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새벽녘의 학교는 조용했다.
3월의 첫 평일, 김독자는 해조차 제대로 밝지 않아 어스름한 시간에 학교의 정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물기를 머금은 아침 안개가 낡은 운동화의 코끝을 적시고, 지난해 말부터 부쩍 짧아진 교복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발목에는 운동화에 채인 모래가 점점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져 내렸다. 신교사의 유리문 앞에 놓인 발 매트에서 흙모래를 털어낸 뒤 계단을 오른 김독자는 곧 낯선 교실 앞에 도착했다. 3학년 3반. 자신이 앞으로 1년간 몸담고 지낼 교실이었다. 아직 닫혀 있는 교실의 문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조심스럽게 밀어 열었다. 안에는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고, 김독자는 짧게 숨을 뱉어내곤 가장 구석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책상 표면이 반질거렸다.
이 시간의 학교는 고요해서 좋았다. 넓은 학교 부지 안에 학생도 교사도 없이, 끽해야 경비 정도만 마주칠 수 있는 시간. 얼마 지나지 않아 개학식이다 뭐다 해서 사람들로 가득 찰 공간이기에 김독자는 짧은 평화를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턱을 괸 채 멀끔하게 닦인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손가락을 까딱이고, 고개를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며, 리듬이라도 타듯 생각에 잠긴 채.
열아홉 살이지, 올해로. 지겨운 학교생활도 1년만 더 버티면 끝이다. 아직 대학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반 녀석들과 이렇게 다닥다닥 붙어 온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하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김독자는 그야말로 참담했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살풋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의 일들은 지금도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다. 고등학교는 그에 비하면 아주 선녀 같지. 비록 혼자 고시원에서 사는,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날들이지만.
아, 얼른 졸업하고 멀리 다른 지역으로 가고 싶다. 굳이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지금처럼 저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지 않을 타지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솟았다.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면 바로 군대를 가 버릴까…….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김독자는 점점 반을 채워가는 아이들에게 부러 신경을 쏟지 않았고, 때문에 한발 늦게 알아차리고 말았다.
어느 반으로 배정을 받든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저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올해는 아닌 모양이었다.
교실의 앞문을 열며 등장한 담임선생님은 가장 먼저 반의 한 곳에 우르르 몰려 있는 아이들의 교통을 정리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김독자는 그제야 절반 이상의 반 아이들이 부자연스럽게도 누군가의 자리를 빙 둘러싸고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흩어지는 소리들의 단편을 통해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누구인지를 금세 깨닫게 되었다.
유중혁.
빼곡한 아이들이 선생님의 손짓을 따라 흩어지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저기 있는 건, 틀림없이 유중혁이었다.
- 자, 집중해라 얘들아. 너희도 올해 고3이다. 다들 공부가 제일 중요할 때라는 거 알지.
가차 없는 현실 직시에 아이들의 원성이 쏟아졌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 모든 것을 한 귀로 흘리며 슬쩍 유중혁의 자리로 눈길을 던졌다.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시선이 이끌렸을 뿐. 유중혁은 그런 녀석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가장 눈에 띄는 녀석,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으니까. 외모며 재능은 말할 것도 없고, 썩 좋지만은 않은 성격이나 말투조차도, 어쨌든 사람의 시선을 끄는 녀석.
김독자는 입학식 날의 유중혁을 기억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서서 신입생 선서 같은 걸 하는 수석 입학 녀석은 누구였는지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온통 유중혁에게만 뺏겼던 시선. 저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아이들도 그랬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누가 녀석을 쳐다보지 않을 수 있을까.
김독자는 지금껏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도, 좋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여자친구? 자신과 세상에서 가장 거리가 먼 단어처럼 느껴졌다. 하물며 남자친구란 말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 왼쪽 대각선 앞자리에 앉은, 이름도 모르는 훤칠한 녀석에게서.
선서, 신입생 대표. 그런 소리가 귓가를 스친 것도 같았지만……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들킬 것 같은데? 그런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정신이 팔렸다. 넋을 놓다시피 바라보길 얼마나 했을까, 문득 녀석이 지루한 듯 몸을 틀며 고개를 돌렸다. 그만, 눈이 딱 마주쳤다.
소란스레 북적이던 강당에 일순 정적이 찾아온 것 같았다. 몇 미터는 될 거리 안에 다른 이는 아무도 없이 저 이름 모를 녀석과 자신 단둘만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쿵. 쿵. 귓가에 심장 소리만 크게 울렸다.
아, 그래.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어쩐지 저 녀석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 한 것 같았다. 금방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머릿속을 비우고 간신히 고개를 단상으로 돌렸지만.
그냥, 그렇게 다른 반이 되어서 서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지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녀석은 유명인이 될 명을 타고난 모양이었다. 학교 내 어딜 가도 녀석의 이름이 들려왔다. 여기도 유중혁, 저기도 유중혁.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종종 오르내릴 정도였으니 말 다 한 것이다. 하긴, 그만큼 잘생겼으면 다른 거 다 개차반이어도 유명해질 만하지. 길거리 캐스팅 같은 건 안 당하나 싶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으니까.
그래서 김독자는 자신이 입학식 때 온 신경을 빼앗겼던 녀석의 이름이 유중혁이며, 제 옆 옆 반이고, 프로게이머 수준으로 게임을 잘하며, 말투가 조금 이상하고 공부는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만 잘하는…… 다소 괴팍한 성향의 녀석이라는 것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되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실제로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적도 많지만 모두 거절했다나 뭐라나(아이돌이 되기엔 음치였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김독자는 유중혁에 대해 관심을 끄려고 노력했다. 내가 뭘 어쩔 건데, 그 녀석에 대해 알아서 어떡할 건데. 어차피 그 녀석은 내 존재도 잘 모를 것이다. 아니, 나쁜 방향으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차라리 몰라줬으면 싶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유중혁은 학교의 유명 인사 수준을 넘어서 거의 지역 명물이 되어 있었다. 문제는 단순히 얼굴로만 유명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녀석은 고작 2년 새 무려…… ‘양궁 꿈나무’가 되어 있었다.
공교롭게도 유중혁과 김독자가 다니는 학교는 체육 고등학교가 아님에도 양궁부가 전국구로 이름을 날리는 학교였는데, 그 잘생긴 얼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발군의 신체 능력까지 갖춘 유중혁은 서로 와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스포츠 동아리들 중에서 양궁부를 택했던 것이다. 무슨 변덕이었는지는 모른다. 입학하기 전까지는 활을 잡아본 적도 없다고 하니 처음부터 양궁을 할 생각으로 이 학교에 입학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흥미로 시작해놓고선 금세 웬만한 부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히 우월한 실력을 보이고 있으니, 아마도 배알이 꼴린 녀석들도 꽤 됐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독자는 재능충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새삼 실감했다. 좋은 스승 아래서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입부한 첫해에 시도대항 대회에서 우승까지 해버리다니. 어디까지 유명해질 셈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유중혁이 유명해질수록, 김독자는 점점 더 녀석에게서 멀어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자신은 유명해질 놈 옆에 있을 팔자가 아니었다. 그건 저 같은 사람에게는 되려 악재일 테니까. 애초에 지금도 전혀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젠장.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오자 시야가 또렷해졌다. 그러자 꼭 입학식 때처럼 제 왼쪽 대각선 앞자리 방향에 앉은 유중혁의 옆얼굴이 설핏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그 위로 2년 전의 첫인상이 겹쳤다. 그때도 앳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잘생긴 소년이 아니라 잘생긴 남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가 흘렀다. 눈썹은 여전히 짙었고, 눈가는 조금 더 우묵해졌나 싶었다. 서구적인 이목구비는 아닌데도 보기 좋게 높다란 콧날이나 조각 같은 턱선, 반듯하게 다물린 입술도. 어느 하나 흠잡을 구석 없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얼굴이다. 그런 감상을 주워섬기던 김독자는 문득 내가 지금 뭘 하는 거냐, 싶어져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버려라, 김독자. 고3이니까 공부나 하자. 졸업하고 취직해야지.
김독자의 삶은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만으로도 이미 숨이 막힐 만큼 벅찼다. 누군가를 특별히 여기는 마음 같은 것을 계속 안고 가기에는 다른 짐들이 너무 무거웠다. 나한테 그런 건 사치야. 알고 있다. 그렇게 두어 번 되뇐 김독자는 결심을 다지며 지난 두 해와 다름없는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등교하고, 공부하고, 하교하고…….
그렇게 조용히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일이 터진 건 3월이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여느 때처럼 조금 이른 시간에 등교한 김독자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사물함을 열었다. 우당탕,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져 있던 교과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론 김독자가 해놓은 일이 아니었다. 무슨 소란인가 싶어 흘끗 쳐다보는 녀석들이 있었지만 김독자는 무심히 허리를 숙여 떨어진 교과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페이지가 온통 구겨지고 찢겨 있다. 겉면에는 굵은 매직으로 낙서까지 되어 있었으니 말 다 한 셈이다.
아, 이건 좀 오랜만인데? 김독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어째 한 반년 정도 아무 일도 없다 싶었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직접적인 구타나 상해 같은 폭력은 없었지만, 몇 달에 한 번꼴로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특히, 모의고사 결과가 나온 직후쯤에.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김독자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반을 가든 제 성적이 잘 나오는 게 아니꼬운 녀석들이 꼭 있었던 것이다. 김독자 주제에 저들보다 모의고사 점수가 높은 게 그렇게나 열이 뻗쳤나 보다. 한심한 새끼들. 김독자는 자신이 공부마저 놓아버리면 이 사회에서 어떻게 도태될지 아주 잘 알았으므로 필사적으로 학업에 열중해왔다. 가진 건 쥐뿔도 없고, 책 읽는 것 외에 다른 재능도 없는 자신으로서는 공부라도 잘해야 했다. 그것만이 정답이었다.
쏟아진 물건들 중 멀쩡한 것을 추려 다시 사물함에 차곡차곡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작문이랑 문법 교과서만 조져져 있는 것이 의도가 너무 확실했다. 김독자는 실없이 웃으면서 원래대로 정리된 사물함을 닫았다. 너네도 꼬우면 책 많이 읽든가, 개새끼들아.
얼추 정리를 마치고 나니 손안에는 너덜너덜한 교과서 두 권만이 남았다. 이건 아무래도 더 못 써먹겠는데……. 그렇다고 교과서를 또 사자니 돈이 아까웠다. 어떻게 새로 구할 방법 없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미 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을 앞뒤로 뒤집어보고 있는데 유중혁이 성큼 교실로 들어섰다. 김독자 주변을 흘끗거리던 아이들이 금방 고개를 돌렸다.
야 유중혁, 왔냐? 중혁아 안녕. 그런 소리를 들으며 김독자는 문득 조금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했다. 아, 이런 일 당한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저 녀석에게 들킨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얼른 찢어진 교과서까지 다시 사물함에 쑤셔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자리로 향했다. 때늦은 수치심으로 뺨까지 화끈거리는 걸 손등으로 가렸다. 유중혁의 시선이 짧게 와 닿았던가,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자리에 앉아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하자니 당장 오늘 수업이 문제였다. 김독자가 속한 3학년 3반 담당 국어 선생님은 꽤 엄한 편이라서 책상 위에 교과서가 없었다간 아주 큰 일이 날 것이 분명했다. 대충 다른 책을 꺼내놓는 것으로 숨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에 들키면,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이런 상황을 여러 번 겪어본 김독자의 소견으로는 선생님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해봤자 일만 더 커질 뿐 제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몇 교시더라? 시간표를 보니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점심시간 후였다. 어디서 구할 방법 없으려나.
하지만 김독자에게 교과서를 빌릴 다른 반 친구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당장 같은 반에도 대화 나누는 녀석이 없는데……. 김독자는 결국 한숨을 푹 쉬었다. 에이 시발, 될 대로 돼라. 그렇게 툭 까진 마음가짐으로 오전수업과 점심시간을 보냈다. 포기하면 편해.
이윽고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무슨 교과서를 꺼내야 제일 비슷하게 보일지 고민하는 김독자의 앞에 문득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깔끔하게 정돈된 교복 재킷 끝단과 바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지? 근 3년간 거의 겪어본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일 자체가.
때문에 순간 김독자는 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뭐야?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누구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놀랄 일이 한 번 더 일어났다. 웬 손이 불쑥 튀어나와서 책상 위에 멀끔한 작문 교과서를 올려주는 게 아닌가. 멍청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한 발짝 늦게 손의 주인을 확인한 김독자는 기절할 만큼 놀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유중혁이었다.
어, 어? 하는 얼빠진 소리가 입에서 샌 것 같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특유의 무심한 얼굴을 한 녀석의 반듯한 입술이 열렸다.
- 나는 부활동이 있어서 오후 수업 빠진다. 네가 써라.
정말로 별일 아니라는 듯, 마치 오늘 아침 식사 메뉴를 말하듯이 건조하게 툭 내뱉고선 사라지는 뒷모습이 낯설었다.
김독자는 멍한 눈으로 가방을 챙겨 교실 문을 나서는 유중혁의 모습을 바라봤다. 방금…… 뭐였지? 너무 놀란 탓인지 시간이 꼭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뒤늦게 숨을 멈췄던 여파라도 되는 것처럼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곧바로 수군대는 소리들이 따라왔다.
- 뭐야?
- 야 방금 뭐야. 유중혁 뭐임? 쟤랑 친해?
- 김독자? 몰라, 나도.
- 야 왜 하필 쟤를…….
- 조용히 해.
웅성거리는 소리. 저를 훑는 시선들이 마치 송곳처럼 날카로워서 김독자는 입을 꾹 다물며 책상 위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저런 시선을 받아야만 한다.
나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책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것도 다른 새끼들이 한 짓, 동의 없이 냅다 교과서를 빌려주고 간 것도 유중혁 자식이 멋대로 한 짓. 그런데 왜 다들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마치, 모든 게 네 탓이라는 것처럼.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김독자는 다시금 하얀 표지의 교과서를 바라보았다. 표지에 쓰인 반듯한 이름 세 글자, 유중혁. 꿈이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김독자는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그래, 어쨌든, 나쁜 의도로 주고 간 건 아닐 테니까. 유중혁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냐. 잘못이 있다면, 저 녀석들이 저렇게 보는 내 탓이겠지. 김독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교과서를 펼치고 수업을 들을 준비를 했다.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 거겠지? 그런데 왜 나한테 이걸? 왜? 얼마 만에 타인으로부터 받아보는 호의인지 기억도 가물거렸다. 낯설기 그지없어서, 그날 내내 김독자는 교과서에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밤잠을 조금 설쳤다.
무슨, 사춘기 중학생도 아니고. 김독자는 스스로를 부정했다. 절대로 설레거나, 두근거리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저…… 이걸 어떻게 돌려줘야 유중혁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그걸 생각했을 뿐이다. 고민 끝에 담임선생님에게 얘기를 꺼내 새 교과서는 받았으니 (어떤 개자식들이 제 교과서를 조져놨어요, 그런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이 교과서를 원래 주인에게 하루라도 빨리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다른 녀석들이 다 보고 있을 때 돌려준다면…… 분명 이상한 얘기가 돌겠지. 그건 유중혁의 위신에도 문제가 되겠지만, 김독자 본인으로서도 피하고 싶은 일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아침에 일찍 등교해서 사물함에 넣어놓는다거나, 그런 건…… 너무 고전적이지 않나? 게다가 자신이 기억하기로 유중혁의 사물함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역시 책상 서랍에 슬쩍 넣어두는 게 방법인가……. 그러다 또 어떤 새끼가 발견해서 찢어놓으면 어떡하지. 야, 유중혁, 김독자 이 새끼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그런 이간질이라도 하면?
……설마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그에게 있어 인간에 대한 불신의 벽은 끝도 없이 높았다.
이런저런 방법을 고민하던 김독자의 머릿속에 문득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유중혁에게 러브레터(우웩) 같은 걸 쓰는 애들이…… 그 녀석 양궁부 사물함에다 갖다 놓지 않던가? 거기라면 확실히 남들이 건드리진 않을 것이다. 유중혁이 자신의 양궁 물품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므로. 유중혁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다면 누구라도 거기에 함부로 손을 대는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러브레터 같은 은밀한 편지들도 그쪽으로 전달된다고 했다.
- 아니 근데, 시발……. 거기다 갖다 놓는 건.
뭔가 좀…… 너무…… 기분이.
좀…… 그렇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거려 저도 모르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니, 김독자 미쳤냐? 너는 지금 빌린 교과서를 돌려주려는 것뿐이야. 러브레터 같은 걸 주려는 게 아니라고. 정신 차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을 설친 김독자는 조금 퀭한 얼굴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집(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작은 방)을 나섰다. 미션 임파서블이라도 찍듯이 몰래 정문을 넘어 양궁부실로 향해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지?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일찍 온 것인지 양궁장에 부연 아침 안개가 껴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으니.
- ……잠 설친 김에 좀 일찍 나왔는데 뭐 어쩌라고, 시발.
꿍얼거리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 지퍼를 열었다. 혹여나 지퍼에 긁히기라도 할까 조심스럽게 교과서를 꺼낸 김독자는 유중혁의 이름이 적힌 캐비닛 앞에 섰다. 멋들어진 글씨체로 새겨진 이름 세 글자에 어쩐지 마음이 심란해졌다.
본 캐비닛에는 당연하게도 자물쇠가 걸려 있었지만, 옷가지 등이 걸리고 들어 있는 그 옆의 작은 나무 사물함은 열려 있었다.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유중혁의 유니폼을 살짝 들친 김독자는 그 아래 교과서를 밀어 넣었다.
사실은…… ‘고마웠다’, 그런 메모라도 남겨야 하나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이쯤에서 모두 없던 일처럼,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싶었다. 유중혁이 차라리 나를 염치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러면…… 나한테 또 이런 호의를 보이진 않겠지. 그러기를 바랐다. 부담스러웠으니까. 이유를 알 수 없는 호의는 김독자에게 있어 공포에 가까웠다. 물론, 정말이지 고마웠지만, 그리고 유중혁 정도 되는 녀석이 고작 저를 괴롭히거나 하려는 하찮은 의도로 이 교과서를 제게 빌려줬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어차피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놈이니까. 그냥 이쯤에서 끝내자, 유중혁.
- ……고마웠어.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린 김독자는 다른 사람이 오기 전에 얼른 양궁부실을 나섰다.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학교 밖을 빙 둘러 돌다가 등교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 뒤로는, 다행히도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한 이틀 정도는. 김독자는 내심 유중혁이 제게 무언가 따지기라도 할까 조금 걱정했던 자신을 비웃었다. 그 자식 말투라면 뭐…… 빌려줬더니 고맙다는 인사도 않는군, 이렇게 말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조금 웃었던 것도 부질없었다. 왜냐하면…… 그러니까…….
유중혁 이 미친 새끼가! 김독자는 절대로 입 밖으로 뱉지는 못할 말을 비명처럼 삼키며 제 코앞에 서 있는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와중에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잘생겼어?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김독자는 얼른 입을 열었다.
- ……내가 잘못 들은 거지?
하지만 유중혁은 가차 없었다.
- 제대로 들었으면서 모른 척하지 마라.
냉랭한 말투에 되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 그래. 이래야지. 김독자는 한숨을 쉰 뒤 현실 부정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중혁의 용건인즉슨, 담임선생님이 저와 김독자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하, 시발……. 담임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슬슬 다른 녀석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 빨리 갔다 오자, 그럼.
그렇게 유중혁과 단둘이 담임에게 불려 간 김독자는, 교무실을 나올 때쯤엔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니…… 시발 내가 뭘 들은 거냐.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담임의 말을 요약하자면…… ‘네가 중혁이 공부를 좀 도와주지 않겠니? 한 학기만이라도 괜찮아.’ 그런 거였다.
김독자는 정말이지, 두 번째 말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저 고3이거든요? 제 공부하기도 바쁜데요? 그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왜 하필이면 내가? 그리고 유중혁은 또 왜?
체대를 갈 때도 성적이 어느 정도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신이 알기로 유중혁은 성적도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었다. 내가 뭘 도와줄 게 있다고? 애초에 한창 예민한 고3한테 이런 부탁을 왜 해요? 담임이? 정말이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전개에 황당해하기도 잠시, 담임선생님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잠시 그것이 무슨 표정인지 가늠하던 김독자는 곧이어 선생님의 입에서 나오는 난처한 목소리에 어렴풋이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선생님, 학교 폭력 사건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시겠다는 거군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엊그제 제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래,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 봐, 학생들의 심리는 아주 확실하게 꿰고 계시네요. 모두가 꺼리는 학생, 김독자. 모두가 떠받드는 학생, 유중혁. 둘을 붙여놓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보통이라면 마이너스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독자가 -100이라면 유중혁은 +120이었다. 아니, +200일지도. 어쨌든 유중혁과 김독자 사이에 친분 아닌 친분이 있는 모습이 보여지면, 김독자를 향한 괴롭힘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예상한 거다. 괴롭힘을 당하는 주체인 김독자도 아마 그렇겠죠, 하고 속으로 인정할 정도니 아마도 틀린 선택은 아닐 터다. 김독자에게 있어서는 좆같은 선택이라는 게 문제지.
어쨌든, 유중혁의 영향력이나 존재감이란 그 정도라는 거다. 그 옆에 ‘김독자’를 붙여놔도, 다른 놈들이 설설 길 정도.
솔직히 말하자면, 김독자는, 정말이지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른 놈들이 겉으로는 설설 길지 몰라도 속으로는 저 새끼 뭐야, 그렇게 생각할 게 뻔한데. 그리고, 내가 왜 굳이 내 공부하는 시간 뺏겨 가면서 이 녀석을 도와줘야 하는데? 유중혁의 공부를 봐주는 데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서 제가 공부하는 시간을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은 쪼개고 쪼개 얼마 남지도 않은 제 자유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는 소리가 된다. (웹소설 보는 시간을 줄여야 하겠지. 시발.)
김독자의 머릿속이 어떻게 돌아가든 선생님은 계속해서 말했다.
- 대신에 중혁이가 미적분은 봐줄 수 있다고 하던데.
그 말에 김독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유중혁을 돌아봤다.
- 너…… 미적 잘하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의문을 낸 김독자는 뒤늦게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생각해 보니까 이 녀석한테 말 거는 거 처음이잖아……? 저번엔 저 자식 혼자서 말하고 가버렸으니까. 하지만 유중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 너보단 잘한다.
순간 울컥했다. 아니 이 새끼가……. 내가 몇 등급인 줄은 알고? 하지만 저 말이 사실이라면 김독자로서는 조금, 혹하는 제안이 되었다. 다른 과목이야 어떻게든 혼자서도 해결이 되었지만 수학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혼자 힘으로 학원이며 과외를 뺑뺑 도는 녀석들의 뒤를 쫓기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학만큼은, 타인의 도움이 조금…… 아니 꽤나 절실했다.
김독자는 망설였다. 언어 영역 좀 도와주고 수리 영역 도움받기. 여기까진 괜찮은데…… 다른 문제가 남아있지 않은가? 역시 이렇게 눈에 띄는 놈이랑 가까워지는 건 사양하고 싶다. 수군대는 시선이 따라붙을 게 뻔한데…….
거기까지 떠올린 김독자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도 어차피 다른 새끼들 다 나보고 수군대고 있지 않나? 여기서 더 해봐야 뭐, 얼마나 지랄이겠어? 그리고 속이야 어찌 됐든 겉으로는 유중혁의 비호(?) 아래 있으면 직접적인 괴롭힘은 없어질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건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자존심을 따질 때가 아닌 것도 맞았다.
김독자는 고개를 조금 돌려 옆에 앉은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시선이 돌아왔다. 불쾌함이라곤 조금도 없는 시선(호의적이지도 않았지만). 그 눈은 너무나도 무기질적이어서, 정말 엊그제 저한테 냅다 교과서를 빌려주고 가버린 놈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다. 하지만 그런 무감한 시선은…… 김독자로서는 오히려, 몹시도 기꺼웠다. 누가 저를 저렇게 마이너스가 아닌 제로의 시선으로 봐주겠는가. 그래서 김독자는 결정했다. ‘까짓거 한번 해보죠.’ (물론 속으로 말했다.)
그렇게 반쯤 충동적으로 기체에 올라타듯 결정을 내린 김독자는 교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진이 빠져 휘적대며 걸었다. 이게 뭐라고 갑자기 이렇게 기운이 빠지냐. 반면 제 옆에서 걷는 놈은 어찌나 똑바른 자세로 걷는지 꼭 기계 같았다. 아니지. 기계라는 말은 실례다. 이 자식은 걷는 것도 무슨, 예술작품처럼……. 아니 시발 김독자 미쳤냐? 얼이 빠지긴 한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려 손으로 뺨을 두어 번 두드리자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이 자식이? 돌아보자 한심하다는 얼굴을 한 유중혁이 팔짱을 낀 채 쳐다보고 있었다.
- ……뭘 보냐?
저도 모르게 조금 날선 소리가 튀어나갔다. 말해놓고선 김독자는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유중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팔짱을 풀더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밀었다.
- 응?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유중혁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 번호 찍어라.
잠시 눈을 깜빡이던 김독자는 그제야 유중혁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내 번호가…… 뭐였지? 갑자기 머릿속이 조금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시발……. 어쩔 수 없잖아, 내가 다른 사람한테…… 전화번호를 알려줄 일이 있었겠냐고. 사실 지금도 휴대폰은 거의 알람 시계와 이북 리더기에 가까웠다.
몇 초간 머리를 굴려 제 번호를 떠올려낸 김독자는 휴대폰의 액정을 터치했다. 이 녀석, 휴대폰 엄청 좋은 거 쓸 줄 알았는데 아니네. 모서리가 조금 깨져 금이 간, 약간 세대가 오래된 스마트폰에 번호를 입력한 김독자는 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유중혁이 그대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김독자의 낡은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소리를 들은 유중혁이 고개를 조금 까딱이고는 빨간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 확인이라도 해본 건가.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는 거야, 뭐야? 그런 시선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유중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 또 도망칠까 봐 확인한 거다. 연락이나 잘 받아라.
그렇게 제 할 말만 해버리고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뻗어 금세 멀어진다. 김독자는 얼떨떨한 심경으로 복도를 돌아 사라지는 너른 등짝을 바라봤다. 저 새끼가……. 뭐라는 거야? 도망? 내가 언제 도망을 쳤다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김독자는 아, 하고 조금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도망친 게 맞다. 나는, 네 얼굴을 직접 보고 빌린 물건을 돌려줄 용기가 없었다. 맞는데, 그런데…….
속내를 들킨 기분이 들어 가슴이 싸해졌다. 동시에 뺨과 귓가에 열이 올라 김독자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유중혁, 개자식. 얼굴이 뜨거워진 이유는 아마도 그것뿐만은 아니었겠으나……. 김독자는 애써 생각을 떨쳐내려 애쓰며 복도를 걸었다.
유중혁과 김독자는 합법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 빠지는 몇 안 되는 학생중 하나였다. 유중혁은 특례로, 김독자도 특례로(물론 정반대 케이스였지만). 어쨌든 그래서 두 사람은 다른 학생들이 학교에서 신나게 야자를 하고 있을 시간에 학교 근처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었다. 화요일과 금요일. 유중혁은 그때밖에 시간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하긴, 실기 같은 것도 준비해야 하나? 김독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10시에 도서관이 문을 닫기 전까지는 서너 시간 정도가 있으니까…… 한 주에 여덟 시간이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넓은 테이블에 유중혁과 마주 보고 앉은 김독자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흘긋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잘생기긴 기가 막히게 잘생긴 놈이다. 그러니까 맨날 저렇게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고백하는 녀석들이 줄을 서는 거…….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책상 위로 꺼내지는 유중혁의 교과서에서 연분홍빛 편지 봉투 같은 것이 툭 떨어졌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와, 이 자식 진짜 장난 아니네…….
편지 봉투를 집어 가방 안에 넣은 유중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문제집도 꺼냈다. 하지만 김독자는 딱히 아무 일도 없는 척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궁금한 것 좀 물어볼 수도 있지. 필통을 열며 슬쩍 눈을 치켜들었다.
- 안 읽어볼 거냐?
유중혁의 짙은 눈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들썩였다. 그 반응에 잠시 실수했나 싶었지만 유중혁은 무심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 네 녀석 앞에서 읽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지?
아, 그러네, 시발……. 김독자는 제가 물어봐 놓고 속으로 욕을 하며 유중혁과 같은 교과서를 꺼냈다.
메신저로 날짜와 시간을 정하며 (고작 10분 정도 나눈 톡이었지만 김독자로서는 손에 꼽을 정도로 긴 메신저 대화였다) 화요일은 김독자가 유중혁에게 국어를, 금요일은 유중혁이 김독자에게 수학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책을 꺼낸 김독자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부를 해본 적은 없었다. 또래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거나, 배움을 받은 적도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이나 고민을 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다른 애들은 이런 때 어떻게 하지? 알 수 없었다. 알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자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웠다.
손으로 쓴 간단한 계획표를 꺼내 들자 유중혁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시종일관 무덤덤한 얼굴이더니, 이제야 좀 궁금한가 모르겠네. 김독자는 계획표를 뒤집어 유중혁 쪽으로 밀어주며 샤프펜슬 뒤꽁무니로 톡 두들겨 가리켰다.
- 이번 주는 이거. 다음 주는…….
간단한 설명을 하자 유중혁은 알아들었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설명을 마친 김독자는 할까 말까 고민하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유중혁, 하고 부르자 검은 눈동자가 제게 향했다. 김독자는 손안에서 샤프펜슬을 굴리며 말했다.
- 그냥 공부하는 것보다…… 뭐라도 걸고 하는 게 더 의욕이 생기지 않겠어?
유중혁이 팔짱을 꼈다.
- 그렇겠군.
-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5월 모고 등급이 3월보다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 어때? 물론 고3이 모의고사 등급을 올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유중혁이 고요한 눈으로 김독자를 바라봤다.
- 나는 국어, 너는 수학?
고개를 끄덕이자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살짝 긴장한 김독자는 곧 반듯한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보며 하마터면 헙, 하고 숨을 들이켤 뻔한 것을 참았다.
- ……벌칙은?
그렇게 말하는 눈빛이, 마치 날카롭게 달아오른 쇳날 같다. 그 속에서 언뜻 호승심 비슷한 것을 엿본 김독자는 과연, 이런 녀석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늘 무심한 얼굴이더니 다른 표정도 할 줄 아네, 활 쏠 때도 이런 얼굴일까……. 짧은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김독자는 턱을 괴곤 씩 웃었다.
- 벌칙은 너무 무섭잖아, 상은 어때.
- 나쁘지 않군. 무슨 상?
그렇게 묻는 얼굴에 김독자는 대충 만든 대답을 내놓았다.
- 소원 들어주기?
유중혁의 얼굴에 잠시 한심하다는 기색이 스쳤지만 김독자는 모른 척했다. 생각 안 나는데 어쩌라고. 마음에 안 들면 네가 정하든가.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 제대로 된 보상이 있어야 할 마음이 날 거 아닌가?
시발, 이 자식 왜 맞는 말만 하지. 하지만 벌칙은 싫었다. 내가 너랑 하는 내기 사이에서도 벌칙을 받아야 하냐? 싫은데. 나는 이미 평생 벌칙을 받고 있는 몸이거든.
그런 말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중혁이 짧게 혀를 차곤 자세를 바로 했다.
- 그걸로 하지, 그럼.
- 좋아.
대답한 김독자는 책을 펼치며 목을 가다듬었다.
제대로 된 상이 있어야 할 마음이 나지 않겠냐고? 그래, 그렇지. 그럼 만약에 내가 이기면……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하는 걸까. 전혀 모르겠다. 남에게 뭔가를 바라는 일을 포기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하지만, 그렇지만……. 어쩐지 막연한 기대, 바람. 그런 것이 스멀스멀 솟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가 알아채기에는 너무나도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래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일단은, 너한테 지긴 싫으니까. 내가 이길 거다. 유중혁.
소문은 생각보다 빨리 퍼졌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틀 만에? 김독자는 유중혁의 이름값을 과소평가한 과거를 반성했다. 이 자식이 길거리에 걸어 다니기만 해도 눈에 띄는 놈이라는 걸 간과했다. 목요일쯤 되니 이미 학교 안에는 두 사람이 스터디(?)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쫙 퍼진 듯했다. 유중혁이? 김독자랑? 왜?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물론 김독자 자신이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대도 단 1%도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 불만은 없었다. 그저, 수군대는 소리가 조금 늘어난 것이 거슬린다면 거슬릴 뿐이었다. 반에 앉아 있으면 대체로 유중혁에게 쏠려 있던 시선이 절반으로 분산되어 제게 돌아왔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김독자는 제게 향하는 시선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예전에는 경멸, 무시, 두려움, 꺼림칙함, 그런 거였다면. 지금은…… 거기에 미약한 경외심 같은 게 섞인 듯한. 아, 그래, 유중혁 이름값 한번 엄청나네…….
김독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했다. 이미 시작한 일, 이제 와서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지들이 쳐다봐서 어쩔 건데. 패기라도 할 거냐. 못 하겠지? 그 ‘유중혁’이랑 엮여 있으니까. 하지만 김독자는 우쭐하기는커녕 조금 신경질적으로 볼펜 꽁무니를 딸깍거렸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단 말인가, 지금 이 기분을. 스스로도 잘 표현할 수 없었다. 나 어휘력 떨어졌나? 좆됐네.
결국 그냥 생각을 관뒀다. 공부하고, 스터디 하고, 웹소설 읽기에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설령 일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더라도 설마 중학교 때보다야 심하겠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금요일. 김독자는 도서관 정문 앞에 서서 이마를 짚었다. 환장하겠네. 그러니까, 이렇게 될 것도 예상했어야 했는데.
김독자는 저 멀리 유중혁(정확히는, 유중혁의 뒤를 쫓아온 몇몇 애들)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냐?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뒤에 있는 녀석들이 저를 위아래로 빤히 훑어보기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확실히 유중혁의 표정이 저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미간을 인정사정없이 좁힌 채 흉흉한 기세로 걸어오던 유중혁이 뒤를 돌아봤다.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라느니, 쫓아오지 말라느니, 뭐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명인 피곤하시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광경이었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유중혁의 성난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약간 뿅 간 듯 반쯤 맛이 간 얼굴로 돌아가는 저 녀석들이다. 유중혁 화난 얼굴도 멋있다, 뭐 그딴 헛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김독자는 제 귓가를 툭툭 두드렸다. 마조히스트인가? 어쨌든 따라오던 무리를 쫓아낸 유중혁은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김독자를 향해 걸어왔다.
- 들어가지.
목소리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졌다. 아니, 나한테 화풀이냐? 하지만 직접적으로 성을 내자니 정말이라도 누구 하나 잡아 족칠 기세로 빡쳐 있길래 김독자는 속으로만 유중혁 개새끼, 하고 중얼거렸다.
잠자코 유중혁의 뒤를 따라 도서관 안으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면 어김없이 유중혁에게 꽂혀 드는 시선을 보니 그래, 이 녀석도 피곤하겠지, 싶었다. 물론 제가 동정할 처지는 아니다.
화요일과 비슷하게 유중혁과 마주 보고 앉아 책을 꺼냈다. 오늘은 유중혁이 제게 수업(?)을 해주는 날이다. 김독자가 계획표를 짜온 것이 제법 인상적이기라도 했는지 유중혁도 계획표 비슷한 종이를 꺼내 제게 내밀었다. 받아 드니 종이에 적힌 내용보다 글씨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흰 교과서의 표지에 적혀 있던 유중혁, 세 글자가 다른 이의 것은 아니었는지 이 하얀 종이 위에 쓰인 글자들도 똑같이 단정하고 깔끔했다. 유중혁이라는 녀석의 성미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군더더기 없는 글씨체.
짧은 감상을 마친 뒤 내용을 훑은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시작하자.
종이를 내려놓으며 빙긋 웃자 유중혁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표정을 원래대로 돌렸다. 펜을 집어 드는 손가락은 곧게 뻗어 길쭉하고, 잔상처가 많았다. 흘긋 거기에 시선을 준 김독자는 다시 유중혁의 손끝을 따라 책 위의 활자와 기호와 그래프로 눈길을 돌렸다. 집중하자. 목소리나 얼굴 말고 내용에 집중…… 집중을…….
시발. 김독자는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시선을 몇 차례나 끌어내리며 교과서 위를 움직이는 유중혁의 펜 끝을 바라보았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그래프다. 젠장. 낮게 긁히는 목소리는 어이없을 정도로 듣기 좋았고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펜촉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그 위에 있을 얼굴이 잘났을 거야 정말이지 두말하면 잔소리, 입만 아픈 절대불변의 참인 명제다.
유중혁과 스터디를 하는 데 이런 난관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번 주만 해도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일을 겪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김독자. 정신 차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집중하려 눈살을 찌푸리는데 무언가가 둔탁하게 제 이마를 치고 지나갔다.
시발, 뭐야?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히 유중혁의 딱밤이었다. 얼얼한 아픔에 이마를 문지르자 유중혁의 싸늘한 시선이 돌아왔다.
- 집중 안 하고 있지.
김독자는 할 말이 없었지만 입을 다물진 않았다.
- 아니거든. 듣고 있었거든?
유중혁은 그야말로 헛소리 중의 헛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선 다시 책을 두드렸다.
- 집중해라. 빨리 끝내고 가게.
그 말에 어쩐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래. 내가 이 녀석이랑…… 오래 얼굴 보고 있을 이유는 없지. 그건 이 녀석도 마찬가지고. 그래. 얼른 끝내고…… 가자.
빨리 끝내고 가자는 게 빈말은 아니었는지 유중혁은 정말로 한 시간 반 만에 목표치를 끝내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줌의 망설임도 없이 가방을 챙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설핏 아쉬움을 느낀 제 머리를 책상에 쾅 박고 싶어졌다. 시발.
짐을 모두 챙긴 유중혁이 어깨에 가방을 다시 둘러메고선 김독자를 내려다봤다.
- 왜? 할 말 있어?
멀뚱히 쳐다보기에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 열심히 해라. 나한테 져서 내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러고는 휙 몸을 돌려 가버린다.
응? 으응? 김독자는 방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나 싶어 황망한 심정으로 열람실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특별히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아닌데. 그런데, 저렇게 말한다는 건……. 혹시 나한테 들어달라고 하고 싶은 소원이 있다는 뜻인가? 유중혁이, 나한테? 뭐가 부족해서?
제가 건 내기에 대충 구색만 맞춰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런 식으로 말을 한다는 건…….
아니, 과대해석이겠지. 내가 집중을 못하는 것 같으니까 도발하거나 긁어 놓으려고 한 말일 거다. 김독자는 이번에는 정말로 책상에 머리를 쿵 박았다. 이마에 닿는 차가운 나무의 감촉과 대비되게 얼굴이 뜨거웠다. 유중혁, 너는 도대체.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연히 나 혼자 의식하고 있는 거겠지만. 생각해 보면 처음 본 날부터 그랬다. 도저히 녀석으로부터 시선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은 원래 그런 녀석이다. 어딜 가든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눈에 띄는 녀석.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김독자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유중혁에게 저가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면 표정 관리 연습이라도 해야겠다. 그런 실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비워 내려 애쓰며 뒤늦게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김독자. 정신 차려. 유중혁한테 일부러 져서, 그 잘난 소원이 뭔지 들어보겠다는 계획 같은 건 세울 생각도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