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김독자는 어둠 속에서 반짝, 눈을 떴다.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익숙하게 서늘한 공기가 이불 밖으로 드러난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흘긋 창밖을 보니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몇 시쯤 되었으려나.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더듬다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화면을 켰다. 밝은 빛에 눈을 찡그리며 확인한 시간은 새벽 네 시였다. 하……. 김독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덮었다.
새벽마다 잠을 설친 지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했고, 실제로도 원인은 그것이 맞겠으나 어쨌든 김독자는 딱 죽을 맛이었다. 김독자는 스스로가 이렇게나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었는지 돌이켜보며 잠시 회의감을 느꼈다. 이상하지,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자신은 늘 정신적인 부담을 짊어지는 삶을 살아왔고, 그런 것치고는 나름대로 무던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몸을 일으켜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옷장 문을 열었다. 낡은 문짝의 경첩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고, 곧 김독자는 어렵지 않게 찾던 것을 발견했다. 하얗고, 깨끗하고, 구김 하나 없이 옷걸이에 고이 걸린 멋스런 예복이었다. 한복 양식도 무엇도 아닌 기묘한 모양새의 옷은 사람의 손길을 전혀 타지 않은 것처럼 그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김독자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동정 부근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이 옷을 입었던 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더라. 두 달? 세 달?
창밖으로 시선을 향했다. 어슴푸레한 새벽하늘. 가을에 성큼 가까워진 날짜는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하늘을 점점 더 높이 올려놓고 있었고, 김독자는 그러한 상용구를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지난 일을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겼던 유중혁의 당황한 얼굴, 그리고, 그다음 날 바로 찾아가 만났던 이수경의 목소리까지.
나는 네게 그 이야기에 대해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구나.
미안하다, 라는 말이 따라붙었던가. 그 점은 이수경답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어찌 되었든 김독자는 그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김독자가 알고 싶었던 것은 ‘멸살법’이라는 이야기의 근본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결코 평탄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김독자의 유년기를 지탱해준 소설이었고, 이런저런 가정사 및 주변 사정으로 마음 둘 곳이 없었던 십 대 시절의 김독자는 가히 과몰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멸살법’에 심취해 있었다. 그 소설을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 이수경이 썼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김독자는 당황했고, 혼란스러웠고, 일종의 배신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망가진 삶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소설의 작가도 이수경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무작정 수감되어 있는 그를 찾아가서 사실 여부를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긍정을 담은 침묵뿐이었다.
그것이 김독자가 마지막으로 본 이수경의 모습이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제 삶을 그렇게나 들었다 놨다 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멸살법’은 끝이 났다. 그의 암담한 심정을 반영하듯이 파멸적인 형태로.
하, 시발……. 김독자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옷장 문을 닫았다. 안전대를 붙잡듯 손잡이를 꽉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말보다도 무거운 죄책감이 손끝을 옥죄어왔다.
그런 소설은 더는 읽기 싫어요. 다 끝나버렸으면 좋겠어요. 엉망진창으로요.
그래, 자신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것이 그렇게 참담한 결과를 불러올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그럴 줄 예상했든 아니든 간에 ‘멸살법’이 그런 식으로 끝나버린 것은 김독자 때문이었고, 최근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김독자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냥 소설 하나일 뿐이다, 망한 결말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넘기기엔 자신이 이미 ‘멸살법’의 세계에 두 번이나 다녀오지 않았던가. 그 세계는 실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멸망했다…….
젠장, 그만 생각해. 김독자는 다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대로는 끝이 없었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이전처럼 다 잊어버리고 모른 척 살거나, 혹은 그 세계로 돌아가 자신이 모든 것을 바로잡거나. 어느 쪽으로든 해결을 보지 않으면 생각을 떨쳐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전자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후자를 고르자니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가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미치겠네, 시발.
흰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유중혁……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세계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거기에 다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그리고…… 내가 과연 그 결말까지 바로잡을 수 있을까.
‘멸살법’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하지만 유중혁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김독자는 다시금 찾아온 깨달음에 헛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된 결말을 봐야만 한다, 내게는 책임이 있다…… 그런 것보다도. 어쩌면 나는, 그저 그 세계를 다시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멸살법’을 읽는 매 순간 가슴이 뛰었던 것을 선명히 기억한다. 다음 화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노트에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끼적이던 나날들을 기억한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였고, 그리고, 유중혁의 이야기였다. 그가 너무나도 좋아하고 응원했던 주인공.
유중혁. 나는 단 한 번도, 네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
자신이 읽었고, 바랐기 때문에, 그 소설이 그런 꼴이 났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도, 김독자는 독자(讀者)인 자신을 부정할 수 없었다.
“원래도 말랐었는데 더 심해졌네. 이 새끼 이거 완전 멸치 다 됐는데.”
“수영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 유상아 너도 눈이 있으면 똑바로 봐봐! 얘 지금 얼굴 핼쑥해진 거 안 보여? 피골이 상접했구만 아주!”
“그 정돈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거울이나 보고 말해, 인마. 눈가가 푹 패였구만.”
“확실히 좀…… 마르기는 했어.”
야, 김독자. 너 진짜 괜찮은 거 맞냐? 그렇게 말하며 제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는 한수영을 보며 김독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간 계속 괜찮다고 말해왔지만, 제가 보기에도 요즘 부쩍 체중이 준 것이 느껴져 머쓱해진 탓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쭈, 이거 봐라. 이제 괜찮단 소리도 안 하네. 진짜 안 괜찮구만?”
팔짱을 낀 한수영이 턱짓을 했다. 너 오늘은 진짜 얘기할 때까지 안 보내준다. 그런 생각을 담은 채 활활 불타는 눈을 슬쩍 피한 김독자는 유상아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한수영과 똑같은 눈을 한 유상아의 서늘한 미소뿐이었다.
“너 진짜 왜 그러는 건데. 뭔 일인지 말을 해야 도와주든 말든 할 거 아냐!”
김독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자신이 직접 말을 꺼내기까지 이들이 오래 기다려줬다는 것을 안다. 예전부터 늘 그래왔으니까.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내를 터놓는 것을 몹시 낯설어했고, 그를 오래 봐 온 유상아와 한수영은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런데도 결국 참다못해 이러고 있는 거겠지. 젠장, 겉으로 티만 안 났어도 그냥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낼 수 있었는데.
“빠져나갈 생각 하지 마. 오늘 완전 벼르고 왔으니까. 그치, 유상아?”
“그래. 말 안 하면 내일 출근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
등골이 오싹해졌다. 유상아가 이렇게 말한다는 건 정말 진심이라는 뜻인데. 물론 한수영도 절대 허세는 아닌 것 같았다. 김독자는 마음속에서 천칭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속된 스트레스 때문인지 그 천칭은 아무래도 고장이 난 듯했다. 결국 김독자는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는 눈금을 인정했다. 그래, 말하자. 못 말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워낙 비현실적인 일이고, 또 개인적인 감정이 많이 섞인 일이라 이들이 듣고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김독자는, 다짜고짜 제 집을 찾아온 두 사람에게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막상 말하기 시작하니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들은 김독자와 학창 시절을 함께 했고, 그때의 김독자가 ‘멸살법’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아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이들도 ‘멸살법’이 왜 그런 식으로 갑자기 끝나버렸는지, 그리고 어째서 김독자가 그 후로 ‘멸살법’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지는 알지 못했다. 느릿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며, 김독자는 식어버린 머그잔의 표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그렇게 된 거야. 별로 재밌는 얘기도 아니고, 믿기도 힘든 얘기겠지만…….”
이야기하는 내내 시선을 떨구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린 김독자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유상아는 예상대로 몹시도 신중한 얼굴을 한 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영은…….
“……너 왜 그래?”
김독자의 의아한 목소리에 한수영을 돌아본 유상아가 흠칫 놀라며 그의 뺨에 손을 짚었다. 수영아. 괜찮아?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김독자도 멍하니 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래도 하얀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왜 그러는 거지? 한수영이 이토록 당황한 모습을 처음 본 김독자는 제 얘기가 뭐였는지도 잠시 잊어버리고선 함께 그의 안색을 살폈다.
“김독자 너…….”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던 한수영이 눈꺼풀을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너, ‘멸살법’이, 그러니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단어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늘 거침없고 가감 없이 또박또박 말하던 한수영답지 않았다. 조금 긴장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한수영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일단 나중에 봐. 나 급하게 갔다 올 데가 있어.”
“어? 어어? 뭐야?”
“나중에 연락할 테니까 일단 딴생각 말고 있어!”
겉옷을 집어 든 한수영은 이내 휑하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남겨진 김독자와 유상아는 눈만 꿈뻑거리며 그가 떠난 자리를 쳐다봤다.
“어……. 뭐지? 한수영 갑자기 왜 저래?”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유상아가 김독자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수영이도 생각이 있겠지. 다시 연락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그래……. 얼마나 걸리려나? 벌써 열두 시 넘었는데.”
“일단 자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덩달아 시계를 바라본 유상아가 빙긋 웃었다. 이거 참……. 떨떠름한 심정에 입안이 텁텁해 입맛을 다시고 있자니 유상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방금 얘기 말인데.”
“어? 응.”
“그 세계에 갔다 왔다는 거지? 두 번이나?”
진지하게 물어오니 오히려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민망하다. 하지만 김독자는 마음을 다잡고선 일어서서 옷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가 꺼내온 옷을 본 유상아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이건…….”
“그 세계에서 내가 입고 있던 옷이야. 깨어나 보니까 이걸 입은 채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유상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옷감을 어루만졌다. 얇은 옷감이 희고 고운 손 아래에서 미끄러졌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고민이라도 하는 걸까.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뜬 그가 이내 다시 김독자를 올려다봤다.
“다시 그 세계에 가는 방법은? 알겠어?”
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김독자는 입을 뻐끔거렸다. 이렇게 쉽게 믿어주는 건가? 정말로? 그런 표정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유상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증거까지 있잖아. 믿는 게 당연하지.”
“……내가 미친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응, 안 해. 나는 널 믿으니까.”
강인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는 거짓말을 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유상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제야 김독자도 조금 마음이 풀어져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들어가는 방법을 전혀 모르겠어. 갔다 온 것도 두 번뿐이라서 규칙도 모르겠고.”
“우리랑 같이 롯■월드에 간 날이랑, 술을 마셨던 날. 그렇게 두 번이라는 거지?”
공통점이라곤 우리랑 같이 있었다는 것뿐이네…….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던 유상아는 이내 다시 시계를 확인하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눈 좀 붙이는 게 좋겠다. 혹시 모르니까 수영이한테는 독자 너 말고 나한테 먼저 연락 달라고 말해놓을게.”
“너도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나보단 네 상태가 훨씬 안 좋은 것 같은데. 그새 잊어버린 건 아니지?”
할 말이 없어진 김독자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몸이 영 피곤했고,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상아를 배웅하고 간단히 씻은 뒤 침대에 누운 김독자는 금세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반짝 눈을 떴을 때.
“네놈은 누구지? 소속과 이름을 밝혀라.”
차가운 칼날이 그의 코끝을 겨눴다.
사방에 흙먼지가 자욱했다. 코로부터 기도까지 흘러드는 짙은 먼지에 절로 기침이 나왔다. 한참이나 콜록거리다가 바닥을 짚은 두 손에 마른 흙이 쥐어졌다. 뭐야? 여기가 어디야?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소매로 문질러 닦아내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광활한 벌판이었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쩡, 하고 울리는 금속의 마찰음과 말발굽 소리들이 있었다. 여기는…… 그래, 틀림없이 ‘멸살법’의 세계겠구나.
하지만 안도감과 기쁨이 가슴에 차오를 새조차 없었다. 저편에서 김독자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던 말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어갔다. 미친, 시발……! 황급히 몸을 웅크려 피한 김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있다간 죽는다.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전쟁이라도 난 건가? 머릿속에서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갔다. 성류국의 국경에서는 늘 크고 작은 전투가 일어나곤 했다. 하지만 이게 과연 그런 소규모 전투일까? 재빨리 주변을 살펴 제법 가까이 보이는 궁의 그림자를 확인한 김독자는 곧바로 이것이 내전 상황임을 깨달았다. 궁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면, 틀림없이 유중혁과 안나의 세력 충돌 사태일 것이다.
너무 빠른데. 도대체 지난번 이곳에 떨어졌던 뒤로 몇 년이 지난 건지 쉬이 가늠이 어려웠다. 자신이 약간의 변수를 주었으니 전개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심지어 유중혁에게 쉽사리 도발 당하지 말고, 섣불리 싸우지 말라고 말까지 해뒀는데…….
“으악!”
휭, 하고 서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들짝 놀란 김독자는 얼른 몸을 뒤로 물렸다. 갑옷을 갖춰 입은 병사 하나가 그를 향해 재차 칼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시발, 미치겠네! 일단 살고 봐야 유중혁도 다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압!”
깡, 하고 검날이 튕겨 나갔다. 병사의 검을 저만치 날려 보낸 한 무인이 김독자의 앞을 막아서며 그와 대치했다.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대체할 것을 찾으려 했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무인이 경로를 차단했다.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 다분히 방어적인 그 모습에 김독자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의문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무장 상태인 상대를 어째서 죽이거나 제압하지 않는 거지? 대치하고 있는 것으로 봐선 서로 적일 텐데.
퇴각! 퇴각하라! 저편에서 큰 외침과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병사는 망설임 없이 도망쳐 버렸고, 이름 모를 무인은 여전히 김독자를 엄호하듯 서서 퇴각하는 군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와 함성이 멀어져갔다. 소매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 있던 김독자는 상황이 대강 정리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젠장, 오랜만에 느껴보는 무력감이다. 하필이면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지다니 정말이지 살아난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구해준 사람이니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겠다 싶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를 돌아본 무인이 투구를 벗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엇, 하고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투구 아래로 나타난 것은 머리를 틀어 올린 젊은 여자의 얼굴이었다. 뺨이 도톰하고 순한 인상이었지만 그 눈만큼은 몹시도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분노를 잠재우지 못한 표정을 바라보는 사이 그가 빠른 속도로 김독자에게 검을 겨눴다.
“너는 누구냐? 어느 편이지?”
그럼 그렇지. 시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이 세계에 들어올 때마다 유중혁에게 생명을 위협당하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차례인 모양이었다. 곧바로 대답을 만들어내려던 김독자는 문득 그의 팔이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다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이상한 것은 떨리는 팔뿐만이 아니었다. 눈매와 입가가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고, 몰아쉬는 숨은 색색 소리가 났다. 그 증상을 본 김독자는 곧바로 ‘멸살법’에 등장하는 어떠한 독의 이름을 떠올렸다. 분명 안나의 휘하에 있는 장수들이 칼날에 발라 사용하는 것 중에 저런 독이 있었다.
“잠깐만요. 더 말하지 마십시오. 독에 당했습니다.”
“그런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네 소속부터 밝혀.”
“치료부터 해야 합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상대는 검을 거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적당한 대답을 하려는 찰나 그들의 주변으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몰려왔다.
“거기 멈춰! 너희는 누구냐!”
뭐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김독자는 근처로 다가온 병사들과 저를 구해준 무인의 갑옷을 비교해 보고서야 이 사람도 소속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지. 상대편을 죽이지 않는 태도며, 양측 군대가 후퇴하는데도 제 소속 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군.
다각다각, 가까워지는 발굽 소리와 함께 호리호리한 인영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김독자는 일순 반가움에 눈을 크게 떴다.
“이지혜!”
“어? ……아, 아저씨?”
해상전신 이지혜였다. 갑옷을 갖춰 입고 허리춤에는 날렵한 검 한 자루를 차고 있는, 이제 제법 장수라는 것이 태가 나는 모습이었다. 이지혜가 깜짝 놀란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훌쩍 큰 모습이었지만, 그에 놀라며 회포를 풀 틈이 없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
“잠깐만,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이 사람 치료부터 좀 해줘.”
김독자의 말에 이지혜가 무인을 돌아봤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어쩔 수 없이 검을 집어넣은 그는 여전히 안색이 파리했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듯한 그를 보며 김독자가 빠르게 말했다.
“해명초(解明草)라고 알지. 그걸 짓이겨서 입술 위에 얹어놓고 두 시진 정도 꼼짝 못 하게 해.”
“독에 당한 거지? 그게 해독법이야?”
“그래. 너희들 중에서도 비슷한 증상인 사람들한테 다 똑같이 처치해. 얼른!”
“아…… 알겠어!”
곧바로 이지혜는 그를 말에 태우고선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멀어져갔다. 하, 이제야 겨우 숨 좀 돌리겠네. 아직 주변에 병사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지혜와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것을 목격한 탓인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돌아본 김독자는 씩 웃었다. 그럼 어디 입을 좀 털어볼까. 여기서 뭐라고 말해야 유중혁이 있는 곳까지 하이패스로 갈 수 있으려나? 금세 생각을 마치고 말을 꺼내려 입을 연 찰나였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익숙하게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를 통해 넘실거리듯 전해져왔다. 눈을 아래로 굴려 제 턱 바로 아래의 공간을 깊숙이 침범하고 있는 새카만 검신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기운을 뿜어낼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틀림없이 한 사람뿐이다.
“천천히 뒤로 돌아라.”
낮은 목소리에 검신이 웅웅 울었다. 젠장……. 잠시 망설이던 김독자는 신중하게 두 손을 들고 검이 닿지 않는 방향으로 몸을 반 바퀴 돌렸다. 얼굴 위로 태양을 등진 커다란 그림자가 졌고, 슬쩍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아주 잠깐,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훈륜(晕輪)과 같이 태양빛을 머리 위로 두른 남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타오르는 금색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볕에 그슬린 듯 짙어진 피부빛, 세월의 흐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강인한 턱과 우묵한 눈매. 예전과 꼭 같은 감색 의복은 검붉은 액체로 얼룩덜룩하게 젖어 있었고, 새카만 검을 쥔 손은 온통 상처와 흉터로 빼곡했다. 흙먼지와 피를 뒤집어쓴 모습으로도 세상의 미의 추를 기울일 수 있을 만한 남자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지난번 만남으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이제는 완연한 사내의 얼굴을 한 유중혁이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정말로 안도감 비슷한 것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드디어 만났다. 겨우, 다시 만났다. 김독자는 부러 더욱 미소를 지으며 입을 떼었다. 아니, 떼려고 했다. 하지만 먼저 선수를 친 것은 유중혁이었다.
“네놈은 누구지? 이름과 소속을 밝혀라.”
……뭐라고?
김독자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 자식이 미쳤나? 갑자기 웬 헛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유중혁이 저를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이놈은 무엇도 잊어버리지 않는 미련한 녀석이니까. 그렇다면 역시 이건…… 유중혁식 농담이라도 되나? 농담치고는 목덜미가 서늘하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김독자는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그쪽은 누굽니까? 다른 이에게 하문하려면 본인의 소속과 이름부터 밝히는 게 순서 아닙니까.”
유중혁의 눈에 한기가 어렸다. 그와 동시에 여전히 목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먹빛 검으로부터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아, 새끼가……. 하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무를 수도 없었고, 물러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디 대답해 보시지, 유중혁. 아니면 내 목을 칠 테냐? 그러지는 못하겠지. 네가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저, 저 무례한 놈! 김독자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유중혁과 꼿꼿이 마주 보자 그의 주변에 늘어선 병사들로부터 기함이 터져 나왔다. 장군님, 저런 헛소리에 일일이 대꾸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 외치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지만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시 고요한 눈으로 김독자를 바라봤다. 그가 검을 들지 않은 쪽 손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거짓말처럼 웅성대는 소리가 멈추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내가 누구냐고?”
정적을 뚫고 소름 끼치도록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울렸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새삼스럽게 목소리도 좋은 놈이군, 생각하는 동시에 이놈이 아직 미친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여전히 김독자의 허연 목덜미에서 검을 치우지 않은 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파천대군(破天大君) 유중혁이다.”
파천대군. 네 글자를 듣는 순간 김독자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니 한자병기 같은 것은 보일 리가 없건만 눈앞에 글자가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중혁이 스스로를 멸칭에 가까운 파천군(派川君)이 아닌 파천대군(破天大君)이라 칭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내전이 꽤 진행된 상태라는 것을 의미했다. 정식으로 파천문(破天門)을 계승하기로 했다는 각오와 허락의 증거였으므로. 원작에서도 유중혁은 안나와 맞서기 시작한 후에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기 위해 파천검성(破天劍聖) 남궁민영을 찾아가 새로운 가르침과 이름을 받았다.
“이제 대답해라. 네놈은 누구지?”
그래서 김독자는, 미약한 흥분감을 감추기 위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는…… 백청문(白淸門)의 김독자다.”
말을 맺음과 거의 동시에 뒷목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며 의식이 뚝, 하고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유중혁의 얼굴에는 김독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김독자는 눈을 떴다.
반짝, 눈을 뜨자마자 베개에 닿아 있던 목덜미로부터 아릿한 충격이 덮쳐왔다. 아으으…….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뒤통수를 문질렀다. 살짝 부어오른 것이 제대로 맞긴 한 모양이었다. 유중혁 개자식, 이렇게 인정사정없이 칠 것까진 없잖아. 아무리 내가 농담 좀 했기로서니. 한참이나 뒷목을 문지르다가 한 발짝 늦게서야 김독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높은 상앗빛 천장. 푹신한 침대. 반투명한 장지문과 흰 옷의 촉감. 김독자는 지난여름 쇠뇌에 맞았다가 눈을 뜬 날처럼 궁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젠장, 그때도 눈을 뜨자마자 통증에 얼얼했었지. 하여간 이 세계에 들어와서 곱게 눈을 뜨는 적이 별로 없었다. 방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김독자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댄 채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지금 성류국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중혁과 안나의 세력이 맞부딪치는 중이었고, 유중혁은 스스로를 파천대군이라 칭했다. 그렇다면 원작으로부터 시간선이 크게 어긋나지 않았을 경우 지난번 자신이 왔을 때로부터 2년 정도가 흐른 상태여야 했다. 원작에서 두 세력의 내전은 유중혁의 스무 살 가을에 발발하니까. 그것을 염두에 두고, 가능하면 세력 싸움을 준비할 시간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 일부러 유중혁에게 4년 후까지 기다리라고 했던 거였다. 물론 그런 얘기를 하면서도 유중혁이 그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훌쩍 자란 이지혜의 모습과 유중혁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고작 2년 사이에 그렇게 클 수가 있나? 아무리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지만 이건 어딘가 이상했다. 역시 올해가 몇 년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만 대뜸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올해가 몇 년이죠?’ 하고 묻는 건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유중혁을 다시 만나면 자연스럽게 너 올해 몇 살이냐? 하고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드르륵, 하고 장지문이 열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문 하나를 가득 가리고 설 만큼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유중혁이었다.
그는 김독자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아리송한 표정을 했다. 젠장, 어이가 없네. ‘멸살법’ 애독자인 내가 주인공인 유중혁의 심리 상태도 파악할 수가 없다니. 그러고 보면 대뜸 저를 보자마자 이름과 소속을 밝히라는 헛소리도 하지 않았던가. 김독자는 도대체 이놈이 무슨 저의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아주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담아 쏘아보듯 쳐다보자 유중혁이 문을 쿵 닫고선 성큼성큼 걸어왔다.
“칼 뽑지 말고 대화로 하자, 중혁아.”
그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김독자는 얼른 선수를 쳤다. 이 녀석이 내 목에 칼부터 들이댔던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더 이상 같은 수에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중혁은 눈썹을 꿈틀하고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허리춤까지 올라왔던 손이 가볍게 쥐어졌다 펴졌다. 이 자식, 역시 칼 뽑을 생각이었구만.
“……방금 뭐라고 했지?”
“대화로 해결하자고.”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뭐?”
뭔 소리야? 내가 무슨 다른 말을 했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중혁이 꾹 다문 입매를 씰룩이다가 이내 옷깃을 털어내고 침상 옆 의자에 앉았다. 무슨 소리냐고 다시금 추궁하려는 찰나 이번에는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매번 만날 때마다 이런 꼴이로군.”
“……나도 이런 모양새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눕혔잖아, 인마.”
“어쨌든 환자 꼴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
이 뻔뻔한 놈. 김독자는 속으로 제 처지를 조금 한탄했다. 비록 체중은 정상 아래일지라도 잔병치레 없이 나름대로 건강하게 살던 몸이었는데. 하지만 김독자는 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아까 왜 나를 모른 척한 거냐?”
“…….”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어느새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검은 새카만 검집에 얌전히 담긴 채 그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손을 많이 탄 듯 제법 낡아 있는 손잡이를 매만지던 유중혁이 문득 김독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제대로 대답해라. 네놈은 대체 누구고, 소속은 어디인지.”
너는 한 번도 똑바로 답해준 적이 없지. 그래서 물었을 뿐이다.
그의 말에 김독자는 잠시 아연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유중혁과 실제로 함께 한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를 지켜봐 왔을 뿐. 김독자는 유중혁을 잘 알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에 대해 그렇지 못했다. 그것이 아마도 유중혁이라는 인물이 김독자에 대해 가지는 불안감일 것이다. 믿을 것이 늘 부족한 이 세계에서 유중혁은 많은 것을 의심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는 애석했다. 그에게 답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이곳은 소설 속이고, 나는 네 이야기를 읽던 독자였다고. 그런 소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이 세계를 멸망시킨 원흉이 자신인데.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저에게 이렇게 똑바른 질문을 던지는 시선에 거짓으로 답할 수도 없었다.
“……그냥 넘어가 주면 안 되겠냐?”
“…….”
“내가 저번에 네 목숨 구해줬잖아. 그 빚 갚는 셈 치고.”
그래서, 그런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뻔뻔하고도 가증스러운 말이지만. 김독자가 유중혁의 목숨을 구했다? 글쎄. 김독자가 아니었다면 유중혁은 원작에서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스운 소리였다. 지난여름에는 제 행방을 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던 유중혁을 보며 고작 그걸로 목숨 빚을 갚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은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유중혁에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대인 자신을 무작정 믿어달라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부탁이었나.
유중혁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은 돌로 조각한 것처럼 정교했다. 김독자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적어도, 그렇게 해 주어야만 했다.
“5년이 지났다.”
“……뭐?”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 명료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김독자를 일별한 그는 지체 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네놈이 지난번에 그렇게 사라진 뒤로 5년이 흘렀다. 그사이 나는 네놈의 말대로 수왕 신유승을 찾았고, 해상전신 이지혜와 의선 이설화를 내 편으로 완전히 포섭했다. 그리고,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4년을 참았다. 네놈이 말했던 그때가 오기까지.”
“…….”
“네놈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믿었다는 뜻이다.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로부터 5년이나 흘렀다고? 그리고 유중혁이…… 정말로 내 말대로 행동했다고?
믿기 어려웠다. 유중혁은 그렇게 쉽게 남을 믿는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놈도 아니었다. 이득이 될 것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김독자는 잘게 몸을 떨었다. 그 ‘유중혁’으로부터 신뢰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크게 울렸다.
김독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유중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좋다, 신유승.”
새로이 불린 이름에 김독자는 살짝 눈을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의 등 너머 장지문 앞을 어른거리던 작은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김독자는 그에게로 살그머니 걸어오는 아이의 말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린아이 특유의 통통한 장밋빛 뺨과 갈색 머리칼. 눈을 굴려 주변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모양새. 발소리를 내지 않는 걸음걸이. ‘수왕(獸王)’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진 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작고 연약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멸살법’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이기도 했다.
“네 녀석이 깨어나길 기다리는 것 같더군.”
김독자는 유중혁의 말을 곱씹었다. 신유승이 나를 기다렸다고? 그 말은, 유중혁의 주변 인물들이 김독자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를 직접 본 적이 없는 신유승에게 뭐라고 소개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안녕. 유승아.”
먼저 인사를 건네자 신유승은 흠칫 놀란 듯했다. 저를 아세요? 그렇게 묻는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을 보며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 지었다.
“나는 예언자야. 당연히 네가 누군지도 알고 있지.”
조금 전 유중혁과의 대화는 제가 예언자가 아니라고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어쨌든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나마 사실에 가까운 해명이기도 하고.
“저기…….”
신유승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더 말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용기를 낸 듯 그가 두 손을 꼭 모아쥔 채 물음을 던졌다.
“예언자님이라면, 제 미래가 어떤지도 알 수 있나요?”
“……그래, 알 수 있지.”
알다마다. 원작의 신유승은 이계의 존재들이 침범해 올 때 유중혁에게 협력했으나 제대로 된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힘없이 죽었다. 그즈음의 유중혁이 닳을 대로 닳아버린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심한 처사였다. 하긴, 어차피 그런 결말이 났는데 보상을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김독자는 원작을 떠올렸다가,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그 결말을 바로잡기 위해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제가, 제가 정말로 수왕이 될 수 있나요? 저는 아직 변변찮은 능력도 없고, 그나마 있는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신유승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아직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제 쓰임새를 고민하며 떨고 있는 모습이라니. 마음 한켠이 쓰라렸다. 역시 유중혁에게 이 아이를 찾으라고 말하기를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에서 예정된 신유승의 허무한 죽음을 막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중혁의 피폐해질 정신 상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김독자는 손을 뻗어 신유승의 머리를 짚었다. 조금은 서구적인 듯한 아이의 눈매가 놀란 듯 동그랗게 휘어졌다. 가능한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김독자는 힘 있는 어조로 말했다.
“될 수 있어.”
“정말……요?”
“그럼. 걱정하지 마. 예언자인 내가 장담할게.”
아저씨는 뭐든지 알아. 그렇게 말하며 씩 웃어 보이자 신유승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김독자는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일견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김독자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말했으니 네놈이 책임져라.’ 그런 시선이었다. 시발, 이제 와서 저 표정이 읽힐 건 또 뭐냔 말이다. 그에 대꾸하듯 적당히 어깨를 으쓱하자 유중혁이 의자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자, 신유승.”
“어…….”
벌써 가게? 아직 할 얘기가 많이 남았는데? 그런 눈으로 쳐다봤지만 유중혁은 냉랭한 시선을 되돌려보냈다.
“비쩍 말랐더군. 눈가도 퀭하고.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다시 오겠다.”
“아니, 야. 지금 사태가 촌각을 다투고 있는데…….”
말을 이을 새도 없이 유중혁의 큰 손이 뻗어와 김독자의 머리를 베개 위로 다시 짓눌렀다. 아직도 얼얼한 뒤통수에 가해지는 가벼운 충격에 으악, 소리를 냈지만 유중혁은 개의치 않았다.
“엄살 부리지 마라. 그렇게 세게 치지도 않았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잇새로 새어 나간 험한 말에 신유승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지만 유중혁은 이제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데리고 문지방을 넘을 뿐이었다. 김독자는 장지문 너머로 어른거리며 사라지는 그림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눈을 감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 확실히, 조금 어지럽기는 했다.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 보자. 그 정도 여유는 있을 것이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온 사방이 캄캄한 가운데 반투명한 문 너머로 밝힌 등불의 그림자만이 어른거렸다. 김독자는 스물여덟 해를 살며 몸에 밴 습관대로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찾았지만 물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젠장, 그랬었지.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컨디션은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원래 살던 세계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얼마나 잔 거지? 설마 하루 넘게 잔 건 아니겠지. 날짜를 손쉽게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게 통탄스러웠지만 김독자는 일단 살며시 침대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밤중에 돌아다니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나, 이미 푹 자고 일어난 뒤라 잠도 오지 않을뿐더러 주변 상황을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탓이었다. 가장 먼저 확인해보고 싶은 것은 전장에서 저를 구해준 무인의 건강 상태였다. 정황상 유중혁의 휘하에 있는 장수가 아닌 것 같았기에 어떤 사연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일단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건 괜찮겠지? 정신을 잃은 자신을 눕혀뒀던 곳인 만큼 개중에는 안전한 곳일 것이 틀림없었다. 딱히 스스로가 특별 대우를 받을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유중혁은 제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을 테니…… 그렇게 쉽게 죽도록 내버려 두진 않겠지.
침상 아래에 놓인 신발-무슨 재질인지 아주 푹신하며 사이즈도 꼭 맞았다-을 꿰어 신고 문 근처로 가서 밖을 흘끔거렸다.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이 있으려나? 모르는 사람일 경우 자기소개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애로사항이 있었으므로 가능하면 아는 얼굴이 있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문 틈새로 열심히 엿본 결과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김독자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 전 제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옷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다른 것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이번에는 과연 누가 갈아입혔을지 궁금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옷은 넓은 소매 끝에 샛노란 국화꽃이 고풍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색조가 있다고는 하나 흰색에 가까운 빛이다. 이 자식, 아직도 나를 예언자로 팔아먹을 생각 만만인 거냐. 상관없지만.
잠시동안 옷을 이리저리 구경한 뒤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들을 살폈다. 애초에 이 세계로 들어올 때는 입고 있는 옷가지 외에는 함께 딸려 오는 것이 없었으니 소지품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챙겨야 할 것은 호신용 무기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무언가 쓸만한 것이 없을까 방 안을 뒤적거리려는 찰나 문득 소매 한쪽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독자는 왼쪽 소매춤을 더듬었다. 얇고 길쭉한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이거 어떻게 꺼내는 거야?
잠시 씨름한 뒤 꺼내본 물건은, 장도(粧刀)였다. 크기로 봐서는 낭도(囊刀)가 아니라 패도(佩刀)에 가까운 크기였고, 칼집과 손잡이는 별다른 무늬 하나 없이 심플했다. 어둑한 가운데 반지르르한 먹빛이 감도는 장도를 붙잡고 칼집에서 살짝 빼내자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썽, 하는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
당연하게도, 진짜 칼이었다. 김독자는 살짝 놀란 심정을 가라앉히고 침착한 눈으로 그것을 살폈다. 제대로 된 무기는 될 수 없겠지만…… 일단 호신용으로는 쓸 수 있을 것이다. 유중혁이 넣어둔 건가? 거기까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쓸 수 있는 것은 써야 했다.
김독자는 장도를 다시 갈무리한 뒤 소매춤에 넣고 장지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스으윽, 하고 종이와 종이가 마찰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복도를 다시 탐색하자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점점이 등불이 밝혀진 복도에 양옆으로 난 문들도 흘끗 살펴봤지만 그중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혹여나 있을지도 모를 암살 시도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아예 주변 방을 다 비워뒀나. 김독자는 소리를 죽여 복도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그다음 복도도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쯤 되면 어리둥절해져도 되지 싶었다. 대충 병사나 하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적당히 구슬려서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김독자는 길을 찾는 데는 영 재주가 없었다. 당장 이 건물의 크기도 알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러다가는 밖으로 나가서 동태를 살피기는커녕 여기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부닥칠지도 지도 몰랐다. 젠장, 내가 길을 못 찾는 게 이렇게까지 문제가 될 일인가. 인상을 쓰며 다음 문을 열어제낀 순간이었다.
번쩍! 눈앞에서 검광(劍光)이 인 것 같았다. 김독자는 반사적으로 소매춤에서 장도를 꺼내 뽑았다. 마찬가지로 검을 뽑아 들었던 눈앞의 상대는 어슴푸레한 등불의 빛에 드러난 김독자의 얼굴을 보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놀란 목소리를 내뱉었다.
“예언자님?”
이 목소리는. 확인을 위해 가만히 어둠 속을 주시하자 상대가 검을 검집에 넣고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현성이었다. 이전에도 강인한 체구를 자랑하던 그는 5년 새에 추가 벌크업이라도 한 것인지 한층 더 단단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김독자는 드디어 아는 사람을 만나 기쁜 마음을 잠시 접어두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현성은 어쩐지 감개무량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니, 저렇게까지 반가워할 건 또 뭔가. 약간 민망한 마음에 뺨을 긁적거리는데 이현성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물론 유중혁 녀석이 친 뒤통수는 아직 안 괜찮습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이현성이 반색하며 물어왔다.
“이런 밤중에 나오실 거라곤 생각지 못해 그만 검을 뽑았습니다. 혹시나 자객일까 싶어……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실 것까지야.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나온 탓이죠.”
“아닙니다. 그런데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잠이 안 와서요. 혹시…… 낮의 전투로 부상당한 병사들이 머무는 의원이 따로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고 보니 의선께서 예언자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설화가? 의아한 눈을 했지만 이현성은 자신이 전하는 것보다 직접 듣는 게 나을 거라며 그를 건물 밖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길을 헤매는 수고를 덜었군. 그의 뒤를 따라가며 살펴보니 건물 내부는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오래된 건물입니다. 선왕 폐하께서 침소로 쓰시던 궁이지요. 일부러 구조를 꼬아두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들은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유중혁 이 자식, 나를 그런 데다 가둬둔 거냐. 도망칠까봐 걱정이라도 됐나.
“달리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자객이 침입할 우려가 적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 너는 다 생각이 있구나.
어쩌면 중의적인 처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선왕이 침소로 쓰던 궁이라는 말이었다. 김독자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 선왕은 원작의 흐름대로 타계한 모양이군.
일전에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제시한 ‘4년 후의 사건’이란 바로 그것이었다. 선왕의 죽음. 원래대로라면 적법한 왕세자인 안나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옳을 터지만, 노환으로 인해 정신이 명징하지 못한 선왕이 말년에 이런저런 실수를 저질러 반발을 크게 산 탓에 신하들의 마음이며 민심까지 모두 들썩거렸을 것이다. 그걸 노리라고 말했던 건데, 다행히도 잘 캐치한 모양이었다.
사실 선왕의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것은 유중혁도 오래전부터 알았을 것이다. 원작에서는 무려 3년 전부터 왕위 계승권을 놓고 유중혁과 안나가 혈투를 벌였는데도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으니까.
“예언자님. 이렇게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아니, 감사를 받을 일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감사라니. 그보다는 그동안 대체 어디로 떠나 있었느냐는 질문이 먼저 나오는 게 맞지 않나?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이현성은 몸을 돌려 제 뒤의 김독자를 흘끗 바라보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응당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주군께서 많이 외로워하셨거든요.”
“……유중혁이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묻자 이현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주군을 그렇게 부르는 것도 5년 만에 듣습니다. 예언자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외로워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군께서는 평범한 분이 아니시니……. 제가 헤아리기 어려운 영역이라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묵묵히 말하는 이현성의 어조에서는 서운함이나 거리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사실의 나열이었고, 그 목소리에는 오히려 제 주군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김독자는 새삼 이현성이라는 인물의 성정을 실감했다. 우직하고 든든한 방패. 그는 분명 유중혁이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이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 김독자가 잠들어 있을 궁을 순찰하러 들어올 수 있었겠지. 그런 이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한다니. 기분이 복잡했다. 기쁘기도 하면서, 동시에…… 고작 활자를 읽었을 뿐인 자신이 그런 말을 들어도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김독자가 언제나 꿈꿔오던 일이기는 했지만.
“다 왔습니다.”
김독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현성이 몸을 돌려 길을 열어주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깨끗하고 커다란 건물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기둥과 처마를 지탱하는 서까래의 목재가 번듯했고, 다른 건물보다 처마가 길게 뻗은 모양새가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이었다. 한밤중인데도 이곳저곳 불이 밝혀진 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니 의원이 맞는 모양이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성 씨도 들어가십니까?”
“어…….”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독자의 뒤로 따라붙었다. 아무래도 호위 임무를 연장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괜히 추가 근무를 시킨 건가 싶어 찔리기는 했지만 김독자는 표정을 가다듬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 예언자님.”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것은 신유승이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왜 여기에 있나 싶었는데, 손에 물 대야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일손을 보태던 모양이었다. 기특하군. 빙긋 웃으며 눈으로 인사를 하자 아이가 몸을 살짝 돌렸다.
“설화 언니를 만나러 오신 건가요?”
설화 언니라. 사실은 무인을 찾아온 거지만 어차피 겸사겸사 만날 생각이었으므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자 신유승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아까 낮에 있었던 전투에서 독에 당한 분들이 많으시대요. 그래서 평소보다 더 붐비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원래도 여기 일을 돕니?”
총총 걸어가던 아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 듯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다른 말은 더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그 속내를 어렵잖게 짐작했다. 아직 스스로를 보잘것없다 느낄 테니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겠지.
얼마 가지 않아 침상이 여럿 늘어선 널찍한 방에 도착한 신유승이 손나팔을 하고선 설화 언니, 하고 불렀다. 잠들어 있는 환자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소리를 죽여 불렀는데도 용케 알아들은 이설화가 고개를 들어 올려 신유승을 바라보고, 이내 김독자까지 발견하고선 밝은 미소를 지었다. ‘독자 씨.’ 하고 입모양으로 말하는 것이, 5년이나 지났건만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던 제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 같았다.
이내 이설화는 돌보던 환자의 몸에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문을 나섰다. 밖에서 병실 안쪽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김독자와 이현성을 데리고 뜰로 나와선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실 줄은 몰랐어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의선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이설화는 가볍게 손을 내젓고선 옅게 웃었다. 그럼 설화 씨라고 불러도 됩니까? 하고 묻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기에 그러기로 했다.
“저야 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죠. 언제나처럼요.”
“한참 바쁘실 것 같긴 합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주변을 둘러보며 말하자 이설화가 입가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독자 씨를 뵙고 싶었어요.”
“저도 들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뇨. 문제가 없어서 문제인걸요. 어떻게 그 독의 해독법을 아셨어요?”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김독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사실, 무인이 독에 당한 것을 확인했을 때 이설화라면 당연히 해독법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별다른 의심 없이 인명부터 구하고자 말을 꺼냈던 거였다. 당연했다. 김독자가 이 독의 해독법을 아는 것은 원작의 이설화 덕분이니까. 다행히도 대답을 더 고민할 필요 없이 이설화가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 보는 독이었어요. 왕세자 측에서 새로운 독을 개발했구나 싶었죠. 병사들이 눈부심이나 현기증, 체온 저하를 호소하는 걸 보니 그런 방향으로 해독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기는 했는데……. 해명초를 짓이겨서 입술 위에 올려놓는다니. 손쉬우면서도 효과적인 해결책이었어요. 덕분에 한시름 덜었답니다.”
“하하…….”
처음 보는 독이라. 김독자는 ‘멸살법’ 원작에서 안나와 차라투스트라가 내전 초기부터 이 독을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단시간에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하는 효과 빠른 독. 그런데 어째서 이설화는 처음 본다고 말하는 걸까. 이런저런 개입으로 시간선이 영향을 받아서 어긋났나?
일단 김독자는 적당히 웃어 보였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어차피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말이라곤 ‘예언자라서 알고 있었다’ 따위가 최선일 터였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하고 넘기자 이설화도 더는 묻지 않고 마주 미소 지었다.
“그런데 설화 씨. 낮에 있었던 전투에서, 이쪽 소속 병사가 아닌 사람이 한 명 있지 않았습니까?”
“아.”
이설화는 금세 그의 말을 알아듣고선 몸을 돌려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여기 도착했을 때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어요. 독의 진행 상태가 상당히 빨라서……. 그래도 독자 씨 덕분에 금방 해독해서 지금은 한숨 돌렸어요. 조금 전에 깨어 계시던 걸 봤으니 지금 가보시면 말씀을 나눌 수 있을 거예요.”
그분도 독자 씨를 찾으시더라구요. 그, 이상한 옷을 입은 하얀 남자는 어디 갔냐고……. 이설화의 재연에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 개탄스러웠다. 이상한 옷을 입은 것도 사실이고, 햇빛을 못 본 탓에 허연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젠장.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작대며 걷던 김독자는 이내 별실처럼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는 이현성과 이설화를 보고는 경례한 뒤 자리를 비웠다.
“일단은 저희 쪽 사람이 아니니 혹시 몰라서 다른 곳에 모셨어요. 지금은…… 그분도 부상을 입은 상태고, 부관께서도 같이 계시니 안전하겠죠. 말씀 나누세요.”
이설화는 별실의 문을 가볍게 두드려 안에 기별을 하고선 신유승을 데리고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김독자는 저의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이현성과 짧게 눈빛을 교환하고 별실 문을 열었다.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다. 깨끗한 침상 하나, 탁자 하나 정도가 놓여 있는 공간. 현대로 따지자면 개인실 개념인 듯했다. 그리고 그 침상 위에 앉아있던 사람이 옷을 추스르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몸 상태라도 확인하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뒤에 있는 이현성이 허둥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김독자는 묵묵히 그가 옷을 다 정리하기를 기다렸다가 한 발짝 다가서서 말을 걸었다.
“김독자입니다.”
“…….”
대뜸 이름부터 말하자 무인의 눈썹이 슬쩍 들어 올려졌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해보려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김독자는 특별한 속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이상한 옷을 입은 하얀 남자라고 칭하면서 찾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독자 씨라고 부르십시오.”
“……정희원이에요. 아무렇게나 부르세요.”
마지못해 제 이름을 밝힌 무인은 탁자 위에 놓인 끈을 집어 들어 풀어져 있던 머리를 다시 올려 묶었다. 딱히 팔을 들어 올리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부상이 있어도 중하지는 않겠거니 싶었다.
그런데…… 정희원이라. 김독자는 ‘멸살법’에서 어렴풋하게 스쳐 지나간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다지 배역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아마도 평민 소생이었던가. 완독자인 제게도 자세한 정보가 없으니 역시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는 침상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가볍게 앉으며 다시금 말했다.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던 것 같아서.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머리를 다 묶고선 물끄러미 김독자를 바라보던 정희원이 하아, 하고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뇨. 감사를 드려야 하는 건 제 쪽이겠죠. 독의 해독법을 알려주셨잖아요.”
“그 독은 목숨에 지장을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투가 어려운 상태로 만들 뿐이죠.”
“전장에서 전투가 어려운 상태가 되면 그게 곧 죽는 거예요.”
“희원 씨는 살아 계셨지 않습니까?”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누자니 결국 정희원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됐어요. 은원은 더 따져봤자 모르겠고, 일단 감사나 받으세요.”
“……예. 저도 감사합니다.”
잠시 입을 다문 정희원이 김독자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아까는 생전 처음 보는 복색을 하고 계시더니. 지금은 멀쩡하네요.”
“……그건…… 여러분은 아직 이해할 수 없을 패션입니다.”
“패…… 뭐요?”
“그런 게 있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자 정희원이 흠, 하며 팔짱을 꼈다.
“어쨌든, 흰 옷이라니. 제법 높은 나으리셨던 모양이죠. 아랫것 나부랭이가 이렇게 마주 앉아서 대화를 나눠도 되는 건가 싶네요.”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요? 흰 옷 입는 사람이 어디 흔한가.”
그렇기는 하겠지. 젠장. 김독자는 미간을 가볍게 좁히고선 곧바로 반박했다.
“그러는 희원 씨도 파천대군의 군사들이 입는 옷을 입지 않으셨잖습니까?”
“그야…… 저는 파천대군의 아랫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럼 어느 편입니까?”
“그건 아까 제가 물었던 물음인데요.”
“저는 이제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부러 보란 듯이 소매를 들어 올려 보여주자 정희원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거기에서 김독자는 미묘하게 싫은 기색을 눈치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정희원은 김독자의 뒤편에 서 있는 이현성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돌렸다.
“파천대군과 가까운 사람일 게 틀림없을 두 분을 앞에 놓고 해도 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어느 쪽 사람도 아니에요. 정확히는 파천대군과 왕세자 양쪽을 다 좋아하지 않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나라에 사는 평범한 소시민이라면 사실 누가 왕이 되든 알 바 아니겠지. 그냥 어서 수도인 서울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퍼진 전운이 가라앉기만을 바랐을 터다. 세력의 크기는 안나 쪽이 훨씬 더 크지만, 유중혁 개인의 무쌍이 워낙 출중한 탓에 전세는 거의 비등하게 유지되었을 것이고……. 그런 소모적인 전쟁이 길어지면 고통받는 것은 힘없는 서민들뿐이다. 그리고 정희원의 눈에는 타의로 안정적인 삶을 도둑맞은 이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독자는 그 눈을 가만히 마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해합니다.”
“그쪽이 뭘 이해한다는 거죠? 파천대군의 곁에서 흰 옷을 입는 사람이면서.”
정희원은 제법 매몰차게 응수해 왔다. 젠장, 이놈의 흰옷. 김독자는 속으로 혀를 차고선 고개를 잘게 저었다.
“저도 원래 높은 신분이 아닙니다. 이런 전투가 계속되는 걸 결코 반기지도 않고요. 그래도 정 불쾌하시다면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내전을 끝내기 위해서 여기로 왔습니다.”
“……당신이요?”
당신이 왜?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질문이었다. 김독자는 여전히 뒤를 지키고 서 있는 이현성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가, 다시 정희원을 바라보았다. 아직 유중혁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왕세자가 왜 이런 내전을 벌이고 있는지를 압니다.”
“왕이 되기 위해서 아닌가요?”
“아닙니다. 왕세자에게는 다른 목표가 있죠. 파천대군을 제거하려는 건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의 일환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방법으로 그걸 해결해 줄 겁니다.”
정희원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마 이현성의 표정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김독자도 자신의 말이 허황되고 이상하게 들릴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가 말한 것은 모두 사실이었고, 또한 그 방법을 통해 실제로 안나를 회유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의 안나가 제가 아는 그대로의 안나라면 말이다.
잠시간 입을 뻐끔거리던 정희원이 돌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더 추궁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터무니없는 소리 같지만, 그렇게나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죠.”
“없으면 이러고 있지 않습니다. 저도 목숨이 하나인데 그렇게 맘대로 살까 봐요.”
“어라. 아홉 개쯤 되시는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도 저는 고양이보다는 개를 더 좋아합니다.”
돌아오는 표정을 보아하니 다행히도 이런 종류의 농담 내지는 통용되는 상식도 현대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깨를 으쓱하자 정희원이 다시 말했다.
“그럼, 왜 왕세자에게 바로 가지 않고 굳이 파천대군 편으로 왔는데요?”
그의 말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씩 웃어 보였다.
“유중혁 녀석에게 빚진 게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