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 오메가버스 AU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김독자는 눈을 떴다. 깜빡, 깜빡. 눈을 수차례 감았다 뜬 뒤에야 간신히 현실감이 몸을 적셨다. 하얀 천장과 푹신한 침대. 오랜만에 꾸는 꿈이었다. 최근에는 거의 꾸지 않아서 잊고 있었는데.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자 역시나 비어 있었다. 살짝 열린 문틈 너머로 음식 냄새가 흘러들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김독자는 슬리퍼를 신고 문을 열었다. 중혁아. 이름을 부르며 다가가자 무언가를 볶던 유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깼나. 응. 익숙하게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에 김독자도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기분 좋게 스며드는 페로몬에 숨을 들이켜며 미소를 짓고.
치익, 하는 소리에 유중혁이 김독자를 살짝 내려놓고 인덕션을 낮췄다. 보글보글 끓는 물에 젓가락을 넣어 둥글게 저은 뒤 계란을 깨서 넣고. 곁에 선 김독자가 옆 프라이팬에서 익어가고 있던 베이컨을 뒤집었다. 여전히 칼질은 엉망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된 모양이군. 몇 장 뒤집더니 간단히 씻고 온다며 욕실로 향한다. 유중혁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잘 익은 베이컨을 미리 준비한 잉글리쉬 머핀 위에 올렸다. 수란을 건져 맨 위에 올린 뒤 홀랜다이즈 소스를 뿌리고, 곁에는 아스파라거스와 샐러드 채소를 더하니 금세 에그 베네딕트가 완성되었다. 식탁 위에 두 접시를 올리고 식기와 물컵까지 준비하니 정말로 금방 씻고 나온 김독자가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아침잠이 많아 아슬아슬한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 잦은 탓에 빨리 씻는 솜씨만 늘었다던가.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조금 떨어지자 머리에 얹은 수건으로 살짝 털어내더니 유중혁을 향해 슬 웃어 보인다.
“식기 전에 먹지. 머리는 다 먹고 말려주겠다.”
“아냐, 괜찮아. 내가 말릴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은 제 손에 넘겨줄 것을 알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대단히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빈 그릇을 물에 담근 뒤 다가가자 눈을 접어 웃는다. 유중혁은 그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소파에 자리를 잡은 뒤 무릎을 두드렸다. 잠시 눈썹을 움직이며 고민하던 김독자가 결국 그의 무릎에 와서 앉았다. 머리에 얹어져 있던 수건을 들어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니 하얀 목덜미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그 손길이 기분 좋은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김독자가 갑자기 소리 내서 웃었다.
“왜 웃지?”
“아니, 그냥. 갑자기 꿈 꾼 게 생각나서.”
무슨 꿈? 그 물음에 김독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미소를 지었다. 잠자코 기다리며 머리를 적당히 말려내자 김독자가 몸을 빙글 돌려 유중혁과 마주보고 앉았다.
“어릴 때 꿈을 꿨어.”
“어릴 때?”
응. 예전에, 너 많이 어려웠을 때 있지. 그 때 며칠 우리 집에서 묵은 적 있었잖아. 기억나냐? 그 말에 유중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한다.”
그 말에 되려 김독자가 놀란 얼굴을 했다. 기억한다고? 그럼 그 때 나랑 만났던 것도 기억나? 그래. 대답을 들은 김독자가 미간을 잔뜩 좁혔다.
“그럼 너, 나랑 알파 전시장에서 다시 만났을 때 왜 모르는 척 했어. 나한테 초면이 어쩌구 그랬잖아.”
글쎄. 왜 그랬을까. 픽 웃은 유중혁은 고개를 조금 숙여 그에게 입을 맞췄다. 야, 잠깐만, 너 아직 대답 안 했잖아, 뭐라 말하던 김독자도 결국 눈을 감았다. 짧은 키스를 나누고 입술을 떼자 김독자가 툴툴거렸다. 유중혁, 지 불리할 땐 아주 맘대로지. 너도 좋아하지 않나? 그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로 허둥거리고. 유중혁은 김독자의 허리를 두 팔로 끌어안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마치 마왕을 무찌른 용사를 보듯, 세계를 구한 영웅을 보듯 반짝거리는 눈으로 저를 보던 그 시선을.
‘난 네 팬이야, 유중혁. 예전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 말에……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하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계속해서 저를 응원하겠다는 그 짧은 말에 절대로 부끄럽지 않은 인간이 되겠다고…… 그렇게 스스로와 약속했다고.
유중혁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 이야기는, 좀 더 나중에 해도 되겠지. 그는 한 손으로 김독자의 허리를 받치고 몸을 기울여 테이블 위에 놓인 네모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깨를 붙잡고 매달려 있던 김독자가 눈을 깜빡거렸다.
“뭐야?”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반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김독자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작은 반지를 꺼낸 유중혁은 천천히 김독자의 하얀 왼손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그대로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고, 가볍게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김독자는 뭐라 한 마디로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결혼반지, 두고 갔었지. 그래서 새로 맞췄다.”
“중혁아.”
“이제 다시는 빼지 않는다고 약속해.”
한참이나 반지를 들여다보던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이곤 유중혁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유중혁은 작게 웃으며 그의 등을 쓸어내렸다. 중혁아. 내가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김독자. 말은 똑바로 해라. 좋아하기만? 잠시 말이 없더니 팔을 풀고 시선을 마주쳐온다.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김독자가 속삭였다.
“사랑해. 유중혁.”
그러면서 조금 달아오른 눈가를 휘어 웃는다. 유중혁은 웃으며 고개를 살짝 비틀고 입술을 벌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혀가 얽혀들었다. 유중혁. 넌 왜 사랑한다고 안 해줘?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말해서. 뭐?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두 사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온 약속을 다시 한 번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