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
* 김독자와 유중혁이 국문학과 학생이고 사귀고 있습니다... 클리셰 퍼부음 주의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3
김독자는 화가 나 있었다.
붉은색 펜으로 이곳저곳이 고쳐져 있는 원고를 팔락팔락 넘기다가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책상에 엎어져 눈을 감고 있는 옆얼굴, 반짝거리는 오후의 햇살이 깎은 듯한 미간과 콧날을 따라 미끄러졌다. 한숨을 폭 쉬며 제법 두터운 종이뭉치를 내려놓은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안 자는 거 다 아니까 일어나. 유중혁.”
제 말에 유중혁이 한쪽 눈만 살짝 떠서 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피식 웃고 다시 감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김독자는 울컥하며 손으로 그의 너른 등짝을 때렸다.
“야, 일어나라고. 지금 잠이 오냐?”
“잘 온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두세 번 더 독촉하자 그제야 유중혁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쭈욱 폈다. 기다란 상반신이 늘어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조금 나른한 시선이 김독자를 향했다.
“일어났다. 왜?”
“…….”
번듯한 얼굴에 홀려 잠시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고 올라왔다. 김독자는 미간을 잔뜩 구기며 원고를 돌돌 말아 테이블에 탁탁 내리쳤다. 희곡 수업 과제로 2주간 쓴 연극 대본이었다. 아직 초안이므로 고칠 부분이 많은 것은 당연했고, 유중혁에게 먼저 읽어봐 달라고 부탁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누가 교정을 봐 달라고 했냐! 감상을 들려 달라니까!”
유중혁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대로 손을 뻗어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 넘겨주고, 재밌다는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 유중혁 이 새끼 진짜……. 김독자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손을 밀어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유중혁과 얼떨결에 사귀기 시작한지도 반 년 정도가 지났다. 해가 넘어가 벚꽃이 필 준비를 하는 봄이었고, 그들은 2학년이 되었다. 같은 과였지만 듣고 싶어 하는 과목이 조금 달라 이번 학기는 수업 두 개만을 함께 듣고 있었고…… 이 희곡 수업은 김독자 혼자 듣는 수업이었다. 그러니 수업을 듣지 않는 유중혁의 눈으로 본 감상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넌 항상 그런 식이지, 이 자식아. 왜 감상을 안 들려주는 건데?”
그 전에도 유중혁에게 자신의 글을 읽어봐 줄 것을 부탁한 것은 여러 차례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쓴 리포트 등을 무려 ‘과탑’인 유중혁에게 보여주는 것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으나, 그가 자신의 글을 읽고 비웃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유중혁은 그의 글을 전혀 비웃는 법이 없었다. 그러면 뭐 하냐고, 읽고 반응이 없는데. 다시 생각해도 부아가 치미는 일이었다. 자타공인 문법 마스터인 자식이 봐주니 확실히 교정은 되었지만……. 그걸 바란 게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한껏 담아 매섭게 노려보자 유중혁이 애매한 얼굴을 했다.
“……정말 이유가 궁금한가?”
“어. 궁금해. 그러니까 말해. 지금. 당장.”
팔짱을 끼고 어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자, 유중혁이 턱을 괸 손을 풀고 제 입가를 매만졌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반 년, 아니, 1년을 넘게 봤으니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제법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뭐야, 뭔데 그렇게 고민해? 설마 내 글이 그렇게 형편없었나? 그래서 말하면 상처받을까 봐 말 안 한 건가? ……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금방 접어두었다. 이 자식이 그렇게 섬세한 놈일 것 같지는 않……
“내 감상은 객관적이지가 않아. 그래서 소용이 없을 거다.”
“……응? 뭔 소리야?”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와 김독자는 눈을 껌뻑였다. 객관성의 화신 같은 놈이 뭐라는 거야 지금. 지난 학기 조별과제에서 조원들의 글을 가차 없이 쳐내버리던 놈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헛소리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자 유중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왔다.
“나는 네가 쓴 글이면 다 좋다. 그러니까 별로 도움이 안 될걸.”
“……이, 이…… 미친…….”
아, 미친 새끼야!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잘생긴 얼굴을 밀쳐냈다. 진짜 이상한 타이밍에 훅 치고 들어오는 새끼. 김독자는 유중혁을 저 멀리 밀어내고 황급히 몸을 돌려 심장께를 내리눌렀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귓가에 심장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이 미친놈이 진짜 뭔 소릴 하나 했더니……. 저럴 땐 왜 저렇게 솔직한 건데? 밀쳐낸 보람도 없이 그의 얼굴이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러지, 김독자.”
그러니까 네가 지금…… 억울한 마음에 왈칵 화를 내려 고개를 돌렸다가 뺨에 닿아오는 손가락에 김독자가 우뚝 굳었다. 따뜻한, 아니, 때로는 조금 뜨겁다 느껴질 정도로 열기가 느껴지는 손가락. 입을 벌린 채로 멈춰버린 김독자를 보던 유중혁이 픽 웃으며 반대쪽 뺨에 입술을 살짝 가져다댔다가 떼었다.
“나는 네 글의 감성이 좋다. 지극히 외로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아주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게 좋아.”
“…….”
뺨에 닿은 부드러운 무언가에 놀라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잠시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였나. 솔직하고 진심어린 말에 가슴 한 구석이 조금 뭉클해졌다. 내 글이, 다른 사람의 눈엔 그렇게 보이는구나. 다른 이보다도 유중혁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기뻤다.
“대답 안 해주면 화난 얼굴 하는 게 귀여웠는데. 이제 더 못 보겠군.”
“…….”
야, 이 새끼야! 결국 유중혁은 김독자의 매서운 손맛을 보고 말았다.
유중혁은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담요 한 뭉치를 꺼내왔다. 복실복실한 감촉을 잠깐 쓸어보고는 소리 나지 않게 펼쳐 소파에 누운 김독자의 몸 위로 덮어주고. 옅게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풀어지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곁에 앉을까 싶었지만 제 체중으로 앉는다면 분명히 소리가 날 것이다. 혹시나 깰까 소파에 앉는 대신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얀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인공조명 아래에서도 하얗게 빛나는 뺨. 그 얼굴은 햇살을 받으면 더 눈부시게 빛났고, 자신을 보며 미소 지을 때는……. 더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김독자는 그에게 있어 어떤 수식어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토록 책을 많이 읽어도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군. 유중혁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 끝으로 그의 얼굴을 덧그렸다.
“아무리 편해졌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막 잠들어도 되는 건가. 애인을 눈앞에 두고.”
가벼운 농담이었다. 김독자는 아무 데서나 쉬이 잠드는 법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피곤하거나 술에 취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점도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온 사람의 버릇 같은 것일까. 사귀기 시작한 초기에는 과제로 밤을 새서 잠에 절여진 얼굴을 하고도, 자고 가라는 말에 절대 안 된다며 고개를 휘휘 젓고 기어코 자취방으로 돌아가 잠을 자던 그였다. 그랬던 김독자가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자신만의 특권일 테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유중혁이 몸을 일으켰다.
눈을 돌리자 기다란 책상 위에 놓인 전공서적과 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최소 두 번은 넘게 읽어 여러 색으로 밑줄이 쳐진 책, 가지런한 글씨로 정리된 노트. 필기를 정리하다가 잠깐 눕고 그새 잠든 모양이었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김독자도 참…… 쉴 틈 없이 열심히 사는 녀석이다. 저와는 꽤 다른 방향으로 열심히 사는 인간이라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같은 책을 두 번 이상 읽는 일이 드물었던 유중혁과는 달리 김독자는 마음에 드는 글을 몇 번이고 읽곤 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과제로 나온 책도 여러 번 읽고, 읽을 때마다 감상이 달라져 여러 관점으로 레포트를 쓸 수 있다는 소릴 했었지. 유중혁에게 책을 다시 읽는 버릇이 생긴 것도 그 말을 들은 무렵 즈음이었을까.
형광펜 옆에는 출력된 감상 레포트가 놓여 있었다. 처음 보는 것이군. 자신과 함께 듣는 수업의 과제물이었다. 궁금해진 유중혁은 책상에 적당히 걸터앉아 김독자의 레포트를 읽기 시작했다.
“으음…….”
뒤편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레포트의 두께가 의외로 제법 되어 천천히 읽던 차였다. 종이를 책상에 내려두고 돌아서자 상반신을 일으키며 눈을 비비는 김독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깜빡 잠들었네. 으으……. 얼마나 잤지?”
“얼마 안 됐다. 더 자라.”
“아냐, 집에 가야지. 헉. 벌써 10시네.”
시계를 쳐다본 김독자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야, 깨워주지 지금까지 냅뒀어? 애초에 9시 반에 졸리다고 누운 네 쪽이 잘못이다. 아니 나는 잠깐 눈만 감고 있으려고 했지……. 몸 위에 덮인 담요를 잠시 바라보다 걷어내고 일어나는 김독자의 뒤로 다가가 가볍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고 가라.”
“어, 어? 야, 안 돼.”
“안될 건 뭐지.”
몸을 조금 숙여 마른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대자 안고 있는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주, 중혁아. 이것 좀 놓고……. 대답 없이 이를 조금 세워 살짝 깨물자 김독자가 후닥닥 돌아서며 제 어깨를 짚었다.
“유, 유중혁, 읏……”
이어지려던 말이 입술이 맞닿으며 무참히 삼켜졌다. 부드럽게 아랫입술을 핥아 올리자 아, 하는 희미한 신음소리와 함께 입이 벌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혀를 밀어 넣으며 손으로 뺨을 감싸자 어깨에 올려져 있던 김독자의 손가락이 제 옷을 꽈악 움켜쥐는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은 그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목에 두르고선 허리를 감싼 채 입맞춤을 이어갔다. 눈을 꼭 감고선 매달리듯이 저를 붙잡고 혀를 얽어오던 김독자가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든 듯 고개를 뒤로 물렀다. 뭐지? 가벼운 의문을 표하며 바라보자 그가 붉어진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물론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손도 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안 된다고 할 건 뭔가. 억울하군. 하지만 유중혁은 그를 가둬두듯 붙잡고 있던 팔을 풀고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딱히 싫다는데 억지로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눈가가 붉어진 채 저를 바라보며 연신 눈을 깜빡이는 걸 보니. 저 안 된다는 말도 그리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중혁은 배부른 맹수처럼 느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고 가라, 김독자.”
“야, 너 내 말을 어디로 들어 처먹은……”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자고 가. 손만 잡고 자겠다.”
“……뭔 인소 남주 같은 소리냐?”
소름이 돋는다는 듯 두 손으로 팔을 문지르던 김독자가 결국 현실과 타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자신의 손만 잡고 편안하게 잠에 빠져든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껴야 했다.
“아, 선배!”
문을 열며 들어오는 경쾌한 목소리에 김독자가 고개를 들었다. 국문학과 신입생인 이지혜였다. 김독자는 딱히 후배들과 깊이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와는 같은 동아리였기에 꽤 안면이 있었다. 오빠라는 호칭은 징그러워서 싫다며, 선배라고 부르는 주제에 말은 꼬박꼬박 반말인 게 웃기는 녀석이다.
“어라. 웬일로 혼자야? 선생님은 안 보이네?”
선생님이라는 말에 김독자가 코웃음을 쳤다. 동아리에서 굴러다니던 유중혁의 글을 읽은 이지혜가 감격한 얼굴로 저를 붙잡고 늘어지던 것이 떠올랐다. 독자 선배! 이 글 쓴 사람 누구야? 응? 나 완전 팬 될 것 같아! 끈질기게 달라붙기에 거, 같은 동아리에 유중혁이라는 놈 있다, 답해주자 그 뒤로 계속 저 상태였다. 실제로 유중혁을 만난 뒤에는 글 쓰는 요령 좀 알려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을 한 듯했고, 그게 어지간히 귀찮았는지 유중혁이 적당히 던져준 매뉴얼 같은 걸 들고 생글생글 웃었던가. 아니꼽기 그지없었다. 유중혁 재수 없는 새끼……. 특이한 것이 있다면 유중혁의 얼굴을 보고 따라다니지는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에이, 아쉽다. 둘이 붙어있는 거 보는 게 제일 재밌는데.”
“뭔 소리야.”
눈썹을 팍 모으며 째려보자 이지혜가 딴청을 피웠다. 오늘은 동아리의 정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고, 유중혁은 집에 일이 있어 참석이 어렵다고 미리 얘기를 해둔 뒤였다. 잠시 이지혜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자 다시금 문이 열리며 셔츠에 청바지를 맵시 있게 입은 미모의 여성이 들어왔다.
“상아 언니!”
이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총총 다가갔다. 유상아는 생긋 웃으며 지혜를 토닥여주고 김독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어요? 개강하고는 처음 뵙네요.”
“아, 예. 오랜만입니다. 방학은 잘 보내셨나요?”
영문학과 3학년인 유상아는 과를 넘어 캠퍼스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점이 김독자에게 큰 의미가 있지는 않았으나, 그런 그녀가 별로 인기도 없는, 그저 책 읽는 동아리인 이곳에 입부하고 싶다고 했을 때는 꽤 놀라긴 했었다. 덕분에 그녀를 따라 입부하려는 사람들이 한 트럭쯤 몰려왔었지만……
“야, 시끄러! 다 나가!”
유상아의 뒤를 따라 들어온 올림머리 여성이 문을 쾅 닫았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문 너머로 손가락 욕설을 해 보인 그녀는 총총 다가와 김독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독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아, 으응. 잘 지냈지. 너는?”
정희원은 하하 웃으며 팔짱을 꼈다. 보시다시피 오늘도 한 무리 혼내주고 오는 길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 뒤로 유상아가 다가와 방긋 웃었다. 두 사람은 대학 입학 전부터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유상아를 따라다니는 극성 인간들은 정희원이 눈을 부라리며 쫓아내고 있는 듯하고……. 덕분에 독서에는 관심도 없는 부원이 부지기수로 늘어나는 건 면할 수 있었다. 방학동안 뭘 했느냐, 하는 소소한 얘기를 나누고 있자 정시에 문이 열리며 거구의 남성이 들어왔다. 문이 좁아 보일 정도로 커다란 체구였다.
“어, 현성아. 어서 와.”
“독자야. 잘 지냈어? 아, 다른 분들도 안녕하세요.”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며 커다란 강아지처럼 다가오는 이 남자는 이현성. 짧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인사를 나누는데 피부빛이 그새 조금 어두워진 것 같다. 또 어디서 하드코어 훈련이라도 한 건가, 생각하며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단발머리를 찰랑이는 여성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지각이다. 한수영.”
“아, 미안~. 죄송합니다아~.”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발랄하게 들어오더니 아무데나 털썩 걸터앉는다. 이제야 다 모였네요, 그럼 이번 달 정기 모임 시작합시다. 김독자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저마다 가방에서 책을 한 권씩 꺼냈다. 이 동아리는 간단히 말하면 독서토론부로 매달 모여서 자신이 읽은 책을 한 권씩 소개하고 추천하는 자리였다. 서로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감상을 공유하기도 하고. 각자 취향이 꽤나 달랐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재미있는 추천이 들어올 때가 많아 즐겁게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들 사이가 좋다 보니 매달 말에 있는 모임 날이 아니더라도 함께 밥이나 술을 먹으러 가는 경우도 많았다.
돌아가면서 책을 한 권씩 보여준 소개 시간이 끝나고 자연스럽게 잡담이 이어졌다. 이번 방학 때는 여행을 다녀왔어요, 와 언니 부럽다. 프사에 올린 사진이 그거예요? 멋지던데 저도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아, 근데 오늘 유중혁은 왜 안 왔어?”
“집에 일이 있다던데.”
김독자가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사람들의 눈이 묘하게 가늘어졌다. 이지혜가 킥킥 웃으며 옆자리의 정희원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언니, 선생님 소식 궁금할 땐 다른 사람 거칠 거 없이 독자 선배한테 물어보면 직빵이에요. 직빵.”
“하긴…….”
저를 위아래로 훑으며 의미심장하게 웃는 정희원의 시선에 김독자가 울컥 대꾸했다.
“뭔 소리야. 내가 동아리장이니까 나한테 말하고 가서 알고 있는 거거든.”
“아닌 것 같은데.”
“조용히 해, 한수영.”
눈을 부라렸지만 한수영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둘이 맨날 같이 다니는 거 완전 유명하거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뭘.”
“맞아. 나도 얘기 많이 들었는데. 그렇게 사이가 좋……”
입이 틀어 막혀진 이현성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김독자를 멀뚱히 쳐다봤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뭔 얘기를 하는 거야.
“유명하긴 뭐가 유명해. 거짓말 마.”
“야, 유중혁 같은 놈은 숨쉬기만 해도 유명하거든. 그런 놈이 맨날 같이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당연히 같이 유명해지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유중혁 새끼 좀 작작 잘생기지……. 아직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다들 알고 있는 듯한 분위기인 거야. 억울한 기분이 되어 있는데 손을 떼어낸 이현성이 말했다.
“독자도 꽤 유명하지 않습니까? 선배들 사이에서 귀엽다는 얘기가 도는 걸 들은 것 같은데…….”
“흠…… 독자 씨가 귀엽기는 하죠…….”
유상아의 말에 김독자의 얼굴이 가볍게 달아올랐다. 그걸 본 이지혜가 어!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독자 선배 지금 상아 언니가 칭찬해줘서 얼굴 빨개진 거? 와, 안되겠다. 선생님한테 다 일러야지.”
아니 미친, 뭐 하는 짓이야 진짜.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드는 이지혜를 말리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제법 몸이 날렵한 그녀를 쉽게 제지할 수는 없었다. 야, 이지혜! 그만해! 싫으면 잡아봐라?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빠르게 자판을 두드린 이지혜가 짠, 하며 김독자의 눈앞에 화면을 보여주었다.
[쌤 독자 선배가 바람 피움]
유중혁과의 1대 1 채팅방에 보내진 메시지였다. 아, 이지혜 뭐 하냐고……. 뭔 놈의 바람이야 바람은.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매섭게 째려보자 이지혜가 정희원 뒤로 숨으며 혀를 베 내밀었다. 저거 진짜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뭐, 그래도 그 유중혁이 고작 저런 메시지에 답장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어엉? 쌤 지금 여기 오고 있다는데? 거의 다 왔대.”
“뭐? 유중혁 온다고?”
정희원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김독자도 처음 듣는 얘기에 얼떨떨한 표정을 하자, 한수영이 킥킥 웃었다.
“애인이 바람피운다니까 바로 달려오는 건가? 유중혁 이거 완전 사랑꾼이었구만? 안 그렇게 생겨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독자 씨. 괜찮아요. 저희는 아무런 편견도 없고……”
“맞아, 김독자. 솔직히 유중혁 정도면 같은 남자여도 뭐. 그럴 수 있지.”
“동의합니다. 중혁이 얼굴이면……”
아니 점점 더 무슨 맥락인데 이거. 계속 이어지는 얘기에 김독자의 표정이 점점 애매하게 구겨지다가 결국 폭발했다.
“아, 글쎄 유중혁이랑은 그냥 친구라니까요!”
버럭 외쳤는데 갑자기 주변 공기가 5도쯤 내려간 기분이 들었다. 엥. 뭐지?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그들의 표정도 굉장히 애매한 상태였다. 설마……. 김독자가 삐걱거리며 문 쪽을 바라보자 모델 같은 기럭지를 자랑하는 남자가 팔짱을 끼고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방금 뭐라고, 김독자?”
아, ■됐다.
유중혁이 나타나자 상황 정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독자를 데리고 사라지는 유중혁을 사람들이 순순히 보내준 것이지만. 끌려가다시피 나가는 김독자를 보며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는 그들을 보자니 배신감이 밀려왔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김독자는 말없이 저를 끌고 가는 유중혁에게 황급히 가까이 다가갔다.
“야, 중혁아.”
“…….”
대답도, 시선도 돌아오지 않았다. 묵묵히 앞만 보며 빠르게 걸어가는 유중혁을 김독자는 힘겹게 뒤쫓았다. 아, 이 새끼 걸음은 왜 이렇게 빨라서…….
“야! 유중혁! 천천히 좀 가. 못 따라가겠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려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 서늘한 시선이 와 닿았고,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조금 움찔해서 하하 웃었다.
“중혁아. 왜 그래. 화났어?”
이제 와서 화낼 일인가? 처음 사귀기로 했을 때 합의된 거 아니었냐고. 그 날, 얼떨결에 가짜 고백이 현실이 되어 연인이 된 날 김독자는 분명히 말했었다.
‘좋아. 사귀자, 그래. 대신 조건이 있어.’
‘뭐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자.’
그런 조건이었다. 아직은 쉬이 공개적으로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언젠가 말하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역시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유중혁 본인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쓸 놈이 아니지만, 김독자의 생각을 이해했기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왜 이러냐. 응?”
“글쎄…….”
느릿하게 대답한 유중혁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치를 보며 한참이나 뒤쫓아 가자 유중혁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까지 왔고,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시동을 걸며 그가 눈짓했다. 타라. 말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에 김독자가 어정쩡하게 조수석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김독자의 안전벨트를 먼저 매주고 제 것도 매는 걸 보니…… 새끼.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건 잘 해……. 쓸데없이 다정한 놈이다. 조금 분해하고 있자 유중혁이 자신을 빤히 보는 것이 느껴졌다. 김독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봤다.
“중혁아.”
“왜.”
“……삐졌냐?”
유중혁의 굵은 송충이 눈썹이 꿈틀거렸다. 영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다. 김독자는 애써 웃으며 상황을 정리해보려다가…… 아니 근데 왜 내가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해? 지도 동의한 조건 아니었냐고? 치고 올라오는 억울함에 인상을 팍 썼다.
“야, 너도 알겠다고 했었잖아. 근데 이제 와서 왜 이러냐?”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지지 않으려 마주 노려봤다. 한참이나 그렇게 보던 유중혁이 손을 뻗어 김독자의 턱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래도 직접 귀로 듣는 건 기분이 영 안 좋더군.”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춰온다. 야, 유중혁, 얘기 좀…… 해…… 젠장. 유중혁은 키스를 너무 잘 했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고 팔을 들어 어깨에 얹으려다가 흠칫 고개를 뒤로 뺐다. 왜 그러지. 유중혁이 물었고. 이 차…… 선팅 제대로 되어 있지?
사실 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유중혁이 타는 차인데 그런 기본적인 기능조차 없을 리가. 어이없다는 시선이 되돌아오자 김독자가 머쓱하게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은 옅은 한숨을 쉬고선 시동을 걸었다. 집에 가서 마저 얘기하지.
“주, 중혁아. 잠깐만. 야……”
“조용히 해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신발을 벗을 새도 없이 붙들려버렸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부딪쳐오는 유중혁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김독자는 숨을 헐떡였다. 중혁아, 잠, 깐만, 읍……. 벽으로 몰아붙인 채 두 팔 사이에 가둬놓고 잡아먹을 듯이 겹쳐오는 커다란 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중혁아……. 가느다란 소리가 흘러나왔고 한참이나 혀를 얽던 유중혁이 입술을 떼었다.
“윽…… 유중혁. 너 진짜……”
유중혁은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단 들어가지, 낮게 말했다. 누가 할 소린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얌전히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었다. 괜히 신경 건드렸다간 더 크게 당할 것 같아서였다. 거실까지 들어가자 유중혁이 먼저 소파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다. 야, 내려줘, 항의했지만 그는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대로 다시 입술을 겹쳐오려기에 김독자가 두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중혁의 눈이 가늘어지며 무슨 짓이냐는 시선을 쏘아 보냈다. 이 새끼야, 나도 차 타고 오면서 생각한 게 있다고……!
“그러니까 너는 지금…… 우리가 사귀는 사이인데, 남들 앞에서는 아니라고 말해서 화가 난 거지.”
유중혁이 여전히 입이 막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불만 있어. 유중혁.”
그동안 계속 궁금했던 것이기도 했다. 물을 타이밍이 애매해서 계속 말하지 못했을 뿐, 이전부터 신경이 쓰였던 부분이었다. 유중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해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와 함께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눈가를 스치고…… 시발, 존나 잘 생겼네. 김독자는 정신을 다잡고 말을 골랐다.
“너…… 네가 주인공인 소설 있는 거 알지.”
의외의 이야기였는지 유중혁의 날카로운 눈매가 조금 둥글어졌다. 손을 들어 가볍게 김독자의 손을 떼어낸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묻지?”
“아는구만. 그치?”
“……그래, 안다. 왜?”
“작가랑 아는 사이냐?”
아니, 이건 너무 당연한 질문인가. 아는 사이가 아닌데 유중혁 이놈을 그대로 빼다 박은 소설 주인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역시나 유중혁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작가가 궁금한가?”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그런 것도 좀 있긴 하지만……. 김독자는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니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소설 속 유중혁은 정말 말 그대로 ‘유중혁’이었다. 살아 숨 쉬는 유중혁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작가는 유중혁이라는 인간을 정말, 아주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물론, 사소한 버릇이나 말투까지.
“그러니까…… 그 작가랑……”
“…….”
“……친하냐?”
고작 이렇게밖에 물을 수 없다니. 한심함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더 괜찮은 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는 걸 어쩌라고……. 물어놓고 답이 듣기 민망해 시선을 피하며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뭐지? 약한 불안감에 시선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자…….
유중혁은 웃고 있었다.
“왜, 왜 웃냐.”
“김독자.”
“……왜.”
“질투하는 건가?”
“뭐? 누, 누가……”
질투 맞다. 알고 있다. 김독자가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 입에서 직접 듣는 건 꽤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고…… 그랬을 텐데…….
근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김독자.”
낮게 울리는 단어가 기분 좋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즐거운 듯 평소보다 더 낮아진 목소리에 심장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리고,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저 시선. 우묵한 검은 눈동자에 제 얼굴이 오롯이 담기고, 열기로 일렁이는 듯했고.
무슨 말이라도 하려 입을 열자마자 그대로 고개가 가까워졌다. 제 목 뒤를 받친 커다란 손 때문에 물러서지도 못한 채 김독자는 잡아먹는 것 같은 그의 키스를 그대로 받아내야 했다. 대체 자기가 조금 전 한 말의 어느 부분에서 이 자식이 흥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진짜. 하지만 혀가 얽히며 타액이 교환되고 김독자도 결국 욕망에 굴복하고 말았다. 두 팔로 너른 어깨를 끌어안자 커다란 손이 제 허리께에 닿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티셔츠 속을 파고들어 척추 근처를 쓰다듬는 손바닥에서 데일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주, 중혁아. 아……”
“김독자. 누가 그렇게 귀여운 소리를 하라고 했지.”
“미, 미친 새끼…….”
허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퍼붓는 입맞춤에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눈을 떠보니 어느새 소파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고 그 위에 유중혁이 올라타 있었다. 야, 잠깐만, 잠깐만……. 몸을 비틀어봤지만 기둥처럼 단단하게 막고 있는 두 팔 사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숙여 코끝을 맞댄 유중혁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억울한 게 있다, 김독자.”
“또 뭔데, 씨……!”
흘러내린 유중혁의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지럽혔다. 더운 숨결이 바로 앞에서 느껴지고 김독자는 하릴없이 눈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억울하다고 말했지만 꽤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감히 네가 먼저 고백을 했다 이거지.”
“……뭐?”
갑자기 튀어나온 엉뚱한 소리에 김독자의 눈이 커졌다. 이게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리래. 고백? 고배액?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김독자의 의문에도 유중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기울여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김독자가 눈을 꾹 감으며 몸을 움츠리자 낮게 웃고.
“내가 먼저 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물거품이 됐지.”
……뭔 미친 소리다냐. 잠시 어이가 없어진 김독자가 허, 하는 소리를 내자 유중혁이 입을 떼고 눈을 마주쳐왔다.
“웃어?”
“아니, 그…….”
웃긴데 어쩌라고. 이 자식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고백하려고 했는데?”
“흐음…….”
눈가에 입술을 내리누른 유중혁이 그대로 이마, 코, 뺨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감각에 조금 웃음이 나와 키득거리자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멋들어진 러브레터라도 쓰려고 했지.”
러브레터?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아 김독자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묘한 얼굴이 된 유중혁이 그를 내려다보자 김독자가 황급히 말했다. 아니, 너무 안 어울리잖아. 유중혁이랑 러브레터, 아…… 진짜 상상 안 간다……. 피식피식 웃으며 말하는 걸 보자니 약간 짜증이 올라왔다. 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지, 이놈은. 하지만 김독자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유중혁의 글을 잘 알고 있다. 일견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지만 분명한 애정이 담긴 글. 러브레터를 쓰는 유중혁을 상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쓰는 러브레터라면, 아주 멋지고 달콤할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김독자가 손을 뻗어 유중혁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대로 입을 맞추자 잠깐 멈칫했지만 곧 응해 왔다. 손바닥이 바지 위로 다리를 쓸어 올리고, 티셔츠 안쪽으로 침범하고, 입술이 귓가와 쇄골에 내려앉으며. 김독자는 조금은 행복한 기분에 젖어 미소를 지었다.
“중혁아.”
“왜.”
“사랑한다.”
“…….”
유중혁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드는 게 보이는 듯했다. 아, 간지러워. 나도 사랑한다. 응? 사랑한다고. 하하. 속삭이듯 말하며 손가락이 얽혀들었다. 다른 손이 바지를 풀어낼 때, 아직 해소되지 못한 의문을 품은 김독자가 물었다. 근데 중혁아. 그래서 tls123은 누군데? 유중혁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지독한 장난기였다. 우리 형이다. 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이 틀어 막혔다. 아, 유중혁 진짜 개새끼……. 그래도 오늘 정도는, 봐주기로 할까. 어쨌든 내가 좋아하는 놈이니까. 김독자는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