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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북극성에게 /完

“유……혁. ……중혁, 야, 인마!”
유중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곤 고개를 돌렸다. 한수영이 사나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녀석 성질 더러운 건 어디 가질 않는군, 10년이 지났는데도…… 짧게 생각하던 유중혁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젠장.
“유중혁 너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사냐, 요즘?”
“네가 알 바 아니다.”
“알 바 아니긴, 미친놈아! 우리가 모를 것 같아? 어?”
흘긋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정희원과 이설화, 유상아까지 표정이 이상하다. 그 사이에 앉아 있는 이현성은 난처한 얼굴로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통유리 너머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스며들어왔다. 어째 오랜만에 전부 다 왔다 싶더니. 유중혁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대로 잠시 가만히 있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연락은?”
“안 받아. 아직도.”
유상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울한 표정을 했다.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짧게 침묵했다. 모두의 머릿속엔 같은 사람이 떠올라 있었다.
“안 받아, 시발. 안 받는다고! 백 번은 전화했을걸! 근데도, 아오, 김독자 그 자식 진짜……”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해봐…… 가둬 놓을 거니까…….”
한수영과 정희원이 이를 갈며 욕을 해댔지만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을 꾹 닫고 있던 유중혁을 향해 이현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중혁아. 그날 무슨 일 있었던 건지…… 정말 말 안 해줄 거야?”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물음이었다. 유중혁은 시선을 내리깔며 조금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화풀이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몸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온갖 감정들이 치고 올라오기에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현성이 그만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이 혀를 쯧쯧 차며 유중혁의 어깨를 콕 찔렀다.
“유중혁. 표정 좀 펴. 아주 사람 하나 잡겠다? 어?”
“손 치워라.”
“아이고, 무서워라. 성깔도 좀 죽이고.”
무서워서 더 물어보기나 하겠냐? 툴툴거렸지만 정희원도 나름대로 그의 심경을 이해하는지 더 캐묻지는 않았다. 입을 닫은 채 묵묵히 테이블을 노려보는 유중혁의 눈앞에 이설화가 손을 흔들었다.
“중혁아.”
유중혁은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이설화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저를 향한 걱정과 동시에,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들.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김독자가 어떤 의미인지를. 제게 있어서도 김독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이들에게도 아마……. 그래서 유중혁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더욱 말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자신이 김독자를 붙잡았다면, 이들 모두에게 이런 실망스러운 이야기를 전할 일도, 괜한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표정들을 짓게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시 짧은 생각에 빠진 그의 뺨을 이설화가 가볍게 꼬집었다.
“……뭐 하는 거지?”
“너 또 이상한 생각 하지. 그만 하고 우리 좀 봐봐.”
유중혁이 말을 더 얹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자 옆에서 한수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욕설을 주워섬겼다. 저 새끼 우리한텐 맨날 성질내더니 이설화한텐……. 하지만 유중혁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설화는, 고등학교를 자퇴해 한국에서의 인간관계가 협소한 유중혁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은 고등학교 동창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학년의 동창들 중 연락을 하고 지내는 것은 그녀뿐이었으니까.
“중혁아. 정말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근데 너, 대답은 안 하고 계속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잖아.”
아직 결정을 못한 거지? 우리한테 말할지, 말지. 정곡을 찌르는 이설화의 말에 유중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읽히는 것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유중혁은 고민하고 있었다. 김독자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김독자는 자신이 독점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니, 이들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늘 그렇듯 답은 나와 있었다. 결정 뒤에 따르는 고민이 길었을 뿐. 그래서 유중혁은, 마치 준비하기라도 한 듯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날. 김독자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가게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 튀어나가서 잡았다. 누가 봐도 몰래 훔쳐보고 있던 모양새더군. 거기까지 들은 정희원이 인상을 썼다. 거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 만만으로 왔었구만? 유중혁은 침묵으로 긍정의 대답을 대신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붙잡아 놨더니, 예전에 같이 먹었던 팬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줬다. 그 다음엔 술을 마시러 갔고.”
“그 때까진 도망가려고 안 했어?”
“도망가봤자지. 내가 더 빠르다.”
“……재수 없는데 또 맞는 말이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유상아의 물음에 유중혁은 다시 말했다.
“취한 것 같길래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더니, 집이 서울이 아니라서 못 돌아간다고 하더군.”
“서울에 안 산다고?”
“하긴 김독자 마지막으로 본 게 부산이었지…….”
“대한민국 넓지도 않은데 막상 또 그렇게 들으니까 어디 사는지 감도 안 오네.”
“어쨌든 그래서 일단 내 집에서 재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유중혁은 말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본 김독자의 서늘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금방 다시 말을 잇기는 했으나…… 조금은 티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으려는 걸, 알려주지 않으면 못 돌려보낸다고 협박해서 알아냈다.”
“허.”
“야, 잘했어 인마. 협박 잘했다. 전화번호라도 얻어낸 게 어디야?”
“전화번호는 알아냈는데, 그러고 그냥 간 거야?”
유중혁은 잠시 입을 다물고, 눈을 꾹 감았다가 뜨며, 다시 입을 떼었다.
“자신이…… 도망친 거라고 생각하냐고 묻더군.”
“……무슨 소리야?”
유중혁은 2주가 지난 지금도 김독자가 제게 한 말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평생 잊어버릴 수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차갑고 따끔한 말을, 그는 어렵게 입에 담아냈다.
“도망친 게 아니라…… 떠난 거라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자길 놔 달라고, 말했다.”
순식간에 모두의 눈과 입이 커다랗게 열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럴 테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김독자가, 자신들을 떠나고 싶어 했다는 것을.
긴 침묵이 서로의 어깨 틈새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는 이어졌으나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무거운 공기는 쉬이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인 홍차가 차갑게 식어갈 무렵, 한수영이 말문을 텄다.
“하…… 시발, 그래. 다시 한 번 더 짚어보자. 이 작가님이 정리해준다.”
모두의 시선이 이마를 짚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한수영이 유중혁을 빤히 바라보고는 말했다.
“유중혁. 술 마시러 가자고 먼저 말한 건 누구였냐?”
“……김독자였다.”
“그럼, 네 집에서 재운 건? 네가 먼저 재워주겠다고 얘기했냐?”
“아니. 재워달라기에 그렇게 했다.”
“그 때 김독자는 만취 상태였고?”
“……그다지 취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네 잤냐?”
“미친, 한수영 돌았나봐!”
정희원이 기겁하며 그녀의 어깨를 후려쳤다. 유상아도 깜짝 놀라 한수영의 입을 막았으나 발버둥을 치더니 기어이 둘을 떼어내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한다.
“이거 존나 중요하거든? 그러니까 빨리 말해.”
“……그게 왜 중요하지?”
“잤네, 잤어.”
시발. 알고 싶지 않았는데. 자기가 물어봐놓고선 온갖 인상을 다 쓰며 난리다. 다른 사람들도 대단히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유중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김독자와 연인 관계였던 걸 모두 알고 있지 않나.
“그게 왜 중요하냐고 물었다.”
“어, 시발 그래 존나 중요하지.”
야. 생각해 봐. 그렇게 말을 시작한 한수영은 손짓을 해가며 설명을 계속했다.
“여기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이 술 마셔본 사람?”
“장난하냐. 난 어제도 마셨다.”
“나도 이번 주에 마실 예정이네…….”
모두가 상사와의 술자리를 떠올리기라도 한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반응이 썩 만족스러웠는지 한수영이 씩 웃고선 말했다.
“그럼 이건? 싫어하는 사람한테 먼저 술 마시러 가자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
“……목적에 따라 다르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난 부장님이랑 술 먹기는 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이들을 향해 한수영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폭탄선언을 했다.
“그럼 싫어하는 사람하고 원나잇 할 수 있는 사람?”
정희원이 차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손으로 입가를 가린 유상아가 눈을 깜빡였다.
“수영이 너 설마……?”
“아니 시발! 나 말고! 나 말고, 혹시 그런 사람 있냐고!”
말해두는데 난 원나잇 나쁘다고 생각 안 해,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내가 한단 소린 아니고, 아, 유상아 그만 쳐다봐! 잠시 소란이 일어난 뒤 결국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웬만해선 안 그러죠…….”
“그치?”
이현성이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에게는 싫어하는 사람과 원나잇이라는 상황 자체가 충격이었는지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듯도 했다. 한수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다른 이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야. 유중혁. 알겠냐?”
“……뭐를 말이지?”
“여기서 더 설명해 줘야 되냐?”
평소엔 빠릿빠릿하더니 도대체 왜 이래?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를 대신해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중혁아. 그건 반대로 말하면, 독자가 널 싫어하지 않는다는 뜻이잖아.”
“…….”
유중혁은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온전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김독자가 내게 그만 놔달라고 말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아니, 야. 좀 상상력을 동원해 봐. 사랑하는데 떠난다, 뭐 그런 얘기들 많잖아?”
유중혁의 짙은 눈썹이 들썩거렸다. 무슨 헛소리냐는 눈빛이 분명해서 한수영은 잠시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거지. 김독자한테 분명히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그런 것쯤은 네가 정리해주지 않아도 안다.”
“아오 시발. 근데 왜 그렇게 가만히 있냐고!”
너 그 후로 김독자한테 한 번도 연락 안 했지? 날카로운 지적에 유중혁은 묵묵히 팔짱을 꼈다.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쉰 정희원이 허리에 손을 얹고선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유중혁. 너 이런 놈이었어?”
“뭘 말하는 거지.”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놈이었냐고! 10년이나 쫓아왔잖아, 우리가 다 포기하고 손 놓았을 때도 넌 끝까지 포기 안 했잖아.”
슬슬 짜증이 나는군. 유중혁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하지만 정희원은 여전히 화가 난 듯한 표정 그대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이설화가 입을 열었다.
“언니. 중혁이도 뭔가 생각하는 게 있었겠죠. 언니 말마따나 우리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독자 선배 쫓아온 장본인이잖아요.”
“아, 그래. 나도 안다고. 그러니까 속 시원하게 얘기를 좀 해보란 말이야. 넌 너무 말이 없어서 탈이라고, 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유중혁. 저를 향해 똑바로 꽂혀드는 의문에 유중혁은 기어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게 문 닫는다. 전부 돌아가라.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아우성이 쏟아졌지만 유중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업 종료를 선언했다. 결국 하릴없이 쫓겨난 그들이 가게 문을 나서며 흘끗흘끗 유중혁을 쳐다봤다. 그 시선들에 담긴 수많은 의미들을 유중혁은 어렵지 않게 잡아냈다. 그래, 알고 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가 그렇게 보지 않아도.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던 이설화와 유상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중혁아.”
짧은 부름에 유중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설화, 나는 괜찮으니 가라. 짧게 머뭇거리는 이설화의 옆에서 유상아가 그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중혁아. 이것만 얘기하고 갈게. 너도 눈치 채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지?”
“독자가 정말 우리를 떠나고 싶었던 거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대처하고 있진 않았을 거야.”
너도 알지? 독자가 어떤 애인지. 유중혁은 가라앉은 시선으로 유상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10년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졌던 녀석이다. 알고 있다.
“전화번호를 바꾸든, 수신 차단을 걸든, 어떻게든 우리와 연락이 닿지 않는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있잖아.”
유중혁.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어. 그리고 우린 그걸 너한테 맡기고 있는 거야.
말을 마친 유상아가 빙긋 미소 짓고는 가게 문을 열었다. 딸랑거리는 경쾌한 종소리를 배경으로 이설화도 옅게 웃어보였다. 이윽고 모두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유중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어. 유중혁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너무나도. 하지만.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들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일순 휴대폰의 액정이 부서지기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김독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떠나고 싶어 한다면? 그렇다면 그의 의견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내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라면. 그런 거라면.
그랬다. 유중혁은 두려웠다. 김독자의 진심을 듣는 것이 두려웠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던 거라면, 더 다가갔을 때 김독자는 끝끝내 자신을 밀어내고 더 먼 곳으로 떠나버릴 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정말, 영영 손이 닿지 않을 밤하늘 저편으로. 유중혁은 그렇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지금 같은 애매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서로의 손에 연락처가 쥐여져 있고, 어쩌면 아주 먼 훗날 언젠가는 다시 전화를 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가.
문득 유중혁은 생각했다. 아, 그런가. 어쩌면…… 김독자, 너도 혹시 이런 기분이었나. 영영 닿을 수 없게 될까 두려워, 차라리 스스로 멀어지기를 택하는.
어이없게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답지 않은 고민을 이렇게나 길게 하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김독자와 관련된 일이라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너에 대한 내 감정의 증명이겠지. 그래, 김독자. 나는 유중혁이다. 네가 싫다고 말해도, 나는 어떻게든 다시 너를 되찾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다시 내 곁에 머물고 싶게 만들겠다. 그게 나의 방식일 테지.
유중혁은 휴대폰을 들어 외워버린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김독자는 가느다란 금이 간 휴대폰 액정을 내려다봤다. 꽉 쥔 손안에서 끊임없이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그 박자에 맞추기라도 하듯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화면에는 저장된 연락처도 없는 열한 자리 숫자만이 떠올라 있었지만 김독자는 알고 있었다. 잊어버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중혁, 너를 가리키는 열한 자리 숫자. 내가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평생이 가더라도, 절대로, 나는.
실수였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실수였다. 유중혁이 은퇴 후 한국으로 돌아와 뜬금없이 디저트 카페를 차렸다는 소식쯤은 훤히 꿰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김독자는 언제나 유중혁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북쪽 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폴라리스, 유중혁. 그 이름대로, 혹은 어느 날의 오랜 약속대로 유중혁은 늘 그 자리를 지켰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북쪽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굳건하게. 선수로서 활동하는 그의 닉네임이 게임 해설자의 입에서, 뉴스 앵커의 입에서, 주변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마다 김독자는 어찌할 바 없이 욱신거리는 가슴을 내리눌렀다. 프로게이머 유중혁은 본래 이름보다도 그 닉네임으로 더욱 많이 불렸다. 폴라리스. 김독자에게 있어 그 네 글자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더욱.
종종 유중혁에게 닉네임의 기원에 대해 묻는 인터뷰어들이 있었다. 그 때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유중혁의 대답을 기다리던 자신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유중혁은 언제나 답했다. 설명하기엔 조금 길지만, 제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이름입니다. 그 대답을 들을 때마다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그리움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숱한 밤이 있었다.
유중혁.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김독자는 월차를 던지고는 채 수리되기도 전에 회사를 뛰쳐나왔다. 등 뒤로 기가 막히다는 한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던가, 기억이 희미했다. 그 순간 회사 같은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유중혁. 유중혁. 유중혁. 그 얼굴이, 늘 저를 향하던 올곧은 시선이, 가끔 지어보이던 미소가 너무나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10년이나 꾹꾹 눌러 참아왔던 그리움은 문이 열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무작정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긴장과 기대감으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라 멀미 같은 건 느끼지도 못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둘이서 함께 올려다봤던 밤하늘, 겹쳐오던 손가락, 맞닿았던 입술, 수많은 기억의 편린들만이 온통 눈앞을 흐려놓았다. 순간의 기억으로 인간은 평생을 살아간다고 하던가. 제 꼴이 딱 그 꼴이었다. 그렇게 무슨 정신으로 도착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는 유중혁의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그 곳에 유중혁이 있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 오렌지빛 조명 아래 그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 곧은 자세, 무언가 생각하는 듯 턱을 괸 채 깜빡이는 시선.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수많은 매체를 통해 흘러나오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다. 그의 고개가 돌아가고, 저와 눈이 마주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게 밖으로 뛰쳐나오는 걸 보면서도 김독자는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유중혁.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하마터면 입이 열리자마자 그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에게 팔목을 붙잡혔을 때, 김독자는 참담한 낭패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실수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여기에 와서는 안 됐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너를 피해 다녔는데. 지금 여기서 너를 돌아본다면, 지난 내 10년은 고스란히 허사가 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이토록 깊은 그리움에 더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 얼굴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혔다.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 안에 제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 또렷한 시선은 10년 전과 어찌도 그리 변한 바가 없는지, 김독자는 울컥 목이 메임과 동시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그 미소가 대단히 애매하게 보일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를 향해 쏟아지던 고백에 속절없이 지어보였던 그 미소와 꼭 닮아 보였을 것이라는 것도. 김독자는 그 순간 마음을 정했다. 유중혁, 나는 아직도 너를. 그러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있게 해줘.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보다 더 긴 시간이라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멍청한 미련의 산물이었다.
전화번호를 바꿀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역시 그날 밤 실수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유중혁. 나는 빛나는 게 멀리 있을 때는 너무 싫었어. 근데 막상 그것들이 가까이 있으니까 알겠더라. 때로는 멀리서 빛나는 걸 바라보기만 하는 게 더 행복할 수도 있다는 걸. 그래, 이렇게 한 번 가까워지고 나니까…… 도저히 놓을 수가 없잖아.
휴대폰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해서 몸을 떨어댔다. 받지 않았는데도 벌써 네 번째 이어서 울리고 있다. 끊어낼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번호를 차단하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대리점에 찾아가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 된다. 잘 알고 있는데 어째서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지, 왜 멋대로 수신 버튼을 누르고 있는지 정말이지 모를 일이다. 그대로 귀에 가져다대지도 못한 채 멍하니 내려다보고만 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김독자. 김독자? 툭, 툭, 액정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소나기였다. 솨아아, 삽시간에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에 어깨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김독자는 하하 웃으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대로 젖은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댔다.
“중혁아. 여기 비 오는데…… 나 우산이 없어.”
데리러 와줄래?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겠다.]
그는 어디인지 묻지도 않았다.



유중혁은 다급히 차를 몰았다. 빗물에 차가 미끄러졌다. 그는 안전선을 유지하며 최대한의 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김독자는 자신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말한다면, 정해진 곳은 딱 하나 뿐이었다. 서울에 살지 않는다고 말했던 그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차에서 내린 유중혁은 커다란 우산을 펼쳐들고 계단을 올랐다. 비가 오는 탓에 산책로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중혁은 하도 많이 다녀서 길을 외워버린 공원을 계속해서 헤쳐 나갔다. 설마 그 자리에 계속 있지는 않았겠지. 거긴 비를 피할 구조물은커녕 마땅히 앉아 있을 벤치도 없다. 김독자, 미련하게 그런 짓은……. 하지만 언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고, 어둑한 시야 가운데 커다란 나무 둥치에 적당히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할 말을 잃은 유중혁은 하릴없이 그에게 다가가 우산을 기울였다.
“김독자.”
내리던 빗물을 가린 우산에 그가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우산 그늘 속에 뒤를 돌아본 흰 얼굴이 유중혁을 보며 작게 웃었다.
“중혁아.”
태연한 미소에 유중혁은 하, 한숨을 내쉬며 우산을 그 쪽으로 더욱 기울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렇게 하면 네가 비 맞잖아, 말하며 우산 손잡이를 쥔 손을 밀어낸다. 그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흠칫 놀라기도 잠시, 거짓말처럼 비가 멎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눈을 깜빡이며 우산 밖으로 손을 뻗어 펼쳤다. 손바닥 위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를 멈췄다.
“와…….”
중혁아. 진짜 희한하지 않냐. 예전에도 여기서 기가 막히게 딱 눈이 오더니……. 짧게 마주친 눈이 흐려졌다. 유중혁은 우산을 접고 바닥에 빗물을 털어냈다. 젖은 낙엽들이 푸석한 소리를 냈다. 빈손을 뻗어 팔을 붙잡고 일으키려 하자 김독자가 뿌리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앉아봐.”
“감기 걸린다.”
“잠깐이면 돼.”
목소리에 실린 단호함에 유중혁은 결국 한숨을 쉬고 그의 곁에 앉았다. 아니, 반대로 돌아서 앉아. 뒤쪽 보고. 그 말에 나란히 앉아 등을 돌린 이상한 상태가 되기는 했지만. 유중혁의 오른쪽 어깨에 마찬가지로 김독자의 오른쪽 어깨가 닿았다. 흠뻑 젖은 코트 자락이 축축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채로 김독자가 후우, 허공을 향해 숨을 내뱉었다.
“중혁아. 내 얘기가 궁금하겠지.”
“……그래.”
유중혁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김독자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서늘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별 거 아닌 얘기일지도 몰라.”
“그래도 상관없다.”
네게는 중요한 일이었을 것 아닌가. 잠시 침묵하던 김독자가 천천히 말문을 떼었다.
“처음 부산으로 전학 갔을 때는 괜찮았어. 거기에는 나를 아는 애가 없었거든. 선생님들 중에는 나에 대한 얘기를 아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래도 선생이라는 자각이 있어서인지 크게 말이 퍼져나가지는 않았어.”
그리고, 뭐…… 너도 알겠지만, 전학 가서 금방 애들이랑 친해지기가 쉽지는 않잖아. 내가 그렇게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그래서 조금 겉돌고 있었는데, 나를 도와준 애가 있었어. 너한테도 얘기한 적 있지? 장하영이라고. 기억을 더듬는 듯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유중혁은 그와의 대화에서 몇 번인가 등장하곤 했던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냈다. 김독자가 먼 곳에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고 고맙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부럽게 느껴졌던 아득한 감정도 함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처음 한 달은 괜찮은 것 같았거든. 근데 결국은 또 일이 터지더라. 소문이 돌았어. 서울에 있을 때보다 더 기이하게 부풀려진 형태로.”
입을 여러 번 거쳐서 그런가 와전이 많이 됐더라고. 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짧게 웃은 김독자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흩어진 물방울이 귓가에 부딪혔다.
“어머니가 쓴 책을 학교에 들고 오는 애들이 생겼어. 하영이가 어떻게든 막아주려고 했는데 역부족이었고…… 음.”
걔, 1, 2학년 때는 반장을 했다고 했었거든. 꽤 인기 많은 애였어. 근데 나하고 얽히는 순간 애들 시선이 싹 달라지더라. 그 애들한테 지난 2년은 뭐였을까, 아무 의미도 없었을까. 순식간에 그저 살인자의 아들을 옹호하는 미친년이 되어 있더라고. 문득 맞닿아 있던 어깨가 움직였다. 김독자가 저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고 파리한 입술이 열렸다. 중혁아.
“나 알고 있었어. 너도 똑같은 일 겪었다는 거.”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뺨을 타고 옷 위로 떨어졌다. 김독자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나랑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너도 똑같은 소리 들었잖아. 미친 거 아니냐고. 끼리끼리 뭉친다는데, 너도 뭐 켕기는 구석 있는 거 아니냐고.”
물론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수군대는 목소리는 끝이 없었다. 김독자의 과거와 함께 유중혁의 가정사까지 파헤쳐졌다. 야, 유중혁도 부모님 없다는데? 아 진짜? 그럼 그렇지, 이유가 있었네……. 모든 것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던 유중혁이었으나 그것이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때의 유중혁은 지금보다 어렸으므로. 설상가상으로 유미아에 대한 헛소문까지 돌 때는 정말이지, 당장이라도 그 말을 지껄인 새끼의 멱살을 쥐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런 짓을 했다간 결국 소문만 더더욱 커질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 그거 다 알고 있었다, 중혁아. 근데 모른 척 했어. 네가 힘든 거 아는데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김독자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고개가 조금 떨궈졌다. 나무 둥치에 얹어져 있던 흰 손이 움츠려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유중혁. 나 존나 이기적이지 않냐. 나 같은 새끼가 너랑 같이 있을 자격이라도 있겠냐. 네 옆에 있어봤자 너한테 피해밖에 안 주는 새낀데.”
“김독자.”
“그래서 도망쳤어. 더 이상 너를 여기에 붙잡아 둘 수가 없었어. 그랬다간 내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어. 그래서…….”
너는, 저 위에서 빛나야 하는데. 나랑 같이 진흙탕에 처박혀 있을 신세가 아닌데. 툭, 김독자의 이마가 유중혁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묻은 채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유중혁. 나 10년 동안 잘 참았거든. 그러니까, 얼마 전에 있던 일도 그냥…… 적당히 잊어주면 안 되냐.”
“김독자.”
“물론 나는 못 잊어버리겠지만, 계속 기억하고 있을 거지만…… 그래도.”
유중혁은 손을 뻗어 흰 손등 위에 겹쳤다. 그의 젖은 몸을 끌어안고 등을 감쌌다. 힘없이 품에 들어오는 차갑게 식은 몸에 오래 전의 기억이 어렴풋하게 스쳐 지나갔다. 유중혁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독자.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를 순순히 보내줄 줄 알았나?”
“…….”
넌 항상 나를 잘 알고 있었지. 그런 네가, 설마하니 내가 널 이대로 놓아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겠지.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눈가에 물기가 고여 들었다. 그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그러니까 이러는 거야. 유중혁, 나 존나 이기적인 새끼라고. 내가 이런다고 네가 놔줄 리 없다는 거 아는데, 그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한심한 놈이라고……”
“넌 더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김독자가 말문이 막힌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슨 말이냐는 듯 깜빡거리는 눈꺼풀을 보며 유중혁이 그의 허리를 감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김독자. 네가 도대체 뭘 잘못했지? 너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문제가 있는 건 네가 아니라 다른 놈들이지. 그놈들이 하는 나쁜 짓을 왜 네가 책임지려고 하는 거지?”
“……유중혁, 나는.”
“그 이상 한심한 소릴 할 거라면 더 안 듣겠다.”
유중혁은 손을 들어 올려 이마에 달라붙어 있는 그의 머리카락을 슬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젖은 머리카락이 감겨들고 이내 흰 이마가 드러났다. 그 차가운 살갗 위에 입술을 내리누르며, 유중혁은 조용히 말했다.
“그만 도망치고 돌아와라.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고.”
길을 잃어버렸단 말은 못 하겠지, 김독자.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밤하늘에 별들이 떠올랐다. 본디 가을철이라면 이렇게 많은 별이 보일 리 없건만, 어째서일까. 이 순간만큼은 작은 별 하나하나의 반짝임까지 구분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먼 북쪽 하늘에서 북극성이 깜빡거렸다. 유달리 빛나는 별이 없는 가을 하늘에서 그 진가를 발하는 오래된 속삭임. 너를 결코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 눈물로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를 문질러 닦으며 김독자가 유중혁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중혁아.”
“그래.”
“나랑 같이 있어줘. 그 말 하려고, 네 전화 받았어.”
이제 도망 안칠게. 그러니까, 계속 내 곁에 있어줘. 내 손이 닿는 곳에.
10년 전에도 꺼내 보인 적 없는 진심이었다.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형광등을 꺼버리듯 별이 땅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아 두려웠다. 유중혁은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따뜻한 손이 뺨을 감쌌다.
“김독자. 폴라리스는 은퇴했다. 더 이상 밤하늘에 떠 있을 필요가 없어졌거든.”
그러니 얼마든지 손에 쥐어도 된다. 이번에는 네 곁에서, 어디도 가지 않을 테니. 김독자는 미소 지었다. 휘어진 눈가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유중혁. 나의 폴라리스, 나의 데네브, 나의 베가. 나의 북극성. 하늘에 떠 있지 않아도 너는 내게 있어 영원히 북극성일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여 줄, 나만의 북극성으로. 유중혁, 사랑해.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나도 안다.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눈부신 별이 입술에 내려앉았다.









며칠 못 본 새 김독자는 눈가가 퀭해져 있었다. 유상아는 입을 가리며 신기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하하……. 멋쩍은 웃음을 흘리는 얼굴은 예전과 꼭 같아 문득 문득 향수가 치밀어 오른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한 유상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신기하네. 처음 다시 봤을 때보다 살은 붙은 것 같은데, 어떻게 동시에 수척해 보일 수가 있지?”
“아, 별거 아냐. 우리가 한 시간 동안 괴롭혔거든.”
한수영이 대수롭지 않게 손을 흔들어대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쉰 김독자가 그들을 쏘아보았다.
“이제 그만 괴롭힐 때도 되지 않았냐? 벌써 한 달째거든?”
“오…… 김독자님, 아직도 입을 열 염치가 있으신가봅니다? 한 달? 한 다아아알?”
한 달이 뭐냐? 10년은 괴롭혀 줄 건데? 정희원이 서슬 퍼렇게 웃자 김독자가 찔끔 입을 다물었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옅은 한숨을 재차 폭 내쉬고 유상아를 향해 웃어 보인다.
“보시다시피 저런 상태라서.”
“저런. 하나도 안 불쌍하네.”
소리 내 웃은 유상아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배까지 이럴 겁니까? 원망하는 듯한 목소리에도 전혀 굴하지 않은 그녀는 마침 주방에서 걸어 나오는 유중혁을 향해 손을 들었다.
“여기, 오늘자 점장님 추천 메뉴로 하나요.”
영업 끝났다, 유상아. 반사적으로 대답하고선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린 유중혁이 눈썹을 들썩였다.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그대로 허리를 숙여 김독자의 턱을 붙잡아 이리저리 돌려보고. 가볍게 놓아준 뒤 정희원과 한수영의 테이블을 노려본다.
“적당히 괴롭혀라.”
“허! 참내! 유중혁 진짜 어이가 없어서!”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문질러대는 정희원 옆에서 한수영이 눈을 가늘게 뜨곤 씩 웃었다.
“사실 제일 많이 괴롭히는 건 유중혁 너 아니냐? 적당히 해라.”
“흠.”
“미친. 한수영 뭔 헛소리야.”
넌 또 뭘 고민하고 앉았어? 기겁한 김독자가 유중혁의 등을 퍽 쳤으나 유중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되레 김독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괴롭히기는 하지만, 많이 먹이기도 하고 있으니 상관없을 것 같군.”
한수영이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발, 디저트 쫌만 맛없었어도 여기 절대 안 오는 건데. 애꿎은 와플을 두어 번 찌르더니 결국 입에 넣고 맛있다며 짜증을 낸다. 도대체가 알 수가 없는 녀석이다. 유상아가 갸웃거리며 물었다.
“설화랑 현성이는 언제 온대?”
“설화는 오늘 못 온대요. 갑자기 급한 수술 잡혔다나. 현성이는 오는 중이라고 했고.”
조금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김독자를 보며 정희원이 빙긋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하얀 얼굴에 떠오른 여러 가지 표정들이 제법, 아주, 상당히 좋아 보였다. 뭐…… 앞으로 더 좋아질 일만 있을 거고. 정희원은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김독자를 보니 역시 저놈은 완전 코가 꿰였다 싶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10년이나 도망쳐 다녔는지 신기해 죽을 노릇이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딸랑거리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이현성이 90도로 인사를 했다. 버릇 어디 안 가네. 웃으며 손뼉을 짝 친 정희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오늘 아주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러 가자!”
“불금이다, 불금!”
“불금 좋지.”
각자 의자와 테이블을 정리하곤 가게 문으로 향했다. 뒷정리만 끝내고 가겠다, 그렇게 말하는 유중혁의 곁에 나란히 선 김독자가 그들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얼른 도와주고 갈게. 자리 잡아놔.”
“그으래, 알았어요, 처어언천히 오세요오.”
“놀리지 말고.”
짐짓 찡그리는 얼굴을 보며 크게 웃어댄 일행이 문 밖으로 모두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김독자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소리 내서 웃은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애인을 껴안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하여간 깜빡이라곤 모르는 놈이다. 살짝 뺨을 붉힌 김독자는 짧게 망설이고는 고개를 들어 그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시선이 마주치고 이내 유중혁이 얼굴을 가까이 해 왔다. 이마를 간질이는 머리카락 탓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말간 웃음소리에 유중혁 또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른 가야지, 중혁아. 뒷정리해야 한다며.”
“이것도 뒷정리에 포함이다.”
“뭔 소리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순순히 눈을 감는다. 씩 웃은 유중혁은 부러 입술 근처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러자 감겼던 눈이 반짝 떠지며 깜빡거린다. 명백히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에 유중혁은 슬그머니 속으로 웃음을 삼켜냈다.
“왜 그렇게 보지?”
“어? 어어……”
장난치듯 지그시 쳐다보고만 있자 김독자의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눈썹을 모으고 고민하더니 살짝 까치발을 들어 입술에 입을 맞춘다. 금방 떨어져나가는 부드러운 감촉에 유중혁은 결국 작게 웃어버렸다. 코끝을 맞대고 입술을 벌리자 다시 눈이 감겨들었다. 허리를 꼭 끌어안고 깊숙이 입을 맞추며, 유중혁은 문득 어느 여름날을, 겨울날을. 김독자와 함께 올려다보았던 눈부신 밤하늘을 떠올렸다.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된 수많은 별들의 이름을. 김독자,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의 북극성은 언제나 너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장소처럼, 북극을 향한 영원한 노스탤지어처럼.
나의 북극성에게.
이 순간 머리 위에서 빛나는 쏟아질 듯한 별들 아래서, 두 사람은 몇 번이고 맞닿은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다.




너는 마치 처음부터 사랑받는 일을 할 줄 모르는 것 같아
"나는 혼자야"
그렇게 살아온 너만을 위한 북극성이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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