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잠깐, 잠깐만! 이 손 좀 놓고……!”
“닥쳐라.”
이 미친, 유중혁 사이코패스 새끼! 김독자는 속으로 피눈물을 쏟으며 제 멱살을 틀어쥐고 있는 잘생긴 꼬맹이-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저를 한껏 노려보고 있는 가열찬 시선. 단정히 갖춰 입은 감색 의복의 긴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나보다 키도 조그만 게 힘은 왜 이렇게 세서……! 김독자는 넥타이가 당겨지며 목이 졸리는 감각에 다급히 머릿속의 페이지를 넘기며 욕설을 주워섬겼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역시…… 으음…… 시발. 모르겠다.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생각해 보자, 김독자. 나는 왜 교복을 입은 채 어딘지도 모르는 장소에 떨어져서 이 꼬맹이에게 대뜸 멱살을 잡혀 있는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가?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들이 있기는 했다. 김독자는 흐릿한 눈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봄날의 날씨는 쾌청했다. 괜찮은 노래라도 들으며 거리를 거닐면 절로 콧노래가 나올 것 같은 기분 좋은 날이었고, 그 들뜬 기분 그대로 김독자는 잠실역 4번 출구 앞을 서성댔다. 만약 지금이 약속 시간으로부터 20분이 지난 시각이 아니었다면 더 기분이 좋았을 텐데. 손에 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투덜대자 옆에 서 있던 유상아가 작게 웃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늦는다고 연락 오긴 했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벌써 개장 시간 지났다고…….”
그냥 먼저 들어가서 기다릴걸. 어깨를 으쓱한 유상아는 다시 지하철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과 유상아, 한수영 세 명의 그룹 채팅방을 재차 들여다보던 김독자는 [미안 늦잠잠; 금방간다;] 라고 적힌 한수영의 마지막 메시지를 밀어서 치워버렸다. 이 자식 이거 일부러 늦게 오는 거 아냐? 우리 엿 먹이려고?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설득력이 있는 듯 느껴져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야, 오늘의 김독자와 유상아는…… 10년 만에 고등학교 시절 교복을 꺼내 입은 스물여덟 살 직장인들이었으니까. 미친, 글자로 요약해두니까 더 소름 끼친다. 김독자는 몸을 부르르 떨며 저를 흘끔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그러니까, 롯■월드의 이벤트 때문이었다. ‘교복을 입고 오시면 나이 상관없이 자유이용권 무조건 50%!’ 이벤트. 한수영이 먼저 제안했고, 유상아가 수락했으며, 김독자는…… 이 나이 먹고 무슨 교복에 놀이공원이냐, 하는 삶에 찌든 직장인 같은 소리를 뱉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기대가 돼서 어젯밤에 잠을 설쳤다. 젠장.
미간을 한껏 찌푸리면서 손가락을 움직여 웹소설 플랫폼을 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웹소나 보면서 기다리련다. 어디 보자. 어제 올라온 ‘멸망 이후의 세카이’ 최신화나 다시 볼까……. 손가락으로 터치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한수영을 발견하고 무산되기는 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더라. 그래. 매표소 직원의 시선이 조금 머쓱하긴 했지만 어쨌든 할인을 받아서 입장을 했다. 중고등학교며 대학교며 모두 시험 기간인 덕에 놀이공원의 내부는 드물게도 한산한 편이었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야외부터 가자!”
익숙한 교복 치마 아래 체육복 바지까지 갖춰 입고 온 꼴이 고등학교 때와 똑같은 한수영이 당당하게 외쳤다. 이 녀석도 참 늙지를 않지. 빙긋 웃는 유상아와 한수영의 뒤를 따라 자이로드롭에 줄을 섰고, 어트랙션 몇 개를 연속으로 타고,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다시 실내로 들어온 참이었다.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가로등을 장식한 인공 벚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아, 언젠가 봤던 석촌호수의 벚꽃이 훨씬 예뻤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다.
어딘지는 몰라도, 최소한 서울은 아닌 곳. 그리고, 202x년도 아닌 시간.
이게 뭐야? 더 복잡해졌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꿈을 꾸나. 역시 그렇겠지. 그치만, 꿈치고는 너무 생생하지 않나? 정말로 숨이 막히는데……. 콜록, 기도가 조여들며 기침이 터져 나왔다. 김독자는 일단 목덜미를 틀어막고 있는 억센 손에 제 손을 얹으며 열심히 입을 놀렸다.
“중혁아, 유중혁, 잠깐. 이 손 놔봐. 얘기 좀 하자.”
유중혁의 가지런한 눈썹이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손아귀의 힘이 조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헉, 헉, 간신히 모자란 숨을 뱉어내고 있는데 그대로 몸이 밀어붙여져 나무 둥치에 등을 쾅 부딪쳤다. 거대한 벚나무에서 벚꽃잎이 몇 방울 흘러내렸다. 악,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김독자를 몰아붙인 유중혁이 대단히 복잡한 표정을 한 채 김독자를 올려다봤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지?”
아차. 김독자는 실수했구나 싶어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에서 유중혁은 왕족이다. 비록 지금은 폐위된 전 왕후의 자식이라서 대군(大君)이 아닌 군(君)에 그쳐 있지만. 평민이라면 왕족의 군호(君號)가 아닌 휘(諱)까지 알 턱이 없고, 평민이 아니라면 왕족인 본인이 모르는 얼굴이기도 쉽지 않을 테니 녀석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도 했다. 심지어 제 존함을 아무렇게나 막 부르다니.
김독자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앳된 구석이 있음에도 서늘하고 날카로운 눈매와 짙은 눈썹, 검은 머리칼. 어느 하나 흠잡을 구석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파천군(派川君) 유중혁.
그 이름에 담긴 모욕적인 의미를 알기에 김독자는 설핏 가슴이 짠해졌다. 파천문(破天門)의 계승자임에도 기어이 하늘을 부수지 못한 어린아이에 대한 조롱. 어머니를 잃고, 지지 세력을 모두 잃고, 궁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하는 신세인 13살의 유중혁이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김독자는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읽었으니까. 이 세계의 장대한 비극은, 이 녀석의 유년기로부터 시작된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자 가슴께를 짓누르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를 내뿜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그가 검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 안도했다.
“궁금하면, 이것 좀, 치워, 얘기를, 못 하겠잖아…….”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려 씩 웃자 유중혁이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손을 풀었다.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듯 새파랗게 노려보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김독자는 그다지 굴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유를 설명하라면 제대로 답할 수 없겠지만. 김독자는 가만히 호흡을 고르며 되레 여유롭게 넥타이와 셔츠를 정돈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중혁이 말했다.
“설명해라.”
“뭘?”
“……검이 없다고 네놈을 죽일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능청스레 대꾸해봤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쉰 김독자는 유중혁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김독자야.”
“이상한 이름이군.”
가차 없는 평가에 헛웃음을 지었으나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일단 이 위기에서는 벗어나야 할 것 같거든.
“이렇게 말한다고 네가 순순히 납득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해라.”
“나는 예언자야.”
궤변이지만 김독자로서는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다. 김독자는 눈앞의 유중혁이 주인공인 ‘멸살법’의 애독자였으니까. 비록 10여 년 전에 완결이 난 소설이기는 하지만.
슬쩍 고개를 들어 유중혁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궁의 그림자와 자그마한 호수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틀림없었다. 궁으로부터 이 정도 거리에 있는 호수와, 수백 년은 묵은 듯한 벚나무. 유중혁의 어머니인 연경왕후(演景王后) 진씨(陳氏)가 몸을 던져 자결한 장소다. ‘멸살법’ 전체를 통틀어 유중혁이 딱 한 번 찾는 장소이므로, 작품상의 어느 시기인지까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유중혁의 나이가 열셋임을 알아챈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이 녀석을 고작 열세 살로 볼까.
김독자는 다시 시선을 내려 유중혁의 얼굴을 살폈다.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아는 ‘멸살법’ 원작의 유중혁이라면 역시, 못 믿겠다며 죽여 버리겠다고 난리가 날까? 하지만 유중혁의 얼굴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 신중한 표정이 검은 눈동자를 타고 흘렀다.
“예언자라.”
“…….”
“그 괴상한 복색도 신통력의 일부인가?”
엥. 김독자는 제 옷을 내려다보곤 다시 옅은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아니, 왜 하필이면 교복 차림으로 여기에 끌려 들어오게 된 거야.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건 너무 수치 플레이 아냐? 어차피 유중혁은 이 복장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지만……. 애써 태연함을 가장한 김독자는 여상히 답했다.
“그래. 너는 처음 보는 복장이겠지.”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유중혁의 얼굴이 다시 서슬 퍼렇게 변했다.
“그게 왕족에게 존대를 하지 않은 죄를 경감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왕실 모독죄는 즉결처분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자, 잠깐! 잠깐만!”
눈빛으로 찔러 죽일 듯한 살벌한 기세를 말리려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유중혁 이 새끼 진짜! 원작에서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놈이라 약간 맛이 가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틀린 거 하나 없다. 김독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꿈이어도 죽고 싶지는 않다.
“난 이 나라에 처음 와 봐서 법도 같은 거 몰라!”
“그렇겠지. 아무리 예언자라 해도 그딴 복색을 즐기는 자가 이 나라에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다.”
그딴 복색이라니. 조금 억울했지만 일단은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김독자는 약간 화색이 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봐줘야지, 안 그래?”
“서경(西京)에 갔으면 서경의 법을 따르란 말도 들어본 적 없는 모양이로군.”
이 자식이……! 하여간 져주는 법이라곤 없는 놈이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존대하자니 어딘지 배알이 꼴렸다. 유중혁 인마, 내가 널 몇 년이나 지켜봤는데. 그것도 못 알아보고 말이야. 억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으나, 이내 김독자는 알 수 있었다. 제가 아는 유중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과 이렇게 오래 말을 섞지 않는다. 하물며 곧 죽일 생각이라면 더더욱.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자신이 지금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앞으로의 행동은 쉬이 결정됐다.
“유중혁.”
짙은 눈썹이 들썩거렸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군, 그런 눈빛이었지만 김독자는 되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기서 날 죽이면 네 손해야. 난 진짜 예언자니까.”
나는 너의 가장 큰 전력이 되어줄 수 있다. 반신반의하는 표정에 쐐기를 박기 위해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못 믿겠으면 예언 하나 할게. 지금으로부터 반 시진 이내에 네 호위 무사가 여기로 올 거야.”
“헛소리 마라. 내가 여기 있는 걸 녀석이 알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예언이지. 안 그래?”
잠시 김독자를 쏘아보던 유중혁은 어디 한 번 지켜보지, 말하고선 호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잎 몇 개만 동동 떠 있는 자그마한 호수.
「그 작은 호수는 변변한 이름조차 없었다. 다만, 그 크기에 비해 깊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어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해도 밑바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인근의 사람들은 그 호수를 일컫기를, 사람 잡아먹는 깊은 물이라 하여 심연(深淵)이라 불렀다.」
‘멸살법’의 묘사가 어렴풋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름 그대로 심연과 같이 깊은 호숫자락. 그 호수만큼이나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눈을 한 유중혁의 옆얼굴 위로 벚나무가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 나이 절반도 안 먹은 게 세상 다 산 것처럼 죽을상을 해가지곤……. 부러 농담이라도 건네 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김독자 또한 미미하게나마 그의 심경에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대감!”
타이밍 좋고. 저만치서 달려오는 커다란 체구의 남성을 보며 김독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달려온 듯하면서도 그다지 지친 기색은 없어 보이는, 어딘지 곰처럼 미련한 인상의 남자. 유중혁의 호위무사인 이현성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모릅니다. 설마 여기에 계셨을 줄은…… 엇.”
이현성을 일별한 유중혁은 뭐라 말릴 새도 없이 그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어 스릉, 검을 뽑았다. 얼떨결에 검을 뺏긴 이현성은 이내 그 검이 희멀건 사내의 목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경악한 얼굴을 했다.
“대감! 갑자기 무슨…… 이 자는 누구입니까?”
“김독자.”
대답인지 부름인지 모를 소리를 한 유중혁이 김독자를 빤히 쳐다봤다. 목젖을 아슬하게 겨눈 검 끝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정말 예언자라면, 맞출 수 있겠지.”
미약한 광기를 품은 고요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김독자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시발, 유중혁…….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일까, 아니면 죽이지 않을까?”
겨누어진 검신이 은빛 광채를 뿌렸다. 그런데도 김독자는, 문득……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르는 상황에도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유중혁. 그렇게 나와야지. 그 정도는 되어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냐. 멸망으로 치달을 이 험난한 세계에서 말이야.
“네가 원하는 것 이상의 대답을 해 줄게.”
“…….”
“지금 당장 네가 날 찌를지 아닐지는 모르겠어. 그건 네 작은 변덕에도 변할 수 있는 미래니까. 하지만, 하나 확실한 미래는 알아. 여기서 날 죽이면…… 너는 평생 이날을 후회하게 될 거다.”
확신에 찬 어조. 유중혁은 별처럼 빛나는 남자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몹시도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분명 사방이 잠겨 있을 이 장소에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나타나서는,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옷차림을 하고. 게다가 아무리 강등되었다지만 감히 왕족인 제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태도와, 목을 졸라 죽이려는 움직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배짱까지. 온통 수상한 점투성이였지만 그럼에도 전혀 다져지지 않은 몸이나 휘적거리는 행세가 도저히 암살자라고 의심하기는 어려웠다. 하기야 애초에 이 나라, 더 나아가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지금의 유중혁을 암살할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되랴. 제가 눈엣가시일 왕세자파 놈들도 저를 죽일 방도가 없으니 가둬두고만 있는 것 아닌가.
너무 수상한 구석이 많아서 되레 믿음이 가는 희한한 놈이다. 이 세상의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기척. 그래서 유중혁은, 정말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어떠한 강박적인 사고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켜볼 가치는 있겠지. 여차하면 나중에라도 죽이면 된다. 날이 서지 않은 무딘 쪽의 검 끝이 흰 피부를 스치듯 훑고 지나갔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불그스레하게 자국이 남는 연약한 살갗을 흘긋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이현성. 묶어서 데려와라.”
“파천군 대감, 이 자는 대체……”
“질문을 허한 적 없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이현성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김독자는 속으로 욕설을 지껄였다. 유중혁, 빌어먹을 새끼야.
손목이 묶인 채로 얼마나 걸었을까. 김독자는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궁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눈을 흐렸다. 글로 읽을 때는 이렇게까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유중혁 자식 기준으로 서술되어서 그랬던 건가. 젠장. 설상가상으로 길도 평탄치 않아 게임 회사의 야근으로 길든 연약한 몸뚱이는 금방 지쳐버렸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멀끔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 유중혁이 눈살을 모았다.
“약하군.”
“그럼 뭐, 예언자가, 체력도, 좋을 줄 알았냐?”
헉헉대며 대꾸하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이현성이었다. 무엄하다! 어찌 대감께 이런 막말을 한단 말이냐! 하지만 유중혁은 손을 내저었다.
“근본이 그런 놈이다. 신경 쓰지 마라.”
……화는 나는데, 뭐라 대꾸했다간 손목이 묶이는 것보다 더한 꼴을 당하게 될 것 같았다. 두고 봐라, 죽어도 존대 안 해줄 테니까. 투덜댄 김독자는 다시 속으로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아, 나는 왜 꿈에서까지 등산을 하고 있단 말인가. 뭐…… ‘멸살법’ 꿈이라니 제법 재밌기는 하지만.
그리고, 갑작스럽게 궁이 눈앞에 나타났다.
뭐야? 김독자는 순간 그 규모에 압도되어 입을 쩍 벌렸다. 웬만한 사람 키의 다섯 배는 될 높이로 솟은 거대한 문, 화려하게 칠해진 서까래와 양쪽으로 늘어선 견고한 돌벽. 내부를 전혀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하늘을 찌를 높이의 폐쇄적인 벽이 온통 시야를 가렸다. 건축 양식 따위엔 완전히 문외한인 김독자였지만 이러한 만듦새는 생전 처음 보는 것임은 분명했다. 한중일 삼국의 양식을 적당히 버무리고 약간의 이질적인 느낌을 추가하면 이런 형태일까, 생각하니 문득 그것이 제 상상력의 한계인 것만 같아 조금 우스워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궁에 결계 같은 게 쳐져 있다더니 진짠가 보네…….”
명칭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하는 세계관인 ‘멸살법’이었다. 신기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는 김독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유중혁은 방향을 꺾었다.
“어디 가? 궁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이 문은 안 됩니다.”
대신 대답한 것은 이현성이었다. 그 침통한 표정을 본 김독자는 곧 이유를 눈치챘다. 아, 그래. 이 문은…… 유중혁에게는 열리지 않는 문이었던가. 읽은 지 오래되어 세세한 설정은 기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깨어나면 ‘멸살법’을 재탕할 각인가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파천군 대감.”
낯선 목소리에 김독자는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가볍게 끌리는 붉은 의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건 누구지? 활자로 읽었더니 얼굴만 봐서는 못 알아보겠는데……. 눈을 가늘게 뜨자니 유중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천 대감.”
천 대감? 천인호를 말하는 건가. 제 기억이 맞는다면, 초반에 잠깐 반짝하는 놈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왕세자파 중 하나인 녀석이었다. 천인호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김독자를 쳐다보았다.
“저 자는 누구입니까? 이상한 옷을 입고 있군요. 설마하니 신분이 확인되지 않은 자를 궁에 들이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파천군이 경거망동하시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요.”
경거망동? 도저히 아랫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하물며 왕족에게라면 더더욱. 입을 잘 터는 놈이었군. 김독자는 슬쩍 눈을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듣는 자신조차도 기분이 나쁜데, 당사자인 유중혁은……. 그리고 그 순간 김독자는 그만 헛숨을 들이키고 말았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금빛 아우라가 번지듯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손목이 묶여 있지 않았다면 눈이라도 비비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초자연적인 힘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라지만, 그것은 후에 나타날 외계의 존재들 때문에 붙은 설정이었다. 그런데 한낱 인간인 유중혁에게서 일어나는 이 기운은, 도대체.
넘실거리는 금빛이 피부를 할퀴듯 따가워졌다. 이걸 보니 아까 저를 죽일 기세라고 생각했던 건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구나 싶었다.
“어이쿠. 사람 잡겠습니다, 대감. 진정하시지요.”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 이걸 보고도…… 저딴 말을 하나? 간이 얼마나 큰 놈이야? 하지만 천인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얼른 이현성을 돌아보니…… 화가 난 얼굴이기는 하지만,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깨닫고 말았다.
이 사람들에겐, 이게 안 보이는구나.
유중혁이 사나운 눈초리로 천인호를 노려보았다. 그와 함께 찌르듯 날카로워지는 기운이 두려울 만치 선뜩했다. 차라리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 싶을 정도로.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시야가 뒤집혔다.
“어? 어어?”
“사사로이 간섭하지 마라, 천 대감. 문제 따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뭐야, 지금? 당사자인 김독자조차 눈치도 못 챌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순식간에 유중혁의 어깨에 짐짝처럼 둘러메인 김독자는 깜짝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균형을 잡으려 황급히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짚으니 얼마나 단련을 한 것인지 넓고도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러니 아무도 열세 살로 안 보지. 적어도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김독자는 두 번째로 깜짝 놀라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이 자식이 왜 갑자기 이런 선언을 하지? 내가 뭔 짓을 할 줄 알고? 그런 생각을 담아 열심히 쳐다봤으나 유중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인호로부터 몸을 돌렸다.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야, 이제 내려줘…….”
커다란 궁을 빙 둘러 모퉁이를 돌아 천인호의 시선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김독자는 유중혁의 어깨를 탁탁 내리쳤다. 도대체 언제 끊은 것인지 손목을 묶고 있던 끈도 사라진 상태였다. 정말 귀신같은 솜씨였다. 혀를 내두르기도 잠시, 유중혁이 서늘한 어조로 대꾸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군. 기절시켜서 끌고 가기 전에 닥쳐라.”
어느 입이 이렇게 고운 말을 할까……. 유중혁 개자식. 김독자는 기어이 파천군 궁에 도착한 뒤에야 저를 내려놓는 유중혁을 향해 시선을 쏘아 보내고는 흐트러진 셔츠를 정리했다. 이놈의 교복 차림 불편해 죽겠네.
“대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자는……”
“일단 별채에 둔다. 천인호에게 들켰으니 소문은 금방 퍼지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입이 무거운 자를 시켜 감시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신분을 위장할까요?”
“그건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지.”
일단 저 옷이 몹시 눈에 띄니, 얼른 갈아입히도록……. 유중혁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하늘거리며 걸어가는 품새가 가히 볏짚 인형과 같았다. 혼자서 어딜 가는 거지, 제 채신머리는 챙길 줄 아는 놈 같았는데.
몇 걸음 가지 않아 어떤 나무 아래에 선 김독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나무의 몸통에 가져다 댔다. 유중혁은 미간을 한껏 좁혔다. 하고 많은 나무 중 왜 하필 그것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예언자라는 게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김독자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김독자!”
유중혁은 깜짝 놀라 얼른 몸을 움직였다. 황급히 손을 뻗어 잿빛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유중혁. 이지혜를 찾아. 해상전신(海上戰神) 이지혜.”
“……뭐?”
“2년 안에 큰 해상전이 벌어질 거야. 그때 찾으면 늦어. 내 말 들어라. 알겠지?”
그리고 지어 보이는 미소가, 마치 물에 녹아 흩어지는 벚꽃잎 같아서. 유중혁은 일순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제 눈앞에서 목줄 잡힌 개처럼 질질 끌려가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붙잡았던 그 커다란 벚나무 아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양 서 있던 희끄무레한 남자의 형상이 지워졌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던 것처럼.
“……김독자?”
옷자락을 잡아채지 못한 채 허공을 거머쥔 손안에는, 분홍빛 잎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야. 넌 무슨 밥을 먹다가 졸고 그러냐?”
김독자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헉, 하고 가쁜 숨이 뱉어졌다. 머리가 핑 돌았다. 이지러졌던 시야가 간신히 돌아오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감각이 실감이 날 때쯤 한수영의 의아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어?”
“많이 피곤했어? 하긴, 요즘 야근이 좀 많기는 했지.”
옅은 걱정이 서린 두 얼굴. 김독자는 세차게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롯■월드의 실내 음식점. 손에 쥔 젓가락까지 그대로였다. 아, 역시 꿈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꿈 치곤 너무 선명해서 하마터면 깜빡 몰입할 뻔했네. 마지막에 유중혁에게 그런 소리를 한 것도 아마 과하게 몰입한 탓일 터였다.
“먹긴 그래도 거진 다 먹은 것 같네? 일어날까?”
“어어, 그래……. 좀 피곤했나 봐.”
아직도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고 붕 뜬 듯한 기분이었다. 하긴, 다른 것도 아니고 ‘멸살법’ 꿈이었으니.
일부러 잊어버리고 살려고 애를 썼었다. 수십 번도 더 읽어 내용을 달달 외고 다닐 정도로 좋아했으면서. 하지만, 어떻게든 기억에서 지우려 하니 지워져 나가는 것 같았다. 바쁘고 고된 현실을 살면서 이제는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책장을 펼치면 들려오던 이수경의 목소리, 한 세계의 멸망과 함께 참혹한 결말을 맞이하던 유중혁의 최후. 그런 것들을, 이제는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김독자는 생각했다. 그 세계에 들어선 순간, 혈관을 타고 흐르던 안온함을. 어찌할 바 없이 두근거리던 가슴을.
살아있다고, 느꼈던 감각을.
“야, 근데 너 이거 뭐야? 어디서 다쳤어?”
“……응?”
한수영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턱을 매만졌더니 가느다란 흉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에 긁힌 것처럼 살짝 부어오른 자국. 고개를 가까이해 살펴본 유상아가 음, 하며 눈을 깜빡였다.
“놀이기구 어디에 긁혔나? 빨갛네.”
“피는 안 나는 것 같은데.”
괜찮으면 다음 거 타러 갈……. 김독자. 너 진짜 아프냐? 걱정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꽂혀 들었으나, 김독자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가락 끝에 닿아오는 흉터 자국을 한없이 더듬으며. 유중혁의 얼굴을, 날카로운 웃음을 떠올렸다.
꿈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것만은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