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중혁은 검을 들었다. 이걸로 벌써 몇 번째일까, 기억도 희미하다. 튀어오르는 핏줄기가 얼굴을 적셨다. 그렇게 몇 번을 베고 또 베었지만 병사들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지독한 회의감이 가슴을 차갑게 찔렀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살해당하는구나.
“유중혁!”
다급한 외침이 귓가에 들려왔다. 미안하다, 김독자. 더는 이들을 죽여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거겠지. 그들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죽겠다.
유중혁은 눈을 감았다. 검날이 심장을 관통하고,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눈부신 빛이 눈꺼풀 위를 간지럽혔다. 유중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일으키자 방 한 편에서 무언가 하고 있던 하얀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아, 중혁아. 일어났냐.”
누구지? 유중혁은 희미한 기억을 되짚었다. 가까이 다가와 빙긋 웃는 얼굴. 결이 고운 머리카락이 이마 위로 흩어졌다. 그래, 기억난다. 김독자…… 온 몸을 짓누르는 통증에 윽, 소리를 냈더니 김독자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다시 눕혔다.
“아직 움직이지 마. 그렇게 무리해놓고.”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러니까 분명히……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으나 필름이 잘려나간 듯 전혀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기억 안 나? 어제 나랑 하루종일 검술 수련했잖아. 그렇게 무리하면 앓아누울 거라고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그랬던가?”
“그래, 인마. 하여간 몸으로 부딪히면 다 되는 줄 알아.”
피식 웃더니 다시 테이블로 걸어간다. 약 구해왔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그 목소리를 아득하게 들으며, 유중혁은 눈을 꾹 감았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미 횟수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기억이 이리저리 뒤섞여 온전하지가 않다. 유중혁은 몇 번이고 죽었고, 그리고…… 늘 다시 깨어났다. 김독자의 곁에서. 이제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이번 회차의 일인지, 아니면 먼 과거의 일인지…… 확신이 없다. 그만큼 유중혁의 머릿속은 엉망으로 꼬여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용을 죽이기 위해 여기에 있다.
용. 세계를 지탱하는 존재. 그 누구도 모습을 본 적 없으나, 이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라면 누구나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하나의 흐름과 같은 힘. 말하자면, 세계 그 자체. 유중혁은 그런 존재를 살해해야 했다. 어렴풋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용을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그런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유중혁은 김독자를 돌아보았다. 어릴 때부터 자신과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 유중혁은 김독자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매 회차마다 김독자는 다른 특성들을 가졌지만, 회차를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속성 한 가지가 있었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
“김독자.”
“응?”
“’용살법’이라는 책을 아나.”
김독자는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용살법’? <용을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말하는 거야?”
“그래, 그거다.”
“읽은 지 좀 오래 됐는데. 갑자기 왜?”
“……나는 용을 죽여야 한다.”
김독자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갑자기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야? 유중혁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내 목표다.”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목적. 김독자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으나, 더 이상 설명해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한숨만 푹 내쉬었다.
“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안 나. 방법 두 가지는 기억나는데.”
“뭐지?”
“첫 번째는, 심장을 도려내는 것. 두 번째는, 마법으로 마력 회로를 파괴하는 것.”
유중혁은 물끄러미 그 하얀 얼굴을 들여다봤다. 역시나, 이번에도 두 가지밖에 기억하지 못하나.
김독자는 그가 등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동료였다. 때로는 아처로서, 때로는 마법사로서, 때로는 힐러로서. 언제나 유중혁의 뒤를 백업하는 강력한 아군이었다. 또한, 매번 새로이 회차를 시작해 기억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한 유중혁을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했다. 이번 회차에서는…… 함께 검술 훈련을 했다는 걸 보니, 검사인가. 그렇다면 첫 번째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겠군. 이번에는, 용의 심장을 베겠다.
(발췌시작)(발췌끝)
몇 년의 시간이 가볍게 흘러갔다. 대륙 최고의 검사 콤비로 이름을 떨치게 된 유중혁과 김독자는 드디어 용을 살해하기 위한 길에 올랐다. 용이 살고 있다는 곳, 별자리의 맥락. 두 사람은 먼 길을 걸어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먼 발치에서 흙먼지가 일었다.
“멈춰라!”
유중혁과 김독자는 의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몰려온 병사들의 무리.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네 놈이 유중혁인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곧바로 칼을 뽑아들려는 유중혁을 김독자가 황급히 말렸다.
“네, 이 녀석이 유중혁이고, 제가 김독자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무엄한 것들.”
기사가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스산한 소리와 함께 노호성이 떨어졌다.
“감히 용의 이름에 도전하는가! 위대하고 지고한 용을 살해하려 하다니, 이 곳에서 즉결 처분을 내리겠다.”
유중혁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다. 이 녀석들. 모르고 있는 건가? 유중혁은 입을 열었다.
“용은 미쳤다.”
“뭐라?”
“용은 미쳤다고 말했다. 이지를 상실해 세계를 파괴하려 하고 있다. 모르고 있었나?”
기사의 얼굴에 조금 전 유중혁의 얼굴에 떠올랐던 것과 똑같은 표정이 스쳤다.
“미친 것이 틀림없구나. 쳐라!”
“자, 잠깐만요! 일단 얘기를……”
“김독자. 소용없다. 검을 뽑아라.”
“유중혁!”
유중혁은 대꾸 없이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새카만 검신이 빛을 빨아들였다. 김독자는 욕설을 지껄이며 검을 뽑았다.
“중혁아. 아무리 우리라도 이 숫자는 무리야.”
“해보기 전엔 모른다.”
“미친 새끼……”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등을 맞대온다. 익숙한 느낌. 유중혁은 데자뷰를 느꼈다. 몇 번이고, 이렇게 등을 맞댄 채……
이 병사들을 맞이했을까.
강렬한 통증이 머리를 관통했다. 유중혁은 황급히 정신을 다잡았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다. 이 숫자는, 진심으로 맞서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 유중혁은 팔을 들어올렸다. 검날의 잔상이 까만 궤적을 그리며 흩날렸다.
그리고, 유중혁은 또 다시 죽음을 맞이했다.
밝은 빛이 눈가에 스며들었다. 유중혁은 힘겹게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향기. 공기 중에 부유하는 먼지마저 기억과 같다. 벌써 몇 번이나 다시 시작한 걸까. 비명을 지르는 근육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키자 테이블에서 무언가 하고 있던 하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중혁아. 일어났냐?”
몇 번이고 봐온 하얀 미소. 유중혁은 수백, 아니 수천 년의 기억이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젠장, 정신이 혼미하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내가 무너지면 세계는…… 남자가 다가와 서늘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괜찮냐? 마나를 너무 많이 쓴 거 아냐?”
이번에는…… 마법사인가. 유중혁은 정신을 붙잡기 위해 애써 눈을 깜빡였다. 지난번엔…… 어떻게 죽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전, 전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보다 더 전에는? 훨씬 더 전에는? 맨 처음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껏 어떻게 죽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늘 그랬다. 죽음의 순간이, 그 상황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다는 감정의 편린, 오직 그것뿐. 유중혁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침음했다.
“김독자.”
“응?”
“용을 죽이는 방법을…… 알고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해선 안 됐다.
용은 미쳐있다. 세계를 수호해야 할 존재가 세계를 부수고 있다. 그걸 아는 것은 자신 뿐이고, 또한 그걸 믿어주는 것도…… 눈 앞에 있는 이 희멀건한 사내 하나 뿐이다. 유중혁은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소망했고,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별자리의 맥락으로 향했다.
문득 곁에서 걷고 있는 김독자를 바라봤다. 자신이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그저 묵묵히 따라와주는 녀석. 희한한 녀석이다. 매번 다른 클래스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함께 해주는 것도, 가끔가다 다 안다는 듯한 미소를 짓는 것도, 슬픈 얼굴을 하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유중혁은 지독한 고독감에 몸을 떨었다.
“중혁아.”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돌아보니 김독자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중혁.”
“…….”
“세계를 구하고 싶어?”
유중혁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뭐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김독자가, 자신의 목표에 의문을 표하는 것은, 천 번이 넘는 회차 중 단 한 번도. 유중혁이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김독자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유중혁. 너는 인간을 사랑해?”
말문이 막혀 그 하얀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새카만 눈동자가 별빛을 머금은 듯 반짝였다. 세계를 구하고 싶느냐고? 인간을 사랑하느냐고? 헛된 질문이다.
당연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유중혁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것인지, 김독자는 말갛게 웃었다.
“중혁아. 너는 진짜 좋은 놈이야.”
그렇게 말하는 김독자의 뒷편으로, 흙먼지가 나부꼈다. 점점 가까워지는, 까마득한 대군(大軍). 김독자는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검었던 눈가에 붉은 빛이 서렸다.
- 퍽!
아찔한 소리가 산등성이에 울려퍼졌다. 머리가 터져나가는 병사들. 푸른 언덕이 붉게 물들어내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산을 보며, 유중혁은 치밀어오르는 토기를 억누르기 위해 입을 막았다.
“욱…….”
“중혁아.”
김독자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새빨간 눈동자가 불길한 빛으로 일렁였다. 차갑고 하얀 손이 두 뺨을 감싼다. 유중혁은 간신히 눈을 뜨고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 김독자가 지금껏 자신 앞에서 이런 식으로 웃은 적이 있었던가. 긴 손가락이 입가를 매만졌다.
“중혁아. 나도 인간을 사랑해.”
“…….”
“그게 내 의무고, 내 존재의 의의니까. 알고 있어. 누구보다도 잘 알아.”
무슨 소리일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유중혁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는 인간을 지켜야 하니까, 죽을 수 없었어. 그래서 몇 번이고 너를 죽였어.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너를 지켜봤어. 그래야만 했으니까. 작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있잖아. 중혁아.”
붉은 눈동자를 깜빡이며, 김독자가 말했다.
“이제 깨달았어. 나는, 인간보다 너를 더 사랑해.”
입술이 맞닿았다. 짧게 스쳐지나간 감촉에 유중혁은 눈을 크게 떴다. 김독자, 이게 대체 무슨…… 고개를 들고 뒤로 물러난 김독자가 희게 웃었다. 머리 위로 뿔이 솟아났다. 등을 찢고 불길하리만치 검은 피막을 두른 세 쌍의 날개가 돋아났다. 붉은 눈동자 속 동공이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유중혁은 숨을 멈췄다.
용.
용이었다.
“중혁아.”
팔을 벌린 김독자가 손톱 끝으로 간단하게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냈다. 흰 가슴 위로 금빛이 일렁였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용의 심장이다. 김독자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에 따라 의도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였다. 유중혁은 칼을 뽑아들었다. 거부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중혁아. 알려줄게.”
“김독자, 너는……”
“용을 살해하는 세 번째 방법은.”
속삭이는 목소리가 고요 속에서 귓가를 파고들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서글펐다.
“사랑을 하게 만드는 거야.”
용은 천칭을 굴려야 하는 존재. 눈을 가리고도 균형을 잡아야 하는 존재. 그 무엇도 다른 것보다 우위에 둬서는 안 되는 존재. 그 저울이 기울어지는 순간, 용은 자격을 박탈당한다.
손짓을 따라 까만 검날이 들어올려졌다. 안 돼. 안 돼, 김독자. 나는, 난…… 목을 틀어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웃었다. 중혁아. 드디어 너에게 안식을 줄 수 있어. 나는 그걸로 충분해. 그대로 검이 내리그어지고, 유중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유중혁은, 용을 살해했다.
(발췌시작)(발췌끝)
눈부셔. 유중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니, 알고 있는 곳이다. 내 방이군. 어두운 방 안에서 하얀 빛을 뿜는 모니터만이 반짝였다. 유중혁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어제의 일을 생각해내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어제는…… 챔피언십이 있었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는 우승이었다. 당연하지.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유중혁은 몸을 돌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땅을 디디고 일어나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어냈다. 달빛이 희미하게 스며들어온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걸까.
멍한 얼굴로 그 날을 회상했다. 손 끝에 선연히 감겨오던 감각. 용의 심장을 베던 그 날. 미쳐버린 수호자에 의해 망가져가던 세계는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유중혁은, 몇 년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자신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김독자. 유중혁은 그 저주스러운 이름을 불렀다. 이딴 식으로, 나를…….
유중혁은 알게 되었다. 이제 자신이 용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가장 잔인하면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유중혁은 김독자를 사랑한다.
그리고 김독자는, 이 세상에 없다.
따라서 그의 천칭이 기울어질 일은…… 영원히, 없다.
이 세상의 어느 인간보다도 사랑하는 존재가 있으니까.
하, 웃음이 터져나왔다. 김독자. 유중혁은 용이 된 지금, 용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판단 아래 지극히 정결한 애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김독자.
유중혁은 조용히 그 이름을 불렀다.
영겁의 세월동안 사랑하게 될, 그 저주스럽고도 사랑스러운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