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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月, 冬 : 三
동양풍 타임트립물(?)

김독자는 두 손을 가지런하게 모아 무릎 위에 올렸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흰 천의 감촉은 낯설었지만 한편으로는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주변에 둥글게 둘러앉은 이들을 차례대로 바라보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설명 부탁합니다.”
“……뭘요?”
정희원이 살풋 미간을 모으며 그렇게 되물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잔뜩 의심하는 눈초리다. 신유승과 이현성, 이지혜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긴 뭐야. 몰라서 묻는 건가.
“저를 죽음의 문턱에 두고 모두 한마음으로 나가 버리신 일 말입니다.”
살인 미수입니다, 이거. 반쯤 농담조로 덧붙이자(반은 진심이라는 소리다) 정희원은 아, 그거. 하는 표정이 되어선 이내 심드렁해졌다.
“죽음의 문턱은 무슨.”
“맞아, 아저씨. 우리는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준 거라니까?”
맞장구를 치며 거드는 이지혜를 김독자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넌 그때 내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걸 못 본 거냐.
“지혜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거기서 자리를 비켜 주면 내가 죽는 일 말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나겠냐?”
“……아저씨 예언자 맞아?”
“뭐?”
“아닌가? 그냥 바보인가?”
순간 제 발 저려서 움찔했지만 이지혜는 무언가 혼자서 납득하고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참, 화를 내자니 예언자란 걸 부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잖아. 이 녀석이 언제 이런 고도의 함정을 팔 줄 알게 됐지. 살며시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데 신유승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예언자님,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그렇지만 예언자님을 위험 속에 방치한 건 절대로 아니에요.”
큰 눈망울이 저를 바라보니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김독자는 얕은 한숨을 쉬며 손을 들어 가까운 자리에 앉은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절대로 아니라고까지 확신을 담아 말하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 실제로 신유승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긴 했다. 이 아이는 조금 전 저를 감싸며 유중혁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았던가. ‘세계관 최강자’일 그 유중혁에게. 하지만 유중혁이 저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라니, 도대체 그런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아저씨 진짜 바본가 봐…….”
“뭔 소리야.”
“진짜로 몰라서 묻는 거예요? 지금도 그렇게 새하얀 옷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 놓고선?”
정희원이 손가락으로 김독자가 입은 옷을 가리켰다. 비단처럼 부드럽고 고운 흰 천으로 만들어진 옷에는 겨울눈 속에 피어나는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흰 바탕에 어우러드는 백매(白梅)가 마치 눈처럼 가지 위에 드리우고, 그 틈새로 홍매(紅梅)가 겨울을 이겨내듯 고개를 내밀고 있는 자수. 설중매(雪中梅)였다.
“아니, 이건 그러니까…… 관행적인 겁니다.”
“뭔 관행이요.”
“……제가 이 나라에 찾아올 때마다 흰 옷을 입고 모두의 앞에 예언자로 나타나는 관행이…….”
정희원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사람이. 김독자는 억울하기 짝이 없었으나 실제로 유중혁이 저를 위해 또 흰 옷을 준비한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반박할 말이 궁했다. 사실 스스로도 의아한 구석이 있기는 한 참이었다. 유중혁 이 자식은 나를 예언자로 제대로 써먹을 것도 아니면서 매번 흰 옷을 내놔서 헷갈리게 만들고 난리냐.
김독자는 손을 들어 제 옷소매를 매만졌다. 도톰하고 매끄러운 자수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어째서 여전히 나에게 흰 옷을 입히는 걸까. 내가 예언자 같은 게 아님을 알면서도.
‘여길 떠나라. 네놈이 원래 있던 곳이든, 다른 세계든, 어디든 좋다.’
불현듯 그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다른 세계. 유중혁은 이곳이 아닌 다른 세계가 있을 가능성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투. 마치, 김독자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확신하기라도 하는 듯한…….
“결국은 지금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이현성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건넨 말에 김독자는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젠장. 그렇긴 하지.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한 그는 일단 눈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다른 설명을 부탁합니다.”
“이제야 본론을 꺼내 놓네요. 어떤 게 듣고 싶은데요?”
“현재 이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진지해진 김독자의 목소리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선수를 치기 전에 이번에는 김독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라고 모든 미래를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안나가 그렇듯이 정확하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일단 지금 성류국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아는 게 도움이 됩니다.”
지금까지 김독자의 예지력은 ‘독자’라는 신분이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그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부터의 예지력은 말하자면 빅데이터 분석이었다. ‘캐해석’과 ‘작가의 성향 파악’ 같은 것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정보가 필요했다. 가능한 한 많이.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에요.”
약간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을 연 정희원의 말을 받아 이현성이 답했다.
“‘이름 없는 것들’…… 아, 저희는 그 검은 존재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름 없는 것들’이 북쪽 국경 너머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게 불과 두 달 전입니다.”
“처음에는 피해가 크진 않았어. 그놈들 힘이 약하기도 했지만, 이런 사태를 미리 예지하고 북쪽에 자리를 잡은 방주군(方舟君)과 ‘차라투스트라’가 막아준 덕분에. 사부…… 아니, 전하가 겨울 대비를 제대로 하라고 말해준 것도 도움이 됐고.”
방주군은 안나의 군호(君號)다. 여전히 존대가 익숙지 않은 듯한 이지혜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는 것을 본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놈들의 양상이 달라졌어.”
“어떻게?”
“나타나는 위치가 제멋대로예요. 동물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도 예측할 수가 없어요.”
신유승의 얼굴에 고민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처음에는 북쪽에서 남하하길래 국경 너머에서 생겨나는 존재인가 싶었는데, 이제는 예고도 없이 수도 근처에서 불쑥 나타나요.”
“최근 수도 외곽에서는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북으로부터 내려온 게 아니라면 이동 경로가 없는 셈이니 그야말로 땅에서 솟았다고 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축지법이라도 쓰는 걸까요?”
“아직까지 수도 내에서 대규모 인명 피해는 없지만, 앞으로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무리 전하가 있다 해도 녀석들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을지…….”
김독자는 그 후로도 이어지는 그들의 근심 섞인 이야기를 모두 귀담아들었다. 사람을 삼켜버리는 공간의 뒤틀림이나, 낮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땅거미가 내려앉고 한밤중마냥 어둠이 덮치는 등의 시간 이상. 한겨울에 벚꽃이 피어났다가, 다시 그 위를 뒤덮는 혹한에 순식간에 얼어붙어 시들었다. 고작 두어 달 만에 세상의 이치는 흐트러졌고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손쓸 수 없는 재앙과 같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 범위 내의 사건들이기는 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모두 일어났던 일들이니까. 그나마 유중혁이 지난 5년간 치세를 이룩했기에 민심이 이만큼이나 잠잠한 것이다. 원작에서는 이계의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 불과 열흘 만에 온 나라가 뒤집어졌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계의 존재들’을 이 세계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는 그 근원을 없애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리부트되기 전 원래의 ‘멸살법’에는, 직접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으나 유중혁과 안나가 가진 초월적인 힘에 이끌려 이계의 것들이 찾아왔다는 뉘앙스가 묻어 있었다. 젠장, 유중혁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금빛 기운을 불길하게 묘사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쨌든 지금 중요한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독자인 자신도 이계의 존재들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문득 초조해졌다. 김독자는 이 일방적인 침략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고 있었다. 하늘을 날고 땅을 기는 것들이 온 천지를 새까맣게 뒤덮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지 않더라도, 해가 뜬 하늘을 온통 가려 빛을 삭힐 만큼 까마득히 많은 개체 수. 밀물처럼 밀려드는 검은 파도를 바라보며 선 유중혁은 생각했다. ‘이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나로 인해서.’
아니.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만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 이 세계는 사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자신은 그 작가와 십 년 이상을 알고 지냈다. 작가라는 녀석이 도대체 왜 이 리부트 작에서마저 이런 재앙을 등장시킨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 원인을 알아낸다면 결과도 해결할 수 있다.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으니까.
“……주변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김독자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생각만 하며 멈춰 있을 수는 없었다.



“왜 갑자기 여기로 온 거예요?”
내의원(內醫院) 건물 앞에 선 김독자는 짧게 혀를 차며 제 뒤를 줄줄이 따라온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원래는 혼자 올 생각이었는데, ‘이름 없는 것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며 위험하다는 이유로 모두가 그를 따라왔다. 애석하게도 아직(?) 평범한 인간인 김독자는 초월적인 존재와 몸으로 맞설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여럿이서 몰려 다니는 건 익숙치 않은데. 어쨌든 김독자는 들려온 질문에 답했다.
“의선을 만날 겁니다.”
“왜요?”
“이름 없는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봐야겠습니다.”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었지만, 그의 뒤에 선 사람들은 더 이상 물어봤자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으리란 것을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또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 하네……’ 같은 불평이 들려 왔지만 적당히 모른 척했다.
“실례합니다. 의선께선 안에 계십니까?”
문을 열고 들어서며 대뜸 묻자 마당을 비질하던 이가 퍼뜩 고개를 들어 그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김독자를 향하는 듯했다가, 그 뒤에 나란히 선 장황한 이들을 알아본 것인지 황급히 아래로 내려갔다.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의선을 불러오겠다며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며 김독자는 황망해했다. 아니, 저렇게까지 공손할 일인가?
“여러분……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생각해보니 대단한 사람들이 맞기는 했다. 왕의 직속 호위무사가 둘에 대장군이 둘. 매번 활자로 읽으며 우리 지혜가 어쩌구, 이현성이 어쩌구 생각하던 독자 입장에선 새삼스러웠지만 그들은 이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었다. 애초에 김독자는 신분제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더욱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 달랐다.
“아니, 우리가 대단한 게 아니라요.”
“……어떡하지? 아저씨 진짜 바보네…….”
“그게 무슨 소리야.”
“하…….”
도대체 이 반응은 뭐지? 다른 건 몰라도 이지혜에게 바보 취급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실눈을 뜨며 더 추궁하려는 찰나 뒤에서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독자 씨?”
김독자는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과 마주했다. 허리께까지 늘어진 흰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타난 이설화는 이전과 다름없이 침착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겨울처럼 청초한 미소가 붉은 입가에 어렸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예언자님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하하…… 그렇게 됐습니다.”
“여전히 비밀이 많으시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이설화 또한 김독자가 제 질문에 제대로 답해줄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바로 용건을 물어왔다. 거추장스러운 안부 인사 같은 걸 나눌 필요가 없어서 편하기는 했지만, 어쩐지 어렴풋하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는 이설화 뿐만 아니라 활자로 이루어진 모두를 향한 감정이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잠길 여유가 없다. 김독자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여기에 ‘이름 없는 것들’의 유해가 있습니까?”
이설화의 낯빛이 일순 변했다. 김독자의 뒤에 선 이들과 시선을 교환한 그가 살짝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있어요.”
“그걸 좀 보고 싶습니다.”
잠시 미간을 모으고 고민하던 이설화는 곧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김독자와 일행들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먼저 창고에 들른 그는 등불을 몇 개 꺼내 일행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리곤 쉿, 하며 입가에 검지를 올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등불은 예비용이에요. 혹시라도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면 켜세요. 이쪽으로.”
이설화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내의원 뒷문-보다는 개구멍에 가까워 보이는 출구-으로 모두를 데려갔다.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어쩐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걸어가는 사이 하늘에서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삽시간에 사위가 고요해져 저벅거리는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희게 쌓이기 시작하는 눈밭 너머로, 거무스름하게 뭉쳐진 물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갔지만 기껏해야 두세 개체가 뒤엉켜 있는 듯했다. 부정한 것을 가둬두듯 주변 나무 사이로는 금줄(禁绳)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금색 방울들이 이따금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걸음을 멈춘 이설화가 몸을 돌렸다.
“……저기에 있어요. 수가 많지는 않아요. 이미 움직이지 않게 된 것들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많이 모아두진 않았어요.”
현재 성류국에서는 이계의 것들을 베어 죽인 뒤 불에 태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여기기 어려우니, 베어 넘겨도 정말 죽은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완전히 불태워 없애면 되살아날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촉수처럼 철벅이며 움직이는 주제에 불에 태우면 재만 남아 사라졌으니까. 김독자는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앞을 향했다. 허리께까지 드리운 새끼줄을 손으로 걷어내며 안으로 진입했다.
그는 발치에 널브러진 검은 촉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들이 다시 깨어날까, 그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이계의 것들은 칼로 베면 죽었다. 생명의 이치를 따르지는 않으나 그것은 분명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쪼그려 앉아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봤다. 빛을 빨아들이는 새카만 먹물 같은 빛깔 때문인지, 마치 블랙홀처럼 양감이 없는 기이한 것을 향해 김독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독자 씨! 위험……”
이현성의 외침이 부질없게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독자는 그저 흰 손끝으로 그것들을 만지고 있었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한없이 하얀 남자가 한없이 까만 것을 어루만지듯 쓸어내리는 모습. 그 대비에 모두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지만, 정작 김독자는 손끝에 닿아오는 그것의 촉감에 몹시도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특별히 촉감을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읽은 것은 활자였으니까. 활자는 읽는 이에게 직접적인 오감을 제시하지 않는다. 김독자 또한 평범하게 ‘이름 없는 것들’의 시각적인 모양새나 소리만을 상상했을 뿐, 직접적으로 만졌을 때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제 손에 닿아오는 질감은 너무나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다지 매끄럽지는 않은 표면. 꾹 누르면 구김이 갈 것처럼 탄력적이지 못한 재질. 그리고 무엇보다도,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이 느낌은…….
그때였다. 겨울의 흐린 햇살을 받아 눈밭에 드리웠던 제 그림자가 빠르게 각도를 틀었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태양을 바라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해가 졌다. 붉은 노을이 눈밭을 물들이기도 잠시, 세상에 밤이 내려앉았다. 뒤편에 서 있던 일행들이 급히 등불을 켜자 간신히 시야가 밝아졌다.
“또 시간이…….”
“독자 씨, 일단 어서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의선께서도 얼른…….”
김독자와 이설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막 몸을 돌려 일행에게 걸어가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덮쳐오는 어떠한 거대하고 오싹한 기운에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분명 야트막한 야산 아니었나? 어째서 고도가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온 것처럼 호흡이 가빠지는 것일까. 헉, 헉. 순간 머리가 어찔해졌다. 김독자는 토하듯 숨을 뱉어내며 땅에 손을 짚었다. 시야가 명멸했다. 차가운 눈이 손아귀를 얼렸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지금 당장.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김독자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모두 피하──”
입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마치 산사태처럼 등 뒤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내리듯 덮쳐왔다.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김독자는 스물여덟 해 평생에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했다. 강렬하기 그지없는 예감이었다. 예언자도, 주인공도,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이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식상한 표현이지만 마치 주마등이 스치듯 시간이 죽 잡아 늘여졌다. 희미한 등불이 간신히 밝혀내는 시야에 함께 온 일행들의 모습이 스쳤다. 경악한 얼굴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가는 정희원, 제일 앞에서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이현성, 신유승을 감싸듯 껴안고 있는 이지혜, 이설화를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신유승, 김독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이설화.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대로 모두…… 죽을 것이다.
그 순간.
어둠을 가르고 섬전(閃電)이 내리꽂혔다.
김독자의 검은 눈동자가 커다랗게 열렸다. 춤을 추듯 아름다운 발도(拔刀)에 일렁이는 등불조차 걷어내지 못한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눈부시게 빛나며 세상을 밝힌 금빛 섬광은 새카만 칼날을 타고 불꽃처럼 흘렀다. 겨울바람을 맞으며 흩날리는 검은 소맷자락,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날카로운 안광.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순간을 무어라 더 표현해야 좋을지, 김독자는 알 수 없었다.
유중혁이었다.
태산보다도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등이 김독자의 앞을 막아섰다. 흰 눈밭 위에 선 새카만 사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다시금 검을 움직였다. 검은 칼끝이 움직이는 궤적마다 한기를 몰아내듯 뜨거운 금색 불길이 일렁였다. 지옥처럼 무덥고, 끔찍한 폭풍이 몰아치는 듯한 검술이었다. 겨울 한가운데에 여름을 몰고 온 사내 앞에 이내 거대한 ‘이계의 신격’이 무릎을 꿇었다.
생명을 잃고 이지러진 이름 모를 것은 더 이상 움직임이 없었다.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휘둘러 칼날에 묻은 진득한 액체를 털어냈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다시금 겨울의 냉기가 스몄다. 그제서야 김독자는 자신이 숨조차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중혁?”
간신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호흡을 내리누르며 김독자는 몸을 일으켰다. 굳어 있던 다리를 어렵사리 움직여 가까이 걸어가자 한 척(尺) 거리로 가까워진 유중혁의 몸에서 열기가 훅 끼쳤다. 김독자는 그 앞에서 드물게도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매를 꾹 늘렸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하지만 어쩐지 그런 말을 하기엔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친 데는 없냐고 묻기에는 너무나도 멀쩡해 보여서 의미가 없는 듯했다. 고개를 살짝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금빛 안광이 사라진 검은 눈동자는 마치, 먼 곳을 헤매는 것처럼 김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스럭. 침묵을 깬 것은 유중혁의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무언가 작은 것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 유중혁은 말보다 빠른 속도로 늘어뜨리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김독자가 더 빨랐다.
“잠깐.”
유중혁의 팔을 붙잡아 만류하며 김독자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다시금 대낮처럼 떠오른 해가 커다랗고 검은 ‘이계의 신격’을 비췄다. 마치 지형지물인 양, 삽시간에 거대한 유적이 되어버린 덩어리 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김독자는 몸을 낮춰 그 앞에 꿇어앉았다. 희미한 겨울 햇살 아래서, 식물의 덩굴처럼 가는 촉수가 꾸물거리며 뻗어 나왔다. 미약하게 움트는 새순 같은 움직임에 김독자는 가만히 손가락을 가까이했다.
“김독자.”
위험을 경고하듯 유중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김독자는 확신이 있었다. 살아 있는 ‘이것’과 접촉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검은 촉수가 손을 휘감았다.
“김독자!”
유중혁이 김독자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기며 흑천마도를 휘둘러 촉수를 잘라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김독자의 어깨에 손을 얹은 순간, 쩡 하고 머리가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먼저 그를 덮쳐 왔다.
【“죽기 싫어.”】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다고.”】
【“전하. 정말로, 이 재앙에 끝이 있습니까?”】
【“좀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원망하지 않아요. 그래도 딱 하나, 아쉬운 건…….”】
【“당신은 혼자 남을 거예요, 유중혁.”】
홍수가 난 것처럼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물밀듯이 몰아쳤다. 어찔해지는 정신에 일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린 탓에 김독자의 어깨로부터 손이 떨어졌다. 눈앞이 검었다. 대지를 뒤덮은 검은 덩어리들이 발에 밟히며 철벅이는 소리를 냈다. 손에 들린 흑천마도는 이계의 것들의 피를 머금고 더욱더 심연처럼 어두워져 갔다. 아니, 아니다. 붉었다. 사람의 피를 머금은 것이다. 정신이 흐려졌다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사부!”
유중혁은 저를 향해 달려와 황망한 표정으로 팔을 붙잡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지혜?”
울음이 터져 눈물로 얼룩진 얼굴 위로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유중혁은 눈을 깜빡였다.
“어째서 살아 있지?”
“……사부?”
이지혜가 당황한 듯 입을 벌리며 멍하니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두어 차례 더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이지혜의 얼굴 그대로였다. 눈물의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커다란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가 됐을 터인 몸도 멀쩡했다.
혼란에 빠진 듯한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이를 악물었다. 어깨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깨달음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기어이 몸을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멈춰선 안 됐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계에 오로지 자신뿐이다.
깨달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제게 몹시도 익숙한 촉감. 바스락거리는 소리. 불에 태우면 재만 남고 소실되는 것. 유중혁과 연결된 순간 머릿속을 메우던 활자의 향연.
‘이름 없는 것들’은 책이었다.
버려진 이야기였다.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지며 폐기된, ‘멸살법’이었다.
“유중혁.”
김독자는 그의 곁에 다가가 섰다. 천천히 손을 들어, 마치 야생동물처럼 기억의 혼란 속에 허덕이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그 위를 덮었다. 걱정 마라 유중혁. 남은 모든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그만 쉬어라.
스르르, 검은 신형이 무너졌다. 무거운 몸을 끌어안듯 부축한 김독자는 눈을 꾹 감으며 내뱉을 수 없는 한숨을 깊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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