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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중혁 싱어송라이터 김독자 썰
* 수정중 * (미완)


「곡을 쓰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까 오랜 시간 고민해왔습니다. (…) 이 앨범을 통해서 저도, 그 사람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라고 쓰여진... 김독자의 앨범 소개글을 읽는 배우 유중혁... 그런거 보고싶은데...



한국에서 이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배우인 유중혁이랑... 약간 마이너하긴 하지만 코어팬층이 두터운 싱어송라이터 김독자... 둘이 대학 동기였는데 김독자는 실용음악과 유중혁은 연극영화과로... 신입생때는 잘 모르고 지냈는데 둘다 과 안에서 약간 유명인 돼서 서로 이름정도는 알고 있는 사이... 유중혁은 일단 겁내 잘생겨서 중고등학교때부터 유명하긴 했는데 그간 캐스팅같은 거 전부 다 거절해와서 걍 잘생긴 일반인으로 유명했던... 근데 대학을 연영과로 가면서 혹시 배우 지망하는건가? 드디어? 해서 입학때부터 엄청 주목받았을듯

그리고 김독자는 처음엔 글케 유명하진 않았는데 좀 지나면서 가사를 진짜 잘써서 좀 유명해질듯 ㅋㅋㅋㅋㅋ 꼭 시 한편 읽는 것 같다, 야 이건 멜로디를 안 붙여도 너무 좋다 뭐 그런 평가 받을 것 같은... 농담으로 너는 실음과가 아니라 문창과같은 데 갔어야 하는거 아니냐 할것같고

근데 둘다 그 좀... 자발적 아싸기질 있어서 동아리 활동 같은 것도 안할듯 그래서 접점이 1도 없었다가 ㅋㅋㅋㅋㅋㅋ 2학년 때 학교 축제에서 뜬금없이 연영과랑 실음과랑 합동 뭐시기를 한다는것이다... 두 과 모두 학교에서 알아주는 과여서 서로 무대싸움... 기싸움 비슷한 게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참에 아예 둘이 합쳐서 무대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나왔고 과대들이 거기에 동의해버린 것으로... 둘이 뭘 어떻게 콜라보를 해? 싶었지만 머리를 맞대니 또 대충 방법이 나오긴 나왔음 연극의 주인공을 가수지망생으로 잡고 극에다 노래를 삽입하자고 합의를 본 것

그래도 기싸움이 있었던지라 연영과에선 야! 연영과의 얼굴 유중혁을 주인공으로 세우자! 하고 여론이 형성됐는데 커다란 문제가 있었으니... 유중혁이 음치라는 것이었음... oO(저자식 어쩐지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안잡더라;) 여튼 그래서 어이없게도... 주연은 다른녀석이 됐고 유중혁은 그 주연의 친한 친구 역할인 주연급 조연으로 들어가게 되었음... 그리고 그 주연이 노래하는 노래 작사작곡에... 김독자가 들어갔다... 각본은 연영과가 쓰기는 했는데 김독자가 쓰는 노래가 노래다보니까 그 감성을 따라갈수밖에 없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꽤 그럴싸한 극이 나왔음

축제에 세워진 극이 엄청 호평이었어서 두 과 모두 위신을 세우는 괜찮은 결과를 낳았지만 내부사정은 그렇질 못했음 그렇다 김독자는 극이 너무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ㅋㅋㅋㅋ 각본 흐름도 아쉬웠지만 제일 마음에 안 드는 건 자기 노래를 제대로 못살리는 주연놈이었음

그냥 연기력이 부족한거면 또 모르겠는데 자존심 세우느라 김독자가 원하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곡을 해석해서 불러버렸던 것... 의견은 끝까지 조율이 되질 않았고 그래서 김독자는 축제가 끝난 뒤에도 욘나 화난 얼굴로 회식자리에 앉아 있었음ㅋㅋㅋ

야 김독자 표정 풀어라 그래도 니가 이번 축제 숨은 공헌자인데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냐? 그런 소리에도 김독자는 싸늘한 얼굴로 앉아서 앞에 놓인 소주잔만 노려보고 있었음 술이 약해서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닌데 오늘은 술이 너무 땡겼음.. 에이 시발 좆같은데 마시고 잊자; 하며 술을 들이킨 김독자

그리고 그런 김독자를 눈여겨보고 있던 유중혁이 있었음... 사실 유중혁도 김독자의 데모를 주연과 같이 들었었고 주연 녀석이 곡 해석을 조금 미묘하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 그런 감성으로 쓴 곡이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말도 해봤지만 먹히지 않았음

그리고 김독자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음 그렇다고 해도 남의 연기에 딱히 왈가왈부할 생각도 없었고 김독자에게 말을 걸어볼 생각도 없었지만... 하지만 저 허여멀건 놈이 소주 두세잔을 연거푸 마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건 좀 신경이 쓰였음

야 어디 가? 신경 꺼. 냉랭하게 말하고 휙 나가는데 약간 휘청하는 꼴을 눈썰미 좋은 유중혁이 놓칠리 없었음 유중혁은 잠깐 고민했다 저걸 따라가볼까... 사실 조금 궁금하기는 했음 김독자가 쓴 노래는 굉장히 특이한 감정선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음 무슨 생각을 하며 살기에 이런 곡을 쓰지? 그런 개인적인 호기심을 참지 못한 유중혁은 결국 답지 않게도 김독자의 뒤를 쫓아갔던 것이다...

딸랑 가게문을 열고 뒤따라가니 언제 챙겼는지 큼지막한 기타케이스를 메고 휘적거리며 가는 김독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음 당장 가서 붙잡으려던 유중혁은 그 오징어같은 꼴이 조금 우스워 잠깐 지켜보기로 했음 흐느적거리던 김독자는 어느 편의점 앞 파라솔 꽂힌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에 주저앉더니 주섬주섬 기타를 꺼냈음 뭐하는 거지? 설마 고성방가를? 눈살을 찌푸리고 지켜보는데 김독자가 피크 없이 손톱으로 스트로크를 치며... 오늘 무대에 올랐던 노래를 부르는게 아니겠음

곡조는 잔잔했고 가사는 담담했음 김독자의 하얀 얼굴도 건조하기 그지없었지만 유중혁은 어쩐지 그 노래가 몹시도 처절한 절규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그래. 이런 느낌을 원했던 거였군. 그제서야 확실히 알 수 있었음 이러니 마음에 안들만도 하지

가만히 자리에 못박힌 채 듣고 있자니 1절까지 부른 김독자가 하아 하고 긴 한숨을 뱉더니 의자에 널부러졌음... 유중혁은 그 틈을 타서 곁으로 다가가서 의자 등받이를 짚었음 이런 곳에서 노래같은 걸 하면 민원이 들어올텐데. 그리 말했더니 고개를 뒤로 더 꺾어 유중혁을 쳐다본 김독자가 픽 웃고선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았음

- 이게 누구야? 연영과의 얼굴 유중혁 아냐?

알랑대는 입꼬리에 유중혁은 눈썹을 들썩였음 이녀석 이런 이미지였던가? 가만 쳐다봤더니 김독자가 턱짓을 했음

- 앉아, 서있지 말고.

내가 왜? 그렇게 답하려다 유중혁은 마음을 바꿔 맞은편에 앉았음 팔짱을 끼고 마주보니 김독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유중혁을 뚫어져라 쳐다봤음 뭘 그렇게 보지? 그렇게 묻자 김독자가 인상을 쓰며 몸을 물렸다

- 연영과의 얼굴께서는 쳐다보면 미모가 닳으시나보죠?

유중혁은... 슬슬 열이 뻗쳤음 이자식 뭐지 초면에?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빡친 기색이 드러났는지 김독자가 실실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유중혁의 미간을 문지르고선 떨어졌음

- 야, 주름 생길라. 인상 쓰지 마.

잠깐 닿았던 손가락이 몹시도 차가웠음 유중혁은 한숨을 푹 쉬고선 그냥 바로 묻고 싶었던 얘기를 꺼냈음

- 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군.

김독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음 어, 존나 마음에 안 들었지. 그렇게 부를 바엔 안 부르는 게 나아. 신랄하게 까는 어조에 유중혁은 되려 호기심이 생겼음

- 방금 노래하는 걸 들었다. 그런 느낌을 원했던 건가?
- 어떤 느낌?

되묻는 말에 유중혁은 잠시 말을 골랐음

- 담담하게 부르지만 사실은 절망해 있는 감정. 그런 걸 전달하고 싶었던 거 아닌가?

김독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빙긋 웃었음 여전히 품에 안고 있는 기타줄을 무의미하게 두어번 튕긴 김독자가 기타 바디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괴었음

- 유중혁. 너는 음악이 뭐라고 생각해?

유중혁은 그것이 대답을 바라는 질문이 아님을 알아차렸음 아니나다를까 김독자는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 유중혁. 음악은 부정방정식이야.
- 부정방정식?
- 그래. 정해진 답이 없다고.

말이야 맞는 말이었지만 유중혁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음 정해진 답이 없다면 어째서 이녀석은 정해진 답대로 노래를 하지 않는다고 기분이 상한 것이지? 유중혁의 그런 의문을 알아차린 듯 김독자가 웃으며 말을 이었음

- 식만 놓으면 일정한 해가 없지. 근데, 조건을 정해주면 하나의 해가 나오기도 하는게 부정방정식이야.

유중혁은 더 설명해보라는 눈빛을 보냈음

- 자, 유중혁. 잘 들어봐. x제곱 더하기 y제곱은 z제곱이라는 식은 해가 일정하지가 않지. 근데 만약 x랑 y랑 z가 모두 자연수고, x가 y보다 작다면. 그리고 그 합이 12라면? 그럼 x는 3이고 y는 4고 z는 5겠지. 음악은 그런 거야.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명석한 유중혁은 서서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이해하기 시작했음

- 그러니까, 네 말은. 해석은 자유지만 만든 사람이 원하는 해석은 정해져있다는 뜻인가?
- 그래, 그거야.

유중혁은 문득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김독자라는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도 알 것 같았다 상대하기 껄끄러운 녀석일지도 모르겠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김독자가 갑자기 기타를 붙잡고 코드를 뚱땅거리기 시작했음

- 김독자. 지금 시간이 몇 신지 아나.
- 아, 조용히 할게. 조용히.

두어 번 더 줄을 튕기더니 아, 하고선 기타케이스 앞주머니를 열어 흰 종이를 꺼낸 김독자는 그러고도 조금 더 앞주머니를 부스럭대며 뒤졌다 어디갔지? 잃어버렸나? 유중혁은 한숨을 쉬고선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볼펜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음 필기구를 찾는 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유중혁을 바라본 김독자가 펜을 받아들고선 천천히 눈을 접어 웃어보였다

- 고맙다. 나중에 돌려줄게.

그러더니 흰 종이에 무언가를 줄줄이 쓰기 시작했다 몹시도 날려쓴 글씨라서 유중혁으로서는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이따금 기타줄을 퉁겨대는 걸 보니 곡을 쓰나 싶었음 그렇게 써내려가는 속도가 0으로 수렴할 때까지 묵묵히 맞은편에 앉아 그를 지켜본 유중혁이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을 입에 올렸음

- 고등학교 때 이과였나?
- ? 아니. 나 수포자였는데?

유중혁은... 짧게나마 김독자라는 녀석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던 몇분 전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음





그날 그렇게 어영부영 헤어진 뒤로 유중혁은 김독자와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과가 다를뿐더러... 유중혁은 사람을 만나는 걸 즐기는 타입도 아니었고 그건 김독자도 마찬가지인 듯했으므로 하지만 유중혁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가는데...

수강생이 200명을 넘는 모 인기 교양 첫수업에서 출석을 부르는데 김독자가 있는게 아니겠음... 김독자. 네. 저만치 뒤쪽에서 들려오는 대답소리에 유중혁은 그냥 김독자가 거기 있는 모양이군 하는 감상에 그쳤다 하지만 김독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음

- 유중혁. 유중혁!

수업이 끝나고 가차없이 건물을 나서려던 유중혁을 불러세운 김독자는 지난 학기에 마지막으로 본것과 꼭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올려다봤음 유중혁이 대답 없이 눈썹만 꿈틀했지만 김독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다음 수업 있냐?
- 왜 물어보지?

까칠한 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인상을 팍 썼음에도 김독자는 씩 웃으며 오늘도 들고 있는 기타케이스를 앞으로 돌려메더니 앞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분명 유중혁이 몇달 전에 빌려줬던 것 같은 펜 한자루였다

- 펜 한번 돌려주기 되게 힘드네.

유중혁은 제게 내밀어지는 펜을 얼떨결에 받아들었음 그러고보니 이게 있었군. 딱히 비싼 것도 아니고 소중한 물건도 아니었기에 애초에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는데-그런 물건이므로 유중혁이 빌려줬던 거지만-그걸 굳이 돌려주러 오다니. 보기보단 성실한 놈인가, 그런 생각을 했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유중혁이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김독자가 얼른 다시 곁으로 따라붙었음

- 다음 수업 몇 시야?
- 2시.
- 아직 한참 남았는데. 어디 가 있을 거야?
- B학관 카페에.
- 아. 너 맨날 간다는 거기?

유중혁은 의아한 얼굴로 김독자를 돌아봤음 무슨 소리지? 유중혁의 표정을 살핀 김독자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빙긋 웃었다 유중혁 너 에■같은 것도 안 한다더니 진짠가보네. 그게 뭐지? 와, 진짜냐. 김독자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음 나도 같이 가도 돼? 그럼 알려줄게. 유중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음

그렇게 B학관 카페에 마주앉아 얘기를 들은 결과 에■라는... 학교 익명 게시판 비슷한 곳에서 자신이 유명인사라는 어이없는 답을 들은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렸음

- 하루에 한 번 꼴로 올라온다고? 내 목격담이?
- 그래. 몰랐냐.
- 범죄행위 아닌가.

야, 범죄는 무슨... 김독자가 살짝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더니 말했음

- 너 정도 되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냐.

유중혁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고 또 자기객관화가 제법 잘 되는 편이었음 이미 십수 년 전부터 뫄뫄지역 존잘 따위의 이름으로 온라인에 사진이 일파만파 퍼져있었으니 뭐... 유중혁이 시큰둥한 얼굴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는 걸 가만 보고 있던 김독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 아무튼 그렇다고.
- 그렇군.

유중혁은 담담히 답하고선 팔짱을 끼고 창 너머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음 창가 자리는 햇살이 잘 내리쬐어 기분 좋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음

무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다시금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 유중혁은 고개를 돌렸음 김독자는... 꼭 그날처럼 종이를 꺼내는 중이었음 아, 이제는 종이가 아니라 수첩이군. 손을 많이 탄듯한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꺼낸 김독자는 겉장에 꽂혀 있던 펜을 딸깍거리며 무언가를 적었음 이번에도 곡을 쓰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호기심이 들어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김독자가 쓰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음 지난번에 봤을 때는 뭘 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김독자는... 가사를 쓰고 있었음

명백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들의 나열에 유중혁은 어쩐지 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시선을 물리고는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이를테면, 민무늬 볼펜을 쥔 김독자의 희고 마른 손가락. 도드라진 손목뼈를 지나 팔을 감싸고 있는 셔츠의 소맷자락. 깔끔한 착장, 고개를 숙여 아래로 늘어진 검고 가는 머리카락, 속눈썹의 그림자, 그런 것들을.

햇빛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얇은 입매가 꾹 다물렸다가 풀렸음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듯 살짝 모인 미간, 씰룩이는 뺨, 그런 것들을 보며 유중혁은 생각했다 하얗고 반짝거리는 녀석이라고... 어디까지나 감성적인 평가보다는 물리적인 외양에 대한 평가였지만

김독자가 갑자기 고개를 홱 들어올려 시선이 마주치는 바람에 유중혁은 답지 않게 살짝 움찔하고 말았음 물론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겠지만... 눈을 깜빡거린 김독자가 하아, 한숨을 쉬더니 흠, 으음... 하며 고민하는 듯한 기색을 보였음 뭐지? 그리고 김독자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유중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 유중혁. 미안한데... 나 펜 한번만 더 빌려줄 수 있냐.

유중혁은 시선을 내려 김독자의 수첩을 바라보았음 흰 종이를 할퀴고 지나간 볼펜자국이 보였다 잉크가 없어 죽죽 그어진 자국만 남은 종이... 그래서 멈춘 거였나? 유중혁은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조금 전 김독자가 제게 돌려주었던 펜을 다시 빌려주었음 김독자는 민망한 웃음을 보였다

- 야. 그... 오해할까봐 말해두는 건데,
- 뭐지.
- 절대로 일부러 이러는 거 아니야. 작업 거는 것도 아니고... 오해하지 말라고. 유중혁.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설명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지만 김독자는 대답하지 않고선 다시 고개를 수첩에 처박았음 이거야 원... 속으로 혀를 찬 유중혁은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만날 때마다 개소리를 적립하는 녀석이군, 그렇게 생각했다. 이윽고 1시 50분경이 되어 유중혁은 가방을 집어들었음 김독자는 정말로 몰입해있었던 것인지 제 앞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깜빡 잊었다는 듯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보였다 유중혁은 눈썹을 들썩이고선 몸을 일으켰음

- 가보겠다. 수업 시간이 다 돼서.
- 아...

김독자는 얼른 들고 있던 유중혁의 펜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 빌려줘서 고마워.

별 생각 없이 그 펜을 다시 받아들려던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 돌려줄 필요 없다.
- 응?
- 네가 쓰라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유를 들라면, 여러 가지를 댈 수 있었겠으나. 그 무엇보다 정확한 이유를 유중혁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음 그리고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김독자가 작게 웃었다

- 안돼. 돌려줄게.
- 필요 없...
- 대신에, 너 번호 좀 가르쳐줘.

유중혁은 입을 다물고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분명 작업 거는 거 아니라는 둥 헛소리를 한 것이 바로 이 녀석이었을 것인데... 그 시선에 김독자가 조금 허둥거리며 말을 덧붙였음

- 아니... 그, 지금 말고, 다음에 돌려줄게. 근데 다음에 돌려주려면 만나야 할 거 아냐. 만나려면 연락처를 알아야 약속을 잡고...

주절주절 말하더니 에이 시발, 하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수첩을 탁, 하고 덮은 김독자가 유중혁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음

- 번호 물어보는 거 가지고 작업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

하, 유중혁은 코웃음을 쳤음 애초에 이놈이 작업이라는 말만 안 꺼냈으면 그냥 당장에 번호를 물어봤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딴 말을 꺼내놓으니 단순히 번호를 물어보는 것마저 이상하게 들리는 것 아닌가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무슨 수작질인지 모르겠지만... 물론 가장 어이가 없는 건 거기에 또 응해주고 있는 자신이었음

- 적어라. 010.
- 야, 잠깐, 잠깐만...

김독자는 황급히 수첩을 펼쳐 유중혁의 번호를 받아적었다 흰 종이 위에 김독자의 필체로 가지런히 늘어선 숫자 열한 자리를 확인한 유중혁은 무심히 몸을 물렸고 그의 등 뒤로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음에 돌려줄 때는 펜 말고 다른 것도 줄게.

무슨 뜻일까, 왜 그런 소리를 한 것일까.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했다... 하지만 유중혁은 카페 문을 열고 나섰음. 다음에 볼 때 알 수 있겠지.





김독자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을 무렵이었음 일단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으니 우연히라도 얼굴이 마주칠법 했으나 유중혁은 지난 몇주간 김독자를 보지 못했음 하긴 200명이 넘게 듣는 수업이니까... 그러던 와중에 온 메시지에 유중혁은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꽉 쥐었음

[수업 언제 끝나?]

고작 여섯 글자인데 반갑다 느끼는 자신이 한심하고 어이없었지만 유중혁의 몸은 솔직하게 답장을 쓰고 있었음...

[5시]

[늦게 끝나네]
[저녁 약속 있어?]

[없다]

[그럼 수업 끝나고 A학관 지하동방 잠깐 들를래?]

웬 지하동방? 이녀석 동아리같은 건 안 한다고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일단 유중혁은 알았다고 답장을 보내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A학관 지하로 향했음 줄줄이 늘어선 동아리방 문들 중 어느 것인가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멀찍이 반대편 입구에서 손을 흔드는 허여멀건 놈이 보였음

- 유중혁. 이쪽.

유중혁은 성큼성큼 걸어 김독자의 앞에 섰음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그리 말하며 입꼬리를 알랑대는 것이 조금 같잖아서 인상을 썼더니 김독자는 모른 척 다시 웃었다

- 오늘은 안 메고 있군.
- 뭘?
- 기타케이스.

아, 감탄사를 흘린 김독자가 씩 웃더니 몸을 돌렸음

- 이쪽으로 와.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법이 없는 놈이군... 그런 생각을 하며 김독자의 뒤를 따라가니 방음처리가 된 동아리방이었음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흘긋 벽에 붙은 포스터나 이리저리 늘어져있는 물건들을 보아하니 음악과 관련된 동아리인 것 같기는 했음 왜 굳이 이런 곳에? 유중혁은 생각했음 김독자는 실음과일텐데 굳이 이런 데로 올 필요가 있나... 그런 유중혁의 의문을 알아챈듯 김독자가 먼저 선수치듯 말했다

- 우리 과 연습실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는 건가. 유중혁은 잠자코 김독자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그는 벽 한쪽에 놓여 있는 눈에 익은 기타케이스의 지퍼를 주르륵 열더니 안에서 기타를 꺼냈음 뭐지? 펜을 돌려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나. 이윽고 김독자는 간이책상 비슷한 데에 걸터앉더니 유중혁에게도 앉으라는 듯 턱짓을 했다... 유중혁은 대충 적당한 의자 하나를 골라잡아 앉았음

잠깐만, 하며 기타줄을 조율한 김독자가 자세를 바로 하며 어쩐지 멋쩍은 듯한 표정을 지었음 유중혁은 김독자가 뭘 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렸다... 흘끗 유중혁을 바라본 김독자가 말했음

- 들어봐.

유중혁은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가만 팔짱을 꼈음 그리고 곧 김독자가 노래를 시작했다

그 곡은 유중혁이 처음 데모음원으로 들었던 노래와도 편의점 앞에서 한숨쉬듯 불렀던 노래와도 달랐다... 건조하고 담백한 노래를 주로 쓰는 줄 알았건만 이건 전혀 그렇지 않았음 비유를 하자면 봄날 햇볕이 잘 드는 카페 창가에 앉아서 테이블을 두드리며 써내려간 것만 같은 노래였다

그리고 유중혁은 그 노래의 가사가... 몇주 전 자신이 의도치 않게 흘긋 훔쳐봤던 김독자의 수첩에 적혀 있던 가사라는 것을 알아차렸음 그때 썼던 곡인가, 그렇군. 가만히 나긋나긋한 음색을 듣고 있자니 꼭 그날처럼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햇빛을 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유중혁은 기타 소리가 멎는 순간 벌써 끝인가? 하고 일말의 아쉬움을 느낀 자신에게 조금 놀랐다 스물 두 해를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음 유중혁은 청각적 자극보다는 시각적인 자극에 민감한 타입이었고 특별히 즐겨 듣는 대중가요도 없는 평범하게 무난한 음악취향을 가진 사람이었음... 낯선 느낌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니 김독자가 슬쩍 눈치를 보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 그...

어땠어? 답지 않게도 조심스러운 듯한 질문에 유중혁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김독자는 기타를 꽉 붙잡은 채 유중혁을 바라보고 있었음

- 그때 썼던 곡인가?
- 어? 어, 맞아. 어떻게 알았냐.

유중혁은 김독자의 하얀 손끝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요한 대답을 내놓았다

- 나쁘지 않군.

그 말에 김독자는 잠시 멈춰있더니 이내 큭큭거리며 웃었음... 유중혁은 자신의 대답 어디가 이상했나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 왜 웃지?
- 아니, 그... 웃겨서 웃은 건 아니고.

웃음을 멈춘 김독자가 다시 입가에 미소를 걸쳤음

- 너 취향 엄청 까다롭다며. 음식 취향도 그렇고 작가 취향도 사람 취향도...
- 누가 그런 소릴 했지?
- 누구긴. 이미 유명하더만.
- ...
- 아무튼, 그래서... 조금 긴장했거든? 형편없군, 이러면서 깔까봐.

물론 그랬다... 유중혁은 대부분의 분야에서 취향이 까다로운 편이었고 특히나 음식에 관해서는 더했음 하지만 음악에서는? 유중혁은 자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사실 특별히 즐겨 듣는 곡이 없다는 것은 곧 유중혁의 취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곡이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으므로... 그래, 만약 이 녀석의 곡에 정말로 별 감흥이 없었다면 유중혁은 그런 평가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중혁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 김독자가 만든 노래가 제법 취향이었다는 것을... 유중혁이 대답하지 않고 있자 김독자가 씩 웃으며 계속해서 말했음

- 아무튼... 너한테 주는 거야. 이 노래.

유중혁은 눈썹을 까딱였음 방금 뭐라고? 그런 시선으로 쳐다보자 김독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 너 생각하면서 쓴 곡이니까 너한테 주는 거라고.

유중혁은... 생각했음. 펜 말고 다른 것도 주겠다는 게 이거였나. 하지만 유중혁에게는 큰 문제가 있었음 그야... 그는 노래를 할 수 없었으므로... 곡을 쓰는 사람이 노래를 준다는 건 보통... 가수들에게 부르라고 주는 게 아니던가? 이녀석 나를 놀리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기엔 김독자의 표정은 진지했음 그래서 유중혁은 뻔뻔하게 굴기로 결심했다

- 나한테 주는 거라고?
- 응.
- 어차피 줄 거면 음원으로 줘라.
- 뭐?
- 나한테 주는 거라며. 어차피 그러기로 한 거 조금 더 힘써봐라.

김독자는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이었음 야, 제대로 녹음하려면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제대로 녹음할 필요 없다. 그냥 핸드폰으로 녹음한 거라도 상관 없어. 그렇게 말했는데도 김독자는 어쩐지 망설이는 기색이었음 왜지? 가만히 쳐다보자 김독자가 인상을 쓰며 답했다

- 나 내 목소리 녹음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 축제 때는 데모를 녹음해서 보내지 않았나?
- 그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원래는 내가 곡만 쓰고 다른 애한테 녹음해달라고 하려고 했어.

그러고보면 그 데모도 축제가 끝나면 꼭 파기해달라고 부탁했었지... 영문을 알 수 없었음 하지만 유중혁으로선 여기서 포기하기도 아쉬웠다 자기가 부를 수도 없는 노래를 받아서 뭘 어쩐단 말인가 적어도 누군가 불러준 형태여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나... 그렇게 말하려고 입을 떼는데 김독자가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음

- 그럼 지금 녹음해. 여기서. 네가.
- 내 핸드폰에?
- 어. 대신에 약속해. 다른 사람한테 들려주지 않고 너만 듣는다고.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음 애초에 누구한테 자랑할 생각도 없었고 유중혁이 누군가와 노래를 나눠 들을 정도로 살가운 성격도 아니었으므로...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꺼내 음성 녹음 앱을 켰고 그렇게 그날 유중혁의 휴대폰에는 김독자의 노래가 저장되었다 음성녹음 003이라는 제목으로

- 저녁 먹었어?
-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먹었을 리가 없지 않나.
- 말을 해도 꼭 그따위로...
- 뭐라고?
- 아니.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그렇게 얼떨결에 김독자와 저녁까지 먹고 헤어진 유중혁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우웅, 울리는 휴대폰의 화면을 바라봤음

[야...]
[생각해보니까 펜을 안돌려줬음]
[그게 본목적인데]

한심한 이야기였지만 유중혁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는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했으므로... 유중혁은 애써 표정을 감추고 답장했다

[다음에 돌려줘라]

그대로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유중혁은... 마음을 바꿨음 통학길에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아넣고 음성녹음 003을 재생하며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창 너머를 바라봤다 해가 진 한강의 푸르스름한 수면 위로 불빛이 반짝거렸음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기타 소리와 김독자의 목소리가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김독자의 목소리는 잔잔하고, 조용하고, 나긋했지만 동시에 웃음기가 어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야, 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 녀석은 웃고 있었으니까. 유중혁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노래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하얀 얼굴이 제 곁에 서서 귓가에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음

그래서 유중혁은 생각했다. 앞으로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나는 몇 번이고 이 날로 돌아오겠군. 그리고 이 노래를, 이 날을 알고 있는 것은... 유중혁 자신과 김독자 뿐일 터였다. 어느 누구도 그 동아리방의 공기가 어땠는지, 조도가 어땠는지, 두 사람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김독자의 흰 손가락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얇은 입매가 어떤 방식으로 노래했는지 모를 것이다.

손안에 들어있는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김독자. 다른 사람한테 들려주지 않기로 약속하라고? 우스운 소리였다. 그런 말이 없었더라도... 유중혁은 절대로 이 곡을 다른 이와 공유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어쩌면 그건 소유욕을 닮아 있었지만, 유중혁은 제 감정이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알고는 있었다. 모른 척할수는 있을지라도 알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녹음이 뚝 끊어졌다. 다시 한 번 재생 버튼을 누르며 유중혁은 느릿한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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