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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풍 타임트립물(?)

폭풍우가 예견된 어느 여름날이었다.
비가 오기 전날이 으레 그러하듯, 물속을 헤엄치는 듯 끔찍한 습기 속에서 김독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흘끗 책상 위에 놓인 디지털 온도계를 확인했다. 29.8℃. 눈을 가늘게 뜬 채 노려보듯 다시 바라보니 그 열기가 닿기라도 한 듯 온도계의 눈금이 0.1℃ 올라갔다. 좋아. 이 기세로 한 번만 더 올라가면…….
따르르릉.
옆에 놓인 휴대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며 기본 벨소리를 울려댔다. 상념 아닌 상념을 방해한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김독자는 한숨을 내쉬고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김독자. 나와.”
“다짜고짜 뭐야?”
“위치 카■으로 보낼 테니까 빨리 와. 지금! 당장!”
제 할 말만 남기고선 뚝 끊어진 전화에 김독자는 망연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바라봤다. 참으로 한수영다운 전화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선 화면을 끄려는 찰나 지이이잉, 하고 메신저가 알림을 보내왔다. ‘○○동 ■■카페’. 몇 번 가본 적 있는 장소였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고즈넉한 분위기의 카페로, 번화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가 커피 맛도 제법 괜찮아 좋은 인상이 남았던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찜통더위에 굳이 나가야 할 이유는 없다. 이제 슬슬 실내 온도가 30℃를 넘었을 것 같으니 에어컨을 켜고 쾌적한 공기를 즐기면서 웹소설이나 읽어야지…….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김독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
[ 안 오면 후회한다? ]
“…….”
도발적인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밀어 치웠다. 하, 시발. 그래. 어디 얼마나 대단한 걸 보여주는지 가보자고. 별거 아닌 일로 부른 거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간단히 휴대폰과 지갑을 챙긴 김독자는 그 길로 문을 나섰다. 책상 위의 온도계는 여전히 29.9℃를 가리키고 있었다.



“김독자. 여기.”
카페 문을 밀고 들어서기가 무섭게 채광이 전혀 되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한수영이 손을 흔들었다. 김독자는 그 옆의 유상아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주고선 카운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뒤 자리로 향했다.
“여기가 네 지정석이라더니 진짠가 보네?”
“어. 완전 딱이지.”
하지만 요즘 카페답지 않게 노트북을 올려놓기 딱 좋아 보이는 널찍한 테이블 위에는 음료 두 잔만 놓여 있을 뿐, 랩탑 비슷한 것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아이디어 노트처럼 보이는 것조차 없다. 뭐지? 김독자는 고개를 슬 기울였다. 이곳은 한수영의 집에서 가까워 그가 집필을 할 때 애용하는 카페다. 그러나 글을 쓰지 않을 거라면 여길 왜 온 것이며 자신은 왜 불러낸 것인가.
“글 쓰는데 심심하다고 노가리 까려고 부른 거 아니었어?”
“뭔 소리야. 내가 그런 걸로 널 왜 부르냐?”
몇 번이나 전적이 있는 녀석이 뻔뻔한 얼굴로 대응하기에 김독자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그럼. 왜 부른 건데?”
김독자의 물음에 한수영은 짙디짙은 미소를 피워올렸다. 후후. 후후후……. 음흉하게 웃는 것이 영 불길하기 짝이 없어 김독자는 망설임 없이 유상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도 얘가 불러서 온 거야?”
“응, 그렇지 뭐.”
“왜 부른 거래?”
하지만 믿었던 유상아조차 미소만 지을 뿐 답이 없었다. 뭐야? 지금 둘이 나 놀리나? 어이가 없어 뭐라고 한 마디 올려붙이려는 찰나 손에 쥐고 있던 진동벨이 부르르 울렸다. 벨을 꽉 쥔 채 한숨을 내쉰 김독자는 여기서 딱 기다려, 라며 삿대질을 하고선 카운터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컵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냉방이 너무 잘 되어 조금 추운 것 같기도 한데 괜히 아이스로 시켰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시였다. 여전히 붉은 빛을 내는 진동벨을 건네주고 음료가 담긴 잔을 집으려는데 동작이 턱 막혔다. 진동벨을 내민 손이 앞치마를 두른 직원에게 붙잡혔기 때문이었다. 어리둥절해 상대를 쳐다보기도 전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자 씨. 여기 좀 보라고요.”
이 목소리는……. 김독자는 삐걱거리며 잘 움직이지 않는 목을 움직였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희원 씨?”
“오. 아직도 안 잊어버렸네요?”
씩 웃는 얼굴, 그 뒤로 높게 올려 묶은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김독자는 얼빠진 표정을 가눌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자신만만한 표정, 곧은 자세, 조금 거친 듯한 손까지도, 제가 상상했던…… 그리고 목격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책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듯 조금도 다름이 없는 모습.
정희원은 재미있다는 듯 김독자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쿡 찔렀다. 독자 씨. 정신 차려요. 그렇게 놀랐어요? 그런 말들이 어렴풋이 들려 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한 김독자가 두 손으로 카운터를 짚었다.
“정말…… 정희원 씨입니까?”
“아이, 참. 그렇다니까요. 왜요? 증명이라도 해 줘요?”
근데 그것보단 저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그리 말하며 정희원은 김독자의 뺨을 찔렀던 손가락으로 카페의 입구를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그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을 바라본 김독자는 진심으로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현성, 이지혜, 이설화, 신유승. 네 사람이 투명한 카페의 문을 열며 들어오고 있었다.



“……설명해 봐.”
“흠.”
“빨리. 지금. 당장.”
김독자의 독촉에도 한수영은 눈을 감은 채 팔짱 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조바심에 참다못한 김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직전, 그가 슬그머니 한쪽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웃어?”
“가만있어 봐.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정리는 무슨……. 너 알고 있었지? 그래서 지금 여기 나 부른 거 아냐?”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린 한수영은 느긋하게 두 눈을 모두 뜨고선 손뼉을 짝 쳤다.
“자, 자. 다들 김독자랑 안부 인사는 나눴지? 그럼 나 잠깐 얘 빌려 간다?”
“뭐? 너 지금 뭔……”
말릴 새도 없이 한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김독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리 강하지 않은 힘에도 김독자는 불가항력으로 끌려가 일행으로부터 조금 거리가 떨어진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야, 한수영. 지금 이게 무슨,”
“김독자.”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한수영은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고개를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미리 말해두자면, 하나부터 열까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설명해 줄 수는 없어. 나도 모르거든.”
“뭐?”
“하지만,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예상’할 수는 있지.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너한테 할 얘기는, 뭐…… 과거의 내가 생각했던 예상 표절? 그런 느낌으로 들어 둬라.”
김독자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긴장감과 흥분이 섞인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말해봐.”
그리고 한수영은 ‘예상’을 시작했다.
“김독자. 너는 네가 바라는 대로 소원을 이루어주는 요정을 믿냐?”
“헛소리를 들으려고 온 건 아닌데.”
“아 씨발, 좀. ……그러면 이건? 네가 적는 대로, 현실이 되는 노트.”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라는 대로, 적는 대로 이루어진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이미 자신은 말도 안 되는 일을 몇 번이나 겪어 왔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한텐 그게 있었어. ……솔직히 나도 완전히 믿어지지가 않아. 저렇게, 진짜로 내 손으로 쓴 ‘등장인물’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데도 말이지.”
힐끗, 한수영의 시선을 따라 김독자는 자신들이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유상아와, ‘멸살법’의 등장인물 다섯 사람, 총 여섯 명의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카페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말이 되지 않는 현실을.
“그걸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정확히는, 네가 ‘멸살법’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때, 독을 해독하면서 알게 됐지.”
“……해독?”
“그래. 이걸 봐.”
한수영은 후드티 주머니에서 몇 번인가 접힌 종잇조각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펼쳐보니, 틀림없는 한수영의 필체로 휘갈겨진 글씨들이 보였다.

그 쇠뇌에는 ‘멸살법’ 세계에선 해독이 불가능한 독이 발려 있었음. 유중혁이 그 쇠뇌를 맞았다간 죽음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상황. 위기감을 주기 위한 장치 + 유중혁의 신뢰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 → ‘멸살법’ 세계가 아닌 현실에서는 해독 가능한 독이었음. 현실에서 치료를 받은 김독자는 완치.

“…….”
김독자의 머리 위로 깨달음이 떠올랐다. 지난 겨울, 유중혁과 서로에게 칼을 겨눴을 때. 자신의 몸 상태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 갑자기 완치되기라도 한 듯 날아갈 것 같은 몸이 되었었다. 그게 착각이 아니었단 말인가? ……독에 당했었던 거라고? 그 여름, 쇠뇌를 맞고서?
불현듯 유중혁이 했던 말들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몸 상태가 왜 그런 꼴이지?’, ‘네놈의 몸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그런 상태로 나를 이기려고 했나?’…….
“그래. 네가 여름 즈음부터 비쩍 곯기 시작한 건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야. 뭐, 그 영향도 조금은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는 거지.”
“…….”
말없이 종잇조각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수영이 손을 뻗어 휙, 그것을 낚아채 갔다. 그리고선 말릴 틈도 없이 왼손에 쥔 라이터로 그것을 태워 버렸다.
“뭐야, 왜 갑자기 그걸……”
“이게 마지막이야.”
너 보여주려고 남겨 두고 있었던 거다. 그리 말하며 한수영은 손 위에서 타들어 가는 낡고 빛바랜 종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타오르는 불꽃이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반질하게 비추고, 현실이 된 소설은 검은 재를 남기며 사라져 갔다.
“말했지만, 나도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어. 어쩌다 그 노트가 그런 힘을 갖게 된 건지, 어째서 시간 순서가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그런 건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내가 쓴 건 소설이 아니야. 현실이었지.”
그러니까 넌, 소설에 들어갔다가 나온 게 아니야. 실제로 존재하는 두 현실을 넘나든 거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가슴께로부터 솟구쳐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랬구나. 그 세계는 역시 실존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어렸던 자신이, 실존하던 그 세계가 멸망하길 종용했다는 것도 사실이 된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금 죄책감에 짓눌리려는 그를 한수영이 딱밤으로 건져 올렸다.
“또 헛생각하지?”
“야, 아파…….”
“네가 그 세계가 망하길 바랐던 건 사실이야. 근데? 그래서 뭐? 실제로 그 세계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쓴 건 나야.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내 쪽이 더 크다고, 멍청아.”
“…….”
“넌 독자지, 작가가 아니잖아. 책임을 지려면 내가 져. 알겠어?”
여전히 김독자가 대답이 없자 한수영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계속 그렇게 눅눅해져 있을 거냐? 정신 차리고, 저기 다시 봐.”
한수영은 김독자의 턱을 붙잡고 돌렸다. 천천히 돌아간 김독자의 시선이 ‘등장인물’들에게 닿았다. 이현성, 이지혜, 이설화, 신유승, 그리고 정희원까지. 그와 눈이 마주친 이들은 모두 빙긋 웃으며 처음처럼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알겠냐? 이제 그만 자책해도 돼. 너는 그 세계를 구해냈으니까.”
멍하니 벌어져 있던 김독자의 입이 다물렸다. 그 세계를 구했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직은 생각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듯싶었다.
“……그래. 그 얘긴 됐고. 그럼…… 저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데?”
“말 잘했네.”
한수영은 다시 처음처럼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텐 안 보여줬지만, ‘멸살법’ 리부트에는 에필로그가 있었거든.”
“뭐?”
“네가 내 ‘등장인물’이 되어 그 세계를 구하고 돌아왔을 때 말야. 전쟁 같은 마지막 편 집필을 끝내고 너희 집으로 달려갔더니, 네가 엉망이 된 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잖아? 구급차 태워서 응급실에 보냈다가 입원시켰더니 3주간이나 혼수상태였다가 기적처럼 생일날 깨어나시고?”
“그래. 그날 너 울었잖……”
“닥쳐! 네 착각이야! 운 건 유상아라고!”
딱밤을 날리려는 손을 재빨리 피하며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솔직하게 전하지는 못했지만 분명, 고마운 일들이었다. 그 세계에 제대로 된 결말을 되돌려 줄 수 있었던 것도, 그 뒤에 저를 돌봐준 것도. ……그걸 제대로 된 결말이라고 불러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련의 사건들이 진정되고 나서 마지막 편을 다시 읽어보니까…….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2퍼센트 부족한 것 같았단 말이지. 그래서 에필로그를 썼어. ‘멸살법’ 리부트의 마지막 편은 어쨌든 내가 처음에 구상했던 결말에선 조금 빗나갔었으니까.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걸 에필로그로 만들었지.”
――그리고, 그게 이 현실이야.
“……너와 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설정과 현실을 부여했어. 물론 그러기 전에 본인들이랑 충분히 대화도 했으니 걱정 말도록.”
“……대화를 했다고? 네가? 등장인물이랑?”
‘작가’ 한수영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다. 숨은 뜻을 알아챈 한수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그냥 등장인물이었다면 절대 안 그랬지. 하지만 저 사람들은…… ‘등장인물’이 아니잖아? 단순한 내 창작물이라곤 볼 수가 없어. 아니, 그럴 수가 없게 됐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애초에 그 세계가 원래 존재했고 내 이야기가 덧씌워진 건지, 내 이야기 때문에 그 세계가 만들어진 건도 모르겠으니까. 저 사람들이 나를 ‘작가’로 인식하는지도 좀 찜찜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따로 떨어져서 얘기하고 있는 거야.”
한수영 또한 작가로서의 자아로 많이 고민한 모양이었다. 자신처럼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무언가를 떠안고 있는 눈빛을 마주하며 김독자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래서…… 그 노트에 에필로그를 썼지.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그건 현실이 됐어. 그러니 그 노트는 이제 없어도 돼. 나도 더는 그런 물건이랑 엮이고 싶지 않다.”
“……왜? 쓰는 대로 이루어지는 노트인데. 아깝지 않냐?”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드물게도 말꼬리를 흐리며 한수영은 테이블 위에 흩어진 검은 재를 정리했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는 손에 모은 잿더미를 티슈 위에 모아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안나는…… 그 세계에 계속 남고 싶다고 했거든? 그러니까 이제 보기 힘들 거야.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안타깝게 됐네.”
“안나가?”
“그래. 지독하지, 진짜.”
김독자는 희미하게 그를 떠올렸다.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밝지도 화려하지도 않겠지만, 굳건하고 아름다울, 그가 이끌어 나갈 세계를.
그리고, 저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묻고 들었지만, 단 하나,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처음의 처음부터, 가장 묻고 싶었던 것. 그것을 알지 않고선 더는 나아갈 수 없다.
“한수영.”
“왜.”
“……그럼…….”
――유중혁은?
그리 물으려는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멈춰 있는 그의 현실 위로 맑은 풍경 소리가 울렸다.
딸랑. 카페의 문이 열리며 문에 붙어 있던 도어벨의 자개 장식이 잘그락거렸다. 김독자는 꽉 쥔 주먹을 테이블 위에 올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운명 같은 예감에 등이 꼿꼿하게 펴졌다.
“역시 주인공이라 늦게 등장하시네.”
이죽거리는 한수영의 목소리에 김독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영겁처럼 느껴지는 찰나에 걸쳐, 수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어…… 몸을 돌렸을 때.
김독자는 유중혁을 마주했다.
백색소음으로 채워져 있던 실내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은 듯했다. 열렸다 닫힌 카페의 유리문 틈새로 무더운 폭풍우를 머금은 공기가 스몄다. 툭, 투둑, 어느새 쏟아지기 시작한 것인지 물방울 묻은 검은 우산을 우산꽂이에 꽂아 넣는 몸놀림이 마치 검을 검집에 넣듯 날카롭게 유려했다. 일련의 무심한 동작들이 끝나고, 남자는 고개를 들고선 헤매지도 않고 곧장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마치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그리되기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저벅거리는 발걸음. 그 걸음 하나당 한 발짝씩, 사내는 두 현실을 가르는 선을 넘었다.
그리고 마침내,
끝없이 저를 읽어제끼고,
동시에 저의 행복을 간절히 소원한 남자의 앞에 서서.
유중혁은 김독자를 마주했다.
김독자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 긴 시간을 넘고, 고난으로 점철된 두 번의 삶을 거쳐, 결국은 제 앞에 오연히 선 이 남자가 몰고 온 무더운 폭풍은…… 서늘하게 식어 있던 몸에, 마치 봄바람처럼 느껴졌다.
멸망한 세계의 기록(滅世之錄)은 끝났다.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생일 축하한다, 유중혁.”
마침내 함께 맞이할 수 있게 된, 너의 태어난 날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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