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
* 오메가버스 AU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유중혁.
김독자는 그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깼다. 하아, 하아……. 공기를 갈구하며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고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아 숨을 골랐다. 땀이라도 흘린 건지 시트가 흥건하다. 아니, 아니다. 이건……. 미끈거리는 감촉이 다리 사이에서 느껴져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미쳤냐, 김독자. 이 나이 먹고 도대체. 억제제도 빠짐없이 복용했으니 사이클이 돌아오더라도 문제는 없었을 텐데. 이불을 들춰내고 몸을 일으켜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달아올라 있는 몸은 찬물이라도 맞아야 조금 가라앉을 것 같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에 머리카락부터 적셔가며 멍한 얼굴로 조금 전 꿈을 떠올렸다.
유중혁.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차가운 눈매, 무정하게 다물린 입, 강인한 어깨와 팔……. 그 조각 같은 얼굴에 늘 깃들어 있던 서늘함이 서서히 열기로 바뀌어 가는 건, 꿈이었다지만 지나치게 기분이 좋았다. 하물며 그런 얼굴을 하고 날…… 아, 시발. 김독자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말이 되는 생각을 해야지, 김독자.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상상해봤자 괴롭기만 할 뿐이다.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 머리에 대충 수건을 얹었다. 물기를 탈탈 털어내며 TV를 켜자 요즘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그런 제목이었지. 죽을 때마다 회귀하는 남자주인공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상투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이너한 소재라…… 이런 게 과연 성공할까 싶었지만 유중혁의 이름값은 가히 신드롬이었다. 유중혁은 한국에서 이미 톱배우였고, 그가 나온 영화나 드라마들은 주변국으로 수출도 심심찮게 되고 있었다. 하기야 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것이다. 하물며 연기력까지 받쳐주는데 오죽할까.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소파에 앉으니 마침 화면에 유중혁이 잡혔다. 스승을 잃은 뒤 힘을 키워 복수를 하는 장면이었다. 무표정하게 냉기가 흐르는 얼굴을 디폴트로 하는 남자이기에 이처럼 강렬한 분노를 드러내는 장면은 많지 않았다. 사정없이 굽어진 짙은 눈썹과 황금빛으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듯한 눈동자. 저건 CG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김독자는 그 연기에 빠져들었다. 이미 세 번이나 본 화인데 또 봐도 압도적이다. 한참이나 몸을 굳히고 바라보다가 전투 장면이 끝난 뒤에야 수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알아차렸다. 김독자는 한숨을 쉬며 수건을 집어 올렸다. 유중혁. 어째서 너는…… 베타인 걸까.
물론, 베타가 세상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알파와 오메가는 극소수라는 것도. 그래도, 백 명 중 한두 명 꼴로 있는 알파잖아. 네가 알파였다면 좋았을 텐데……. 관두자.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오메가가 아닌 것만 해도 어딘가.
일이나 하자. 슬슬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김독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대표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김독자는 턱을 괴고 있던 팔을 풀며 의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머리를 동그랗게 올려 묶은 여성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 옆으로 놓인 묵빛의 삼각기둥 명패에는 고급스런 글자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대표이사 김독자(金獨子).
“왜요? 그래 보입니까?”
“네.”
간결하게 대답하더니 빤히 쳐다본다. 마치 속내를 파악하기라도 하려는 듯.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글쎄요.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제가 대표님을 얼마나 오래 봤다고 생각하세요. 정희원의 말에 김독자는 다시 웃었다.
“하여간 이래서 힘들다니까. 희원 씨는 날 너무 잘 압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그러더니 책상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와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결재해주시죠.”
“검토해주시죠, 가 아니라?”
“이미 수십 번이나 보셨잖아요.”
정말이지, 너무 잘 알아서 탈이다……. 올려다보자 정희원의 고집스런 입매가 빙긋 올라갔다. 김독자는 만년필을 꺼내들고 서명을 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정희원은 이내 서류를 제 손안으로 수거해갔다.
“이걸로 또 한 건 하셨네요. 축하드려요.”
“누구 덕분에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님 악명은 더더욱 올라갈 거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김독자는 서류의 내용을 가만히 떠올렸다. 모르긴 몰라도 이 건은 내일 신문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할 것이다. ‘<김독자 컴퍼니>, 계속되는 공격적 M&A’…… 뭐 그런 제목 아닐까. 이미 <베다>와 <파피루스>를 먹어치웠다. <올림포스>도 내일이면 공식적으로 손에 들어온다. 책상에 두 팔꿈치를 올리며 손깍지를 끼고 바라보자니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언제나 대표님 편이니까요.”
“그것 참 든든하군요.”
농담처럼 주고받은 말에 정희원이 희게 웃고는 이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나갔다. 김독자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라……. 맞는 말이었다. 김독자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 저주스러운 기업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렸다는 쾌감보다 더한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니?
이수경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젠장. 김독자는 미간을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올해로 스물여덟. 아니, 12월이니 곧 스물아홉이다. 확실히 오메가치고는 출산이 늦은 편이기는 하다. 애초에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출산을 논하기는 어렵지만, 평균적인 나이로 봤을 때 그렇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오메가 집안들은 상류층이다. 게다가, 이 사회의 최상류층은 모두 오메가라고 봐도 좋을 정도고. 그러니 돈이든 권력이든 편한 쪽을 써서 괜찮은 집안의 알파와 어릴 때부터 연을 맺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김독자는, 일반적인 오메가 집안의 사람이 아니다. 그야 당연하지. 누가 살인자 집안의 오메가와 선뜻 연을 맺으려고 할까. 설령 우성일지라도 그것은 기피대상이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짜증나……. 그냥 결혼하지 말고, 아이도 낳지 말고 살다가 죽을까. 회사는 그냥 적당히 능력 있는 사람한테 주고. 그렇게 살아도 그다지 미련은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
아니. 아니지. 김독자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정확히는, ‘누군가’의 아이가 아니면 갖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가 아니면 누구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한수영은 늘 그런 김독자를 비웃어댔다. ‘세상에 베타를 10년도 넘게 좋아해서 고통 받는 오메가는 너밖에 없을 거다.’ 듣기만 해도 혈압이 상승하는 말이었으나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난 유중혁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애증하는 거지.’ 그리고 한수영의 반응도 늘 같았다. ‘지랄하네.’
- 부르르르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한숨을 쉬며 화면을 확인하자 문자 메시지가 하나 떠 있었다.
김독자. 오늘 밤 11시 ■■빌딩
한수영이었다. 하필이면 자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문자를 보내온다. 귀신같은 녀석……. 김독자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또 왜 됐으니까 꼭 나와. 이거 진짜 대박 안 오면 존나 후회함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한수영이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이 정도로 강하게 말하는 건…… 조금 수상한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들었다. 둘 사이에는 이런저런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었지만 자신에게 해가 될 일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꾸민 건지. 그래서, 김독자는 머릿속에 일정을 새겨 넣었다. 11시, ■■빌딩.
김독자는 코트자락을 여미며 허공으로 숨을 뱉어놓았다. 대기하세요, 운전사에게 지시해두고 손에 낀 검은색 가죽장갑을 고쳐 끼우며 걸어가자니 한수영이 건물 안쪽으로부터 고개를 내밀었다.
“11시 딱 맞춰서 왔네. 하여간 타이밍 기가 막힌 새끼.”
“칭찬인지 욕인지 하나만 해라.”
픽 웃으며 가까이 가자 한수영은 손을 휘저어 자동문을 다시 열었다. 작은 키로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한수영의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따라가다가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부른 건데?”
“존나 대형 비밀이라 말 못해. 일단 가보면 알아.”
도대체 뭐길래. 점점 더 궁금해진다. 김독자는 기대감으로 서서히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한수영을 따라 하얀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기 의료재단 부속 건물 아니던가?”
“겉으로는 그렇지. 나도 얼마 전에야 다른 용도가 있다는 걸 알았어.”
엘리베이터의 버튼 세 개를 동시에 누른 한수영이 김독자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즉시 문이 닫히더니 옅은 흔들림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층수가 표시되지 않는다. 지하에 뭔가 있나 보군. 김독자는 말없이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한참이나 내려가는 듯하더니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가자.”
한수영의 목소리에서 조금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이 녀석이 이러는 건 오랜만에 보는데. 김독자는 덩달아 긴장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자박. 자박. 어두운 복도를 한참이나 걸어가며 슬슬 괜히 온 건 아닌가 고민하기 시작한 김독자의 앞을 커다란 철문이 가로막았다.
“뭐야?”
한수영은 대꾸 없이 문 옆에 달린 홍채 인식 장치에 눈을 가져다댔다.
[데이터베이스 검색 중.]
[확인. 우성 알파, 한수영 님.]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시발, 아직 안 되네. 일처리 똑바로 안 하냐.”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한수영을 쳐다봤다.
“뭐야? 자신만만하게 들이대더니?”
“있어봐. 사람 나올 테니까.”
아니, 애초에 확인은 됐는데 왜 출입이 불가능이야? 한수영이 팔짱을 끼고 문을 노려보자 이내 홍채 인식 장치 옆 스피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한수영.”
[선약이 있으십니까?] “여기까지 온 거 보면 모르냐. 안에 다시 확인해 봐. 내 이름 있을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목소리가 끊기고…… 속으로 노래 한 곡을 다 부를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장치가 붉은 빛을 발했다.
[재시도해 주십시오.] 한수영은 다시 장치에 홍채를 인식시켰고, 이내 철문이 소리도 없이 가로로 열렸다.
“뭐길래 이런 게 있어?”
김독자가 미심쩍은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지문도 아니고 홍채 인식? 국가에 홍채가 등록되어 있는 건 알파뿐이다. 그리고 여기는 어딜 봐도 정부 기관은 아니다. 정부 기관도 아닌 데서 홍채 정보를 가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깜짝 놀랄 걸.”
과연, 얼마나 어마어마한 게 숨어있을지. 김독자는 한수영의 뒤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고, 곧바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알파 페로몬.
온갖 종류의 알파 페로몬이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머리가 어찔해진다. 우성 오메가인 김독자로서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페로몬이 홍수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억제제를 꼬박꼬박 먹고 있었던 덕에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었다. 열성이었다면 진작에 이성을 잃고 안으로 뛰어들었을 정도의 양. 뭐지, 여긴? 김독자는 십수 년간 알파 페로몬을 느낄 일이 거의 없었다. 비단 김독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20년 전 알파 등록제가 시행되고, 페로몬 억제기구의 착용이 의무화된 이후로 알파가 아무 데서나 페로몬을 내뿜는 것은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 그 뒤로는, 한 번도…….
불쾌한 듯 고양이처럼 송곳니를 드러내던 한수영이 손목에 찬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따라와.”
김독자는 홀린 듯이 그 뒤를 따랐다. 온갖 향들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우스운 것은, 개중 태반이 불쾌한 향이었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어쭙잖은 알파들만 모아놓은 건가. 그래놓고 억제기구까지 풀어놨다고? 이해가 안 가는데. 걸어가던 한수영이 1863번이라는 번호가 붙은 문 앞에 서더니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 들어오라 손짓하기에 김독자는 순순히 그에 따랐다. 찰칵,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눈앞에는 기이하게도 방을 반으로 가르는 철창이 있었다. 뭐야? 감옥이야? 점점 더 이해할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도 여기는 페로몬이…… 없군. 숨쉬기가 한결 낫다. 후우, 크게 숨을 들이쉬며 철창 가까이로 다가간 김독자는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아니, 어째서? 왜?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옆에 선 한수영이 킬킬 웃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거 봐. 대박이라고 했지.”
철창 안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유중혁이었다.
김독자는 몸을 떨며 철창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가죽장갑 너머까지 스며오는 듯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꿰뚫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유중혁. 유중혁이었다. 10년, 아니…… 14년 만의 재회였다. 김독자는 말을 꺼낼 정신머리조차 잊은 채 하염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다.
“유중혁. 이 녀석이야.”
벽에 기대선 한수영이 철창 안에 대고 말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눈으로 탐색하듯 김독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김독자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 한수영. 이게, 이게 어떻게 된……”
“어떻게 된 거냐고?”
키득거리며 웃더니 팔짱을 끼고 유중혁을 빤히 쳐다본다. 김독자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한수영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딘가 미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시선으로……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뭐 하는 데냐면.”
천천히 입을 연 한수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알파 전시장이야.”
“알파…… 뭐?”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나. 김독자가 미간을 좁히며 눈을 깜빡이자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 그대로야. 알파들을 전시해놓고, 오메가들이 구경을 와. 그리고, 알파를 데려가.”
“……그게 무슨?”
한수영은 팔짱을 낀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며 인상을 썼다.
“씨를 사고파는 거라고.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머릿속이 멍해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래. 한국에도 정자 은행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베타들을 위한 것이고…… 또한 기증의 형태이며, 받고자 하는 사람이 선택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뭐? 사고팔아? 그것도 알파를?
“불법이잖아?”
당연한 의문이 튀어나갔다. 하지만 한수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귀를 후볐다.
“뭐 언제는 깨끗한 짓만 했나. 사람들이 다 그렇지 뭐.”
김독자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오메가들이 얼마나 추잡한 짓들을 많이 하는지는 알고 있다. 비단 오메가뿐만이 아니라 돈 좀 있고 권력 좀 있는 자들이라면 범법 행위 한두 개쯤은 우습지도 않게 저지르는 게 일상이지. 김독자는 더 말해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한수영은 별다른 첨언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나머지는 둘이서 잘 얘기하라고. 난 자리 비켜줄 테니까.”
“뭐, 뭐? 야, 잠깐……”
쾅. 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김독자는 황망한 심정으로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다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철창 안에는 여전히 유중혁이 앉아 있었다. 미치겠네, 시발.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이마를 짚으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일단 앉지.”
퍼뜩 놀라 고개를 드니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이 꽂혀들었다. 김독자는 거부하지 못하고 옆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다. 긴장한 탓에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몇 번이나 실패한 끝에 간신히 장갑을 벗어내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철창을 사이에 두고 숨 막히는 침묵이 오갔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그야말로 샅샅이 관찰하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에 김독자는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시발,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리고 뒤늦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여기, 알파 전시장이랬지.
유중혁…… 베타 아니었어?
“너……”
“초면인데 마음대로 부르는군.”
“……유중혁 씨.”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에 김독자는 황급히 호칭을 수정했다. 그런데, 젠장. 초면이라니. 이 자식…… 날 기억 못 하는 모양인데. 조금 억울해졌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잊어버려? 괘씸한 놈……. 하지만 일단은 대화를 나눠야 했기에 그에 응해주기로 했다.
“베타…… 아니었습니까?”
낯선 존댓말이 입 안을 빠져나갔다. 유중혁은 느릿하게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김독자를 바라보다가.
“생각보다 이해가 느린데.”
뭔 개소리야, 이 자식이. 김독자는 인상을 팍 쓰며 그 잘생긴 얼굴을 노려봤다. 예나 지금이나 싸가지 없는 건 똑같은 놈이다. 하지만 그 말 덕분에 냉수를 마신 것처럼 이성이 되돌아왔다. 김독자는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알파 전시장이다. 그럼 당연하게도 알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유중혁은 알파일 것이다……. 당연한 얘기군. 젠장.
“왜 베타라고 속였지?”
나도 반말할 거다, 인마. 김독자의 치기어린 목소리에 유중혁이 눈썹을 꿈틀댔으나 이내 묵직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에서 김독자는 가만히 답을 유추해냈다.
사실, 알파의 삶에는 꽤나 귀찮은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매년 정기적으로 정부에 신상정보를 재등록해야 하며, 페로몬 억제기구를 필수로 착용해야 하고, 아주 특수한 경우에 한해서지만 공공장소에서 입마개를 해야 할 때도 있다.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지나친 관심의 시선은 덤이다. 오메가로서 살아온 김독자는 앞의 것들은 몰라도 후자는 지겹도록 느껴온 사람이었기에 그 심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그래도 알파 등록을 하는 게 더 쉬웠을 텐데. 정부에서 지원을 많이 해 주는 데다, 베타라고 속이고 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페로몬을 완전히 갈무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억제기구를 차도 페로몬은 완전히 눌러지지 않는다. 오직 우성 알파들, 그 중에서도 일부만이 자신의 페로몬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간에 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 페로몬은, 그것을 방증해내고 있었다.
유중혁은, 우성 알파다. 그것도 페로몬의 완벽한 컨트롤이 가능한.
김독자는 순간 황홀한 감각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유중혁이 우성 알파라고? 그 유중혁이? 믿을 수 없는 기적 같은 현실에 김독자는 하,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지?”
유중혁의 물음에 김독자는 눈을 가리며 조금 더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혹시 오늘이 내 생일인가? 14년 동안 쫓아온 놈을 드디어 만났는데, 그 녀석이 우성 알파라고? 기가 막힌다. 아주 끝내준다. 기분이 몹시 좋아진 탓에 하마터면 속내를 그대로 답할 뻔했으나…… 이성의 끈이 충실하게 김독자를 붙잡았다. 안 되지. 알파랑 기싸움에서 지면. 오메가 가오가 있잖냐, 김독자.
“몰라도 돼.”
“흠.”
유중혁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대로 잠시 김독자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김독자.”
“……응?”
뭐야? 내 이름을 알고 있어? 어떻게? 그런 의문을 읽은 건지 유중혁이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다. 내가 너를 선택한 거지.”
“……뭔 소리야?”
이번에는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유중혁이 의자에서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철창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온다.
응? ……으응?
“뭐, 뭐야, 철창……”
“애초부터 안 잠겨 있었다.”
“그럼 왜 그 안에 들어가 있던 건데?”
“그게 규칙이래서.”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황당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유중혁이 손을 뻗었다. 그대로 김독자의 팔을 붙잡아 의자에서 일으켜 세운다. 얼떨결에 붙잡혀 올려진 꼴이 된 김독자는 코앞에 있는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도 잘 알 텐데. 내가 굳이 이런 곳에 와서 스스로를 팔아야 할 정도로 돈이 궁하지 않다는 건.”
김독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나신 톱스타 씨. 근데 인마, 알고 있냐? 네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게 나다. 시발, 은혜도 기억 못 하는 새끼……. 김독자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던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나를 애타게 찾는 오메가가 있다고 들어서. 그래서 찾아온 거다. 너를.”
“…….”
갈수록 태산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를 기억도 못 하면서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다. 돈도, 추억도 필요하지 않은데 나는 왜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한수영이 연결해 준 거냐?”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그 말에 딸깍, 스위치가 눌렸다.
김독자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유중혁의 손을 쳐냈다. 그대로 구겨진 코트 자락을 털어내고, 목을 조르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내고.
“나한테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식으로 굴어봤자 좋은 대답 못 얻을 거다.”
백 퍼센트 진담은 아니었다. 김독자는 유중혁이 강압적으로 요구한다면…… 솔직히 끝까지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김독자에게 있어서 유중혁은 그만큼 대단한 존재였으니까. 카펫에 흩뿌려져 눅진하게 흡수되어가던 시뻘건 액체와, 귀가 찢어질 듯 울리던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속절없이 감옥에 수감되던 어머니의 힘없는 어깨를 기억한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 고독한 기분을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랬던 김독자에게 스스로 일어서고, 혼자서도 모든 상황을 개척해 나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간 유중혁의 뒷모습은…… 구원자나 다름없었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인 구원이 아닐지라도. 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순순히 배를 까뒤집고 누우라고? 웃기지 마, 유중혁. 분명 나는 오랜 시간 너를 찾았고, 다시 만나고 싶어 했어. 하지만 나는 오메가고, 동시에 사업가다. 내가 온전히 너에게 휘둘릴 거라고 기대하지 마. 기선제압은 내 전문 분야다. 이리저리 치이기만 하며 살아왔다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유중혁이 김독자의 눈을 들여다봤다. 의중을 파악해내려는 듯 집요한 시선. 하지만 김독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뻔뻔한 얼굴로 웃으며 그 눈을 마주했다.
“……좋아. 얘기하겠다.”
유중혁이 먼저 한 발짝 숙이고 들어왔다. 김독자는 옅은 쾌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디, 말해봐. 유중혁은 조금 물러나 팔짱을 낀 채 김독자를 바라봤다.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나는 원래 베타였다.”
흐음? 이건 무슨 소릴까. 김독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알파로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두 달 정도 됐나.”
“뭐?”
김독자는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까지 늦게 발현하는 경우가 있던가? 알파와 오메가는 일반적으로 아무리 늦어도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청소년기 이전에 발현이 확정된다. 여성 알파와 남성 오메가의 경우 생식기 구조가 다르므로 출생 시에 이미 밝혀지는 경우가 많지만, 남성 알파와 여성 오메가는…… 확실히 구별이 쉽지 않다. 그래, ‘사이클’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 베타로서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내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더군.”
그렇게 말하는 유중혁의 미간이 슬 좁혀졌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대단히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 김독자는 유중혁의 말을 이해했다. 페로몬 억제기구는 통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 그 개발이 더디다. 팔찌나 발찌 등 장신구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크기나 모양이 일정해야 했기에…… 말하자면, 누가 봐도 페로몬 억제기구임을 알아볼 수 있는 모양새인 것이다. 유중혁처럼 스크린에 잡혀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 억제기구는 대단히 큰 장애물일 것이다. 사실 두 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들키지 않은 것이 더 용하다. 독한 놈.
“그래서? 계속 말해봐.”
“네 힘을 빌리고 싶다.”
김독자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 힘이라. 유중혁이 자신을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김독자라는 오메가가…… 오메가치고 그다지 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 텐데. 그러한 의문을 담아 바라보자 유중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올림포스>가 개발 중인 체내 이식형 페로몬 억제기구. 출시되지는 않았지만, 샘플은 완성됐다고 들었다.”
이 녀석이 그걸 알고 있다고? 소식이 그렇게 빨랐나. 하기야 뭐, 극비사항으로 쉬쉬하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곧 <올림포스>는 네가 먹어치울 계획이겠지. 틀린가?”
“…….”
예리한 추론에 김독자는 조금 웃었다. 여전히 장난 아닌데, 유중혁. 오싹하게 짜릿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저도 모르게 입이 말라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연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쪽 업계에도 관심이 있나봐?”
“제법 있지.”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래. <올림포스>는 곧 <김독자 컴퍼니>랑 합병될 거다. 정확히는 내일.”
아니, 12시가 지났으니 오늘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능청스레 말하며 웃자 유중혁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페이스가 빠르군.”
“왜? 기대 이상이야?”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인상을 찌푸리며 다른 말을 꺼냈다.
“어쨌든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 샘플이 필요해. 그걸 네게서 제공받고 싶다.”
“흠.”
김독자의 사업가적 두뇌가 빠르게 굴러갔다. 그걸 내어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뭘 받느냐가 관건인데. 순간 머릿속에 여러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온갖 잔소리를 쏟아내던 친척들의 얼굴. 이건…… 꽤 괜찮은 방법이겠는데. 금방 생각을 마친 김독자의 입꼬리가 알랑거리며 올라갔다.
“맨입으로 달라고는 안 하겠지?”
“……당연하다. 뭘 원하지?”
김독자의 표정을 보고 잠깐 멈칫했던 유중혁이 대답했다. 빚지는 거 싫어하는 건 여전하네, 유중혁. 그걸 이용해서, 이번엔…… 내가 원하는 걸 좀 받아내 볼까.
“내 조건은 이거야.”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유중혁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래서 김독자는 계속해서 지껄였다.
“나랑 결혼해.”
“…….”
유중혁의 표정이 대단히 이상해졌다. 처음엔 충격으로 일그러지나 싶더니 곧 어이가 없다는 듯 수차례 눈을 깜빡거리고. 말을 고르지 못해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모양새가 제법 볼만해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미친 건가?”
“제정신이거든.”
또박또박 대답하자 유중혁이 인상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는데. 고작 억제기구 하나 제공해주는 대가로 결혼? 평생을 끌려다니라고?”
“누가 평생이래? 중간에 이혼하면 되지.”
“무슨…….”
상상도 못한 또라이를 봤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억울하네, 유중혁. 내가 뭐 없는 사람 등쳐먹는 악덕 사업가인 줄 알아? 이래봬도 자선사업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거든.
“잠깐 주변 눈을 속이자는 얘기야. 이건 너한테도 도움이 되는 얘기다, 유중혁. 맞지?”
정곡을 찔린 것인지 유중혁이 입을 다물었다. 김독자는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아직 안 죽었다니까. 정확하게 본 것이 틀림없었다.
유중혁은, 왜 굳이 베타로 살고 싶어 하는가? 알파로 사는 것이 훨씬 쉽고 속 편하다. 알파라서 받게 될 주변의 지나친 관심쯤이야 이미 톱스타인 지금도 넘칠 만큼 받고 있을 터였다. 신상정보 재등록? 약간의 귀찮음만 감내하면 된다. 페로몬 억제기구야 조금 번거롭긴 하겠지만 어차피 베타로서 위장하려면 죽을 때까지 차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장점이 없는데 왜 굳이, 베타로?
그래. 이 녀석은, 오메가와 엮이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것도 죽도록.
김독자는 14년 전의 유중혁을 떠올렸다. 분노로 일렁이던 눈동자가 선명했다. 그 당시에도 녀석은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다. 하지만 속해 있던 소속사가 대형 사기를 치고선 유일한 소속생이었던 유중혁에게 그 빚을 떠넘기고 도주해버렸다. 애매한 계약관계 탓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사장이 오메가였지. 그것도 꽤나 유명한. 김독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대체 오메가란 녀석들은 왜 다 그 모양인 걸까. 아니, 돈과 권력이 문제인 걸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까마득한 빚을 그대로 떠안은 14살의 유중혁에게 변제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런 유중혁을 구제하는 척하며 다시 종속노예계약을 맺으려 한 회사의 사장도 오메가였다. 우연이라기엔 기가 막히지. 그 수가 얼마 되지도 않는 오메가에게 두 번이나 당하다니, 운도 없게. 그런 일을 겪었으니 나였어도 오메가라면 이를 갈았을 거다.
어쨌든, 그렇게 늪으로 빠져가던 유중혁을 뭍으로 간신히 끌어올린 것이 김독자였다. 정확히는 제법 이름 있는 집안의 오메가였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탁한 것이었지만. 김독자의 아버지는 개새끼였고 능력도 없었으나 집안과 재력은 있는 인간이었다. 김독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간절한 요청을 했으며, 아버지는 그것을 수락했다.
김독자는 눈앞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14년 전 중학생이었던 앳된 얼굴을 그 위에 겹쳐보며.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무조건 알짱거리면서 얼굴 도장이라도 박아둘걸. 유중혁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늘에 있었고, 아버지의 회사가 앞에 나서서 돕는 척했으니까. 그 때는 회사 이름도 달랐으니 아버지와 자신을 겹쳐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 끝까지 저에게 도움이라곤 안 되는 인간이시군요.
“유중혁. 너는 알파인 걸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은 거야. 들켰다간 오메가들이 잔뜩 달라붙을 테니까. 그렇지? 너처럼 잘난 형질만 빼다 박은 알파를 얼마나 많은 놈들이 노릴까.”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톱스타 하나 끌어내리는 것쯤 일도 아닌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유중혁은 침묵으로서 긍정했다. 그 얼굴을 보며 김독자는 옅게 웃었다.
“평생을 베타인 척 하며 어렵게 살 각오를 할 정도로 오메가가 싫은 거지, 유중혁.”
“……그래.”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말하자면, 기간제 위장 결혼으로. 유중혁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김독자는 그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할 말은 모두 전달했으니 선택은 유중혁의 몫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가 말문을 뗐다.
“나와 결혼한다면 구설수에 오를 텐데. 베타와 결혼한 오메가라고 난리가 날 거다.”
“이미 욕은 잔뜩 듣고 있거든. 더 들어봤자 티도 안 날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유중혁은 미미하게 인상을 구기며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대중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입장이다. 이혼 경력이 남는 것은 솔직히 내키지 않는군.”
“요즘 이혼 안 해본 연예인도 있어? 그거 재밌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야 물론 유중혁은 자신의 개인사를 철저히 감추는 편이고, 그러한 신비주의 덕에 이미지가 괜찮게 잡혀 있었다. 그러니 이혼 경력은 그의 말대로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또 다시 생각했다.
“유중혁.”
짙은 고뇌가 담긴 시선이 되돌아왔다.
“너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
“나는 너랑 거래를 하려는 게 아니야. 왜냐면…… 너는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잖아?”
김독자는 말갛게 웃었다. 유중혁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페로몬 억제기구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그토록 싫어하는 오메가 중 하나일 자신을 찾아올 정도로. 애초에 거기서부터 거래의 여지는 없는 것이었다. 저 쪽이 간절하게 원하는 걸, 김독자가 손에 쥐고 있지 않은가.
“유중혁. 나는 네게 호의를 보여주고 있는 거야.”
“……김독자.”
“나를 이용해.”
얼마든지 이용당해 줄 테니까. 뱉어지지 않은 말을 읽어낸 듯 유중혁이 애매한 얼굴을 했다.
“김독자.”
“응?”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이득은 뭐지?”
유중혁의 눈이 희미하게 빛났다.
“너는 사업가지. 그것도 아주 공격적인. 흐름을 읽는 눈이 좋고, 판단력도 있고, 손속도 좋고.”
“본인을 앞에 두고 칭찬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 비행기 태워주는 건가?”
“이해가 안 가서 묻는 거다.”
김독자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하여간 정말이지…… 빚지는 걸 싫어하는 놈이다. 그냥 호의라고, 나는 네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어릴 적의 네게 빚진 것이 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도, 오롯한 너를 짓밟고 진흙탕에 처박았던 그 지긋지긋한 ‘오메가’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다고. <베다>도 <파피루스>도 <올림포스>도 다, 너를 대신해서 한 복수의 일환이었다고.
그런 말을 한다고, 곧이곧대로 믿어줄까. 절대로 감정 따위에 흔들릴 것 같지 않은 눈을 한 이 사내가.
그래서 김독자는 말했다.
“유중혁. 넌 말해줘도 이해 못 해.”
곧게 뻗은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뭐, 인마. 그렇게 쳐다봐서 어쩔 건데. 김독자는 쏘아보는 시선을 꼿꼿이 받아내며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일단은 마음껏 오해하게 둘 생각이었다. 우리한테는…… 시간이 아주 많을 것 같거든.
“결정했어? 내 말대로 할지?”
“…….”
유중혁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내려앉은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가, 다물려 있던 입매가 풀리며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고.
반짝 떠진 눈이 다시 김독자를 향했다.
“결혼 기간은?”
그 말에 김독자는 눈을 한껏 휘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