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
* 베트로버스 AU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찰랑거리는 물방울이 부옇게 흩어지는 소리.
유리병을 귓가에 가까이 한 채 가만히 손을 움직이면, 마치 파도가 치는 백사장 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가느다랗게 끊어질 것만 같은 소리에 의지해 눈을 감으니 끝도 없는 암흑만이 펼쳐진다. 하늘은 검고, 바닷물도 까맣고, 눈을 뜨면, 손 안에 들려 있는 유리병 속 액체도 검다.
김독자는 어둡게 요동치는 자신의 유리병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어머니의 보라색도, 아버지의 붉은색도 아니다. 명백하게 빛을 빨아들이는 새카만 액체. 어쩌면 그 색깔마저 이렇게 암담한지, 김독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미래인 것만 같아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에텐. 그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도 전에 그 단어를 먼저 배웠으며, 철이 들고 난 뒤로는 능숙하게 수명병을 숨기는 방법을 배웠다. 캐묻는 친구들의 말에 대답이 궁해져 아예 병을 들고 다니지 않는 날도 많았다. 어차피 누가 뚜껑을 열어도 훔쳐갈 수 없는 수명이다. 물론 다른 이에게 수명을 양도받을 수도 없으며.
또한, 언제 죽음이 찾아올 지 알 수 없다.
에텐의 수명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치 엠비와도 같이. 그러나 영원히 사라질 일 없는 그 하얀 액체와는 달리, 에텐의 검은 물은 어느 한 순간에 전부 사라져버리며 그 때 소유자는 죽음을 맞이한다. 김독자는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을 자신만은 알지 못한다. 그 소외감은 지독히도 컸고, 무지는 공포를 불러왔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설마, 요즘은 백세 시대라는데. 100살까지도 사는 마당에 아무리 에텐이라지만 일찍 죽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으나. 스무 살을 훌쩍 넘기고 서른이 더 가까워진 지금, 그는 자신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무지는 죄였고 저주였다. 수명의 감소 속도에 맞춰 인생을 설계하고 미래를 그리는 수많은 이들 사이에서 김독자는 언제나 독자(獨子)였다. 연애? 사랑? 그런 건 사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로의 수명이 맞는지 확인하고 결혼을 하는데, 그 누가 에텐을 사랑하고자 할까. 새카만 빛깔이 불길하다며 보자마자 눈을 돌려버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김독자는 손을 들어 눈가를 꾹 눌렀다. 유중혁 앞에서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자신의 마음을 죽이기로 결정한 지 10년, 그 긴 시간동안 무던히 감정을 깎아내 왔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입술이 맞닿은 순간 손쓸 수도 없이 벅차오르는 감정의 파도에 잠식당할 뻔했고, 때문에 곧바로 밀어내지 못했다. 차라리 닿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한 번 손에 닿았던 것을 놓는 것은 배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김독자는 손가락 끝으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예 관심을 끊었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처럼, 영영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김독자는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기뻤다.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행복했다. 끊어내려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러지 못해 팬으로 남았던 것 아니었던가. 쌍방의 감정 교류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그저 책을 읽듯, 영화를 보듯,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렇기에 그의 팬을 자처했고,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했을 때 되려 안심했었다.
그런데 그 유중혁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유중혁이 명백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봤을 때…… 김독자는, 이제 정말로 자신이 벽을 세워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마른기침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시발, 감기라도 걸린 건가. 유중혁이 떠난 후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쪼그려 앉아 한참이나 운 탓인 듯했다. 김독자는 성의 없이 옷을 걸쳐 입고 이불로 몸을 둘둘 감았다. 일단은 좀, 푹 자고 싶다……. 그대로 눈을 감고, 꿈조차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중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조금 축축한 것이, 자면서 땀이라도 흘렸나. 등이며 어깨도 땀에 젖어 서늘하다. 악몽을 꿨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무언가 꿈을 꾼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악몽이라기엔 지나치게 부드럽고, 더운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옆에 놓인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1시를 조금 넘은 시간. 간만에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어젯밤 늦게 황망한 심정으로 침대에 누워 아주 오랫동안 뒤척이지 않았던가.
- 부르르르
휴대폰이 손 안에서 울었다. 액정을 확인하니 ‘김남운’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히 떠올라 있다. 유중혁은 그의 성씨만 보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을 뻔했던 자신이 우스웠으나 일단은 얌전히 전화를 받았다.
“유중혁! 한 판 하러 가자.”
“……형이라고 안 하나, 김남운.”
“오늘 내가 이기면 되는 거 아님? 빨리 나와. 상아 누나랑 이지혜도 온댔음.”
유중혁은 이마를 짚었다. 웃기는 놈이다. 엠비라서 나이를 안 먹으니 곧 동갑이나 다름없다는 기적적인 논리를 펼치는 고등학생. 유중혁과 같은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게이머 동료이기도 했다. 김남운은 어딘가 살짝 맛이 간 놈이었고, 하도 붙어대는 게 귀찮아서 네가 이기면 마음대로 불러도 좋다고 했더니 이제는 이 모양이다. 오늘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 다음에…… 그렇게 대답하려 했지만, 이대로 집에 있어봤자 썩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알겠다고 대답했으며, 곧 근처의 PC방 입구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사부! 얼른 와!”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이지혜를 보고 유중혁은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같은 소속사의 전도유망한 후배다. 그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유상아도 가볍게 목례를 건넸고, 김남운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붕대를 감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었다.
“유중혁, 오늘은 반드시 이겨주마…… 크킄.”
“또 헛소리 시작이군.”
“김남운 추하다. 지금까지 사부랑 전적이 몇 대 몇?”
“시, 시끄러!”
“추운데 얼른 들어가죠.”
넷은 아무도 없는 구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곧바로 진행된 2대 2 경기의 승자는 당연하게도 유중혁과 이지혜의 팀이었고. 김남운은 분한 듯 책상 위에 주먹을 올리고 파르르 떨었다.
“크읏, 유중혁…….”
“형.”
“……유중혁 형…….”
유중혁이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눈을 감고 의자 깊숙이 몸을 묻자 옆자리의 이지혜가 머뭇거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사부. 무슨 일 있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 옆자리에서 자신을 보고 있던 유상아도 입을 열었다.
“오늘 중혁 씨답지 않게 실수가 꽤 많았는데요.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사부가 이렇게 실수를 많이 할 리 없다고. 어디 아파?”
“아니.”
제 이마를 짚으려 들길래 가볍게 밀어내고 몸을 조금 일으켜 앉았다. 그대로 가만히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젠장, 그래. 김독자에 대해 생각하느라 실수를 너무 많이 했다. 어젯밤, 눈이 발갛게 부어오른 채 그만 돌아가 달라 말하는 김독자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순순히 그의 집을 빠져나왔었다. 그리고 그 뒤로 한 순간도 빠짐없이, 마치 고장 난 테이프처럼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고 있었다. 역시 그 때 더 물어봤어야 했나. 하지만 그 우는 얼굴을 보자니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혹시?”
“나는 이제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이지혜와 유상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부들부들 떨던 김남운도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미친, 유중혁 애인 있었음?”
“형.”
“……유중혁 형 애인 있었음?”
“아니.”
“씨바 뭔데?!”
“사부, 누구한테 그런 소릴 들었는데?”
이지혜의 물음에 유중혁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유상아는 눈치 빠르게도 그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듯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니 미친 애인도 아닌데 이제 안 좋아한다는 게 뭔 개소리임? 절교 선언?”
“절교?”
“애인 아니면 친구나 지인, 뭐 그런 걸 거고. 근데 이제 안 좋아한다는 건 만나기 싫단 소리 아님?”
“…….”
유중혁의 미간이 삽시간에 좁혀지는 것을 바라본 이지혜가 황급히 김남운의 등짝을 때렸다. 아, 왜 때려! 분위기 파악 좀 해, 멍청아. 낄끼빠빠 모르냐? 아니 씨 내가 뭘 어쨌다고……. 투덜거리는 김남운의 입은 재차 이어진 이지혜의 등짝 스매싱으로 조용히 막혔다. 유상아가 유중혁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입을 열었다.
“중혁 씨. 그 사람이랑 원래 알던 사이였어요?”
“글쎄…….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다고 했습니다.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답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유상아가 이지혜와 김남운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중혁 씨.”
“예.”
“그 분 좋아하죠?”
유상아의 말에 서로 멱살을 잡을 기세로 투닥대던 두 고등학생도 입을 벌리고 뜨악한 시선을 보내왔다.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좋아합니다.”
“미친! 씨발! 유중혁 미친 거 아님?”
“아 김남운 좀 닥쳐봐!”
김남운의 입을 틀어막은 이지혜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유중혁을 쳐다봤다.
“사부, 진짜야?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그래.”
“근데 그 사람이 이제 사부 안 좋아한대?”
“…….”
유상아가 황급히 말했다.
“중혁 씨. 차분하게 생각해요. 일단은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해요.”
“무슨 뜻입니까?”
“그 분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대화를 나누지 않고 어림짐작으로 의도를 파악해선 안 돼요. 그러면 오해만 불어나고, 결국엔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직접 물어보라. 역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 유중혁 본인도 그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하려고 하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웠다. 그에게는 꽤나 낯선 감정이었다. 두려움. 어두워지는 유중혁의 표정을 확인한 유상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무슨 대답이 돌아오더라도, 외면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원래 중혁 씨의 방식 아닌가요?”
유중혁은 눈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현명한 사람이다. 이지를 잃지 않는 저 눈동자는 팀을 승리로 이끌곤 하는 주된 전력이기도 했다.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유중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화 좀 하고 오지.”
“와, 시발. 행동력 존나 쩌네……”
이지혜에게 눈짓을 하자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이 놈 입은 내가 확실히 막을게! 그런 눈빛이 되돌아왔고. 유중혁은 PC방 문을 열고 나가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김독자는 눈을 감은 채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하다가, 곧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통화 괜찮은가?”
“아…….”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미친……. 잠결에 휴대폰이 울리길래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받았던 것이다. 머리가 핑 돌았다. 몸이 물을 먹은 듯 무거웠다. 엄습하는 한기에 잠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고 있자니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김독자?”
“어, 어어…… 중혁아…….”
빠르게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움직여 대답하자 유중혁의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혹시 괜찮으면, 잠깐 만날 수 있나.”
“어…… 응? 지금……?”
눈을 깜빡이며 몽롱하게 고개를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3시를 넘어가는 시곗바늘을 확인하고, 김독자는 옅게 숨을 몰아쉬었다.
“미안, 중혁아, 오늘은 내가 좀……”
미처 막지 못한 밭은기침이 새어 나왔다.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김독자? 어디 아픈가?”
“아, 아냐, 중혁아. 나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집으로 가겠다.”
“어? 야, 잠깐만,”
뭐라 더 대답하기도 전에 통화가 끊어졌다. 유중혁, 이, 미친 새끼……. 행동력 하나는 무시무시한 놈이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한 것 같았다.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다시 정신을 잃듯 잠에 빠져든 김독자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으응…….”
“깼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더니 커다란 손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그대로 살짝 내리눌러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어준 유중혁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자도 된다. 아직 6시야.”
“아, 아니, 야. 네가 왜 여기……”
머리가 아파 인상을 조금 찡그리자니 유중혁의 잘생긴 얼굴에 걱정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한 박자 늦게 유중혁과 잡담을 하다가 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그의 생일이라는 얘기를 했던 것까지 생각이 났다. 미친, 내가 미쳤지 진짜. 뭘 믿고 이 행동력 넘치는 남자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줬을까.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니 손이 다시 이마를 덮어온다. 열이 있는데. 약 먹고 다시 자는 게 낫지 않나.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약 없어.”
“내가 사 왔다.”
“…….”
어처구니가 없어 빤히 쳐다봤더니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집에 상비약도 구비해 놓지 않고 사는 거지. 그 흔한 해열진통제도 없고. 감기약도 없고.”
“……너 혹시 내 집 뒤졌냐?”
유중혁은 아랑곳하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라도 만들려고 냉장고를 열었더니 텅 비어 있고. 대체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거야.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있는 게 신기한 수준이다.”
“야, 그 정도는 아닌……”
“조용히 해라.”
서슬 퍼런 목소리에 김독자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 별로 할 말은 없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으니까. 김독자는 요리에 재주가 없었고, 그래서 끼니는 늘 적당히 해결했다. 하지만 그다지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기에 아픈 일은 별로 없었다. 방송을 못 할 정도로 아파서 쉬는 날은 한 해에 고작 두세 번 정도일 정도로 성실하게 방송을 하고 있었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집에 약이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죽 끓여 뒀다. 먹고 나서 약 먹어라. 공복에 먹었다간 속 버릴 수도 있으니.”
“죽?”
그러고 보니 희미하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네가 직접 한 거야? 물으니 당연한 걸 왜 묻냐는 시선이 돌아온다. 입맛이 까다로워 직접 요리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겪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김독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간단히 막아 세운 유중혁은 문을 열고 나가더니, 잠시 후 야채 죽이 담긴 그릇과 숟가락을 쟁반에 얹어 들고 돌아왔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직접 숟가락을 든 김독자는 죽을 후후 불어 입에 넣었다.
“……맛있네.”
“내가 만든 건데 맛이 없을 리가.”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웃기는 놈이다, 정말. 유중혁 미친놈. 진짜 왜 그러냐? 왜 나 같은 걸 좋아해? 갑자기 목이 뻐근하게 메여와 김독자는 죽으로 목구멍을 막았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기침감기약과 해열제까지 챙겨 먹인 뒤에야 유중혁이 그를 놓아주었다. 김독자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고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김독자.”
“왜.”
“…….”
불러놓고 말이 없다. 눈을 살짝 뜨고 바라보자 시선이 똑바로 꽂혀들었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조금 내리깔았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안 해도 돼. 하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겠다.”
“……뭔데.”
어제 일 얘기겠지, 물론. 김독자는 옅은 한숨을 뱉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리자, 신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제 했던 말.”
“…….”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눈을 깜빡이고, 짧은 망설임이 머릿속을 스치고. 하지만 이미 결심했다. 이 이상 유중혁이 그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은 막아야 했다.
“있는 그대로의 뜻이야. 말 그대로.”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만에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그래. 짧은 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너무나 깊었고. 그걸 깨달은 김독자는 그저 말없이 이불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유중혁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가 싫다면 더 이상 접촉하지 않겠다.”
“…….”
“하지만, 이전처럼은 만나줄 수 없나.”
이전처럼. 어젯밤 일이 있기 전을 말하는 것일까. 김독자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중혁.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난 이대로 너와 인연이 끊어지는 걸 바라지 않아.”
“유중혁……”
“너한테 부담이 간다면 거절해. 하지만 날 걱정해서 하는 소리라면, 신경 쓰지 말고 대답해라.”
김독자는 물끄러미 유중혁을 마주봤다. 곧고, 강인한 눈동자. 그래, 이 녀석은 그런 놈이었지. 웃음이 나왔다. 유중혁. 그거 알아? 나는 네 그런 모습이 정말 좋아. 너를 좋아해, 아주 많이. 네가 여기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텅 비어있던 집 안이 가득 차는 것 같아. 따뜻한 죽이 들어찬 뱃속으로부터 온 몸으로 온기가 퍼졌다. 김독자는 늘 외로웠고, 그렇기에…… 이토록 저만을 바라보는 올곧은 시선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중혁아. 나 너무 이기적이냐. 근데 어쩔 수 없잖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다면. 나한테도,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김독자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 행복한데 울 이유가 없잖아. 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고.
어쩐지 조금 눈앞이 흐렸다.
유중혁이 잔소리를 남기고 떠난 뒤 김독자는 이불에 폭 감싸인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딸깍거리는 마우스 소리와 옅게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방 안을 메웠다. 포털 사이트 검색을 통해 마침내 원하는 답을 얻어낸 김독자는 그대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바닥에 끌렸지만 개의치 않았고, 그대로 조금 걸어 책꽂이 위에 놓여 있는 유리병 앞에 섰다. 손 안에서 작은 종이조각이 바스락거렸다. 김독자는 그것을 돌돌 말아 직경을 작게 만들었다. 그대로 수명병의 뚜껑을 열고 종이를 안에 집어넣은 뒤 닫으니, 하얀 종이는 새카만 액체에도 젖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떠올라 있었다. 마치 망망대해를 떠가는 유리병 속 편지 같다.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병을 가볍게 두드렸다.
중혁아, 나는 네가 나 없이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적은 진심이 손을 떠나자 마음도 조금 홀가분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의 미래에 이 병이 비는 날이 온다면, 이걸 발견해 주는 건 유중혁이겠지.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영원을 살아갈 것이고, 행복해져야만 했다. 괜찮아. 이제는 정말로 괜찮아. 김독자는 수없이 되뇌었다. 스스로를 속일 정도로, 아주 많이 반복해서.
겨울의 추위가 조금 물러간 2월 초순의 어느 밤이었다.
[뭐임??? 나 구마님 방송 연령제한걸린거 첨봐]
[헐 나 성인이라 존1나 다행]
[나이먹은게 이렇게 기뻐본적은 오랜만이다...]
[구마님 오늘 왜 연령제한잇어요??? 꾸금겜함???]
[ㅁㅊ 꾸금겜한다고??? ㅋㅋㅋㅋㅋㅋ]
[엥 배경 처음보는덴데? 뭐예요??]
김독자는 카메라에 얼굴을 내밀었다. 잘 잡히는지 손을 흔들어 보이고,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게임 방송이 아닙니다.”
[ㅅㅂ...미쳣내 뭐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와 씨 뭐야 미쳣다]
[둘이 완전 장난 아닌데...;]
〔 불꽃천사우롈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
》 전!우!애! 《
저 시청자는 도대체 왜 늘 전우애를 외치는 걸까. 김독자가 소리 내서 웃으며 접시에 가지런히 담겨 있는 빨간 양념의 생새우 무침을 카메라에 담았다.
“여러분, 이거 보세요. 완전 맛있겠죠.”
손가락으로 새우 꼬리를 잡아 입에 넣고 우물거리자 채팅창에 우는 소리가 가득해졌다.
“김독자, 간 봐봐.”
유중혁이 거의 다 끓어가는 나가사키 짬뽕을 나무 숟가락으로 한술 떠 그에게 내밀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김독자는 웃으며 후후 불어 식히고 국물의 맛을 봤다. 눈을 굴리며 냠냠거리고 있으니 유중혁도 그대로 숟가락을 입에 가져다 물었다. 좀 짠가? 아니, 지금 딱 좋아! 그럼 이대로 하지. 유중혁이 가스 불을 낮췄다.
“자, 저희 술은 소주입니다. 안주도 다 된 것 같으니 음주방송 시작하죠! 같이 술 까실 분들 준비하세요!”
김독자가 카메라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 세팅을 시작했다. 냉장고에 넣어뒀던 소주병을 꺼내오고, 수저와 소주잔을 식탁에 놓았다. 그 가운데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나가사키 짬뽕과 생새우 무침이 놓였다. 유중혁이 의자를 빼내 앉고, 김독자는 카메라를 움직여 각도를 조정한 뒤 자리를 잡았다.
[하,,,, 술사왔다]
[구마님이랑 랜선짠!!!]
[패왕님... 같이 술자리해서 영광입니다...]
유중혁이 소주병 뚜껑을 따고 김독자의 잔을 채웠다. 병을 받아든 김독자는 그의 잔도 마주 채웠다. 술잔을 들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여러분, 같이 마셔요. 짠!”
[짠~♡]
[랜선짠!!!!]
[크으으 나도 짠]
두 잔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맞부딪히고, 소주는 금방 입에 털어 넣어졌다.
“크으, 써.”
“천천히 마셔라. 술도 약하면서.”
“알았어, 알았어.”
[구마님 술 약해요???]
[머임 귀여워...]
[주량 얼만데요??]
“저요? 소주…… 반 병 정도?”
“그것도 안 되는 것 같던데.”
“아니거든, 유중혁.”
[근데 웬 음주방송ㅋㅋㅋㅋㅋㅋㅋ]
“아, 거 사람이 주량 약하면 술도 못 마십니까?”
[ㅋㅋㅋㅋㅋㅋㅋ개웃겨]
[패왕님은요???]
[유중혁 설마 술도 잘마십니까]
김독자가 유중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얘는 좀 세요. 한…… 두 병 마시냐?”
“글쎄. 세 병 정도 되나.”
[뭐야 진짜 못하는게 머임]
[존1나완벽...............]
[형 결혼해주세요]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독자는 웃으며 잔을 다시 채웠다. 안주를 먹으며 맛있다고 잔뜩 칭찬을 하자 유중혁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대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최근에 하는 게임은 뭔지, 즐겨 보는 TV 프로는 무엇인지. 무슨 영화가 재밌더라, 책 얘기도 조금 나오고. 유중혁이 한 병, 김독자가 서너 잔 정도 마셨을 즈음부터 그의 하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구마님 벌써 취하셨나본데 ㅋㅋㅋㅋㅋ]
[마왕님 닉넴이 넘 무색하넼ㅋㅋ]
“안 취했거든요.”
[혀 꼬였음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술 약한가봨ㅋㅋㅋㅋ]
[한 30분 있다 방종하는거 아님???ㅋㅋㅋ]
[맥주 다마셨네 더사옴 ㅠ]
김독자가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웃더니 빈 소주잔을 들어 올려 만지작거렸다.
“야, 중혁아.”
“왜.”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유중혁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바라봤으나, 김독자는 굴하지 않고 무척이나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어떻게, 어? 그럴 수가 있어?”
“김독자. 취했나?”
“아냐 아냐. 안 취했거든. 그러니까 어? 진짜 나쁜 자식아.”
[구마님 개귀여웤ㅋㅋㅋㅋ큐ㅠㅠㅠ]
[어떡해...진짜귀엽다....]
[1가정 1구마 필요]
[ㅋㅋㅋㅋㅋㅋ아 씨 구마님 오늘 또 레전드찍네]
김독자는 조금 풀린 혀를 열심히 움직여 말을 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 까먹을 수가 있냐.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뭘 말하는 거지?”
“너 고등학교 때, 씨.”
그의 손에서 미끄러지려는 소주잔을 얼른 붙잡은 유중혁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지. 동창인 건 밝히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유중혁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깐 가리겠다.”
[헐 너무해]
[저희도 보여줘요]
유중혁은 망설임 없이 카메라를 돌려두고 마이크의 전원을 껐다. 소리도 없이 덩그러니 싱크대를 비추는 카메라에 채팅창은 원성이 그득해졌지만 유중혁과 김독자가 그걸 알 길은 없었다.
“김독자. 무슨 얘기지?”
“중혁아. 너 진짜 너무한다고.”
“……내가 뭔가 잘못을 했나?”
“그래 인마. 너 생일날.”
김독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방송용 방으로 들어갔다. 유중혁은 깜짝 놀라 얼른 뒤를 쫓았고, 무거운 졸업앨범을 빼내려 애쓰는 그를 대신해 앨범을 꺼내주었다. 바닥에 앉아선 앨범을 펼쳐 의미 없이 넘겨대기에 유중혁도 같이 털썩 주저앉았다. 김독자가 말했다.
“너 생일날 기억 안 난댔지.”
“……그래.”
“그날, 어? 내가…… 너한테……”
“네가 나한테?”
김독자는 손을 우뚝 멈추더니 유중혁을 빤히 쳐다봤다. 달아오른 눈가가 붉었다. 여러 가지로 괴롭게 하는군, 김독자. 유중혁은 간신히 표정을 유지했으나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내가 너한테……”
김독자의 손이 유중혁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느릿하게 손가락이 뺨에 닿고, 고개가 가까워진다. 유중혁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반대쪽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방금 뭐였지? 유중혁이 얼떨떨한 얼굴로 쳐다보자 김독자가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했고. 그리고 너는……”
무릎 위에 얹어진 커다란 손을 붙잡아 제 뺨에 가져다대고는 가볍게 문지른다.
“……너는, 이렇게 했잖아.”
손바닥에 닿는 피부 아래에선 열기가 피어올랐다. 뜨겁군, 취한 건가……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유중혁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만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 잠깐. 잠깐만……. 문득 옅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유중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중혁아. 진짜 기억 안 나냐.”
어느덧 조금 또렷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꿈이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기억이 너무 흐릿해서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에 나부끼던 하얀 커튼,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가는 손가락. 열이 오른 머리는 몽롱했고. 중혁아, 누군가 제 이름을 속삭였던 것 같았다. 뭐였지? 그건, 뭐였지.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얼굴이 있었다. 새빨갛게 달아올라 손을 대면 델 것만 같은 두 볼, 바람이 불어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날리고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이 반짝거렸다. 그 얼굴이 제법 예쁘다고 생각했던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뺨에 가져다 댔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중혁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
그는 손을 뻗어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김독자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김독자는 조금 움찔했으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꿈이라고 생각했었어.”
“……뭘?”
“그날, 나는 아팠다. 열이 심했어.”
그래. 이제야 알겠다. 유중혁은 졸업앨범을 빠르게 넘겼다. 단체사진들을 주루룩 훑어 김독자의 3학년 반을 찾고, 개인 사진은 가나다순으로…… 이윽고 찾던 이름을 발견해 내서. 그 이름 위에 놓인 사진 속 학생은 눈을 아슬하게 가릴 정도로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앞머리가 길었군. 저 반짝이는 눈동자와 기다란 속눈썹을 온통 가리는…… 그래서 못 알아봤던 거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뺨을 감쌌던 손을 들어 그의 눈가를 가렸다. 아닌데, 눈을 가려도…… 충분히 예쁜 얼굴인데. 유중혁? 눈이 가려진 김독자가 의아한 듯 물어왔다.
“기억났다, 김독자.”
“기억났다고?”
“그래.”
손을 내리고 조용히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야 그날, 눈이 잔뜩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날 김독자가 했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너는, 내 뺨에 입을 맞췄던, 10년 전 그 때…… 나를 좋아했었나.
그리고,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건가.
“중혁아?”
“…….”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께에 파고드는 듯한 감각에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시큰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고, 유중혁은 그저 눈앞의 남자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왜 미리 알아보지 못했을까. 어째서, 10년 전 그 때 이 녀석을 붙잡아두지 못했을까. 누군가 사랑은 타이밍이라고 했던가. 내가 너무 늦어서 너는 금방 떠나버린 건가. 너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가.
“중혁아? ……괜찮아?”
조심스레 물어오는 말에 유중혁은 눈을 꾹 감았다. 이대로 끝낼 건가? 늦었다는 이유로 내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건가, 김독자. 정말 너무한 것은 네 쪽 아닌가. 하지만.
나를 너무 얕봤군.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김독자, 나는 쉽게 포기하는 인간이 아니다.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
“김독자.”
“응?”
“나는 너를 좋아한다.”
말문이 막힌 듯 김독자가 입을 벌렸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유중혁은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또 다시 그 미소로 진짜 감정을 감춰버리기 전에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 집요하게. 김독자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유중혁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피하지 말고 대답해, 김독자.”
“…….”
“너는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유중혁은 기다렸고, 김독자는 망설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나 에텐이야, 중혁아.”
“……뭐?”
“에텐이라고.”
유중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응?”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지.”
김독자는 하, 웃음을 터뜨렸다. 이해를 못 하는구나, 중혁아.
“중혁아. 너는 엠비지. 죽음이란 걸 겪을 일이 없을 거야. 그렇지?”
“…….”
“근데 나는 아니야. 언젠가 죽을 거고, 심지어 그게 언제인지도 몰라. 당장 내일일 수도 있어.”
“김독자. 그건.”
“들어봐, 유중혁!”
언성을 높이자 유중혁이 입을 다물었다. 눈매가 매서워졌으나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는 늙지도 죽지도 않잖아. 근데 나는 계속 나이를 먹을 거고, 언젠가는 죽는다고. 네가 날 좋아해서 어쩔 건데? 내가 너랑 영원히 같이 있을 수도 없는데, 어쩔 거냐고. 만약에 당장 죽어버리면 어떡할 거야?”
“…….”
“중혁아. 나는 천년만년 네 곁을 지켜줄 수도 없고, 네가 소중한 사람을 잃는 상실에 대비할 시간을 줄 수도 없어.”
네가 엠비인 건 괜찮아. 너는 언제까지나 빛날 것이고, 나는 그런 너를 사랑하겠지. 그래. 내가 에텐만 아니었어도. 그랬다면, 어쩌면 나는 겁 없던 스무 살의 어느 날 무작정 너를 찾아가 끌어안고 입을 맞췄을 지도 모른다. 너를 사랑한다고. 너처럼 영원히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닿는 한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언젠가 너는 나를 잃겠지만, 그래도 죽음의 때를 알 수 있으니 대비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잖아. 나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잖아. 김독자는 이를 악물었다. 중혁아, 나는 나 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워.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몰라서 무서운데. 그런 나를 좋아하면, 네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런 건 싫어. 절대 안 돼. 너는, 행복해야만 한다. 악문 잇새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울컥 터져 나왔고, 뺨을 가득 적시며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문득 손에 가해지는 악력에 김독자가 읏, 하는 소리를 냈다. 붙잡힌 손을 꽉 쥔 유중혁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할 얘기는 다 했나, 김독자.”
“……너,”
“그럼 이제 내가 얘기해도 되나?”
유중혁은 손을 들어 젖어든 김독자의 뺨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해서 다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조용히 눈가를 닦아준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독자. 너는 잘못 생각하고 있어.”
“……무슨, 소리야.”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 너는 지금 무지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순 숨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중혁?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은 거의 없다. 그건 에텐이든, 노말이든 마찬가지야. 너도 알지 않나. 수명이 다해가는 사람은 몸도 함께 쇠약해지는 신호가 온다는 걸.”
“…….”
“거꾸로 말하면…… 몸이 약해지는 것을 보고 수명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지. 김독자, 너는 지금 건강해. 갑작스럽게 돌연사할 일은 없어.”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눈물도 천천히 그쳤다. 맞는…… 말이긴 했다. 틀린 점은 없었다. 하지만 공포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 마음을, 네가 알까.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되살아난 이성은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었다.
“그, 래도…… 난 언젠가는 죽어.”
“그렇겠지.”
“뭐가 그렇겠지야?”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는다. 엠비가 아니면. 당연한 거 아닌가.”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유중혁은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엠비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 전 세계 사람 중 그 몇 안 되는 엠비를 제외한 모든 노말과 에텐은 언젠가는 죽는다. 하지만, 그래서 네가 나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나는 영원히 누구도 사랑하지 말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말라는 뜻인가, 김독자.”
“…….”
“그렇게 언제까지나 외로우라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바라보자, 유중혁이…… 웃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도 빛이 나서, 캄캄했던 제 세계까지 온통 밝히는 것만 같았다. 김독자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유중혁이 고개를 숙여 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정말이지, 김독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했더니.”
“……중혁아.”
“김독자.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는데.”
유중혁은 뜸을 들이더니 김독자의 손을 붙잡아 올려 손등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닿아오는 입술의 감촉이 선연했다.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내가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글쎄. 나는, 네가 곁에 없는 게 훨씬 더 불행할 것 같군.”
그러더니 낮게 소리 내서 웃는다. 아, 유중혁의 웃음소리. 김독자는 어느 여름날로 다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그 시절의 바람이 뺨을 스쳤다. 아무 걱정도 없이, 그저 눈앞의 이 남자를 좋아한다는 감정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던 어린 날처럼. 역시 그 때 너를 붙잡았어야 했을까. 그대로 마음을 털어놓아야 했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이렇게 10년이나 되는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괜찮았을까.
김독자는 한참이나 망설였고, 유중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긴 침묵 끝에 마침내 그의 눈이 반짝 뜨였다.
“유중혁.”
“응.”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그래.”
대답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다정하게 저를 향해 휘어지는 눈. 유중혁, 너는 너무 상냥한 사람이야. 대체 나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해.”
“…….”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가 키스해줘.”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림자를 드리우며 가까워지는 얼굴을 보며,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김독자는 화면을 바라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불 꺼진 어두운 방 안에 하얀 모니터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떠올라 있는 것은 몇 시간 전 방송의 다시보기였고, 한참이나 자리를 비운 두 사람을 대신하듯이 채팅창에서는 신나게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독자와 유중혁이 다시 카메라에 잡히자 채팅창이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아악!!!!!!!!!]
[미친지금머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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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제한 왜걸엇나햇더니 이걸이렇게????]
[아!!! 두분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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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시길^^ 《
[오늘진짜개미쳣다대박이다]
[패왕구마예쁜사랑!!!!!]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방송이 종료되었고, 김독자는 저려오는 허리를 두드리며 창을 껐다. 흘긋 뒤를 돌아보니 제 침대 위에서 잠든 채 옅은 숨소리를 내고 있는 잘생긴 남자가 보였다. 김독자는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미친, 유중혁. 적당히 좀 하라니까……. 조용히 침대로 다가가 벗은 몸 위로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었다. 그대로 침대 끝에 살짝 걸터앉아 머리카락을 슬 쓸어보고,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자 피식 웃고. 누구 애인인지 엄청 잘생겼네, 진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서 서랍장 앞에 선 김독자는 소리가 나지 않게 서랍을 열었다.
검은 액체가 찰랑이는 유리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안에 든 종이는 여전히 전혀 젖지 않은 채 흔들리고 있다. 김독자는 뚜껑을 열고, 핀셋으로 종이를 꺼냈다. 겉면을 타고 흐르는 액체를 병 안에 털어내고 뚜껑을 닫았다. 손가락 두 개만한 편지를 펼쳐본 김독자는…… 웃으며 그대로 찢어버렸다.
중혁아. 너 진짜 크게 실수한 거다. 어떡하냐? 이제 나 없이는 못 살게 만들 건데. 김독자는 장난스레 웃으며 종잇조각을 휴지통에 버린 뒤 침대로 돌아가 가만가만 그의 곁에 누웠다. 유중혁이 눈썹을 찡그리더니 팔을 뻗어 제 몸을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강인한 팔이다. 넓은 품에 안긴 채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중혁아.”
속삭이듯 말하며 손가락으로 뺨을 쓸자 간지러운 듯 고개를 움찔하더니 그대로 이마에 입술을 내리누른다. 김독자는 소리 없이 웃었다.
“사랑해, 중혁아.”
“……나도 사랑한다.”
잠결인지, 깨어 있는 건지.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으며 그의 입술 위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아주 긴 시간동안 사랑해 온 남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