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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
프로게이머 유중혁 × 스트리머 김독자 / 베트로버스 기반

2018.11.
* 베트로버스 AU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뽀드득. 유리병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유리창을 닦듯이 문질러도 보고, 조심스럽게 손톱 끝으로 두드려도 본다. 손가락만 한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찰랑거리며 흔들리는 액체. 눈이 부실 정도로 내리쬐는 가을 햇살이 병에 부딪혀 내리고, 액체는 햇살을 삼킨다. 김독자는 한숨을 폭 쉬고는 병을 소중히 갈무리해 품속에 넣었다.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시야를 확보한 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도 줄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더럽게 오래 걸리네. 입장 시작한 지가 언젠데…….”
    투덜거리며 팔짱을 풀고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48분. 경기 시간은 4시이니 아직 한참 남긴 했지만, 1시 즈음부터 줄을 서 있던 김독자로서는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괴롭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방송이라도 켤까 싶었지만 입장을 해야 하니 중간에 껐다 다시 켜기도 애매하다. 휴대폰을 다시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고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괴롭지만, 이 정도쯤이야. 거북이처럼 줄어드는 줄을 조금 더 바라보고 있자니 마침내 자신의 입장 차례가 왔다. 경기장 안으로 입장한 그는 커다란 스크린에 비춰지는 프로모션 영상에 시선을 빼앗겼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매, 강인한 어깨 위로 걸쳐진 하얀 유니폼. 팔짱을 끼고, 먼 곳을 헤매는 듯한 시선. 늘씬한 몸과 큰 키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모델로 착각할 법도 했지만 그는 프로게이머였다. 아니, ‘모르는 사람’ 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유중혁을 모르는 사람은 전 세계를 털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게이머가 아닐까.

    <패왕> 유중혁
    유중혁★V10
    패왕, 당신이 평창입니다


    주변을 가득 수놓고 있는 현수막들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피식 웃었다. 당신이 평창입니다? 우습지만 틀린 말도 아니라 반박하기 힘들었다. 실제로 평창 올림픽 폐막식 무대에 섰던 놈 아니던가. 그만큼 유명한 인간이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중 구할 이상은 유중혁을 보러 온 것일 터였고. 상대 선수는, 글쎄, 물론 응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력으로 따지나 유명세로 따지나 유중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야 당연했다. 유중혁은 한국의 유일한 ‘엠비’였으니까. 그것도 프로게이머의 전성기라는 스무 살에 성장이 멈춘.
    모든 사람은 유리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유리병 속에 들어있는 것은 ‘수명’. 액체처럼 찰랑거리기도 하고, 색상도 제각각이며, 뚜껑을 열어 다른 이에게 나눠줄 수도 있으나 그것은 틀림없는 수명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서서히 줄어들며 액체가 모두 소진되는 순간 한 인간의 삶도 끝난다. 따라서 인간에게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이란 거의 없다. 겉보기엔 평온한 세계. 인간은 모두 자신의 죽음의 때를 알고, 준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중혁은 달랐다. 엠비. 그것은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몇 되지 않는 희귀한 존재로, 어느 순간부터 수명이 감소하는 것을 멈추고 그 상태로 신체가 고정되어 불로불사로 살아간다. 그들의 유리병은 금조차 가지 않으며 따라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 않는다. 사고도, 살해도, 그 무엇도 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데 저렇게 젊은 나이에 몸이 고정된 엠비라니. 김독자는 새삼스럽게 스크린 속 유중혁의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일견 운동선수처럼 느껴질 정도로 좋은 피지컬이었고, 실제로도 그를 영입하려는 다른 업계의 시도는 무수히 많았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지금은 게임에 집중하고 싶다’고 답했던가, 재수 없는 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김독자의 입꼬리는 자연스레 올라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냈다. 경기 시작까지 조금 시간이 남았으니 잠깐 방송을 켜 볼까.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켠 김독자는 화면과 경기장을 번갈아보며 카메라의 각도를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했고 금세 시청자가 천여 명을 넘어섰다.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카메라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방송 켜서 놀라셨죠? 어서 오세요.”

    [마왕님이다!!!!]
    [마왕님 웬일로 낮방???]
    [오 대박 나 생방 처음봄]
    [앜 알림설정해둬서 다행 놓칠뻔 ㅠㅠㅠ]
    [구마형 잘생겼다]
    [♥오늘도잘생긴구원의마왕♥]
    [마왕님 거기 어디예요? 혹시 패왕 경기 보러 가셨어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작은 액정 위로 주르륵 올라오기 시작하는 채팅들을 살폈다. 김독자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계신 분도 있네요? 유중혁 경기 보러 현장에 와 있습니다! 엄청 오래 줄 서있었어요.”

    [와 구마님 진짜 패왕 골수팬이네ㅋㅋㅋ]
    [찐이라니까 ㄹㅇ]
    [그거 티켓팅 1초컷아님??? 전세계에서 티켓팅한다며요]
    [와 마왕님 그거 어떻게 뚫었어요?? 미쳣다 미쳣어 나도 패왕경기 ㅠ]
    [ㄹㅇ임 웬만한 컴으로는 접속도못함]
    [쉬바 졸라 부럽다 나도 패왕 경기 실제로 보고싶다...]


    물론 김독자가 직접 티켓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유중혁 경기의 티켓팅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 수준. 운이 어지간히 따라주지 않으면 꿈도 못 꾸는 일이다. 그러니 김독자가 티켓을 얻은 건 어디까지나…… 업계 종사자(?)의 특권 같은 거라고 할까. 김독자의 채널은 구독자가 백만이 넘어가는 게임 스트리밍 유튜브 채널이다. 자연스럽게 관계자로부터 티켓이 들어오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었다.
    “부럽죠? 이게 다 패왕을 향한 내 사랑을 하늘이 알아준 거 아니겠습니까.”

    [아 예]
    [구마님 또 입털기시작 ㅡㅡ]
    [아 짱나는데 부러워서 더짱남 ㅠ]


    능청스레 농담을 하며 눈을 찡긋하고 카메라를 돌려 경기장 내부를 비췄다. 프로모션 영상에 떠오르고 있는 유중혁의 모습을 잠시간 비추다가 다시 제 얼굴 쪽으로 고정하고, 시청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자니 어느새 경기 시작 시간이 가까워왔다.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지는 안내 방송이 있었고. 선수 입장이 시작됩니다, 그 말에 김독자는 고개를 번쩍 들고 카메라를 무대 쪽으로 돌렸다. 꺄아악! 귀청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이 경기장을 온통 뒤흔들었다. 저벅저벅 걸어 나와 관중석 쪽으로 무뚝뚝하게 목례를 한 장신의 남자는 부스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열광했고, 환호했으며, 졸도할 정도로 기뻐했다.
    무패신화 유중혁. 패왕 유중혁.
    프로게이머가 된 지 올해로 10년째, 그는 리그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늘 불가능한 업적들을 이뤄내곤 하는 엠비들의 역사를 봤을 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부스 안에 들어간 유중혁을 비추는 영상에 김독자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아차, 방송 켜져 있지.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카메라를 제 쪽으로 돌렸다.
    “여러분, 보셨어요? 장난 아니죠? 실물도 완전 쩔어. 역시 우리 중혁이.”

    [아 마왕님 진짜 웃겨 ㅋㅋㅋㅋㅋㅋㅋ]
    [보긴 뭘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마왕님 흥분하셧나봄ㅋㅋㅋㅋㅋ]
    [예 장난 아니긴 하네요 소리가요]
    [솔직히 10년 덕질한사람 실물봤는데 봐줍시다]


    “응? 왜요? 뭐 이상했어?”

    [카메라 완전 천장만 비춤 ㅋㅋㅋㅋㅋ]
    [쓰바 패왕 실물 나도 ㅠㅠㅠ 나도 실물 ㅠㅠㅠ]
    [소리만 졸라 크게 들렸음ㅋㅋㅌㅋㅋㅋ]


    아, 젠장. 유중혁 실물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카메라 각도가 어긋난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미안한 표정을 했다. 미안해요, 나도 정신이 없었네. 사과의 의미로 액정에 손가락 하트를 날리자 후원 몇 개가 줄줄이 들어왔다.

    [귀엽다고 봐줄 줄 알았음? 맞아요 9158~♡]
    [9158 양심적으로 그만하자]
    [에반데;]
    [솔직히 에바임]
    [ㅇㅇ에바]
    [삼진에바ㅋㅋㅋ]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 여러분. 감사합니다, 일단 낮방송은 여기서 종료할게요! 경기 잘 보고 가겠습니다. 밤에 만나요! 매일 밤 10시 구마방송!”
    멘트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고 방송을 종료했다. 김독자는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면 가득히 보이는 유중혁의 얼굴. 그는 헤드폰을 낀 채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일견 무심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그 속에 담긴 옅은 자신감을 캐치한 김독자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새끼, 이번에도 자신 있다 이거지. 문득 10년 전 유중혁을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과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그런 식상한 풍경이었지만.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울려 퍼지는 방송 소리에 퍼뜩 현실로 돌아온 김독자는 두 손을 모아 쥐며 간절한 마음으로 속삭였다. 중혁아, 올해도 우승하자.



    “……그래서, 거기서 딱! 11시 방향으로 치고 들어가면서. 네, 맞아요, 여기요. 보신 분도 있으시네.”
    모니터 속 하얀 남자는 시청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오늘의 경기 화면을 다시보기 하고 있었다. 혼자서 말하고 있지만 마치 토론이라도 하는 것처럼 열띤 목소리. 훌륭한 컨트롤이 나오면 자기가 해내기라도 한 듯 환호성을 지르고, 아쉬운 장면에서는 책상을 내리치며 저가 더 아쉬워하고. 재밌는 녀석이지만 별로 특이할 건 없군. 그렇게 생각하며 유중혁은 창을 끄려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 순간, 남자가 말했다.
    “여기서는 사실 이것보다 이렇게 하는 게 더 낫거든요.”
    뭐? 유중혁은 손을 멈추고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남자는 다시보기 영상을 일시정지 하더니 캡처해서 그림판을 띄웠다. 그 위로 능숙하게 선을 그어가며 설명을 이어간다. 보세요, 여기가 비었죠. 지금 상황에서 이쪽을 치는 게 손실이 더 적거든요. 게임 화면을 더 크게 띄워둔 탓에 작은 캠 화면 속에 얼굴만 간신히 들어오는 남자의 눈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어지는 설명에 유중혁은 잠시 동안 깊이 빠져들었다. 꽤 괜찮은 생각이군. 순순히 인정할 만한 전략이었다. 자신이 오늘 해낸 전술보다 이 남자가 말하는 방법이 더 낫다. 근소한 차이기는 하지만.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던 유중혁은 마무리 파트에서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채팅창에 글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얘를 치는 걸로 마무리하면…… 응?”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 중 유중혁의 것을 용케 확인한 것인지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제일 낫지 않나요? 한 방에 보낼 수 있는데?”

    [엥 태클? ㅋㅋㅋ]
    [뭐임 오늘 토론 완전활발 장난아니네]
    [시비거는 애들 특징 : 게임 ㅈ도 모름, 설명하라면 못함]
    [어그로 먹금~~]


    “아, 여러분 진정하세요. 욕 쓰신 것도 아닌데. 토론하는 거 재밌지 않나요?”
    남자가 웃으며 한 말에 채팅창이 금방 조용해졌다. 5천명이 넘어가는 생방송인데 신기하게도 자잘한 채팅조차 멈췄다. 뭐지, 이 분위기는? 하지만 이미 겜알못 취급을 당한 유중혁은 짜증이 울컥 올라와 있었다. 그는 조용히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거기서 그거 한 방에 보내봤자 게임 바로 안 끝남. 어차피 자잘한 뒷마무리 또 해야 하는데 확실히 이기려면 차라리 반 나눠서 12시랑 3시 같이 치는 게 나음]

    유심히 채팅창을 들여다보던 화면 속 남자가 입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네요, 하긴 프로 리그에서 저거 한 방에 보낸다고 놀라서 포기하고 패배선언 하고 그러진 않겠죠. 맞는 말입니다.”
    모니터 속 하얀 얼굴의 남자…… 닉네임 ‘구원의 마왕’이 수긍하자 채팅창이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와 마왕님이 인정하는 거 오랜만에 봄;]
    [오 방금 그거 괜찮은데? 나눠서 치면 될듯 ㅇㅇ]
    [장난? 그거 하려면 컨트롤 졸라쩔어야하잖음]
    [아 프로면 알아서 하겠죠 그정도 컨트롤도 안되는데 프로 왜함?]
    [방송 5년 보면서 지금까지 구마 전략에 태클건 사람중에 방금이 제일 나았음 ㄹㅇ]
    [ㅁㅈㅁㅈ 지금까지 99퍼 어그로성이었는데 ㅋㅋㅋ]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바라봤다가, 다시 ‘구원의 마왕’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조금 전 제 말을 곱씹어 보는 듯 진지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한 짓을 했나, 별로 욱할 일도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경기에서 실수를 한 번 한 것이 마음에 남아있어 조금 언짢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우승은 했지만. 한숨을 푹 내쉰 유중혁은 짧은 상념에 잠겼다.
구원의 마왕. 인터넷 방송 경력 10년차인 베테랑 스트리머다. 게임 방송 위주로, 장르를 딱히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플레이하는 잡식성. 컨트롤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지만 입담과 매너가 좋아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가끔 하는 토크 방송도 시청자가 몰린다고 했고…… 그리고 종종 프로 리그 경기들을 분석하는 방송을 하는데, 그 수준이 상당히 높아서 현직 프로게이머들도 찾아보고는 하는 채널이었다. 유중혁도 동료 프로게이머들에게 들어서 알게 된 정보들이었다.
    ‘확실히 헛소문은 아니었나본데.’
    이 정도 수준이라면 가끔 찾아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다. 유중혁은 마우스를 움직여 딸깍, 구독 버튼을 누르고 망설임 없이 창을 껐다. 빠르게 창을 닫는 바람에 막 올라가던 채팅을 보지 못한 채로.

    [근데 방금 그사람 아이디 패왕이랑 비슷하지 않았음?]









    김독자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천장만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뭐지, 시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꿈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을 팽팽 맴돌았지만 휴대폰 화면을 켜서 다시 확인해 봐도 선명하게 기록이 남아 있었다.
   
010-1863-**** 유중혁 선수 번호입니다

    미친, 이거 진짠가? 실화야? 김독자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뒤늦게 심박수가 빠르게 치솟았다. 조금 전, 유중혁의 매니저라는 사람으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뭐? 그 유중혁 매니저가 왜 나한테? 깜짝 놀라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저도 모르게 공손한 자세로 전화를 받으니, 그 용건은 더 놀라운 것이었다.
    아니 글쎄 그 유중혁이 나랑 합방을 하고 싶다잖아!
    미친. 미친. 또 생각해도 미쳤다. 김독자는 여러 프로게이머들과 알음알음 연이 있었고, 그 중 몇과는 종종 합동방송을 하기도 했지만…… 유중혁과도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유중혁은 세계적인 유명인이 아닌가. 자신도 제법 유명하다지만 그래봤자 한국 내에서다.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기회가 올 줄은…….
    아니,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손끝이 간지러웠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10년 전 그 순간만큼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저릿해오는 손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 한 김독자는 고개를 탈탈 털어 흔들고선 휴대폰을 꽉 쥐었다. 언제 전화가 올지 모르니 잘 붙잡고 있다가 놓치지 말아야……
    - 부르르르
    “악 시바 깜짝이야!”
    꽉 쥔 손 안에서 부르르 떨리는 휴대폰을 황급히 붙잡았다. 아, 떨어뜨릴 뻔했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액정을 조심조심 들여다봤다. ‘유중혁’. 조금 전 저장한 번호다. 화면에 떠오른 세 글자에 호흡이 거칠어졌다. 아냐, 진정해라, 김독자. 너 프로잖아. 아마추어 아니잖아. 침착하게 대처해. 그러면 돼. 김독자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통화 버튼을 드래그했다.
    “여보세요?”
    “구원의 마왕이십니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몸이 흠칫 떨렸다. 각종 인터뷰 영상이며 온갖 것들을 다 섭렵했는데도 이렇게 직접 저를 향해 꽂히는 목소리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김독자는 마치 상대방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유중혁 선수 되시나요?”
    “예. 그냥 편하게 김독자 씨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내 이름까지 알고 있네? 하긴 일을 하는데 닉네임으로 일관하긴 쉽지 않다.
    “네, 편하게 부르세요.”
    “그러죠. 김독자 씨.”
    아, 시발……. 그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니까 정말 죽을 것 같았다. 10년이나 좋아한 팬 입장에선 정말 계 탄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말할 뻔했다.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김독자가 대답했다.
    “매니저 분께 말씀은 들었습니다. 저랑 합방을 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습니다. 시간 언제 괜찮으신지 맞춰볼까 하고.”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아, 시발. 팬심이 다 뭐라고. 김독자는 머릿속으로 달력을 넘기며 일정을 생각했다.
    “저는 매일 밤 10시에 방송을 하고 있어요. 굳이 그 시간에 맞추지는 않아도 되지만 가능하면 밤 시간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낮보다는 밤에 시청자가 훨씬 많거든요.”
    “요일은 상관없습니까?”
    “네, 다음 주는 금요일 빼곤 다 괜찮습니다.”
    “그럼 토요일 10시로 하죠.”
    토요일이라, 주말이니 시청자가 좀 더 있을 것 같다. 잘 된 일이었다. 김독자는 미소 지으며 승낙의 대답을 했다. 좋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방송 하려면 사전에 합의할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8시쯤 찾아뵈면 될까요.”
    “네?”
    뭐라고? 찾아뵌다고? 그냥 온라인으로 만나서 게임 하는 합방이 아니었어? 깜짝 놀란 김독자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의아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뭐 이상한 말 했습니까?”
    “아, 아뇨, 찾아뵌다고 말씀하셔서……. 혹시 합방이란 게 온라인상으로 만나서 게임하는 게 아니라, 그…… 진짜 만나서 하는 방송이었나요? 얼굴 맞대고?”
    손에 땀이 나는 것 같아 휴대폰을 더 꽉 움켜쥐었다. 이건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유중혁은 방송 출연을 안 하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유명인치고는 사생활에 대해서도 거의 드러난 바가 없다. 그런 사람이 인터넷 방송이긴 하지만 얼굴을 비추면…… 시발. 이건 진짜 난리난다. 조금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당연하다는 듯한 어조의 답이 돌아왔다.
    “예, 직접 만나는 거 얘기였습니다. 온라인상으로 합방하는 건…… 뭐 그것도 할 수야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김독자 씨가 컨트롤이 좋은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 저랑 플레이하시면 별로 좋은 모양이 안 날 것 같은데.”
    아, 싸가지 없는 새끼……. 말하는 거 봐.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꼭 그렇게 말해야겠냐? ……그치만 그래야 내가 아는 유중혁이지. 김독자는 어이없으면서도 불쾌함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피식 웃었다.
    “그렇죠. 네. 그럼 저희 집에서 방송하는 걸로 괜찮으십니까?”
    “괜찮습니다. 8시까지 가죠. 집 주소는 문자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그……”
    “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사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당연한 의문이지만. 물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왜 저랑 합방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신 거죠?”
    아차, 너무 취조하는 말투였나? 합방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입장인데 나댄다고 생각하려나? 짧은 순간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그런 생각들은 싸그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건 방송에서 직접 말씀드리기로 하죠.”
    “…….”
    그 뒤로 짧은 인사말을 나누고 통화는 끊어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김독자는 정신을 차리고 바로 집 주소를 그의 번호로 보냈다. 읽었다는 표시는 떴지만 별다른 답장은 없었다. 하아,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어져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유중혁을 만난다……. 경기장에서 일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실제로 얼굴을 맞대고 자리를 잡아 만난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10년 만이다. 뭘 준비할까. 당장 머릿속에 이런저런 것들이 떠올랐다. 아직 시간은 많아, 하나씩 준비하자.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딩동. 경쾌한 초인종 소리에 네- 하고 대답한 김독자는 얼른 현관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차콜 그레이 코트 아래 검은색 목폴라를 받쳐 입은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저도 모르게 숨을 흡 들이쉬니 바깥의 서늘한 기운이 함께 빨려 들어왔다. 새삼스럽지만 키 진짜 크네. 눈앞의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심호흡을 한 김독자는 방긋 웃었다.
    “어서 오세요. 멀지 않으셨어요?”
    “멀진 않았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요. 들어오세요.”
    8시에 만나기로 했었지만, 앞 스케줄이 길어져 늦는다는 연락을 미리 받았다. 유중혁이 도착한 것은 아홉 시 반이 넘은 시간이었지만 그다지 상의할 게 많을 것 같지는 않으니 괜찮겠지. 집 안으로 들어서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 집에 유중혁이 있다. 시발, 이건 진짜 쩐다. 평범한 10년 팬 같은 생각을 하며 일단 그를 거실로 안내했다.
    “앉으세요. 마실 건 뭘로 드릴까요? 물? 커피? 아니면 차?”
    “커피로 부탁합니다.”
    그럴 줄 알았지. 내가 괜히 10년 팬이 아니다. 유중혁의 입맛쯤은 꿰고 있었던 김독자는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뜨거운 거 맞으시죠?”
    “……? 예.”
    잠시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유중혁을 웃어넘기며 김독자는 금방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를 내왔다. 감사합니다, 짧게 답하며 잔을 받아 든 유중혁이 천천히 한 모금을 마셨다. 들썩이는 목울대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던 김독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김독자, 너는 오늘 유중혁 팬이 아니다. 알겠냐. 오늘 너는 세상에서 제일 객관적인 방송 진행자다. 스스로를 세뇌하며 흘끗 다시 바라보자 유중혁은 제법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세한 변화였지만 김독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입에 맞나,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그가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방송 콘텐츠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 네. 일단 토크 형식으로 조금 진행하다가 게임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중혁 씨가 플레이하시고 제가 해설하는 느낌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요.”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원래도 게임 해설 방송으로 유명하시죠.”
    “아하하, 유명한 정도까진 아니고…… 중혁 씨에 비하면야 뭐.”
    유중혁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알겠다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커피 잔을 들어올렸다. 김독자는 말을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채널에 미리 공지를 해뒀습니다. 오늘 유중혁 씨 출연하신다고. 댓글 수 장난 아니었어요, 금방 뉴스 기사까지 났던데.”
    “봤습니다.”
    “네, 아마 평소보다 사람이 훨씬 많이 몰릴 겁니다. 어쩌면 외국에서도 많이 시청할 것 같네요. 원래는 방송 매니저를 안 쓰는데 오늘은 필요할 것 같아서 지인 분들께 부탁드려뒀어요.”
    “감사합니다.”
    “아뇨, 별말씀을.”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중혁은 역시나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김독자는 이런 침묵을 타파하는 방법을 백 가지는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막상 유중혁을 앞에 두니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말없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커피를 홀짝이던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방송 준비 할까요.”
    “……네.”
    진짜 유중혁이다.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방송용 방으로 향했다.









    “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방송을 켜자마자 순식간에 시청자가 만 명을 돌파했다. 이런 미친. 진짜 장난 아니네. 점점 더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금방 사, 오만 명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 하긴 인터넷 뉴스도 탔는데 그 정도는 가뿐하겠지. 얼마나 몰릴지는 예상을 포기하기로 했다. 서버가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 일단 김독자는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방송을 켰다. 자신의 방송에 유중혁이 출연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먼저 짧은 소개를 하고 그를 불러 올 예정이었다.

    [구마님 안녕하세요]
    [마왕님이다~]
    [오늘 패왕 진짜 옴???]
    [패왕보러왔습니다]
    [유중혁유중혁유중혁]


    중간 중간 섞여 올라오는 어그로성 채팅들은 보이는 족족 매니저들이 차단하고 있었다. 한수영이랑 이현성이랑…… 정희원이랑…… 나중에 밥이라도 사야지. 김독자는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아요, 오늘은 그 유명한! 패왕 유중혁 선수! 와의 합방입니다.”

    [와 시1바 진짜라니 말도안된다]
    [ㄹㅇ임???? 개충격적 패왕이 방송나온다고?]
    [오늘 방송 레전드각;]
    [구마님 유중혁이랑 원래 친해요?? 부러워ㅓ ㅜㅠㅠㅠ]


    “공지 보고 놀라신 분들이 많던데요.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저 게임 못한다고 많이 무시하셨죠. 다시는 구원의 마왕을 무시하지 마라.”

    [아 예...]
    [시작부터 마왕님 입 모터 가속하는데 ㅋㅋㅋ]
    [예 무시해드림]
    [뭔소리예요 겜못하는건 안변하는데]
    [팩폭ㅋㅋㅋㅋㅋㅋㅋ]


    이 사람들이. 김독자는 픽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자, 그럼 거두절미하고 얼른 모셔올까요! 중혁 씨, 들어오세요~”
    김독자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 너머에 서 있던 유중혁이 걸어 들어왔다. 길쭉한 기럭지 탓에 서 있으니 얼굴이 잡히지 않았다. 자, 이쪽. 김독자가 가리킨 의자에 앉은 유중혁이 신기하다는 듯 화면을 잠시 쳐다봤다.

    [와 □□.....]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개미쳣다;]
    [방금 채팅창 3초정도 멈춘듯ㅋㅋㅋㅋㅋ]
    [뭐임...? 마왕님 집에 후광조명 달았어요? 뒤에서 빛나오는데요]
    [미친............... 사람얼굴아님..........]
    [시;바진짜개미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갑자기 종교생길것같음]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눈을 굴려 읽던 유중혁이 옅게 피식 웃었다. 그러자 채팅창이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진행을 해야 하는 김독자도 잠시나마 넋을 놓을 뻔했으니. 얼른 정신을 수습한 김독자가 채팅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자 여러분, 패왕 유중혁 선수입니다! 중혁 씨,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프로게이머 유중혁입니다.”
    짧은 목례와 함께 낮은 저음이 울리자 채팅창이 덜그럭거렸다.

    [패왕!!!!!!!!!!!!!!!!!!]
    [아앆 저 진짜 졸라 팬이에요 오빠 ㅠㅠㅠㅠㅠㅠㅠㅠㅠ]
    [ㅍ퓨ㅠㅠㅠㅠ내가살아생전에 유중혁나오는방송을다보고]
    [유중혁 사랑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존잘]
    [형 사랑해요]
    [게이될것같음...... 나 이상한거아니지.....]
    [ㅅㅂ 저도임]


    한참이나 미친 듯이 올라가는 채팅창을 보던 김독자와 유중혁은 결국 반응을 모두 읽는 것을 포기하고 마주 인사를 나눴다. 일단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중혁 씨. 오늘도 앞에 스케줄이 있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예, 별 건 아니고 가벼운 촬영이 있었습니다. 촬영이요? 어떤 거였나요? 광고입니다. 자세한 건 비밀로 하죠.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간신히 채팅창이 진정되었다.

    [진짜 쩐다....]
    [근데 어쩌다 둘이 합방해요???]
    [원래 아는사이예요 마왕님?]


    “아하, 이 질문이 역시 나오네요. 그건……”
    “제가 먼저 제안 드렸습니다. 같이 방송하고 싶다고.”
    유중혁의 선언에 김독자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적당히 프로게이머들이랑 인맥이 있어서 기회가 생겼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하면 후폭풍은 내가 감당하잖아 인마! 저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자 유중혁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시1바 내 눈 이상한거 아니지 패왕 지금 웃는거 맞음????]
    [미친; 패왕 오늘 뭐 기분좋은일 있나;]
    [웃는거 존1나 희귀한거아녓음? 레전드찍을듯]
    [아니 패왕이 뭐가 모자라서 구마님한테 먼저 합방제안을???????]
    [우리 구마 그정도로 유명했냐 개감동;]
    [마왕님 의외다... 그렇게 안봤는데.......]
    [뭐임 마왕님 개유명한거임??? 1도몰랏는데 급 떡상;]


    김독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벌써부터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수습하자. 가라 김독자!
    “아하하……. 여러분 또 저 놀리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나 완전 대단한 사람이라고. 지금 빨리 알아두세요. 앞으로 더 유명해지면 이제 막, 어? 여러분이랑 행사장에서 만나도 사진도 안 찍어준다? 어?”

    [먹금]
    [아 예 구마님 잘나셨다 너무잘났다~♡ 오구구]
    [아니 ㅁㅊ 님들아 지금 먹금이 안된다니까 패왕이 자기입으로 말햇잔어]
    [뇌물먹인거아님????????]
    [유중혁이 부족한게 머가잇다고 구마한테 뇌물을 먹음; 거꾸로면 모를까]
    [패왕님은 구마님 어케 알앗는데요??]


    채팅을 유심히 보던 유중혁이 흐음,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방송을 봤습니다. 동료들이 얘기를 많이 해서요. 호기심에 잠깐 봤는데 해설을 아주 잘 하시더군요. 그 뒤로 종종 찾아봤습니다.”
    아니 이게 뭔 소리야. 이건 김독자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네가 내 방송을 봤다고 중혁아? 미친. 말도 안 돼! 김독자는 갑자기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 됐다. 아니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난……. 그 동안 방송들에서 중혁아, 우리 중혁이가, 하고 거리낌 없이 불러댔던 것들이 파바박 떠올랐다. 미친 시발 진짜…….

    [아 마저 구마님 가끔 프로게이머들이랑 합방했지... 너무친숙해서 까먹음]
    [헐... ㅁㅊ... 그럼 그동안 우리 패왕이랑 같은방에 잇엇던거임? ㅅㅂ그것도모르고]
    [미쳤다진짜;]
    [어??? 잠만 그럼 혹시 그때 그사람 패왕 본인임?????]
    [ㄴㄱ?]
    [그 패왕이랑 닉 비슷햇다는사람?]
    [아 맞어 그 패왕 결승전 해설방송때 닉 비슷한 사람 있지 않았냐]
    [ㅇㅇ 그뒤로도 가끔 보였음]


    당황한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채팅창을 살피던 김독자가 한 번 더 굳었다. 기억난다. 리그 결승전 해설 때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던 시청자. 그게 유중혁이라고? 진짜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군요. 그때 그거 저 맞습니다.”
    “허억…….”
    유중혁의 확인사살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미친……. 말도 안 돼……. 김독자의 눈이 허공을 헤매는 것을 본 시청자들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난리가 났다.

    [ㅋㅋㅋㅋㅋ구마님 멘붕옴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아 캡쳐각이다 ㅅㅂ]
    [오늘거 꼭 전체 다시보기 올려주세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이제와서 뭘 숨김 구마님 유중혁 10년 팬인거 모르는 사람 있음?]
    [마왕 귀 빨개짐ㅋㅋㅋㅋㅋㅋ]
    [구마님 진짜 혼모노라니까 이 방송보는사람들은 다 안다 ㄹㅇ]
    [개쌉ㅇㅈ 방송중에 패왕 언급 안하는 날 세는게 빠름]
    [ㄹㅇㄹㅇ 마왕님 방송 보기 시작한지 일주일된사람인데 저도 알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치겠네. 들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다. 귓가가 가볍게 달아오른 채 온갖 후원이 쏟아져 들어오는 채팅창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김독자가 슬그머니 유중혁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는 이 상황이 제법 재미있다는 듯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기. 중혁 씨. 그러니까, 그……”
    “말씀하시죠.”
    “그…… 네, 제가…… 유중혁 씨 데뷔 때부터 팬이었는데요…….”
    “데뷔 때부터?”
    “네…… 10년 전부터요…….”
    유중혁이 재밌다는 얼굴로 씩 웃었다.
    “알고 있었습니다.”
    “네? 아셨다고요?”
    “예. 방송 봤으니까요.”
    아 미친…….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설을 내뱉을 뻔했으나 간신히 참고 손으로 눈가를 폭 짚었다.
    “그리고, 방송 봤으니까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예?”
    또 뭔 소릴 하려고? 유중혁 너 이렇게 시한폭탄 같은 놈이었냐? 시바, 아무리 별 합의 없이 시작한 방송이라지만 이 정도일 줄은……. 김독자가 떨리는 동공으로 바라보자 유중혁이 고개를 슬 기울였다.
    “중혁아, 라고 부르시던데.”
    “미친. 아, 아니 죄송합니다. 아!”
    미친 유중혁 새끼야 뭐라는 거야! 그런 건 좀 모른 척 해줘!
    “그냥 편하게 부르시죠. 동갑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

    [패왕 20살에 멈췄는데 왜 동갑임]
    [우리 마왕님이 8살이나 더 늙은 거 아니엇냐;]
    [엠비도 나이는 따로 세지 않음? 나중엔 너무 오래 살아서 다들 까먹는다고는 하던데]
    [아니 근데 패왕도 액면가는 좀 높지 않냐]
    [뭐? 누가 패왕욕함? 현피]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김독자도 28살, 유중혁도 28살. 유중혁은 20살에 성장이 멈췄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살아온 햇수로 따지자면 같으니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제가 중혁 씨한테 그렇게……”
    “그럼 제가 먼저 할까요. 말 놔.”
    와 나 진짜 유중혁……. 내 유중혁은 이렇지 않은데요? 캐붕 아니냐?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유중혁을 빤히 바라봤지만 그는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하아…… 그래 알겠다. ……중혁아.”
    유중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쳐졌다. 그리고 본인 앞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김독자는 마치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주, 짧게나마. 빠르게 눈을 깜빡인 김독자는 결국 포기했다는 듯 웃어버렸다. 그래, 어차피 들킬 거였잖냐. 그냥 편하게 생각하자. 본인 앞에서 의도치 않게 들킨 건 좀 부끄럽지만 뭐…… 유중혁 10년 팬인 것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 당당한 팬의 태도를 장착한 김독자는 고개를 들고 빙긋 웃었다.

    [아 구마님 표정 원래대로 돌아옴....]
    [ㅈㄴ아쉽.. .놀리는거 개꿀잼이엇는데...]
    [마왕님 놀리기 넘 재밋다.... 담에 또해줘 알았죠?!?!]


    또 하긴 뭘 또 해. 여유를 되찾은 김독자가 피식 웃으며 다시 페이스대로 토크를 이어나갔다. 말을 놓으니 훨씬 편한 분위기가 되어 김독자 특유의 입담도 터져 나왔다. 유중혁도 과묵했던 인상과는 달리 제법 괜찮게 맞춰오고 있었고. 뭐, 존댓말을 할 때와는 사뭇 달라진 말투가 조금 낯설기는 했다. 그는 시청자들에게도 대부분 말을 놓았고, 김독자를 부를 때 본명 대신 구마 혹은 너라고 지칭했다. 몇몇 화제들이 지나가고, 시청자들로부터 질문을 받기 시작하자 같은 질문이 여러 번 올라왔다.

    [패왕님 엠비 병 한번만 구경시켜주면안됨???]
    [와 나도 그거 궁금했음]
    [ㅁㅈㅁㅈ 엠비 수명 색깔 흰색이자너 개궁금함...]
    [투명한 흰색임??? 아님 우유같은 색인가?]


    “아…….”
    김독자는 슬쩍 유중혁의 눈치를 살폈다. 이 화제에 대해 유중혁은 어떻게 생각할까. 쉬이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처음 엠비라는 것을 밝힌 뒤로 유중혁은 그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궁금한가?”
    그가 화면을 똑바로 보고 묻자 채팅창이 ‘네’로 빠르게 도배되었다.
    “중혁아. 싫으면 굳이 안 보여줘도 돼.”
    “괜찮다. 별로 숨겨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간결하게 대답한 유중혁은 옷 주머니에서 손가락만한 길이의 병을 꺼냈다. 찰랑. 병 안을 팔할 정도 채우고 있는 반투명한 흰 액체가 작은 소리를 냈다. 그는 카메라에 유리병을 가까이 가져다대고는 이리저리 돌려서 확인까지 시켜줬다. 김독자는 그 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런 색이구나. 엠비의 수명이란.

    [와 진짜 흰색이네... 신기하다]
    [색깔 개 오묘함]
    [ㅈㄴ신기... 병 진짜 안깨져요?]


    채팅을 본 유중혁이 엄지와 검지를 튕겨 병을 두드렸다. 톡톡, 맑은 소리가 울리고. 장난치듯 병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아내고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미친 누가 수명병을 저렇게다룸;;;]
    [아 ㅅㅂ 존1나놀람]
    [씨;바 깜짝이야; 역시 엠비는다름;]
    [개쩐다진짜... 20살 몸으로 불로불사 개오짐...,,]


    채팅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중혁이 묵묵히 김독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김독자는 그 시선을 받아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와, 엄청 신기하죠. 나도 엠비 유리병은 실제로 처음 봐요.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 같은데. 고맙다, 중혁아. 좋은 구경 했네.”
    “별로.”

    [근데 구마님 수명은 무슨 색임?]
    [ㅁㅈ 한번도 못봄]
    [구마님 닮은 빨강색 각 섰음]


    역시나 이 질문도 딸려 나오는구만. 10년간 방송을 한 입장에서 이런 상황이야 수백 번도 더 겪어봤다. 김독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내 병은 비밀입니다. 수명 얼마나 남았는지 보이잖아요. 힌트를 주자면 어머니는 보라색, 아버지는 빨간색이셨어요.”

    [구마님 가만보면 비밀 ㅈㄴ많음...]
    [그게 마왕님 매력임 까지마]
    [대충 자주색정도 되것네....]


    미소를 걸친 김독자는 방송을 계속했다. 유중혁은 그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고, 그리고. 어쩐지 그 얼굴이 낯설지 않다 생각했다.









    “수고했다, 중혁아.”
    “이제 반말 잘 하는군.”
    “아, 두 시간이나 했더니 입에 붙었네. 왜? 다시 존댓말 할까?”
    “됐어. 편하게 해라.”
    두 시간을 조금 넘게 이어진 방송은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끝이 났다. 사실 유중혁은 더 길게 이어갈 의지도 있었으나 그의 컨디션을 걱정한 김독자가 방송을 적당히 마무리 지었고. 방송이 제대로 종료되었는지 확인한 김독자가 맑게 웃었다.
    “고생했어. 생각보다 토크 파트가 길어졌는데 괜찮았어?”
    “할 만 하던데. 너야말로 말 많이 하느라 힘들지 않았나.”
    “나야 그게 직업인데 뭐.”
    방긋 웃으며 유중혁의 곁에 다가가 선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제 가?”
    “왜. 아쉽나? 가지 말까?”
    “……너 그런 농담도 할 줄 아냐?”
    오늘만 내 안에서 너 캐붕이 몇 번이나 일어난 줄 아냐.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김독자는 자신이 모르는 유중혁을 발견한 것에 만족했으므로 불만 같은 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냥 가긴 좀 아쉽군. 잠깐 얘기라도 할까.”
    “그래? 그럼 뭐 먹을 거라도 내올게.”
    “아니, 먹을 건 됐다. 물이나 한 잔 줘.”
    “어, 그래.”
    부엌으로 사라지는 김독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중혁은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을 메우고 있는 책장. 책을 많이 읽는 편인가? 아니, 스트리머들은 장식용으로도 많이 두던데. 하지만 책장의 위치를 보니 카메라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 곳이었다. 장식용이 아니라는 거군. 가까이 다가가 책장을 훑던 유중혁은 커다란 앨범을 발견했다.
    “…….”
    이건, 그래, 졸업 앨범인데.
    그렇다면.
    “자, 여기 중혁아……”
    물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오던 김독자가 우뚝 멈춰 섰다. 유중혁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잠시 머뭇거렸다. 혹시? 설마?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에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중혁의 고개가 느리게 돌아갔다. 저를 똑바로 향하는 시선. 그 시선에 꿰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김독자는 천천히 침을 삼켰다.
    “김독자.”
    “…….”
    “2학년 3반 김독자?”
    아……. 김독자는 신음을 속으로 삼키며, 눈앞에 선 남자의 번듯한 이마를, 짙은 눈썹과 그 아래 서늘한 눈동자를. 그리고, 곧게 다물린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가 기억하는 10년 전과 거의 다름이 없는 얼굴이었다. 선명한 이목구비. 나이를 먹지 않는 엠비.
    그것은, 첫사랑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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