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 오메가버스 AU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미지근하게 데워진 핫초코 잔으로부터 달착지근한 향기가 퍼졌다. 바로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딱 알맞게 식은 온기. 김독자는 손가락 끝으로 잔을 두드리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이내 간단한 뒷정리를 마치고 커피를 든 채 맞은편에 앉는, 잘생긴 얼굴. 김독자는 발을 움직여 그 긴 다리를 슬쩍 감고는 장난스레 웃었다.
“누구 남편인지 진짜 잘생겼네.”
유중혁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개를 조금 돌리니 테이블 옆에 쌓여 있는 여러 언론사의 신문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느릿하게 무너뜨리자 1면을 장식한 제목들이 한가득 드러났다.
‘<김독자 컴퍼니>, <황제> 인수합병…… 다음은 어디?’
‘계속되는 M&A, <김독자 컴퍼니> 성장세의 끝은 어디인가’
<황제>의 인수합병. 확실히 엄청난 사건이기는 했다. 기존의 <김독자 컴퍼니>라면 황제보다 그 규모가 작았을 테지만…… <베다>와 <파피루스>에 이어 <올림포스>까지 흡수한 지금, 그 크기는 <황제>와도 비할 바가 아니었다. 주가가 착실하게 올라가고 있군. 물론 악명도 함께. 유중혁은 입 속에서 씁쓸한 맛을 굴리며, 당당한 미소를 걸치고 있는 사진 속의 김독자를 들여다봤다. 탁, 김독자의 손이 사진 위에 정확히 내려앉고. 뭐 하냐는 눈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여기에 실물이 있는데, 왜 사진을 보고 그래.”
하여간, 웃기는 녀석이다. 곧 테이블 위로 저를 향해 기울어져 오는 흰 얼굴. 유중혁은 익숙하게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조금 짜릿한 듯, 기분 좋은 느낌. 각인이 된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접촉은 확실히 안정적인 느낌이 있었다. 코끝에 옅게 감도는 페로몬에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김독자가 빙긋 웃었다.
“너무 유명인이 돼 버렸네. 이러다 너보다 더 유명해지면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간단히 대꾸하자 웃음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김독자는 턱을 괴며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중혁아?”
“무슨 생각?”
“내 다음 목표. 어디일 것 같아?”
유중혁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베다>, <파피루스>, <올림포스>, 그리고 <황제>……. 이들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알파와 오메가를 타겟으로 하는 상품들을 생산하는 회사. 하지만 유중혁은 이제 알 수 있었다. 김독자라는 인간은 대단히 복잡했다. 뻔히 보이는 그런 단순한 행동패턴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유중혁은 그로부터 답을 역추론할 수 있었다. 이들의 진짜 공통점은, ‘기업 총수가 오메가’라는 것이었으므로.
“<아스가르드>인가.”
김독자는 오, 하는 소리를 내더니 빙긋 웃었다.
“내 남편은 너무 잘나서 탈이야.”
“탈일 건 또 뭐지. 잘나면 좋은 거 아닌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싱글싱글 웃는 얼굴이었으나, 유중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뭘 숨기고 있나, 김독자.”
“좀 봐줘. 얼마 안 있으면 알게 될 테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조금 나아졌나 싶더니 그새 또 비밀이 생긴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가리고 숨겨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 끝에는 애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숨기는 것은 있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는 녀석이니, 곧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훤히 뚫린 거대한 통유리 창문 너머로 눈송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져내렸다. 새해가 갓 지난 겨울 하늘이 고요히 잠겨들었다. 처음 만난 날로부터 어느덧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유중혁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모두, 김독자를 만나 변한 것들이었으니까. 흘긋 김독자를 바라보자 조금은 무심한 듯한 옆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다. 허공을 헤매는 눈동자의 빛. 유중혁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김독자는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서로 조금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나가 있어 주십시오. 현성 씨.”
“안 됩니다, 대표님! 정체도 모르는 사람이랑 단 둘이 계시게 할 수는……”
“몸수색은 했죠?”
“……네. 그치만, 혹시 모르는 일이고……”
김독자는 팔을 들어 손 안에 쥔 것을 흔들어 보였다. 버튼 하나만 달린, 심플한 모양의 장치.
“이게 있잖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누르겠습니다.”
“하지만……”
“현성 씨.”
김독자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현성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얼굴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문제 생기면, 꼭 누르십시오.”
“네. 알겠어요.”
그제야 이현성이 굳은 얼굴로 방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김독자는 얼굴에 띄웠던 미소를 지워내고 서늘한 시선을 들어올렸다. 사내는 그 눈빛에 잠시 안절부절 못하는 듯 했으나, 이내 결심한 듯 주먹을 꾹 쥐고 김독자를 마주보았다. 그래, 그래야지. 나를 직접 만나러 올 정도면, 그 정도는 돼야지. 김독자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자, 그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
“알파 전시장 관리자께서?”
남자는 입을 다물고 잠시 침음했다. 김독자는 그 얼굴을 면밀히 살피며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중요한 타이밍이다. 절대로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내가 원하는 걸 얻어내야 한다. 말을 고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유중혁 씨에 대해,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게 뭘까.”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자 그가 재차 말했다.
“유중혁 씨가 알파인 걸 압니다.”
“아아, 네. 그러시겠죠.”
그런 소문이야 이미 몇 번이나 돌고 돌았다. 하지만, 증거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증권가 찌라시 돌듯 계속해서 올라왔다가 수그러드는 헛된 가십이었다. 김독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다리를 꼬자 남자가 무릎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증거가 있습니다.”
김독자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그렇군. 대단히 아쉽게도, 한수영 선에서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만나기 위해 알파 전시장을 이용했었다. 세간의 시선이 닿지 않는 음지 중의 음지이니 그 곳을 매개체로 택한 건 아주 신중하고 좋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관리하는 곳인 만큼, 언젠가는 목격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침착해라, 김독자. 이 때를 위해 계속 준비해 왔잖아. 무슨 증거일까. 대단한 게 아니라면 여기서 바로 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김독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증거요. 어디 들어나 볼까요.”
“……녹음본과, 홍채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독자는 순간 당황해 몸을 움찔할 뻔했다. 뭐? 홍채 정보?
알파 전시장은 정부의 홍채 데이터베이스를 ‘빌려’ 쓰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입장을 위해 스캔한 출입자들의 홍채 정보는 매일 삭제하는 것이 규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간신히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남자를 쏘아봤다. 그렇군. 이놈이…… 유중혁의 홍채 정보를 남겨뒀군. 그게 엄청난 가치를 지닐 것임을 알아본 것이다. 감이 좋은 놈이야.
곤란한 상황이 되었다.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알파와 오메가, 그 중에서도 극소수밖에 모르는 사실이지만. 신체 구조로 구분이 어려운 남성 알파와 여성 오메가는…… 홍채 패턴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원인은 모른다. 이 사실이 밝혀진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저, 베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기에 기준이 될 뿐. 젠장. 김독자는 속으로 욕을 하며 평정을 가장했다. 이제 어쩐다. 빠르게 저울질을 마친 김독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시군요.”
“…….”
“1년 넘게 고민이 많으셨겠습니다?”
사실상 긍정의 대답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예상했다는 듯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를 가늠하며 눈을 굴릴 뿐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십니까? 마음껏 말씀해 보세요.”
기선 제압이 필요한 시점이군. 일부러 여유롭게 말하자, 남자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거래, 좋죠. 조건은?”
김독자는 빈 종이를 밀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어서 만년필을 집어들려던 손이, 남자의 말에 우뚝 멈췄다.
“제가 원하는 건 <김독자 컴퍼니>입니다.”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간도 크군, 감히…… 뭘 원한다고?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제법 의연했다.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 그래, 이제 알겠다. 뒤에…… 누군가 있군. 하기야 ‘그’ 알파 전시장이니. 뒷세력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건, 어딜까. 김독자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스타 스트림>을 끼고 있군요. 그렇죠?”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적중한 모양이다. 김독자는 하, 헛웃음을 흘렸다. 일이 이렇게도 흘러가는군. 예상했던 범위를 넘어섰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할 것이 조금 더 빨리 다가왔을 뿐. 할 수 있어. 나만 잘 하면 된다.
<베다>. <파피루스>. <올림포스>. <황제>. 그리고, <아스가르드>. 그 외에도 먹어치우려는 기업들은 몇이 더 있었으나…… 저 다섯이 전부 손에 들어오면 <스타 스트림>과 맞서는 것도 꿈이 아니다. 다수의 오메가들에게 부와 권력을 쥐여 주고 있는, 이 나라 최대의 그룹. <스타 스트림>만 무너뜨리면, 분명히…….
김독자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그토록 바랐던 단 하나의 결말을 위해 지금껏 계속해서 움직여왔다. 그러니까, 고작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손가락으로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매끈한 감촉이 오늘따라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떠올렸다. 차가운 철창을 사이에 두고 만났던 12월의 어느 날. 왜 하필 지금, 그 철창을 움켜쥔 가죽 장갑 너머로 전해져 오던…… 서글픈 감촉이 떠오르는 것일까. 김독자는 눈을 감았다.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이다.
유중혁. 김독자는 속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 다시 한 번 더,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부드러운 이불이 어깨 위로 덮였다. 맨살에 닿는 감각이 포근했다. 김독자는 웃으며 유중혁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금방 유중혁의 팔이 김독자의 등과 허리를 끌어안았다. 따뜻해.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도 늘 그래왔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고개를 조금 들어 유중혁의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로 말했다.
“중혁아.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아?”
간지러웠는지 유중혁이 조금 웃고선 대답했다.
“그래. 중요한 날이지.”
알고 있네. 김독자는 물끄러미 유중혁의 어깨 너머로 어슴푸레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은은한 달빛. 추위가 제법 많이 가시고 꽃이 피어나는 3월이었다. 유중혁과 김독자가 위장 결혼을 한 지 꼭 1년이 되는 달이기도 했다. 내일이 바로 그 날이지. 우리 결혼기념일. 하지만, 매년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뿐일 날을, 기념일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김독자는 몸을 조금 물려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감겨 있던 눈이 반짝 떠지며 김독자를 향했다. 얇은 겹쌍꺼풀 아래 검은 눈동자가 나른하게 빛났다. 그 얼굴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진짜 잘생겼네.
“왜?”
홀린 듯 가만히 보고 있자 유중혁이 되물어왔다. 김독자는 다시 물음으로 되갚아주기로 했다.
“중혁아. 다시 한 번 물어볼게.”
“뭘?”
“너 정말 나랑 이혼할 생각 없어?”
이미 몇 번이고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 때마다 유중혁은, 그럴 일 없다는 한결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김독자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난처했다.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흔들림 없는 눈으로 말하면, 거기에 마음껏 의존하고 싶어진다. 그냥 이대로 여기에 안주해서 함께 있고 싶어진다.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그냥 영원히 이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 것만 같은 달콤한 환상.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김독자는 그것이 넓은 의미의 길티 플레저임을 알았다. 지금의 행복은…… 유중혁의 고통과 인내를 기반으로 한, 희생 위에 놓인 것이었으니까. 무엇도 하지 않고 영원히 이대로라면, 유중혁은 평생을 베타로 위장한 채 살아야 한다.
그래서 김독자는 결정을 내렸다.
“유중혁.”
유중혁은 대답 없이 김독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감각이 서글펐다.
“날 믿어?”
“…….”
갑자기 무슨 소릴 하냐는 듯 빤히 쳐다본다. 김독자는 고요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유중혁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답했다.
“믿고 있다.”
“…….”
“김독자, 나는 너를 믿는다.”
그래……. 그럼, 됐어. 중혁아. 나는 오로지, 네게 행복한 결말을 주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김독자는 유중혁의 눈꺼풀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코끝에, 그리고 다시 입술에. 손을 뻗어 그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사랑해.”
“……김독자.”
그러니까 너도, 사랑한다고 말해줘. 나는 그걸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며 바라보자, 유중혁이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사랑한다, 김독자.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김독자는 눈을 꾹 감았다.
유중혁은 눈을 떴다. 품 안이 허전했다. 김독자가 없었다. 어쩐 일이지. 김독자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늘 자신보다 늦게 일어나곤 했는데.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내고 바지를 걸친 뒤 침실 밖으로 나갔다. 주방에는, 없군. 김독자.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독자. 한번 더 불렀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어딜 간 거지. 거실로 향했으나 그 또한 텅 비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얗고 낯선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은 걸음을 옮겨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서류 위에 포스트잇이 두 개 붙어 있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을 읽은 유중혁은 서류가 구겨질 정도로 꽉 움켜쥐었다.
[너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두고 갈게.]
[아프지 말고, 밥 잘 챙겨먹고.] 서류는 이혼 동의서였다. 김독자 본인의 필체로 또박또박 적힌 글씨. 유중혁은 당혹감과 분노로 손을 떨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그 위에 적힌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비어버린 집 안에서 희미한 편백나무 향기만이 끊어질 듯 맴돌았다. 테이블 위에서는 금빛 반지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김독자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