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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月, 秋 : 二
동양풍 타임트립물(?)

유중혁은 어둠에 잠긴 침소 안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빛이라곤 문 너머에서 이따금 점멸하는 화등이 고작인 캄캄한 공간에서 무엇도 제대로 보일 리가 없건만, 그는 주변의 정경을 대낮처럼 환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눈꺼풀의 깜빡임을 따라 금빛 안광이 점점이 사라졌다가 드러났다.
그의 신체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다. 그리된 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덕분에 유중혁은 보통 사람들처럼 매일 일정량의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이들이 잠들어 있을 이런 시간에도 깨어 있는 채로 다음 날과 그다음 날, 그리고 먼 미래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유중혁은 언제나처럼 단단한 돌바닥 위에서 정좌한 자세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호흡이 멈춘 것일까 저어될 정도로 어깨와 가슴의 들썩임까지 멈춰버린 곧은 자세였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 며칠간 그의 심야 명상은 희끄무레한 남자의 얼굴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얼굴. 정확히는 조금 살이 내려 마릇해지기는 했으나 그 얼굴 어디에도 세월의 흔적은 없었다. 그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디 그것뿐이랴. 김독자(金獨子)라는 기묘한 이름자 하며 도무지 출생을 알 수 없는 가족 내력, 예언자가 아닌 것이 틀림없음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유중혁 자신보다도 한 수 더 앞을 읽어내는 신묘한 시야, 그리고 제멋대로 몸을 사라지게 하는 능력까지. 무릇 김독자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유중혁에게는 불가사의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은, 그런 놈을 신뢰하는 자신이겠지.
잘 마른 자기(瓷器) 같던 단정한 미간에 찰나 주름이 패였다. 김독자. 그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 유중혁은 복잡한 감상에 시달렸다. 유중혁은 그를 처음 만난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가 익히 아는 정경 위에 누군가 서툴게 덧씌운 그림처럼 서 있던 남자. 그는 마치 이 세상에 속한 이가 아닌 것처럼 풍광 속에 부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리고 그를 본 순간, 유중혁은, 이제껏 경험해본 적 없는 거대한 예감을 느꼈다. 그것은 무어라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직감이었고, 예지였고, 또한 기시감이었다.
낯선 감각이었다. 때문에 그를 경계했다. 쉬이 틈을 내어주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김독자라는 녀석의 태도는 몹시도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마치, 아주 잘 아는 이를 대하듯 스스럼없는 표정과 말투. 바라는 것도 없이 무언가 내어주려고만 하는 행동들. 그에게 피와 살이 되는 조언-비록 신탁처럼 짧고 불분명한 말들에 지나지 않았지만-을 아끼지 않더니, 저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이 목숨까지 대신 내던지던 뒷모습…….
유중혁은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기에 어느새 놈을 믿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믿어도 좋은 동료라고 인정하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젯밤 김독자와 만나서 나눴던 대화를 다시금 곱씹었다. 며칠 전 홀연히 전쟁터 틈바구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놈은 기운을 차리자마자 이전과 다름없이 알랑거리는 입꼬리로 웃으며 유중혁을 깜짝 놀라게 할 말들을 꺼내놓았다.
‘왕세자의 진짜 목표를 알고 있어. 그리고 난 그걸 이루어 줄 수 있다, 중혁아.’
왕세자 안나의 진짜 목표? 그것이 무엇이냐 물었으나 김독자는 쉽사리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비밀이 많은 자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저를 믿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걸 해결하면 안나도 더는 너를 공격하지 않을 거야.’
‘내가 네놈의 뭘 믿고 그런 소리를 들어줘야 하지?’
‘그럼 안 들어줄 거냐?’
‘……제대로 된 계획을 말해라, 김독자. 네놈에게 협조할지 말지는 듣고 나서 정하겠다.’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서운하게. 형이 다 생각이 있다. 때가 되면 전부 말해줄 테니까 일단 내가 하자는 대로 해봐.’
하, 유중혁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중혁아’부터 ‘형’까지, 감히 저를 향해 선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호칭이야 이제 놀랄 거리도 못 되었다. 그저 제대로 된 계획을 설명하지도 않고 밀어붙여 저를 끌고 가려는 행태가 황당할 뿐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유중혁은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김독자의 능력만큼은 신뢰했다. 놈은 대체 무슨 수로 알아내는 것인지는 몰라도 왕세자파의 내부 사정은 물론이요, 유중혁의 측근들밖에 모를 기밀까지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믿을 수밖에.
유중혁은 문득, 지난해 찾아뵈었던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파천검성은 그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조금이나마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유중혁은 그에게 김독자라는 이에 대해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연기를 피워올리며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듣던 스승은 손에 든 곰방대를 까딱이며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만면에 띄웠다.
‘중혁아, 그놈은 네게 귀인(貴人)이다.’
‘……예?’
‘머리로 판단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본능을 믿어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런 놈과 만났으니 나도 마음이 조금 놓이는구나, 그런 말도 덧붙였던가. 그리고 그것이 스승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파천문을 정식으로 계승하게 된 유중혁은 직감적으로 그가 오래도록 자리 잡았던 산줄기를 떠나 더 먼 초야로 갈 것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예견된 이별이었고, 때문에 크게 상심하지는 않았으나 굳이 찾아내어 눌러보면 아린 흉터는 있기 마련이었다.
문득,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유중혁은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침착하게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기척에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눈에서 황금빛 불길이 일렁였다가 꺼졌다.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군. 문을 지키고 있을 병사들을 통과한 것을 보니 아주 낯선 놈이나 자객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제가 있는 침소로 가까워지는 발소리는 없었다. 길이라도 잃은 건지 아직도 가까워지기는커녕 텅 빈 방들 근처만 뒤지고 있는 놈…….
유중혁은 쯧, 하고 혀를 차고선 몸을 일으켰다. 예전에도 길을 잘 찾지 못하는 것 같더니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 놈이 어떻게 팔문금쇄진은 기가 막히게도 통과해서 흑천마도를 구해온 건지. 유중혁은 무의식중에 허리춤에 매달린 새카만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침소를 나섰다. 침입자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장지문을 벌컥 열며 모습을 드러내자 홱 뒤를 돌아보며 소매춤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던 김독자가 우뚝 멈춰 섰다.
눈이 마주치고 짧은 침묵이 둘 사이의 어둠을 가로지를 동안 유중혁은 가볍게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흰 옷은 주목받아서 싫다느니 어쩐다느니 투덜대면서도 밖으로 나올 때면 꼭 입고 다니는 것이, 적어도 그 옷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놈이라 다행이지 싶었다. 소매춤으로 손을 뻗은 것은 제가 넣어둔 장도를 꺼내려던 것이겠지. 종잇장처럼 팔랑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양새가 영 시원찮기는 하지만 역시 안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종종 저보다도 뛰어난 구석을 보이는 놈이지 않던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유중혁은 흠칫 놀라 내달리는 사고를 멈췄다. 애초에 이놈 걱정을 왜 한단 말인가.
“안 자고 있었네.”
금세 옅은 호선을 그린 입에서 나긋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중혁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빤히 김독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잠을 잘 자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 놈이었다. 인사치레치고는 무의미하군.
“이미 알고 있으면서 뻔한 소리는 하지 마라.”
“그렇긴 하다만.”
“이런 시간에 왜 왔지? 제대로 침소로 찾아오지도 못할 거면서.”
그리 말했더니 갑자기 흠칫 어깨를 떨며 눈을 커다랗게 뜬 김독자가 유중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체온이 뺨과 입가를 덮어 누르는 감각이 생경했다. 유중혁은 어이가 없어 김독자를 멀거니 내려다봤다. 충분히 피하거나 막을 수도 있었지만, 황당해서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침소로 찾아간다니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
도대체 이놈의 둥근 머리통엔 뭐가 들었는지. 뭘 어떻게 꼬아 들으면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누가 들을까 겁나기라도 한다는 듯 소리를 죽여 말하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헛소리는 작작 해둬라.”
한 손에 쥐어 잡히는 손목을 붙잡고 떼어내며 말하자 김독자는 금세 빙긋 웃는 얼굴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어디 좀 앉자. 여기서 대화하긴 좀 그렇잖냐.”
“용건부터 말해라.”
“아니,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너 어차피 안 잘 거잖아.”
그냥 얘기나 좀 하자, 라……. 이번에는 또 무슨 생각일까. 유중혁은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침소로 돌아와 문을 열고 고갯짓하자 김독자가 미간을 살짝 좁혔다.
“너…… 나 놀리는 거지.”
“뭐가 말이지?”
“왜 굳이 일부러 침소로 오냐고. 이 대궐 같은 궁에 너랑 나랑 대화를 나눌 장소가 여기밖에 없어?”
“싫으면 가라.”
부러 가차 없이 말하자 김독자가 입 속으로 무언가 구시렁거리며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섰다. 유감스럽게도 이미 인간의 청력을 한참 뛰어넘은 유중혁에게는 그것이 제 욕이라는 것이 뻔히 들렸지만, 적당히 골탕 먹여 줬으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문을 닫고선 작은 화등을 켜 어둡던 침소를 희미하게 밝혔다. 한쪽에 놓인 둥근 탁자에 앉자 화등 불빛에 의지해 내부를 둘러보던 김독자가 그의 맞은편으로 걸어와 앉았다.
“침소인데 뭐가 이렇게 살풍경해? 온기라곤 하나도 없네. 제대로 잠 안 자냐.”
“나는 굳이 수면을 취할 필요가 없는 몸이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남들만큼 잘 필요가 없을 뿐이지, 아예 안 잘 수는 없잖냐.”
말이야 맞는 말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몸이라 해도 휴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도 알고 있을 그런 사실들을 다시 한번 늘어놓는 대신 반박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 걸 걱정할 시간에 네놈 몸이나 돌보는 게 낫지 않나?”
유중혁은 탁자 위로 올라온 흰 손목을 빠르게 붙잡아 맥을 짚었다. 불규칙한 맥박이 파르르 떨리듯 전해져왔다. 깜짝 놀라 팔을 빼내려는 것을 손가락으로 어렵지 않게 제압하고선 진맥을 계속했다. 오장육부의 혈도가 멀쩡한 게 하나도 없군……. 확실히, 이놈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매서운 눈으로 김독자를 쏘아보았다.
“……왜.”
“굳이 말로 해야 하나?”
“됐어. 나도 알아.”
여전히 서늘한 손목과 손등, 손가락이 차례로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소매를 끌어 내려 손을 감춘 김독자가 고개를 돌리고선 얕은 한숨을 쉬었다. 유중혁은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도대체 몸 상태가 왜 그런 꼴이지?”
“뭐야. 걱정이라도 하는 거냐? 아니지? 네가 보태준 것도 아닌데.”
나도 이유를 몰라.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보지. 그리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컨디션’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독자가 스치듯 한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태준 것이 아니라니, 생각해 보면 분명 제가 김독자의 몸 상태에 영향을 준 적이 있지 않던가…….
유중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김독자의 옷섶을 붙잡았다.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여러 겹으로 된 옷이 금세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기겁한 김독자가 황급히 유중혁의 손을 붙잡았지만 고작 그런 힘에 제지당할 유중혁이 아니었다. 드러난 마른 어깨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상반신 반쪽이 고스란히 드러날 때까지 벗겨내고서야 유중혁은 찾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옆구리를 뚫고 지나간, 깊은 관통상이 살짝 아문 흔적.
“…….”
유중혁은 하얀 몸 위에 오점처럼 남은 흉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어째서 여전히 흉터 자국이 붉지? 마치……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처럼. 이해할 수 없었고, 가지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도 정확한 원인을 추리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다시 생각을 원점으로 돌렸다. 인간의 몸은 생각보다도 훨씬 약하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번 이런 상처를 입는 것만으로도 신체 전반의 균형이 깨지고 체질이 변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한 원인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김독자는 답지 않게 입을 뻐끔거리며 황망한 눈으로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허리끈을 꽉 붙잡고 말하는 걸 들은 체 만 체하며 유중혁은 곧바로 물었다.
“이 상처. 제대로 아문 것 맞나?”
“뭐 하는 짓이…… 뭐라고?”
“제대로 치료했냐고 물었다.”
두 번째로 황당한 얼굴을 한 김독자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때 설화 씨가 치료해줬잖아. 오 년이나 지났다고 잊어버렸어?”
“아니. 네놈은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사라져버렸지. 그것도 내 눈앞에서. 그 후에 제대로 뒤처리를 한 게 맞느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야…….”
김독자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말을 고르는 듯한 자세를 보며 유중혁은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답은 듣기 어려우리란 것을 알아챘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5년.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김독자가 무얼 하고 다녔는지 유중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리저리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유령 같은 놈이 제 곁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을 겪고 어떤 상처를 입었을지 전혀 모르고,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만큼 유중혁은 김독자를 몰랐다. 이 하얀 얼굴을 한 남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고작 이름 석 자뿐이었다. 어쩌면 그마저도 거짓인지도 몰랐다.
“김독자.”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네놈이 필요하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필요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멀쩡히 살아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네놈의 목숨을 좀 더 소중히 해라.
김독자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열렸다.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표정을 하고선 입술을 달싹거린다. 생명줄처럼 꽉 쥐고 있던 허리끈을 붙잡은 손에도 힘이 풀렸다. 김독자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유중혁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무릎 위로 떨어졌다. 그러고도 김독자는 한참이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유중혁은 손을 움직여 옷을 다시 어깨에 걸쳐주었다. 저도 모르게 꽉 쥔 탓에 옷섶이 온통 구겨져 있었다. 두 손으로 옷매무새를 고쳐주는 동안에도 김독자는 그가 마음대로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일견 무방비한 모습을 보며 유중혁은 짧게 낯선 충동을 느꼈지만 이내 물러나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무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에 겨우 고개를 든 김독자가 느리게 표정을 풀어 피식 웃고선 입을 열었다.
“벗겼다가 입혀줬다가. 뭐 하는 짓이냐?”
“……별게 다 불만이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목소리에 유중혁은 조금 안도했다. 정리된 제 옷을 흘끗 내려다본 김독자가 눈을 들어 유중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유중혁.”
“…….”
“나는 안 죽어. 해야 할 일이 있거든.”
“해야 할 일? 나를 도와주겠다는 그것 말인가?”
“뭐…… 비슷하지.”
말꼬리를 흐리고선 눈을 깜빡거리던 그가 이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유중혁.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뿐이야.”
김독자는 언제나처럼 그다음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저, 화등의 불꽃을 반사해 유리알처럼 일렁이는 눈동자로, 난해한 서책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중혁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어쩐지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그래, 언젠가는. 지금은 꾹 다물려 있는 저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견고한 벽과 같은 입술에서 저절로 답이 흘러나오는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유중혁은 그런 예감을 받았다.



김독자는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이 그를 경계하며 양쪽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육중한 문이 안쪽으로 아가리를 벌렸다. 이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더는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흘끗 고개를 돌려 제 뒤쪽에 서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신유승과, 허전한 허리춤을 습관적으로 더듬고 있는 정희원. 김독자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그들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 또한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신중하고 태연해야 했다.
서늘한 공기가 뺨을 감쌌다. 길 양쪽에 일렬로 버티고 선 장수들이 언제라도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선 살기등등한 눈으로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 길 끝에,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칼을 틀어 올린 채 돌로 된 옥좌에 가지런히 앉아 있는 왕세자의 모습이 보였다.
왕세자 안나. 그 모습은 김독자가 ‘멸살법’을 읽으며 상상했던 바와 똑같았다. 아름다운 이목구비, 빛나는 금발, 불길하게 적색으로 소용돌이치는 왼쪽 눈. 마지막 결심을 마친 김독자는 그를 향해 꼿꼿하고 신중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점점 가까워지는 김독자와 두 사람을 보고도 안나는 묘한 미소를 걸친 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사실 김독자는 안나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멸살법’에서 그가 유중혁을 얼마나 벼랑까지 몰아붙였던가. 무력으로만 겨룬다면 안나는 유중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대일 결투가 아닌 세력 간의 싸움이었어도, 왕세자가 아무리 큰 세력을 업고 있었다고 해도 유중혁을 꺾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예언자답게 유중혁의 어느 부분을 공략해야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길어진 내전을 멈추고 유중혁에게 왕위를 양보하겠다 제안했다. 유중혁은 의심하고 또 의심했지만 안나는 끝까지 저자세를 유지했고, 결국 유중혁이 방심한 순간을 노려 그를 굴복시켰다. 말하자면 뒤통수를 친 셈이다.
아마 전개가 그대로 흘러갔다면 유중혁은 꼼짝없이 죽거나 평생을 유폐당했겠지. 하지만 안나가 그렇게 하려는 순간, 완전히 제압당했을 터인 유중혁의 몸에서 금빛 어둠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새카만 것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불길한 것들이 대지 위를 기고 태양을 가렸다. 그렇게 세계는 어둠에 잠겼고 멸망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멸살법’ 2부의 시작이었다.
그것들이 오면 김독자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멈춰야 했다. ‘멸살법’의 완독자인 김독자는 안나가 어째서 유중혁의 뒤통수를 쳐가면서까지 그를 막아내려고 했는지 알고 있었다. 왕세자 안나가 진정으로 목표하는 것.
이 여자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이제야 만나는군요.”
지척까지 다가가자 고요하고 느긋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자리에서 멈추라는 의미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린 김독자는 단정히 앉은 자세인 안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섰다. 그의 뒤쪽으로 정희원과 신유승도 나란히 멈춰 섰다.
“김독자입니다.”
“그래요. 당신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김독자를 훑은 안나의 왼쪽 눈이 붉게 점멸했다. 하지만 그 빛은 이윽고 고장 난 전구처럼 사그라들었다. 눈가를 가볍게 찡그린 안나가 말했다.
“……여전히 볼 수가 없군요, 당신에 관한 것들은. 이렇게 직접 만나기까지 했는데도.”
예상대로였다. 김독자는 안나가 ‘미래시(未來視)’로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은 ‘멸살법’의 등장인물이 아니므로. 때문에 안나는 김독자를 직접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을 터다. 과연 정체가 무엇이기에 그가 미래를 읽을 수 없는지 몹시도 궁금했을 테니. 그래서 이런저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만드는 데에 동의한 것이겠지.
물론, 김독자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나는 그가 비무장 상태로 올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 ‘차라투스트라’ 세력은 무장을 하겠다는 의사를 가감 없이 밝혀왔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조건이지만 김독자는 그의 경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가 어떻든 간에 안나가 보기에 김독자는 유중혁의 최측근이다. 그런 이를 무장시킨 채로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겠지.
김독자는 더 이상의 조건을 붙이지 않은 채 그대로 수락할 생각이었다. 안나는 어차피 제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죽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안나와 얼굴을 마주한다면, 김독자는 그를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찰나 유중혁이 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붙잡았다.
‘왜?’
‘네놈의 미친 계획을 구경만 할 수는 없다.’
하, 참나.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김독자는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어디가 미친 계획인데? 내가 다 생각이 있다, 중혁아.’
‘나도 함께 가겠다.’
‘뭐?’
앞뒤 다 잘라먹고 대뜸 무슨 소린가.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유중혁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유중혁의 말을 들어줄 김독자도 아니었다. 여차하면 혼자서 몰래 궁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던 김독자가 생각을 고쳐먹은 것은 자신이 혼자 가는 것보다 유중혁이 동행하는 편이 안나의 의심을 줄이기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유중혁도 무장을 해제당한 채 궁 밖에서 기다리게 되었지만, 김독자는 그가 맨손으로도 주변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는 사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만나고 싶었어요. 파천대군의 동향이 이전 같지 않다 싶었거든요. 분명 누군가 조력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맞게 보셨습니다.”
짧게 대답한 김독자는 안나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옅은 피로감이 서린 얼굴, 희미하게 그림자가 진 눈가. 미래시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떻습니까? 직접 만난 소감은.”
“글쎄요. 흠…….”
입가를 매만진 안나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예상한 것과는 다른 느낌이네요. 그리고 그 자체로 아주 낯설어요. 언제나 예정된 미래만 걸어왔는데, 당신과 만나는 미래 같은 건 볼 수가 없었으니까.”
“얼른 익숙해지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앞으로 내가 할 말들도 아주 낯설 테니까.”
웃는 얼굴에 희미하게 금이 갔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의 상태를 생각해가며 말을 골라줄 생각이 없었다.
“왕세자. 당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존칭 같은 건 아예 생략하는군요?”
“그런 한가한 걸 따질 때가 아닐 텐데.”
안나의 금빛 눈썹이 들썩였다. 김독자는 뒤쪽에 서 있던 신유승을 돌아보며 아이의 어깨를 짚어 가까이 데려왔다. 잠시 움찔한 아이는 이내 의젓하게 안나와 마주 보고 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이 아이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설마. 수왕 신유승?”
안나가 놀란 기색으로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본 미래에 이 아이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떤 모습이었을지도 압니다.”
안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김독자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멸망한 세계였겠죠. 창공과 대지를 이계의 것들이 뒤덮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세계. 그들과 싸우며 매일을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수왕 신유승은, 그 이계의 존재들을 마음대로 이끌고 수족처럼 부렸을 겁니다.”
짚고 있는 아이의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독자는 손에 힘을 주어 아이를 다독였다. 간신히 떨림이 잦아들었을 무렵, 희게 질려가는 안색으로 안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 이제 다시 이 아이의 미래를 보십시오.”
차가운 돌로 만든 팔걸이 위에 얹어진 안나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잠시 망설인 안나는 이내 신유승을 바라보며 미래시를 발동했다. 붉게 소용돌이치던 눈동자의 빛이 그치고 그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대답해 보십시오, 왕세자. 아직도 이 아이에게서 그런 미래가 보입니까?”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으로 답을 얻은 김독자는 다시금 정희원도 이끌어 제 곁에 세웠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정희원입니다. 왕세자, 유중혁의 미래에서 이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렇겠죠. 왜냐하면 이 사람은 며칠 전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정희원이 깜짝 놀라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가만히 그를 바라본 김독자는 살짝 고개를 젓고 다시 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제 다시 보십시오. 미래에서 이 사람이 누구의 곁에 서 있는지, 누구를 지키는지.”
결과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안나는 정희원이 유중혁의 뒤에 서 있는 미래를 볼 것이다. 이현성, 이지혜, 이설화, 그리고 신유승의 곁에 있는 미래.
안나는 분명 유중혁의 미래를 보았을 것이다. 수십 수백 번도 더. 하지만 그가 본 미래는 ‘멸살법’ 원작대로의 미래였다. 이계의 것들의 침입에 영향을 받아 이지를 잃은 유중혁이 세상을 도륙 내는 모습. 곁을 지키는 이라곤 아무도 없이, 오로지 이계의 존재들만이 그 뒤를 따르고…… 끝내 세상은 완전히 멸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계에서, 유중혁은 스스로를 향해 칼끝을 겨눌 것이다. 그것이 ‘멸살법’의 결말이었다.
안나의 미래시는 완벽하지 않았다. 온전히 원하는 순간을 볼 수 없고, 그저 파편적인 단면을 조합해야만 하는 능력.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봐왔을 모든 미래는 한 점을 가리켰다. ‘유중혁이 이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래서 안나는 유중혁을 막아야겠다 결심했다.
김독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세계를 지키겠다는 안나의 이상(理想)이 숭고하며 무결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김독자는 동시에 알고 있었다. 세계가 멸망한 것은, 유중혁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유중혁은 끝까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것을. 그럼에도 한낱 ‘등장인물’이 ‘작가’의 폭력적인 외압을 이겨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 펜놀림 아래 결국 유중혁은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고…… 그리고…….
아니. 사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 세계가 멸망하길 바랐던 것은, 다름 아닌 김독자 자신이니까.
김독자는 가라앉은 눈으로 창백해진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왼쪽 눈을 부여잡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도 안 돼……. 어째서? 분명 내가 본 미래는…….”
“틀림없었겠죠. 몇 번이고 봤을 테니.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미래는 바뀌었습니다.”
설령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내가 바꿀 겁니다. 김독자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되뇌며 입을 닫았다. 안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기색으로 눈동자를 떨고 있었다. 김독자의 양옆에 선 이들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그들 주변의 ‘차라투스트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안나는 충격이 상당한지 소란을 잠재울 여력도 없는 듯했다. 그렇겠지. 오랫동안 유중혁을 막기 위한 계획을 세워왔을 텐데, 그 계획 자체가 필요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근본적인 동기가 사라진 셈이다. 김독자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가 정신을 수습하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가 손을 들어 올렸고, 주변의 웅성거림이 곧바로 잦아들었다.
“……김독자, 라고 했죠.”
“예.”
“아직 나는 확신할 수 없어요. 이미 한 번 바뀐 미래가 다시 바뀌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죠?”
“정당한 의문입니다.”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질문이었고, 김독자는 ‘제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겁니다’ 같은 허황된 뜬 소리가 그에게 먹히지 않을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준비한 답을 내놓았다.
“지금 당장은 미래시를 더 사용할 수 없겠죠. 능력에 한계가 왔을 테니. 몸이 회복되면 유중혁의 미래를 다시 보십시오. 가능하면 자주.”
“……무슨 소리죠?”
“미래가 계속해서 그대로 유지되는지 주시하란 얘깁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본 미래에서 또다시 유중혁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든다면, 그때 막아서면 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이토록 오래 계획해왔어도 파천대군을 제압하지 못했는데, 그때 가서 무슨 힘으로 막아내라는 거죠?”
“그래서 이들과 함께 온 겁니다.”
김독자는 정희원과 신유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김독자의 진지한 얼굴을 보고선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 사람들은 강하고,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겁니다. 유중혁이 미친 짓을 벌이려고 하면 당신과 함께 녀석을 막아줄 겁니다. 그렇죠?”
“뭐라고요?”
정희원이 입을 쩍 벌리며 얼빠진 목소리를 뱉었지만 김독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정희원 씨는 제가 신분을 보증했으니 어렵지 않게 유중혁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녀석을 막으려면 놈과 가까이 지낼 사람이 필요하겠죠.”
“아니, 저기요. 제가 언제 그런 일을 하겠다고……”
“해 주시겠죠?”
빙긋 웃으며 묻자 정희원이 허, 하며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대로 하세요. 목숨을 빚졌는데 어쩌겠어.’라는 만족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신유승은, 당신도 봤겠지만 이계의 존재들까지 부릴 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유중혁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녀석의 힘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 유승아. 유중혁 녀석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면 막아줄 거지? 그렇게 묻자 아이는 머뭇거리면서도 ‘네’ 하고 힘있게 대답해 왔다. 기특한 아이였다.
안나는 잠시 머릿속으로 전력을 따져보는 듯했다. 아마도 적당히 계산이 맞아떨어질 것이다. 유중혁 개인의 무쌍이 출중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차라투스트라’와 신유승의 막강한 힘을 더하고, 거기에 바로 곁에서 목을 노릴 수 있는 정희원까지 가세한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여겨지겠지. 게다가 방금 실제로 유중혁의 미래가 바뀐 것을 보지 않았는가. 지금껏 안나 자신의 행동 원칙이 되었던 ‘미래시’가 이제는 모순처럼 그의 발목을 잡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김독자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당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를 구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무의미한 희생이 계속되는 내전은 멈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나는 분명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린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이라도 빌리고,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지만, 이제는 바뀌어버린 미래를 제 눈으로 뻔히 보고서도 유중혁을 막아설 수 있을 리 없었다. 등장인물인 안나는 그렇게 행동할 것이 틀림없다고, ‘멸살법’의 완독자로서 그렇게 확신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안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져 있던 모든 것을 수습하고, 반듯한 자세로 선 그가 입을 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시간부로 파천대군 유중혁에 대한 대응을 중단합니다.”
안나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도열해 있던 이들이 일제히 응답해왔다.
“단, 한시적인 중단입니다. 미래가 다시 변할 경우 언제든 대응은 재개될 수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김독자를 바라본 안나가 조용하지만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만일의 사태가 일어났을 때 수왕과 그 무인이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준다고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어요. 그 부분에서 당신의 말을 전부 믿을 수도 없고요.”
“압니다.”
“하지만, 그런 거짓말을 해봤자 당신에게 득이 될 것도 없겠죠. 그것도 알겠어요. 굳이 세계의 멸망을 바라는 이가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필요도 없을 테니.”
“잘 알고 계시는군요.”
나야말로 이 세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다. 그리 생각하며 씩 웃어 보이자 안나가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맑은 빛을 되찾은 눈동자가 깊은 의문을 품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고 싶어요. 당신은 누구죠?”
이것 또한 예상 범주 안에 들어 있던 질문이었다. 그렇기에 답을 가지고 있는 김독자는, 그로서는 아주 익숙한 말을 내놓았다.
“저는 독자입니다.”



내전은 종식되었다. 애초에 왕위가 목적이 아니었던 안나는 왕위 계승권 포기를 선언했고, 그 외에 유일하게 적법한 후계자인 유중혁이 자연스럽게 공석인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안나가 왕이 되는 편이 후에 유중혁이 폭주할 경우를 대비하기에 더 좋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싶었으나 다행히도 그는 김독자를 믿어준 모양이었다. 하긴, 왕위 그 자체를 노렸던 게 아니라면 국왕이라는 건 오히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자리다. 모르긴 몰라도 유중혁 또한 그다지 원치는 않을 것이다. 유중혁으로서는 왕위에 오르는 것이 곧 생존권과 직결되는 일이니 싸워온 것일 테지만.
혼란스러운 왕국을 가능한 빠르게 안정시키기 위해 즉위식은 최대한 가까운 시일로 정해졌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바로 내일이 당일이었다.
그리고, 즉위식 전야(前夜). 김독자는 유중혁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예의 그 침소였다.
“이제 굳이 여기서 몰래 대화할 필요 없는 거 아냐? 네 목숨 노릴 자객도 더는 없을 텐데.”
“싫으면 나가라고 분명히 말했다.”
잠시 투덜거린 김독자는 탁자 위에 차려진 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김독자로부터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비로소 일신에 약간의 안정을 찾게 된 유중혁은 이전만큼 주변인을 모두 내치지는 않았으나, 이 널따란 궁 안에는 여전히 두 사람뿐이었다. 물론 내일이면 왕이 될 유중혁을 굳이 암살할 만큼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도 딱히 없을 것이요, 하물며 그런 자객에게 함부로 당할 유중혁도 아니지만……. 하긴 이 녀석, 원래도 딱히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즐기지는 않았지. 원래가 고독한 늑대 같은 놈이니. (물론 늑대가 집단생활을 하는 무리 동물이라는 것은 김독자도 잘 알았다.)
이 술상을 올린 궁인도 지금쯤이면 궁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충 반경 1km 정도 안에는 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상기해내고 김독자는 술은 입에도 대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딱히 술버릇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라도 술에 취해 눈앞의 유중혁에게 추태라도 부렸다간 수습이 귀찮아진 유중혁이 저를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죽음은 사양이었다.
김독자는 하얀 술잔에 따라진 노르스름한 액체를 마시는 유중혁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다시 잔을 채우던 유중혁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뭘 보지?”
“아니. 잘 마시네 싶어서.”
“그러는 네놈은 한 방울도 못 마시는 모양이지. 입에도 못 대는 걸 보니.”
이 자식이. 은근히 자존심을 긁어내리는 말에 오기가 생긴 김독자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의외로 술은 크게 독하지 않았다. 오히려 향긋한 꽃내음과 같은 향취가 있고 끝맛이 씁쓸하지 않은 것이 아주 맛이 괜찮았다.
“맛있네.”
“국화주다.”
국화주? 신기한 마음에 술병을 들어 좁다란 주둥이 안쪽을 들여다보자 샛노란 꽃이 동동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는 딱히 풍류에 관심이 없었건만, 이렇게 영화나 소설에서만 나올 법한 곳에서 꽃잎이 떠 있는 술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없던 운치도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김독자는 다시 잔을 채워 입가에 머금었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유중혁이 몸을 일으켜 침소의 한쪽 벽을 가리고 있던 병풍을 치웠다. 그 너머의 네모난 창을 열자 가을의 밤공기가 사늘하게 스며들었다.
김독자는 창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높이 떠오른 달빛 아래 샛노란 은행잎이 간간이 흩날렸다. 가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몇 번인가 주거니 받거니 잔을 채우고 비우자 술기운이 천천히 피어올라 뺨이 달아올랐다. 도수가 낮다고는 해도 이렇게 계속 마시다 보면 취하겠다 싶었다. 그만 마셔야겠는데. 김독자는 잔을 내려놓고 뺨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김독자.”
“왜.”
김독자를 따라 술잔을 내려놓은 유중혁이 내내 닫고 있던 입을 떼었다.
“즉위식에서, 내 오른편에 서라.”
김독자는 흠칫 놀라 눈을 커다랗게 뜨며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갑자기 또 웬 미친 소리를 하나 싶었다.
“내가 방금 맞게 들은 거냐? 오른편에 서라고?”
“맞게 들었다.”
김독자는 속으로 탄식했다. 유중혁 이 녀석이 원작대로 안 가더니 이젠 다른 쪽으로 미쳤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왕의 오른편에 서는 것은 그와 짝을 맺은 지고의 왕후여야 했으니까.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지?”
“안다. 오해하는 건 네놈 쪽인 것 같지만.”
“무슨 오해.”
“나는 짝을 맺은 이가 없다. 어차피 오른편이 비어 있을 테니, 그걸 기회로 삼아 네 얼굴을 다른 이들에게 보일 생각이었다.”
아, 그러셔. 김독자는 코웃음을 치며 술잔을 들어 올려 반쯤 비웠다. 당연히 유중혁 이놈이 제정신인 이상 저와 국혼을 하자느니 따위의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닐 줄은 알았지만.
“글쎄. 난 싫은데.”
“이유는?”
“…….”
김독자는 이미 이 이야기의 전개를 많이 뒤바꿔 놓았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많은 이들에게 얼굴을 알리지 않은 채 행동해 왔지만, 만약 즉위식과 같은 공개석상에 나서서 저를 인식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그것은 또 다른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김독자는 술잔을 쥔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어라 설명하기는 어려운 감각이지만, 김독자는 자신이 이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이번에도 원치 않는 시간에 쫓겨나고 말겠지.
“어쩌면 내일 나는 여기 없을지도 몰라.”
“…….”
“네 즉위식은 보고 싶었는데. 못 보고 갈지도 모르겠다.”
그래, 김독자는 유중혁을 지켜보고 싶었다. 정당하게 왕위에 올라 곤룡포를 입고 관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이야기이지 않은가. 유중혁이 무사히 왕이 되고, 오래도록 치세를 펼치며 나라를 안팎으로 강건하게 만들고…….
그리고, 언젠가의 미래에, 왕위를 내려놓고 한 명의 무인으로서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는 이야기도 좋을 것 같다. 악인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구하는 이야기도 좋겠지. 혹은, 세계 곳곳에서 날뛰는 마수를 때려잡는 이야기도. 그게 싫으면, 그냥 계속 왕으로 남아 천수를 누리고 평온한 잠에 빠져드는 이야기라도…….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이라도 좋았다. 김독자는 그저, 유중혁의 이야기를 계속 읽고 싶었다. 작품 외적인 이유로 억지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좋았다. 그것이 어쩌면 독자(讀者)로서의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세계에서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더 이상, 이 페이지 너머로 이어질 유중혁의 이야기를 볼 수 없게 되는 걸까. 앞으로의 전개는 김독자도 알지 못했다. 이미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다시는 유중혁을 볼 수 없겠구나.
달칵, 술잔이 손에서 떨어져 내리고 노란 국화주가 탁자를 적셨다. 나뭇결이 미처 다 머금지 못한 액체가 흰 옷자락 위로 몇 방울 흘렀다. 퍼뜩 정신을 차린 김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정리하려 했으나 유중혁이 더 빨랐다. 몸을 일으킨 그가 가까이 다가와 김독자의 옷을 살폈다.
“괜찮아. 별로 안 묻었어. 술 얼마 안 남아 있었거든.”
유중혁은 어쩐지 몹시도 언짢은 얼굴을 하고선 옷에 묻은 술방울들을 털어내는 김독자의 손을 붙잡았다. 왜?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가만히 눈을 마주치던 유중혁이 갑자기 또 괴상한 짓을 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과 똑같이 김독자의 옷을 붙잡아 끌어내린 것이다. 김독자는 황당하기 그지없어서 말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한풀 낮아진 유중혁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약간 곱슬진 머리카락이 등불을 받아 은은하게 보였다.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하지만 유중혁은 대꾸하지 않고 김독자가 앉은 의자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리했다. 뭐 하는 거지? 술기운 탓인지 어디 한번 지켜보자는 대담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독자의 흉터를 찾아낸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접촉한 부위로부터 국화주 속 국화만큼이나 샛노란 기운이 피어올랐다. 김독자는 금빛으로 넘실거리는 그것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제 옆구리에 닿아 따뜻하게 느껴졌던 체온이 이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마치 핫팩을 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간 그렇게 김독자에게 제 운기를 불어넣은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 발짝 늦게서야 김독자도 깨달았다. 이 녀석, 내가 술잔을 떨어뜨린 게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걸로 착각한 모양인데.
“유중혁.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나 지금 몸 상태 괜찮거든.”
헛소리 말라고 일축하는 시선에 김독자는 억울해졌다. 정말로 괜찮았다. 지난여름에 이쪽 세계에서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 상처는 병원에 가서 제대로 치료를 받았던 것이다. 의사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이런 상처를 입은 거냐고 의아해했고, 병원비도 엄청나게 깨졌지만 어쨌든 회복에 문제는 없었다. 깊기는 해도 반경이 큰 상처가 아니었기에 천만다행으로 장기에도 큰 이상이 없었다. 지금은 실밥도 다 뽑았는데…….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의 말을 전부 변명으로 치부하는 듯했다.
“좀 나아졌나?”
“응?”
유중혁의 물음에 김독자는 다시금 제 허리께를 내려다봤다. 사실, 실밥까지 뽑았다고는 하지만 안쪽까지 완전히 아문 것은 아니어서 격하게 몸을 움직이면 통증이 있기는 했다. 때로는 별다르게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아릿하게 아파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한결 가신 듯했다.
“어…… 그런 것 같은데.”
그제야 유중혁이 한껏 좁혔던 미간을 살짝 풀어냈다. 허. 새삼스럽게도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유중혁의 손이 김독자의 몸 다른 부분 곳곳을 짚었다.
“다른 아픈 곳은?”
“아. 없어…… 야, 잠깐만. 야. 간지러워…….”
허리부터 갈비뼈 아래까지를 짚어대는 손길에 움찔거리며 물러나려다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간지러워서 생리적으로 나온 웃음이었다. 그만하라고 유중혁의 손과 머리를 밀어내는데 이놈은 돌덩이라도 되는지 꼼짝도 하질 않았다. 되려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빤히 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강렬해서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머리를 밀어내던 손이 어정쩡하게 귓가에 걸렸다.
“……다시 떠날 건가?”
가지런히 다물려 있던 입술이 열리고 낮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와 허리께를 간지럽혔다. 김독자는 다시금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냐.”
“이번에 떠나면,”
유중혁의 손이 손목을 붙잡아왔다. 온통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뜨겁게 느껴졌다.
“……언제 돌아올 거지.”
그리 말하며 살풋 찡그린 눈썹 아래 눈이 가늘어지며 황금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유중혁의 목소리는 일견 절박하게 들렸다. 믿을 수 없게도.
김독자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귓가에 걸려 있던 손가락이 곱슬거리는 머리칼, 귀, 그리고 턱으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유중혁은 별다른 말 없이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손도 마저 뻗어 유중혁의 얼굴에 가까이했다. 손끝에 닿는 가지런한 이마, 눈썹, 눈꺼풀, 콧날, 그리고 입술. 김독자는 아주 느리고 신중한 동작으로 그의 얼굴 윤곽을 덧그렸다. 손가락이 홧홧해져 왔다.
아, 그래. 어쩌면 이건 그냥 술기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면. 이게 네 얼굴을 보는, 네 이야기를 읽는 마지막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확실하고 선명히 기억하고 싶었다. 눈으로, 손으로, 할 수 있는 한 있는 힘껏. 그리고 동시에 김독자는 한없이 서글퍼졌다. 유중혁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소설이 아니었다.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것이고, 다시 꺼내어 펼쳐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김독자는 무엇으로도 그를 곱씹을 수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아쉽고 서러웠다.
“유중혁. 나는……”
목이 잠겨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김독자는 정말 오랜만에 그에게 진심을 내비쳤다.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가 지켜볼 수 없는 곳에서라도.
그것만이 독자로서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한참이나 김독자의 손목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던 유중혁은 천천히 힘을 풀어내고선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언제나 그의 허리에 걸려 있던 새카만 검이 풀려나와 김독자의 손에 쥐어졌다.
“가져가라.”
“……이걸? 너 제정신이야?”
“제정신이다.”
“이건 네 검이고 네 무기잖아. 나한테 줘봤자 쓸모도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흑천마도는 내가 네게 준 거였다. 하지만 이 검이라도 제게 쥐여주려는 유중혁의 심정을 김독자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이것은 아마도, 네 나름의 감사 표현 방식일 테지.
“그러니까…… 정 주고 싶으면, 이것만 줘.”
김독자는 검 손잡이 끝에 달린 장식술을 가리켰다. 처음 자신이 구해올 때는 분명 깨끗한 붉은 술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핏물이라도 묻은 것인지 얼룩덜룩했다.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유중혁은 이내 품속에서 다른 칼을 꺼내 깔끔하게 장식술을 베어냈다. 그것을 받은 김독자는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는지 짧게 고민하다가 머쓱해져서 그만두었다.
손끝이 저릿해졌다. 김독자는 직감적으로 때가 왔음을 알았다. 뚝, 뚝, 열린 창 너머로 은행잎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은 이내 굵어져 창틀을 때리며 부서져 내렸다.
“창문 닫아야겠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창을 바라보았지만 유중혁은 그쪽으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못 박힌 듯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가라앉았던 술기운이라도 다시 올라오는지 뺨이 뜨거워졌다. 김독자는 애써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유중혁, 많이 보고 싶을 거다. 정말이야. 그런 말은, 차마 꺼내지도 못하고.
“다시 만날 거다. 반드시.”
속삭이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눈앞이 흐릿해져 갔다.
“그랬으면 좋겠네.”
마주 속삭이며, 김독자는 안녕이라는 인사를 속으로 삼켰다. 이것이 진짜 마지막이 아니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피부를 타고 전해지던 온기가 멀어져갔다. 이내 김독자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반짝, 눈이 떠졌다. 익숙한 흰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고, 마찬가지로 익숙한 방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김독자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예상했던 대로 옷은 그 세계에서 입고 있었던 것 그대로였다. 그리고, 제 손안에는 유중혁이 잘라서 건네준 흑천마도의 장식술이 있었다. 한참이나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김독자는 솨아아, 쏟아지는 빗소리에 문득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살짝 열린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쳤다. 반사적으로 얼른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멈춰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도 비가 오는구나.
그것을, 뭐라 설명하면 좋을까.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김독자는 알지 못했고, 그래서 손에 쥔 것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며 빗물로 흐려진 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었다. 김독자는 걸음을 옮겨 시끄럽게 몸을 떨어대는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액정에 떠오른 한수영, 세 글자를 확인하고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수영아……”
“야, 김독자! 너 아직 안 자고 있지?”
“아니…… 안 잔 건 아닌데. 아무튼 깨어 있기는 해. 왜?”
열흘이 넘는 시간을 저쪽 세계에서 보낸 탓에 기억을 되짚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한 박자 늦게 마지막으로 한수영과 만난 것이 몇 시간 전임을 떠올린 김독자는 이내 그의 창백했던 얼굴까지도 기억해 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이게…… 시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는데.”
“천천히 말해봐.”
수화기 너머로 한수영이 하,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김독자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굳었다.
“‘멸살법’ 책을 찾았어. 김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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