여준다는 것을 김독자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손을 뻗어 뺨을 감싸자 유중혁이 그 쪽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설핏 눈을 감더니 조곤조곤 입술이 열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부터 네게 주려고 했던 이름이니까.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거겠군.”
가슴 한 구석이 저릿해졌다. 아련한 기억들이 울컥하고 목구멍을 막았다. 김독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그것을 삼켜냈다. 유중혁이 눈을 감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런 표정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폴라리스. 오래된 이름이었다. 유중혁의 캐릭터 머리 위에 늘 떠올라 있던 S. S. Polaris라는 글자. 검은 유니폼 뒤를 눈부시게 수놓았던 글자. 수많은 금빛 트로피들에 선명히 새겨져 있는 글자. 그 모든 것은 유중혁의 것이었고, 동시에 제 것이었다. 저를 위해 유중혁이 준비한 모든 것들이었다. 오롯하고 꼿꼿하게, 수년간 한결같이 북쪽을 지키던 눈부신 별의 이름은 이제 제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중혁아.”
유중혁이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김독자는 눈을 감으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살짝 입술을 벌리자 커다란 손이 허리를 받쳐왔다. 혀를 밀어 넣으며 제 쪽으로 기울어지는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밤공기가 한껏 불을 밝힌 와이탄처럼 금빛으로 빛났다. 하아, 숨을 뱉으며 잠시 떨어진 입술이 곧바로 다시 서로를 갈구하며 맞물렸다. 김독자는 손을 더듬어 유중혁의 왼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살짝 물리고 눈을 뜨며 씩 웃었다. 가볍게 혀로 입술을 핥은 유중혁이 왜 그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김독자는 그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들러리는 유승이랑 길영이한테 맡기자. 어때?”
“괜찮군.”
유중혁의 입가에 번지는 옅은 미소를 바라본 김독자는 이내 장난스런 웃음을 지었다.
“근데, 중혁아. 나랑 결혼하려면 일단…… 우리 어머니부터 만나러 가야겠는데.”
잘생긴 얼굴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그 살벌한 표정이 정말이지 귀엽다고 느껴진다면 미친 걸까. 미간을 한껏 좁힌 유중혁이 마지못한 듯 중얼거렸다. 너희 어머니께서는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던데.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김독자는 기어이 크게 웃어버렸다. 아, 이 사랑스러운 녀석을 어쩌면 좋지. 끝을 모르고 한없이 벅차오르는 마음에 김독자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내 유중혁의 따뜻한 손길이 등을 쓸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중혁아, 내가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 숨김없이 제 마음을 쏟아내며 김독자는 문득, 아, 사랑을 고백한다는 게 이렇게나 행복한 일일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유중혁. 나는, 너를, 사랑해.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모든 마음을 알아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한없이 그렸던 유일한 존재였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말할 거라고. 그렇게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왜냐하면, 유중혁……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