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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에게 쓰는 편지

 
    물론 김독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유중혁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유중혁과 마주 보고 앉아 5월 모의고사 채점을 마치고선 등급컷이 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유중혁은 꽤 괜찮은 선생님이었고, 그래서 김독자는 내심 수학 등급이 오르지 않았을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주 앉아선 서로 말없이 스마트폰을 새로고침하고 있자니 묘한 긴장감 같은 것이 사이를 맴돌았다.
    - 어, 떴다.
    곧장 자신의 수리 영역 등급부터 확인한 김독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고…… 아주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유중혁의 얼굴과 마주했다.
    설마?
    저와 눈이 마주친 유중혁이 정색했다. 이 자식이.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등급이 하나씩 올라서 내기는 무승부가 되어버렸다. 김독자는 조금 허탈해져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딱히 대단한 소원을 빌려고 했던 것도 아니지만, 허무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내가 이기면 유중혁한테 ‘너 나한테 무슨 소원 빌려고 했냐?’ 라고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램프 요정 지니에게 내 첫 번째 소원은 소원을 백 개 더 늘리는 거야, 라고 비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김독자는 애써 외면했다.) 어쨌든, 비겼으니 물거품이 됐네.
    팔짱을 낀 채 묵묵히 김독자를 쳐다보던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 다음은 7월 모의고사로 하지.
    김독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 아직 계속할 수 있는 거구나…… 1학기는 이제 절반 지난 거니까. 그래서 김독자는 씩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 기준은? 이번 모고?
    - 당연한 소릴 하는군.
    일견 자신만만해 보이는 표정에 김독자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이 자식 정말 자신 있나? 나는 솔직히 조금…… 자신이 없는데……. 여기서 등급이 과연…… 더 올라줄까?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가오가 있지 멈출 수는 없었다.
    - 무르기 없다, 유중혁.
    - 너나 모른 척할 생각 마라.
    그런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김독자는 한 발짝 늦게 제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시발, 김독자. 표정 관리 좀 하라고. 입가를 매만지고 있자니 유중혁이 흘긋 시선을 들어 문 쪽을 바라봤다.
    - 공부하다 갈 건가?
    - 아니, 난 오늘은 쉴래. 너는?
    -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갈 거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가방을 쌌다.
    유중혁과 두어 달 정도 함께 스터디를 한 김독자는 우습게도 스터디 외의 시간에도 그와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작은 언제였더라? 유중혁은 항상 제 수업을 단시간에 끝마치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고, 그래서 김독자는 금요일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더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셋째 주쯤부터 유중혁이 제 옆 칸에 앉기 시작했다.
    - 야, 왜 여기 앉아?
    김독자는 입을 뻐끔거렸다. 열람실의 좁은 칸막이 책상보단 넓은 테이블을 쓰는 게 더 좋다고 했던 놈이라서 기가 찼다. 하지만 김독자는 금방 원인을 깨달았다. 아, 저 얼굴. 지난주에 봤던 애들이네.
    유중혁을 따라다니는 애들 몇몇이 그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척이겠지)를 하려 애쓰고 있었다. 김독자는 속으로 혀를 조금 찼다. 저러니 유중혁이 자신에게 편지며 선물 공세를 해대는 녀석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좋아하는 건 자유라지만, 그 명목으로 방해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당연하잖아.
    잠시 생각하던 김독자는 노트 귀퉁이를 조금 찢어 쪽지를 썼다.
    [ 쟤네 왜 계속 너 쫓아다녀? 거절한 거 아니었어? ]
    작게 접어 칸막이 너머로 툭 떨어뜨리자 유중혁이 고개를 들었다. 펼쳐보고 있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가 이내 책상을 긁는 펜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쪽지를 집어 들어 펼치니 이제는 제법 익숙한 글씨체로 답이 적혀 있었다.
    [ 거절해도 쫓아오는 녀석들이다. ]
    말하자면, 답 없게 끈질긴 녀석들이란 소리네. 피식 웃은 김독자는 필통 속에 쪽지를 집어넣고선 샤프펜슬을 사각거렸다. 유중혁 정도 잘난 놈이면 세상만사 다 편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역시 그런 건 아니네. 그런 생각도 했었던가.
    - 김독자.
    문득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걷던 유중혁이 살짝 의아한 기색을 띤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어, 응? 불렀어?
    유중혁이 손가락을 들어 골목을 가리켰다.
    - 집에 안 갈 건가?
    그 손가락을 따라간 뒤에야 김독자는 깨달았다. 아, 너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느라 유중혁과 갈라지는 길에 도착한 줄도 몰랐다. 김독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어깨에 멘 가방끈을 붙잡았다.
    - 아니, 가야지. 나 먼저 간다.
    그렇게 말하고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나타났다. 우리 학교 교복인데……. 자세히 보니 같은 반 녀석들이다. 괜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얼른 자리를 뜨려 했더니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 야, 유중혁! 집에 가냐? 야자도 안 하면서 왜 이 시간에 집에 가?
    그리고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김독자는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얼른 집에나 가자. 하지만 느릇한 목소리들이 뒷덜미를 잡아챘다.
    - 김독자 아냐?
    - 유중혁 너 요즘 쟤……랑 같이 공부한다더니 진짠가 보네.
    유중혁의 대답은 없었다. 무시했거나, 끄덕였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정말로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왁자한 목소리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근데 이 시간까지 같이 공부했냐?
    - 유중혁 웬일이냐, 너 혼자 공부하는 게 좋다고 야자도 뺀 거 아니었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김독자는 다시금 느려지려는 걸음을 재촉했다.
    - 유중혁 이거 심상치 않은데?
    - 우리랑은 피시방도 같이 안 가는 자식이 쟤랑은 같이 공부를 한다고? 뭐냐, 김독자랑 사귀기라도 하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 미친 새끼들이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김독자는 유중혁이 그들의 말을 헛소리하지 마라, 라며 일축하길 기다렸다. 하지만 유중혁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겠지, 거리가 멀어져서 내가 못 들은 거겠지. 그러나 이어지는 녀석들의 반응은 그것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했다.
    - 이 자식 부정을 안 하는데?
    - 진짜야? 실화?
    - 시발, 유중혁 미친 거 아냐?
    쿵. 쿵.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가방끈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은 것을 애써 추슬러 김독자는 달리듯이 걸었다.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 계속 걸어서, 마침내 손바닥만 한 제 방에 들어와서야 문을 닫고 털썩 주저앉았다. 무거운 가방이 미끄러져 옆으로 굴렀다. 헉, 허억. 숨이 가빴다. 언덕길을 올라서인지, 오랜만에 달리듯이 걸은 탓인지, 혹은 이도 저도 아닌 다른 이유인지. 뺨이 얼얼하고 귓가가 뜨거웠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는데도 열기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중혁, 미친놈. 미친 새끼야.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왜 거기서 부정을 안 해? ‘김독자랑 사귀기라도 하냐?’, 그런 노골적인 비웃음이 담긴 질문에, 어째서? 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꿈을 꾼 건가? 환청을 들었나? 차라리 그쪽이 더 현실성 있는 것 같았다. 아냐, 진정하자. 유중혁이 뭔가 생각이 있었겠지. 혹시 나를 엿먹이려고? 이건가? 하지만…….
    유중혁이 저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 분명 무언가 다른 사유가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유랄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녀석들 설마 이상한 소문을 퍼뜨릴까? 하지만 워낙 터무니없는 이야기니 다들 안 믿을지도 모른다. 그래, 시발,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얘기여야지. 별일 없을 거야. 괜찮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비척대듯 바닥에서 일어났다. 씻고 잠이나 자자.



    물론, 시발, 당연히 별일이 있었다. 씨발……. 김독자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유중혁을 둘러싼 녀석들이 그날 이야기로 한창 열띤 공방을 펼치고 있었다.
    - 아니 씨발 내가 들었다니까? 김독자랑 사귀냐고 했는데 유중혁이 부정을 안 했다고.
    - 너는 시발 부정 안 하면 다 긍정이냐? 존나 국어 1등급 맞을 새끼네.
    - 뭐 씨발 말 다 했냐. 상식적으로 니 같으면 김독자랑 사귀냐고 물어봤을 때 아무 말도 안 할 거냐고?
    그날 밤 유중혁과 대화를 나눴던 녀석 중 하나가 내뱉은 말에 순간적으로 공기가 싸해졌다. 저를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김독자는 씨발, 하고 다시 입속을 짓씹었다.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던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지?
    그 말에 다시 한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눈치를 보며 유중혁과 김독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애들 몇이 말했다.
    - 중혁아, 너 진짜 쟤랑…… 사귀어?
    김독자는 지금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갈까 고민했다. 역시 그편이 낫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를 끌고 일어서려는 순간 유중혁이 말했다.
    - 못할 것도 없지.
    김독자는 책상을 붙잡은 채 그대로 굳었다. 방금…….
    - 뭐?
    누군가의 목소리에 김독자는 하마터면 제가 생각을 입 밖으로 냈나 착각할 뻔했다.
    - 유중혁 진심이냐?
    - 거짓말하지 말고.
    - 너 미쳤어?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목소리들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김독자는 참지 못하고 휙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교실을 가로질러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맞물렸다. 그 눈동자는 평소처럼 검었고, 조금은 무기질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건조했다. 여전히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시선. 아, 그래.
    플러스가 아니라서…… 다행이네.
    김독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그런 거 아냐.
    삽시간에 따가운 시선들이 제게 꽂혀 들었다. 김독자는 주먹을 꾹 쥔 채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을 둘러봤다. 정말이지,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지겹다, 이딴 식으로 주목을 받는 건.
    - 유중혁이랑 영원히 그럴 일 없으니까 오해하지 마.
    주변을 전부 얼려 버리기라도 할 듯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고선 교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울컥, 목구멍이 뜨거웠다. 씨발. 유중혁 개새끼가…… 왜 그딴소리를 해? 나 엿 먹으라는 것밖에 더 되냐고? 왜, 거기서, 네가 그런 말을 해? 무슨 생각으로? 도대체 왜? 개새끼야…….
    한참이나 정신없이 달려 나온 것 같았다. 숨이 차서 더는 달릴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학교 밖이었다. 미쳤네, 수업 곧 시작할 텐데. 하지만 도저히…… 그 교실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내가…… 어떻게.
    돌벽에 등을 기댔다. 서늘한 온도가 옷자락 너머로 전해졌다. 스르르 주저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두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유중혁 미친 새끼야…… 네가 어떻게. 머리가 뜨거웠다.
    저를 보는 유중혁의 시선은 항상 제로썸이었다.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시선. 늘 마이너스인 시선만을 받아온 김독자로서는 그것마저도 신선하고 고마웠지만, 그렇지만. 김독자랑 사귀냐? 그 질문에, 못할 것도 없지. 라고 대답하면서, 그런 눈을 하면.
    무릎을 꽉 쥐었다. 손아귀에 쥐어지는 교복 바지가 닳고 닳아 반질거렸다. 눈시울이 홧홧했다. 김독자. 플러스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아니지, 미친놈아. 거기서는…… 플러스가 아니라서 문제인 거야.
    당장이라도 유중혁의 멱살을 잡아 쥔 채 따지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냐고, 그런 거면 나는 이미 충분히 힘들고 지쳤으니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잘생기고 뻔뻔할 낯짝에 주먹을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김독자. 그렇게 저를 부를 낮은 목소리를, 그래. 있는 힘껏 밀쳐내고 싶다고…….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제게 쏟아지는 햇빛을 막고 서 있는 익숙한 낯짝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환각을 보나? 이 새끼를 너무 때리고 싶어서, 그래서 헛것이 보이나. 하지만 틀림없는 유중혁이었다.
    - 김독자.
    다시 한번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하, 헛웃음을 흘렸다.
    - 네가 왜 여기 있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유중혁이 입을 다물더니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김독자는 그 손을 탁 쳐내고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동정하지 마, 개새끼야. 니가 벌인 일이잖아. 너 같은 새끼한테 위로받을 마음 없어. 사과도 받기 싫으니까 꺼져.
    벼려진 칼날처럼 잔뜩 날이 선 말을 던졌지만 유중혁은 손만 거두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되려 허리를 숙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춘다. 김독자는 그 낯짝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온 힘을 다해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반듯한 입술이 열리며 나온 말에, 김독자는 순간 어이가 가출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절감했다.
    - 사과할 마음 없다.
    유중혁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뭐, 이 새끼가? 기가 막혀 노려보는 것도 잊고 입을 뻐끔거리자 유중혁이 계속해서 말했다.
    - 거짓말을 한 게 아니니까, 그걸로 너한테 사과할 생각은 없다.
    김독자가 그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이어졌다.
    - 하지만 조금 전 상황은…… 곤란했을 테니까. ……그건 미안하다.
    사과라는 행위가 낯선 녀석처럼 말끝을 어마어마하게 흐리긴 했지만, 김독자는 분명히 들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몇 초가 몇 분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간신히 유중혁의 말을 이해한 김독자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 거짓말이…… 아니라고?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거짓말하지 마.
    씹어뱉듯 말하자 유중혁이 서늘한 얼굴을 했다.
    -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다.
    하, 시발, 존나 어이가 없네. 실없는 웃음을 흘린 김독자는 표정을 굳히며 다시 유중혁을 노려봤다.
    - 너, 나랑 사귈 수 있어? 개소리하지 마, 유중혁 미친 새끼야.
    분명 유중혁을 향해 던진 말인데 제 속이 문드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짓뭉개진 상처 위에 소금이라도 뿌린 듯 쓰리고 아팠다. 유중혁은 눈썹을 꿈틀했다.
    - 김독자. 나는 분명히 말했다. 못할 것도 없다고.
    아직도 거짓말이네. 김독자는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유중혁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유중혁이 눈을 꾹 감으며 제 관자놀이 부근을 문지르고는 입을 열었다.
    - 너야말로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못 할 것도 없다고 말했을 뿐이지 너와 사귀고 싶다고는 안 했다. 무슨 차이인지는 나보다 네 녀석이 더 잘 알 텐데.
    김독자는 입을 조금 벌렸다. 듣자마자 바로 이해했지만 다시 곱씹었다. 그러니까…… 그렇지. ‘사귈 수 있다’와, ‘사귀고 싶다’는 엄연히 다르다. 가능 여부와 희망사항. 어찌 보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문장이다.
    갑자기 뒷목이 서늘해졌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한 것 같아 뺨이 달아올랐다. 유중혁, 이, 개새끼가…….
    김독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래도 미심쩍은 점이 남아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보통 다른 녀석들은 나랑 사귄다는 의심만 받아도 펄쩍 뛸 텐데. ‘내가 미쳤냐?’ 그런 소릴 하면서. 그런데 왜, 너는.
    - 너는…… 내가 싫지 않냐?
    미처 막지 못한 질문이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김독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유중혁은 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 싫어해야 할 이유가 있나?
    김독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 유중혁 특유의 저 눈빛. 그래서 오히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김독자였다. 고개를 다시 무릎에 파묻었다. 도저히 녀석과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자 유중혁이 몸을 일으키는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 적당히 하고 들어와라.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김독자는 손가락 끝이 하얘지도록 무릎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여전히 고개는 들 수 없었다. 지금 제 얼굴은 분명히 엉망진창일 테니까. 유중혁, 그거 아냐.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처음 본 순간 생각했었다. 나는 저 녀석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2년 전의 어느 날 일기장에 적어 내렸던 문장을 떠올리며, 김독자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여름은 예년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김독자는 교복 셔츠 앞단추를 푸른 채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를 쥐고 흔들었다. 더워. 도서관 안은 에어컨이 잘 켜져 있었던 덕분인지 서늘했지만 더운 바깥 공기에 익은 몸은 금방 가라앉지 않았다. 흘긋 옆을 돌아보니 유중혁도 저와 그다지 다르지는 않은 듯했다. 하긴, 이 녀석 은근히 더위 잘 타는 것 같았지. 얼굴만 봤을 땐 늘 냉기가 흐르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곁에 서 있을 때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체온은 제법 높았다.
    별로 알고 싶진 않았지만.
    김독자는 지금도 여전히 전해져 오는 더운 열기에 한 발짝 몸을 옆으로 물렸다. 유중혁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부러 모른 척했다.
    그날 이후로 둘 사이가 어색해지지 않을까, 내심 고민했던 김독자는 다음 날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제 앞에 앉는 잘생긴 놈을 보며 혀를 찼다. 그래, 시발. 내가 존나 고민해봤자 뭐에 쓰냐. 이 자식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래도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 두기는 한 건지 저를 향하던 날카로운 시선들은 거진 덜어진 상태였다. 도대체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금방 사그라든 건지 좀 의뭉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또 몇 주는 금방 흘러갔다. 유중혁은 여전히 금요일마다 제 수업을 일찍 끝마쳐버리곤 했고, 오늘도 아마 그렇겠거니 생각하고 도서관 앞에서 유중혁을 마주한 참이었다.
    - 왔냐, 중혁아.
    씩 웃으며 부르자 유중혁이 애매하게 심기가 불편한 얼굴을 했다. 뭐, 인마. 그렇게 쳐다봐서 어쩔 건데. 죽이기라도 할 거냐. 김독자는 실실 웃으며 먼저 열람실로 향했다.
    유중혁과 김독자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스터디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는 어렴풋한 변화들이 생겼다. 매일 같은 교실에서 마주치는 얼굴. 게다가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둘이서만 붙어 있게 되니…… 계절이 변하듯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김독자는 이제 유중혁이 제법 편해졌다고 느꼈다. 얼굴에 떠오르는 몇몇 표정들을 읽어낼 수도 있게 됐다. 유중혁은 특유의 무심하고 서늘한 디폴트 표정 덕분에 어떤 녀석들 사이에서는 냉혹미남이니 뭐니 하는 인소에나 나올 법한 별칭으로 불리는 듯했지만, 김독자는 이제 제가 혀를 놀려 조금 장난을 치면 그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진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건 꽤나 재밌었다. 저 때문에 유중혁이 저런 표정을 한다니. 김독자, 하고 으르렁거리듯이 부르면서도 저한테 딱히 해를 가할 수는 없어 미간에 주름만 깊게 파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요즘 김독자의 낙이었다. 물론 도가 심해지면 정말로 딱밤이나…… 어쨌든 얻어맞는 일이 생기곤 했으므로 자중할 타이밍을 잘 재야 하긴 했지만.
    김독자는 턱을 괸 채 샤프펜슬로 노트 위를 유영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세 면이 막힌 칸막이 책상 안에서 조용히 반사되었다. 옆자리에 앉은 유중혁은 숨소리마저도 고요한 것이 그야말로 양궁하는 녀석다웠다. 집중력도 좋네.
    슬쩍 옆을 돌아보고선 짧게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시집을 한 권 꺼냈다. 고3이 이 중요한 시기에 웬 시집? 누가 보면 황당해할 일이지만(어차피 김독자에게 그렇게 살가운 질문을 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는 개의치 않고 팔락팔락 책장을 넘겨 책갈피를 끼워둔 페이지를 펼쳤다.
    김독자는 평소에도 이런저런 책을 가리지 않고 고루 읽는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의 도서관 대출 내역엔 시집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미색 모조지 위를 손가락 끝으로 덧그렸다. 먼지가 이는 낡은 종이 위로 검은 활자가 반들거리는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둘 사이의 관계는 변한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김독자 자신에게도 변화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조용히 시구를 읽어나가고 페이지를 넘기던 김독자의 손이 문득 멈춰 섰다. 책 가운데를 살짝 눌러 활짝 펼친 뒤 옆에 잠시 내려두었던 펜을 집어 들었다. 사각, 사각, 유선 노트 위에 얌전한 글씨로 시를 필사했다. 유중혁에게 주고 싶어서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세상 모든 노랫말들이 제 이야기처럼 들린다고 했던가. 김독자에게는 활자가 그러했다. 웹소설을 읽어도, 교과서를 읽어도, 하다못해 길가에 늘어선 간판들을 읽어도 머릿속에는 계속 유중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자각했을 때는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미친 거 아니냐고, 김독자 너 제정신이냐? 네가 유중혁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런 생각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선 안 된다고도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감히.
    그즈음에는 유중혁의 얼굴을 보기도 힘들어서 일부러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고는 했다.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유중혁은 몹시도 화가 난 듯했지만 김독자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습관적으로 쓰던 일기는 이제 유중혁의 이름 세 글자를 지우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김독자, 미친 새끼.
    하지만 의외로 평정은 금방 찾아왔다. 2년 전 입학식 날의 일기를 다시 읽은 후부터 김독자는 제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나는, 저 녀석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누군가 왜냐고 물어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정말로 그냥. 나는…… 유중혁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이미 2년 전에 그리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현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유중혁을 대하기도 편해졌다. 나는 유중혁을 좋아한다. 유중혁이 저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테니까 기대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쉽지 않은가. 그냥 나는, 내가 유중혁을 좋아한다는 사실만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 차오르면 언젠가는 기대를 하게 되어 버릴까 봐. 그래서 김독자가 선택한 방법은……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편지, 누가 보면 실컷 비웃고도 남겠지. 만약 제 일이 아니었으면 그도 신나게 웃었을 것이다. 시발, 내 일이니까 웃지 마. (어차피 웃을 사람도 없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떠올라 참기 어려워질 때마다 그에게 편지를 썼다. 정확히는 편지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유중혁을 떠올리게 했던 문장, 단어, 시구, 그런 것들을 필사했다. 그 외에는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편지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유선 노트에 글씨를 썼다. 자신의 글씨체는 유중혁이 이미 익히 알고 있으니 들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유중혁에겐 안됐지만, 제 평소 글씨체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로 글씨를 쓸 줄 알았다. 쓸데없는 잔재주였고 딱히 익히고 싶어서 익힌 것도 아니지만 친구 없는 김독자에게는 그런 것이 놀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니, 특별한 주기랄 것도 없이 제 유니폼 위에 반듯이 놓이는 이 쪽지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유중혁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냥 그거면 되었다.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 되려 영영 몰라줬으면 싶다. 그걸로 충분했다. 필사를 마치고 시집을 덮어 가방에 다시 넣었다. 노트도 찢어내 고이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옆자리에 앉은 유중혁은 여전히 집중하고 있는지 큰 움직임이 없었다. 빙긋 웃은 김독자는 입술만 움직여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말을 전했다.
    유중혁, 좋아해.
    그래,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김독자는 다시 교과서와 문제집을 펼치며 샤프펜슬을 집어 들었다.



    림에 꿰인 활줄을 한번 당겼다. 두 번 당겨 입가에 걸쳤다. 몸은 과녁과 일직선이 되도록, 시선은 과녁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피융, 하고 순식간에 손가락을 떠난 화살이 과녁에 꽂혀 들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가운데라고는 인정해주기 어려운 위치에 꽂힌 화살을 본 유중혁은 한숨을 쉬었다. 로워림 끄트머리를 운동화 위에 걸쳐놓고선 인상을 쓰자니 곁에 서 있던 양궁부 선생님(정확히는, 코치)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 중혁아. 어째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더 못 쏘느냐?
    유중혁은 미간을 잔뜩 좁히며 다시 활을 붙잡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 잠깐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 무슨 생각?
    - 별거 아닙니다.
    - 별게 아니긴. 네 장점은 잡념이 없다는 데서 나오는 거 아니었느냐.
    당기려던 활줄을 다시 내려놓은 유중혁이 남궁민영을 돌아보았다. 씩 웃는 얼굴이 어쩐지 놀리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졌다.
    -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 없습니다.
    - 아닌 것 같은데.
    - 말 걸지 마십시오. 집중이 안 됩니다.
    남궁민영이 혀를 끌끌 찼다. 저놈 성질머리는 언제쯤 고치겠느냐. 유중혁은 못 들은 척하고선 다시 시위를 당겼다. 활줄이 입가에 걸쳐졌을 무렵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 편지 때문에 그러느냐?
    핏, 활줄이 어그러졌다. 과녁에도 도달하지 못한 화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흐트러진 자세 탓에 활의 무게와 함께 휘청인 유중혁은 원망 섞인 시선으로 남궁민영을 쳐다보았다. 반응이 재밌었는지 소리 내어 웃은 남궁민영이 돌연 놀란 눈을 하고선 유중혁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 중혁아. 너 이거, 흉지겠구나. 이 얼굴이 아주 봐줄 만했거늘 이걸 어쩌면 좋느냐?
    유중혁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매만졌다. 약간 얼얼한 것이, 조금 전 활줄이 튕기며 스친 모양이었다. 양궁을 하면서 가슴이나 손가락, 팔목에 상처가 남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얼굴은 처음이다. 그만큼 당황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 그러게 왜 갑자기 말을 거셔서…….
    목소리에 섞인 원망에도 남궁민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살폈다.
    - 평소에는 옆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까지 쳐도 신경도 안 쓰던 놈이니 장난 좀 친 것인데. 어지간히도 정곡이었던 모양이지?
    유중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이 억울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제 앞으로 도착한 러브레터(유중혁은 인상을 썼다)의 개수를 세라면 수십은 훌쩍 넘어갈 터였지만…….
    유중혁은 남궁민영이 말하는 ‘편지’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었다. 편지 봉투에 담기지도 않은, 발신인도 없는 편지. 쪽지나 메모에 가깝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투박한 편지였다. 조금 거친 듯한 글씨체는 처음 보는 것이었고, 종이 또한 개나 소나 들고 다니는 찢어 쓰는 노트라서 발신인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제게 편지를 쓰는 이들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들을 읽지도 않고 휴지통에 처박을 정도로 인정머리 없는 성미는 아니었다. 되려, 고지식한 면이 강해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그 뒤에 버렸다. (누군가 봤으면 개새끼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전부 모아두자면 그 종이들로 세계문학전집을 출판하고도 남았을 것이므로 유중혁에겐 불가항력이었다.
    그런 유중혁이 정말 오랜만에 버리지 않은 편지였으니 남궁민영이 재밌다는 듯 보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내용도 대충 봐서는, 사실 연서라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이건 거의 오늘 할 일 목록, 혹은 장 볼 물건들의 메모 같은 느낌 아닌가. 하지만 유중혁은 그 종이쪽지가 접혀 있는 방식이 아주 조심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곱게 개어진 유니폼 위에 그보다 더 고이 놓여 있는 쪽지. 어떤 모양으로 둬야 가장 좋아 보일지 고심하기라도 한 듯 늘 보기 좋게 위치한 편지. 거친 듯한 글씨체도 사실은 떨리는 심정을 감추듯 느리게 쓰인 것처럼 느껴졌다.
    - 누가 보냈는지 찾았느냐?
    - 아직 못 찾았습니다.
    - 하긴, 애초에 알아달라고 보낸 편지 같지도 않았지.
    유중혁은 묵묵히 수긍했다. 물론 유중혁은, 고작 그런 편지에 좀 흥미가 생겼다고 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발신인에게 호감을 느낄 정도로 말랑하지 않았다. 그냥, 조금 궁금할 뿐이다. 어째서 내게 이런 글들을 보내는지. 무슨 마음으로 써 내려간 쪽지인지. 편지는 특정한 주기가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언제 올지, 유중혁은 그것을 내심 궁금해하는 자신을 인지하고선 어쩐지 자존심이 상해 인상을 구겼다.
    그의 미간을 꾹꾹 누른 남궁민영이 웃으며 말했다.
    - 오늘은 가 보거라. 더 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구나.
    유중혁은 묵묵히 동의하고선 짐을 챙겼다. 그의 뒷모습을 배웅하던 남궁민영이 자신의 입가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 그거, 흉지기 전에 치료하거라.
    고개만 대충 끄덕인 유중혁은 양궁부실 문을 나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곧장 집으로 향하려다가 오늘은 유미아가 늦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고선 잠시 고민했다. 어디서 공부나 좀 더 하다 가야 하나. 도서관? 하지만 별로 공부를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가려 발걸음을 떼놓는 찰나,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유중혁?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유중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처럼 빙긋 웃는 얼굴이 익숙하면서도 또 낯설었다.
    - 웬일로 벌써 집에 가? 오늘 훈련 있다지 않았어?
    제법 친근하게 물어오는 목소리. 몇 달 전과 비교하면 다른 녀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유중혁은 흘긋 눈을 들어 학교 정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딱 야자가 시작할 시간쯤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다 잡혀 들어갔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김독자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희고 긴 손가락이 제 얼굴로 향해왔다.
    - 유중혁. 얼굴이 왜 이러냐?
    입가에 닿는 서늘한 체온이 낯설어 유중혁은 반사적으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 반응에 왜인지 저보다 더 깜짝 놀란 듯한 김독자가 황급히 손을 거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작게, 미안, 하고 중얼거린다. 그 모습에 유중혁은 뭐라 입을 열려다가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잘 알 수 없어서였다. 이런 적은, 별로 없는데.
    잠시 손가락을 달싹거리던 김독자가 어깨에 멘 가방을 한쪽으로 내리더니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서 연고와 반창고를 꺼내는 것을 본 유중혁은 눈썹을 까딱였다. 그런 걸 들고 다니나? 그렇게 묻자, 김독자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고 뚜껑을 돌려 열더니 손가락 끝에 조금 짜낸다.
    - 최근엔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좀 오래됐는데…… 괜찮겠지?
    그런 소리를 지껄이더니 조심스러운 손길로 손끝을 입가에 댄다.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다루듯 연고를 문지르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유중혁은 묵묵히 제 입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김독자의 집중한 얼굴을 내려다봤다. 긴 속눈썹이 팔랑이지도 않고 한 점을 향하고 있다. 이내 반창고를 뜯어 붙여주는 것까지 마친 김독자가 다시 가방에 그것들을 집어넣고선 어깨를 으쓱였다.
    - 하필이면 얼굴이 그렇게 됐냐. 활 쏘다 그런 거야? 이 연고 흉 안 지는 데 엄청 좋아. 아마 금방 없어질 거야.
    생각보다 말이 많은 놈이라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은근히 듣기 좋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중혁은 반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 김독자.
    - 응?
    - 활 쏴볼 생각 있나?
    김독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 자식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래서 김독자는, 그러니까…… 양궁 카페라는 곳에 와 있었다.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김독자는 신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중혁은 의외로 종종 들락거리는 곳인지 주인이 그를 알아봤다.
    - 이 녀석 요즘 뜸하더니. 오랜만에 오네?
    유중혁은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선 그와 뭐라 뭐라 대화를 나눴다. 흘긋 저를 돌아보면서 초보자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욕인가 싶었지만 김독자는 초보자가 맞았으므로 참았다. 주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위아래로 훑고선 씩 웃었다. 뭐야. 무시하는 건가.
    이윽고 장비를 들고 온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건넸다. 팔목과 가슴에 하는 가드와 장갑이었다. 안내에 따라 장비를 걸친 김독자는 이미 준비를 마친 채 저를 기다리고 있는 유중혁을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유중혁의 교복 위로 자리한 체스트 가드에 시선을 줬다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 이 자식 가슴이…… 아니 김독자 미쳤나.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일부러 얼른 입을 열었다.
    - 어떻게 하면 돼?
    유중혁이 커다란 리커브 보우를 건넸다.
    - 일단 들어봐라.
    왼손으로 활을 받아 든 김독자는 하마터면 무게에 휘청할 뻔한 몸을 간신히 바로 했다. 아니, 생각보다 엄청 무겁네. 민망해져 흘긋 돌아보자 유중혁의 입매가 조금 들썩였다. 이 새끼 이거 백 퍼센트 웃음 참고 있다. 저 잘난 낯짝에 이번에야말로 주먹을 먹여주고 싶었으나 김독자는 제 일일 선생이 되어줄 녀석을 위해 조금, 아주 조금만 참아주기로 했다. 다시 김독자에게서 활을 받아 간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 일단 내가 하는 걸 봐라. 두 발은 십일 자로 나란히 놓고, 어깨는 과녁과 일직선으로. 허리나 골반이 틀어지면 안 된다. 바른 자세가 정확도를 결정하니까.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유중혁의 곧은 자세를 보며 김독자는 조금 감탄했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 넓은 어깨를 반듯이 펴고 서 있는 모양새가 정말이지 보기 좋았다. 유중혁은 그대로 화살을 얹고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당길 때는 이렇게 한 번, 두 번째에 입가에 걸쳐서 고정하듯이. 입매에 붙은 반창고 위로 활줄이 드리워졌다. 그야말로 교과서 같은 자세로 선 유중혁이 고요한 시선으로 과녁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퉁, 하며 화살이 말 그대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손을 놓음과 동시에 90도 회전하는 커다란 활, 그리고 정확히 과녁의 정중앙을 맞힌 화살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리며 감탄했다. 와. 새어 나온 얼빠진 소리에 민망해할 겨를도 없었다. 멀리서는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활을 쏘는 유중혁의 모습은…….
    심장이 다시 시끄럽게 울리려 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쓰며 박수를 쳐준 김독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 잘 쏘네, 자식.
    - 그럼 설마 못 쏠까.
    - 하여간 말 좀 곱게 하면 덧나나.
    - 네가 할 말인가?
    괜히 투덜거리자 다시 제 손에 활이 쥐어졌다.
    - 한번 해봐라.
    김독자는 조금 전 유중혁의 자세를 따라 하려 해봤다. 두 발은 나란히, 몸은 곧게 세우고, 또…… 뭐더라.
    곁에 서 있던 유중혁이 몸을 훅 숙였다.
    - 등과 배에 힘을 줘라.
    커다란 손이 척추와 배를 부드럽게 눌러 자세를 교정했다. 김독자는 하마터면 힘이 풀려 활을 놓칠 뻔한 것을 간신히 꽉 붙잡으며 숨을 들이켰다. 꾹 눌러오는 손길이 뜨거웠다. 시발, 유중혁. 하지만 유중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했다.
    - 고개는 정면으로. 어깨는 가만히.
    두 손이 어깨를 고정하고 턱을 붙잡아 돌렸다. 아, 젠장. 이래서야 되려다가도 안 되겠다. 호흡을 꾹 참은 채 김독자는 팔을 들어 올렸다. 제 뒤에 선 유중혁이 왼손으로 활을 함께 붙잡고 오른손을 제 손 위에 겹쳤다.
    - 화살은 이렇게 잡고. 당기고, 한 번 더 당기고.
    두꺼운 활줄이 입꼬리와 뺨을 누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한 것은 유중혁의 체온이었다.
    김독자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과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귓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귀담아들으면서 숨결은 무시해야 하는 것이 정말이지 고문 같았다. 탕, 유중혁의 손을 따라 시위를 떠난 화살이 과녁 끄트머리 어딘가쯤에 애매하게 맞았다.
    김독자는 뒤늦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떼었다. 과녁에 꽂힌 화살을 바라본 유중혁이 한심하다는 시선을 향했다.
    - 몸으로 하는 일엔 도통 재주가 없군.
    김독자는 인상을 팍 구기며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이,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김독자는 대충 쏘아붙였다.
    - 내가 잘 쐈으면 선수 했지 이러고 있겠냐?
    어깨를 으쓱한 유중혁이 그의 손에서 다시 활을 받아 들었다. 시범을 보이듯 한번 더 쏜 화살도 정중앙에 명중이었다. 김독자는 눈을 깜빡이고선 말했다.
    - 한 번만 더 보여줘. 그러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중혁이 별말 없이 다시 활을 들었다. 과녁을 향하는 깊고 고요한 시선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가슴께를 내리눌렀다. 무언가에 한없이 집중한 유중혁의 얼굴. 저 녀석은 여자친구한테도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할까? 은근히 고지식한 녀석이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올곧은 시선을 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라 당장 그만뒀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정가운데를 맞힌 유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 이제 할 수 있겠나?
    김독자는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는 욕을 지껄였다. 너 같으면 할 수 있겠냐, 시발.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마치, 쏜살같이. 어느새 9시를 훌쩍 넘긴 것을 발견한 김독자가 화들짝 놀라 유중혁을 붙잡았다.
    - 야, 9시 넘었어. 벌써 이렇게 됐냐?
    그 말에 시계를 바라본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 들어가지.
    곧 두 사람은 문을 나서 어두운 밤거리로 걸음을 내디뎠다. 야자가 끝날 시간이 되기 전에 얼른 나온 보람이 있는지 거리에는 둘이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이상한 소문 따위를 낼 녀석들은 하나도 없었다. 김독자는 침묵이 아쉬워 이런저런 얘기를 주절거리며 가방을 고쳐 멨다. 유중혁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혹은 대꾸를 했다. 그냥, 평범한 대화였다. 하지만 김독자에게 있어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대화였다. 상대가 유중혁이어서든, 그냥 대화를 나눌 또래 친구라서든.
    김독자는 짤막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상대 앞에서는 역시 조절하기가 좀 힘들다. 그래도 역시 너무 지껄였나 싶어 입을 다문 채 조금 더 걷자 유중혁도 묵묵히 곁에서 걸었다. 초여름 밤공기가 피부에 엉겨 붙었다.
    - 공부는 잘돼가냐?
    실없이 묻자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 내기 상대를 걱정해줄 여유도 있는 모양이지.
    하여간 이 새끼는 꼭 말을 저렇게 한다. 김독자는 눈을 부라렸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시발, 이러다 진짜 지는 거 아냐. 이 자식은 근데 뭘 이렇게 필사적으로 이기려고 한대? 도대체 나한테 얼마나 무시무시한 소원을 빌려고? 그것만 생각하면 김독자는 자다가도 뒷목이 서늘해져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 유중혁이 시키는 일이니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대체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그저 막연한 공포에 떨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절대 지면 안 돼. 한 번 더 다짐하고 있는데 저 멀리 어딘가를 바라본 유중혁의 입매가 희미하게 끌려 올라갔다.
어? 김독자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섰다. 방금…… 웃었어?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김독자가 멈춰 선 것을 눈치챈 유중혁이 뒤를 돌아봤다.
    - 김독자?
    그렇게 묻는 얼굴은 언제 웃었냐는 듯 다시 무표정이었다. 내가 잘못 봤나. 하지만 김독자는 곧 고개를 저었다. 잘못 본 건 아닐 터였다. 유중혁의 웃는 얼굴은 어떨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본 적이 없어서 상상하기도 어렵지 않았던가. 그러니 상상이라기엔 너무 선명했던 조금 전의 표정은, 잘못 본 게 아닐 터였다.
김독자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저 무뚝뚝한 녀석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을 보여줄까. 눈을 마주하고선 조용히 웃어주려나. 그런 얼굴도 엄청 보기 좋겠지.
    뭐였을까. 저 녀석을 웃게 만든 건.
    갑작스레 가슴이 저려 왔다. 시큰한 감각에 조용히 이를 악물며 김독자는 애써 빙긋 웃었다. 그래, 요즘 유중혁의 표정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설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지만 김독자는 알 수 있었다. 살짝 밝아진 얼굴. 가끔씩 허공을 헤매는 시선. 지난 세 달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던 놈인데 최근 들어서만 벌써 몇 번이나 그런 모습을 보였다. 유중혁? 하고 부르면, 그제서야 현실로 다시 돌아오는 듯했던 눈빛.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중혁의 미세한 변화들은, 꼭,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녀석 같았다. 누군가 다른 이를 마음에 둔 것 같은 표정, 눈매, 입꼬리. 과대 해석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번 생각하고 나면 돌이킬 수가 없는 법이다.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일까, 생각했다.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껏 아무하고도 안 만났던 녀석이지만…… 오히려 그런 만큼 갑자기 누가 좋아졌을 수도 있지.
    김독자는 두어 발짝 움직여 그의 곁에 섰다. 부러 씩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 유중혁, 너 요즘 표정 좋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냐?
    삽시간에 얼굴이 구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 손가락으로 딱밤을 때릴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래도, 그렇지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성질을 낼 줄 알았던 유중혁은 왜인지 대답이 없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돌아왔다. 제게 올곧게 꽂히는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췄다. 눈조차 깜빡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저를 바라보던 유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 신경 꺼라, 김독자.
    저벅저벅 앞서가는 뒷모습. 김독자는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쫓았다.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날카로운 것이 파고들듯 첨예하게 찌르는 감각이 혈관을 타고 퍼졌다. 목이 멨다. 눈시울이 달아오르는 듯했다. 김독자는 가슴께의 옷을 꽉 쥐며 숨을 고르려 애썼다. 그러니까, 유중혁. 너…….
    유중혁한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다.
    짧은 문장이 심장을 짓눌렀다. 돌처럼 무거운 활자가 쿵, 쿵, 가슴을 두드리고 지나갔다. 마음과는 달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아, 시발. 내가 왜……. 김독자는 몸을 뒤로 돌렸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저만치 앞서가 있지만, 그래도.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냥, 유중혁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사귀고 싶다거나, 유중혁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전혀 그런 게 아니라고. 나는 유중혁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어차피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니까 기대해봤자 소용없다고, 잘 알고 있다고.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짐에 불과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부처럼 칼로 썰어 양분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아무리 날이 선 칼이라도 물을 벨 수는 없다. 유중혁을 향한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 좋아한다면, 바라는 게 당연한 거였다. 둘을 나눠놓을 수는 없는 거였다.
    유중혁과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 바운더리 안에 사람을 잘 두지 않는 편이었지만, 자신은 최근에 그 범주 안에 조금 발을 들여놓았다고 생각했다. 유중혁이 제게 마음을 열고 있다고 느꼈다. 이제는 제로썸이 아닐 거라고, 플러스 쪽으로 기울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래, 그렇게 많이 말을 섞고, 얼굴을 마주하고, 어깨를 맞대고, 손끝을 움켜쥐며 온기를 나눠도. 그런다고 해도, 유중혁이 바라보는 건 김독자가 아니다. 알고 있었다. 나는 아마도 영원히, 그 시선 끝에 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중혁이 자신을 바라봐줄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멍청한 김독자. 알고 있었으면, 시작하질 말았어야지. 그게 맞는 일 아닌가. 당연하잖아.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겠지. 나는 이미 처음 봤을 때부터, 너를.
    김독자는 몸을 돌렸다. 저를 바라보고 멈춰 서 있는 유중혁이 보였다. 입술을 움직였다. 유중혁, 좋아해. 소리가 되지 못한 말에 유중혁이 미간을 조금 좁혔다.
    - 뭐라고? 못 들었다.
    김독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발을 움직여 그의 곁에 가서 섰다.
    - 천천히 좀 가라고. 너무 빨라서 못 쫓아가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표정이 되돌아왔다. 김독자는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유중혁, 좋아해. 아마도 이 마음을 전할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겠지. 조금만 시간을 줘. 천천히…… 덜어나갈 테니까.
    여름 공기가 습했다. 머릿속까지 눅진하게 눌어붙는 서글픔에 김독자는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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