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 오메가버스 AU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유중혁은 탐탁찮은 시선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다리를 꼰 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낯짝. 가늘게 접혔다가 다시 떠지는 눈과, 무릎에 얹어진 채 까딱거리는 긴 손가락이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젠장. 유중혁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유중혁.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왜일 거라고 생각하나. 유중혁은 깊은 한숨을 뱉고선 팔짱을 꼈다. 김독자가 능글맞게 웃더니 상체를 앞으로 슬쩍 기울였다.
“우리 중혁이 왜 기분이 안 좋냐. 내가 맞춰볼까? 흐음…….”
턱을 괴고선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한다. 유중혁은 그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까 조금 궁금해져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독자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아하. 내가 초콜릿 안 줘서 삐졌어?”
……기껏 한다는 소리가. 유중혁은 어이가 없어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미친 건가, 김독자. 그를 만난 뒤로 이 말만 몇 번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또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건가?”
“완전 제정신이거든.”
유중혁은 인상을 팍 쓰며 허연 얼굴을 노려봤다. 갑자기 웬 초콜릿이란 말인가. 물론, 이유야 알고 있었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다. 모 기업의 초콜릿 광고까지 찍은 유중혁이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너 단 거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준비 안 했는데. 그렇게 서운해 할 줄 몰랐네. 미안하다, 야.”
이어지는 김독자의 말에 유중혁은 이마를 짚었다.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단 걸 안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물어봐야 하나. 아니면, 전혀 서운하지 않다고 먼저 말해야 하는 건가. 유중혁은 그냥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하여간 만날 때마다 정신을 뒤흔들어놓는 이상한 놈이다. 물론 오늘의 만남도 김독자가 멋대로 유중혁의 집에 쳐들어온 덕분에 발생한 일이었다.
“흐음. 다른 선물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됐다. 너한테서 뭔가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서늘하게 돌아오는 단호한 대답. 그럼 그렇지. 김독자는 픽 웃으며 그 잘생긴 얼굴을 쳐다봤다. 무언가 대가 없이 받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녀석이다. 달리 말하자면, 목적을 알 수 없는 호의를 상당히 꺼려한다고 할 수 있겠지. 그에게 목적을 밝힐 수 없는 김독자는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반응쯤이야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의를 드러낼 때마다 적의로 되갚아오는 유중혁이라니. 아무리 김독자라 해도 쉬이 무뎌지긴 어려웠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TV조차 켜지지 않은 거실을 적막한 공기만이 가로질렀다. 김독자는 한참이나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대부분은 유중혁과 관련된 생각들이었다. 그의 앞에서 꺼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문득 유중혁이 설핏 눈썹을 들썩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늘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김독자가 침묵하자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웃기는 녀석이다. 날 그렇게나 싫어하는 주제에 저런 반응이라니.
그러니까 기대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중혁이라는 인간의 기저에 깔려 있는 다정함에 말이다.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하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잡생각은 치우고 웹소설이라도 볼 요량이었다. 그 때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언제 갈 건가?”
김독자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스마트폰의 화면을 들여다봤다. 조금은 아픈 말이라서, 눈을 마주치기 위한 용기가 필요했다.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을 뿐이다. 빨리 가라는 독촉을 듣고도 계속 앉아 있어야 하나. 자존심이 짓밟히는 기분에 울컥 화가 나다가도 동시에 서운함으로 목이 메이는 것만 같았다. 김독자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눈을 들어 올려 유중혁을 쳐다봤다. 그가 상당히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지만 딱히 다른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가 말해놓고 왜 저딴 표정이야. 김독자는 평정을 가장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
유중혁은 다른 말을 더 얹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을 뿐이다. 이 시간에 갑자기 웬 주방.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김독자는 의문을 품었으나 묻지 않고 조용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조금 바빠서 보지 못한 웹소설들이 쌓여 있었다. 어디…… <멸망 이후의 세카이>부터 볼까. 소설을 켜자 마음이 조금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김독자는 금세 독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얼마나 밀린 웹소설들을 읽고 있었을까. 얼핏 달착지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뭐지? 화면으로부터 눈을 떼고 고개를 들자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는 몸을 일으켜 살금살금 주방으로 향했다. 잿빛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에서 손을 씻던 유중혁이 흘긋 그를 돌아봤다.
“이 시간에 뭐해?”
“……별거 아니다.”
별게 아니긴. 완전 별건데. 김독자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리며 유중혁의 곁으로 다가갔다. 부엌에서는 달큰한 초콜릿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초콜릿이 묻은 그릇에는 설거지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뜨거운 물이 채워져 있었고. 누가 봐도 초콜릿으로 뭔가를 만들고 난 후의 풍경이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에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나한테 주려고 만든 걸까. 그게 아니면 굳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만들 이유가……. 아냐, 아냐.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하지 말자. 굳은 다짐을 하고 있는데.
“굳히는 중이다. 조금 걸릴 테니까 기다려.”
김독자는 눈을 깜빡거리며 얼떨떨한 얼굴로 유중혁을 올려다봤다. 이 녀석이 방금…… 뭐라고 했지? 그 표정을 본 유중혁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입매를 길게 늘렸다가 말을 이었다.
“……생각난 김에 만든 거다. 별 뜻은 없어.”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김독자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러니 어떻게 미워할 수가 있을까. 애초에 김독자에게 유중혁을 미워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김독자가 한참이나 웃는 동안 유중혁은 그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앞치마의 끈을 풀어냈다. 익숙한 손동작으로 벽에 앞치마를 걸어두는 모습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조금 더 웃었다. 잘생긴 남자가 요리까지 잘 한다니 신은 너무 불공평하다. 나야 좋지만. 느슨하게 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휘어 웃자 그를 빤히 바라본 유중혁이 인상을 쓰곤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조금 한숨을 쉰 것 같기도 하고. 한숨 많이 쉬면 빨리 늙는다, 중혁아.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멈추고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요리는 언제부터 배웠어?”
“딱히 배운 적은 없다.”
“그래? 안 배우고도 그렇게 잘 하는 거야? 대단한데.”
유중혁은 대답 없이 묵묵히 뒷정리를 시작했다. 짜식, 부끄러워하는 건가. 김독자는 싱글싱글 웃으며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언제 시작했는데?”
“……글쎄. 중학교 때쯤인가.”
중학교 때라. 김독자는 가만히 유중혁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딱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유중혁의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건. 억울하게 빚을 떠안고 고생하던 와중에 가족까지 잃었으니 그 괴로움이 얼마나 컸을지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웠다. 김독자는 그 시절의 유중혁을 기억하고 있었다. 웬만큼 열성적인 팬이 아니었다면 알아채기 어려운 차이였을 테지만, 김독자의 눈에는 보였다. 그즈음 스크린에 잡히는 유중혁의 동공은 이전보다 빛이 흐려져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던 거였다. 저 녀석을, 구해주고 싶다고.
유중혁이 거기서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쉽게 떨치고 일어나기도 어려워 보였기에. 그래서…… 손이 닿는 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그렇게 뻗어진 작은 도움의 손길 하나로도 유중혁은 보란 듯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상 무엇도 거칠 것이 없는 사람처럼 오만하고 당당한 눈빛. 그 꼿꼿한 등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희망을 얻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내가 유중혁이라면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거야. 나는 유중혁이다. 그런, 조금은 부끄러운 말도 했었던 것 같다.
김독자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눈앞에 있는, 진짜 유중혁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뒷정리를 멈추고 가만히 김독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독자.”
“응?”
회상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갸웃하자 유중혁이 말했다.
“너희 어머니는…… 잘 지내시나?”
순간, 김독자의 얼굴에 짧게 어떤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주 찰나에 불과해 유중혁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김독자는 이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잘 지내시지. 곧 출소하실 걸.”
“그렇군.”
잠시 이수경의 얼굴을 떠올렸던 유중혁은 금방 상념을 털어내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도와줄까? 김독자가 다가와서 묻기에, 유중혁은 됐다고 말하려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주방에 있는 물건들을 건드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 작은 변덕이었을 것이다. 설명할 길은 그것뿐이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이 빛나는 걸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으니까.
뒷정리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초콜릿이 묻은 그릇과 도구들이었지만 유중혁은 준 프로답게 세척거리를 줄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독자는…… 차라리 도와주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군. 유중혁은 짧게 혀를 찼다. 신나게 방해만 해대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화가 나지 않는지, 그게 제일 이상하고 억울했다.
뒷정리를 마치고 손을 털어내며 흘긋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대충 굳었을 것 같은데. 유중혁은 냉장고의 문을 열고 완전히 굳은 초콜릿을 꺼냈다. 옆에서 기웃거리던 김독자가 작은 탄성을 냈다. 동그랗고 네모난 작은 틀에 넣어서 굳힌, 한입 크기의 초콜릿들. 유중혁은 초콜릿들을 투명한 포장봉투에 넣고 리본을 묶었다. 보라색 리본이 스르륵 소리를 내는 것을 지켜본 김독자가 조금 웃었다. 유중혁은 그의 손에 봉투를 쥐여 주었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건네주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적당히 겸양의 표현을 했다. 사실 유중혁에게는 조금 낯선 말이었지만. 유중혁은 자신이 만든 음식들이 대단히 맛있는 축에 속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 반응도 비슷한 것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네가 만든 게 맛없을 리가 없잖냐, 그런 대답. 하지만 김독자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뭐지? 유중혁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눈꺼풀과 함께 팔랑거리는 속눈썹을 바라보았다. 김독자는 손에 들린 초콜릿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째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은, 정말로 이상하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렵고, 그 탓에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만날 때마다 이 기묘한 감정은 가중되기만 했다. 그래서 유중혁은 김독자를 피하고 싶었고, 한편으로는…… 더 많이 만나고 싶었다. 이 난해한 남자에 대해 지금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길게 숨을 내쉰 김독자가 고개를 들었다. 말간 웃음이 흩어졌다.
“고맙다, 중혁아.”
그날이 김독자의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유중혁이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달이나 지난 후였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귀청이 터지도록 힘차게 울어대는 소리가 제법 지겨워질 무렵인 8월이었다. 물론 유중혁은, 바깥 사정과는 상관없이 에어컨이 틀어진 쾌적한 실내에서 눈을 떴다. 서늘한 공기에 노출되어 있던 살갗이 조금 차갑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니, 곁에는 조용히 숨을 색색대며 잠들어 있는 김독자가 있었다. 팔을 벤 채로 계속 잔 모양이다. 팔뚝이 조금 저릿한 것 같기도 했지만, 유중혁은 말없이 다른 손을 들어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겼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념겨지고 그 사이로 흰 이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감긴 눈꺼풀 아래 긴 속눈썹이 도드라졌고. 유중혁은 가만히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김독자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일어났나.”
“응…….”
대답은 돌아왔으나 아직 몽롱한 목소리였다. 흐릿한 시선이 이곳저곳을 헤맸다. 저혈압이라도 있는 건지 늘 아침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런 점도 조금은 사랑스럽게 보인다고 하면, 미친 걸까. 김독자 본인에게 말하면 미쳤냐며 기겁할 게 뻔했다. 그래서 유중혁은 그저 조용히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함께 지낸 반 년간 알게 된 배우자의 습성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서.
한참이나 바르작거리던 김독자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유중혁을 보며 멋쩍어하더니 손을 뻗어 뺨을 꾹 눌러댄다.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눈을 휘어 웃었다.
“너 또 나 자는 거 구경했지.”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닌데. 대답하더니 미간을 조금 모으고 대단히 억울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넌 왜 맨날 나보다 일찍 일어나냐. 억울하네.”
“네가 늦게 일어나는 거라곤 생각 안 해봤나?”
“난 원래 야행성이야.”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진다. 그런 점이 바로 김독자다운 것이지만. 유중혁이 픽 웃으며 바라보자 그 얼굴을 손으로 꾹 밀어내더니 몸을 일으킨다.
“몇 시지? 늦으면 안 되는데.”
“오늘 휴일이다. 잊어버렸나.”
“야, 나도 알거든. 무슨 날짜 감각도 없이 사는 줄 알아.”
저렇게 따박따박 대꾸하니 재밌어서 그만둘 수가 있어야지. 유중혁은 느긋하게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댄 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김독자를 바라봤다. 몸을 돌리며 이불을 걷어내자 새하얀 등과 목덜미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중혁은 팔을 뻗어 김독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깐만, 나 나가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지.”
어깻죽지에 입술을 내리누르고 지분거리자 몸을 파르르 떤다. 유중혁은 망설임 없는 손길로 김독자의 가슴과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흐으, 하며 뱉어지는 숨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이미 다 벗고 있어서 벗길 필요가 없군. 천천히 페로몬을 풀어내며 계속해서 만지작거리자 김독자가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돌아봤다.
“유중혁. 나 나가야 된다고…….”
“그러니까 어딜?”
갑자기 입을 꾹 다문다. 뭐지, 또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유중혁은 잠시 눈썹을 들썩였다가 하던 일을 마저 계속하기로 했다. 그럼 적어도 입은 열리겠지.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겹치자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결국 혀를 얽으며 키스에 응해온다. 그럴 거면서. 유중혁은 옅게 퍼지는 편백나무 향을 느끼며 김독자의 몸을 품으로 끌어들였다.
어딜 간 건지 점심 즈음에 나간 김독자는 저녁 시간이 가깝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움직이려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문자를 받고서 손을 멈췄다.
[금방 갈게. 저녁 하지 말고 기다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릴까. 유중혁은 슬그머니 미간을 좁혔다. 저녁을 사오겠다는 건가? 유중혁은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었다. 때문에 본인이 직접 한 요리 외에는 그다지 즐기는 것이 없었다. 김독자 또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인데. 하지만 유중혁은 일단 그의 말대로 했다. 무언가 생각이 있겠지. 일이 잘못된다면 그때 가서 따져도 될 일이다. 그렇게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김독자가 돌아왔다.
“중혁아, 미안. 기다렸지?”
유중혁은 적당히 고개를 저으며 김독자의 손에 잔뜩 들린 것들을 바라보았다. 저게 다 뭐지. 시선을 눈치 챘는지 김독자가 방긋 웃으며 손에 들린 봉투를 들어 올렸다.
“일단 저녁부터 먹자. 너 좋아하는 무림만두 사왔다.”
유중혁이 반짝, 눈을 빛냈다. 무림만두는 유중혁이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였다. 봉투를 받아들며 물었다.
“제법 멀었을 텐데. 직접 다녀왔나?”
“응, 오늘 다른 사람들은 휴일이니까.”
무림만두는 분점조차 없는 가게인 데다 거리가 먼 탓에 자주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차를 달리면 왕복 세 시간은 잡아야 할 거리다. 그래서 늦었나. 유중혁은 피식 웃으며 식탁에서 봉투를 풀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만두가 식욕을 자극했다. 용케도 안 식었군. 적당히 주변을 정리하는 사이 김독자가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서 만두를 먹었다. 물론 대단히 맛있었다. 김독자는 맞은편에 앉은 잘생긴 남자를 보며 속으로 조금 웃었다. 유중혁은 감정이 얼굴에 그다지 티가 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을 때 나오는 버릇 같은 것은 있었다. 이를테면, 저렇게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덧그린다든가 하는 행동 말이다. 기분 좋은 모양이네, 우리 중혁이. 먼 거리를 차로 달린 보람이 있는 듯했다.
만두를 먹은 잔해를 정리한 김독자는 다른 것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유중혁은 누가 봐도 케이크 상자처럼 생긴 그것을 보고서야 아, 하고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생일이군. 지난주에 생일 기념으로 작은 팬미팅도 했었는데, 정작 당일이 되니 잊고 있었다. 김독자는 상자를 열어 케이크를 꺼냈다. 당근과 유자 껍질 등이 꽃 모양으로 장식된 홀케이크였다.
“너 단 거 안 좋아하잖아. 그래서 특별 주문했지.”
설탕 말고 다른 거 썼대. 스위트펄인가, 뭐라던데. 알아들은 유중혁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겠군.”
“고생은 뭘.”
김독자는 씩 웃으며 초를 꽂았다. 스물아홉이라서 초도 많이 꽂아야 되네. 이내 불까지 모두 붙인 김독자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 축하해, 중혁아.”
유중혁은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그 대답만으로도 김독자는 대단히 기분이 좋아졌다. 초를 불어 끄는 유중혁에게 박수를 쳐주고, 불 꺼진 초를 모두 정리한 뒤 포크를 꺼내왔다. 유중혁은 케이크를 조금 찍어 입에 넣었다. 달지 않은 당근 케이크에 유자의 향이 더해져 제법 괜찮은 맛이었다. 맛있군, 그렇게 말하자 김독자는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또 무언가를 꺼낸다. 손바닥만한 상자였다. 유중혁이 고개를 갸웃하자, 김독자가 그를 향해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반질거리는 검은색 시계판이 눈에 띄는 메탈시계였다. 김독자는 시계를 꺼내 유중혁의 손목에 직접 채워주었다.
“길이는 조절해야겠네.”
유중혁은 조용히 시계를 바라보았다. 째깍대는 초침이 심박처럼 뛰었다. 서늘한 감촉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어쩐지 조금,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디자인은 어때? 마음에 들어? 가능하면 네 취향에 맞추려고는 했는데.”
같이 가서 고르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래도 서프라이즈라는 게 있잖냐. 그렇게 말하며 웃기에 유중혁도 마주 웃어주었다.
“아주 마음에 든다. 내일 바로 줄여서 차고 다녀야겠군.”
그 말에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다.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면 취향을 조금 굽힐 수도 있었을 테니까. 그는 팔을 뻗어 김독자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며 식탁 너머로 몸을 기울이고. 입술이 부드럽게 맞닿았다. 눈을 감는 김독자를 시야에 담으며 가벼운 키스를 한 뒤 떨어지자 작게 웃는다.
유중혁은 손목시계를 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마지막 선물만 남은 건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끌어안으니 김독자가 눈을 크게 떴다.
“미친, 유중혁! 또 하자고? 아침에도 했잖아! 어젯밤에도!”
“새삼스러운 소릴.”
“야, 잠깐만, 나 더는 못 한다고……!”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고 김독자를 안아 올렸다. 그렇게 말해봤자, 정직하게 페로몬이 새어나오고 있지 않은가. 김독자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혔다. 침실로 발을 움직이자 떨어지지 않으려 어깨를 끌어안기에 고개를 숙여 그의 흰 목덜미를 살짝 깨물었다. 달착지근한 향기.
“김독자.”
“응?”
“내년 네 생일은, 반드시 멋진 날로 만들어주겠다.”
네가 그랬던 것처럼.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유중혁 또한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코끝으로 전해지는 애정의 무게를 음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