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가 캄캄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별히 빛이 들지 않아 어둑한 환경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5층 높이의 오피스텔에 살며 굳이 창문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쳐놓고 잠들어본 적이 별로 없는 탓이다. 뭐지? 밖에 비라도 쏟아지는 새벽에 깬 걸까. 하지만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바닥에 손을 짚은 순간, 김독자는 곧장 원인을 알아차렸다.
새벽이 아니다. 비도 오지 않는다. 이곳은…… 야외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잠결에 어리둥절하기도 아주 잠시였다. 김독자는 빠르게 자신이 다시 ‘멸살법’ 세계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납득했다. 어떻게? 왜? 그런 의문은 여전히 따라왔지만 자신은 늘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겠지.
손바닥에 닿는 마른 수풀이 버석거리는 것을 느끼며 상체를 들어 올리자 천천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주변을 희미하게 인식했다.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아주 관리가 잘 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사람의 손은 어느 정도 탄 듯한 초록의 향연. 하지만 스멀스멀 몸을 타고 흐르는 한기에 김독자는 의아함을 느꼈다. 겨울, 그래. 겨울이었다. 자신이 ‘멸살법’ 세계에 들어올 때, 이곳은 늘 원래 살던 세계와 계절이 일치했다. 그렇다면 이곳도 겨울이라는 뜻인데, 어째서 초목이 이렇게 푸른 거지.
“일어났어요?”
경쾌한 목소리에 김독자는 흠칫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호리호리한 인영이 느긋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으로 무언가 무거워 보이는 것을 질질 끌고 온 여성은 그것을 한쪽으로 던져버리더니 김독자의 곁으로 다가와 훅하고 쪼그려 앉았다.
“……희원 씨?”
“어이구. 내 이름은 기억하는 모양이네요? 영광이네.”
씩 웃은 정희원은 어디 보자, 하며 김독자의 어깨를 붙잡고선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몸은 멀쩡해 보이네요. 다행히도.”
“……안 멀쩡할 이유가 있습니까?”
상황 파악을 위해 물음을 던지자 정희원이 둥근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농담이죠? 이런 외곽에서 혼자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면서.”
농담? 외곽? 무슨 소릴까. 김독자는 그에게 무언가 더 물으려다가 일단 말을 삼갔다. 이 사람은 내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모른다. 괜히 현재 이 나라나 주변의 상황을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티 나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가벼운 농담이나 던져봤습니다. 희원 씨도 괜찮아 보이네요.”
“아휴,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힘들어 죽겠구만.”
뚜둑거리며 팔을 푼 정희원이 흘긋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집어던진 검은 물체를 바라보았다. 이제사 해가 뜨기라도 하는 것인지 서서히 시야가 밝아졌고,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하는 그의 등 너머로 철벅거리며 내던져진 그 물체를 바라보곤 잠시 숨을 멈췄다.
나무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드는 아래에서도 그것은 새카맸다. 제대로 된 형체가 없고, 무언가 만들어지다 만 듯한 모양새의, 기묘한 것. 늪에서 방금 건져 올리기라도 한 것처럼 끈적하고 검은 물이 주변을 흐르고, 그로부터 생명의 기운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다. 이계의 것들.
김독자는 얼른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 않은가. 하지만 의외로 그것은 활자들이 그려냈던 묘사만큼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해의 범주를 벗어난 것들이란 느낌은 있었지만. 그리고 덕분에 김독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외곽’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구나.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습니까?”
“모르겠어요. 내가 발견한 건, 글쎄…… 반 시진쯤 되었으려나?”
바로 궁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저놈이 난동을 부리는 게 보여서. 급한 대로 옷이라도 덮어 주고 조지고 왔죠. 엄지손가락으로 시커먼 것을 가리킨 정희원이 씨익 웃었다. 김독자는 역시, 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제 몸 위에 덮여 있던 털옷을 집어 그에게 건넸다.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이걸로 두 번째군요.”
“아, 입고 있어요. 얼굴도 여전히 허연 게 가다가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저 멀쩡합니다만.”
억울한 마음에 항변해 보았지만 정희원은 들은 척도 않고 고개를 휘 젓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챙겨 입어요. 궁까지는 조금 걸어야 할 테니까.”
“……걸어간다고요? 외곽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
“?”
앞서가려던 정희원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의 어리둥절한 시선이 가운데서 맞물렸다. 뭐지? 이계의 것들이 나타나는 외곽이라길래 당연히 왕국 북쪽 끝자락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설마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건 아니죠?”
“……아니죠. 당연히 알죠.”
……아니었던 모양이다. 젠장. 식은땀이 한 줄기 등을 타고 흘렀다. 한기가 엄습해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어깨에 걸친 정희원의 털옷 앞섶을 여몄다. 그렇다면 설마, 수도의 외곽이었던 건가? 이계의 것들이 벌써 나타난 것도 모자라 거기까지 침입했다고? 연재 중이던 부분으로부터 얼마나 전개된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나 참. 당신 길치였군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침궁(寢宮)에서도 길을 잃었다고 했던가. 걱정 마세요. 이제부터 내가 잘 안내할 테니까요.”
……멋대로 오해해주는 걸 고마워해야 할지 억울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쉰 김독자는 일단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궁까지 걸어가는 길은 그다지 험하지는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서울 변두리의 마을처럼 보이는 곳에 들어섰고, 그 뒤로는 계속 사람의 손에 의해 다져진 길이 이어졌다. 다만 희한한 것은, 궁에 가까워질수록 추위가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원인은 대충 짐작이 갔지만……. 김독자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제 정체를 들키지 않으면서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얻어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까 제가 쓰러져 있던 곳…… 그 주변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던데, 어째서 사람들이 초목을 가꾼 흔적이 남아있던 겁니까?”
정희원의 얼굴에 옅게 어둠이 내려앉았다.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쪽이 더 따뜻하니까요.”
“예?”
“‘그것’들이 다가오는 쪽일수록 따뜻하다고요. 이상 기후예요. 본래는 1월이니 가장 추워야 할 계절인데도, 그것들의 영향을 받은 곳은 이상하게 따뜻하고 초목이 푸르러져요. 그러니까 겨울이라 먹을 게 궁해진 사람들이 자꾸 그쪽을 향해 갔다가 죽는 거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다면서.”
“…….”
“이상 기후뿐만이 아니에요. 그것들이 있는 곳에선 온갖 기이한 현상들이 발생하니까.”
전하가 말했던 혹한이라는 게 이런 의미일 줄은 몰랐는데. 투덜거리듯 걱정을 토로한 정희원이 제 옆구리에 매여 있는 검의 손잡이를 꾹 붙잡았다가 놓았다. 일종의 습관처럼 보이는 동작에 김독자는 새삼스럽게 그가 진짜 검과 함께하는 무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말이 없어진 정희원의 등을 따라가며 김독자는 현재 상황을 가만히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마지막으로 ‘멸살법’ 세계에 들어왔던 때로부터 5년이 흘렀다. 보아하니 바로 며칠 전까지 읽었던 ‘멸살법’의 최신화로부터 조금 지나서 이어지는 상황인 모양이었다. 이계로부터 온 존재들의 등장, 배경이 겨울이라는 점, 그리고 방금 정희원의 ‘전하가 말했던 혹한’이라는 말로 보아 확실했다. 살짝 세월의 흔적이 머물고 있는 그의 얼굴을 봐서도 그렇고(정희원이 들었다간 경을 칠 생각 같아서 입꼬리가 비싯 올라갔지만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
둘째, 이계의 존재들이 실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이 오는 곳에는 언제나 이상 현상이 발생한다. 이것은 수정되기 전의 ‘멸살법’에도 존재하던 설정인데, 아무래도 이 리부트 작에서도 유지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기존 ‘멸살법’을 읽었던 기억을 되짚으며 이상 현상들의 예시를 떠올렸다. 어떤 게 있었더라. 이상 기후, 역병, 괴생물체의 등장, 시간의 흐름 왜곡, 공간의 뒤틀림……. 이것저것 있으니, 일단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계속 예언자 행세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이 기현상의 해결 방법은 자신도 모른다는 거지만.
셋째, 아직 안나는 유중혁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한 모양이다. 새로 연재 중인 ‘멸살법’에서 안나는 아예 왕족이라는 위치조차 포기하고선 자신의 세력들을 이끌고 왕국의 북쪽 끝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위 계승권을 유중혁에게 넘겼다고는 하지만, 유중혁에게 자손이 없으니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다음 왕이 되는 건 안나일 텐데도.
그에 김독자는 내심 감탄했었다. 예전 안나가 보았던 미래에서 세상을 실제로 멸망시키는 것은 이계의 것들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영향을 받은 유중혁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제 말을 믿고, 유중혁을 감시하는 대신 이계의 것들이 찾아올 외곽을 수비하기 위한 변경백을 자처한 것이다(타국과 국경을 맞댄 게 아니니 변경백령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로는 이계와의 경계선이니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안나가 만일 유중혁을 치러 수도로 돌아왔다면 정희원이 이렇게 한가하게 수도 외곽이나 산책하고 있진 않았겠지. 그 말인즉슨 안나가 여전히 제 말을 믿어주고 있다는 뜻이다. 고맙게도.
“…….”
김독자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눈을 들어 정희원을 좇았다. 드높은 겨울 하늘만 보이던 그의 등 너머로 일순 궁의 그림자가 선연히 드러났다. 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었다.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지. 그 전에 생각을 더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알아낸 사실들과 더불어 의문점도 더해져만 갔으니까.
안나는 김독자의 말을 듣고 유중혁은 믿어 주었지만, 이계의 것들이 침범해올 것은 여전히 대비하고 있었다. 이는 최근의 ‘멸살법’ 전개에서도 언급되어 김독자도 알고 있었다. 낯선 것들이 이 세계를 방문하리라는 미래가 안나의 미래시에 포착되었고, 그렇기에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었던가.
사실 그 전개를 보며 김독자는 의아해했었다. 아니, 한수영 이 자식이 이제 유중혁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아갈 내용을 써줄 줄 알았더니 또 이걸 등장시킨다고? 이게 무슨 전개냐고 일종의 항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수영은 코웃음만 치며 제대로 된 답을 돌려주지 않았었다. 일단 지켜보라고나 말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멸살법’ 세계로 들어올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자세히 물어보는 건데 그랬다. 젠장.
김독자는 이계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애초에 ‘멸살법’에서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것은 그저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처럼 묘사되었고, 유중혁 또한 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내려 절망적인 결말을 맞이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에 대항할 적확한 방법 같은 건 독자인 제 손에도 없었다. 작가인 한수영에게는 그 대책이 있었을까? 확신하기 어려웠다. 한수영이 지나가는 말로 흘린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원래 즉흥적인 아이디어였어. 소설에 위기감을 주기 위해 즉석에서 구상한 장치. 처음에는 윤곽만 잡았다가 나중에 살을 붙인 거고. 그러다 얼마 안 있어서 완결로 가는 직행열차 표가 돼 버렸지. 무엇으로도 대항할 수 없는 장치로 포장되기엔 딱이었거든…….’
……요약하자면 그냥 노선을 틀어서 질러버렸단 얘기였다. 처음에는 돌파구를 생각해 뒀지만, 나중에는 그것마저 막아버렸다는. 한수영답지 않았다. 아니, 한수영다운 건가? 그는 즉석에서 떠오른 아이디어가 좋다고 여겨지면 제 소설에 채택하기를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하지만 타고난 작가의 심미안으로 제 소설에 좋을 아이디어와 나쁠 아이디어를 기가 막히게 구분해냈기 때문에 소설이 늘 재미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이계의 것들’은 과연 좋은 아이디어였을까 나쁜 아이디어였을까.
아직은 가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 한수영이 ‘멸살법’의 뒷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들어와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소설 속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기는 하다만. ……이쪽은 더 생각해봤자 정말로 답이 없었으므로 김독자는 빠르게 생각을 그만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바닥 닳아 없어지겠네.”
정희원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고개를 든 김독자는 대충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퍽 추운 겨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뭐, 봐줄게요. 당신이 이상했던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 것 같고.”
“이상하다뇨. 예언자일 뿐입니다.”
“얼씨구. 그래서 이렇게 나이도 안 먹으시나?”
5년 만인데도 전이랑 얼굴이 똑같은데. 그리 말하며 제 뺨을 쿡 찔러 보는 손길에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입을 조금 벌렸다. 하지만 정희원은 전혀 아랑곳 않고 웃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길을 독촉할 뿐이었다.
“얼른 가요. 다들 보고 싶어 했거든요. 유승이랑 지혜가 얼마나 컸는지 보면 깜짝 놀랄걸요.”
“……그렇겠군요.”
사실은 활자를 통해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빠르게 자랐고, 또한 훌륭하게 성장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 제가 뿌듯해질 만큼 대단하게. 얼른 만나보고 싶었다. 최근화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한 이미지들이 있었는데, 과연 실제와 얼마나 비슷할지 비교하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김독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중혁은……, 잘 지냅니까?”
“전하요?”
꽤나 불경한 태도로 반문한 정희원이 흐음, 하며 팔짱을 끼고 제 턱을 쓰다듬었다.
“뭐…… 잘 지내신다면 잘 지내시고 아니라면 아니시고.”
“무슨 대답이 그럽니까.”
“직접 보면 알 거예요.”
젠장, 역시 일단 얼굴을 맞대는 수밖에 없나. 김독자는 한숨을 쉬며 지금껏 겪었던 유중혁과의 세 번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등골이 서늘해졌다. 세 번 다 목에 칼이 들어왔었는데……. 시발, 이번에도 그러는 거 아냐? 유중혁이라는 놈의 성깔을 떠나서 작품의 클리셰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나?
“한수영…… 듣고 있으면 대답 좀 해 봐.”
부질없이 중얼거리자 정희원이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김독자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빗나가는 적이 없나.
“유중혁…… 우리 말로 하자.”
“닥쳐라.”
냉랭한 대답에 김독자는 속으로 제 목에 칼을 겨눈 이를 1800번쯤 욕하며 하하, 웃었다. 입꼬리만 웃을 뿐 눈은 웃을 수 없었지만……. 당연하지 않나?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그냥 소설 읽는 걸 조금 좋아하는 독자일 뿐인데? 갑자기 목에 진짜 칼이 들어오면? 당연히 못 웃을 수밖에 없지 않나? 아무리 이게 네 번째여도?
“중혁아. 이번에는 왜 화가 났냐. 내가 너무 늦어서 그래? 미안하다고 했잖아.”
“…….”
잘 벼려진 칼날로부터 넘실대는 안개가 턱 밑을 간지럽혔다(물론 전혀 간지럽지 않았다). 이놈의 칼은 가면 갈수록 업그레이드라도 되는 것인지 이제는 금빛 기운까지 넘실거리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하, 시발. 유중혁…….
“전하. 이, 일단 고정하시고…….”
유중혁을 말리려는 듯 용감하게 반 발짝 앞으로 나선 이현성의 머리 뒤에서 후광이 빛나는 듯했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고맙습니다, 현성 씨. 여기서 살아 나가면 꼭 은혜 갚겠습니다.
“납득이 안 가는 게 있으면 일단 죽이는 게 아니라 물어봐야죠!”
그래, 지혜야. 웬일로 말 잘한다.
“그래요! 다짜고짜 죽이기 전에 일단 묶어놓고 신문부터 하시라고요!”
아니…… 희원 씨, 그건 좀.
“전하……, 예언자님 죽이지 마세요…….”
……신유승의 물기 어린 목소리에 양심이 쿡쿡 찔려왔다. 어느덧 훌쩍 자란 아이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눈높이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저는 무슨 말을 했던가. 자신이 예언자이므로, 네가 수왕이 될 것이라 장담한다 했었지. 실제로 아이는 이제 어엿한 짐승들의 왕이 되어 있었으나, 어쨌든 자신이 예언자라는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할지라도. 얕게 목이 멨다. 그때, 아이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면…… 저도 안 참을 거예요.”
“………….”
신유승의 주먹에 서서히 고이는 검은 기운을 보고 잠시 목이 막혔던 게 쑥 내려갔다. 김독자는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유승아. 지금 그 발언은……? 하지만 정말 진심이었는지 신유승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유중혁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잠깐. 생각해보니…….
‘그렇지? 유승아. 유중혁 녀석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막아줄 거지?’
……안나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젠장. 제 업보였다. 김독자는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신유승은 진심이다. 그리고 유중혁이 고작 저런 협박 앞에서 눈이라도 깜빡할 위인이던가. 실제로 지금 신유승 쪽은 보지도 않고 자신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지 않나.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이 둘이 맞붙기라도 했다간 주변에 남아나는 것이 없을 터였다. 김독자가 일단 입을 열어 두 사람을 말리려던 찰나, 눈앞에 선 이의 입이 먼저 열렸다.
“전부 나가 있어라.”
얼음처럼 차가우면서, 동시에 불꽃처럼 거친 목소리였다.
김독자는 일순 숨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이마, 짙게 치켜 올라간 눈썹, 벼려진 칼날 같은 콧대, 단단한 턱선. 무슨 수식어를 가져다 붙여도 만족스럽지 못할 완벽한 조형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그 누가 묘사한다 해도 한 페이지를 빼곡히 서술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조각 같은 사내. 지난번 만남에도 완연한 사내의 얼굴을 하고 있다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던 듯싶었다. 전체적인 이목구비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이전보다 더욱 깊고 짙어진 눈매에 옅은 세월이 내려앉아 있었다.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가열차게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선연했다. 어렴풋이 금빛이 감도는 그 눈을 보며, 김독자는 새삼스럽게도 그가 이제 저와 동년배임을 실감했다.
스물여덟 살의 유중혁이 그곳에 있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다른 이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유중혁의 입이 한 번 더 열렸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지혜와 정희원이 자, 자, 저희는 나가 있읍시다, 하며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조금 전까지 힘을 모으고 있던 신유승마저 시선을 내리고 조용히 방을 나가는 것을 보며 김독자는 아연해했다. 아니, 싸움을 말리려던 내 각오는 어디로……? 물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위험은 없어져서 다행이었지만, 이제는 그 고래를 혼자 마주해야 할 상황에 처해 버리지 않았나.
장지문이 닫히는 것까지 바라보던 김독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변함없는 표정과 변함없이 제 목에 겨눠진 검은 칼날을 보며 김독자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됐다, 이제. 맘대로 해라.”
다른 사람들 시선도 없겠다. 김독자는 약간의 객기를 부려 제 뒤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칫하면 그대로 칼날에 쓸려 상처가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칼을 든 상대가 유중혁이 아닌가. 김독자는 그것을 믿었다. 당연하게도 그 칼날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제 턱 아래를 따라오며 한 점의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 뭐 언제는 네가 마음대로 안 한 적이 있느냐만…… 잠깐.”
……뭐 하냐? 김독자는 칼을 검집에 집어넣고 대신 제 멱살을 쥐어오는 유중혁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주먹으로 상대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런 의문은 완전히 부질없어졌다. 유중혁이 멱살을 쥐지 않은 손으로 김독자가 잠옷 대신 입고 있던 티셔츠를 걷어 올렸기 때문이다.
“……미쳤냐?”
어이가 없어 멈출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자식이 그새 돌아버렸나? 최신화까지는 멀쩡해 보였는데? 하지만 유중혁은 심각한 얼굴로 김독자의 드러난 맨살을 바라보더니 탁, 하고 멱살 쥔 손을 풀어주었다. 반동으로 뒤로 밀려나 의자에 안착한 김독자는 여전히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티셔츠를 탁탁 털며 설명해 보라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유중혁은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꺼내놓지 않았다.
“설명 안 할 거냐?”
“무엇을.”
“방금 뭐 한 거냐고.”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이 다시금 그의 티셔츠 아래를 꿰뚫어 보듯 눈길을 주었다. 대체 뭘 보는……. 그리고 한 발짝 늦게서야 김독자는 진상을 알아챘다.
유중혁은 방금 김독자의 허리께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마치, 그것이 신원확인이라도 된다는 양.
“……아직도 널 노리는 녀석들이 있어?”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은 잠시 뜸을 들이듯 제 입가를 매만졌다. 김독자는 김독자대로 숙연해졌다. 최근 ‘멸살법’에서는 암살 시도 같은 묘사가 전혀 없었는데. 역시 활자로 표시되지 않는 너머에서는 여전히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유중혁이 김독자의 생각을 끊어 냈다.
“한동안 잠잠했다. 다시 시작된 건 아주 최근이지.”
“……무슨 소리야?”
“네놈도 오면서 목격했을 텐데.”
“설마. ……‘그것’들이 사람의 모습을 모방한다고?”
유중혁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나타났을 땐 제대로 된 형체도 없고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상위 개체들이 등장하는 모양이더군. 그래봤자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기만 할 뿐, 제대로 된 언어는 구사하지 못하지만.”
‘멸살법’ 원작에서도 그런 묘사가 있었던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원작에서 이계의 것들은 그저 강대한 힘을 가진 무형의 무언가였을 뿐이다. 그럼 이건 리부트되면서 추가된 설정인가? 가면 갈수록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한수영은 이것들로 뭘 하려고 했단 말인가. 아니, 근데 잠깐.
“잠깐만…….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 그럼 날 의심할 필요도 없었잖아. 난 지금 겉모습도 완전히 멀쩡한 인간이고 말도 이렇게 멀쩡하게 하는데?”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유중혁은 그저 말도 못 하게 잘생긴 얼굴로 우수 어린 눈빛을 지었을 뿐이다. 김독자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 자식……. 진짜로 그냥 화풀이한 거였잖아!
“야. 유중혁. 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난 거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5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
감동의 재회는 못 할망정……. 중얼거리자니 맞은편 자리에 앉아 검집에서 칼을 반쯤 꺼내 천으로 닦던 유중혁이 흘긋 시선을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써컹, 하는 소리를 낼 것 같은 칼날의 번쩍임에 저도 모르게 눈가가 움찔 떨렸지만 김독자는 침착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내 유중혁이 다시 시선을 내려 검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방금 네놈 입으로 전부 말한 것 같군.”
“뭐. 5년 만에 다시 만났다는 거? 그게 뭐…….”
김독자는 미간을 좁히며 말을 멈췄다. 이 녀석, 말하는 뉘앙스가 뭔가 이상하지 않나? 5년이나 기다리게 해서 나한테 화가 났다는 말이라면, 그건 마치…… 재회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이놈은 그렇게 무르지 않다. 다시 못 만날 거라고 말하며 떠나 놓고선 왜 다시 나타나 귀찮게 하느냐는 의미겠지.
“여전히 환영받질 못하는구만…….”
씁쓸하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김독자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다시는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활자로조차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유중혁의 다음 이야기를, 그다음 페이지를 영영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마치 기적처럼 다시 시작된 ‘멸살법’에 이어서 이제는 다시 이 세계로 들어오기까지 하다니. 솔직한 심정으로 김독자는 지금 이 상황이 몹시 기꺼웠다. 그렇게까지 표정이 다양한 얼굴은 아니건만 그 기쁨의 일부가 밖으로 새나오듯 흰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어라 말하려던 유중혁은 그 미소를 보고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사위가 캄캄해졌다. 환하게 빛이 들던 창가에 순식간에 새카만 어둠이 드리웠다. 낮이라 등불 한 점 켜두지 않았던 방 안도 금세 어두워졌다. 김독자는 창밖을 확인하려는 심산으로 탁자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몸을 움직인 유중혁이 탁자 위의 초를 밝혔다. 한 줄기 불빛이 주변의 어둠을 걷어냈지만 창밖에 내려앉은 어둠은 마치 끈적거리는 액체처럼 뭉근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김독자는 아무 말 없이 창가로 걸어가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넓게 뚫린 창 바로 앞에 선 그는 잠시 너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창틀 위에 한 손을 얹은 채 김독자를 바라보는 유중혁의 뒤로, 어둠을 가르듯 금빛 번개가 내리쳤다.
“김독자.”
캄캄한 바탕에 샛노란 균열이 번졌다. 금이 가듯 깨져나가던 어둠 위로 다시금 칠흑처럼 검은 무언가가 덧씌워졌다. 그 무엇도 무용하다는 듯 거침없는 손속이었다.
김독자는 어둠을 역광처럼 두른 사내를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이 세계는 멸망할 거다.”
음울함조차 없이 무감한 목소리였다. 아침 식사로 무엇을 먹었는지 말하는 것만큼 여상한 목소리에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마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는 듯.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양.
“여길 떠나라. 네놈이 원래 있던 곳이든, 다른 세계든, 어디든 좋다.”
가능한 한 멀리.
낮게 읊조려지는 말을 들으며, 김독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