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야, 눈 감아. 보지 마.
살갗이 거칠게 일어난 손이 눈가를 덮었다. 전해져 오는 온기는 명확했으나 폐부에 들어찬 차가운 공기마저 녹이지는 못했다. 눈앞이 온통 붉었다. 바닥이 질척하게 젖어드는 듯했다. 막연한 감각뿐이었지만 그것이 더욱 상상력을 자극해 공포심을 키웠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아이에게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부터 모든 걸, 다시 읽는 거야.
좆같은 꿈이었다. 김독자는 긴 소매 끝으로 눈가를 마구 문질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몸을 휘감고 있던 이불을 힘없는 손으로 밀어냈다. 그대로 잠시 암흑 속을 응시하자 천천히 어두컴컴한 방의 정경이 보였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가구 두 개로 꽉 차버린 비좁은 방. 그 흔한 책장 하나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토록 읽는 것을 좋아하던 김독자가 종이책이 아닌 웹소설을 선호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손을 뻗어 책상 위를 더듬었다. 곧바로 손에 잡혀오는 차갑고 네모난 것에 빠르게 뛰던 심박이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푸르스름한 불빛이 켜졌다. 오전 5시 24분. 고개를 돌려 자그마한 창밖을 바라봤으나 3월 초순의 새벽녘은 휴대폰 액정처럼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씨발, 잠 다 깼네. 눈을 다시 부빈 김독자는 무릎을 끌어 모으고 휴대폰을 두드렸다. 익숙한 웹소설 어플이 켜지며 활자들이 주루룩 시야를 덮었다. 창백한 배경, 검은색 글씨들과 얼굴을 맞대는 이 시간만이 그에게 있어 유일한 안식처였다. 잠시 글자를 읽어나가던 김독자가 문득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아, 입학식 가기 싫다.
입학식…… 그냥 행사인데 좀 빠지면 안 되나. 중요한 것도 아닌데. 그 끔찍한 중학교 생활이 끝난 것은 기쁘기 그지없었으나, 결국은 또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는 현실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차라리 검정고시를 볼까 생각도 했지만……. 김독자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단호한 얼굴을 떠올렸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면, 더 이상 책임져주지 않겠다. 웃기는 소리였다. 검정고시 준비한다고 어디로 싸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게 풀어놓느니 학교에 가둬두겠다는 생각이겠지. 학교에는 자신들 대신 감시해 줄 눈-선생님들-도 많이 있고.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김독자가 그들의 말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손끝이 가늘게 떨려오는 걸 숨기지 못했을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되는 게 없는 인생이었다. 좆같네. 한숨을 내쉰 김독자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활자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미친. 시발, 김독자 인마! 첫날부터 이게 뭔 멍청한 짓이야! 김독자는 당황스러움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새벽에 일찍 눈이 떠졌다고 늑장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미뤄뒀던 웹소설을 정주행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던 탓에 입학식 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맞춰 강당에 도착했고, 줄지어 앉아 있는 신입생들의 시선이 꽂혀드는 것을 한시라도 빨리 피하기 위해 급하게 빈 의자에 앉았던 것이다. 아니, 그 줄이 반별로 앉아 있는 거인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입학식이 모두 끝나고 자신이 앉아 있는 줄을 인솔해 교실로 데려가는 선생님을 따라가면서도 의심을 품지 않았던 것이 잘못이라면 또 잘못이겠으나. 어쨌든 김독자는 줄을 따라 교실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잘못된 반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남들보다 한 발짝 늦게 원래 교실을 찾아 들어간 참이었다. 마지막으로 교실 문을 열어젖힌 바람에 자리에 착석해 있던 학생들과 선생님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를 향했다. 옅은 현기증이 일었다.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하나 남은 빈자리에 황급히 몸을 끼워 넣었다. 시발, 그럼 그렇지 맨 앞자리만 비어 있었다. 고개를 숙인 김독자를 흘끗 바라본 담임선생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아무튼 그러니까 1년 동안 잘 지내보자.”
그렇게 말하더니 일단 너희들 얼굴부터 익혀볼까, 하고선 출석부를 펼쳐든다. 이름 부르면 손 들고 큰 소리로 대답해. 강수아? 네. 가나다순으로 가지런히 정렬된 이름들이 선생님의 입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얼굴을 외워버릴 기세로 학생들 하나하나를 뜯어보았다. 김독자는 약간 긴장한 채 호명을 기다렸다. 가나다순이니 꽤 앞쪽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김독자.”
“……네.”
손을 들고 대답하자 선생님의 눈빛이 그에게 정확히 꽂혀들었다. 훑는 듯한 시선이 한 차례 그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짧은 찰나였으나 김독자는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 선생님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제발 그러지 않기를 빌었는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선생님을 쳐다보고 있자 이내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김미지. 여상하게 다음 이름이 불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숨통을 조이던 무언가가 탁, 풀려나간 기분이 들었다. 그다지 조여 매지도 않았던 붉은색 교복 넥타이를 살짝 끌어당겨 헐겁게 했다. 가느다란 호흡이 새어나왔다.
다행히도 이 선생님은 자기소개 따위를 시키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적당히 학생들과의 인사를 마친 선생님은 잠시 교무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비웠고, 조용히 있으라는 당부에도 불구하고 교실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김독자는 눈을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 듯 친해 보이는 무리가 여럿 있었다. 아마도 같은 중학교를 나온 사이겠거니, 생각했다. 김독자는 일부러 중학교 동창들이 가장 적게 진학한 고등학교를 택했으니 아는 얼굴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긴, 있어봤자 나랑 살갑게 얘기 나눌 정도로 친한 녀석도 없지만. 멍하니 둘러보는 사이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야.”
김독자는 그야말로 자리에서 튀어오를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뭐야? 누구야? 누군가 저를 먼저 부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었기에 과한 반응이 나와 버리고 말았다. 그 리액션에 부른 당사자도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톰한 뺨과 서글서글한 눈매가 제법 귀염상인 여학생이었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함께 흔들렸다. 김독자가 얼떨결에 대답하지 못하고 빤히 쳐다보자 여학생이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순식간에 장난기 넘치는 맹수처럼 변한 인상에 김독자는 얼른 그녀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위험인물이다. 귀염상 절대 아님.
“너 입학식 때 자리 잘못 찾았지.”
여학생-명찰을 보니 정희원이라는 이름이었다-이 씩 웃는 얼굴 그대로 김독자를 향해 놀리듯 말했다. 다시 한 시간 전이 떠올라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김독자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입을 열며 날카롭게 대답하려는데 옆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여학생이 킬킬 웃었다.
“너 지금 아니라고 하려고 했지? 아니긴 뭘 아니야, 다 봤거든.”
언제부터 까먹고 있었는지 손에 든 막대사탕을 빙빙 돌리며 재밌다는 듯 웃는 얼굴이 재수 없었다. 이 자식은 또 뭐야. 어이가 없어 잠시 말문이 막혀 있는 사이 그 반대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커다란 체구의 남학생이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좀 진정해…… 얘 놀라면 어떡해.”
첩첩산중이다. 도대체 뭐냐, 얘네. 김독자는 정말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금붕어 마냥 입을 뻐끔거렸다. 간신히 생각을 정리한 김독자는 미간을 사정없이 좁혔다.
“너네 뭐야? 시비 거는 거야?”
“엥.”
정희원이 조금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한수영이라는 이름이 적힌 명찰을 단 단발머리 여학생이 쯧, 하며 혀를 차곤 사탕을 낼름 입에 물었다. 곰 같은 체구의 남학생 이현성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왜 네가 대신 사과해? 네 잘못도 아닌데?”
어이없다는 듯 서늘해진 김독자의 목소리에 정희원이 아차 싶었는지 얼른 말했다.
“아냐. 우리가 미안. 화나게 하려고 한 거 아냐. 미안해.”
그제야 김독자는 눈썹을 조금 풀었다. 어쨌든 바로 사과하는 걸 보니 제게 나쁜 짓을 할 녀석들은 아닌 듯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이런저런 괴롭힘에 시달려 온 김독자는 저를 대하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를 기민하게 감지할 줄 알았다. 야, 한수영 너도 얼른 사과해. 정희원이 한수영의 동그란 뒤통수를 꾹 누르자 벌컥 성질을 내며 손을 뿌리친다. 그러더니 김독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안하다. ……됐냐?”
그렇게 말하고선 눈을 치켜뜬다. 이 자식은 뭔 사과를 저딴 식으로……. 김독자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는 것을 눈치 챈 정희원이 한수영의 이마를 꾹 밀어내고는 말했다.
“아니, 우리 셋이 같이 앉아 있다가 네가 늦게 들어온 거 봤거든. 같은 반인 줄 알았으면 거기 네 자리 아니라고 알려줄 걸 그랬네. 몰랐어.”
“그래. 웬 허여멀겋고 인상 흐릿한 애가 지각하는 게 잘 보이더라고.”
담임선생님이 나눠준 종이 뭉치를 돌돌 말아선 입! 이놈의 입! 하며 한수영의 입을 눌러대는 정희원을 바라본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또 기분이 상했을까 걱정하는 모양인데, 그에게는 오히려 반대였다. 인상이 흐릿하다? 그 말인 즉슨…… 이 녀석들은, 자신에 대한 소문을 모른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것이 기쁜 동시에 한편으로는 걱정이 차올랐다. 이 녀석들도, 나에 대한 얘기들을 듣고 나면 경멸하는 얼굴을 할까. 저들끼리 장난을 치며 입가에 매달려 있는 미소들이 곧 살얼음처럼 깨어지는 상상을 한 김독자는,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나에 대한 소문 같은 건 영영 몰랐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김독자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더라도, 이들이 지금처럼 똑같이 저를 대해주는 상상을 한 자신을, 김독자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독자 이 자식이 그때 말야…… 어?”
“아, 조용히 하라고 한수영!”
입을 틀어막으려 손을 뻗었으나 술에 취해 힘없는 팔이 제 기능을 할리 없었다.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김독자의 팔을 손쉽게 피한 한수영이 키득거리며 계속 지껄였다.
“아니 글쎄, 2년 연속 자기 자리를 못 찾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설마하니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 하고 내 눈을 의심했는데, 글쎄 바로 여기 있더라니까. 김독자 씨, 인터뷰 한 번 해주시죠?”
“닥쳐, 한수영…….”
“김독자 진짜 웃기다니까, 내가 그날 얘 또 어디 갔나 찾다가 신입생 자리에 가 있는 거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알아?”
정희원마저 낄낄대며 웃어대는 통에 김독자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술잔을 홀짝이던 유상아가 아, 나도 기억난다. 되게 눈에 띄던데? 하고 거든 것이 크리티컬 히트였다. 만신창이가 된 김독자가 테이블 위로 스르르 무너지려 하자 유중혁이 이마를 턱 짚어 부축했다. 뜨끈한 손길에 김독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대로 저 녀석들 페이스에 말려들 수는 없다. 그래서 짐짓 능청스레 중혁아, 너밖에 없다, 말하려 고개를 돌렸으나…… 시선이 마주친 유중혁은 누가 봐도 웃음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야, 유중혁 인마, 너까지……!”
이거 배신이다 진짜, 어?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결국 유중혁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 새끼, 왜 잘생겨가지고……. 어쩌자고 비웃는 것도 잘생겼냐고? 어? 간신히 한 가닥 남아 있는 이성의 끈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까지는 막아주었다. 김독자가 몸을 일으킨 것을 확인한 유중혁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설마하니 자기 입학식 때도 그랬을 줄은 몰랐군.”
평생 놀려도 할 말 없다. 그 말에 김독자는 기어이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그래, 내가 죄인이지, 웅얼거렸다. 쿡쿡 웃은 이설화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래서 선배들은 어떻게 친해지게 되신 거예요? 계속 궁금했는데.”
설화야, 넌 그걸 10년 만에 물어보냐. 돌아오는 말에도 이설화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그야…… 예전엔 물어보기 어려웠는걸요. 지금이니까 물어볼 수 있는 거죠.”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모두 모르지 않았다. 김독자는 고개를 들고 이설화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타인과의 거리감을 정확히 잴 줄 알면서, 동시에 상냥한 사람이다. 그건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네. 고작 1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천문부 시절에는 저와 제법 죽이 잘 맞기도 했었다. 아련한 기억에 잠시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니 한수영이 소리 내서 웃었다.
“완전 맞는 말이네. 누구 설명해 줄 사람?”
“작가님이 하세요. 귀찮아.”
“아, 떠넘기지 말고. 이현성 네가 할래?”
“응? 내가?”
얼떨결에 화살이 돌아온 이현성은 짧게 고민하더니 우직하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러니까…… 나랑 희원이랑 수영이는 같은 중학교를 나와서 원래 아는 사이였어. 상아 누나는 수영이랑 친해서 알게 됐고…….”
처음엔 희원이였던가? 쟤 자리 잘못 찾아서 지각한 거 너무 귀엽지 않냐, 그런 얘기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이현성의 말에 정희원이 무릎을 내려치며 박장대소했다.
“아, 맞어, 그랬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기네. 미치겠다.”
“그만 웃어, 정희원…….”
“김독자 이거 또 까칠한 거 봐. 얘 그때도 엄청 까칠했다니까. 무슨 고슴도치마냥.”
어, 대박. 나도 기억난다. 얘 그때 뭐랬더라? 나랑 친하게 지낼 생각 하지 마? 뭐 그런 소리 하지 않았냐? 한수영의 말에 기어이 김독자가 테이블을 탕 쳤다. 나 집에 간다, 말리지 마. 일어나려는 그를 간신히 붙들어 다시 앉혀 놓고. 숨이 넘어가도록 웃던 정희원이 웃음을 멈추고 눈가를 닦았다. 그대로 김독자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기류가 조금 달라졌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알아차린 김독자는 고요히 그녀를 마주했다.
“처음엔 진짜 중2병 아닌지 고민했었거든. 근데, 진심이었더라고.”
그 말이 정확히 사실 그대로일 줄 누가 알았겠어. 웃음 섞인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듯 흘러나온 말에 김독자는 조금 시선을 흐렸다. 김독자는, 이들이 자신과 친하게 지내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싸우기도 제법 싸웠다. 밀어내느라고 애를 많이 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듣고 난 뒤에도 그들은 곁에 있어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 젠장. 불현듯 목이 메여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어쨌든…… 상아 언니가 천문부 소속이어서. 우리도 자연스럽게 거기 들어갔지, 뭐. 우리랑 같이 김독자도 입부하니까 다른 새끼들은 다 나가버렸지만. 우리야 좋았지?”
그때도 김독자 이 자식은 별 보는 거 싫다고 난리난리를 쳤지만. 고개를 내린 김독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별 같은 거 딱 질색이라고 그렇게 몸서리를 쳤는데도 억지로 끌고 가더라. 결과적으론 좋아하게 됐지만.”
그 말에 유중혁이 고개를 돌려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꼭 그 시절, 저를 바라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너도 좋아하게 될 거야. 별 보는 거. 속삭임이 별처럼 깜빡여 흩어졌다. 멋진 이야기네요, 끄덕이며 미소 짓는 이설화의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서로의 술잔이 채워지고 추억들이 허공을 날았다. 오늘 밤은 오랜만에 되찾은 옛날이야기들로 제법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독자는 잔을 손에 쥐었다.
“으응. 중혁아…….”
유중혁은 혀를 차며 김독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술에 취해 늘어진 몸이 제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체중을 손쉽게 지탱하며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데리고 들어가겠다.”
“야, 그냥 빨리 둘이 집 합쳐. 어차피 지금도 반쯤 동거하고 있지 않냐?”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라.”
유중혁의 품에 코를 박고 있던 김독자가 갑자기 얼굴을 번쩍 들어올렸다. 불그스름한 눈가를 휘어 웃더니 종잇장처럼 손을 팔랑거린다. 난 우리 중혁이랑 먼저 갈게! 다음에 봐! 명백히 혀가 꼬인 발음에 모두가 웃어댔지만 웃는 사람들도 그다지 제정신은 아니었다.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일행들을 훑었다. 술도 약한 녀석들이 분위기는 잘 타니 매번 끝이 이런 꼴이군. 그나마 멀쩡한 건 유상아 정도인가……. 그래도 다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성인들이니 알아서 잘 들어가겠지.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김독자를 품에 끌어안은 채 택시를 잡았다. 그간 이것저것 제법 많이 먹였는데도 여전히 가벼운 몸을 들어 뒷좌석에 앉히고, 그 옆에 자리를 잡은 뒤 자신의 집 주소를 불렀다. 아직도 환한 불빛들을 점등한 불야성의 서울 시내를 작은 차체가 가로질렀다.
“으음.”
제 어깨에 고개를 늘어뜨리고 있던 김독자가 옅게 뒤척였다. 유중혁은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슬 쓸었다. 취기가 올라 뜨끈한 뺨이 부드러웠다. 술이 약한 건 재회한 첫날 바로 알아차렸지만, 도대체 주량이 늘지를 않는군. 애초에 술이 잘 받지 않는 체질인가. 뭐라 웅얼거리던 김독자는 이내 색색 숨소리를 냈다. 오피스텔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이어진 평온한 잠이었다.
유중혁이 그의 몸을 부축하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김독자가 반짝, 눈을 떴다. 깜빡거리던 눈이 이내 제자리를 찾았다.
“깼나?”
“으응, 응. 중혁아…….”
근데 어지러워. 헤실거린 김독자가 부러 유중혁에게 몸을 폭 파묻고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거의 깬 모양이군. 취하는 것도 깨는 것도 빠른 녀석이다. 픽 웃은 유중혁은 그대로 그를 껴안고 걸어가려다가, 은근슬쩍 등을 더듬고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오는 손길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모른 척 손가락을 움직여 주물러대는 게…… 김독자, 죽고 싶나. 유중혁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허리를 숙였다. 그대로 무릎 뒤에 손을 넣어 그의 몸을 가뿐히 들어올렸다. 화들짝 놀란 김독자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기겁해 외쳤다.
“악! 미친! 야, 중혁아, 내려줘!”
“침대에서 내려줄 테니 걱정 마라.”
“야, 으악, 부끄럽다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려줘!”
“먼저 도발한 게 누구였지?”
어차피 늦은 시간이라 주변에는 아무도 없건만, 부끄럽다고 난리인 발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내려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 더 대로변에 서서 놀려줄까 생각했으나 몸이 달아 그만두었다. 결국 급한 건 내 쪽인가. 유중혁은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김독자를 안아든 채 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어깨에 고개를 푹 파묻고 있던 김독자가 슬그머니 얼굴을 들었다.
“이제 내려줘…….”
“침대에서 내려주겠다고 말했을 텐데.”
“이러고 있으면 문 못 열잖아.”
“네가 열어라.”
그 말에 김독자가 작게 웃더니 손을 뻗어 도어락으로 향했다. 흰 손가락이 익숙한 숫자를 누르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구둣발 끝으로 현관문을 지탱한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틈새로 몸을 밀어 넣어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빠르게 신발을 벗고 침실로 향하자 김독자가 버둥거렸다.
“야, 나도 신발 벗어야지……”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하란 뜻으로 입술에 입을 맞췄더니 뺨을 빨갛게 붉히며 허둥거린다. 연인의 이런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제가 말한 대로 기어이 침대 위에 김독자를 내려놓은 유중혁은 몸을 숙여 김독자의 신발을 벗겨주었다. 침대 다리 옆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뒤 손을 뻗어 드러난 발목을 붙잡자 간지러운 듯 키득거린다. 아직 웃을 여유가 있나보지. 발목을 휙 들어 올려 제 어깨 위에 얹고선 덮치듯 몸을 겹치자 김독자가 앗, 하는 소리를 냈다.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 유중혁을 올려다본 김독자가 하하 웃으며 두 손으로 그의 뺨을 붙잡았다.
“중혁아.”
“왜.”
“선배라고 불러봐.”
유중혁은 짙은 눈썹을 모았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김독자가 손가락을 움직여 연신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눈동자가 묵연하게 잠겨든 듯하면서도 반짝거려서, 유중혁은 말없이 그가 만지작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서 추억에 젖기라도 했나.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김독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중혁아, 얼른.”
속삭이는 목소리가 야살스러웠다. 하마터면 원하는 대로 답해줄 뻔했으나……. 유중혁은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렇게 나온다면 내게도 할 말이 있다, 김독자.
“김독자.”
“선배라고 해야지, 유중혁.”
“아닐 텐데.”
너는 빠른 년생이지. 나랑은 생일도 고작 여섯 달밖에 차이 안 나지 않나. 유중혁의 말에 김독자가 순순히 에이, 들켰네, 하며 웃었다. 들키기는 무슨. 이마를 콩 부딪히자 아프다며 엄살을 피운다. 가볍게 무시하고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춘 유중혁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거 말고, 입학식 때 얘기나 좀 더 해보지.”
삽시간에 붉어지는 귓가가 눈에 훤히 들어왔다. 입술을 대면 뜨끈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유중혁은 그렇게 했다. 흐앗, 하고 움찔한 김독자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살짝 밀어냈다.
“입학식은 왜…….”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달싹거린다. 확실히 흑역사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입꼬리를 올려 웃은 유중혁은 바로 그 흑역사가 있던 날 처음 만났던 김독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고 가는 머리칼에 부딪혀 부서져 내리던 초봄의 햇살. 투명할 정도로 희끄무레한 피부, 단정한 차림새, 별처럼 빛나던 검은 눈동자까지. 밤하늘 같던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운명, 우연, 그런 것 따윈 전혀 믿지 않으며 살아온 유중혁의 짧은 삶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히 울려 퍼지던, 어떤 감각.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예감이었을 테지.
“선배.”
“어? 어어? 응?”
“키스해도 됩니까?”
어지간히도 갑작스러웠는지 김독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중혁아. 잠깐. 잠깐만……. 뺨으로부터 뜨끈한 열기가 올라오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붉었다. 제가 불러보라고 한 주제에 뭘 그리 당황하는지. 허나 그런 얼굴이 정말이지 보기 좋았다. 유중혁은 고개를 숙여 그와 코끝을 맞대며 말했다.
“좋아합니다.”
“…….”
김독자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렸다. 눈꺼풀을 깜빡거린 그의 눈가에 문득 옅은 물기가 비쳤다. 오늘은 확실히, 옛날 일을 많이 떠올리게 되는 날이다. 작게 웃은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키스부터 하고 고백하는 게 어디 있냐고 했었지. 그러니까 이번엔 먼저 말해주겠다.”
김독자가 기어이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아왔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팔에 힘을 주고, 눈을 꼭 감으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키스해줘, 얼른. 유중혁은 그에게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 했다. 긴 속눈썹이 뺨에 닿을 정도로 드리워졌다. 유중혁은 눈을 감으며 부드럽게 입술을 겹쳤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마치 오랜 시간에도 전혀 바래지 않은 어떤 마음 같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