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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月, 冬 : 五
동양풍 타임트립물(?)

“일어났어?”
김독자는 부러 여상한 목소리로 농을 건네듯 말했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침소 안, 그 널찍한 공간 한가운데에 유중혁이 서 있었다. 손에는 예의 그 먹빛 검을 쥐고, 고개를 비스듬히 아래로 숙인 채.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동자에선 불길하리만치 선명한 금빛 기운이 일렁거렸다. 김독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았다. 괜찮을까? 놈은 제정신일까? 아니, 제정신이어도 문제였다. 여전히 이 세계를 파괴하고 ‘진짜 세계’를 찾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마지막으로 침소 안에 들어선 안나가 장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걸어온 안나는 김독자보다 한 발짝 앞에 섰다. 김독자를 포함한 모두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유중혁.”
“…….”
“당신 때문이에요.”
“안나!”
김독자가 날카롭게 외쳤지만 안나는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를 제지했다. 젠장, 어째 아까 전에 순순히 제 말을 들어준다 싶더니. 물론 김독자는 전혀 굴하지 않고 안나를 막으려 했지만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이 더 빨랐다.
“‘이름 없는 것들’은 당신에게 이끌립니다. 알고 있었겠죠? 유중혁.”
“……알고 있다.”
유중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가 닫혔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라……. 김독자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 말이 내포한 의미를 파악하려 했다. 지금 유중혁은, 어떤 상태지? 하지만 유중혁은 움직임 없이 일렁이는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안나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것들은 당신과 공명할 겁니다. 그리고 끝내 이 세계의 멸망을 가져오겠죠.”
“아닙니다.”
그의 말을 막기 위해 결국 김독자는 말을 뱉었고,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안나에게 반박하려면,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 사실 이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그 결심이 서지 않아서. 유중혁을 포함한 이 모두가, 활자에 불과한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라는 것을 고해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계속 망설였을 뿐.
“안나. 당신의 말은…… 틀렸어.”
힘겹게 뱉어진 말에도 안나는 예상했다는 듯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설명해 보시죠. ‘독자’.”
김독자는 입을 가로로 꾹 다물었다가 풀었다. 한수영.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겠냐. 작가인 너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려고 했을까. 물어봤자 소용없었다. 지금 그의 목소리는 한수영에게 닿지 않고, 작가인 한수영이 쓰려 했을 방법은 한낱 독자인 자신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일 터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온전히 자신의 고해성사 시간이었다.
김독자는 긴 숨을 내쉬고,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을 살짝 틀어, 유중혁을 포함한 모두를 바라보는 자리에 섰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모두의 시선이 저를 향했다. 그것은 김독자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커다란 압박으로 돌아왔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의 ‘등장인물’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고해는, 짧게 줄여지는 종류의 말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가능한 한 감정을 제거한 어조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했다. 힘겨웠던 유년 시절, 그 위안이 되어 주었던 하나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의 파국을 바랐던 어린 자신. 그 결과 한번 멸망했다가 다시 시작된 이야기 위에 서 있는 우리들, 그리고 저 너머에 있을 자신의 친구와 작가에 대해서.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고, 충격 어린 고요 속에서 김독자는 속죄하듯 마지막 말을 꺼냈다.
“……저를 원망하셔도 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독자는 차마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 마치 살아있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것만 같아서 자신의 숨마저 막혀 왔다. 호흡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힘겹게 서 있는데, 문득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김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유중혁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놈은, 속죄하고 싶은 건가? 계속해서 읽어 나감으로써 이곳에 있는 모두를 파멸로 이끈 것을?”
스릉, 선연한 검명과 함께 흑천마도가 뽑혀 나왔다. 퉁 하고 바닥에 칼집이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먹빛 칼날이 김독자를 향했다.
“나를 기만했군. 죽어라. ……그렇게 말하며, 내가 네놈을 죽여주길 바라는 건가.”
김독자는 유중혁의 목소리에 깃든 깊고 오래된 절망을 느꼈다. 그는 이 세계가 거짓임을 알았고, 그 세계를 부수려다가 실패해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그 절망의 단초가 된 것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독자’라니.
아, 그런가……. 나는, 차라리 네 손에 단죄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고 응원했던 나의 주인공에게.
김독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랜 죄책감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르게 선 자세 그대로, 김독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를 죽여, 유중혁.”
……안 돼!
머릿속을 강타하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흠칫 놀라며 눈을 떴다. 방금 그 소리는, 뭐였지?
멍청아, 지금 뭐 하는 거야! 거기서 네가 죽어봤자 개죽음밖에 더 돼?
“……한수영?”
입 속으로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목소리가 현실감을 띠기 시작했다. 완연히 선명해진 한수영의 목소리가 다시금 다그쳤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쓴 건 나야! 씨발, 그냥 읽었을 뿐인 너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야?
“하지만…….”
“하지만, 내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가 결말을 맞이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겠지.”
목덜미로 겨누어졌던 선뜩한 느낌이 사라졌다. 김독자는 반사적으로 목을 문지르며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칼을 거둔 유중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아니. 네놈은 틀렸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는 죽음에 한없이 근접한 형태일 뿐이다.”
파국이 두려워 걸음을 멈추는 것은, 곧 죽음과 같다.
그리 말하고 유중혁은 휙 몸을 돌렸다. 침소 밖으로 거침없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에 잠시 황망해져 있던 김독자는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유중혁의 말은, 무슨 뜻이지? 멈추는 것은 곧 죽음과 같다……. 그래, 저 녀석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죽음과도 같은 삶을 연장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음을 택하겠지.
“……유중혁!”
황급히 부르며 그를 따라나서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뭐 해요? 안 갈 거예요?”
열린 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듯 서 있는 사람들.
김독자는 잠시 말문이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이었다.
“……저를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원망? 됐어요. 중요한 건 당신이 내 목숨을 살려 줬다는 거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어조로 어깨를 들썩이는 정희원. 다른 이들도 무언가 결의를 다진 것처럼 비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뒤이어 이지혜가 말했다.
“아저씨, 난 복잡한 거 딱 질색이야. 이 세상이 소설이고 아저씨가 읽었고 어쩌고저쩌고, 그런 건 모르겠어. 생각할 시간도 없고. 지금 중요한 건, 사부가 뭔가 하려고 하고, 그걸 아저씨랑 우리가 막아야 한다는 거 아니야?”
얼른! 늦겠어요! 여기저기서 뱉어지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비틀거리면서도, 그들과 함께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렸다.
모두와 함께 이곳에서 살아있음을, 실감하며.
“──유중혁!”
달리고 또 달린 끝에 도달한 정전(正殿) 앞의 너른 마당. 유중혁의 즉위식이 거행됐던 그 넓은 눈밭 한가운데에 유중혁이 서 있었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쏘아보는 자세 그대로, 한 손에는 검집이 없는 새카만 검의 칼자루를 쥔 채. 불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이 시시각각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모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제각각 유중혁을 부르며 그를 돌려세우려 했지만 무엇도 지금의 유중혁에게는 닿지 않는 듯했다.
“한수영.”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김독자는 그가 듣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이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알겠어?”
……뭔가를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저기 있을 뿐이지.
“……미안한데 독자 시점으로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시발…….
익숙한 욕설과 함께, 거대한 어둠이 유중혁의 머리 위 하늘에 고였다. 뚝, 뚝, 진흙처럼 뭉친 어둠은 유중혁의 뺨 위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이게 내가 계획했던 ‘멸살법’ 리부트의 클라이맥스야. 그걸 ‘주인공’인 저 녀석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거라고!
……뭐?


“씨발……!”
한수영은 이를 갈며 책상을 내리쳤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죽일 듯이 모니터를 노려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쓰이고 있는 ‘멸살법’ 리부트.
“왜 멈추질 않는 거냐고! 하다못해 바꿀 수라도 있으면……!”
키보드를 아무렇게나 두드렸다. 하지만 입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키보드의 전선을 뽑았다가 다시 연결해도, 마우스를 미친 듯이 흔들어도, 모니터는 마치 정해진 답만을 내놓는 계산기처럼 희멀건 빛만 내뿜을 뿐이었다. 알고 있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 현실적인 문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문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째서 쓸 수 없는가? 이다음 이야기를, 왜 작가인 자신 마음대로 써내려갈 수가 없는가? 물론 그 답도 알고 있다. 자신이 미리 정해 두었던 ‘설정’과 ‘개연성’ 때문이다. 한수영이 본래 계획한 ‘멸살법’ 리부트의 클라이맥스. 이곳에서 유중혁은 이전 버전의 ‘멸살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겨내야 했다. 그리고 비로소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져야만 했다.
하지만 한수영은 몇 주 동안이나 그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 유중혁 혼자서는 ‘자기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 그걸 도와줄 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그 ‘등장인물’이 모자랐기 때문에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치만 지금은 ‘등장인물’이 되어줄 김독자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수영아. 여길 봐!”
유상아의 손끝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 다급히 모니터를 쳐다봤다. 커서가 제4의 벽처럼 깜빡였다.
「“한수영.”」
“……그래, 김독자. 듣고 있어.”
「“이 장면을, 어떻게 쓰려고 했었어?”」
“…….”
한수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 한 방울씩 뺨으로 흘러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그 모든 방울 안에 옛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오래되어 잊히고, 희미해지고, 작가와 독자조차 외면하려 했던 이야기였다. 유중혁은 그 모든 것을 ‘기억했다’. 언젠가는 그의 일부였을 이야기.’”
거짓말처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문자들이 화면에 입력되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이를 바득 갈았다.
“씨발. 이걸 쓰려던 게 아냐! 내가 쓰려고 했던 건…….”
내가 지금 써야 할 것은,
「“한수영.”」
“……말해. 김독자.”
「“내 이야기를 써.”」
“뭐?”
「“유중혁의 이야기는 네 손을 떠났어. 그러니까 이제, 내 이야기를 써 줘.”」
한수영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김독자의 말을 들었다.
“네 이야기를…… 써 달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지금 너의 ‘등장인물’이니까.”」
입꼬리를 씩 올려 웃는 얄미운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미세하게 떨리던 손의 경련이 잦아들었다. 검은 눈동자에 선명한 확신이 깃들었다. 한수영은 심호흡하듯 깊은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의자를 끌어당겨 바른 자세로 앉고,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가 폈다.
“…….”
곁에 있는 유상아의 시선이 뺨에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모니터 너머, 저곳 어딘가에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을 김독자의 시선도 함께.
작고 흰 손이 키보드 위로 올라섰다. 전조도 없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일행은 경악하는 것조차 잊고 유중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듯한 기분이었다. 놀랄 계제조차 없었다. 초월적인 무언가를 목도하는 범인(凡人)이 되어, 일곱 명의 ‘등장인물’들은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끝없이 쏟아져 내린 검은 덩어리가 유중혁의 신형을 완전히 덮었다. 후두둑거리며 떨어지던 점성 높은 액체가 작은 산을 이루고는 마침내 멈췄을 때.
사방에 정적이 찾아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와 같은 정적이었다.
푹.
그 침묵을 깨며, 산을 뚫고 새카만 검 하나가 솟아올랐다. 검자루를 쥔 주먹은 마치 태산처럼 굳건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 단단히 뭉쳐 있던 덩어리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가 다시 몰려들었다. 흑천마도를 들어 올린 유중혁에게로.
【유중혁유중혁유중혁유중혁】
【왕이시여왕이시여왕이시여왕이시여】
【우리를우리를우리를】
【두 고 가 지 마】
마치 주인을 쫓는 개처럼, 잃어버린 부모를 애타게 찾아 외치는 아이처럼. ‘그것’들은 무언가를 갈구하듯 너른 정전의 마당 위로 중얼거림을 흩어놓았다. 그리고 곧장 유중혁에게로 달려들어…… 흡수되었다.
“……! 저게, 도대체…….”
누군가의 경악 어린 목소리가 회오리처럼 귓가를 휘감았다. 김독자는 잠시 자신이 해야 할 일조차 잊고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한수영의 말대로였다. 유중혁은 이전의 ‘멸살법’을 제 몸에 담아 넣고 있었다. 사실은 모두 다 토해냄이 마땅할진대, 미련한 사내는 그 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다시금 고요가 찾아오고, 그 한가운데 오연히 서 있던 사내가…… 굳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어둡던 하늘을 가르며 번쩍, 금빛 번개가 내리쳤다. 그와 함께 유중혁의 몸에서 금빛 아우라가 솟구쳐 올랐다. 그의 등 너머에 있는 정전의 거대한 음영조차 가리는 눈부신 금빛이었다. 용을 닮은 형상이 휘몰아치며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파지직. 하늘을 찢는(破天)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김독자가 있는 방향을 겨누었다.
“……피하십시오!”
소리보다도 빠른 섬전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다른 이들은 내려꽂히는 번개를 피했다. 하지만 김독자로서는 피할 방법이 요원했다.
그 순간, 작가가 펜을 들었다.
「김독자는 제게 겨눠지는 검의 궤적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깨달음과 움직임은 거의 동시였다. 순식간에 등을 찢고 거대한 검은 날개가 자라났다. 바람의 흐름을 탄 그의 몸이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부터 멀어졌다. 두 발이 있던 자리에 곧장 금빛 번개가 내리꽂혔다.」
“……하…….”
전혀 예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김독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한 기분으로 김독자는 하늘을 밟고 섰다.
“독자 씨……?!”
저 멀리 아래에서 놀란 이들이 저를 부르는 것이 들려왔다. 흑천마도를 비껴 쥔 유중혁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는 것도 선명히 보였다. 유중혁의 주변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뭉글뭉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각자 자신의 무기를 꼬나쥐는 사람들도.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봅시다, 여러분.”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처럼 날아드는 검은 신형을 김독자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저와 같이 허공에 선 유중혁의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김독자는 미소 짓듯 이를 악물었다. ……작은놈들은 다른 사람들이 막아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유중혁을 상대해야 했다.
번개처럼 그려지는 검의 궤적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김독자는 말했다.
“한수영!”
알아, 멍청아! 일일이 부르지 마!
김독자는 씩 웃으며 품속에 가지고 있던 것을 꺼냈다. 얼룩덜룩 붉게 물든 장식술. 그것을 마치 어떠한 신념의 칼자루처럼 손아귀에 꽉 쥐며, 김독자는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으로부터 빛살로 이루어진 검이 생겨났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이어받았던 신념의 파편. 부러진 것처럼 끄트머리가 거칠고 칼날의 길이도 짧은 그것을 김독자는 자기 몸처럼 익숙하게 휘둘렀다.」
카앙! 날카로운 소음을 내며 두 검이 맞부딪쳤다. 순식간에 몇 합이 더 이루어지고 두 사람은 잠시 거리를 벌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칼날을 털어내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헛웃음을 삼켰다. 칼자루를 쥔 손이 얼얼하게 아려왔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그러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정말이지 괴물이 따로 없다 싶었다. 이것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건가. 역시……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길 수 없겠군.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금 달려 들어왔다. 쌔애액! 공기를 찢는 날렵한 찌르기가 귓가를 스치고 뒤늦게 파열음이 이어졌다. 잘려 나간 머리칼이 팔랑팔랑 허공으로 흩어지며 하얀 뺨에 길게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곧바로 이어지는 가로베기를 검으로 쳐낸 김독자는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유중혁은 검을 좌우로 크게 그었다. 그 뒤 머뭇거릴 찰나조차 주지 않는 변칙적인 발차기. 복부를 강타당한 김독자는 허공 저편으로 쏘아지듯 튕겨 나갔다.」



“아니, 그렇게는 안 돼.”



「유중혁은 검을 좌우로 크게 그었다. 그 뒤 머뭇거릴 찰나조차 주지 않는 변칙적인 발차기. 하지만 김독자는 그의 움직임을 ‘읽었다’. 옆으로 슬쩍 몸을 비틀며 물 흐르듯 흘려보내고 손을 들어 짤막한 검을 강한 힘으로 내려쳤다.」
캉! 재빨리 흑천마도로 공격을 막아낸 유중혁이 다시 멀어졌다. 헉, 헉……. 김독자는 삽시간에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눈으로는 계속해서 유중혁을 주시했다. 숨소리 하나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채 새카만 검을 느슨히 쥐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 숨이 가쁜 제 꼴이 무색했다. 무언가 이상하긴 했다. 체력이 좋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지만, 고작 이 정도 움직였다고 이렇게까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숨이 차다니. 게다가 유중혁의 저 태도. 그는 분명히 작가의 힘을 업은 자신보다 강하다. 어쩌면 훨씬 더. 그런데 어째서 계속 몰아붙이지 않고 이렇게 틈을 준단 말인가?
김독자는 유중혁과 시선을 맞췄다. 굳게 닫힌 입술, 심유한 검은 눈동자 위로 일렁이는 금빛. 일견 무표정했고, 무심했지만, 김독자는 그 안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음을 눈치챘다.
유중혁은, 기다리고 있었다.
“……유중혁!”
외마디 부름을 지르며 김독자가 먼저 움직였다. 캉! 까드드득, 카앙! 예리한 칼날이 서로의 날을 깎아 먹으며 맞물렸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읽으며’ 숨 돌릴 틈도 없이 공방을 이어갔다. 그리고, 찰나. 아주 짧은 찰나 보인 틈새로 손을 뻗었다.
훅 뻗어나간 손이 유중혁의 눈가를 덮었다. 시야가 가려져 잠시 멈칫한 유중혁을 김독자는 그대로 내리눌렀다.
“이쯤 해두고……”
체중을 싣고, 바람을 타고, 중력에 힘입어, 손아귀에 들어온 유중혁의 몸을…… 머리부터 바닥에 처박았다.
“정신 차려, 새끼야!”
“……!”
엄청난 힘으로 강타당한 돌바닥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제 손목까지 저릿저릿하게 전해져 오는 충격에 김독자는 손을 털며 일어서서 다시 검을 쥐었다. 경계하는 태세로 유중혁을 내려다봤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타격이 전혀 없었을까봐 그것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충격에 잠시 기절이라도 한 것인지 눈을 뜨지 않았다.
“……유중혁?”
저도 모르게 목을 길게 뻗어 다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는데 반짝, 감겨 있던 눈이 떠졌다.
“무르군. 김독자.”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목덜미를 움켜쥐고선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등허리에 가해지는 아픔에 얕은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키려는데 새카만 검이 콱, 하고 돌바닥을 가르며 머리통 옆에 꽂혔다. 그대로 검에 체중을 맡긴 채 몸을 숙인 유중혁의 오른발이 김독자의 아랫배를 지그시 밟아왔다.
“허억……!”
쇠뇌를 맞은 부위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김독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헛숨을 들이켜며 몸을 말았다. 겉은 아물었기에 밖으로 피가 배어 나오지는 않았으나 속을 헤집는 듯한 통증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네놈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그런 상태로 나를 이기려고 했나?”
“……윽….”
“어째서 그때, 나를 구하려고 했지?”
“크윽……!”
“대답해라.”
다시금 옆구리를 건드려 오자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한수영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쉴 새 없이 타자를 두드리던 손이 멎었다. 한수영은 김독자의 여름을 되짚었다. 7월, 김독자는 유중혁과 재회했고, 흑천마도를 얻어내 그의 손에 쥐여주려는 차에…… 쇠뇌에 맞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노트들을 헤집었다. 유상아가 번개처럼 그가 원하는 것을 알아채곤 건네왔다. ‘멸살법’ 리부트의 설정집. 아니, 정확히는 김독자가 겪었다는 이야기를 단순한 얼개로 엮어 적어둔 노트였다.
한수영은 표지를 열었다. 여름이라는 라벨이 붙은 페이지를 넘기며 눈으로 자신이 쓴 글자들을 훑었다. 이윽고 그의 검은 눈동자에 ‘쇠뇌’라는 글자가 걸렸다. 그리고 그 위에 쳐진 동그라미와, 선으로 뻗어 나와 적힌 ‘해독 불가능한 독’ 이라는 메모까지.
“……독?”
유상아의 놀란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았다. 한수영은 김독자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때, 내가 놈 대신에 쇠뇌를 맞았어.’
‘……너 바보냐?’
‘아니, 불가항력이었다니까? 머릿속에 그 목소리가 꽉 차서…….’
불가항력.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작가인 자신의 목소리였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때의 한수영은 그저 김독자가 팔문금쇄진의 여파로 환청을 들으며 얼간이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답게, 그는 그 쇠뇌에도 착실하게 뒷설정을 붙여두고 있었다.

그 쇠뇌에는 ‘멸살법’ 세계에선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 발려 있었음. 유중혁이 그 쇠뇌를 맞았다간 죽음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상황. 위기감을 주기 위한 장치 + 유중혁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

흘려 쓴 글씨로 적힌 메모를 손으로 훑어 내렸다. ‘등장인물’이었을 김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뒷설정. 다듬지 않아서 허술했지만, 이른바 미래를 위한 떡밥으로 남겨둔 거였다. 그리고 한수영은 자신이 무엇을 빠뜨렸는지 알아챘다. 머리로만 생각하고, 이 노트에 기록해두지 않았던 것.
책상 위를 구르던 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메모 옆에 작은 메모를 추가했다.

‘멸살법’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는 해독 가능한 독이었음. 현실에서 치료를 받은 김독자는 완치.

달그락, 펜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황급히 모니터를 살폈다. 유난히 고통스러워하던 김독자가 이를 악물고 저항하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는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제야 제대로 설 수 있다는 듯이.
됐다…… 해결했다! 하지만 동시에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이제야 김독자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 과거의 김독자에게 제 목소리가 닿았고, 과거의 설정을 실시간으로 고쳐 쓸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는 ‘멸살법 세계에서는 해독 불가하지만 현실에서는 해독 가능한 독’이라는 개연성도 없고 두서도 없는 설정까지 적용되었다.
물론 지금은 그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김독자에게는, 유중혁에게는…… 아직 한수영이 필요했다. 그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유중혁…….”
김독자는 손을 뻗어 여전히 제 복부에 올라와 있는 유중혁의 발목을 붙잡았다. 직전이었다면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몸이 가뿐했다. 지금껏 얼마나 쓰레기 같은 몸 상태였는지가 순식간에 체감됐다. 힘을 주어 유중혁의 발을 밀어내며 김독자는 몸을 일으켰다.
“왜 구했느냐고? 너를?”
유중혁은 천천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완전히 일어선 김독자가 곧은 자세로 서서 저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짓눌려 있던 검은 날개가 하늘을 향해 다시 펼쳐지고, 새하얗게 빛나던 이마 위로 날카로운 뿔이 돋기 시작했다.
“말했잖아. 유중혁.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뿐이야.”
첨예한 기운이 그의 몸 주변에 어렸다. 광포하면서도 어딘가 간절한 소망을 담은, 바람.
“나는 네가, 살아서…… 제대로 된 결말을 맞이하길 바랐을 뿐이라고!”
노기 어린 외침에 돌바닥이 쩌적 갈라졌다. 바닥에서 살짝 떠오른 채로, 김독자는 유중혁을 내려다보며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바라봤다. 펼쳐진 검은 날개, 불그스름한 뿔, 희다 못해 투명한 피부와 새카만 머리칼, 그와 대비되는 새하얀 옷자락. 그야말로 이야기 속 마왕(魔王)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구원하고 싶었노라 말하는 모순된 외침을 발하며.
유중혁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이 그 언젠가의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눈앞에 선 새하얀 남자의 견고한 벽이 열리며, 대답이 흘러나올 그 순간.
김독자가 ‘격’을 끌어올렸다. 그에 맞서듯 유중혁 또한 금빛 기운을 그러모았다. 그리고, 두 개의 강력한 힘이 서로를 상쇄하듯 거세게 맞부딪쳤다.




폭풍이었다.
김독자는 까무룩 놓았던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사방이 조용했다. 고개를 들어 올릴 힘이 없어 눈만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정전 마당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이름 없는 것들’의 잔해와, 그 근처에 쓰러진 채 의식이 없는 듯한 사람들이 보였다.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 이설화, 신유승, 안나, 그리고 그가 데려온 ‘차라투스트라’의 일원들과 궁을 지키던 병사들……. 김독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가장 중요한 이의 생사를 확인해야 했다.
부러진 모양새의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앞을 쳐다봤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한 사내의 검은 신형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어렵사리 두 발로 선 김독자는 비틀거리며 저와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된 유중혁에게 다가갔다. 그는 눈을 뜨고 있었다. 새카만 눈동자에는 여전히 금빛이 어른거렸지만 공기를 따갑게 찌르던 기운은 사라진 채였다. 할 말을 잃은 듯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에 유중혁이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만 끝내라.”
그 말에 김독자는 울컥, 말을 뱉었다.
“또 자살하려는 거냐?”
“…….”
유중혁은 물끄러미 남자의 하얀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토록 읽었음에도 놈은 아직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이 우스웠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김독자라는 이를 잘 알지 못하므로.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는 전해져야만 한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홀린 듯 가까워진 상대의 멱살을 잡아채 제게 끌어당겼다. 쿵, 하고 이마가 부딪치며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김독자의 눈에 유중혁의 눈이 고스란히 비쳤다.
「유중혁은 생각했다. 나는 자살한 게 아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활자가 흘러들었다.
「‘미안하다. 나중에 꼭 제대로 끝맺어 줄게.’
마지막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은 결단코 환청이 아니었다. 그 목소리로 유중혁은 ‘작가’의 존재를 알아챘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생명줄처럼 쥐고 있던 검조차 놓쳐버릴 뻔할 만큼. 그런가. 나는, 이 세계는…… 버려진 건가. 눈앞이 흐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하지만.
버려졌다면 어떠한가?
애초에, 그것이 도대체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내는 단 한 번도 남에게 소유되었던 적이 없다. 그는 이곳에 홀로 오롯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저 너머에 ‘작가’라는 존재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는 버려진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저 목소리도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단초일 터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겠다는 맹세.
그는 살고 싶었다. 그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는 답이 없겠군.’
유중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잠식된 세계. 생명의 불씨가 모두 꺼진 이곳에서 무엇이 새로이 시작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나을 것이다.
유중혁은 그 방법을 알 것 같았다.」
“…….”
툭, 툭. 뜨끈한 무언가가 뺨으로 떨어져 내렸다. 겨울 공기에 금세 미지근해지는 감촉에 유중혁은 말없이 제 위에 무릎 꿇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희게 빛나는 부러진 검신을 제 머리 옆 바닥에 꽂고, 그것에 몸을 의지한 채 내려다보는 시선. 해와 달의 움직임은 이미 의미가 없었으나, 어느새 저물어버린 것인지 어둑한 하늘에는 별빛만 가득했다. 그 반짝임을 배경삼아 제게 그림자를 드리운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유중혁.”
떨림을 갈무리한 목소리에 유중혁은 눈을 깜빡이길 멈췄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냐. 오히려 그런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먼 사람이지.”
난 네게 한 번도 제대로 내 소개를 한 적이 없어. 속삭이듯 낮아진 목소리에 유중혁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내 이름은 김독자.”
이리저리 찢긴 채 금빛 잔재로 얼룩져 있던 날개가 사라졌다. 이마 위로 돋았던 뿔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스물여덟…… 아니,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됐고. 게임 회사의 직원이야. 취미는 소설 읽기…….”
그토록 저를 위해 모든 걸 버리면서도, 단 한 번도 내보인 적 없던 진실이.
“시시하지? 그냥, 이게 나야. ……유중혁, 너는 누구지?”
진심이 되어 흘러나왔다.
유중혁은 마치 사형선고를 기다리듯 입술을 감쳐무는 남자의 별처럼 빛나는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예정된 대답이 언어가 되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김독자는 눈을 떴다.
희미하게 코끝을 찌르는 약품 냄새. 병실 특유의 새하얀 천장과 커튼. 살짝 열린 창 너머로부터 불어오는 옅은 바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따뜻했다. 눈을 깜빡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흘끗 돌아본 팔에는 수액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줄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짝 몸을 일으켜 앉았다. 꿈조차 없이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탁탁탁탁. 닫힌 문 너머 누군가가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람의 기척. 이윽고 차라락 열린 커튼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둘 드러났다.
“…….”
김독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한수영과 유상아를 쳐다봤다. 오랜 시간 마주하지 못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느낌이 아니라 사실인지도 몰랐다. 삐빅. 미약한 소리를 내는 탁상 위 디지털시계가 2월 15일을 가리켰다.
“김독자!”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와락 끌어안겼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눈을 돌려 유상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하염없이 미소를 지었다. 비로소 안온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끝난 것이다. 전부. 김독자는 가는 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내렸다. 믿을 수 없게도 울먹이는 듯한 한수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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