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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 너에게 쓰는 편지

유중혁 이 새끼. 김독자는 속으로 욕설을 주워섬기며 다리를 움직였다. 앞서가던 유중혁이 몸을 반 바퀴 돌려 뒤로 걸으며 말했다.
- 그런 체력으로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었던 거지?
- 시끄러, 이 자식아……. 네가 너무한 거거든. 나는 보통이고.
- 아직 떠드는 걸 보니 할 만한가 보군, 계속 가지.
- 야 이 유중혁 개…….
결국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멈춘 김독자는 무릎을 짚은 채 이마 위를 흐르는 땀을 훔쳤다. 지금 뭘 하는 거냐고? 그야…… 기초체력 훈련이지 뭐겠는가. 더워 죽겠네, 이 자식 지금이 여름이란 자각이 있긴 한 거냐.
애초에 도대체 왜 갑자기 나한테 이런 훈련(을 빙자한 고문)을 제안한 건지 모르겠다. 정말 나 괴롭히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냐? 그게 아니면 나한테 왜 이런 시련을? 하지만 가장 웃긴 것은 그걸 또 좋다고 수락한 제 모습일 것이다. 아니, 아니다. 좋다고 수락하진 않았다.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포기할 줄을 모르는 저놈 때문에 결국 끄덕여버린 거지. 절대로 거…… 잘생긴 얼굴을 하고 부탁하듯이 말해서 수락한 게 아니다. 절대로.
저만치 앞서갔던 유중혁이 되돌아왔다. 얼굴에는 참으로 한심하다는 기색을 띠고 있어 김독자는 미간을 구겼다.
- 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내가 어떻게 체대 목표로 하는 놈이랑 똑같은 훈련을 하냐?
- 똑같다고? 양심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군, 김독자.
김독자는 가늘게 눈을 흘겼다. 유중혁이 먼저 제안한 아침 달리기였지만, 어쨌든 그는 상식이 있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운동을 막 시작한 일반인이 하기에 딱 적당한 강도로 코스를 잡아놓은 참이었다. 김독자도 그것을 알고는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제 체력이 일반인보다 한참 못하다는 걸 간과했다는 거겠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울컥 화를 내려 했더니 이마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뭐야? 손을 들어 올려 붙잡아 보니 얼음물이 든 물병이었다.
- 못 하겠으면 저기 공원에 잠깐 앉아 있어라. 한 바퀴 더 돌고 올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웃기지 말라고 답하고 싶었으나 몸은 솔직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인 김독자는 물병 뚜껑을 열어 입에 차가운 물을 흘려 넣으며 공원으로 향했다. 상당히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다들 아침 운동 하는 사람들인가. 대충 자리를 봐서 구석 벤치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물병을 뒷목에 가져다 대 체온을 식히고 있자니 유중혁이 돌아왔다. 이미 저보다 두 배는 더 돌아놓고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얼굴이다. 물론, 날씨가 날씨인 데다 운동량이 있으니 머리칼이나 목덜미에서 땀이 흐르고 있기는 했지만. 김독자는 물병을 다시 건네주며 제 옆자리를 탁탁 쳤다. 선 채로 물을 들이켠 유중혁이 흘긋 시선을 향하고선 벤치에 걸터앉았다. 옆에 앉은 것만으로도 열기가 훅 끼쳐와 기껏 식혀놓은 체온이 다시 옮겨붙는 것만 같았다. 무릎에 팔을 걸친 유중혁은 손등으로 턱선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어쩐지 민망해져 슬쩍 시선을 돌렸다.
- 매일 이 시간에 운동해? 등교 시간 전이잖아.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돌고서 등교했다고?
- 문제 있나?
- 아니. 대단하다고.
김독자는 헛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폈다. 어째 괴물 같은 체력이긴 하더라.
- 할 만한가?
- 응?
갑자기 물어오기에 김독자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다시 피했다.
- 아직 3일밖에 안 됐잖아. 더 해 봐야지 뭐.
- 일주일 정도 하면 조금 달라진 걸 느낄 거다.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유중혁 너, 내가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거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긴 하냐? 나 야행성이거든. 너 때문에 나오는 거야. 너 보려고. 그런 소리는 당연히 속으로만 했다. 넌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돼. 그런 마음과, 절대로 몰라줬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치솟았다.
저도 모르게 옅은 한숨을 쉬자 유중혁이 눈썹을 꿈틀댔다.
- 무리하는 거 아닌가?
- 아니야. 나도 체력 좀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얼른 대답하고선 벤치에 등을 기댔다. 아침에 일찍 일어날 때는 피곤했지만, 이렇게 한 바퀴 몸을 움직이고 나면 제법 상쾌해져 머리가 맑아졌다. 이 정신으로 샤워를 한 뒤 아침을 먹고 공부를 시작하면 참으로 집중이 잘 됐다. 이게 운동의 효과라는 건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아침 공기를 맞고 있는데 유중혁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왜?
돌아보며 묻자 가지런히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 아침 먹고 가라.
- 응?
김독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 그래도 돼?
사실 저야 좋았다. 어차피 아침은 원래 안 먹던 끼니인지라 대충 때웠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유중혁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김독자는 그의 뒤를 따라 두 번째로 유중혁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세 번, 네 번…… 그리고 지금. 김독자는 숟가락으로 국을 뜨다가 말고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았다. 내가 어쩌다 이러고 있지.
- 아저씨 안 먹어요?
유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 아, 아니. 먹어.
얼른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그러니까…… 아니, 나 지금 뭐 하고 있냐고. 운동을 시작한 지 3주째였다. 3일 차, 유중혁네 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저녁도 먹으러 오래서 그래? 좋지, 하고 또 갔다. 그다음 날도 아침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도…….
아니 미친. 이게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덜그럭, 숟가락을 떨궜다. 유중혁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쳐다봤다. 유미아가 헐,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흘겼다. 주섬주섬 숟가락을 줍고 휴지로 바닥을 닦자니 유중혁이 새 숟가락을 가져다줬다.
- 칠칠치 못하군.
하지만 김독자는 거기에 뭐 인마, 하고 대꾸할 정신머리도 없었다. 지금 3주째 유중혁네 집에서 아침저녁을 다 얻어먹고 있다고. 이거 실환가. 깨달음이 너무 늦었다. 벌써 3주나 지났고, 방학이 끝날 무렵인데. 뭐, 그래도 이제 다시 학교에 가야 하니까 아침을 같이 먹을 일은 없겠지……. 그럼 됐어, 이제 발길 끊는 거다. 그때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김독자.
- 응?
- 개학해도 아침 먹을 생각 있으면 와서 먹고 가라.
김독자는 하마터면 숟가락을 또 떨어뜨릴 뻔했다. 간신히 손아귀에 힘을 주고 황망한 눈으로 쳐다보자 유중혁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뭘 그렇게 놀라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아니, 야. 내가 이제와서 이런 소리 하는 것도 너무 염치없는 것 같기는 한데…….
- 새삼스럽게 염치 따지지 마라.
무심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미친 중혁아! 김독자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이 왜 이러지? 사람 밥 못 먹여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나? 하지만 유중혁 저놈은 귀신이 들러붙으려다가도 양기가 너무 강해서 거꾸로 귀신이 퇴마당할 것만 같은 녀석이다. 그래서 김독자는 말했다.
- 그럼 나도 식비 보탤게.
- 됐다. 식비는 무슨.
- 야, 내가 지금 아침저녁 두 끼나 너희 집에서 먹고 있는데 식비를 안 내는 게 더 마음 불편해. 이건 거의 하숙 아니냐고.
- 하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갈수록 가관이다. 이 새끼, 아니 우리 중혁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어쩌지. 대회가 코앞인데, 너 그러다 큰일난다 중혁아. 김독자의 표정을 본 유중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 집에 방 남는다.
……진심인가? 김독자는 할 말을 잃었다.
얼마간 유중혁의 집을 들락거린 결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유중혁은…… 부모님이 안 계셨다. 무슨 사정인지 먼저 말할 놈이 아니었기에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고민했는데 의외로 답은 유미아에게서 쉽게 나왔다.
- 엄마 아빠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교통사고로.
김독자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자 유미아가 눈을 홉떴다.
- 우리 오빠 앞에서 그런 표정 절대 하지 마요. 오빠 그런 거 제일 싫어하니까.
얼른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설마, 동정하는 표정? 내가 누굴 동정할 처지라도 되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유미아가 흥, 하며 팔짱을 꼈다.
- 난 오빠랑 할머니만 있으면 돼요.
유중혁과 유미아 남매는 할머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거라고 했다. 할머니가 무슨 무형문화재……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손주들을 데리고 함께 살기에는 무리가 없을 정도의 재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일이며 취미로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니셔서 집을 자주 비운다고 했다. 때문에 김독자도 이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할머니의 얼굴을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김독자는 흘긋 눈을 들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서울, 이런 위치에 자리한 이층집의 소유자라는 것만으로도 사실 이미 재력은 증명된 셈이지.
김독자는 대충 회상을 마치고선 한숨을 푹 쉬었다.
- 말은 고마운데 난 혼자 사는 게 더 편해.
그렇게 답하자 유중혁이 잠시 저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설마 ‘그런 주제에 매일 여길 드나들고 있지 않나’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식탁 아래로 정강이를 걷어차 주려고 했는데 (후폭풍은 나중 문제다) 다행히도 그건 아니었다. 유중혁은 비운 그릇을 들고 일어서며 일견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중에라도 내키면 말해라.
뭐냐, 저 자신만만한 목소리는……. 김독자는 젓가락을 움켜쥐며 작게 숨을 뱉었다.



유중혁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설거지할 권리마저 빼앗긴 김독자는 소파에 털썩 기대앉아서 천장을 쳐다봤다. 유미아는 숙제를 한다고 제 방에 쏙 들어가 버렸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와 물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유중혁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눈을 껌뻑거렸다. 천장이 새하얬다. 내가 불쌍해 보였나? 그런 건가? 이게 역시 가장 가능성 있었다. 유중혁에게 받는 동정이라. 기분이 나빠야 할지 좋아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은 좀 나쁜 것 같다. 동정받는 기분은 절대 유쾌한 것이 아니지만, 늘 동정보다는 경멸을 받아온 입장에서 경멸보다는 차라리 동정이 조금 더 나았다. 적어도 제 앞에 떨어지는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유중혁에게 받는 동정이라니…… 썩 유쾌하진 않은데.
배 위에서 깍지를 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면 유중혁이 누굴 동정한다고 해서 이렇게 밥까지 먹이고 재워주겠단 소리까지 할 놈인가, 그건 또 회의적이었다. 저놈이 어떤 놈인데. 애초에 동정 같은 걸 할 수 있는 놈인가,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럼 뭐지? 동정이 아니라면? 설마…… 호의? 김독자는 킥킥 웃었다. 시발, 존나 말도 안 되네. 쟤가 나한테 왜.
그러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바라보니 유중혁이 서 있었다.
- 아, 깜짝이야. 설거지 다 했어?
그렇게 물어보니 끄덕이고선 옆자리에 앉는다. 소파가 푹 꺼졌다. 흘긋 유중혁을 돌아본 김독자는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뺐다. 너무 가까운데. 이 자식은 자리도 많은데 왜 여기 앉아? 유중혁의 시선이 제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묘한 침묵이 거실을 맴돌았다. 김독자는 스마트폰을 꺼내 웹소설을 볼 타이밍도 잡지 못한 채 손가락만 꿈틀거렸다. 아, 왜 이러지. 이게 뭐라고 갑자기…… 긴장되지. 유중혁이랑 단둘이 있었던 게 처음도 아닌데. 도서관에서도 늘 같이 있었고, 운동할 때도, 내 집에 쳐들어왔을 때도…….
아, 그런가, 그때는…… 무언가 목적이 있어서 같이 있었던 건데. 이렇게 아무 할 일도 없이 나란히,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역시 조금, 기분이 이상하다.
가볍게 숨이 막혔다. 아마도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해서일 것이다. 아, 제발. 진정해라…….
- 김독자.
소파가 들썩이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김독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돌아보기가 두려웠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아도 유중혁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불러, 유중혁. 미치겠네 진짜.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자 소파가 조금 더 들썩거렸다. 유중혁이 제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더운 체온이 훅 끼쳐왔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얼마나 가까운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깐만, 잠깐…… 왜 이러냐…….
안 된다. 김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탓에 하마터면 김독자에게 부딪힐 뻔한 유중혁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올려다봤다.
- 나…… 집에 가야겠다.
김독자는 삐걱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현관으로 향했다. 곧바로 커다란 그림자가 저를 따라왔다.
- 데려다주겠다.
유중혁이 뒤따라와 신발을 신었다. 아, 시발, 유중혁 미친놈아! 왜 맨날 데려다주냐고! 김독자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 금방 가니까 안 데려다줘도 돼. 벌써 몇 번째 말하냐?
- 금방이니까 데려다줘도 상관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
이 자식은 이상하게 이런 면에서 강경하게 굴었다. 시발, 유중혁……. 별 상관도 없는 남을 매번 집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이상한 데서 꼬장꼬장한 새끼. 결국 유중혁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을 안 김독자가 양보했다.
- 그럼 얼른 가든가.
휙, 문을 열고 먼저 나섰다. 밤공기는 처음 유중혁의 집에 왔던 날에 비하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또 가을이겠지. 시발, 고3한테 가을이고 뭐고가 어딨냐. 자소서며 원서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리니 부르르 몸이 떨렸다. 다음 주면 또 학교 가야 하네. 김독자는 저벅저벅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유중혁 놈은 다리도 길어서 별 어려움도 없이 금방 따라왔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조용히 걷기만 하자 유중혁은 여느 때처럼 별말이 없었다.
이윽고 익숙한 골목이 다시 나타났다. 먼지 낀 가로등을 올려다본 김독자는 몇 주 전의 기억을 떠올리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날, 유중혁은 갑자기 김독자의 손목을 붙잡았고, 저를 돌려세워서 벽으로 몰아붙이고…… 아니! 시발! 김독자 미쳤냐! 몰아붙이긴 뭘 몰아붙여, 그건 그냥 내가 피하다가 벽에 부딪힌 거다……. 하지만 그런 제 앞을 유중혁이 막아선 것은 또 사실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이마가 맞닿고…….
김독자는 그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숨을 멈춘 채 유중혁의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바라봤다. 꿰뚫어 볼 것처럼 끓는 시선으로 저를 보던 눈빛. 어째서 그런 눈을 했던 걸까. 유중혁, 이 나쁜 새끼야……. 네가 그딴 식으로 굴면, 나도 착각하게 되잖아. 어쩌면 내가, 너한테 조금은 중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착각을 하게 되잖아.
유중혁은 그날 제게 자신이 친구가 아니라면 뭐냐고 물었다. 몹시도 화가 난 듯이. 그런 질문을 하면서, 그런 눈을 하면…… 어쩌면, 너와 내가 정말로 친구인지도 모른다고, 그런 기대를 하게 되잖아. 그러니까 작작 해. 나는 친구 없는 김독자라서…… 그렇게 대해주면 착각할지도 모르니까, 개새끼야.
그런 생각을 하느라 저도 모르게 멈춰 서 있던 것 같았다. 얼마나 서 있던 걸까, 옆에 가만히 있던 유중혁이 김독자를 불러왔다.
김독자는 흠칫 놀라 그를 돌아봤다. 그날처럼 가로등을 등진 유중혁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했던가, 그날처럼 겹치는 이미지에 김독자는 지레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에 차가운 돌벽이 닿아왔다. 아, 미친. 제 무덤을 파도 이보다 잘 팔 수는 없을 것이다. 김독자 미친놈아.
얼른 다시 몸을 떼어내려는 찰나 유중혁이 앞을 가로막았다. 왜 또 이래? 그리고…… 다시 한번 손목을 붙잡혔다.
김독자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유중혁을 쳐다봤다. 손목에 닿아오는 손바닥은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활을 잡을 때 접히는 위치일 엄지와 검지 사이. 그 감촉에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어 있는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 김독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왜…… 그렇게 부르는 건데. 아까부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유중혁은 평범하게 저를 부른 것일 테고, 이상하게 느끼는 건 자신뿐일 테니까.
그래서 김독자는 간신히 입을 열어서, 왜? 하고 대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유중혁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나는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무슨 대답?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나 그날과 똑같은 상황인데, 물어보는 게 무엇인지는 뻔하니까.
김독자는 생각했다. 친구가 아니라면, 뭐냐고? 유중혁…… 너랑 내가 친구라도 말해도 좋은 사이야? 친구라는 건 뭘까. 나한테는…… 그런 게 있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김독자는 유중혁과 함께 보낸 지난 반년을 떠올렸다. 함께 하교하고, 공부를 같이하고, 밥도 같이 먹고, 운동도 하고…… 문자도, 전화도 한 것 같다. 그럼, 친구인가? 그런가? 그게 친구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아, 그렇구나……. 그럼 나한테도 이제, 친구가 있는 거구나.
김독자는 입술을 달싹였다. 얼른 대답해주고 싶었다. 유중혁, 너랑 내가 친구지 그럼 뭐겠냐. 근데…… 친구라고 해도 되는 거지? 기분 나쁜 거 아니지?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유중혁의 표정이 묘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가까웠다. 유중혁의 눈에는 미미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유중혁, 왜…… 그렇게 봐. 왜, 나를.
- 좋아한다.
- …….
김독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음…… 방금 뭔 소리를 들었는데. 뭐였지? 유중혁이 말했나? 근데 뭐라고 말했지? 깜빡. 깜빡깜빡. 눈꺼풀을 팔랑거리고 있으니 손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 김독자.
부르는 목소리가 뜨거웠다. 잠깐. 잠깐만. 아니…… 뭐? 김독자는 입을 벌리며 얼른 고개를 틀어 유중혁의 그림자 밑에서 벗어났다.
- 바, 방금 뭐라고 했어?
너무 놀라 목소리가 떨렸다. 유중혁은 조금 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니까, 똑같은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히 잘못 들은 거다. 그치만 같은 소리를 두 번이나 했는데? 꿈인가? 손목을 쥔 손이 풀렸다. 놓아준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단단한 손가락 끝이 손목을 지나 손바닥을 스치고는 깍지를 껴 왔다.
김독자는 정말로…… 제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놀라 숨을 턱 멈췄다.
- 유……중혁?
잠, 깐만. 잠깐만, 유중혁. 너 왜 이래……. 하지만 손은 풀리지 않았다.
- 김독자.
낮게 부르는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꼭 한여름 밤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유중혁, 왜…… 어째서? 눈만 크게 뜬 채 쳐다보고 있자 잘생긴 입술이 다시 열렸다.
- 너는, 싫은가?
그렇게 말하면서, 저를 향하는 눈빛에는…… 어딘지 초조하고 간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두 눈 뜨고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중혁이, 진심이라는 것을.
왜? 왜 나를?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김독자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내가 여기서 좋다고 하면…… 사귀게 되는 건가?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됐다. 당연하잖아. 나는 고3이고, 몇 달만 있으면 졸업해서 대학에 갈 거고, 유중혁도…… 이 녀석은 체대에 갈 테니 당연히 같은 대학에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당장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대학을 갈 수나 있을지, 나를 받아주는 데가 있을지부터가 불투명한데. 내 미래는 안개투성이다. 혼자서 살아남기도 벅차다. 그런 내 삶에 다른 누군가를 집어넣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애초에, 사귄다고 하면 뭘 어쩔 건데? 고등학교 때 사귀던 커플은 대학 가면 다 헤어진다던데. 그리고 유중혁 정도 잘난 놈이면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들이 지금보다 늘면 늘었지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심지어는…… 이 녀석, 국가대표급이잖아, TV에 나올 거라고, 전 국민이 이름을 다 아는 녀석이 될 거라고……. 그 옆에 내가 있는다고? 존나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외에도, 수십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과 유중혁이 사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수십 가지 이유들. 김독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옳은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수많은 생각들 중, 유중혁과 사귀어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건 한 녀석밖에 없었다. 너 유중혁 좋아하잖아? 그럼 된 거 아냐? 그렇게 말하는 자신 하나뿐.
김독자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듯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얼굴. 그래서 김독자는 결정을 내렸다. 아주, 몹시도, 무던히도 합리적인 결정을.



불 꺼진 방은 언제나처럼 어두웠다. 조용히 문을 닫은 김독자는, 그 언젠가의 날처럼, 가방도 제대로 내려두지 못한 채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방에 들어온 건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제 대답에 유중혁은, 의외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손을 놓아주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도망쳤다. 유중혁의 얼굴을 더는 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일견 간절하게까지 보이는 눈빛으로 보는 시선을, 더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중혁. 유중혁……. 왜? 왜 나를? 다시금 의문이 머릿속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왜 나 같은 걸 좋아해,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나를? 어째서? 물론, 그 의문에 답해줄 사람은, 영영 없을 것이다. 손끝이 가볍게 떨렸다. 김독자, 너 방금 유중혁을 찬 거야. 한 줄로 정리하니 더욱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왜 이렇게 된 걸까. 유중혁이 왜 나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유중혁을 좋아해서는 안 될 이유들은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확신만큼, 꼭 그만큼…… 가슴이 짓뭉개지듯 쓰렸다. 나는, 안 돼. 유중혁. 나는…… 네 곁에 있을 만한 녀석이 못 돼. 너도 후회할 거야. 나 같은 녀석이랑 만났다간, 너도 언젠가 반드시.
억울했다. 전부 다. 왜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왜 내 인생은 이 꼴이어야 하는 걸까. 너무 힘들었다. 정말로…… 너무 힘들었다.
어딜 가든 시선이 꽂혀 들었다. 김독자? 그, 그 사람 아들? 쟤가? 헐……. 남들이 뭐라 떠드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하루도 멍이 마를 날이 없던 중학교 시절을 기억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 수 있었다.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부질없는 희망을 아등바등 붙잡고 살아왔다. 고등학교만 가면 나아질 거야. 대학만 가면. 취직하면……. 아마도 그렇게 계속 살아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없었다. 마음에 여유 같은 게 전혀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결혼 같은 건 조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왜 그날, 나는 저 녀석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버린 걸까.
처음 본 순간 생각했었다. 나는 저 녀석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나 혼자 좋아하는 선에서 끝났으면 좋았을걸. 애정을 되돌려 받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면 그냥, 언제나처럼…… 아, 그래, 내가 그렇지 뭐, 하고…… 익숙하게 삭혀낼 수 있었을걸.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괴로웠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만큼. 깨닫고 보니 호흡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진 눈물에 턱이며 옷깃이 축축했다. 입을 틀어막았다.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방에서 큰 소리로 울면 옆방 사람에게 민폐다. 끅, 끅, 죽지 않을 만큼만 숨을 들이켜며 이를 악물었다. 왜, 이렇게 됐어야 했던 걸까. 어째서 나는……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해서도 안 되는 걸까.
유중혁. 나한테 그런 건 허용되지 않아. 너를 좋아한다고, 나도 너를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건. 네 마음에 미소로 응답하고, 손을 꼭 붙잡고, 등을 끌어안으며,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나한테는, 그런 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유중혁…… 유중혁.
미안해.
하필이면 김독자라는 인간을 좋아하게 된 유중혁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일이 주말이라 다행이었다. 분명히 이런 얼굴로는, 학교에 갈 수 없을 테니까.








눈빛은 고요했고, 화살촉은 무심했다. 유중혁은 과녁 정중앙에 꽂힌 화살을 반으로 무참히 가르고 한 번 더 꽂혀 들어간 화살을 보며 활을 내렸다. 먼발치에 앉아 있던 남궁민영이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섞여 있는 것도 착각은 아닌 듯했다. 이윽고 남궁민영은 장신의 몸을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왔다.
- 요즘 아주 컨디션이 좋구나.
유중혁은 그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활통에서 다시 화살을 꺼내 찰칵, 하고 활에 걸었다.
- 내일이 마지막 대회이니 좋은 상태긴 하다만…….
남궁민영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말없이 다시 활줄을 당겼다. 유려한 등 근육의 움직임과 함께 활줄에 가해지는 장력. 조금 전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에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끌어당겨서, 홀딩. 손을 당기듯 놓으며, 슈팅을 한다.
유중혁에게는 이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한 번 더 과녁의 중앙을 맞힌 화살을 바라보고 유중혁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이만하면 됐다. 내일 대회에서도 이만큼만 할 수 있다면, 대학 입학이나 스카우트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슬링을 풀어내며 걸어가자 남궁민영이 미소를 지으며 따라왔다.
- 내일이면 지도받는 것도 끝입니다.
부러 무뚝뚝하게 말하자 기어이 소리 내어 웃는다.
- 중혁아. 내가 한국체대 교수직 겸임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느냐?
유중혁은 대답했다.
- 대학 가서는 코치님 제자 안 합니다.
호방한 웃음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암 가드와 체스트 가드를 풀어내고 있자니 남궁민영이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남궁민영은 그와 꼭 닮은 무심한 듯한 시선을 건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유중혁은 물론 알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해 빨간 과녁을 맞히곤 했으니,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냐고 묻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유중혁은 그에 대해 돌려줄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날, 김독자를 붙잡고 꺼낸 말은 맹세컨대 거짓도, 충동도 아니었다. 다만 계산했던 것과는 조금 어긋나있던 고백이었을 뿐이다. 대뜸 그런 식으로 좋아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은 적어도 친구라는 인정을 받고 난 뒤에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김독자에게서 우리는 친구가 맞다, 그런 말을 받아내기 위해 손목을 붙잡았을 때. 김독자가 지어 보였던 표정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자신이 단단히 미친 게 아니라면…… 그건 적어도, 친구라고 선을 그어 부를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미미하게 달아오른 뺨, 숨 쉬는 법을 잊듯 멈춘 호흡. 무언가 간절히 말하고 싶은 것처럼 달싹이던 입술.
유중혁은 타인의 감정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적어도, 최소한,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이나 확실해 보였다. 비단 그날의 반응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반년 넘게 김독자와 함께하며, 자신을 남보다 못한 시선으로 보던 시기를 거쳤기에 가질 수 있는 확신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사실 유중혁은…… 그 이유도 어느 정도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는 김독자라면, 아마도. 그래서 유중혁은 생각했다. 김독자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기다려야겠다고. 하지만……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만약 장고 끝에 나온 악수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럼 그때는, 다시 붙잡아야 하는 것인지, 혹은 놓아줘야 하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봤자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은, 대회에서 우승하리라 생각했다. 그것만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유중혁은 자신이 김독자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점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완고한 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유중혁은 하, 한숨을 쉬며 교문 앞에 서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늘은 수능 날이었다. 유중혁이 김독자와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 지도 석 달 가까이 되었다는 소리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노릇이다. 대회를 마치고 난 뒤 유중혁은 그다지 할 일이 없어졌다. 이제는 수능 최저만 맞추면 될 것 같았고, 지금까지의 성적으로 봤을 때 최저는 가뿐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수차례 연락을 했다. 요즘 바쁜가? 그런 무난한 안부부터, 같이 공부하는 건 어떤가, 자소서 봐줄 사람 필요하지 않나, 저녁 먹고 가라, 그런……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제안들까지. 하지만 김독자는 그야말로 철옹성이었다. 미안, 바빠서. 나 요즘 혼자 공부해. 자소서 선생님한테 봐달라고 했어. 저녁 먹었어.
유중혁은 솔직히,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김독자, 그날 일이…… 너한테는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건가. 아무래도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집을 찾아가기도 여러 번이었다. 김독자는 그를 문전 박대하지는 않았지만, 늘 형식적인 이야기만 하고 마지막에는 조금 싸늘한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 유중혁, 시간 늦었는데. 안 가도 돼?
완곡한 거절의 표현에 결국 유중혁도 그의 집을 찾아가기를 그만두었다. 기다리기로 결심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이쯤 되니 정말로 자신이 착각했던 것인지, 정말로 김독자는 자신을 친구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았고 아무런 마음도 없었던 것인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그즈음 김독자는 몇 군데인가 수시 원서를 넣은 것 같았지만 모두 결과가 나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정시를 봐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걸린 자조적인 미소에 유중혁은 한 번 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서 유중혁은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적어도, 수능 날까지.
딱히 할 일이 없어진 유중혁을 심란하게 만드는 일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발신자 불명의 편지는 묘하게도 방학 동안 뚝 끊겼다. 자신이 학교에 있는 시간이 학기 중일 때보다는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충학습을 나오는 녀석이라면 계속해서 학교에 나왔을 텐데 어째서? 더 묘한 것은, 개학 후에도 몇 주간이나 소식이 없다가…… 자신이 대회를 마친 다음 날부터 재개되었다는 것이다. 편지는 늘 그 자리에 있기라도 했었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모양새로 놓여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의 내용도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그저 마음에 양식이 되는 좋은 글들이 많다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연서 비슷한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볼펜 새로 삼’ 따위의 글이 적혀 있던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편지 위를 흐르는 감정선은 명확하게도 사랑의 그것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읽기를 그만두었다. 다른 이를 좋아하고 있으면서, 저를 향한 이런 절절한 고백을 읽고서도 묻어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습다면 우습게도, 2학기가 된 데다 교내에는 저와 김독자가 사귄다는 소문이 은연중에 퍼진 터라 그 편지를 제외하면 제 앞으로 오는 러브레터 따위는 더는 없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처음으로, 제게 오는 편지를, 읽지도 않으면서…… 버리지도 못하고 쌓아두는 일을 하게 되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것도 같았다(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편지는 계속해서 쌓여갔다. 그것이 노트 한 권 분량이 되고, 두 권, 그리고 두 권 반쯤 되었을 무렵이 수능 시험 날이었다. 수능 전날에도 어김없이 편지는 왔다. 그날은 평소보다 조금 더 두꺼웠지만 유중혁은 열어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유중혁은 교문 앞에 서서 시험을 마치고 나올 김독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시퍼런 시선을 쏘아 보내자 잘생기셨네요, 연예인 하실 생각 없으신가요, 번호 좀……. 그따위 말을 걸러 오던 사람들도 파랗게 질려 돌아갔다. 유중혁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김독자, 설마하니 오늘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지금껏 공부를 핑계로 나를 피해 왔겠다.
오늘이야말로 붙잡고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생각했다. 도대체가, 자신이 먼저 대화를 시도하게 만들다니 어떻게 되어 먹은 녀석인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는데 저만치서 휘적휘적 흐느적거리는 몸뚱아리가 한눈에 잡혔다. 학생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운동장이라서 더욱 눈에 띄었다. 시험이 끝난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대체 뭘 하다가 이렇게 늦게 나온단 말인가. 설마 나를 피하려고 하기라도 했던 건가.
유중혁은 입을 꾹 다물고선 성큼성큼 걸어 그에게로 향했다. 코앞에 도달할 때까지도 저를 눈치채지 못한 듯 흐늘거리던 김독자의 앞을 막아서자 그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들어 올린다. 시선이 멍했다. 그 얼굴을 본 유중혁은 이를 갈며 화를 내려던 것도 싹 잊은 채 그 하얀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로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얼굴이었다. 이전보다 조금 수척해진 듯한 뺨, 흐릿하게 그늘이 진 눈 밑까지. 얼마나 고생을 한 건지 모르겠다. 공부가 그렇게 고되었던 건가? 아니면, 나를 피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던 건가. 이렇게까지 되도록 굳이 자신을 피해 왔다 생각하면……. 꺼내려던 말이 흐려졌다.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 유중혁?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설마, 기다렸어?
유중혁은 대답 없이 그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과 똑같았다. 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는 얼굴. 무언가를 몹시도 참고 있는 얼굴.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김독자의 두 손이 제 옷깃을 잡아 왔다. 벌어진 코트 자락을 꽉 붙잡고선 제게 몸을 붙여오고,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시선. 유중혁은 멈칫하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저를 바라보던 김독자가 별안간 제 품에 고개를 묻었다. 어깨가 가늘게 들썩거렸다.
- 유중혁. 나…… 망친 것 같아.
무엇을 망쳤다는 것일까. 시험? 아니면…… 다른 무언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김독자의 목소리에는, 몹시도 많은 것들이 무너져 지친 기색이 얼룩져 있었다. 유중혁은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조용히 쓸어내리자 떨림이 커졌다. 잇새로 새어 나온 흐느낌이 들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서 있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유중혁은 창가에 앉은 이의 실루엣에 걸음을 멈췄다. 통유리로 만들어져 겨울 오후의 햇살이 한없이 내리쬐는 아늑하고 폭신한 의자 위에 앉은, 가는 몸. 앳된 인상은 결코 아니지만, 어딘가 서늘하고 예민한 구석이 보이는 얼굴. 얇게 다물린 입매에서 느껴지는 완고함.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주변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고, 무엇도 가까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차가운 벽 같은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에게 있어 김독자의 첫인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누구도 곁에 두려 하지 않는 녀석. 겨울바람이라도 두른 듯, 가까이 다가가면 칼로 엘 듯. 가까이 가지 않을 테니까, 너도 다가오지 마. 나를 내버려 둬.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싸늘한 눈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 벽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는 순간,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꼬리, 입술, 반짝이며 반기는 눈동자. 일견 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제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
- 중혁아. 왔어?
유중혁은 홀린 듯 걸어가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신발을 아래에 벗어두고 두 발을 모두 의자 위에 올린 채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던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었다. 비스듬히 기댄 몸 위를 덮고 있는 겉옷, 그 위에서 움직이며 책장을 넘기는 흰 손.
유중혁은 가방을 풀어놓았다. 지퍼를 열고 책갈피가 꽂힌 책을 꺼내자 김독자가 입꼬리를 알랑거리며 웃었다.
- 유중혁 너 요즘 독서에 취미 들렸나봐? 누가 보면 문창과라도 가는 줄 알겠다?
- 조용히 해라, 김독자.
일갈하며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은 뒤 다리를 길게 꼬고 책을 펼쳤다. 실실 웃던 김독자도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2월 초의 도서관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한 달여 전 갓 스무 살이 된 두 사람은 조용히 책장을 넘겨 갔다. 당연하게도 도서관에는, 동갑내기 녀석들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미성년자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기로에 서서 신나게 마지막 무언가를 즐기고 있겠지. 유중혁 또한 그런 마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두 사람이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김독자는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마지막 학창 시절을 불태우는 것보다는 이렇게 도서관에 틀어박혀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녀석이었고,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녀석이라는 것이다.
유중혁은 책장으로부터 시선을 떼어 들어 올렸다. 시야 안에 김독자의 집중한 얼굴이 들어왔다. 아래를 향하며 내리깐 눈, 얼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속눈썹에 손가락을 대보고 싶었다. 책장을 넘기는 가늘고 마른 손가락에 제 손을 얽어 잡고 싶었다. 책 그만 읽고 나를 봐. 그렇게 말하며 두 뺨을 붙잡고 들어 올려, 그 반짝이는 시선이 오로지 제게 꽂히도록 하고 싶었다. 달아오른 뺨으로 미소를 지어준다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고 싶었다. 마른 몸을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싶었다. 유중혁이 바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명확했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매년 그렇듯 유난히도 추웠던 수능 날, 제 품에 고개를 묻고 한참이나 울던 김독자에게 유중혁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돌아올 대답이 두려웠다. 정확히 무엇이 두려운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그랬다. 김독자 또한 그날 이후로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눈물 비슷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일도 두 번 다시 없었다. 김독자는 웃었고, 유중혁은 끄덕였다. 그렇게 둘 사이의 관계는 어그러지기 전 8월 언저리의 어느 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유중혁은 만족할 수 없었다. 고작 이 정도의 관계에 머무르길 원했다면 그날 제 마음을 고백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독자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그럼 유중혁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유중혁은 무력했다. 이토록 저를 밀어내는 이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쩌다 실수로 손끝이라도 닿을라치면 김독자는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이전처럼 화들짝 놀라는 일도 없었다. 그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벌렸다. 명확한 거절의 표현이었다. 잘만 마주 보고 있다가도 빤히 쳐다보면 시선을 피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 앉으면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유중혁은……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정말로, 이보다 훨씬 더 멀리 도망쳐버릴까 두려워서. 그저 곁에 있을 수 있는 관계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걸까. 속이 쓰렸다.
2주 전쯤 두 사람 모두 대학 입시 결과를 받아보았다. 유중혁은 체육학과에서 단 두 명 뽑는 남자 양궁 신입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고, 김독자는…… 수능을 망친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현재 사는 곳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지방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평소 성적을 생각했을 때 다소 억울하리라 생각했다. 만약 수시 모집 대학들이 부당한 방식으로 김독자의 입학을 반려하지 않았다면, 이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녀석인데. 마치 제 일인 것처럼 속이 끓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 한두 번도 아니고, 이런 걸로 일일이 실망하면 난 진작 화병으로 죽었어. 괜찮아, 인마. 별걸 다 걱정하고 그래?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씩 웃는 얼굴에 화는 갈 곳을 잃었다.
- 유중혁.
김독자의 목소리에 유중혁은 흠칫 눈을 들었다. 그를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에, 혹시나 또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느껴졌을까 싶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책 끈을 당겨 페이지에 꽂고는 책을 덮었다.
- 내일 졸업식 갈 거야?
유중혁은 잠시 고민했다.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학교에 플래카드도 걸린 마당이니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은 건 상관없지만,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유중혁의 표정을 읽었는지 김독자가 빙긋 웃었다.
- 안 갈 거면, 내일 나 배웅해줘.
무슨 소린가 싶었다.
- 배웅이라니?
그렇게 묻자, 김독자가 눈꼬리를 접어 미소를 지었다.
- 나 내일 내려갈 거야. 벌써 짐은 다 보냈어.
어느 틈에? 그렇게 물을 새조차 없을 정도로 빠른 일 처리였다. 어이가 없어 미간을 좁히자 김독자가 손을 내저었다.
- 야, 그래도 몰래 가진 않았잖아.
- 김독자. 그걸로 지금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빠드득, 이를 갈았더니 김독자가 키득거렸다.
- 유중혁 또 빡쳤냐? 화내지 마.
그런 말을 하면서 그런 표정을 하는 건,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손을 뻗어 미간을 문질러오는 감각에 유중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대체 누구보고 얼굴을 잘 써먹는다느니 하는 거냐, 김독자. 그건 네 얘기 아닌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유중혁의 표정이 누그러진 것을 눈치챈 김독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 유중혁, 기억나냐? 우리 내기했었던 거.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소원을 빌 거냐고 물었더니, 졸업할 때 알려주겠다고 했던 그 얼굴이 선명했다. 때문에 우습게도 졸업을 무던히도 기다리게 되지 않았던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 내일 오면 알려줄게. 내 소원.
어쩐지 가슴이 서늘했다. 예감이 몹시도 좋지 않았다.








밤잠을 설쳤다. 불길한 예감 탓이었다. 생전 이런 적은 없었는데, 김독자 때문에 처음 겪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평소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난 유중혁은 미리 기차역으로 향했다. 아침잠도 많은 주제에 왜 굳이 아침 기차를 타고 간다는지 우습기는 하지만.
분명히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는데, 아직 안개가 부연 기차역 안에는 김독자가 와 있었다. 낡은 캐리어를 앞에 세워두고 대합실에 앉아 있는 모습이 바로 눈에 띄었다. 유중혁은 성큼성큼 그에게 걸어가 옆자리에 앉았다. 흠칫 몸을 떤 김독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웃었다.
-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그렇게 웃는 얼굴이 조금 퀭한 것이…… 어째 이 녀석도 제대로 잠을 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김독자의 눈 밑 그늘을 매만진 유중혁은 아차 싶어 손을 떼어냈다.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거리던 김독자는 정말로, 아주 오랜만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왔다. 그래서 유중혁은…… 손을 뻗어서, 무릎 위에 놓여있는 김독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김독자. 당분간은 얼굴 보기 힘들어질 텐데,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알아들은 것인지,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독자는 손을 빼내지 않은 채 물끄러미 유중혁의 손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유중혁과 눈을 마주쳤다.
- 유중혁.
조용히 부르고선, 말을 잇는다.
- 나 오늘 생일이야.
유중혁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2월 15일. 오늘이 생일이라고? 지금껏 그토록 생일이 언제인지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더니 몹시도 갑작스러웠다.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생각보다도, 진작 알았더라면 뭐라도 준비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후회가 밀려왔다. 빙긋 웃은 김독자가 말했다.
- 그러니까, 소원 두 개 들어줘. 하나는 내기, 하나는 생일 선물.
유중혁은 가만히 김독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불가항력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김독자가 마치 준비한 것처럼 단조로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 첫 번째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기차 시간까지 여기에 오지 마.
유중혁은 방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했지만 김독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그리고 두 번째는, 이거…… 꼭 집에 돌아가서 읽어.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네모나게 접힌 종이를 꺼내 제 코트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유중혁은 두 번째로 어이가 없어 입을 꾹 다물었다.
- 김독자. 대체 뭐 하자는 거지?
- 유중혁, 들어주기로 했잖아. 약속 지켜.
칼로 잘라내듯 단호한 어조에 유중혁은 눈썹을 한껏 좁혔다.
- 김독자, 내 소원도 들어줘야 한다는 거 알고 있겠지.
- 응. 알아. 나한테 뭐 원하는 거 있어?
말간 시선이 돌아왔다. 마치, 할 말이 없으리란 것을 꿰뚫어 보듯이. 유중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계속해서 딱 하나뿐이었고, 그건…… 이렇게, 소원을 비는 형태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빌 소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예상했다는 듯 김독자가 피식 웃었다.
- 생각 안 나면 나중으로 달아둬. 오늘은 말고.
그리 말하며 여전히 제 손 위에 얹어져 있던 유중혁의 손을 떼어낸다.
- 이제 가, 유중혁. 얼른.
유중혁은 김독자를 노려봤다. 하지만 김독자는, 지금껏 유중혁이 봤던 어떤 모습보다도 가장 냉담한 얼굴로 그를 밀어냈다.
- 유중혁.
한 번 더 독촉하듯 부르는 목소리에 이를 바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김독자,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멀리 간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몇 번이든 찾아갈 테니까 도망칠 생각도 하지 마.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 어차피 도망도 못 가. 너 내 기숙사 주소도 알고 핸드폰 번호도 알잖아.
순순히 인정하는 꼴이 같잖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꾹 억눌러 담으며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도대체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배웅하러 나와 달라고 해놓고선, 기차 시간까지 돌아오지 말라고? 그리고 이건, 집에 가서 읽어보라고? 뭐 하는 짓인가. 당장이라도 쪽지인지 메모인지 뭔지를 펼쳐서 읽고 싶었다. 하지만 김독자의 마지막 얼굴이 계속해서 눈가를 스쳤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다시 빼내며 얼굴을 덮었다. 김독자, 너는…… 도대체.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계속해서 김독자에 대한 생각을 곱씹으며 온 것 같았다. 얼른 집안으로 들어선 유중혁은 눈을 부비는 유미아에게 적당히 인사를 하고는 방으로 뛰어들듯 들어갔다. 손아귀에 쥐고 있던 종이를 다급히 펼쳤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설면서도 몹시도 익숙한 글씨체였다. 김독자의 글씨체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어제까지도 제 앞으로 오던, 그 편지의 발신인의 글씨체였다.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마비되었다. 이게 왜? 네가 왜 이걸? 이윽고 결론은 한 점으로 수렴했다. 설마? 설마…… 네가? 뒤늦게 편지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 처음 본 순간 생각했었다. 나는 저 녀석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
그 아래로 이어진 것은, 어느 날의 일기였다. 불안과 긴장으로 점철된 단어들. 낯선 곳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이의 떨림, 모두가 저를 멸시할 곳으로 향하며 느낀 불안과 걱정, 억울함, 분노.
「 그런데 입학식에서 이상한 녀석을 봤다. 」
손이 떨렸다.
「 아주 잘생긴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
종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이름이 뭔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저 녀석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이유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운명 같은 개소리는 믿지 않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랬다. 」
끝자락에 날짜가 적혀 있었다. 3년 전 3월의 어느 날짜.
유중혁은 종이를 떨어뜨렸다. 황급히 서랍을 열어 그동안 모아뒀던 편지를 꺼냈다. 펼쳐보지도 않은 채 모아둔 수북한 양의 편지. 차곡차곡 쌓은 덕분에 맨 위에 바로 어제 자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유중혁은 손끝을 가볍게 떨며 편지를 집어 들어 펼쳤다. 거기에는 어떤 노래 가사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 묻고 싶던 그 수많은 이야기는 가슴에 묻어두고
  나를 사랑했었다는 그 확인이나
  어떤 다짐도 약속도 없이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로 해 」
유중혁은 퍼뜩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었다. 김독자. 절대로, 나는 이대로는, 절대.
- 오빠?
유미아의 부름에 대답도 해주지 못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다. 택시가 더 빠를까? 아니면 지하철? 출근 시간이었다. 택시는 안 됐다. 급히 올라탄 지하철이 몹시도 느리게 기어갔다. 칸마다 가득 찬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도 온통 생각은 김독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김독자. 어째서, 어째서…….
유중혁은 알 수 있었다. 김독자가 왜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로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김독자, 나는.
왔다 갔다 한 탓에 시간은 김독자가 말했던 기차 시간에 거의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도 아직 여유는 있었다. 김독자, 어디 있지?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플랫폼으로 향했다. 비슷한 인상착의가 있는지 둘러봤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낡은 캐리어를 끌고 가는 뒷모습.
- 김독자!
반사적으로 소리쳐 부르며 달렸다. 팔목을 끌어당기며 돌려세웠다. 김독자가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더니 애매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 유중혁,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내 소원 들어주기로 한 거 아니었…… 그런 말을 늘어놓는 입에 입술을 겹쳤다. 호흡을 뚝 멈추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늘 서늘한 체온만큼 두 뺨이 차가웠다. 양손으로 붙잡으며 입술을 떼어놓자 김독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어물거렸다.
- 너, 너…… 무슨…….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들었다. 겨울 공기로 식어있던 뺨이 그제서야 조금 달아올랐다. 깜빡이지도 못하고 바라보는 시선에 유중혁은 말했다.
- 김독자. 내 소원을 들어줄 차례다.
김독자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 나랑 사귀자. 김독자. 소문 말고, 진짜로. 네가 후회할 일 따위는 절대로 없게 해줄 테니까.
- …….
멍하니 올려다보던 김독자가 한참 만에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 유중혁. 너…… 내 소원 안 들어줬잖아. 그런데 내가 왜?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할 셈이냐고 물으려다가, 유중혁은, 그냥 웃어버렸다. 반쯤은 어이가 없어 나온 웃음이었지만 몹시도 드문 행동이었던 탓인지 김독자가 설핏 몸을 떨었다. 유중혁은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뺨을 붙잡은 손을 놔주지 않은 채 이마를 맞댔다.
- 김독자. 내가 정말로 오지 않기를 바랐더라면, 왜 그 편지를 줬지?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유중혁은, 그를 대신해 답해주기로 했다. 언제나 제 탓을 먼저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이 녀석에게는 그래야만 했다.
- 김독자. 너 자신을 믿지 못하겠으면 나를 믿어. 그러면 된다. 네 탓 말고, 내 탓을 해. 그날 유중혁이 몰아붙인 탓에 이렇게 되었다고. 너는 잘못이 없다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깜빡이는 눈동자가 말갛게 물들어갔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김독자가 제 손을 유중혁의 손 위에 겹쳤다.
- ……중혁아.
잠긴 목소리로 불러오기에 유중혁은 엄지로 그의 뺨을 쓸었다. 간신히 흐린 미소를 지어 보인 김독자가 팔을 뻗어 유중혁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 유중혁.
- 그래.
- 나 보러 와.
- 알겠다.
- 연락 자주 해.
- 잘 받기나 해라.
- 유중혁.
- 왜.
- 좋아해.
제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마주 꽉 껴안았다. 대답을 대신하듯이. 한참이나 그렇게, 시간이 다할 때까지 서 있었다.



문이 닫혔다. 커다란 몸체가 미끄러지듯 철로를 달려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유중혁은 그 광경을 한없이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김독자. 금방 만나러 가겠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다시 만날 때까지.
그때는, 시간이 모자라서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전부 해주겠다고. 이번에는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했던 생각을 들려주겠다고. 기차가 빠져나간 자리로 겨울 공기가 밀려들었다. 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유중혁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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