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멸살법’을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조용한 컴퓨터실을 밝히는 어슴푸레한 모니터의 불빛.
비좁은 화면 속에 꽃핀 까만 활자.
내 손으로 굴려 넘기던 부드러운 마우스 휠의 감촉.
김독자는 컴퓨터 같은 걸 마음대로 만지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때문에 학창시절의 그에게 있어 ‘멸살법’을 읽던 시간과 공간은 정해진 수업 시간표마냥 늘상 같았다. 모두가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과 매점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시간, 담당 선생님이 관리를 소홀히 한 덕분에 언제나 문단속이 되어 있지 않았던 컴퓨터실. 행여 복도로 불빛이 새어 나가, 어느 선생님이나 학생에게 발견되어 혼자만의 시간을 뺏길까봐 항상 불을 꺼둔 채로 김독자는 가장 구석진 자리의 컴퓨터 전원을 켰다. 오래된 컴퓨터의 본체가 위잉 소리를 내고 부팅까지 걸리는 몇 분간의 시간을 그는 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매일 저녁 7시 정각에 올라오는 ‘멸살법’ 또한 늘 그곳에 존재하는 오랜 약속처럼 김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따지자면 업로드 된 지 거의 22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보게 되는 셈이었지만, 김독자는 오롯이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시간을 쓸 수 있는 이 순간에 그 약속을 만나러 오고 싶었다.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마냥 설레는 마음을 안고.
순식간에 한 화를 다 읽고, 느리게 다시 한번 더 읽고, 그 여운을 곱씹고 나면 반쯤 열린 커튼 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그를 맞이했다. 학교 정문 앞에 우뚝 솟은 가로등은 여름엔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래. 딱 이 즈음…… 한겨울에는 이미 어둠이 내린 거리를 둥그렇게 밝혀내곤 했었다.
김독자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하나, 작은 책상 하나, 옷장 하나가 놓인 단출한 방의 창 너머로 가로등이 깜빡거렸다. 조금 전 곱씹은 ‘멸살법’의 최신화 덕분에 오랜만에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다. 십 년 이상이 흘렀음에도,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임에도 가로등은 그때와 똑같이 어두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들이닥쳐 옷소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한파가 가장 기승을 부리는 1월의 어느 날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눈동자 위로 이계의 색을 담은 듯한 금빛이 아른거렸다. 까마득히 먼 너머로부터 몰려오는 차갑고 불길한 것들의 기운이었다.
“혹한을 대비해라. 이번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도 추울 것이다.”
무감한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김독자는 며칠 전에 연재된 ‘멸살법’ 최신화의 마지막 파트를 상기하며 생각에 잠겼다. 한수영이 ‘멸살법’ 책을 찾았다며 너덜너덜하게 낡은 노트를 보여줬던 것이 불과 석 달 전이었다.
“……이게 ‘멸살법’이라고?”
“응.”
“장난칠 기분 아니야, 한수영.”
“씨, 나야말로 장난칠 기분 아니거든?”
됐고, 일단 봐봐. 그렇게 말하며 제 손에 억지로 두꺼운 노트를 떠넘기기에 김독자는 못마땅한 심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도대체가 이해할 수가 없다. 인터넷 소설인 ‘멸살법’의 실물 책이 있다는 건 또 뭐고, 이 손때 묻은 낡은 노트는 또…….
첫 장을 펼친 김독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이제 몇 개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평생 잊을 수 없을 문장들이었다. ‘멸살법’의 마지막을 닫던 글자들.
“……뭐야?”
몇 장을 더 넘기며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세월에 빛바랜 노르스름한 종이, 샤프펜슬로 꾹꾹 눌러 쓴 익숙한 필체. 이 노트의 주인은 틀림없이 한수영이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글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았는지 이따금 지우개로 잔뜩 지워낸 자국들과 가로로 죽죽 그어버린 줄들이 보였고, 간혹 과감하게 몇 장씩 뜯어낸 흔적도 있었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가 비스듬히 접힌 페이지도 자주 눈에 띄었다. 김독자가 익히 알고 있는 한수영의 습관들이었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페이지 위로 하나의 세계가 펼쳐졌다가 저물어갔다.
자신이 기억하던 그대로의 ‘멸살법’이 거기에 있었다.
김독자는 느리게 고개를 돌려 한수영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중 무엇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아랫입술을 깨물던 한수영이 이내 결심한 듯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너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 많이 늦었지만.”
“…….”
할 말이 있다고? 이제 와서? ‘멸살법’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린가? 손안에서 애매하게 떠도는 퍼즐이 맞춰질 듯 말 듯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손으로 주욱 잡아 늘인 것처럼 시간이 늘어졌다. 결단을 내린 후엔 망설임 없이 열리곤 하는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김독자는 두려웠다.
“‘멸살법’의 작가는 사실……”
──나야.
그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뭐?”
한수영은 잇새를 꾹 물며 멍청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하얀 남자의 표정을 살폈다. 곁에 서 있던 유상아의 눈동자도 휘둥그렇게 커지는 것이 보였다. 언젠가는 얘기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은, 그 시절에 언제라도 이야기하려 했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의 봄, 한수영은 이수경과 처음 만났다.
중학교 3학년생이 되어 반 배정을 받아 들어간 교실에는 그 녀석이 앉아 있었다. 희멀건 얼굴, 마른 몸, 뺨에 붙은 커다란 반창고. 특별히 이상하다거나 신기하다는 첫인상이랄 것은 없었다. 어디 만화나 소설 같은 데에 나올 법한 그린 듯한 이미지의 남학생을 보면서도 한수영은 ‘다음 전개에 이런 느낌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그런 작가의 직업병 같은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남학생은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새 학기 첫날의 시끄러운 소음 사이에서도 그는 외딴섬처럼 혼자였다. 어쩐지 선생님들조차도 그를 부르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그런 점마저 그야말로 소설 속 등장인물 같았기에, 한수영은 요즘 연재 중인 소설의 다음 전개를 알려달라 아우성치는 시끄러운 녀석들 사이에서 레몬 사탕이나 쪽쪽 빨며 슬쩍 그를 지켜보았다. 실감 나는 캐릭터 메이킹을 위해선 관찰이 필수니까.
그 남학생의 이름이 ‘김독자’라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날 오후였다.
“김독자? 이상한 이름이네.”
“수영아. 다른 사람 이름을 가지고 그런 소릴 하면 어떡해.”
“아니,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하지 그럼 뭐라 해? 유상아 니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지 않냐?”
“흔한 이름은 아니지. 그래도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이름일 거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얼굴에 한수영은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고작 중학생 주제에 벌써 생불(生佛) 같은 이 녀석에게 더 이상 말해서 무엇 하랴. 하지만 확실히 기억에 남는 이름이기는 했다. 독자, 김독자라. 성씨가 흔해 빠져서 더 이상한 이름이 됐잖아. 한자는 뭘 쓰지? 설마 독자(讀者)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혼자 피식 웃자 유상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아마도 대충 그런 식으로 시작된 관계였다. 관찰하다 보니 신경이 쓰였고,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학생을 내버려 두지 못하는 유상아에게 끌려가서 말을 걸었고, 어쩌다 보니까 친구 비슷한 게 됐고…… 시발. 그랬었지.
유명 인사들이 많이들 그러하듯, 김독자 또한 막상 친해지고 보니 눈에 띄게 이상한 별종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한 쪽에 가까웠다면 가까웠지. 그는 지금껏 제법 모진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의외로 주변 일들에 무덤덤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과거를 붙들고 늘어졌을까.
구태여 말을 꺼내 물어보지는 않았으나-사실, 한수영은 몇 번인가 그 뉴스 기사들이 전부 사실이냐고 물으려 했지만 매번 유상아에게 제지당했다-김독자의 과거에 대해서는 두 사람 모두 알음알음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저 유상아는 그런 것에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으며, 한수영은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쓸 만큼 소인배가 아니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 이번 주 토요일에 어머니 면회 가.”
“……응?”
이수경이 진짜 자신의 남편을 살해했든 아니든 아무래도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김독자가 먼저 그리 말을 꺼냈을 때는 천하의 한수영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가족을 만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범죄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이수경은 자신의 남편을 죽인 여자였고, 또한 몇 달간 아들의 입에 한 번도 오르내린 적이 없는 어머니였다.
너희도 같이 갈래? 그 말에 유상아와 한수영은 홀린 듯 김독자와 함께 교도소로 향했다.
난생처음 가보는 교도소였다. 언젠가는 꼭 가서 소설에 쓸 자료를 얻어 와야지, 그런 생각은 늘상 하고 있었지만 그 기회가 이렇게까지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제 친구인 김독자를 생각하면 마냥 좋아할 일로 여겨선 안 된다는 도덕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소풍 전날처럼 들뜨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한수영은 회색 담장을 넘으며 감히 탈출할 수 없을 그 높이를 가늠했고, 지루한 면회 절차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그렇게 젯밥에 더 눈독을 들이던 한수영의 앞에 이수경이 나타났다.
“독자 친구들이니? 반갑구나.”
상상 이상으로 평범한 인사였다. 어조는 무난했고, 표정도 담담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기묘했다. 아니, 아니다. 기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김독자 때문이다.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이수경과 마주 앉은 김독자는 이수경의 안부 인사에도 입을 다문 채 영 말이 없었다. 도저히 오랜만에 제 어머니를 만난 아들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그렇겠지. 이 둘은 평범한 모자 관계가 아니니까. 빠르게 납득한 한수영은 김독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왜 아무 말도 안 해?”
“……별로, 할 말이 생각 안 나서.”
“허.”
이 자식 봐라. 평범한가 싶었더니 역시 아니었잖아. 곁에 선 유상아는 김독자가 자신들을 소개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한수영은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아줌마. 저는 김독자 친구 한수영이라고 하는데요.”
“수영아, 너……!”
대뜸 말을 꺼내자 유상아가 황급히 말렸지만 한수영은 발을 뺄 생각이 없었다.
“아줌마, 진짜로 남편 죽였어요?”
치기 어린 도발이었다.
면회실 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상아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고, 아마 김독자도 말은 없었지만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수경의 뒤편에 서 있던 교도관조차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하지만 한수영은 이수경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예민한 감각으로 곧바로 알아챘다.
이 자리에서, 오직 나와 이 사람만이 당황하지 않고 있다.
순식간에 호기심이 치밀었다. 또한 동시에 은근한 전율 비슷한 것이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어쩌면 동류를 만났을 때 느끼는 찌릿한 감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한 발짝 늦게 찾아오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데 이수경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래. 내가 그랬어.”
그때 그런 대답을 예상했었던가, 아니었던가. 이제는 기억이 희미하다. 하지만 이수경과의 첫 만남은 한수영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 뒤로 한수영은 김독자 없이 혼자서도 종종 이수경을 찾아갔다. 딱히 숨기려고 한 것도 아니라서 김독자도 유상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두터운 유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가들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까지 알지는 못했다.
“……라고 써보려고 해. 어떤 것 같아?”
“거기서는 더 위기감을 조성해 보는 게 어떠니?”
한수영은, 새로 연재할 예정인 소설의 얼개를 이수경과 함께 짜나가고 있었다. 사실 예정에는 없던 일이었다. 다만 이전에 쓰던 소설이 얼추 완결에 가까워졌고, 차기작을 생각하던 와중 김독자가 소설 읽기를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 녀석, 읽는 게 삶의 낙이라고 했었지. 많이 읽었으면 보는 눈도 꽤 높을 것 같은데. 그 녀석이 재밌게 읽을 만한 소설을 하나 쓰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구성하기 시작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교도소의 차가운 돌벽 속에서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탄생했다. 대부분은 한수영의 아이디어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수경이 건네는 피 같은 조언들이 이야기에 살을 더했다. 본의 아니게 김독자를 저격해서 쓴 소설이 되긴 했으나 일단 자신이 보기엔 평범하게 재밌기도 했으니 괜찮은 것 같았다.
그해 겨울, 한수영은 전반부의 초고가 담긴 노트를 들고 학교에 가려다가 손을 멈췄다. 아직 유상아와 김독자에게는 자신의 차기작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작가는 자고로 비밀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당분간 계속 비밀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기존 작품으로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명을 버리고 아예 다른 필명으로 글을 올려보면 어떨까 하는 도전 의식도 생겼고, 무엇보다 김독자가 자신이 썼다는 사실을 모르고 이 소설에 푹 빠졌으면 싶었다. 객관적인 독자로서의 의견이 궁금했으니까. 뭐, 그 녀석이 다음 편이 기대된다고 말하면 좀 기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쓰기 시작했던 거야. ‘멸살법’은.”
그날과 같은 침묵이 방 안에 고요히 울려 퍼졌다. 입을 다문 김독자는 오랜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낯설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유상아를 바라보자, 이미 저를 보고 있었던 탓에 눈이 딱 마주쳤다. 의외로 그는 몹시도 담담한 기색이었다. 올곧은 시선 아래 가지런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괜찮아, 수영아.’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입모양으로 말을 건넨 유상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 유상아. 너는 진짜……. 제게 마지막 한 조각의 망설임이 남아 있었음을 눈치챈 것일까. 한수영은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고맙다. 이제는 모두 당당히 얘기할 수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멸살법’의 작가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침묵을 가르고 김독자가 말했다. 한수영은 그를 향해 돌아섰다.
“알아.”
“…….”
“왜 완결을 그렇게 냈냐고…… 그걸 묻고 싶은 거지?”
무언의 긍정이 돌아왔다. 한수영은 얕게 심호흡하고 목소리를 냈다.
“김독자. ‘멸살법’은 네가 봐줬으면 해서 쓴 소설이었어.”
“……그래서?”
“그런데 네가 그랬잖아. 그런 소설은 더는 읽기 싫다고. ……전부 엉망진창으로 끝나버렸으면 좋겠다고.”
김독자의 눈가에 희미한 절망과 후회가 스쳤다. 한수영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늦었으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마. 뭐,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어렸으니까 좀 상처받긴 했지만……. 벌써 십 년 가까이 된 얘기고.”
“…….”
“애초에 나한테 실망해서 한 소리가 아닌 것도 알아. 너는 ‘멸살법’의 작가가 네 어머니인 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부탁한 거야. 그렇게 말을 맞춰 달라고.”
잠깐만 비밀로 해 두려던 것이 너무 길어져 버렸다. 제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가, 자신이 작가인 줄도 모르고 신나게 감상을 떠드는 것을 지켜보는 게 이렇게나 재밌는 일인 줄 몰랐었다. 그러다 보니 거짓말로까지 흘러가 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수경에게도 못 할 짓이었다. 김독자와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렇게까지 격한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아마, 김독자도 어렴풋이 이해할 것이라고 느꼈다.
“아무튼…… 나도 그땐 어렸고, 내 이야기를 가장 좋아해 주던 독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좀 쫄았지. 그래서 그렇게 끝내버린 거야.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가기가 무서워서.”
“…….”
“과정이 어떻게 됐든 그건 내 실책이야.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욕할 거면 해도 돼.”
후우, 긴 숨을 내뱉고, 한수영은 김독자의 말을 기다렸다. 정말로 화를 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야기를 책임질 의무가 있는 존재니까. 독자가 버린 이야기라도,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지라도 제대로 된 끝을 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걸 알고 있다.
각오했다고 생각했지만 수 초가 영겁처럼 느껴지는 기다림이었다. 초조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 숙인 그를 바라보는데, 드디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수영.”
“……어.”
“욕은 안 한다.”
고개가 들어 올려지고, 드러난 하얀 얼굴 위에 익숙하게 얄미운 미소가 그려졌다.
“대신, ‘멸살법’은 제대로 끝내라. 작가인 너라면 할 수 있겠지?”
그 말에, 한수영은 저도 모르게 만면에 자신만만한 웃음을 띄웠다. 김독자는 한수영에게 있어 언제나 최고의 독자였다. 그러니까 이제, 드디어 이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 기회가 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 미치겠네.”
글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았다. 슬럼프인가? 너무 오랜만에 뒷이야기를 이어 쓰려고 해서 그런가? 그때의 감각을 잃어버린 건가? 김독자는 ‘멸살법’ 세계에 다녀온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주었고, 한수영은 그 뒷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당당히 선언했지만 현실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유중혁도, 이현성도, 이지혜도, 이설화도, 신유승도, 정희원도, 안나도, 모두 자신이 구상하고 만들어 냈던 캐릭터임이 분명한데도. 왜지? 어째서? 몇 주간 이리저리 돌며 방황한 끝에 한수영은 결국 답을 찾아냈다.
이야기가 달라졌다. 자신이 쓰던 때와는.
당연했다. 이제 ‘멸살법’은 오롯이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독자’였던 김독자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지침을 돌려놓은 작품이 되어 있었으니까.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한수영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마음대로 움직이게 두면 된다.
그렇게 새로 시작된 ‘멸살법’ 리부트였다.
김독자는 흘끔 시계를 쳐다봤다. 새벽 1시 22분. 친구에게 전화를 걸기엔 다분히 늦은 시간이었지만 상대가 한수영이라면 다르다. 그가 절대로 자고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한 김독자는 스마트폰을 들어 연락처 앱을 켰다.
뚜르르. 뚜르르르. 몇 초간의 신호음 뒤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갑자기 웬 전화?”
“한수영. ‘멸살법’ 최신화 왜 안 올려?”
“……이 자식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내네?”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자칭 천재 미소녀 작가님께서 며칠이나 글을 안 올리니까 이상해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지금 다음 편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데……”
“자칭 소리는 빼라.”
하아, 수화기 너머로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대충 예상은 했다. 학창 시절에도 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에 글을 올리던, 타고나길 작가인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며칠이나 글을 올리지 않는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가능하면 독촉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부 정도는 물어야 좋을까 싶어서 건 전화였는데 괜히 했나 싶었다.
“문제가 있다.”
“그렇겠지. 뭔데?”
“……애들이 안 움직여.”
……뭔 소리야? 잠시 어리둥절해진 김독자가 미간을 좁히는 사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한수영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글을 쓰려면 애들이 움직여줘야 되는데 안 움직인다고! 아, 억지로 움직이려고 해도 뒤지게 말 안 들었는데 이제 직접 움직이지도 않네. 이거 뭘 어떻게 해야 하냐? 내가 진짜, 10년 넘게 글 쓰면서 이런 적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듯싶었다. 이거 참…….
“왜 안 움직인다는 거야? 읽는 나도 다음에 어떻게 될지 대충 예상이 가는데 작가인 네가 왜 그게 안 되는데.”
“……예상이 된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다음 전개가?”
“어. 한 5년 정도 태평치세였잖아. 이제 슬슬 다시 그 이계의 것들 나올 차례 아니야? 그래서 추운 겨울이 될 거라고 한 거 아니고?”
“…….”
한수영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김독자가 적당히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한수영이 중얼대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래도 안 돼. 뭔가 빠졌어. 안 움직인다고…….”
……이 자식 심각한데. 속으로 혀를 찬 김독자는 야, 고민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그리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나도 내일 출근하려면 얼른 자야지…… 시발. 그렇게 욕을 하면서 베개에 머리를 묻고…….
……반짝 눈을 떴을 때는, 믿을 수 없게도.
다시 ‘멸살법’ 세계 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