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독자는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음 아...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옆 테이블을 더듬으려고 했는데... 테이블이 손에 잡히지 않았음...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평소라면 전혀 없을 둔탁한 통증이 허리를 타고 찌르르 올라왔다;
김독자는... 또 깨달았다... 물론 눈을 뜬 그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 시발 또... 또... 자버렸다... 이 자식이랑...;; 진짜 죽고 싶었음 이번에는 술에도 안 꼴아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로 다... 기억이 났던 것이다... 김독자 미친새끼 진짜 뭐냐 어떻게 나한테 이런 일이????? 황망한 심정으로 한참이나 지혼자 울리는 알람을 듣고 있자니 제 허리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이 느껴졌음 누군지는 볼것도 없이 옆에 누워있을 (게 틀림없는) 유중혁놈이겠지...
"더 자라."
어깻죽지에 고개를 묻고 말하는 바람에 피부를 타고 낮은 목소리가 전해져서 김독자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야, 잠깐, 잠깐만..."
김독자는 움찔거리며 유중혁을 밀어서 떼어냈고 잠을 방해받은 것이 몹시도 불쾌한 표정으로 유중혁이 눈살을 팍 찌푸렸음 그제야 깨어나서 처음으로 유중혁의 얼굴을 본 김독자는... 잠시 호흡곤란이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졌음 아... 이자식 진짜... 잘생겼다; 이렇게 잘생겨서 내가 시발 두번이나?; 그러고보니 지난밤 아침에도 일어나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일단 김독자는 시간 확인이 급했음 그래도 나름대로 정상적(?)인 밤을 보낸 것인지 분명 거실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침실... 침대 위였음... 일단 시끄러운 핸드폰이 어딨나 몸을 일으켜서 여기저기를 더듬으니 유중혁도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음 그 일련의 동작이 꼭 느긋한 맹수 같고 또 몸이... 몸이 너무 좋아서; 김독자는 또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다시 휴대폰을 찾았다 근데 저 자식 진짜 직업이 뭔데 몸이 저렇게 좋은거지
간신히 뒤적거리니 도대체 왜 거기 들어가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랍 안에서 휴대폰이 나왔다 이게 왜 여기 있더라; 알람을 끄고 손에 들고 기억을 되짚고 있자니 뒤에서 유중혁이 첨언했다
"어제 네가 회사 사람 카톡 오는 거 짜증난다고 거기 처박았다."
아니 시발 유중혁자식아 친절한 설명 그만둬;; 어쨌든 시간을 확인하니 다행히도 알람을 몇개 놓쳐보낸 건 아닌 모양인지 평소처럼 8시 언저리였음 아 얼른 출근해야지... 시발 근데 허리 끊어지겠다 오늘 왜 금요일이지; 끙하며 몸을 일으키니 뒤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자율출근이라며. 좀 늦게 가도 되는 거 아닌가?"
김독자는 그제야 다시 유중혁을 돌아보며 한숨을 쉬곤 말했다
"내가 얘기했잖아. 매일 저녁에 하는 일이 있어서 자율출근이어도 9시 출근 6시 칼퇴한다고, 야근 있는 거 아니면..."
그렇게 말했더니 유중혁이 조금 어깨를 들썩였음 설마 웃은 건가? 이윽고 무심한 얼굴로 돌아온 유중혁이 말했다
;; 말하다보니 김독자는 또 괘씸해졌음 이 자식이 왜 또 나랑 그... 그... 자, 잔 거냐고! 그래서 김독자는 유중혁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야, 유중혁 너... 얘기 좀 해."
"출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아나; 닥치고 좀 들어봐;
"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야?"
직접적인 단어를 쓰기 민망해서 돌려 말한 꼴이 되었는데 유중혁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듯했다 눈썹을 까딱인 유중혁이 말했다
"네가 먼저 나를 여기로 데려왔지."
"그건...!"
시발! 그건 그거고!
"회사로 찾아갈 바엔 집으로 오라는 말도 했고."
아니 그게 왜 또 말이 그렇게 돼?
"내가 말한 건 집 앞까지만 오라는 소리였거든, 집 안까지 쳐들어와도 좋다는 소리가 아니었다고."
김독자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집에 초대했다고 그, 그... 다 동의한 건 아니거든. 도대체 뭔 생각으로..."
금방이라도 다시 뻔뻔한 대답을 할 줄 알았던 유중혁이 왜인지 말이 없었음 김독자는 무슨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눈을 뜨고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중혁이 몹시도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음...
"김독자."
"...어?"
"너는 싫었는데 내가 몰아붙였다는 건가?"
김독자는 또 존나 할말이 없었음... 물론... 시발... 단 한 번도 아주 조금도 밀어내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음...;; 하지만 그렇게 인정하기는 싫어 시선을 돌렸더니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중혁이 짧게 한숨을 쉬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녀석은... 옷을 하나도 안 걸친 상태였고 김독자는 황급히 눈을 저 멀리까지 돌렸음 ;; 하지만 유중혁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무언가 부스럭댔다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다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왜, 하고 답했다 바지를 찾아서 입은 유중혁이 상의를 들어 입으면서 김독자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랬던 거라면 일단 사과하지."
여전히 낮고 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약간 다른 기색이 묻어있었고 김독자는 그 말에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아니... 거짓말을 한 건... 아닌데... 근데... 아냐... 거짓말인가... 그러고 있자니 옷을 다 입은 유중혁이 혀를 한번 쯧, 차더니 몸을 돌려 방 밖으로 향했다
"출근 준비나 해라."
...;; 김독자는 일단... 그러기로 했다... 유중혁은 유중혁이었고... 패왕 방송은 패왕 방송이었으므로... 약간 애매하게 우울한 심정으로 얼른 준비를 마치고 나오니 유중혁도 김독자를 따라 현관을 나섰다 하아 시발 회사 가기 싫다 그리고 유중혁 이 자식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누르려는데 유중혁이 먼저 지하층을 눌렀음 아 지하에 유중혁 차 세워뒀었지 그래서 다시 1층을 눌렀더니 유중혁이 ? 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김독자도 ? 하는 얼굴로 마주해주자 유중혁의 표정이... 얕게 여러 번 변했다; 왜 그러지? -> 무슨 꿍꿍이지? -> 설마? 하는 삼단변화를 보며 김독자는 뭔 조화인가 싶었음
"김독자. 설마 버스 타고 출근할 예정인가."
"어? 그럼."
하, 하고 한숨쉬는 유중혁을 보고서야 김독자는 깨달았음 뭐야 이 자식 설마 태워다주려고 했나?;
"태워주려고?"
그렇게 묻자 유중혁이 미간을 문지르며 심기불편한 얼굴로 쳐다보고선 1층에서 열린 문을 닫힘을 눌러 닫아버렸다 아 그래 태워주려나보다... 우리 중혁이 착한놈이네 시발
김독자는 유중혁이란 녀석이 제게 왜 이러는지 알 길이 없었음 아니 그... 뭐... 처음에는 오해로 시작해서 미안한 마음에 나한테 빚갚듯이 했다는 건 알겠는데... 그 후로는... 밥친구 하자고 하질 않나... 그러더니 또 나랑 자...기도 하고... (이게 제일 이해가 안 가는 지점이었음 도대체 왜?) 거기서 그냥 끝이면 또 모르겠는데 내가 조금 전에 불쾌한 기색까지 보였음에도 이렇게 친절하게 회사까지 태워다주겠다는 의사를 표현한다니...
솔직히 김독자는... 유중혁과 처음 잘 때는 자기가 먼저 들이댔고... 두 번째로 잤을 때도 전혀 거부를 하지 않아 놓고선... 계속 후회하는 기색을 보여서 유중혁이 화를 낼 줄 알았다; 이랬다저랬다 뭐 하는 짓이냐고... 근데 도대체 뭐지 이 자식... 혹시 호구인가? 잘생긴 호구? 아 그런 것 같다; 젠장 나는 호구 녀석을 맘대로 이용해먹을 만큼 나쁜 성품은 아닌데 이걸 어째야 하나... 중혁아 너 직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돈도 많은 것 같은데 이상한 사람들한테 뜯기고 사는 거 아니냐 설마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조수석에 또 타고 있었고 차는 유유히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서 회사로 향했음... 회사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고... 김독자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자 마찬가지로 말이 없던 유중혁이 김독자의 회사가 멀찍이 보일 즈음에 차를 멈춰세웠음
"여기서 내려라."
"응?"
"눈에 띄는 거 싫어하지 않았나?"
김독자는 속으로 조금 또... 감동 비슷한 것을 하고 말았다 이 녀석 정말 좋은 녀석인가본데 어떡하냐 중혁아... 너 아무한테나 그러면 안된다 알겠지... 그래서 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유중혁이 팔목을 턱 붙잡았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미간을 모았다가 푼 유중혁이 말했다
"정말로 패왕 방송 때문에 매일 정시 출근, 정시 퇴근하는 건가?"
야 이 자식아...!
"아니.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하지만 김독자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유중혁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앞으로는 방송 일정을 미리 예고하겠다."
".....????????"
김독자는 매우매우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들은 말 중에 최고로 충격적인 말인데 이거...?
"뭔 소리야? 니가 패왕 방송 일정을 어떻게 알아?"
김독자는 패왕의 몹시도 들쭉날쭉한 방송 패턴을 상기했다... 그의 방송은 시즌중이든 아니든 불규칙적으로 열렸다가 닫혔고 시청자가 있든 없든 그것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캠도 마이크도 켜지 않는 방송이었음;; 그저 그 게임 닉네임이 패왕의 부계정이란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으므로 아 이거 패왕인가보다, 하고 사람들이 추측하며 그의 방송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을 뿐... 그렇게 규칙이 없는 패왕의 방송도 나름의 패턴은 있었는데 그것은... 날짜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일단 방송을 켜는 시간은 대충 7시경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패왕의 10년 팬인 김독자가 그걸 모를 리 없었고 그래서 김독자는... 게임회사에 입사한지 1년째... 회식이 있어도 째고 (야근에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곤 했지만) 패왕의 거의 모든 방송을 실시간 사수해왔던 것이다... 다시보기도 있는데 왜 굳이 실시간으로 보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실시간 방송을 봐본 자만이 안다...
그렇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니 유중혁이 약간 불쾌한 듯하면서도 미묘한 기색으로 답했다
"...아는 사이다. 패왕이랑."
"????????????????"
김독자는 펄쩍 뛸 정도로 놀라서 막 차문 손잡이에 올려놓았던 손도 떼고 유중혁을 향해 몸을 휙 기울였다
"진짜로? 패왕이랑 아는 사이라고?"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조금 물린 유중혁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독자는 지금까지 중 최고로 밝은 표정으로 얼굴 만면에 미소를 띄웠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야 내가 진짜 지금까지 게임 업계 사람들 그렇게 많이 만났어도 패왕이랑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진짜 우연히 만난 사람이 패왕이랑 아는 사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
김독자는 눈을 반짝이며 유중혁의 손을 꼭 붙잡았음
"나 패왕 싸인 한 장만 받아다주면 안 되냐 중혁아... 패왕 팬사인회도 안하잖아 그게 얼마나 억울한지 아냐"
유중혁의 얼굴이 미묘하게 씰룩거렸음; 나 패왕 신상 하나도 안 궁금하고 알 생각도 없거든... 싸인 한 장만 있으면 된다 진짜로; 아 그리고 엄청 응원하는 변방의 팬이 있다고 전해주라 그거면 돼 진짜... 주절주절 그런 말을 한 것 같은데 유중혁의 얼굴에 어쩐지 불쾌한 기색이 어렸음 아니 시발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나;; 김독자는 그제야 제가 유중혁의 손을 붙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슬그머니 놓아주면서 몸을 슬슬 물렸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요구였냐 혹시... 싸인도 안 돼? 진짜?"
"..."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더니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알겠다. 전해주겠다."
김독자는 그 순간... 지난주 금요일부터 꼬박 일주일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제 인생이 사실 이 날을 위한 액땜이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환희에 젖었음 와 시발 이런 액땜이라면 존나 대환영이다 누가 덕계못이라고 했냐 내가 바로 성덕이다 이거야; 환희의 순간이 가시고 생각해보니 유중혁 녀석한테 패왕의 열렬한 팬이라는 걸 들킨 꼴이 되어버렸으나 당장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녔음 지금 그딴 소소한 사정 따지게 생겼어?????? 어???? 패왕 싸인이 걸려있다고;;; 시발 가문의 영광이다 3대간 가보로 모시라고 해야지 아 결혼 생각은 없지만...
어쨌든 자기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은 김독자는 유중혁한테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을 간신히 꾹 눌러 참았음 물론 어젯밤에 많이 했지만 아니 아니 시발! 이런 생각은 하지 말고 시발 김독자 미쳤냐 갑자기 부끄러움에 사로잡힌 김독자는 후닥닥 차에서 내렸음 태워다줘서 고마워;;
그리고... 차를 타고 온 덕에 출근시간까진 아직 한참 남았건만 황급히 회사 쪽으로 멀어지는 김독자를 보며 유중혁은... 존나 깊은 한숨을 쉬었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그로서도 설명할 길이 없었음 김독자 저 녀석 도대체 뭐지; 유중혁은 차를 몰며 생각에 잠겼음 김독자... 이상한 놈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기가 어려운 녀석이었음 밥을 같이 먹으면 맛있게 잘 먹고... 잘 때도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매달려 오는 쪽이었는데... 이상하게 거리감이 줄어들지를 않았음 도대체 이게 뭐 하는 건지; 유중혁은 연애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이런 관계는 또 처음이었음 이상하군 무엇이 문제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내가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딱히 다른 불만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게 있으면 따박따박 따질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그 녀석은.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지만 딱히 결론은 나오지 않았음 결국 유중혁은 아직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천천히 알아나가야겠다는 평범하게 유교적인 사고를 하며 차를 세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흘긋 시계를 보고... 일요일에는 경기가 있어서 토요일도 비워둬야 할 것 같았다 방송은 못하겠군
김독자... 방송 때문에 칼출근 칼퇴근까지 한다니 그정도면 자신의 팬들 중에서도 제법 골수팬인 것 같았다 물론 유중혁은 패왕이라는 이름으로 10년간 프로게이머 활동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희한한 팬이란 팬은 다 만나봤지만... 김독자와 같은 부류도 있긴 있는 법이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는 꺼려하지만 덕질은 열심히 하는 일종의 코어팬층... 유중혁으로서는 제일 괜찮게 생각하는 팬 부류이기도 했다 일단 귀찮게 하지 않으니까;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은 것을 깨닫고 유중혁은 표정을 고쳤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웃다니 정신이 나갔다고 해도 할말이 없겠군... 어쨌든 유중혁은 집에 안착해서 켜져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채널 공지글을 썼다
[일요일까지 방송 없습니다. 다음 방송은 월요일 오후 8시.]
간결하게 내용만 적고 업로드한 뒤 모니터를 껐음... 늦었지만 간단하게 아침 대용으로 뭐라도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하고 그나저나 시간이 없어서 아침도 못 먹여서 보냈군, 어떻게 살길래 그렇게 비쩍 꼴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 유중혁은 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김독자한테 자신이 패왕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건 여러 이유가 있었음 일단은 10년간 지켜온 신념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고 해도 그걸 딱히 밝힐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그래왔고... 그것 때문에 트러블이 생긴 적도 종종 있었지만 유중혁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음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그가 패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정말 손에 꼽았고 그들은 유중혁이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독자가 그 안에 속하느냐고 묻는다면 유중혁 기준으로 아직 아니었음...
생각해보니 이런 경우도 또 처음이었음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알기도 전에 섹스부터 하고 갑자기 이런 관계가 되어서... 물론 유중혁은 절대로 누군가와 아무 마음도 대책도 없이 자는 타입은 아니었으니 이번에도 진심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유중혁도 처음인 경우뿐이었고 역시 약간 혼란이 왔음 김독자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어쨌든 그런 이유 말고도 유중혁은 그놈의 성실한 마인드때문에 자기 팬이랑 사귀어 본 적도 없어서...... 김독자한테 더더욱 자신이 패왕이라고 밝힐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걸 말해버리는 건 일종의 치트키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동등해야 할 관계가 우상과 팬이라는 관계로 어그러지는 건 절대 원치 않았음
그래서 유중혁은... 이런저런 깊은 고민을 안고... 아침을 보냈음... 김독자가 자신을 애인은 커녕 친구라고조차 생각하지 않는다곤 꿈에도 알지 못하고...
오랜만에 9시 이전에 회사에 도착한 김독자는 (늘 딱맞게 도착했었음) 여유롭게 근처 카페에서 바닐라라떼를 사서 출근카드를 찍는 여유로운 아침을 보냈다 커피는 역시 달아야지; 커피를 크게 즐기지는 않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직장인이라 아침엔 먹어줘야했고 오늘은 믹스커피 대신 맛있는 커피를 먹어서 기분이 좀 하이했음 물론 몸뚱아리가 하이하지 않으니 기분이라도 하이해야 밸런스가 맞았다;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주저앉았더니 오늘도 자신처럼 정시 출근한 유상아가 옆에서 빙긋 웃었음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입니다."
유상아와는 입사 동기인 것도 있지만 입사 시험 때 같이 문제해결을 한 적도 있어서... 그의 협소한 인간관계에 있어 그야말로 빛과 소금같은 사람이었다 김독자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걸 그다지 원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꺼리는 편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김독자는 이렇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절대 물어오지 않는 유상아가 몹시 기꺼웠음 자신도 유상아에 대해 업무적으로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무엇도 묻지 않았으니 그렇게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목소리에 김독자는 멈칫하고 말았음
"독자 씨 오늘 그 노란 람xxxx 타고 출근하셨나요?"
김독자는 하마터면 모 드라마의 모 장면처럼 커피를 입가로 줄줄 흘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음 입에서 빨대를 빼며 황급히 답했다
"예? 갑자기 무슨..."
유상아가 눈을 깜빡이더니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김독자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유상아와의 대화가 본의 아니게 새어나갈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상아가 누군가에게 말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믿어도 될까? 잠시 고민한 김독자는 그럴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1년이나 지켜본 게 있으니 어느 정도는... 그래서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음
"네. 어떻게 보셨어요?"
"저 요즘 자전거 타고 출근하거든요. 막 근처까지 왔는데 거기서 내리시는 걸 봤어요."
아, 젠장. 어차피 아니라고 잡아떼도 소용 없었겠다 현장을 들켰으니; 그래서 김독자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유상아가 말을 이어왔음
"그 차, 회사 앞에 몇 번 왔었던 것 같은데... 독자 씨 친구분이신가봐요."
"네, 뭐. 그렇습니다."
친구라기엔 좀 애매한 구석이 있는데 그냥 밥메이트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 그치만 밥메이트라기엔 잠도 두번이나 잤는데 그럼 ...... 섹스메이트라고 해야 하나? 아니 시발 아니다 이게 뭔 소리냐 김독자는 얼른 고개를 저었고 유상아가 의아한 눈을 했지만 ; 김독자는 태연한 얼굴을 했음 유상아도 그 이상 묻지 않고 업무로 돌아갔다 김독자는 마우스를 딸깍여 또 쌓여 있는 고객불만사항 정리본과...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업무량을 가늠하며 한숨을 쉬었음 시발 야근은 안돼 기필코 6시전에 끝낸다;
그리고 슬쩍슬쩍 월루를 하며 패왕의 방송 페이지를 흘끗 살핀 김독자는 진짜로 화들짝 놀랐음 헉 시발 패왕이 공지를 썼다고? 실화냐 ; 공지 내용도 심지어 방송시간 예고였다 김독자는 정말... 믿을 수가 없었음 뭐야 진짜냐...;; 유중혁이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행동할 줄도 몰랐기에 어안이 벙벙했음... 근데 진짜 신기하네 유중혁 자식 어떻게 패왕이랑 아는 사이지? 그리고 자기가 10년간 봐온 바로는 패왕도 고집이 상당히 센 편이라 무언가 원칙이 있어 지금까지 그렇게 불규칙적인 방송을 했던 거라면 이렇게 쉽게 공지를 쓰지 않았을텐데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고 김독자는 엄청나게 붐비는 퇴근길 버스에 간신히 올라탔음 존나 콩나물 시루가 따로 없네 시발; 사람들 틈새에 꽉 껴서 숨만 쉬며 김독자는 생각하고 말았다 아... 유중혁이... 태우러 와줬던 거... 진짜 편했는데...;; 사람이란 게 정말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유중혁이 회사에 찾아오는 거 그렇게 극혐했건만 곧바로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앉아 있다니;
김독자는 유중혁이 생각난 김에 다시 그에 대한 생각 정리를 시작했음 그러니까 나랑 유중혁은... 이걸... 무슨 관계라고 해야 하는 거지? 김독자는 친구가 있어본 적도 별로 없었음은 물론이요 이런 관계도 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에 적당한 말을 알지 못했음 그냥 밥만 먹는다기엔 자기도 잤잖아... 앞으로 더 안 자면 그냥 밥메이트라고 하면 되는 거 아냐?
근데 과연... 앞으로 더 안 잘까?; 김독자는... 거... 솔직히... 자신이 없었음...;; 유중혁이랑 자고 나서 두번 다 후회하기야 했지만 그건 원나잇을 두번이나 해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였지... 자는 그 순간만큼은 존나 일말의 후회도 없었음... 김독자는 문득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버스에서 제 뒤에 닿았던 유중혁을 생각했음 생수병이냐고 화들짝 놀라 오해할 정도의 그... 그...... 그랬다 유중혁과의 섹스는 가타부타 첨언할 것도 없이 진짜 엄청나게; 좋았기때문에; 처음 하면 아프기만 하다던데 무슨 조화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새 인터넷에 검색을 때려본 김독자였음) ...
덜컹거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김독자는 버스 바닥이 꺼질 정도로 한숨을 푹 쉬었음 유중혁이 그 얼굴로 만약에 또 수작을 부리면 그는... 홀라당 넘어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인정할 수밖에 없네... 유중혁이랑 내가... 섹파라는 걸... 그렇게 생각하니 약간 침울해졌음 첫 애인보다 첫 섹파가 먼저 생기고 말았다 내 인생...
약간의 우울에 젖어 김독자는 멍하니 잘 보이지 않는 차창 밖을 바라봤다 저녁 뭐 먹지... 아... 시발 맛있는 거 먹어버릇 했더니 이제 편의점 도시락 먹기 싫다... 이래서 사람이 살던 대로 살아야 하는데 이게 뭔 꼴인지 모르겠다 맛있는 게 있는 줄도 몰랐으면 이럴 일은 없었는데;
그렇게 그날 저녁을 김독자는 공복에 맥주캔을 따고 오징어다리를 씹으며 보냈음 왜 이렇게 궁상이냐 김독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의 삶은 원래가 이랬음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평소에도 종종 도시락이 물리면 그냥 끼니를 거르고 맥주로 대신하기도 했고 또, 그리고...
문득 김독자는 자신의 삶이 왜 이런 모양인지 왜 이런 모양이어야만 했는지 멍하니 생각했다 매일매일 눅눅한 녹빛같은 인생, 특별히 즐겁고 행복한 일은 일어날 리 없는 건조한 삶 그걸 나쁘게 여겨본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필사적으로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에 휴대폰을 들고 만지작거리고 있었음 김독자는 멍하니 손을 움직여 연락처 앱을 켰다 회사 동료들 몇몇의 이름, 얼굴이 매치되지 않는 동창들의 번호, 그리고 가족으로서의 호칭이 아니라 '이수경'으로 저장되어 있는 어머니의 연락처
연락을 하지 않은지는 몇 년이 지났다 오늘따라 불쑥 문자라도 남겨보고 싶은 충동이 피어올랐지만... 김독자는 그 조금 위에 위치한 이름 세 글자를 보고 충동을 집어넣었음 유중혁, 이라고 적힌 연락처... 이름도 잘생긴 새끼... 김독자는 짧게 망설였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음 약간 긴듯한 신호음이 지나고 낮은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음
[김독자?]
여보세요, 대신 들려오는 제 이름에 김독자는 어쩐지 갑자기 목이 콱 메어 잠시 입을 다물었음 대답을 하지 않자 유중혁이 재차 그를 불러왔다
[김독자. 왜 말이 없지? 무슨 일 있나?]
간신히 목을 가다듬은 김독자가 웃음으로 말을 시작했다
"아무 일 없어."
대뜸 전화를 걸어놓고 처음 하는 말치곤 너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유중혁은 대화를 이어주었다 정말이지... 고맙게도;
[차단은 확실히 푼 모양이군.]
김독자는 피식 웃어버렸다
"푼 거 직접 보여줬잖아, 못 믿었냐."
[차단해 놓고선 까맣게 잊고 있던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새끼가 왜 이렇게 맞는 말만 해 ;
"어쨌든."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고 손가락을 들썩인 김독자가 말했음
"바빠?"
[왜?]
"그냥."
[바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김독자에게는 어쩐지 그 말이... 김독자가 원한다면 시간을 내줄 수도 있다는... 그런 말처럼 들렸고 그래서 소파에 고개를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럼 됐어. 잠깐 이렇게 통화나 해."
그 말을 입밖으로 낸 후에야 김독자는 깨달았다 아, 내가 외로웠나보다... 대화할 사람이 있었으면 했나보다 그래서 연락처 앱을 켜놓고도 연락할 사람을 못찾아서 섹파한테나 연락하고 있는 인생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유중혁의 목소리에 몹시도 안정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음... 이 자식 섹파 주제에 뭐가 이렇게 친절한 거냐, 오해하겠다 인마.
그런 생각을 하며 유중혁과 짧은 통화를 끝낸 김독자는 은근하게 올라오는 술기운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지금 씻고 침대에 누우면 딱 알딸딸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김독자는 정말로 오랜만에 패왕이나 회사 걱정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유중혁이 나오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주말은 조용히 지나갔음 불과 2주 전에도 평범한 주말을 보냈던 김독자는 어쩐지 그게 2달 전 일처럼 느껴진다 생각하며 침대에서 굴렀다... 유중혁은 무슨 일이 있는지 주말동안은 바쁠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나 아직도 이녀석 직업 모르잖아 다음에 만나면 물어볼까... 패왕 방송도 주말동안은 없다고 했으니 흐음...
김독자는... 생각했다... 주말이... 원래 이렇게... 심심했나...?; 이상했음 패왕은 방송을 그렇게 자주 하는 편도 아니었으므로 방송이 없어서 심심한 건 아니었음 심지어 내일... 일요일엔 패왕 경기도 있는데... 이 허전함은...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김독자는 버릇이 잘못 들었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음 아 젠장... 사람 만나는 게... 이렇게 재밌는(?)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치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또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서 안면을 트고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는 김독자였음 내가 왜 모르는 사람이랑;
어느 정도로 심심했냐면 회사에 나가서 어제 검토하다 만 신규 캐릭터 밸런스 문제나 좀 더 고민해보고 싶은 심정이었음 (물론 생각하자마자 1초만에 그만뒀다) 펄쩍 몸을 일으켰지만 허리가 살짝 말을 듣지 않아 삐걱거린 김독자는... 나 혹시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에 휩싸였음 그야 유중혁 자식은 몸이 좋은 만큼 체력도 좋았고 정력도... 아니 시발 그만 생각해야... 그치만 그 자식한테 맞추려면 나도 체력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 내가 왜 그놈한테 맞춰? 너 걔랑 또 잘거야? 진짜냐 진심이냐 김독자;;
김독자는 좁은 방안을 서성거렸음 도대체 뭔 생각인지; 아냐 그걸 떠나서 생각해보자... 내 몸 상태가... 과연 정상인가? 김독자는 올해 초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가만히 떠올렸음 다행히도 큰 이상은 없지만 늘 낮게 나오는 체질량지수와... 권고사항에 쓰여있는 근력운동 권장이라는 글... 길게 살 생각은 없지만 어차피 짧게 살거라면 굵고 짧게 사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반쯤 충동적으로 집 근처에 헬스장이 있나 뒤적거리는데 역시나 엎어지면 코닿는 거리에 하나가 있었고 심지어 개인 PT 할인 이벤트도 하고 있었다 아니 이런거야 상술로... 언제나 상시할인중이겠지... 싶었지만 그래도 다른 데보단 가격이 상당히 저렴했음 하지만 아직 갚아야 할 대출금도 이래저래 남은 김독자로서는 조금 고민을 해야 하는 금액이었고... 그렇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김독자는... 나중에 유중혁에게 물어보기로 결심한다...; 그녀석 분명히 몸 관리하는 것 같으니까 추천도 잘 해주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자마자 김독자는 또 속으로 벽에 이마를 좀 박았음 와 나 지금 모든 생각이 다 유중혁으로 귀결되고 있는 거 진짜냐... 김독자 친구가 없어서 넹글 돌아버린 것인가... 그는 나름대로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편이었음 슬프게도... 아니 뭐 친구 없는 삶에 불만 같은 건 전혀 없었지만...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음 만난지 고작 일주일 조금 넘은 녀석인데 왜 이렇게 제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버렸단 말인가... 그래서 김독자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랑 좀...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너무 가까워지면 안되겠어 내 생활이 흔들리고 있다고;
김독자는 그렇게 유중혁이 알았다간 기가 차서 뒤집어지고도 남을 생각을 하며 휴일을 보냈다 일요일엔 패왕 경기도 챙겨보고 (패왕... 오늘도 개 쩔었다...!) 밤에는 출근 싫다 생각을 하며... 그치만 내일은 패왕 방송하는 날이니까 힘내자... 흔한 덕후같은 생각을 하며 잠드는 김독자였음
하지만 역시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맘대로 덜어내어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니었음 게다가 주말엔 바쁠 거라던 유중혁이 월요일도 연락이 없어 김독자는... 또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선 한숨을 푹 쉬었음 아, 시발 유중혁 진짜 신경쓰이게 하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게 뭐 연애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 사이에 밀당 같은 거 하는 거 아니랬으니까 퇴근하면 내가 먼저 연락해야겠다... 근데 우리 친구 맞나 혹시 이녀석이 정색하면서 '친구 아닌데.' 라고 말하면 어쩌지 싶어 김독자는 속으로만 생각하기로 했음 ;
어쨌든 그렇게 오늘도 칼퇴각을 재며 일을 하던 김독자는... 퇴근 30분 전 떨어진 일 때문에 추가근무를 하게 되고 마는데... 아! 시발! 오늘 패왕 방송 있는 날이라고요 어째서 내게 이런 일이??? 패왕이 방송 예고까지 해줬는데????????? 이럴순없다 하지만 별 수 없었음 회식이야 빠진다쳐도 이건 꼭 집어 자기 앞으로 떨어진 일이고 게다가 마감일이 촉박해서 (시발 그럼 미리 주던가) 얼른 넘기라고 성화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라고 마감(?)을 친 김독자는 간신히 2시간 초과근무로 끝내고 퇴근할 수 있었다
회사 문을 나서자마자 이어폰을 꽂고 패왕 채널을 켰음 시간은 8시 10분을 넘어가고 있었고... 방송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음 패왕님 이렇게까지 칼같이 8시에 시작하셨어야만 했습니까 인간미 있게 10분만 늦었어도... 이럴수가 앞부분 놓쳤어...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퇴근버스부터 집 현관에 들어서기까지 휴대폰 화면으로 방송을 본 김독자는 집에 들어와 안락하게 데스크탑 화면으로 방송을 시청하며 짧게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앗 그러고보니 저녁을 안 먹은 것 같은데... 지금 저녁이 대수냐 싶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챙겨야겠지 체력 걱정한 게 바로 어제 일이니까; 싶어 냉장고를 뒤졌고 나오는 건 맥주뿐이었음... 앗... 아앗... 이제라도 집앞 편의점에 다녀올까 싶었지만 그러자니 또 귀찮았음 뭣보다 패왕 아직 방송중이고...
그래서 또... 맥주로 저녁을 때운 김독자는... 10시경이 되어 뚝 끝난 패왕 방송에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음 다시보기 뜨면 앞부분 놓친것만 보고 자야겠다
막 씻으러 욕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휴대폰이 울었음 누구지 이 시간에?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음 스팸전화 아니면 유중혁이다; 앗 시발 그러고보니 오늘 먼저 연락해 본다는 게... 추가근무로 패왕 방송타임이 되어서... 깜빡 잊어버렸다 야 중혁아 미안 너보다 패왕이 더 중요했다; 미안한 마음에 김독자는 얼른 전화를 받았음
"여보세요?"
[김독자.]
"어, 중혁아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머쓱해서 대충 말이 나왔음 그런데 유중혁은 좀 의외인 말을 뱉었다
[방송은 봤나?]
엥? 무슨 방송? 패왕 방송 말하는 건가? 그러고보면 패왕이 방송예고 해준 것도 유중혁 덕분인데 감사인사를 더 해도 모자란 것 같았다
"응, 당연히 봤지. 근데 앞부분 조금 놓쳤다."
[...왜? 방송 예고도 했는데?]
어째 약간 불쾌한 듯한 기색으로 물어오는 것이 의아하긴 했지만 김독자는 대답했다
"아니 오늘 갑자기 추가근무할 일이 생겨가지고... 나도 억울해 죽겠다 다시보기 할거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중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음
[김독자. 혹시나 싶어 묻는 건데...]
"응?"
[저녁은 먹었나?]
...;; 이새끼... CCTV 달아둔 거 아냐...?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지만 김독자는 움찔하고선 대꾸했음
"어 당연히 먹었지"
[아닌 것 같은데.]
"진짜거든?"
[뭘 먹었지?]
김독자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음... 대충 평소대로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다고 둘러대도 됐겠지만 어째 그렇게 말하면... 이 미식가 녀석에게 질타를 받을 것 같았다; 그딴 허접쓰레기를 먹다니 사람이냐면서 막... 파르르 몸을 떨고 있자니 수화기 너머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가겠다.]
"...?????"
미친놈이 오긴 뭘 와?
[저번에 보니 냉장고도 텅 비어 있던데. 집에서 요리 안 해먹지.]
이 새끼 그건 언제 봤대...;;
"요리에 소질 없어서 어쩔 수 없거든, 인마."
[늦었지만 야식이라도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라. 금방 간다.]
아니... 유중혁 이 새끼야 좀 진정해봐... 김독자는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유중혁이 또 이 집에 들어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얼른 거절의 말을 뱉으려고 입을 열었음 근데... 조금 궁금하긴 하다... 유중혁이 야식 만들어준다고...? 이녀석 설마 요리도 잘해? 그렇지 않고서야 맛없는 건 안 먹는다는 놈이 직접 요리를 할 리가? 한번 생각하고 나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음... 거기다가... 배도 고프긴 고팠음
그래 이건 생리현상때문이다 식사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럼 ; 딱 야식만 먹고 헤어지는거야 김독자 알겠냐; 그렇게 스스로와 다짐한 김독자는 곧 집에 도착한 유중혁에게 문을 열어주었음 유중혁의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려 있었음 뭐지? 싶었지만 곧 제 집 냉장고가 텅 비어있으니 재료를 사온건가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김독자는 머쓱하게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유중혁을 맞이했음
"어... 어서와, 늦은 시간인데 괜찮냐?"
유중혁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선 김독자를 약간 한심한 눈길로 쳐다봤음 야 이 새끼야 나도 ...... 나도 밥 잘 챙긴... 그치만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김독자는 눈만 가늘게 떠주고선 현관문을 걸어잠갔다 언제 와봤다고 제집처럼 자연스럽게 주방으로 향한 유중혁이 봉투에 든 물건을 풀어놓았다 상추를 비롯한 채소 몇 종류와 소면과...
"웬 김치?"
곁에서 기웃거리며 묻자 유중혁이 미간을 좁혔다
"집에 김치도 없길래 일단 가져왔다. 제일 기본적인 반찬조차 없는 걸 보니 집에서 뭘 먹고 살았을지는 뻔하지."
하...... 유중혁 이자식... 팩트폭력이 아팠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찡하고 고마웠음... 직접 담근 것 같은데 이거... 그런데 봉투에서 나온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음 웬 고춧가루부터 시작해서 식초 간장 참기름같은 양념장들도 작은 병 사이즈로 튀어나오는 게 아니겠음... 야 이건 다 뭐야? 그렇게 물었더니 유중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먹일 일이 좀 많을 것 같아서."
...;; 이녀석 여기서 살림을 차릴 셈인가 헛 내가 무슨 말을;; 김독자는 뭐라 항의할 새도 없이 손을 씻고 척척 주방을 뒤지는 유중혁의 모습을 바라봤음
"냄비도 사와야 할지 고민했는데 그 정도까진 아니군."
이자식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한 거냐... 어쨌든 냄비에 물을 끓이고 도마를 꺼내 김치와 야채들을 착착 썬 유중혁은 고추장 1T 다진마늘 1T 고춧가루 1T 식초 1T 간장 1.5T ... 기타등등을 섞어 양념장 같은 걸 만들기 시작했음 김독자는 어느새 식탁에 앉아서 그걸 지켜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근데 메뉴가 뭐야?"
"김치비빔국수."
시발 메뉴만 들어도 맛있겠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턱을 괴고 유중혁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봤음 유중혁의 손놀림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깔끔했으며 확실했다... 요리라곤 뭣도 모르는 김독자로서도 몹시 대단하게 보였음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독자의 앞에는 잘 삶은 소면 위에 김치와 양념장과 여러 야채들이 곁들여지고 깨가 뿌려진 채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엄청나게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김치비빔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음... 입을 뻐끔거리며 진심으로 감탄하자 맞은편에 앉은 유중혁이 젓가락을 건네줬고 김독자는 빙긋 웃으며 감사인사를 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유중혁은 눈썹을 살짝 들썩였고 이어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은 것 같았다... 진짠가? 다시 보니 이미 원래 표정으로 돌아와 제 몫의 국수를 비비고 있었지만... 야식의 맛은 어땠느냐하면 첨언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두면 될 것 같았다 이게 딱히 엄청난 요리 실력이 필요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이녀석... 손놀림이... 보통이 아니다...;; 다른 요리도 잘할 것이 틀림없었음 그리고 설거지권마저 뺏긴 김독자는 그릇을 씻는 유중혁의 뒤에서 알짱거리다가 유중혁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저리 가 있어라."
"안 가면?"
"안 가면..."
장난 좀 쳐본 거였는데 유중혁이 사납게... 노려보는 시선을 보내서... 식겁한 김독자는 얼른 주방을 빠져나왔음 저녀석 성깔 장난 아니네;; 그렇다고 노려볼 건 또 뭐야... 투덜대기도 잠시 스마트폰을 조금 들여다보고 있자 유중혁이 곁으로 다가왔음
"먹을만 했나?"
"어, 맛있었어. 약간 맵긴 했는데."
그 말에 쓸데없이 친절하게도 다음엔 덜 맵게 해주겠다, 라는 말이 이어붙어 김독자는 어쩐지 조금 간질거리는 심정이 되고 말았음 아니... 왜 그런 소릴 하냐고, 유중혁.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궁시렁대고 있자니 유중혁이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 시발 깜짝이야;
김독자는 이 집안에서 늘 혼자 있는 것이 익숙했고 사람이라곤 정말로 들여본 기억이 없었음 그 흔한 집들이조차도 안 했었으니까... 그래서 이 작은 공간에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이 몹시도 낯설었음 머쓱하게 몸을 살짝 옆으로 물리자 유중혁이 조금 심기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김독자는 그냥 무시했음 내가 더 불편해 인마...;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추가 근무가 있었다고?"
"어? 어, 응. 두시간이나 더 해서 8시에 퇴근했다. 덕분에 패왕 방송 앞부분 놓쳤네."
한숨을 푹 쉬고 있자니 유중혁이 무언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김독자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음
"다음부턴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해라."
???? 내가 왜? 그런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고 김독자는... 참지 않았음
"내가 왜?"
"..."
유중혁이... 세상에서 제일 난해한 철학서같은 얼굴로 김독자를 바라봤음... 이녀석 정말 가끔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유중혁이 말했다
"그냥 말해. 말한다고 네가 손해보는 것도 없지 않나?"
아니 뭐 거야 그렇긴 한데...;; 그래서 김독자는 알겠다고 답했고 이윽고 환한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음 김독자는 그래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야, 중혁아. 너 패왕이랑 진짜 친한가보다."
그 말에 뒤늦게 유중혁이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나 싶어 갸웃했더니... 싸인도 받아왔는데 깜빡하고 차에 두고 내렸다는 얘기였다 어째 그걸 말하면서 굉장히 착잡한 표정인 것이 이상했지만 김독자는 픽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다음에 줘도 돼. 급한 것도 아니니까. 아니면 이따 너 가기 전에 나도 내려가서 받아오든가."
그렇게 말하고 나니 아, 유중혁이랑... 다음이라는 게 있는 거구나. 그래도 괜찮은 건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김독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패왕이랑 만나볼 생각은 없나?"
김독자는...... 화들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음 아니 이자식이 지금 뭔 소리야;;
"패왕이랑? 내가?"
유중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음 김독자는 어버버하며 대답했다
"패왕 신상... 비밀이잖아?"
"그렇지."
"근데 패왕이 나를 왜 만나?"
김독자는... 정색을 했음...
아니 중혁아 내가 패왕 팬이긴 하지만 패왕이 10년이나 개인 신상을 밝히지 않은 건 다 뜻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근데 거기에 한낱 일개 팬인 내가 끼어들면 안 되지 않겠냐? 그리고 나는 패왕이랑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생각 전혀 없거든 그냥 멀리서 응원하는 거면 충분하고 늘 좋은 경기 보여줘 (이하생략)
주절주절 얘기를 하니 유중혁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고 김독자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말을 마무리했음
"그러니까 그... 나는 만날 생각 없다고.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
유중혁의 침묵은 오랫동안 이어졌음 뭐지 설마 패왕이 먼저 날 보고 싶어했다거나 그딴 건 아니겠지... 어쨌든 김독자는 잠자코 유중혁의 대답을 기다렸고 유중혁이 "알겠다." 하고 무거운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음... 유중혁이 흘긋 시계를 살폈다 열한 시를 조금 넘어가는 시간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독자는 그를 따라 지하로 내려갔음 지하주차장에는... 노란 차 안보이는데...? 유중혁이 시동을 건 것은 무난한 (물론 평범하지는 않은) 검은색 세단이었음 뭐야? 네 차야? 그렇게 물었더니 끄덕이는 유중혁을 보고 김독자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음 이 자식 이렇게 눈에 덜 띄는 차도 있으면서 굳이 그렇게 누가 봐도 절대 못 잊을 차를 몇 번이나 끌고 찾아왔겠다... 일부러 그런 거 아냐? 하는 의심도 들었음; 그런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유중혁이 어깨만 으쓱하고는 운전석을 열어 희고 판판한 종이를 꺼냈음 A4보다 조금 더 커보이는 사이즈의 종이를 받아들며 김독자는 짧게 감격했다 이게... 패왕 싸인... 그 희귀템이라는... 글씨도 잘쓰네 존나 간지나... 역시 유중혁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간 좀 거리감을 두고 싶었던 유중혁도 좀 예뻐보일 지경이었음
그러고 있으니 머리 위에서 픽 웃는 소리가 들려왔고 김독자는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유중혁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새도 없이 크고 따뜻한 손이 귓가를 문지르고 뺨을 감싸왔음 김독자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굳었다
유중혁? 갑자기 무슨... 입을 뻐끔거리기도 잠시 제 뺨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음 아니, 잠깐만, 잠깐, 유중혁... 야...! 제대로 말이 되어 나오는 소리는 없었고 유중혁의 손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선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닿았던 자리가 화끈거리고 뜨거웠음 입술을 꾹 깨물며 쳐다봤더니 유중혁이 낮게 웃으며 잘자라, 김독자. 라고... 말한 것 같았다. 사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유중혁의 웃는 얼굴이나 목소리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그러면서 운전석에 올라타 문을 닫으려는 유중혁의 손을 붙잡고 제 몸을 밀어넣은 김독자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할 말을 정리하지 못한 채 입부터 열었음 야, 그, 잠깐만, 너...
"너 그래서 직업이 뭐야?"
아니 시발 김독자 지금 뭔 소릴 하냐 이 상황에서 그런 질문이 나와???? 이미 더 달아오를 것도 없을 것 같던 얼굴이 다시금 뜨거웠고 유중혁은... 무슨 소리냐는 듯 잠시 눈썹을 들썩이더니 곧... 눈을 가늘게 뜨며 김독자도 처음 보는 짙은 미소를 피워올렸다. 문이 닫혔고, 잘 빠진 검은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김독자는... 조금 전 유중혁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궁금하면, 다음에 다시 물어봐라.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그렇게 말하니까 오히려 다시 물어볼 수가 없었음 왜 그런 말을 한 거지?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하는 건가? 그렇지만 말해주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다시 물어보라는 건... 온갖 생각이 머리를 헤집었음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김독자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건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 차마 뱉질 못해서 대신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갔던 그 말이었다.
유중혁, 자고 가.
김독자는 짧은 순간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흰 페인트가 칠해진 차가운 콘크리트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얼굴이 뜨거운 건 확실히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유중혁은 그 뒤로 더 자주 방송을 했다. 한달에 두세번 꼴이던 것이 일주일에 두번, 세번으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아예 월수금 저녁 8시로 시간이 고정되었음 물론 그렇게 된 이유는 다 김독자 때문이었다... 힘들게 일하고 와서 패왕 방송을 보면 피로가 싹 가신다는 말에 타협한 유중혁이었음
애초에 방송을 켜지 않아도 게임 플레이는 연습 때문에 늘 하고 있었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음 그리고 김독자는... 처음엔 야근사실을 보고(?)하라는 유중혁의 말에 어리둥절한 얼굴만 했으나 이제는... 제법 편해진 것인지 먼저 유중혁에게 연락이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야 중혁아 나 오늘 야근함ㅜ 그런 연락이 종종 오곤 했고 그러면 유중혁은 그날 방송을 쉬었다. 김독자는... 그것도 모르고... 야 니가 패왕한테 얘기해준거냐? 고맙다 놓쳤으면 집가서 밤새서 다시보기 볼뻔했네 그런 속편한 소리나 했다...
그리고 매주 주말이면 유중혁은... 김독자의 집을 찾아가거나 그를 제 집으로 불렀음 김독자는 늘 귀찮아, 피곤하다, 용건이 뭔데? 그런 어이없는 소리들을 늘어놓았으나 유중혁이 다짜고짜 찾아가면 문전박대하지 않았고 결국은 유중혁과 만나주었음... 데이트 약속 잡기가 이렇게 어려운 애인은 또 처음이라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 .
그리고 유중혁이 은근한 함의를 담아 하얀 목덜미를 슬쩍 쓸거나 손가락을 얽어 잡으면 김독자는... 안 된다고 말했던 게 거짓말처럼 너무 쉽게 넘어오곤 했음 이것도 당황스럽다면 당황스러운 부분이었음; 이녀석 처음에는 몹시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가...
하여간 그렇게 종잡기 어려운 애인과 만나고 있는 유중혁은 요즘... 주변으로부터 애인 생겼냐는 소리를 듣고 있었음 프로게이머 후배 이지혜까지 알아차릴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였다; 사부 애인 생겼지? 맞지? 짓궂은 웃음을 짓는 이지혜에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지혜는 재미없다는 얼굴을 했다... 애인 누군데? 나도 소개시켜줘 그런 소릴 하길래 유중혁은... 조만간 자리를 잡아보겠다고 말했음...
한편 김독자는... 짬을 내서 다녀온 건강검진 결과를 받아보고 아연해졌음 몸무게가... 몸무게가? 제 인생에서 처음 찍어보는 최고치였음 그래봤자 남들보다야 썩 마른 수준이었지만 김독자로서는 미묘한 기분이었음 왜 이렇게... 살이 쪘지? 이게 다 유중혁이 먹여서... 근데 그자식... 날 먹인만큼... 괴롭히고 있지 않나? 빠져야 맞는 거 아냐? 그렇다 김독자는 그런 불순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유중혁과 만난지도 벌써 세달정도 되어가고 있었으니 역시 인간은 적응을 잘 하는 생물이었다
김독자는 요즘 좀... 뿌듯한 것 같았다 믿기 어렵지만 그랬다; 늘 친구 없는 김독자로 살아왔는데... 나한테도 친구 있다고... 아 친구가 이렇게 좋은건줄 진작 알았으면 친구 더 많이 만들걸...(;;) 물론 만들고 싶다고 맘대로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중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디보자... 김독자... 지금... 주차장이다 아니 시발 유중혁 미친놈이 또 연락도 없이 쳐들어왔어; 김독자는 후다닥 거실바닥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음 친구 있어서 좋다는 말 취소다 신경쓸게 너무 많다고... 왜 신경을 쓰고 있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김독자였음
어쨌든 그날도 유중혁은 평범하게 김독자의 집을 찾았고...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피딩(;)당했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음 주방에선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을 활짝 걷어 햇살도 따뜻하고 배도 부르고 몹시 기분이 좋았음 점점 몸이 허물어지듯... 누웠음
어느새 설거지를 끝냈는지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집안 꼴이 이게 뭐냐며 잔소리하는 소리가 얼핏 스친 것 같았다 야 그래도 정리한 거거든... 너 온대서 급하게... 그런 말을 웅얼거렸더니 유중혁은 잠시 대답이 없었음 이윽고 무언가가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고 곧 위잉... 하며 청소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중혁 깔끔한 자식...
피식 웃다가 살짝 선잠이 든 모양이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반짝 눈을 떠보니 유중혁이 소파 옆 바닥에 앉은 채 제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음 여느때처럼 체온이 높은 손가락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히 눈을 깜빡거리던 김독자는 빙긋 웃었다 청소 다 했어? 약간 놀리듯 물었더니 유중혁은 미간을 좁히며 귓불을 만지던 손가락에 살짝 힘을 줘 문질렀음...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더니 또 슬그머니 손에 힘을 푸는 게 조금 그... 귀엽다고 느껴지는 것 같기도 아니 시발 김독자 미쳤나 이건 그러니까... 그... 야생 늑대가 사람 말을 잘 듣는 걸 봤을 때의 그런 귀여움이다 그런게 틀림없다; 덩치도 산만하고 시커먼게 귀엽기는 무슨... 근데 늑대는 시커먼 것도 귀엽지 않나? 아 시발...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래서 김독자는 대충 아무 말이나 꺼내기로 했다
"야."
대뜸 부르자 유중혁이 눈썹을 까딱이며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음 그러는 와중에도 만지작거리는 손길은 끊이질 않아서 슬슬 뺨과 턱으로 옮겨가더니 목덜미와 쇄골을 쓰다듬었다 간지럽고 저릿한 느낌에 움찔한 김독자는 얼른 다시 할말을 찾았음 이대로 휩쓸리면 뒤는 불보듯 뻔했음...
"청소 하느라... 고생했다고."
대충 말했더니 유중혁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새삼스러운 소릴 하는군. 하루이틀도 아니고."
이 자식이...;; 다시 손길이 이어지려 해서 김독자는 황급히 다시 말했다
"아니 그냥, 친구 있어서 엄청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유중혁의 손이 뚝 멎었음... 김독자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유중혁? 왜 그래? 그렇게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음 그 표정은 김독자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라 알 길이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음... 이자식... 화났는데...??;; 내가 뭘 잘못 말했지? 김독자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음 방금 한 말의 대체 어느 부분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혹시 너무 이용해먹는 것처럼 들렸나? 아니면... 친구라고 칭한 게 잘못됐나? 그런 건가? 시발... 고민하느라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유중혁이 몹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음
"김독자."
"...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김독자는 직감했음... ■된 것 같다고... 그리고 유중혁은 거의 이를 악물다시피 한채로 짓씹듯 말했음
"친구라고?"
아... 그래 시발 좆된 거 맞네... 유중혁의 분노한 얼굴을 보며 김독자는 침을 꿀꺽 삼켰음 아 역시... 내가 너무 주제넘게 굴어서 빡쳤나보다 우리는 그냥 섹파였는데 내가 친구인 척해서...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는 됐지만 어쩐지... 속이 너무 쓰리고 가슴이 답답했음 친구가 아니었구나... 나는 도대체 뭘 기대하고...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져 입을 꾹 다물었더니 유중혁이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음 그 깊이에 김독자의 심장마저 철렁하는 느낌이었다... 유중혁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지잉 하고 울었음 빡친 얼굴로 끊어버리려던 유중혁은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더니 다시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전화 좀 받고 오지. 김독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휙 몸을 돌린 유중혁이 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독자는 그대로 잠시 굳어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음...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직도 얼굴이 뜨끈해서 두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 유중혁이 나간 현관을 바라보았다 유중혁 지금까지 전화가 와도 굳이 저렇게 나가서 받은 적은 없었는데... 정말로 화가 났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씨발 김독자 뭘 기대했냐 진짜... 친구? 니 삶에 그런 게 가당키나 하냐 부모님도 사랑해주지 않았는데 누가 너를 사랑해준다고? 그야말로 쓸데없는 기대였다
근데... 시발 억울하잖아 누가 친구 해달라고 했냐 유중혁? 먼저 내 삶에 걸어들어온 건 너잖아 그래놓고선 그런 표정이라니... 그런 얼굴을 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선을 긋고 만났을텐데... 아니 아예 안 만났을텐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심란한 얼굴로 걸어들어오는 유중혁을 보며 김독자는 마음을 굳혔음 현관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려는 유중혁의 앞을 막아섰다
"유중혁."
대답이 없는 이를 향해 김독자는 서늘한 말을 뱉었다. 이제 찾아오지 마. 일순 당황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유중혁을 밀어내 다시 현관 밖으로 내쫓았다
두고 간 거 없지? 그럼 잘가. 안녕.
망설임없이 현관문을 쾅 닫아 걸어잠그고 소파로 돌아왔음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몇 번,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 몇 번, 휴대폰이 울리기도 몇 번이었지만 김독자는 전부 못들은 척했다 한참 뒤에야 모든 소리가 멎었음
김독자는 간신히 잠잠해진 집안을 둘러보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공간... 귓가에서 유중혁이 내던 생활소음의 환청이 울리는 것 같았다. 개수대의 물소리,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 재료를 불에 볶을 때 나던 치이익 소리, 청소기가 돌아가던 소리, 그리고 제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까지.
김독자는 소음을 내지 않고 사는 방법이 몸에 흠뻑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제 집이 아닌 곳에 몸을 맡기고 살아야만 했던 세월이 아주 길었으므로. 그 습관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었고, 그래서 유중혁이 내는 소리들이 아주 낯설면서도... 반가웠었다. 그랬었는데, 이제는.
생각해서 뭐 하냐. 그냥 잊어버리자. 김독자는 생각했다. 사실 그냥... 친구가 아니라면, 그 아래의 섹파 비슷한 무언가로 남아있어도 될 일 아닌가? 그렇지만 이제 김독자는 그럴 수 없음을 알았다. 이대로 계속 유중혁과 만나게 된다면 나는 분명히... 그 이상을 기대하게 되어버릴 것이다. 그냥 뭐... 지난 세달을 없었던 취급하면 되겠지. 그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든 김독자는 유중혁의 번호를 차단하고 메신저도 차단한 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미안, 유중혁. 고마웠다.
그리고 김독자는... 이때까진 몰랐다... 불과 하루 뒤인 월요일 오후 8시면... 유중혁을 다시 만나게 될거라는 사실을... 패왕이라는 이름을 한 유중혁의 방송을. . . 보게 될거란 사실을. . . . . .
김독자는 멍하니 패왕의 방송이 켜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게임 소리는 평소처럼 시끄럽게 이어지고 있었으나 김독자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음...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느새 방송이 끝나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10시가 넘어가고 있었음 아... 뭐지? 두시간 허송세월을 보낸 김독자는 마우스를 딸깍거리다가 컴퓨터를 꺼버렸다... 어쩐지 지금은 패왕의 방송조차 볼 의욕이 나지 않았음 전원스위치까지 내린 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꿈뻑이고 있자니 유중혁 생각이 나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시발 이게 웬 청승맞은 꼴이냐 싶었지만... 그냥 있던 사람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허전할 일인가 든자리는 몰라도 난자리는 안다더니 딱 그꼴이었다
우스운 건 김독자는 지금껏 난자리에 연연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음... 어차피 모두 저와 관련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랑 연이 끊어져도 실망하거나 슬퍼하거나 허전해해본 적이 없었는데... 씨발, 유중혁 개새끼야. 그렇게 허공에 욕을 뱉어봐도 기분만 더 더러워졌음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다가 잠이 든 것 같았다. 꿈에서는 유중혁이 처음 보는 싸늘한 얼굴로 김독자.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따위의 말을 한 것 같았다. 알람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이게 웬 개꿈이냐고 생각하긴 했지만... 온몸이 찬 것은 개꿈이 아니었다. 대충 널브러진 채 잠든 탓에 초겨울 기온에 몸이 그대로 노출되어... 감기기운이 든 것 같았음 시발... 좆됐다... 아니 이렇게 춥게 자니까 그딴 개꿈도 꾸는 거 아니야... 머리가 무겁고 띵했음 시발 이게 다 유중혁 니가... 그렇게 유중혁 탓을 해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음 유중혁이 지금껏 제게 해줬던 일을 생각하면... 차마. 아니 그래도 시발 그 표정은 너무했잖아...
그렇게 유중혁 생각만 하며 출근한 김독자는... 퇴근할 무렵 인정해야만 했다... 시발 감기 진짜 된통 걸렸다. 아... 미친 이거 진짜 심한데... 어질어질해서 시야까지 흐릿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상아가 몹시도 걱정스런 얼굴로 독자 씨 내일 반차 내시고 병원이라도 다녀오세요, 그런 말을 해서 김독자는 고개만 끄덕였음
비척대며 간신히 약국에서 종합감기약을 사다가 먹고... 침대로 걸어갈 즈음에는 머리에서 스팀이 오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고... 기억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절하듯이 잠든 것 같았다 그리고 반짝 눈을 떴을 땐 새도 울지 않는... 쨍쨍한... 시간이었음
눈을 뜨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망했다는 감각에 펄쩍 일어나 얼른 스마트폰을 더듬거려 확인하니 시간은... 낮 12시를 넘어가고 있었음 아니 시발 아무리 자율출근제라지만 시발... 하며 머리를 뜯다가 메시지가 와있다는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올 데가 없는데? 그건... 유상아의 메시지였고 11시까지 김독자가 출근을 하지 않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두어 번 남아있는 부재중 전화... 그리고 끝에는 독자 씨 많이 아프세요? 회사에 전화걸기 힘드시면 제가 대신 독자 씨 월차내신다고 말씀드려 볼게요... 라는 친절한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팀 분위기가 그렇게까지 까탈스러운 편도 아니었고 사회생활에 능숙한 유상아라면 저보다 더 잘 말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김독자는 실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이 가시고 나니 온몸이 밤새 흘린 땀으로 축축했음... 일단 씻자 씻고 병원을 가자...
그런데 정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동네 병원에 가서 한참 걸려 진찰을 받은 뒤... 건물을 나오려니 비가 존나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시발 내 인생 요 며칠 왜이러지? 속으로 온갖 욕을 지껄이며 편의점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뛰어가면 그렇게 안 젖을 것 같기도 하고 아 근데 우산 사기 아깝다고 제일 싼거 사도 내 저녁값인데... 기다렸다가 그치면 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음 커다랗고 검은 우산으로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어어? 김독자는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숙여 우산 아래 얼굴을 확인했고 그건... 유중혁이었음... 김독자는 당황해서 그대로 눈이 마주친 채 굳어버렸다... 니가 왜 여깄어? 그게 제일 먼저 나와야 할 물음이었지만... 김독자는 그보다 먼저 반가운 마음이 들어버리고 만 자신이 한심해졌다...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소란스러웠음 그대로 얼마나 있었을까 유중혁이... 묵묵히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건넸고 김독자는 제 앞에 내밀어진 그것을 얼떨결에 받아들었음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눈을 깜빡거렸더니 유중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쓰고 가라. 안 돌려줘도 된다."
그러곤 무심히 돌아서려 하기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유중혁의 팔을 잡아챘다 곧바로 유중혁의 의아한 시선이 돌아왔지만 김독자는... 제 상태를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명징하지 않았음 다른 손아귀에 들고있던 약봉투를 구겨지도록 꽉 쥐며 김독자는... 말했다... 같이 가. 유중혁.
그렇게 흐릿한 정신으로 어찌저찌 집에 돌아온 것 같았다 유중혁과 한 우산을 썼던가? 그에게 거의 업히다시피 해서 왔던가? 잘 모르겠는데... 어찌됐든 유중혁은 일단 김독자에게 약부터 먹였고 김독자는 침대에 축 늘어졌다 아, 시발... 몸살감기 한번 지독하게 오네... 이렇게 크게 앓아본 게 몇년만인지 기억도 가물거렸음 그리고 아플 때 누가 이렇게 옆에 있어본 적도... 있긴 있었던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게 서러운 적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누가 있는 걸 보니 뒤늦게 그것이 서러워졌다 아, 누가 있어준다는 거... 이렇게 좋은 거였나.
유중혁은 병간호도 썩 잘했다 마치 많이 해본 사람처럼... 답지 않게도... 하긴 의외로 요리도 잘하고... 그랬지... 이마에 맺힌 땀을 닦고 지나가는 서늘한 물수건과 목까지 끌어올려지는 이불의 감촉에 김독자는 까무룩 다시 잠이 들었음
눈을 떴을 때 방은 어두컴컴했다. 아, 얼마나 잔 거지... 꾸물거리며 몸을 일으켜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중혁은... 없네. 하긴... 손을 두어 번 쥐었다폈다 하고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려 방의 불을 켰다 벽시계는 저녁 8시즈음을 가리키고 있었음 닫힌 방문을 소리없이 열고 나갔는데... 김독자는 낮에 이어서 다시 한번 굳고 말았음 주방에 유중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언가 맛있는 냄새도 나고 있었음 뭐지? 죽 같은 건가...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유중혁은 어떻게 알았는지 김독자를 돌아보고는 잠시 침묵했다
"죽만 만들어두고 가겠다. 자는 사이에 마음대로 써서 미안하군."
그런 말을 하는 게... 너무나도 새삼스러웠다 정말로... 새삼스럽게 그게 왜 미안하냐, 유중혁 이 자식아. 그렇게 말하면... 진짜로 너랑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것 같잖아.
김독자는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계속 망설여왔지만... 지금은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얘기해야 해. 나는 너와 대화를 해야 한다. 그래서 김독자는 유중혁에게 걸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들어줘, 유중혁.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죽은듯이 앓은 탓에 힘이 풀리려는 몸을 다잡았다.
유중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김독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 사인이 떨어지길 기다린 사람처럼 말을 꺼냈다... 유중혁, 주말에 있었던 일은... 미안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뒷말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뱉어진 것은... 한탄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다 유중혁 내가 그런 말을 한건 미안한데... 그래도 이 새끼야 니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진심으로... 너를...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 말은 차마 할수가 없었음 친구? 내가 너를 그런 이름으로 불러도 되나? 아닌 것 같다. 나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유중혁. 그보다 더... 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유중혁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김독자는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유중혁의 체온에 짧게 몸을 떨었다 눈꺼풀을 떨며 바라보자 유중혁이 몹시 복잡한 얼굴을 하더니 김독자의 뺨에 커다란 손을 맞댔다 그건 참 따뜻하고... 기분이 좋았다.
유중혁이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해왔다. 김독자. 이런 소릴 하는 게 우스운 꼴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너를 애인이라고 생각했었다.
? ...
김독자는... 지금껏 유중혁에게서 들은 말 중... 최고로 충격적인 말을 듣고... 오늘만 세번째로 굳어버렸음... 잠깐. 유중혁... 뭐라고...? 유중혁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김독자. 그날 카페에서 대화한 내용 기억하나?"
너랑 카페 간 게 한두번이 아닌데 중혁아... 그 표정을 본 유중혁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쳐다봤음
유중혁의 얼굴에... 예상은 했지만 한심하군... 이라는 표정이 스쳐지나가 김독자는 하마터면 울컥할 뻔했지만..
"틀렸다. 나는 너랑 처음 잔 날부터 애인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애인도 아닌 사람이랑 아무렇게나 자고 다닌다고 생각했나?"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시발 또 그렇기는 한데 아니... 중혁아 나는...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유중혁이 고개를 훅 숙이더니 입술을 맞대왔다 열린 틈새로 가볍게 입안을 훑고 지나가는 말캉한 혀의 감촉이 일순 짜릿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정말... 좋았다 그래서 김독자는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 나는... 유중혁을...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는구나... 하고. 그런 생각을 알아챘는지 유중혁이 재수없게도 잘생긴 웃음을 지었다 아, 시발... 심장에 해로운 새끼... 뜨끈한 뺨을 내리누르며 바라봤더니 유중혁이 물어왔다
원망스러운 어조로 뱉어진 말에도 유중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김독자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리고 다시금 입을 맞춰오려는... 녀석의 뻔뻔하고 잘생긴 낯짝을 김독자는 기적적으로 막아냈다. 유중혁의 얼굴이 찌푸려졌음
"뭐 하는 거지?"
김독자는 얼른 말했다
"나도 물어볼 거 있어. 유중혁."
유중혁이 물음표를 띄우며 바라보기에 김독자는... 물었다...
"너 그래서... 직업이 뭐야? 불법적이거나 위험한 일 하는 거면...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부러 그렇게 말하자 유중혁의 표정이 변했다가... 다시 변했다. 어째서인지 긴 한숨을 쉰 유중혁이 김독자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선 식탁 의자 위에 놓여있던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냈음 그건... 가면이었다. 눈과 코를 가리는 검은 가면... 김독자는 당연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겁한 얼굴로 유중혁을 쳐다봤음.
유중혁이 잠시...... 환장할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김독자의 손에 가면을 들려주었다. 김독자. 네가 직접 확인해봐라. 가면을 쥔 김독자의 손목을 붙잡은 유중혁이 그것을 천천히 움직여... 제 얼굴 위에 겹쳤고... 비로소 나타난 패왕의 모습을 확인한 김독자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음 미친... 시발... 아니... 야! 패왕... 아니, 유중혁... 이 개자식아! 그런 외침을 들으며... 유중혁은 가만히 대답했다
"이제야 알았나?"
사실 공개할지 말지 고민을 많이 해왔다 김독자는 패왕의 팬인데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종류의 팬이었으므로... 그래서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간 헤어지자고 말할까봐. 그것이 걱정됐으나... 유중혁은 김독자에게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진심이었으므로... 계속 숨기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생각했다 그래서 약간 긴장하며 김독자를 바라보는데... 김독자가 말했음
야... 이 나쁜자식아 그럼 너 지금까지 내가 패왕 찬양하던 걸 다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고? 유중혁이 묵묵히 쳐다보자 김독자는 한숨을 푹 쉬고선... 유중혁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안았다. 너라서 봐주는 거다, 유중혁. 패왕이었으면 안 봐줬어.
유중혁은 잠시 굳었다가 표정을 풀었다. 김독자. 내가 패왕인데. 아니거든 유중혁. 달라. 아니 네가 패왕인 건 맞는데... 아무튼 나한테는 다른 사람이야. 그냥 그렇게 알고 있어. 유중혁은 그만 낮게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 야. 유중혁. 내말 잘 들어. 나는 패왕 애인이 아니고 유중혁 애인이야. 알겠어?
- 또 헛소리 시작이군. 김독자.
- 아니 일단 확실히 대답 해. 너 팬들이랑 방송 시청자들이 자꾸 패왕 애인이 어쩌고 하잖아.
- 있는 그대로의 사실 아닌가?
- 아, 시발, 유중혁. 아니라고!
이래서 머글은... 김독자는 오늘도 그런 생각을 하며 유중혁의 품에 폭 안긴 채 따뜻하고 노곤한 밤을 보냈다. 시발... 모르겠다. 이 녀석 평소엔 똑똑하면서 왜 이건 이해를 못 하지? 그치만... 이렇게까지 이해를 못 한다면... 그냥 내가 패왕 애인 해줘야지 별 수 있냐. 그리 생각하며 씩 웃었더니 유중혁이 미간을 찡그리며 입술을 꾹 눌러왔다. 김독자, 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지? 이상한 생각은 무슨. 나 믿지, 유중혁. 그날도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