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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고백
과탑 유중혁 방해하려고 고백했다가 얼떨결에 사귀게 되는 이야기

2018.10
* 김독자와 유중혁이 국문학과 신입생이고 썸을 탑니다 클리셰 퍼부음 주의
* 종이책 <멸망하지 않은 세계에서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에 수록했던 버전입니다.











1


    ‘바야흐로, 청춘의 여름이었다.’
    크으으. 김독자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책장을 덮었다. 멋진 이야기였다. 누구라도 붙잡고 그렇지 않느냐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충족감인가.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읽고 난 뒤의 기쁨은 늘 다른 무언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좋은 책에 대단히 기분이 좋아진 채로 싱글거리고 있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좋지?”
    아, 시발. 산통 깨네.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재수 없게 잘생긴 과탑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으음…… 그래도 뭐, 잘생긴 걸 보니 그렇게까지 감상이 와장창 나는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내가 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고개를 휘휘 저은 김독자는 방금 덮은 책을 들어올렸다.
    “다 읽었거든.”
    “흠.”
    김독자의 손에 들린 책의 제목을 바라본 유중혁은 턱을 괴었다. 느긋하게 쳐다보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잘생겼다며 속으로 감탄하던 김독자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눈이 커졌다.
    “그 책 괜찮지. 나도 재밌게 읽었다.”
    “응? 진짜?”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만약 도서관이 아니라 카페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목소리를 낮추고 유중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사실 난 과제로 나온 책이라 기대도 안 했거든. 근데 되게 괜찮네.”
    “그래. 조금 취향은 탈지도 모르겠지만.”
    감상을 나눌 상대가 생긴 김독자는 한참이나 신이 나서 책 이야기를 했다. 유중혁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제 생각을 덧붙였고. 그렇게 실컷 얘기를 한 뒤에야 김독자는, 새삼스럽게 유중혁을 다시 바라보았다.
    유중혁. 김독자가 아주 오랫동안 읽었던 어떤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에 앉아 있는 같은 과 동기의 이름이기도 했고. 처음 강의실에서 녀석을 만났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 지내보고 나니…… 이제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생겼다. 내가 읽었던 그 소설 속 주인공인 ‘유중혁’의 모티브가 된 게 이놈이구나, 하고 말이다.
    그야, 주인공 ‘유중혁’과 과탑 ‘유중혁’은……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똑같았으니까. 잘생긴 것도, 말투도, 성격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똑같다. 주량이 센 것도 마찬가지였고. 문득 개강총회 때, 술에 절어 꾸벅거리던 제 이마를 턱 받쳐주더니 데리고 나와서 집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놈인 것까지…… 똑같지. 피식 웃은 김독자는 유중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내가 시험 끝나면 밥 한번 살게.”
    시험공부며 레포트며 조금씩 도움 받은 것이 있어 뭐라도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중혁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뭘 사먹일까, 잠시 생각하던 김독자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결론을 내렸다. 유중혁은 만두를 좋아하니까, 역시 만두를 먹으러 가야겠다.



    “어, 유중혁.”
    또 마주쳤군. 누가 보면 약속이라도 잡고 만나는 줄 알겠다. 유중혁은 고개를 돌려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고 있는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너도 마실래? 아, 너 콜라 안 좋아하지. 그러더니 묻지도 않고 다른 음료를 뽑아 제게 건넨다. 유중혁은 기가 찼다. 이놈은 대체 뭐란 말인가. 김독자는 늘 유중혁이 말하지도 않은 것들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었다. 도대체 그 자식은 소설에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자세히 썼길래……. tls123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속으로 이를 간 유중혁은 잠자코 김독자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아 들었다. 어쨌든…… 좋아하는 음료수인 건 맞았다.
    “공부하러 왔냐? 넌 과탑인 놈이 뭐가 그렇게 성실해.”
    “인과관계가 반대라고는 생각 안 해봤나?”
    “으응? 음. 그런가?”
    미간을 좁히고선 백팩을 고쳐 메며 먼저 도서관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제는 익숙해진 유중혁도 그의 뒤를 따라 한쪽 테이블에 함께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던 국문학과 녀석들 몇이 수군거렸다. 야, 저기 수석이랑 차석이랑 같이 공부한다. 뭐? 유중혁이 누구랑 같이 공부를 한다고? 저 새끼 책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냐? 물론 유중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가방에서 노트와 책을 꺼내들었다. 오히려 김독자가 그들에게 뭐라 지껄여서 멀리 쫓아내고선 돌아온다. 이제야 좀 성가신 것이 가셨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더니 책을 펼치고. 두 사람은 익숙하게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내일 한 과목만 더 보면 지겨운 중간고사도 끝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네 시간…… 해가 저물고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갔다.
    “으으…….”
    김독자가 먼저 몸을 젖히며 기지개를 폈다. 이미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더니 유중혁에게 고개를 돌리고.
    “유중혁. 나 먼저 들어간다.”
    “그래.”
    간단히 대꾸하자 짐을 챙기던 김독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아, 그리고 내일 시험 끝나면 저녁 먹자. 약속 있냐?”
    “아니.”
    그럼 6시에 무림만두에서 보자. 너 만두 좋아하지? 그 말에 유중혁은 여전히 어이가 없으면서도…… 맞는 말이기에 반박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어쩐지 휘말리는 듯한 느낌이군. 그게 또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게 신기한 일이기는 하지만. 나 간다. 내일 봐. 그렇게 말하며 뭐가 급한지 빠르게 사라지는 김독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유중혁은,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 프린트물이 하나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집어드니 오늘 시험을 치른 과목의 자료였다. 당장은 필요 없겠군, 나중에 돌려줘야……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으려던 유중혁은 문득 손을 멈췄다.
    김독자. 金獨子. 金讀者.
    낙서하듯 적혀 있는 글씨. 틀림없는 김독자의 글씨체였고. 유중혁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느 부모가, 자식 이름에 홀로 독 같은 한자를 쓸 생각을 했을까. 외로운 이름이었다. 유중혁은 지난 반 년 간 함께 지낸 김독자라는 인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는 절대로 가족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다.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겐 이상할 정도로 친근하게 굴어대니 호기심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을 뿐인데…….
    너무 많이 알아버린 건가. 네가 나를 잘 안다는 듯이 구는 것처럼. 늘 타인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유중혁은, 그렇게 조금 낯선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그와 저녁을 먹는 것이…… 조금 기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2


    10월 말의 서늘한 공기가 거리에 내려앉았다. 해가 져서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에 김독자는 코트 앞섶을 여몄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장신의 남자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한 손으로 조금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고, 앉아 있었던 탓에 구김이 간 코트 자락을 두어 번 털어내고. 그 동작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김독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야, 중혁아. 내가 산다고 했잖아. 이러는 게 어딨냐?”
    유중혁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하고는 거리로 걸어갔다. 김독자가 종종걸음으로 그 옆에 붙어서며 재잘재잘 말을 쏟아냈다.
    “너 진짜 이럴 거냐? 내가 너한테 고마워서 밥 사겠다는데 이게 뭐야. 시험공부도 네가 도와줬는데 밥까지 사면 밸런스가 안 맞잖아, 밸런스가. 커피라도 살까? 여기 근처에 괜찮은 카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너는 아메리카노지?”
    투덜거리면서도 이어지는 목소리에 유중혁은 피식 웃으며 옆을 돌아봤다. 아메리카노. 그새 또 자신이 좋아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다. 분명 유중혁 자신의 입으로는 말한 적이 없었을 터였다. 그 소설을 어지간히도 열심히 읽은 모양이군. 그게 그렇게 재밌나. 한 번 읽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치자…… 김독자가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왔을 뿐이었다. 왜 그랬냐고 물으면, 글쎄.
    “억울하면 다음에 다시 사라.”
    그런 핑계를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툭 내뱉자 김독자가 잠시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뭐야, 메뉴가 마음에 안 들었냐? 아닌데, 잘 먹는 것 같았는데. 너 만두 좋아하잖아 그치. 음? 말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그가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장난스레 웃었다.
    “얼, 뭐냐, 유중혁. 지금 나랑 밥 한 번 더 먹자고 꼬시는 거야? 아, 진작 말을 하지. 내가 또 눈치 없게 몰랐네.”
    ……어지간히 눈치 없는 녀석이다. 유중혁은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하늘 아래 대학로 상점들이 점등한 불빛이 깜빡였다. 금요일 저녁 특유의 활기가 감돌고, 평소 같으면 이런 거리를 걷는 건 썩 반가운 일이 아닐 터였지만. 그는 옆에서 따라오는 김독자를 위해 걸음을 조금 늦췄다.
    그새 새로운 생각에 돌입한 모양인지 하얀 손가락으로 제 입가를 쓸며 눈썹을 모으던 김독자가 팔꿈치로 유중혁을 쿡 찔렀다. 돌아보자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한 채였다.
    “메뉴는 네가 정해. 너 만두 말고 뭐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맛없는 건 죽어도 안 먹는다는 건 알겠는데.”
    또 아무렇지 않게 저런 소리를 한다. 이제 숨기지도 않겠다는 건가. 처음에는 제가 말해놓고 멈칫거리더니 이제는 완전히 거리낌 없는 태도였다. 다 맞는 소리라 반박할 말이 없기도 하고, 굳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설명할 귀찮음이 줄어드니 그냥 두고는 있지만.
    “그래, 맛없는 건 안 먹는다.”
    “그치? 역시 네가 정해라. 계산은 내가 할 테니까.”
    그 순간 유중혁의 머릿속에 짧게 괜찮은 생각이 스쳤다.
    “만두를 제외하면 집에서 직접 요리해 먹는 걸 좋아한다.”
    오~…. 역시나 알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그렇다고 너희 집 밥을 메뉴로 할 순 없잖아. 다른 거 말해봐. 유중혁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안될 건 뭐지?
김독자가 입을 쩍 벌리며 자리에 멈춰 섰다. 유중혁도 두어 걸음 앞서던 발을 멈춰 세우고 그를 돌아봤다. 문제라도? 금붕어마냥 입을 뻐끔거리던 김독자가 훌쩍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문제 있지! 너희 집 밥이면 네가 요리하는 거잖아. 음식점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계산하냐?”
    “네가 요리 재료를 사오면 되지 않나?”
    “그걸로 해결이 된다고?”
    어이없다는 얼굴로 올려다보는 시선에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눌러 참고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유중혁은 가볍게 다리를 움직여 걸어 나가며, 일단 카페로 가지. 이러다가 거리에서 밤새우겠군, 여상한 목소리로 말하고. 어, 야, 잠깐만, 같이 가 유중혁!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보이지 않을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몇 번이나 항의했지만 모조리 손쉽게 묵살 당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조건이었으나 저런 식으로 네가 아무리 말해봐라, 나는 안 듣는다, 태도면 뭐라 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유중혁 이 새끼 하여간 고집 센 건 알아줘야……. 김독자는 툴툴거리며 손에 든 봉투를 갈무리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삐리릭,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제는 꽤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 봐도 잘생긴 새끼. 재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김독자는 하하 웃어 보였다.
    “나 왔다, 중혁아. 어, 그러니까……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진부한 소린 됐다. 들어와.”
    내용은 냉랭하지만 어조는 제법 부드러웠다. 올해 초에 비하면 조금 달라졌을까.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끔한 공간에 저도 모르게 입이 헤, 벌어진 것을 얼른 다물었다. 손님이 온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라도 한 걸까 생각했지만, 제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평소에도 이러고 살 것 같았다. 아니 뭐, 사실은 소설 주인공 유중혁이 그렇다는 거지만…… 거의 비슷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슬리퍼까지 있을 건 뭐냐? 철저한 자식. 얌전히 발을 슬리퍼에 넣으며 고개를 들자 유중혁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손에 들린 봉투를. 곧 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요리 재료가 담긴 봉투를 가져갔고, 별 말 없이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김독자도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전체적으로 무채색인 인테리어였다. 거실의 회색빛 소파 위에는 쿠션이 두어 개 놓여 있고, 은은하게 오렌지 빛을 내는 조명이 제법 괜찮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맞은편에 위치한 부엌은 기역 자로 놓인 싱크대와 검은색 수납장,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하얀색 아일랜드 식탁이 조화를 이뤘다. 놓여 있는 의자는 두 개. 하긴, 혼자 사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김독자는 순수한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내부를 둘러봤다. 그야 소설로는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녀석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래, 이 집은, 정말로 유중혁 다운 모습이었다.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그’ 유중혁이 평범하게 산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듯한 풍경. 어쩐지 뭉클한 기분이 되어 있자 유중혁이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준비할 테니 앉아 있어라. 조금 걸릴 거다.”
    “어? 아냐, 도와줄게. 뭐 할까?”
    “…….”
    아무 말 없이 마주쳐온 시선이었지만 담긴 의미가 명확해서 김독자는 입을 조금 삐죽였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뭐 그런 눈빛. 쳇 소리를 내며 알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곤 거실로 향했다. 심심하면 TV 켜도 된다.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김독자의 시선은 어느새 다른 쪽에 꽂혀 있었다.
    거실 한쪽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들이 있었다. 상당히 많은 양이라 근처에 가자 꼭 도서관처럼 책 냄새가 난다 느껴질 정도였다. 김독자는 홀린 듯 책장으로 걸어가 눈으로 제목들을 훑었다. 고전문학부터 현대문학, 소설, 수필, 자서전, 시, 자기 계발서, 판타지…… 국적도 가리지 않는 온갖 장르의 책들이 종류별로 잘 정돈된 채 꽂혀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야. 꼭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읽은 책들도 꽤 많았지만 처음 보는 제목들도 제법 있었고, 아, 대박. 저거 읽고 싶었던 건데 절판돼서 못 샀었지. 이걸 가지고 있네? 김독자는 들뜬 기분으로 눈높이를 훌쩍 넘는 높은 곳에 꽂힌 책을 꺼내려 손을 뻗었지만 책 끝까지 손가락이 자라지 않았다. 받치고 올라설 만한 물건이 있나 주위를 둘러보려는데 시야에 그늘이 지며 큰 손이 머리 위로 뻗어왔다.
    “이걸 찾나?”
    손쉽게 책을 꺼낸 유중혁은 그것을 김독자의 손에 착 쥐여 주었다. 조명을 등지고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늘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 밖에서 볼 때와 달리 제법 편하게 입은 듯한 흰 티셔츠 아래 체격 좋은 몸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가까워. 어쩌다보니 책장과 유중혁이라는 커다란 벽 사이에 끼인 모양새가 된 김독자는 조금 당황하며 황급히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어, 고, 고맙다, 중혁아. 유중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말은 왜 더듬지?”
    낮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등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 들었다. 아, 씨, 왜 이러지? 미쳤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는 바람에 빈손으로 유중혁의 어깨를 밀어내며 몸을 빼냈다. 더듬긴, 누가. 옅게 떨린 목소리가 들켰을까, 다행히도 유중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물러서서 입을 열었다.
    “물어보는 걸 깜빡해서. 된장찌개는 매운 게 좋나? 아니면 맵지 않은 거?”
    “……아, 안 매운 거.”
    미묘한 얼굴로 저를 훑어본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에서 수도를 틀어 쏴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 뒤에야 김독자가 하아아, 한숨을 뱉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젠장, 갑자기 가까이 오고 난리야. 깜짝 놀랐잖아.
    사실 생각해 보면 그간 가까이 붙어 있던 일은 꽤 많았으나…… 눈을 깜빡이며 천장에 매달린 조명을 노려봤다. 이게 다 이 자식 집에 처음 와서 이런 거다. 낯설어서 그래. 낯설어서. 잡념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휘휘 젓고선 손에 든 책을 펼쳤다.



    “……자.”
    “……독자.”
    어깨에 내려앉는 손길에 김독자는 그제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이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들린 것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김독자도 반쯤 읽은 책을 내려다봤다. 책에 완전히 몰입해 그야말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페이지를 넘겨댔던 것 같았고, 펼쳐진 장은 200쪽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황급히 시계를 보니 집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허, 벌써 이렇게 됐나?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이 희미하게 웃은 듯했다.
    “그렇게 재밌었나?”
    “어, 응. 재밌네. 읽고 싶었는데 절판돼서 못 읽던 책이었거든. 좀 마이너한 작가라 그런지 도서관에도 없었고……. 용케 이걸 가지고 있네, 야.”
    “운 좋게 구했다.”
    유중혁은 그 작가 책을 누가 통째로 파는 걸 사왔다고 덧붙이며 책꽂이를 바라봤다. 과연, 같은 작가의 책이 한 칸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김독자가 눈을 빛내자 그걸 알아챈 유중혁이 피식 웃고.
    “일단은 밥부터 먹지. 책은 천천히 봐도 괜찮으니.”
    “아, 그래, 맞다.”
    책을 덮어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와줄 필요 없이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사실 얼쩡대면서 구경할 요량이었는데. 유중혁이 요리하는 장면을 놓치다니,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시며 그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향하자 맛있는 냄새가 훅 풍겨왔다.
    깔끔하게 수저까지 세팅된 식탁을 보고 김독자가 눈을 크게 떴다. 직접 한 것처럼 보이는 나물 무침 두세 가지, 큰 접시에 담긴 잡채, 고등어 한 토막, 조금씩 덜어 내온 듯한 젓갈과 김치, 가운데에는 뚝배기에 담긴 채 여전히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 소박하지만 정갈한 차림새에서 정성이 완연히 묻어났다. 원래 집 밥이 손이 많이 가는 법이다. 혼자 산 세월이 꽤 된 김독자는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집 밥을 먹어본 지가 언제였더라.
    깊게 파고드는 상념에 괜스레 눈가가 시큰해졌다.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도 줄곧 저에게 같은 질문을 되갚아주기에 그냥 평범한 집 밥이 먹고 싶다고 대충 대답했었다. 된장찌개 같은 거 먹고 싶다. 한식 잘 하냐, 중혁아? 그렇게 묻자 그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내가 못하는 요리는 없다, 그래, 그런 재수 없는 대답을 했던가.
    의자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내며 유중혁이 자리에 앉았고, 김독자도 생각에서 빠져나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세로 폭이 넓지 않은 아일랜드 식탁이라서인지 가운데는 수납공간이 없이 비어 있었고, 그 자리에 의자가 마주보고 놓여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은 편이었고. 무심코 의자를 당겨 앉자 유중혁의 무릎에 제 무릎이 닿았다. 아, 이 새끼는 다리도 길어 왜……. 의자를 조금 빼서 앉자 유중혁도 꼭 그만큼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앞에 놓인 수저를 손에 쥐며 김독자가 밝게 웃었다.
    “잘 먹을게, 중혁아.”
    제법 고마움이 담긴 목소리였고, 유중혁도 그걸 알아챘는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가, 잘못 봤나? 저 자식이 웃었다고?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보자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머쓱하게 된장찌개를 한 숟갈 퍼서 후후 불고, 입에 넣고. 앗, 뜨거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이 나오자 유중혁이 일어나 물컵에 물을 따라 가져다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라.”
    “아. 응. 고맙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걸 봤으면서도 다른 데 정신이 팔려 너무 급하게 먹은 제 탓이었다. 물을 마시고 다시 한 숟갈 입에 넣자…… 억울하게도, 정말, 엄청 맛있었다.
    야, 우리 중혁이 시집 잘 가겠다. 곧이곧대로 맛있다고 말하기가 괜히 자존심이 상해 시답잖고 고루한 농담을 던지자 유중혁이 멈칫했다.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젓가락질을 하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좁은 시야 내에서 젓가락이 움직였다. 유중혁 이 새끼는 젓가락 쥔 손도 잘생겼네. 키도 크고 목소리도 좋고 공부도 잘 하고 요리도 잘 하고…… 아, 시발. 김독자는 조금, 아니, 꽤 많이…… 억울해졌다.



    유중혁은 한 손에 들고 있던 핫초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 고마워, 인사를 하며 김독자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는 걸 됐다고 말려 앉혀두고 뒷정리를 모두 끝내니 시간은 8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유중혁은 김독자의 옆자리에 앉으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요리 재료 봉투에 핫초코가 한 상자 있길래 뭔가 했더니 자기가 마시고 싶다고 사온 거였다. 어린애 입맛도 아니고. 뭐, 그런 점이 조금은 귀엽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문득 돌아보니 김독자는 가만히 잔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마시지 않고 있었다.
    “먹고 싶어서 사 왔다고 하지 않았나?”
    “어, 그렇긴 한데. 뜨거워서.”
    뜨거운가? 조금 전 저녁에 된장찌개를 먹을 때도 뜨겁다고 했던 녀석이었다.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건가, 생각하며 다음부터는 조금 온도를 낮춰야겠다고 머릿속에 메모를 했다. 그러고 보니 돌려줘야 할 것도 있었지. 잠깐 기다려라, 말하며 유중혁은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갔다가 종이를 한 장 들고 나왔다.
    김독자가 떨어뜨렸던 프린트였다. 만두를 먹으러 갔던 날 돌려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다가 이제야 돌려주게 되었다. 어차피 중간고사 범위였으니 당장 필요하진 않았겠지. 김독자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유중혁은 두어 번 매끄러운 종이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봤다.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한 듯 하얀 얼굴. 매일 도서관에 박혀 책만 읽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유중혁이 그걸 묻지 않고 알 길은 없었다. 문득 이름의 한자가 두 가지로 쓰여 있던 것이 떠올랐다.
    “네 이름.”
    “응?”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는 얼굴에 긴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물끄러미 그걸 보던 유중혁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자로 어떻게 쓰지?”
    탄성 비슷한 것을 낸 김독자가 피식 웃었다. 프린트물에 적힌 한자를 엄지 끝으로 쓸더니 건조한 어조로 대꾸해왔다.
    “홀로 독, 아들 자. 그래서 김독자. 이상하냐?”
    물론 이상한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슬픈 이름이기도 했다. 유중혁은 생각 그대로 말하기를 꺼리는 인간이 아니었고, 그래서 대답했다.
    “외로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김독자의 시선은 한참이나 말없이 프린트물 어딘가 쯤을 헤맸다. 유중혁이 커피를 거의 다 마시고, 김독자 앞에 놓인 핫초코가 알맞게 식었을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외로운 이름이지.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한테 이런 이름을 지어준대냐? 웃기지.”
    “웃기지 않아.”
    의아하다는 시선이 저를 똑바로 향했고, 유중혁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미신을 믿지 않지만, 이름대로 살아간다는 말도 있으니. 나 같으면 그런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김독자는 그 이름이 뜻하는 바와 같이 외로운 인간처럼 보였다.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독자가 풍기는 묘한 분위기는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으나, 그것을 먼저 쳐내는 것은 늘 김독자 쪽이었다. 1년 가까이 그를 지켜본 유중혁은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혼자 사는 것이 익숙한 놈이다. 언제나 그렇게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하며 살아온 사람. 물론 자신처럼 천성적으로 그 편이 편한 인간도 있겠지만, 김독자는 어떨까.
    김독자에게 처음 문법을 알려주던 날이 생각났다. 그는 제 맞은편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연신 손 안에서 연필을 굴렸고, 페이지는 10여분 째 같은 곳에서 넘어가질 않고 있었다. 평소라면 자신도 공부에 집중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을 테지만 옅게 끙, 하는 신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탓에 모를 수가 없었다. 거슬리는군. 보다 못한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었다. 모르겠는 부분이라도 있나? 알려줄까.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던 김독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낯설어하는 얼굴. 그리고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아주 민망하고도 머쓱해하는 얼굴로 대답했었다. 알려주면…… 나야 고맙지. 그래, 그것도 아마 모든 걸 혼자 해결해 온 습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가 피식 웃으며 눈을 접었다. 그래, 중혁아. 정말 그러네. 나도 그래. 나도 그래……. 절대로 자식한테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을 거라 되풀이해 말하는 김독자의 조금 붉어진 눈가를 보며 유중혁은 그답지 않게도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책…….”
    “응? 아, 이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한 김독자가 큼큼, 두어 번 목을 가다듬고 조금 전까지 읽던 책을 들어올렸다.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빌려가도 된다. 다른 책들도.”
    “어. 정말?”
    눈에 띄게 환해지는 얼굴을 보며 유중혁은 옅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또, 좋은 구실도 떠올랐다.
    “대신 한 번에 한 권만.”
    “으잉. 왜? 그럼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하잖아.”
    귀찮게……. 김독자가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지만 그 귀찮음이야말로 유중혁이 바라는 것이었다. 나도 그 책은 종종 찾아서 읽는다. 그러니까 한 번에 한 권만. 아니 이런 마이너한 책을 왜 여러 번 찾아보냐? 그러는 너는 왜 보고 있지? 말문이 막힌 김독자가 어버버하더니 어정쩡하게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와 만나고자 하는 자신의 모습이 뭘 의미하는지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유중혁은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하지만 김독자는 아무래도 바보인 것 같다.



    [과탑놈 이번에도 시험잘볼거같은데]
    [걍 이참에 고백해서 멘탈 박살내버릴까]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김독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등받이에 몸을 한껏 묻은 채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니 두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충돌하는 소리가 선연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두 가지 생각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야 아무리 과탑인 게 아니꼬워도 그렇지 너무 치사한 방법 아니냐?’, ‘그래도 유중혁 멘탈 깨뜨리려면 이게 제일 잘 먹힐 것 같지 않냐?’, 뭐 그런 거였다. 두 생각은 계속 치고받고 싸워댔다.
    ‘유중혁 그 독한 새끼가 고작 이런 걸로 멘탈 깨질 것 같냐?’
    ‘원래 저런 자식들이 이런 게 잘 먹힌다. 유중혁 당황하는 거 좀 보고 싶지 않냐?’
    ‘유중혁이 너 커밍아웃 했다고 생각하고 소문내면 어떡하냐.’
    ‘그때 가서 장난이었다고 하면 되지. 그리고 저 새끼 나 말곤 친구 없어서 아무한테도 말 못할걸.’
    ……아, 씨. 이게 무슨 고민이냐 진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가 의자를 빙빙 돌린 후유증으로 잠시 휘청거리고 책상을 부여잡아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노트북에는 실시간으로 새로고침 된 익명 게시판이 떠올라 있었고. 그새 댓글이 여럿 달려 있었다.

    [고백공격 ㄷㄷㄷㄷㄷ]
    [ㅋㅋㅋㅋㅋㅋ개웃곀ㅋㅋㅋㅋㅋ 참신해]
    [ㅁㅊㅋㅋㅎㅎㅋㅎㅋㅎㅋㅋ]
    [진짜 좋아하는거냐ㅋㅋㅋ]


    뭐?
    김독자는 황급히 댓글을 다시 읽었다. 진짜 좋아하는 거냐고? 미쳤냐. 질색하는 얼굴을 하며 노트북 덮개를 덮으려다가 조금 전 제가 썼던 글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참에 고백해서.
    이참에. 고백해서.
    “……!”
    황급히 노트북을 쾅 덮고 옆의 침대로 몸을 날렸다.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갑자기 치솟은 맥박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김독자는 다른 과도 아니고 국문학과 학생이다. 저 짧은 두 마디가 내포하는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아악, 미친!”
    죄 없는 이불을 손끝으로 쥐어뜯으며 베개에 머리를 퍽퍽 박았다. 무의식중에 저런 글을 썼다고? 내가? 자괴감에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이나 이불을 죄 잡아 뜯던 김독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래, 이판사판이다, 이 자식아. 함가, 함가. 어차피 유중혁 그 냉정한 새끼가 그걸 듣고 뭐 특별한 반응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멘탈을 깰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제와 금욕의 화신 같은 놈이 아닌가. 연애라곤 거들떠도 안 볼 것 같은 놈이다. 말하자면 모솔. 모솔이 고백을 받는다? 그만큼 멘탈이 터지는 일이 있을까? 없으리라. 물론 김독자 본인도 모솔인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앉은 김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짜 고백을 한다고 해서 내가 뭐 손해 볼 건 없잖아? 유중혁이 이런 얘기를 어디에 말하고 다닐 정도로 교우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고, 또 그런 성격도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은 정말로 손해 볼 게 없고, 운이 좋아 유중혁의 멘탈에 제대로 타격을 줄 수 있다면 자신이 과탑을 노리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응, 다시 생각해도 역시 그렇다. 좋아. 내일 당장 말하자. 김독자는 휴대폰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중혁아, 내일 수업 끝나고 잠깐 볼 수 있냐.



    수업이 제법 늦게 끝나는 날이었고, 교정에는 오가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김독자는 조금 초조한 심정으로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비볐다. 벚나무는 겨울이 가까워와 잎사귀가 많이 떨어져 나간 조금은 앙상한 모습이었다. 해가 일찍 지기 시작해 벌써 불그스름하게 넘어가려는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문득 초조해하는 자신에게 조금 화가 났다. 아, 시발, 진짜 고백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되고 지랄……. 입속으로 욕설을 뇌까릴 무렵 먼 발치에서 기다란 형체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코트에 그의 장신이 더 돋보이는 듯했다. 하얀 셔츠에 검은 슬랙스, 검은 구두. 심플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이었지만 멀리서도 기가 막힐 정도로 잘생긴 놈이라는 건 알 수가 있었다. 일단 기럭지부터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가까워지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문득 그를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뒷모습만 봐도 장난 아니라고 생각했던가. 그리고 지금 그는, 유중혁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긴 다리로 걸어온 탓인지 생각보다 더 빨리 제 눈앞에 선 유중혁을 올려다보며 김독자가 침을 삼켰다. 그가 코트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며 손목에 찬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늦진 않았군,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을 하고선 다시 자신을 바라본다.
    “할 말이 있다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용건부터 바로 치고 들어오는 새끼……. 하긴 그게 유중혁이지. 그런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어, 할 말 있다. 유중혁.”
    “……뭐길래 그런 얼굴을 하는 거지?”
    당장 결투장을 내밀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낯이다. 유중혁의 얼굴에 미심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가, 김독자의 표정이 쉬이 풀어지지 않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리고 곧 그것은 김독자가 난생 처음 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저 표정은 뭐지? 김독자는 유중혁이라는 인간을 아주 잘 안다고-비록 소설을 통해서일지라도-생각했지만, 이런 표정은…… 글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만큼은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김독자는 아득해지려는 정신 끄트머리를 간신히 붙잡고 혀로 입술을 축였다. 유중혁의 시선이 그의 입술로 향하는 듯했다가 다시 눈을 마주쳐왔다. 그렇게 서로 가만히 눈만 쳐다보고 있기를 얼마나 했을까, 잠자코 기다리던 유중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김독자가 불쑥 말했다.
    “좋아해.”
    말을 하는 순간 도저히 얼굴을 확인할 용기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입에서 말이 내뱉어지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덕분에 김독자는 유중혁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표정들을 고스란히 눈에 담게 되었다. 눈이 커지고, 동공이 확장되고, 꾹 다물려 있던 곧은 입술이 조금 벌어지고. 날카로웠던 눈매가 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김독자는 그제야 조금 긴장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이 새끼 당황했네. 멘탈 깨진 거 맞지? 성공한 건가? 곧이어 ‘그’ 유중혁의 이런 표정을 봤다는 희열이 아래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아, 웃으면 안 되지. 김독자는 기쁨을 억누르고 온갖 심각한 생각을 끌어올리려 노력하며 자못 고민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이제 적당히 둘러대고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 대답을 듣지 않은 채로 떠나면 된다. 그럼 이 얄미운 과탑 자식은 제가 한 가짜 고백을 진짜라 믿으며 곱씹고 고민하겠지.
    “지금 바로 대답 안 해줘도 돼.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그럼……”
    “잠깐.”
    유유히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는데 유중혁의 손이 그의 손목을 턱 잡아챘다. 뭐야? 고개를 돌려 올려다보자 처음 보는 낯을 한 유중혁이 강렬한 시선을 맞부딪쳐왔다. 조금 전과는 또 다른 표정이었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 아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응? 대체 왜?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눈을 깜빡이는데.
    “알겠다.”
    ……뭘? 멍청하게 되물을 뻔하며 입을 벌렸다. 뭘 알겠는데?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자 유중혁이 다시 말을 이어왔다.
    “좋다, 김독자. 사귀자.”
    ……응?
    으응?
    “자, 잠깐, 잠깐만, 중혁아. 너 대체 무슨……”
    뭐라 말을 해보려 했지만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이 새끼가 지금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마구 떨리는 동공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붙잡힌 손목에서부터 유중혁의 뜨거운 체온이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열기 같은 것이…… 착각은 아닌 듯했다.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알아?”
    “안다.”
    “안다고?”
    “그래.”
    “아, 알긴 뭘 알아!”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빽 높여 외쳤다. 유중혁이 의아한 기색을 띄우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머리카락이 잘생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고.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 그러긴 했는데……”
    “그래서 나도 좋다고 답했다.”
    여기에 무슨 문제가 있지? 그렇게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문제가 있다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나는……. 김독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애매한 얼굴로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하자, 유중혁이…… 환하게 웃었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 착각할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뭐냐고, 왜 그런 얼굴로 웃는데……. 그 얼굴에 어찌할 바 없이 빨라지는 심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미쳤냐, 김독자? 왜 이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잡힌 손목을 타고 그에게로 맥박이 흘러들어갈 것만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푹 숙이자, 유중혁이 허리를 숙여 김          독자의 얼굴을 살폈다.
    “보, 보지 마, 이 망할 자식아.”
    황급히 빈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금방 다른 손에 붙잡혀 끌어내려졌다. 손을 빼내려 해도 도저히 놔 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속절없이 붉어진 얼굴로 숨도 쉬지 못한 채 눈을 빠르게 깜빡이자, 유중혁이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부끄럼을 타는군, 김독자.”
    “누, 누가, 누가……”
    “괜찮다. 그런 얼굴도 제법 볼만하니까.”
    그러면서 긴 손가락으로 제 뺨을 쓸어 올린다. 미친 거 아냐? 간지러운 촉감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자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정신을 차려보니 손목을 잡고 있던 유중혁의 커다란 손은 제 손을 꼭 맞잡고 있었고, 그리고…….
    “가자. 김독자.”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미소를 띤 얼굴에 늦가을의 노을이 부딪혀 부서져 내렸다. 부드럽게 잡아끄는 손길에 끌려가며, 김독자는……
    아, 그래. 과탑은 물 건너갔구나…… 그런 생각과.
    과탑 같은 거 아무려면 어떠냐. 그런 생각을 동시에 하고.
    따뜻하고 뭉클한 것이 가슴을 조이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붉게 물드는 보도블록을 밟아나갔다. 같이 가, 유중혁, 이 나쁜 새끼야. 종종걸음으로 달리듯 걸어 그 옆에 나란히 서며, 김독자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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