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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에게 쓰는 편지

7월 모의고사 일주일 전이었다. 유중혁은 샤프펜슬 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긴 김독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심각한 고민을 하는 듯 곡선을 그리고 있는 가지런한 눈썹과 그 아래 그림자를 드리우는 속눈썹. 깜빡거리지도 않고 종이를 노려보던 눈꺼풀이 이내 들썩였다.
- 아. 알겠다.
삽시간에 밝아지는 표정. 가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곧이어 계산을 마친 김독자가 답을 적어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유중혁에게 내밀었다.
- 맞지? 이거?
그제야 유중혁은 정신을 차리고 옆에 놓여 있던 답지를 집어 들었다. 대답 없이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주자 좋다고 의기양양하게 웃는다. 그 얼굴이 어쩐지 신경 쓰여 펜 끝으로 이마를 슬 밀어내자 금방 눈을 가늘게 뜬다.
- 내가 답을 맞힌 게 불만이냐? 선생님이 그래도 되는 거야?
유중혁 긴장해라, 인마. 이번엔 내가 이긴다. 그런 소리를 주절거리는 뺨을 꾹 눌러보고 싶은 충동이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소매 교복 셔츠 아래 드러난 팔뚝이나, 조금 짧은 듯한 교복 바지 밑으로 보이는 발목 같은, 몸의 마디마다 뼈가 도드라지게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마른 주제에 뺨은 또 하얀 것이 만지면 촉감이 좋을 것 같은…….
유중혁은 갑자기 정색하며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때마침 고개를 든 김독자가 흠칫하곤 마주 봤다. 너 이 새끼 왜 그렇게 쳐다봐, 눈으로 그렇게 욕을 하기에 피하지 않고 쏘아봤더니 먼저 시선을 돌린다. 뭐라 입속으로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욕일 것이 틀림없어 보여 그냥 눈만 조금 더 부라렸다. 가느다란 머리칼이 귓바퀴를 살짝 덮고 있다. 교복 셔츠 아래 받쳐 입은 라운드넥 티셔츠 너머로 드러나는 목덜미, 쇄골, 이상할 정도로 하얀 피부 위로 스치는 불그스름한 기운. 더위를 많이 타나, 그렇게 생각했다.
테이블을 두드리는 손가락을 일견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중혁은 다시 저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김독자가 대단히 애매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 못 들었다. 뭐라고 했지?
그렇게 묻자 김독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했나, 다시 물으려는 찰나 김독자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 유중혁 너 요즘…… 아니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녀석이 문제집을 넘겼다.
- 이 페이지도 풀어? 기다려봐.
그러면서 다시 미간을 좁힌다. 노트 위로 어지러운 수식들이 그려졌다. 유중혁은 검게 채워지는 노트를 가만히 지켜보며, 전혀 상관없을 누군가를 떠올렸다. 글씨체도 전혀 닮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면 그 편지가 생각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일주일에 두어 번꼴로 놓여 있던 편지가 이번 주에만 네 통이 왔다. 기복이 심한 녀석이군,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다지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 편지를 펼쳐보기 전까지는 솔직히, 조금 기대감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 이름 모를 녀석이 적어주는 글자들은 제법 좋은 것들이 많았으므로. 편지에 적힌 내용들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오늘의 운세 같은 짤막짤막한 문구들이 아니었다. 그 내용이 시라면, 시 전체가 통째로 적혀 있었다. 소설이라면, 최소한의 문맥이 파악되도록 하려는 것인지 앞뒤 세 장 정도의 분량이 들어 있었다. 그런 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서 좋았다. 그 긴 글줄을 필사할 동안 너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아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런 게 좋을 리가 없었다. 지금껏 질색해오지 않았던가? 유중혁은 다시금 정색했다. 다시 말하지만, 기복이 심한 녀석이다. 그야, 이번 주에 온 편지 내용들은.

「 검은색 펜 다 떨어져서 사러 갔다 옴 」
「 수특 영어 20강 듣기 단어 50개 」
「 유가네 닭갈비 」

이따위였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어져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되어버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잠시나마 기대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져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앞에 두 개는 그렇다 치고(그렇다 치고 싶지 않았지만) 유가네 닭갈비? 이건 도대체 뭐지? 미친 건가. 그러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두 번째인가 세 번째에 온 편지에도 웬 상호가 줄줄 적혀있었던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암호문인가 싶어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뜻은 파악하지 못했다. 덕분에 유중혁은 최근 들어 굉장히, 몹시도, 그 편지를 신경 쓰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란 것을 아는데도 집중력이란 원래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언가 차가운 것이 이마에 닿아왔다. 정확히는, 서늘한 손가락 끝이 제 미간을 꾹꾹 눌러 문질렀다. 흘긋 손의 주인을 쳐다보니 실실 웃으며 계속해서 문질러댄다.
- 뭐 하는 거지?
차갑게 물었지만 멈춤이 없었다.
- 사람 잡겠다, 유중혁.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냐.
유중혁은 제 표정이 어땠는지 알 길이 없었으므로 김독자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손안에 들어오는 저보다 작은 손의 체온이 훌쩍 낮았다. 저도 모르게 그 손을 꽉 붙잡은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 원래 이렇게 손이 차갑나?
김독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선 손을 빼내려는 듯 팔을 당겼지만 유중혁은 놔줄 생각이 없었다.
- 아니, 시발, 유중혁 이것 좀 놓고…….
뻐끔거리는 말을 끊고 제 할 말을 했다.
-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 아닌가?
김독자의 뺨이 조금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 아픈 데 없거든, 미친놈아. 빨리 이거나 놔. 뭐 하는 거야.
이상할 정도로 당황하는 것이 미심쩍었지만 유중혁은 놔주기는커녕 김독자의 손을 펼쳐서 다시 제대로 붙잡았다. 안쪽은 더 차갑군. 이제는 욕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지 김독자가 입술만 달싹거렸다. 커다랗게 열린 눈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눈매를 세웠다.
- 김독자. 너…….
뭐라 말하려는데 옆에서 ‘헐.’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중혁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같은 반 녀석이었다.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손아귀에서 손이 싹 빠져나갔다.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는 김독자를 흘끗 바라본 유중혁은 속으로 조금 혀를 찼다.
- 헐…… 소문 진짜였나 보네.
유중혁은 굳이 무슨 소문인지 묻지 않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독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 무슨 소문?
물어놓고선 헙, 하고 입을 다문다. 질문을 받은 녀석 또한 설마하니 그 ‘김독자’가 제게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그냥 무시할지 말지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녀석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 너랑 유중혁 사귄다고…….
순식간에 김독자의 표정이 급변했다.
- 미쳤냐? 그런 거 아냐.
황당하다는 목소리에 대답한 녀석도 똑같은 목소리로 다시 답했다.
- 아니, 시발. 니가 해명 안 해도 되거든. 당연히 아니겠지.
그러면서 유중혁을 흘끔거린다. 그치? 라고 묻는 듯한 눈빛. 유중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녀석의 얼굴에 설마? 하는 기색이 스쳤다. 김독자가 유중혁을 바라보며 독촉하듯 말했다.
- 유중혁, 왜 가만히 있어? 이상한 소문 돈다잖아.
하지만 유중혁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 팔짱을 꼈다. 명백하게 묵비권을 행사하는 태도에 옆에 서 있던 녀석이 질린 표정을 했다.
- 나도 모르겠다 시발, 둘이 알아서 잘해라.
그러고선 얼른 자리를 뜬다.
- 유중혁!
김독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 조용히 해라, 김독자.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말하자 김독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거기서 왜 입을 다물고 있어, 미친 새끼야. 난 니가 갑자기 입술이 딱 달라붙는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네, 시발.
쏟아져 나오는 험한 말에 눈썹을 들썩였지만 김독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얼마간 더 뭐라 뭐라 욕을 하던 김독자가 문득 말을 멈췄다.
- 너…… 설마 알고 있었어? 저런 소문 도는 거?
유중혁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김독자의 표정이 한 번 더 변했다. 책상 위에 얹어진 손이 주먹을 꽉 쥐어 하얗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가뜩이나 하얀 놈인데.
- 유중혁. 잠깐 나와.
간신히 입을 열어 씹어뱉듯 말하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한다. 유중혁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자 도서관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점등된 가로등만으로 밝혀진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서 김독자가 서성대고 있었다. 마치, 분을 삭이려는 듯이. 혹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이. 하, 시발,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올린 김독자가 유중혁을 바라보고선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대뜸 멱살을 잡아챈다.
- 유중혁 미친 새끼야. 너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장난치는 거야?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유중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김독자의 손을 잡아 떼어내었다. 하지만 김독자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 대체 왜 그러냐고. 재밌냐? 나 갖고 장난치니까 재밌어?
몹시도 화가 난 얼굴. 도대체 왜 그러느냐고 묻고 싶은 것은 유중혁 자신이었다.
- 장난친 적 없다.
그렇게 말하자 김독자가 하, 하고 웃었다.
- 이게 장난이 아니면 뭔데? 왜 저딴 소문이 도는데 부정을 안 하냐고? 너랑 내가 사귀냐?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에 어쩐지 몹시도 불쾌해졌다는 것이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노려보았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시선이 돌아왔다.
- 김독자.
- 왜.
- 저기서 그럼 내가 뭐라고 대답하길 바라지?
- 뭐?
순간 어이없다는 눈빛이 쏘아졌으나 곧 김독자가 따박따박 말했다.
- 아니라고 했어야지. 그런 사이 아니라고 정확하게 말했어야지!
예상한 대답이었다. 유중혁은 말했다.
- 내가 그렇게 대답하면 다른 녀석들이 어떻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나.
김독자가 멈칫거렸다. 커다랗게 떠졌던 눈이 가늘어졌다가, 바닥으로 향했다. 발끝 어딘가를 헤매던 시선이 다시 들어 올려지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하겠지.
살짝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당연하지, 넌 그걸 믿었냐? 유중혁이랑 김독자가? 말이 돼? 그렇게 반응하겠지.
김독자의 눈이 점점 흐려졌다.
- 급이 안 맞는 것도 정도가 있지,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냐, 그렇게 말하겠지. 세상에서 제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씨발, 유중혁. 내가 이런 걸 내 입으로 말해야 돼? 그래야 속이 시원하냐? 개새끼야!
날카롭게 쏟아지는 말은 유중혁을 향했지만 김독자는 마치 자신이 찔린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했다. 실제로도 그 말들은 모두 김독자를 향해 날이 서 있었다. 유중혁은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이 뾰족한 말을 던지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을 파먹는 행위라는 것을.
유중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대답하지 않은 거다.
- 뭐?
얼빠진 목소리를 들으며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 김독자, 너는 무슨 일이 터지면 너 자신 탓부터 하지. 한심한 꼴이다. 몸으로 하는 건 모조리 재주가 없고, 체력도 바닥을 기고.
김독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녀석이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할 정도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어쩔 수 없이 네 비교 대상에 내가 놓이게 될 테니까.
김독자가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푸는 것이 보였다. 아니, 힘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유중혁은 잠시 김독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다음 말을 할지, 아니면 참을지, 짧은 갈등이 지나갔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결국 유중혁은 제 속을 짓누르던 말을 꺼내놓았다.
- 하지만 네가 그런 소문 때문에 그 정도로 불쾌해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유중혁은 조금 전 김독자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던 표정들에 얽힌 감정을 전부 읽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김독자는, 자신과 엮이는 일을 전혀 반기지 않는다.
김독자. 그렇게 화난 얼굴을 할 정도로 싫었던 건가? 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불필요했으니까. 유중혁은 몸을 돌렸다.
- 머리 좀 식히고 들어와라. 먼저 간다.



하지만, 도서관 폐관 시간이 다 되도록 김독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 학생, 문 닫을 시간인데…….
그런 말을 들으며 유중혁은 제 앞자리에 어지러이 펼쳐진 문제집과 교과서를 바라보았다. 책과 필기구를 갈무리해 김독자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제 가방은 어깨에 메고, 김독자의 가방은 손에 든 채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또 도망친 건가, 김독자. 그 정도로 싫었던 건가.
문득 처음 번호를 교환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보다 더 전, 제 교과서를 넘겨줬던 날도. 유중혁은 딱히 정의의 사도 같은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라는 인간에 대해 개인적인 호감이나 유감도 전혀 없었다. 그냥,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 모습은 보기 불쾌했다. 그래서 한 행동이었고, 그 작은 호의에도 김독자는 도망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나와 묶이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 저 정도로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녀석이니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중혁은 제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애초에 이런 스터디 같은 제안에도 응하지 말 것이지. 어째서 시작했단 말인가. 이제 와서 저 희멀건 녀석을 모른 척하기엔, 유중혁은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 집이 어디지? ]
당연하게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다시 활자를 타이핑했다.
[ 네 가방은 내가 가지고 있다. 내일 학교에서 돌려주는 편이 낫나? ]
여전히 답은 없었다. 결국 포기한 유중혁은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부르르, 휴대폰이 울었다. 화면에 짧은 주소가 떠올라 있었다. 어느 고시원의 주소였다.



유중혁은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입구 도어락 비밀번호는 김독자가 알려준 대로 풀고 올라왔지만, 막상 그가 알려준 방 앞에 서니 노크를 하기가 망설여졌다.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나? 생각지 못했었다. 녀석의 환경이 열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사람 하나 서 있기도 비좁은 복도에 낡은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먼지가 잔뜩 낀 전등은 어두침침했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굴렀다.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던 유중혁은 결심을 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두드리려는 찰나 달칵, 하고 문이 안쪽으로 열렸다. 어둑한 조명 아래서도 흰 얼굴이 저를 올려다봤다.
김독자는 교복 차림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복에 신기해하기도 잠시, 김독자가 시선을 피하며 몸을 물렸다.
- 들어와.
유중혁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그렇게까지 좁지는 않았다. 몹시도 상태가 좋지 않은 복도를 보고 내부마저 그러할까 봐 걱정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책상 하나, 책장 하나, 침대 하나. 안쪽으로 작은 문 하나. 화장실인 모양이었다. 빨래 건조대를 세우고 나면 공간이 그닥 남지 않을 것 같은 정도의 크기. 하지만 혼자서 살기에는 그다지 무리가 없어 보였다.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기도 했고.
침대에 털썩 앉은 김독자가 고갯짓을 했다.
- 아무 데나 앉아.
유중혁은 책상 의자에 앉았다. 물끄러미 유중혁을 바라보던 김독자가 피식 웃었다.
- 네가 있으니까 이 방 왜 이렇게 좁아 보이냐. 너 혼자 살기엔 여기 좁겠다. 누가 운동하는 놈 아니랄까 봐 체격은 좋네.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김독자가 웃은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신경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짧게 한숨을 쉬고선 바닥에 내려뒀던 가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 아무리 그래도 가방을 두고 가나?
그렇게 묻자 김독자가 다시 웃었다.
- 네가 가져다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 뻔뻔하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자 또 웃는다. 걱정한 것이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반응에 유중혁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조용히 시선이 마주쳤다. 침대 위로 한쪽 다리를 접어 올린 김독자가 무릎에 뺨을 기대고는 빙긋 웃었다.
- 중혁아.
- 왜.
- 나 이렇게 살아. 아무한테도 보여준 적 없어. 네가 처음이야.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리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김독자는 다리를 끌어모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 그렇게 못 살지는 않아. 돈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친척들이랑 같이 살기 싫어서 내가 나온 거야.
자세한 부연 설명은 없었다. 유중혁은 그의 배경으로부터 어렴풋한 사실관계를 유추하다가 그만두었다. 추측해서 뭘 할 건가. 묵묵히 다리를 꼬고 있자 잠시 망설이던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 아까 날카롭게 말해서…… 미안하다.
작은 목소리라서 하마터면 제대로 듣지 못할 뻔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김독자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 그냥…… 어쨌든 니가 나쁜 의도로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알았으니까.
그러더니 다시 얼굴을 돌려 씩 웃는다.
- 그래도 유중혁 이 새끼야, 어떻게 그런 소문이 퍼지게 가만히 냅둘 수가 있냐. 나는 소문에 엄청 느리다고. 하마터면 평생 모를 뻔했네.
평생 모르면 좀 어떤가. 설핏 그런 생각을 한 유중혁은 흠칫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김독자가 눈을 깜빡였다.
- 너는 불쾌하지도 않았냐?
뭐가 말이지, 하고 눈으로 묻자 침착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나랑 사귄다는 헛소문이 도는데도 기분 나쁘지 않았냐고.
하긴, 안 나빴으니까 가만히 있었겠지. 유중혁 미친 새끼. 또 욕인지 칭찬인지, 무엇도 아닌지 아리송한 소리를 한다. 김독자가 다시 말했다.
-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부정 안 할 거냐?
유중혁은 묵묵히 시선을 되받아쳤다.
- 하여간 진짜 이상한 새끼야…….
중얼거린 김독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듣기 좋은 소리였다.
- 이제 가, 유중혁. 가방 가져다줘서 고마웠다.
김독자가 몸을 일으켰다. 유중혁은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 김독자를 올려다봤다.
- 왜 그래?
그렇게 말한 김독자가 잠시 망설이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들어 올려 엄지로 조심스럽게 입가를 쓸어낸다.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조금 멈췄다.
- 이거 생각보다 오래가네. 약 안 발랐어?
활줄에 스쳤던 상처였다. 크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보일 정도는 되었다.
- 유중혁 너 인마, 얼굴 믿다가 큰코다친다. 너 봐줄 건 얼굴밖에 없으니까 관리 잘해라.
헛소리에 미간을 팍 좁히자 김독자가 키득거렸다.
- 기다려봐.
그러고는 주섬주섬 연고를 꺼내와 발라준다.
- 흉터 남으면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플 것 같으니까 관리 좀 해, 자식아. 근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딴생각이라도 했냐?
주절거리는 입술의 움직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과녁을 바라보듯이, 저도 모르게 집중해서.
유중혁은 손을 들어 올렸다. 제 입가를 매만지고 있는 손을 붙잡자 김독자가 멈칫하며 눈을 맞췄다. 짧은 침묵이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입을 벌린 채로 경직된 흰 얼굴이, 움찔거리는 손가락이…….
김독자가 다른 손으로 콱, 제 얼굴을 밀어냈다. 유중혁은 인상을 쓰며 손을 놓아주고 일어섰다.
- 뭐 하는 거냐.
김독자가 뒤로 물러나며 주먹을 꽉 쥐었다.
- 얼른 가, 이 자식아. 답지도 않은 행동 하지 말고.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조금 틀어낸 탓에 흰 목덜미가 고스란히 보였다. 잠시 거기에 시선을 주고 있던 유중혁은 바닥에 내려두었던 제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문으로 걸어가자 김독자가 따라왔다. 복도로 나서는 저를 배웅하듯 문고리를 붙잡고 선 김독자를 돌아봤다. 어두운 등 아래에서도 그 눈은 언제나처럼 묘하게 빛났다.
- 김독자.
- 응?
- 잘 자라.
김독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눈꺼풀이 팔랑거렸다. 곧, 쾅 하고 황급히 문이 닫혔다. 유중혁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슬그머니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홀가분한 심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울었다.
[ 너도 잘자 ]
[ 내일 봐 ]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껐다. 까맣게 물든 화면에 제 얼굴이 비쳤다. 평소 제 모습이라곤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풀어진 표정에 유중혁은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기분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유중혁은 입을 꾹 다문 채 맞은편에 앉은 녀석을 쳐다봤다. 저와 똑같은 표정을 하고선 앉아 있는 꼴이 아무래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고 있자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유중혁.
- 왜.
- 작작 좀 열심히 해.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건지. 유중혁은 고개를 치켜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 그건 내가 할 말이다, 김독자.
그러니까, 그랬다. 7월 모의고사 결과도 둘 다 나란히 한 계단씩 등급이 올랐던 것이다. 아, 여기서 더 올리긴 힘들 것 같은데, 투덜거리며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김독자는 말과는 달리 기분이 꽤나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유중혁은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눈앞의 허여멀건 녀석을 바라보았다. 딱히 무언가 명확한 소원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내기나 승부라고 하니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을 뿐. 그런데 다시금 비기고 나니 무언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것처럼 허전했다. 속으로 조금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김독자가 슬쩍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다. 뭘 보나, 그런 시선을 되돌려주자 웃는 얼굴이 돌아왔다. 얄밉게도 입꼬리를 알랑거리는 미소라서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분이.
김독자가 상체를 조금 기울였다.
- 중혁아.
- 왜.
- 이렇게 됐으니까 그냥…… 서로 소원 하나씩 들어주기 할래?
유중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또 무슨 수작질인가 싶었다. 몇 달간 지켜본 결과, 김독자라는 녀석은 은근히 사람을 놀려먹는 재주가 있었다. 멀찍이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라서 처음에는 적응을 하지 못해 여러 번 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다. 빨리 속내를 털어놓으라는 듯 빤히 쳐다보자 김독자가 어이없다는 듯 하, 소리를 냈다.
- 유중혁. 내가 뭐 틈만 나면 이상한 짓 하는 줄 아냐?
아랑곳 않고 계속 바라보니 제풀에 찔리는지 말꼬리를 흐린다.
- 아니, 뭐…… 야, 어쨌든 이번엔 진짜 이상한 뜻 있는 거 아냐. 정말로…….
그렇게 말하며 어쩐지 눈치를 보듯 제대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흘끔거린다. 확실히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기는 했다. 한참이나 김독자를 꼬아보던 유중혁이 결심하고선 입을 열었다.
- 무슨 소원을 빌 생각이지?
김독자가 말간 눈으로 저를 쳐다봤다. 쉬이 읽어내기 어려운 시선. 이 녀석은 종종 이런 눈으로 나를 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김독자. 정말이지…… 가끔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보자 김독자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 나중에 말해줄게.
- 나중에, 언제?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김독자가 말했다.
- 우리 졸업할 때.
그래서 어이없게도, 유중혁은 졸업을 기다리게 되었다.








여름이 깊어갔다. 기말고사쯤부터 모의고사 이후까지 계속해서 눅눅하게 이어지던 장마철도 그 끝을 보였다. 그와 함께 기온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학교도 드디어 짧은 방학을 맞이했다. 김독자는 지난 3년간의 성적표를 들여다보며 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짧은 고민에 빠졌다. 7월 모의고사를 마치며 유중혁과의 스터디는 어영부영 끝이 났다. 유중혁은 굳이 수능을 잘 볼 필요가 없을 것이었으므로 이제는 공부가 아니라 실기에 힘을 쏟아야 할 시기였다. 원서 접수 전까지 남은 대회에서 죄다 상을 쓸어올 기세이기에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 거기 딱 두 명 뽑는다며, 유중혁.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 자신 있냐? 그렇게 묻자, 유중혁은 조용히 답했다.
- 나는 상당히 늦게 시작한 편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겠지.
김독자는 웃으며 그의 단단한 어깨를 두드렸다. 합격할 수 있을 거야, 인마. 응원한다. 그런 말은 속으로만 했다. 말로 하기엔 왠지 쑥스러워서.
김독자는 한숨을 폭 쉬었다. 지금 유중혁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그 자식은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할 놈이다. 유걱쓸이다, 유걱쓸(유중혁 걱정 쓸데없다). 김독자는 들여다보던 성적표를 책상에 탁 내려두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 대학 어디 써야 하지. 원서접수비도 비싸겠지,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설핏 어머니나 다른 친척들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얼른 지워버렸다. 절대로 손 벌리기는 싫다. 지금부터라도 모아놔야지. 근데 어디서 줄이지. 식비를 줄여?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켜자 유중혁의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 김독자 지금 올라간다 ]
뭐? 아니 미친 유중혁 이 자식이. 김독자는 침대에서 펄쩍 뛰듯이 일어나 얼른 방을 정리했다. 넓지 않은 방이라 정리할 것은 별로 없지만……. 건조대에 널린 빨래를 갤 시간은 없었으므로 바닥에 흩어놓은 종이 뭉치나 침대 위의 이불만 대충 정리했다. 그날 주소를 알게 된 이후로 이 자식은 이렇게 갑자기 쳐들어올 때가 있었다. 내가 시발, 그때 미쳤지. 왜 주소를 알려줘서…….
이불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어쩔 수 없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그런 호의와 걱정을 완강히 거부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도 이 이상은 안 되겠지. 적당한 선까지만 허용하자. 여기서 유중혁이랑 더 친해져서 뭘 어쩔 건가. 반년만 있으면 빠이빠이 하고 각자 갈 길 가게 될 텐데. 유중혁은 한국체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뉴스에도 종종 오르내리는 녀석이니 아마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어쩌면 내후년쯤에는 하계 올림픽 양궁 국가대표 선수 목록에서 유중혁이라는 이름 세 글자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뭐, 좋은 거지.
김독자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나중에라도, 저 녀석이랑 한때나마 친했던 적이 있었다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지만 그러기엔 난관이 두 개나 있었다. 첫째, 유중혁과 자신이 정말 친하다고 해도 되는 것인가. 둘째, 내게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과연 생길 것인가. 흠, 둘 다 회의적인데.
피식 웃은 김독자는 이불을 탁탁 두드리고선 몸을 일으켰다. 김독자, 열아홉 살. 반년 후면 스무 살, 아마도 대학생.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내 삶은 언제나 그대로일 것이다. 언젠가 미래에는 곁에 누군가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이제 와서 그런 걸로 슬퍼할 마음은 없다. 그런 건 지난 몇 년간 이미 충분히 많이 했다. 나는 계속 혼자일 것이고, 누군가가 곁에 있어 주지도 않을 것이며, 그런 걸로 상처받지도 않는다. 혼자 사는 게 뭐 그리 문제라고.
고개를 돌려 희뿌옇게 먼지가 낀 창문을 바라보았다. 길어진 여름 해가 저물어가는지 온통 붉은 기가 돌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왜 살지.
얼른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왜 살긴. 나한테는 아직 완결까지 못 본 웹소설이 있다. 완결 보기 전엔 절대 못 죽는다. 그거 완결 나고 나면? 다른 거 완결 기다리면서 사는 거지 뭐. 아마도 나는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살아갈 것이다. 이유? 그런 건, 아무도 묻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대답할 수가 없으니까.
눈가가 시큰했다. 코를 훌쩍이며 휴지를 뽑아 콧망울을 꾹 눌렀다. 시발, 유중혁 오는데. 그 순간 기가 막히게도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중혁 이 귀신 같은 놈. 김독자는 휴지를 휴지통에 쑤셔 넣고선 문으로 향했다. 잠금을 풀자 여느 때처럼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이 서 있었다. 입가의 흉터는 이제 없다. 다행이네.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갑자기 오지 좀 마, 이 새끼야. 여기가 너네 집이냐?
목이 갈라져서 큼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시발, 좆됐네. 설마 얼굴도 이상할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꽂혀 들어 김독자는 슬쩍 고개를 돌리고선 몸을 물렸다.
- 왜 왔냐? 오늘 연습 없었어?
- 끝나고 오는 길이다.
- 끝나면 너네 집으로 가야지 왜 우리 집으로 와? 할 일 없냐?
흘긋 책상을 살핀 유중혁이 안으로 들어서지 않은 채 고개를 까딱였다.
- 저녁 먹었나?
- 응? 아니, 아직.
반사적으로 솔직하게 대답한 김독자는 뒤늦게 이 새끼가 왜 이런 걸 묻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유중혁의 입에서 정말이지 어안이 벙벙한 말이 흘러나왔다.
- 안 먹었으면 같이 먹지.
- ……?
물음표를 띄우며 쳐다보자 유중혁이 뻔뻔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 왜 그렇게 보지?
김독자는 유중혁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리를 굴렸다. 이 자식이 왜 나랑 같이 밥을 먹재? 밥을 같이 먹는 걸로 나한테 엿을 먹일 만한 방법이 뭐가 있지? 고민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 왜?
그러자 유중혁의 얼굴에 허를 찔린 듯한 기색이 아주 짧게 스쳤다가 사라졌다. 곧 녀석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내려다보는 얼굴이…… 시발, 이 새끼 왜 이렇게 잘생겼지? 김독자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이 자식…… 뭐냐고. 이게 설마 잘생긴 놈들이 얼굴을 써먹는다느니 뭐니 하는 그건가? 미친놈. 유중혁이 그대로 입을 열었다.
- 같이 안 갈 건가?
김독자는 얼떨결에 고개를 젓고는 뒤늦게 아차 했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유중혁의 집이었다.
응? 김독자는 눈을 껌뻑거리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낯선 천장이다. 으응? 그러니까…… 여기까지 어떻게 왔더라. 그놈의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김독자는 혹시 제게 얼빠 기질이 있었던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대충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유중혁은 제게 뭘 먹고 싶냐고 묻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어디론가 향했다.
- 어디 가?
그렇게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김독자는 유중혁의 식습관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까다롭다는 것 정도는. 그런 녀석이 가는 곳이니 모르긴 몰라도 맛이 없진 않겠지 싶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데면 비싼 거 아닌가? 시발, 식비를 줄여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존나 이게 무슨 일이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얼떨결에 계속 따라와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왜 여기 있냐고. 심지어 눈앞에는 유중혁과 몹시도 닮은…… 예쁘장한 애가 앉아 있다. 뭐지 진짜 시발. 누가 봐도 남매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얼굴에 김독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 유중혁, 너 동생 있었냐?
그렇게 묻자 유중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몰랐냐는 듯한 반응이다. 뭐라 더 말하려는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 오징어.
- ……응?
김독자는 갑작스런 폭탄 발언에 눈을 껌뻑거리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식탁 위에 놓인 숟가락 끄트머리를 쥐고 흔들며, 그 손짓과는 전혀 달리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한다.
- 오징어.
김독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 나?
유미아라는 이름의 아이가 확인 사살을 하듯 숟가락 끝으로 김독자를 가리키며 끄덕였다. 아니, 오징어라니. 너무한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못생겼나?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김독자는 의외로 제 외모에 대해 자기 객관화가 잘 됐다.) 그러다가 문득, 맨날 유중혁 같은 얼굴만 보고 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시발, 유중혁 작작 좀 잘생기지. 그치만 작작 잘생겨봤자 아쉬운 건 유중혁 본인이 아니라 그 낯짝을 보는 자신일 터였다. 머쓱하게 뺨과 턱 언저리를 매만지고 있자니 유미아가 다리를 통통 튀기며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 오빠. 오늘 할머니 안 와?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아는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선 다시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마주 보자 유미아가 말했다.
- 우리 오빠 친구예요?
김독자는 할 말을 잃은 채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 친구라기엔 좀…… 너무 양심에 찔리는데. 흘긋 유중혁의 눈치를 보자 막 앞치마를 매던 유중혁이 아이를 불렀다.
- 유미아, 괜한 소리 말고 기다려.
입술을 비죽 내민 아이가 다시금 흥미 가득한 눈길로 김독자를 훑었다. 유중혁이 왜 앞치마를 매는지 고민하던 김독자는 다시 저를 보는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샅샅이 살펴보는 것이 어째 어린아이의 시선이라기엔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누가 유중혁 동생 아니랄까 봐.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 안녕. 나는 김독자야.
유미아는 눈을 깜빡였다.
- 아저씨 몇 살이에요?
아니, 아저씨라니…….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 나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렇게 말하자 유미아가 커다란 눈을 굴렸다.
- 나한테 오빠는 우리 오빠밖에 없는데…….
가스레인지 앞에서 무언가를 하던 유중혁이 흘긋 고개를 돌리고선 기특하다는 듯이 유미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돌아갔다. 유중혁 인마, 네가 그렇게 가르쳤냐.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봤으나 유중혁은 본 척도 않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익숙하게 주방을 거니는 유중혁의 모습에 김독자는 슬쩍 동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저기…… 너희 오빠 요리 잘해?
그렇게 묻자 유미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당연하죠. 우리 오빠는 못하는 거 없어요.
아 그래……. 김독자는 애써 웃었다. 쉽지 않군. 유중혁보다 더 대하기가 어렵다. 그야 물론, 김독자는 애초에 유중혁 외에 또래 친구라곤 없었고, 이렇게 나이 차이가 나는 아이들과 대화할 일도 전혀 없었으므로 당연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열심히 고민하는데 유미아가 먼저 재잘재잘 말을 늘어놓았다.
- 아저씨 진짜 우리 오빠 친구예요? 우리 집에 오빠 친구 온 적 한 번도 없는데…….
- 뭐?
김독자는 유중혁을 돌아보았지만 유중혁은 못 들었는지, 못 들은 척을 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손만 움직였다. 치이익, 프라이팬에서 소리가 났다. 저거 아무래도 모르는 척하는 것 같은데. 나랑 친구라고 인정하기가 그렇게 싫냐? ……하긴, 그렇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 미안한데 친구는 아냐. 그냥 스터디…… 공부 같이하는 사이야.
유미아가 눈을 굴렸다. 프라이팬에서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치익, 하는 소리가 났다.
- 야, 타는 거 아냐?
- 신경 꺼라.
어쩐지 몹시도 빡친 목소리가 돌아와 김독자는 고개를 돌렸다. 이 자식이 자기가 요리 실수해 놓고 나한테 화풀이냐. 맛없기만 해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유미아가 숟가락을 입에 물고선 입술을 움직였다.
- 아저씨 좀 이상하다…….
뭐가. 김독자는 억울해졌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식사였던 것 같았다. 김독자는 멍한 눈으로 배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소파에 길게 늘어져 앉았다. 그러니까…… 맛있었다. 엄청. 딱히 특별한 음식도 아니었고, 그냥 백반집 가면 나오는 메뉴 같았는데 말도 안 되게 맛있었다. 뭐지? 꿈인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내가 제대로 된 밥이 너무 먹고 싶어서 꿈을 꾸나…… 말이 안 되지 않나? 맛있는 밥을 먹은 것만으로도 꿈 같은데 그걸 심지어 유중혁이 했다고? 역시 꿈인가보다. 그럼 안 깨고 싶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러고 있는데 정수리에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아야, 하며 올려다보자 유중혁이 몹시도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이 자식은 밥 먹을 때도 죽상이더니 왜 아직도 이러고 있냐. 정수리를 문지르며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 야, 너 나한테 무슨 불만 있어? 아까부터 왜 그래?
유중혁의 얼굴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아, 아니……. 입을 우물거리던 김독자는 뒤늦게 제가 감사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러나? 그제야 김독자는 머쓱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 어…… 잘 먹었어. 엄청 맛있더라.
평소였다면 뒷말은 붙이지 않았겠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이 신경 쓰여 덧붙였다. 유중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여간 이 자식 은근히 섬세한 구석이 있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유미아가 툭 중얼거렸다.
- 아저씨 진짜 이상하다.
뭐가 또 이상한데? 되물으려는 찰나 유중혁이 말을 가로챘다.
- 다 먹었으면 가라.
김독자는 황당한 얼굴로 유중혁을 다시 쳐다봤다. 뭐야? 진짜 용건이 밥이었냐고?
- 가라고? 지금?
저도 모르게 되묻자 유중혁이 잠시 서늘한 얼굴을 했다.
- 공부해야 하지 않나?
아니 시발 이 자식이, 일부러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다시 떠오른 성적표에 김독자의 얼굴에 설핏 옅은 우울이 스쳤다. 에이, 그래. 가서 공부나 해야지.
김독자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 나 간다, 유중혁. 잘 먹었어.
겉옷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하는데 유중혁이 뒤따라왔다.
- 데려다주겠다.
- 응? 뭐라고?
- 데려다준다고.
김독자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 녀석 오늘 진짜 이상한데.
-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애냐?
- 잔말 말고 나가라. 더 늦기 전에.
유미아, 잠깐 다녀온다. 오빠 다녀와, 그런 소리를 배경으로 들으며 김독자는 떨떠름하게 유중혁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 자식 진짜로 어디 아픈 거 아냐?



유중혁은 미간을 한껏 좁힌 채 김독자의 곁에 서서 걸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여름 밤거리의 온도에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제 곁에서 걷고 있는, 항상 말이 많던 녀석은 눈치라도 보는지 이쪽을 흘끔거리기만 할 뿐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유중혁도 뭐라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어색한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얼마 걷지 않아 김독자가 살고 있는 고시원의 골목 앞까지 도달했다.
- 다 왔네, 나 간다.
얼른 말하는 것이, 어지간히도 빨리 이 어색한 침묵을 벗어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김독자의 팔목을 붙잡았다.
- 김독자.
체급 차이 때문에 하릴없이 끌려온 김독자가 휘청이다가 벽에 손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 아, 깜짝이야. 왜 갑자기?
유중혁은 김독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일단 앞을 막아섰다. 가로등을 등진 자세가 되어 제 그림자가 김독자의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김독자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저를 올려다봤다.
유중혁은 저녁을 먹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굴렸다. 김독자.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친구는 아니라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어이가 없었다. 김독자, 지금까지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나와 엮이는 것도 그렇게까지 싫어했던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퍼즐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친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어째서. 유중혁은 김독자의 미소를 떠올렸다. 저를 바라볼 때면 부드러이 접히는 눈, 다른 녀석들 앞에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으면서 제 앞에서는 온갖 이야기들을 다 늘어놓던 입술. 중혁아, 하며 친근하게 불러오던 목소리, 따끔거리는 입가를 매만지던 손가락. 친구가 아니라면, 어째서? 납득할 수 없었다.
동시에, 친구도 아니면서 그런 식으로 저를 대했다고 생각하면, 친구…… 혹은 그 이상인 이들에게는 어떤 얼굴을 하는 거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걸 생각하면 어쩐지 몹시도 화가 났다. 뒷목이 뻐근해졌다. 김독자는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알고 있는데.
애초에 자신은,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단 말인가. 김독자가 저를 친구로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무슨 상관인…….
문득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쨍, 하며 치고 지나갔다. 그랬다. 이 녀석이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화가 난다는 건…… 곧, 나를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이 녀석이 나를 친구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나를 보고 웃어주고, 말을 걸어주고, 때로는 장난도 쳐줬으면 좋겠다. 이제는 그런 게 없으면 허전할 것 같았다. 이 녀석이 제 눈앞에서 없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상실감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 김독자.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저를 쳐다보고 있는 얼굴이 그림자 아래서도 하얬다. 유중혁은 붙잡은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말했다.
- 친구가 아니라고?
한 박자 늦게 김독자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 뭐?
눈꺼풀이 깜빡였다. 유중혁은 고개를 조금 더 숙이며 이를 갈듯 낮게 말했다.
- 친구가 아니라면, 김독자.
손안에 잡혀 있는 몸이 굳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그러면, 나를 뭐라고 생각하지?
이마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벽에 등을 딱 붙인 채 김독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유중혁은 그 발그스름한 입술을 빤히 바라봤다.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닿는다. 호흡이라도 멈추고 있는 것인지 입술 틈새로 숨결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유중혁은 짧은 충동에 시달렸다. 지금 고개를 숙이면, 닿는다……. 나는, 이 녀석에게 키스하고 싶은 건가. 그리고 유중혁은, 당연하게도, 알고 있었다. 친구끼리는, 키스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가까이 닿아 있는 몸이 달아올랐다. 여름밤의 열기에 머릿속이 녹진하게 녹아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탓에 충동에 몸을 내어주기 직전. 김독자가 유중혁의 얼굴을 콱 밀어내며 황급히 몸을 빼냈다.
얼떨결에 밀려난 유중혁은 눈을 깜빡거리며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헉, 헉, 김독자의 입에서 뒤늦게 가쁜 호흡이 흘러나왔다. 황급히 손을 들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다.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본 유중혁은 뒤늦게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깨닫고선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지금.
허둥거리던 김독자가 몸을 휙 돌렸다.
- 나…… 나 간다.
달리듯 멀어지는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유중혁은 하, 숨을 뱉으며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니까, 나는 방금……. 믿을 수가 없었다. 깨달음의 단계를 몇 단계나 뛰어넘은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와서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너무 늦게 깨달은 감이 있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늘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늦게 깨달았단 말인가. 이제는 스터디라는 명목으로 저 녀석과 시간을 보낼 수도 없는데.
게다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독자, 친구가 아니라고? 대답도 안 하고 그냥 갔단 말이지. 그럼 나는…… 좋아하는 녀석이, 나를 친구라고조차 생각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짝사랑을 시작해야 하는 건가.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환장하겠군.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지금껏 저를 좋아한다며 부딪쳐 오던 이들을 밀어낸 벌이라도 받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는 것이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니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가 고민해야 할 것은, 저 까마득하게 허들이 높은 녀석을 어떻게 제 곁에 묶어놓느냐 하는 것이다.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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