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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동거엔딩 내는 중독
* 수정중 * (미완)

* 4부까지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역시 개연성스파크 안맞으려고 강제동거엔딩나는 중독을 봐야할듯..

<히든 시나리오 ㅡ 개연성 충족>

분류 : 히든
난이도 : D
클리어 조건 : 당신은 이 세계의 개연성에 속박되었습니다. 개연성 스파크로 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알맞은 행동을 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생존
실패시 : 사망

  "……뭐야?"

  김독자는 황당한 얼굴로 시나리오 창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세 번째 읽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내용 자체야 아주 이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김독자 자신과 '김독자 컴퍼니'가 지금껏 개연성을 뒤틀 정도로 새로운 행보를 보여 온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므로 김독자가 황당해하고 있는 지점은 따로 있었다. 애초에 개연성 스파크로 인해서 사망이라는 게 가능한가? 행동에 제약이 생기거나 부상을 입는 정도면 모를까 사망한다는 이야기는 '멸살법'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적이 없으니 이런 시나리오 또한 처음 보는 것임은 당연했다.

  나만 시나리오 받은 건가? 김독자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질문을 건넸다.

  "혹시 방금 히든 시나리오 받으신 분 계십니까?"
  "히든 시나리오요?"

  어째 다들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성운 대표고 성좌라서 대표로 짊어지게 된 건가? 차라리 그런 거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일행들은 위험할 일이 없다는 뜻이니까……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김독자는 황급히 유중혁의 행방을 찾았다. 어쨌든 이놈도 저와 함께 공동 대표니까 같은 시나리오를 받았을 지도 모른다. 녀석과 의논하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도 유중혁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 와중에도 성실하게 수련 중이었는지 가까이 다가가자 훅, 하고 열기가 끼쳐 왔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김독자는 저를 돌아보는 유중혁에게 물었다.

  "너도 시나리오 받았어?"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김독자."
  "야, 왜 나를 의심해?"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피해자라고, 인마! 유중혁의 의심에 합당한 구석이 있을지라도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그래서 너도 받았냐고."
  "히든 시나리오 말인가?"
  "그래, 그거. 개연성 충족인가 뭔가 하는 거."

  받았구나. 젠장. 그렇다면 성운 대표인 두 사람에게 돌아온 업보인 것이 맞는 듯했다. 흉흉한 눈으로 김독자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금방이라도 뽑을 기세로 검손잡이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러고선 턱을 까딱이는 것이 어디 설명해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건방진 자식. 하지만 김독자로서도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도 잘 몰라. 처음 보는 시나리오라서."
  "처음 본다고."

  유중혁의 삶을 전부 읽은 김독자가 처음 보는 시나리오라면, 그가 설화 '생과 사의 동료'를 발휘해 지난 회차의 기억들을 읽어와도 별 소용이 없을 터였다. 짙은 눈썹을 접붙이는 모습을 보던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애초에 시나리오 자체가 이상해. 너무 두루뭉술하잖아."

  뭐 명확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충족 조건이 이래서야 뭘 어떻게 클리어하라는 거야? 아무리 히든 시나리오라지만……. 그렇게 투덜거리는 찰나 허공에 메시지 창이 한번 더 떠올랐다. 이번에는 각자에게 떠오른 것이 아니라…… 함께 볼 수 있도록 하나의 메시지로 통합된 상태였다.

<히든 시나리오 ㅡ 개연성 충족>

클리어 조건(세부 사항 추가) : (현재 비공개 상태입니다.)

  세부 사항을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어째 불길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열린 창에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이야기는 개연성의 힘으로 움직입니다. 화신 '유중혁'과 성좌 '구원의 마왕'의 첫 번째 시나리오부터 현재 시나리오 진행 상황까지의 행보를 종합했을 때,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은 두 사람의 관계가……

  "잠깐만."

  김독자는 일단 시나리오 창을 닫았다. 개소리의 나열에 머리가 띵했다. 유중혁 또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찢어버릴 기세인 것을 보고도 김독자는 말리지 않았다. 똑같은 심정이었으니까. 일단…… 이 헛소리 하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해야 한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설명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비유."

  [바앗?]

  품 속에서 쏙 고개를 내민 비유가 허공으로 둥실둥실 떠올랐다. 그 모습에 잠시나마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 김독자는 비유의 뿔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유. 미안한데 이 시나리오가 뭔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설명 좀 해줄래."

  [바아앗.]

  몸을 둥글게 만 비유가 인상을 쓰더니 허공에 손짓을 했다. 바앗, 바아앗 바앗 바앗. 김독자는 깨달았다. 젠장……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비형을 불러야 하나 싶었지만 이미 대도깨비가 된 놈을 이런 걸로 오라가라 하기도 애매하고……. 잠시 고민하는 찰나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야, 장하영."

  부르는 소리에 흘끗 두 사람을 돌아본 장하영이 선뜻 가까이 다가왔다. 바앗, 바앗! 귓가에서 통통거리는 비유를 쓰다듬으며 김독자는 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통역?"
  "그래, 정확히는 한 다리 건넌 통역이긴 한데……."

  시나리오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도깨비인 비유가 1차로 번역(?)을 해주면 비유의 말을 2차로 통역해달라는 뜻이었다. 장하영은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무슨 시나리오를 하는 중인 건지 미심쩍은 눈치였지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

  [바앗, 바아앗. 바앗. 바아앗 바아아앗.]

  "……."

  장하영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째 느낌이 영 좋지 않았다. 김독자는 조심스럽게 장하영을 다시 불렀다.

  "뭐래, 그래서?"
  "……그대로 말해도 돼?"

  뭔가 엄청난 게 있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시발, 뭐야. 김독자는 슬쩍 유중혁을 돌아보았다. 유중혁 또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지 표정이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김독자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자 장하영이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개연성을 위반하지 않으려면 너네 둘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데."
  "?"
  "?"

  너무 황당한 말을 들어서 사고가 정지했다. 뭔…… 뭔 개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빤히 보인다는 듯 장하영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야, 나도 몰라!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한 거라고."
  "……비유.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바아앗…… 바앗. 바앗? 바앗.]

  "……그러니까…… 지금까지 너네 둘이 한 말들이나 행동을 봤을 때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데."
  "……."

  이 상황에서 결혼을 하는 건 앞뒤가 맞고? 남자끼리? 그것도 유중혁이랑 내가? 김독자가 입을 쩍 벌리거나 말거나 비유는 계속해서 열심히 번역했다.

  [바앗 바앗.]

  "유중혁 너, 김독자랑 처음 만났을 때 얘 어룡 입에 던져넣으면서 왜 웃었냐는데?"

  유중혁이 인상을 팍 구겼다.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선 애꿎은 장하영을 쏘아봤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고 계속했다.

  "그리고…… 그것도 뭔 소린지 설명해달래."
  "……뭐를?"
  "내가 뭐 때문에 널 따라왔는데! 네가 왜 혼자야? 우린 함께라고!"
  "잠깐만."
  "네 곁엔 늘 내가 있잖아! 희망을 잃지 마! 우리 아이를 생각해!"
  "야, 그건 필터링이……"
  "내가 왜 너 때문에 여기까지……!"

  시발……. 김독자는 이마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저놈의 필터링은 왜 하필 저렇게 먹혔지.

  [바앗.]

  "아직도 많다는데. 음……. 유중혁 너 왜 김독자 어머니랑 치고박고 싸우다가 김독자 오니까 갑자기 예의 갖춰서 말했냐는데."
  "그건 또 뭐야?"

  [바아앗 바앗.]

  비유가 영상을 지원했다.

- 심성이 뒤틀린 자로군.
- 맹랑한 아이네.
- 김독자를 내놔라. 그러면 너를 살려주겠다.

  "……너 저랬냐?"

  유중혁이 우수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새끼…… 모르는 척 하네. 하지만 곧이어 김독자는 그 자리에 제가 도착했을 때 유중혁이 했던 말도 떠올렸다.

  '너희 어머니께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군.'

  생각해보면…… 유중혁이 그런 존칭을 쓰는 게 이상했긴 이상했다.

  "아니 근데 고작 그런 거 가지고……."

  [바아아앗!]

  비유가 답답하다는 듯 김독자의 어깨 위에서 방방 뛰어올랐다.

  "계속 들어봐. 다음은…… 어. 마계 얘기라는데. 유중혁이 김독자 네 차 뺏어마셨다고……. 야, 진짜야? 이거?"
  "아니 시발."

  그게 뭐 대수라고 난리야? ……라고 말하기엔 뭔가 걸렸다. 유중혁은 성정만큼이나 입맛도 까다로운 놈이라서 남이 만든 건 잘 먹지도 않는다. 하물며 남이 마시던 것에 입을 댈 이유가…….

  "……야. 너도 해명 좀 해봐. 왜 가만히 있어?"
  "헛소리라서 할 말이 없을 뿐이다."
  "헛소리인 건 나도 아는데 일단 뭐라도 말해보라고. 내 차 왜 마셨는데?"
  "……."

  왜 답이 없어, 유중혁 이 자식아! 김독자는 억울했다.

  [바아앗? 바앗.]

  "음…… 이번엔 김독자 너 얘기다."
  "나? 나 뭐?"
  "귀환자 됐을 때 비천호리가 '기다리는 애인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라고 물어봤는데 왜 대답 안 했냬."
  "……."

  정말이지 황당하다. 애인이 없어서 그냥 대답을 안 했을 뿐이다. 억울하다. 그런데 어째 유중혁이 미묘하게 따가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
  "애인이 있었나?"
  "있었으면 있다고 답했겠지."
  "……."

  유중혁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왜 취조당한 느낌이 들지. 아니 그리고 애인 있으면 어쩔 건데. 그나저나 이놈의 시나리오는 어째 헛소리 집합체같다.

  "시스템 고장난 거 아냐?"

  창을 쿵쿵 두드려봐도 별 효과는 없었다.

  그 뒤로도 비유와 장하영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번역)했다. 화가 난 유중혁의 손에 순순히 죽어주려 했던 김독자와(야 그건……. 김독자는 입은 열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다), 유중혁은 왜 김독자의 '벽'을 깨려고 그렇게 검을 내리쳤는지(유중혁 이 새끼가……. 유중혁은 모른 척했다), 유중혁이 '은밀한 모략가'와 대치할 때 '김독자는 성좌가 아니다'라고 발언한 것(김독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유중혁을 바라봤다) 등등.

  "더 있다는데. 말해줘?"
  "……아니. 그만 해도 돼 이제."

  시발……. 들을 수록 정신적인 타격만 들어온다. 유중혁 또한 드물게 한숨을 쉬는 것이 영 상태가 안 좋은 듯했다. 김독자는 너덜너덜해진 채로 흐느적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황당한데…… 황당하긴 한데……. 젠장. 물론 이 모든 일들은 각각 놓고 보면 별 것 아니었다. 따로따로 설명하라면 전부 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인 독자의 시선에서 보자니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원래 개연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김독자는 흘끗 유중혁을 쳐다보았다. 뭘 보냐는 듯 무시무시한 시선이 되돌아왔다. 이 자식이……. 나도 피해자라니까? 똑같이 쏘아보자니 유중혁이 손을 들어올렸다.

  "히든 시나리오니 당장 닥쳐오는 문제가 없다면 수행하지 않아도 상관 없겠지."
  "어."

  듣고 보니 그랬다. 어딘가에 갇히거나 한 상황도 아닌데 굳이 이 시나리오를 수행할 이유가 없다. 내용이 하도 황당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장하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히 번거로울 것 같으니까 그냥 취소해 버려."

  유중혁이 망설임 없이 시나리오를 취소하려는 찰나였다. 김독자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섬전처럼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

  손목을 확 붙잡으니 유중혁이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뭐 하는 짓이지."
  "잠깐. 취소하지 말아봐."

  미친 건가? 그렇게 묻는 소리에도 김독자는 굴하지 않았다. 유중혁의 손이 다시 움직일까 꽉 쥔채 말을 이었다.

  "이 시나리오…… 내용은 개소리지만 일단 주제랑 보상은 확실하잖아."

  유중혁이 눈썹을 까딱였고 장하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독자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지금 이 시나리오가 왜 나왔겠어? 어쨌든 개연성이 어그러지고 있으니까 그걸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시나리오 형태로 준 거잖아?"

  시나리오 또한 개연성의 산물이다. 아무렇게나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수가 원한다면 그것이 곧 개연성이고, 코인을 기반으로 탄생하기도 하는 것. 유중혁은 김독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깨달은 듯했다.

  "그러니까, 이 시나리오를 수행하면 앞으로 개연성을 조금 더 어그러뜨려도 괜찮을 거라고."

  개연성이 -100 된 상태라서 이 시나리오가 나온 거라면, 시나리오를 수행함으로서 그 수치를 0으로 맞춰둘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가올 마지막 시나리오들을 맞닥뜨리는 데 몹시도 큰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어쨌든 개연성은 힘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건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였다. 이렇게 손쉽게 개연성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전혀 마다할 이유가 없는…….

  "……."

  헉, 시발. 김독자는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흉흉해지는 유중혁의 기세에 저도 모르게 붙잡고 있던 팔목을 놓아주었다. 애초에 잡고 있는다고 막을 힘도 없었다. 옆에 서 있던 장하영이 세 발짝 멀어지는 것이 옆눈으로 보였다. 야, 어디 가. 가지 마.

  "김독자."
  "……어?"
  "그래서 이 시나리오를 수행하자고?"
  "……."

  김독자는 하하,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시발 수행하지 말자는 소리겠냐? 그렇게 말했다간 마지막 시나리오는 커녕 이 자리에서 생을 마감할 것 같았기에 일단 대답을 보류했다. 유중혁 이 자식이 왜 이러지. 시나리오를 깰 때면 늘 효율을 최우선시하는 놈이다. 고작 명분만 있는 결혼관계를 맺는 걸로 이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면 엄청 괜찮은 거래라는 걸 놈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싫어한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중혁."
  "……."
  "내가 그렇게 싫냐?"

  그렇다. 이 이유밖에 없는 것이다. 이름뿐일지라도 나랑 결혼의 기역 자로도 얽히는 게 싫은 게 틀림없다. 유중혁 개자식. 이제 간신히 동료 정도는 된 줄 알았는데.

  "야, 인마. 나도 싫거든? 나는 뭐 좋아서 하자는 줄 알아? 착각하지 마."

  유중혁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김독자는 얼른 대책을 생각했다. 여기서 자극해봤자 좋을 게 없다. 적당히 구슬려서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수락하게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 시나리오를 위해선 이게 최선이다.

  "야, 중혁아. 들어봐. 지금 당장은 싫겠지만……"
  "김독자. 이 시나리오가 뭘 요구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나?"

  응? 김독자는 눈을 깜빡거리며 유중혁을 쳐다봤다.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린 채 이어서 말했다.

  "비유의 말에 의하면 이 시나리오는 너와 내가 결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 그렇지."
  "일반적인 관념으로 생각했을 때 결혼에는 부가적으로 딸려오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부가적인 거? 그게 뭔데? 김독자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유중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나 생각을 못한 모양이군."
  "아니 그러니까 뭔 소린데."

  유중혁은 한심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에 김독자가 울컥해서 뭐라 하려는 찰나 멀찍이 떨어져서 신변의 안정을 찾고 있던 장하영이 가까이 다가왔다.

  "김독자."
  "왜."
  "보통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잖아?"
  "그렇지."
  "거꾸로 말하면…… 결혼을 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이라는 뜻이잖아?"
  "그게 뭐……"

  김독자는 그제야 깨달음을 얻고서 우뚝 말을 멈췄다. 사랑하는 사이에 하는 게 결혼이다. 사랑하는 사이에선 뭘 하지? 사랑고백은 기본일 것이며 스킨십도 자연스러운 행위일 터였다. 아. 시발. 그렇구나. 뒤늦게 얼굴이 하얘지는 김독자를 보며 장하영이 안쓰럽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야. 잘해봐."

  잘하긴 무슨. 아쉽지만 시나리오는 취소해야겠다. 다른 방법이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시나리오 창을 켰을 때였다.

히든 시나리오 수락이 확인되었습니다.

  "?"

  이게 왜이래? 또 고장났나? 야, 유중혁…… 하고 부르려 돌아본 김독자는 그의 뻔뻔한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뭐야 시발. 설마?

  "너 이거 수락했어?"
  "하자고 말하지 않았나?"

  이런 미친 노빠꾸 직진맨 유중혁 새끼야! 김독자는 황당한 심정으로 입을 뻐끔댔다. 방금까지 그렇게 하기 싫어하더니 왜?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떨며 노려봤더니 유중혁은 이미 결심을 마친 듯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네놈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더군. 준비해라. 김독자."

  이, 미친…… 효율충 새끼야! 너는 결혼 해봤으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안 된다고! 어쩌다 입장이 뒤집혀버린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독자가 분노로 떨든 말든 유중혁은 말도 못하게 잘생기고 우수어린 얼굴로 곧 떠오를 시나리오 창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자식아. 언젠가는 꼭 갚아준다. 그 사이 장하영이 다시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어…… 나는 너네 둘 그…… 그런거 하는 꼴 보기 싫으니까 이만 가볼게."

  제발 걱정을 가중시키는 말은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마음같아서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으나 만약 시나리오가 진짜 그렇고 그런 걸(?) 요구한다면……. 김독자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차라리 둘만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김독자는 그렇게 장하영을 보냈다.







  그래서는 안됐다.

  그렇다. 완벽한 실수였다. 김독자는 멍한 정신으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 천장의 조명 장식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귓가로 희미하게 물소리가 흘러들었다. 침대 푹신하니 좋네. 이런 푹신한 침대에 누워본 게 얼마만인지……. 시발! 이게 아니라고!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침대는 비싼 값을 하는지 미동도 없었다. 방은 그래도 간소하건만 침대는 왜 이렇게 좋아? 머리를 헤집고 있자니 뒤늦게 사람들이 침대는 꼭 좋은 걸로 사야한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던 것이 떠올랐다. 아니, 그게 그런 뜻이었다니.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기분에 김독자는 팔을 문질렀다.

  그러니까, 역시 그때 장하영을 그렇게 순순히 보내서는 안됐다.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장하영이 떠나고 [시나리오 세부 사항 업데이트 준비 중입니다.] 라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 창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던 김독자는 유중혁과의 어색한 침묵을 한참이나 버티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야, 유중혁……."

  이름을 부르니 유중혁은 의외로 군말 없이 시선을 마주쳐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니 자신만 이렇게 당황하고 있나 싶어 배로 억울해졌다. 한숨을 푹 내쉰 김독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너 진짜로 할 생각이냐, 이거."
  "쓸데없는 말을 하게 하는군."

  여전히 성격이 더러운 놈이다. 하지만 서늘한 목소리에 김독자도 이성적으로 뒷일을 생각할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일단 수락한 이상 취소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시나리오 실패 패널티는 사망…… 즉 무조건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시발…… 좆됐다. 역시 실수한 것 같다.

  "너 자신있냐?"

  수련을 마저 하려는지 다시 연무장으로 가려는 채비를 하는 유중혁에게 물었다.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당연히 자신 있으니까 수락했겠지. 유중혁은 그런 놈이다. 하지만 묻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한심하다는 눈빛만 돌아왔다. 젠장.

  "김독자."
  "……어?"

  잘각. 검집을 움켜쥐는 동작이 어째 위협적이었지만 김독자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그를 똑바로 마주봤다. 한참이나 김독자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수락한 이상 끝까지 간다."

  이, 미친 자식이.

  그랬던 게 불과 24시간 전이다. 그래. 고작 24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미친 건가? 유중혁이 할만한 대사를 뇌까리며 김독자는 손을 쥐락펴락 불안하게 움직였다. 하루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연무장으로 휑하니 떠난 유중혁을 바라보다가 일단 다시 공단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럽게 히든 시나리오가 어쩌구 하며 사라진 김독자를 걱정하기라도 했는지 돌아오자마자 일행들이 모두 뛰쳐나와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몸을 수색했다. 어디 다친 데 없어요? 무슨 이상한 짓 하고 온 거 아니에요? 죽고 싶어요? 그런 폭언을 들으면서 김독자는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짧은 고민에 빠졌다. 물론 돌아오는 내내 생각이야 해두었지만……. 생각이야 쉽지, 말로 꺼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김독자는 결국 공단이 마계까지 내려앉을 정도로 한숨을 푹푹 쉰 뒤에야 모두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운을 떼자 일행들이 몹시도 긴장한 얼굴로 시선을 모았다. 무기를 움켜쥐는 사람들을 보며 김독자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니고……"
  "우리한테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요?"

  정희원의 눈빛이 더욱 흉흉해졌다. 아니. 잠깐만요. 들어보세요.

  "정말로 위험한 일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네. 그리고 저만 하는 것도 아니고 유중혁도 같이 하고……."

  사실 그래서 위험한 것 같기는 한데 그 말은 일단 뺐다. 유중혁이 함께 시나리오를 수행한다는 말에 일행들의 눈빛이 간신히 조금 누그러졌다.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던 한수영이 팔짱 낀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무슨 시나리오였는데? 성운 대표 둘이 이참에 결혼이라도 하래냐?"

  수영 씨, 재밌는 농담을 하네요.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낄낄대는 사람들 속에서 김독자는 침묵했다. 시발……. 예상표절이라도 돌렸나? 고작 이런 일에 그런 스킬을 굴려? 하지만 정작 말을 꺼냈던 한수영도 농담이었는지 이어지는 김독자의 침묵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회의실을 울리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뭐야 시발? 진짜야?"

  이내 회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마냥 조용해졌다. 김독자는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급격히 피곤해졌다. 결심을 굳힌 김독자는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미쳤는데 사실 이정도 일은 별것도 아닌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어차피 어느 성좌들이 준 시나리오일 거고, 대충 맞춰주는 척 쇼만 하면 될 겁니다. 난이도도 D였으니까 큰 어려움은 없을……."

  으응? 김독자는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일행들을 훑었다. 황당함에 가득 차 있을 줄 알았건만 어째 분위기가……. 그러니까, 분위기가.

  "드디어 시나리오로 떴네."
  "지금껏 안 나오는 게 이상했죠."
  "성좌들도 지금까지 버틴 거 아니에요? 개연성 몰아서 한번에 꽂아주려고?"
  "우리 성좌가 어째 엄청 신났더라니 이거 때문이었구나."

  여러분? 무슨 말을 하시는 거죠? 얼떨떨한 기분에 눈만 깜빡거리고 있자니 정희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빨리 준비해야겠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내가 봐둔 데가 있죠, 또."

  그러면서 눈짓을 하자 공필두가 툴툴거리면서도 함께 따라 일어섰다. 거긴 내가 봐둔 명당자리인데…… 어쩌구 중얼거리는 것이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이현성까지 함께 일어나 회의실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이번에는 이지혜가 아이들을 데리고 벌떡 일어섰다.

  "사람들은 우리가 불러올게! 걱정 마, 아저씨!"

  뭔…… 뭔 소리야?

  "준비할 게 많겠는데요. 그럼 저도 이만……."

  그렇게 말하며 이설화도 빠져나갔다.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던 한수영이 결국 참지 못하고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김독자의 어깨를 매운 손으로 팡팡 내리쳤다.

  "이런 것까지 맞추고 싶지는 않았는데. 본의 아니게 정곡을 찔러서 미안하게 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관둬. 너 예상표절 썼지?"
  "미쳤냐? 힘을 비축해도 모자랄 판에 아깝게 니네 일에 왜 낭비해?"

  낭비라니. 성운 대표 두 명이 이 꼴이 났는데. 이죽거리던 한수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사탕을 쭉 빨았다.

  "그냥 작가 짬밥으로 예측한 거지. 이런 쉬어가는 전개가 나올 타이밍이 됐다 이거야."
  "너한텐 이게 쉬어가는 전개냐?"
  "내 일도 아닌데 그럼 쉬는 거지 아니냐?"

  이 자식……. 주먹을 꽉 쥐며 파르르 떨자 조금 더 웃은 한수영이 손을 팔랑거리며 멀어졌다.

  "아무튼 잘 해봐. 너 혼자면 또 모르겠는데 유중혁 그놈이랑 같이 한다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야, 지금 유중혁이랑 같이 한다는 게 제일 문제인 부분이라고."

  시발……. 어쩌다 이렇게 됐지. 왜 하필이면 유중혁이야? 그리 중얼거리자 한수영이 측은한 눈길을 보냈다. 어깨 위로 올라온 비유가 어쩐지 조금 무거워진 것 같았다.

  "말해 뭐해. 이 시국에 이런 웃기지도 않는 히든 시나리오를 수락했다? 취소도 가능한데? 그 유중혁이랑 김독자가? 안 봐도 각 나오지. 어느 정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수락했을 거 아냐. 아니면 이득되는 부분이 있거나."

  정확한 지적에 김독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둘 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아무튼 나 귀찮게 하지 말고 니들끼리 알아서 해결해. 나는 그거 말고도 준비할 게 많아서 이만."

  한수영마저 나가자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 있던 유상아가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 그 반작용처럼 김독자는 옆의 의자에 푹 주저앉았다.

  "독자 씨."
  "……예."

  체념한 목소리로 답하자 유상아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리를 숙여 김독자의 어깨를 가볍게 짚은 유상아가 눈을 맞춰왔다.

  "독자 씨, 저는 알아요. 사실 시나리오 취소할 방법 있었죠?"
  "……."
  "그런데도 수락한 거죠? 중혁 씨와 이런 시나리오를 하는 데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유상아에게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김독자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이니까. 어깨를 짚은 손이 상냥한 두드림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며 김독자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시나리오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알아요. 읽었으니까. 음…… 크게 보자면 독자 씨가 희생한 거죠, 또.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할 생각 마세요."

  단호해지는 목소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천천히 몸을 세운 유상아가 빙긋 웃었다.

  "무사히 끝나도록 응원할게요."

  그러니까 그런 응원은 필요 없는데요.

  김독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회의를 가진 게 23시간 전이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 스피디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집에 들어와 있느냔 말이다!

  배신감에 몸이 떨렸다. 뭘 준비한다며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 진작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그게 결혼식 준비였다니! 정희원이 알아본다고 나간 게 신혼집 위치였다니! 이지혜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게 하객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니! 한수영이 축사를 써주고 이설화와 유상아가 턱시도를 준비해주다니!!! 젠장……. 상식이 남아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믿었던 파천검성조차 껄껄대며 웃기만 할 뿐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중혁이 그놈이 결국…… 하고 의미 모를 말만을 중얼거렸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키리오스는 번개처럼 화를 내기는 했으나……. '이 못난 제자 녀석, 어쩌다가 파천문의 후계와……!' 하며 화를 내는 걸 보고 있자니 이미 수락했는데 뭘 어쩌란 말씀이신지? 이딴 반항어린 대꾸밖에 나오질 않아 결국 번개를 맞았다. 그도 결국은 시나리오 취소가 불가능하며 실패 패널티가 사망이라는 것을 납득하고서야 자리에 내려앉았다. 그렇게 화를 내고도 결혼식장에서 김독자 측 혼주석에 앉아있었다는 게 웃기는 일이었다.

  아니, 아니다. 그만 생각해라. 김독자는 고개를 휘 저으며 결혼식장의 풍경을 떠올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이를테면 황당하게도 인자한 얼굴로 주례를 서던 한명오라거나, 신랑 두 명은 맹세의 입맞춤을, 따위의 소리에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지던 유중혁의 얼굴이라거나…….

  그래, 시발. 정확히는 그런 유중혁의 머리 위로 떠오르던 시스템 메시지창-[맹세의 입맞춤을 하시오.]-과, 한껏 분노한 얼굴을 하면서도 우악스럽게 허리를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치고선 떨어져나가던 유중혁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친 새끼. 하란다고 또 해요 그걸. 돌았나? 물론 그가 안 했으면 제가 했을 테지만. 시나리오라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 직후 [제4의 벽]이 열심히 기능을 발휘해 준 덕에 태연한 얼굴로 씩 웃으며 비유를 통해 생중계를 보고 있을 성좌놈들에게 손도 흔들어줄 수 있지 않았던가. 거기서 딱 기다려라. 너희는 다 죽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신혼집이라니? 제가 왜 이놈이랑? 강제(?) 결혼식이 끝나고 강제(?) 페라르기니에 올라(탐을 당하고)있자니 정희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단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곳이에요. 일부러 한적한 데 잡아놨으니까 걱정 마요."
  "한적하면 위험한 거 아닙니까?"
  "돌아가면서 주변을 순찰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괜찮아요. 저희도 번갈아서 감시할 거고."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할 때인데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없었다. 결혼이야 시나리오 요구사항이니 그렇다 치는데 굳이 단 둘이 신혼집까지 갈 필요가 있는 겁니까? 다시 한 번 묻자 정희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독자 씨. 이 시나리오를 수락한 이유는, 여유 개연성을 조금이라도 벌어두려고 한 거랬죠?"
  "……그랬죠."
  "그리고 시나리오는 개연성의 산물이랬죠?"
  "……그렇죠."
  "그럼 이제 곧 요구사항이 뜨지 않을까요? 신혼집에서 첫날밤을 보내세요, 같은 거."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머리 위로 뜬 시나리오 창에는……. 말을 말자. 24시간만에 일어난 일을 되짚으며 정리하던 김독자는 욕실 쪽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잦아드는 것을 눈치채고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있다간 큰일이 난다. 분명하다. 정희원의 말대로 상황이 개연성을 만들어서 그로 인해 시나리오의 세부 요구사항이 계속해서 추가되어 가는 거라면…… 정말로 그 망할 놈의 첫날밤이니 뭐니 하는 꼴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이건 미친 짓이다. 역시 장하영을 그때 보내지 말고 비유와 좀 더 대화를 해봤어야 했다. 이 시나리오가 이 정도로 흉악한 것이었을 줄이야……. 일단 슬금슬금 몸을 옮겨 집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욕실 문이 달칵 열렸다. 곧바로 서슬 퍼런 목소리가 따라왔다.

  "김독자."
  "……."
  "어딜 가려는 거지?"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김독자는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려 그를 마주봤…… 마주… 봤…….

  "너 꼴이 왜 그래?"

  갓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유중혁은 편한 바지 한장만 달랑 걸친 상태였다. 곱슬진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카펫 깔린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잠시 시선 둘 곳을 잃은 김독자는 눈을 굴리며 다시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아무튼, 나 일단 나간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유중혁의 표정은 훤히 그려질 만큼 짐작이 갔다. 눈썹이나 들썩거리며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하지만 김독자는 결심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너도 봤잖아. 실시간으로 시나리오 세부사항 추가되는 거."
  "그래서?"
  "이렇게 너랑 한 공간에 있다간 또 무슨 시나리오가 나올지 겁나서 그런다."
  "……."

  대답이 없기에 슬쩍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유중혁은 심각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납득한 기색이었다. 답지 않게도 조금 안심한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그러니까 잠은 따로 자자고."
  "네놈이 저기서 자라. 내가 나가지."
  "뭐?"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와 김독자는 잠시 입을 벌렸다. 당연하게도 신혼집인지라 침대는 침실에 있는 것 하나 뿐이었는데……. 웬일로 이놈이 좋은 자리를 양보하지?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데 유중혁이 갑자기 손목을 확 붙잡아왔다.

  "야, 무슨……."

  유중혁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다짜고짜 김독자의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냈다. 그대로 팔꿈치까지 쭉 걷어올리자 흰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곧바로 팔목이 부서져라 맥을 짚은 유중혁이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화신체가 이 꼴인데 어딜 밖에 나가서 자겠다고?"
  "……."

  아니, 뭐…… 노숙한 게 하루 이틀인가. 그리고 이제는 아이템도 있고…….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김독자는 말을 멈췄다. 이놈이 좋은 자리를 양보해 준다는 데 굳이 나서서 걷어찰 필요는 없는 것이다. 김독자의 생각을 알아챘는지 쯧, 하고 혀를 찬 유중혁이 손목을 내팽개치듯 풀어냈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누워라."
  "넌 어디서 자게?"
  "네놈이 신경쓸 일이 아니다."

  그래, 뭐. 알아서 잘 자겠지. 김독자가 신경쓸 일이 아닌 것은 맞다. 평소라면 그도 그러든가, 맘대로 해라, 하며 덜렁 침대로 가서 보란듯이 드러누웠을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이 양보해준 자리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불쑥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소리를 꺼낸 것은.

  "그냥 같이 자든가."

  김독자를 밀어내고 문을 나서려던 유중혁이 자리에 멈춰섰다. 천천히 다가오는 시선이 따가워 김독자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신경쓰인다고. 네가 밖에서 자면."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썼지?"

  시발, 너는 언제부터 내 몸 상태를 그렇게 신경썼다고? 그 말이 목끝까지 올라왔으나 김독자는 그냥 한숨만 푹 쉬었다.

  "마지막 시나리오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너도 몸이 완전히 제 컨디션인 건 아니잖아."

  지금처럼 이례적으로 평온할 때 푹 쉬어두어야 한다. 김독자는 새삼스럽게 '멸살법'의 유중혁을 떠올렸다. 다른 이들이 휴식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면서도, 자신은 쉬는 법이 없었던, 고집 센 녀석. 김독자는 그 모습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참으로 외로우리라고 여겼었다. 늘 모든 것을 혼자서 짊어지려 한 고독한 이.

  팔을 뻗어 문고리에 얹어진 유중혁의 손에 얹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온 탓인지 손등이 따끈따끈했다. 아니, 사실 이 녀석은 늘 뜨끈한 느낌이 있었지. 지금도 그냥 가까이 서 있을 뿐인데 열기가 느껴진다. 그것이 유중혁이라는 인간의 체온이고 본질일까. 어쩐지 기분이 조금 간지러워지려는 듯해서 김독자는 그저 씩 웃었다.

  "침대 넓더라. 이참에 너도 좀 쉬어."

  다행스럽게도 [제4의 벽]은 여전히 잘 기능중이었다. 잠시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김독자를 위아래로 훑던 유중혁이 물어왔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이상한 시나리오가 나올 까봐 걱정된다지 않았나?"
  "그건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뭐, 설마하니 노골적인 무언가를 요구하진 않겠지 싶어서."

  애초에 지금은 채널도 꺼져 있다. 지금까지의 행태를 봤을 때 시나리오도 [신혼집에서 첫날밤을 보내시오.] 라는 큰 틀을 요구했을 뿐이니 굳이 무언가 행위를 더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꽤나 오랫동안 침묵했다. 김독자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이놈이 왜 이런 좋은 휴식 기회를 마다하지? 나를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역시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 자식…… 나랑 같은 침대에서 자기가 그렇게 싫은 거냐.

  "야. 나도 너랑 같이 자기 싫거든? 내가 좋은 마음으로 선심써줄 때 모르는 척 들어와라 그냥."

  물론 유중혁은 이렇게 말하면 더욱 미간을 좁힐 놈이다. 하지만 김독자로서도 뭘 더 말할 방법이 없었다.

  "싫음 말고. 그럼 나 먼저…… 어."

  유중혁은 대답 없이 다짜고짜 그를 붙잡고 성큼성큼 침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야, 왜 이래? 반박할 새도 없이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김독자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유중혁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널부러진 몸을 일으키다 말고 유중혁의 얼굴을 코앞에서 맞닥뜨린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김독자."

  조명을 등진 탓에 그림자가 진 얼굴에 음영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야말로 조각 같다는 말이 어울리는 날렵한 콧대와 움푹한 눈, 깎은 듯 강인한 턱선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김독자는 이어지는 유중혁의 말에 눈을 껌뻑였다.

  "네놈은 아직도 준비가 안 된 모양이군. 알고는 있었다만."
  "……뭐가?"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쳐다보자 유중혁이 그의 몸 양옆으로 손을 턱 짚었다. 얼떨결에 거리를 벌리려 몸을 뒤로 물리자 등에 서늘한 침대의 헤드보드가 닿아왔다. 그럼에도 유중혁은 멈출 생각이 없다는 듯 더욱 몸을 붙여왔다. 이 새끼 왜 이래? 우리 중혁이가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야, 유중혁, 너 왜……"
  "김독자. 나는 시나리오를 수락할 때, 사실혼 관계에서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든 하겠다는 각오로 수락한 거다."
  "……."
  "그리고 네놈도 거기에 동의했지."

  김독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그 시나리오는 결국 김독자도 동의했기에 수락이 된 거다. 알고 있다. 결혼한 사이라면 가벼운 스킨십은 물론이요 키스며 섹스까지도 가능하다(남자끼리 어떻게 가능한지의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김독자는 이 모든 것에 경험이라곤 전혀 없었지만, 그럼에도, 고작 이런 시나리오를 수행해서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수월하게 클리어할 수 있다면. 그리해서 모두가 살아남아, 원하는 결말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면. 고작 이런 걸로 망설이고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누구 주려고 평생 간직해 온 순정도 아니고, 키스 좀 한다고 입술이 닳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김독자도 뭐든지 할 각오를 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아는 것은 다르다.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 입을 꾹 다물자 유중혁이 손을 뻗어왔다. 커다란 손이 뺨과 턱을 지그시 붙잡아오는 감각에 흠칫 놀란 김독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유중혁은 미동도 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금의 동요조차 없는, 무감각할 정도로 무기질적인 시선이었다.

  문득 김독자는 하, 하고 조금 웃어버렸다. 그래, 시발. 유중혁. 우리한테는 이런 놀음을 할 여유가 없지. 이런 시나리오는 하루빨리 깨버리고 가서 다른 일들을 준비하는 게 최고로 효율적인 동선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다음은 쉬웠다. 이 시나리오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갈 필요도 없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달려버리면 되는 것이다. 키스해야 하면 하고, 섹스해야 하면 하고. 이딴 시나리오는 그냥 빨리 치워버리자, 유중혁. 괜히 이상한 생각 들기 전에.

  김독자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순히 끌려온 유중혁과 쿵, 하고 입술이 부딪쳤다. 생각보다 세게 부딪친 탓에 입술이 아릿하게 아팠지만 그런 걸 신경쓰기엔 이미 늦었다. 눈을 꾹 감고 입을 벌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키스는 이렇게 하는 거겠지. 하지만 정작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거리를 좁혀오던 유중혁은 그대로 굳었는지 반응이 없었다. 시발, 유중혁 이 새끼야! 내 이 숭고한 희생정신도 몰라주고. 너도 협조 좀 해봐……! 민망함에 입술을 떼어놓으려는 찰나였다.

  김독자는 허리를 홱 끌어안는 손길에 휘청이듯 무너졌다. 순식간에 맞닿은 입술 틈새로 혀가 밀려들었다. 낯선 감각에 김독자는 몸서리치듯 눈을 감으며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유중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바싹 붙어오는 탓에 얇은 셔츠 한 장 너머로 뜨끈한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유중혁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혀로 입안을 온통 헤집더니 입술을 잘근 깨물고 빨았다. 한 팔로는 허리를 꽉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귓가와 턱선, 그리고 셔츠깃 아래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김독자는 숨을 쉴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헐떡이며 제대로 나오지 않는 말을 띄엄띄엄 뱉었다.

  유, 중혁, 흐, 이, …야, 잠, 깐만……! 더듬거린 끝에 간신히 고개를 돌려 하, 하고 턱끝까지 들어찬 숨을 뱉어냈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자 여전히 허리를 두르고 있던 유중혁의 팔이 풀려나갔다. 김독자는 차마 그를 향해 얼굴을 돌리지 못한 채 손으로 미적지근하게 뺨을 가렸다.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얼굴이 뜨거웠다. 시발…… 이 새끼 왜 키스도 잘해? 역시 주인공이다 이거냐? 아니면 내가 못하는 건가? 어느 생각이든 이 상황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김독자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은 이보다 더 큰 거사였으므로…….

['제4의 벽'이 두꺼워집니다.]

  그래, 시발, 이게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벽이 두꺼워졌는데도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뛰는데,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김독자는 문득 유중혁이 반응이 없는 것이 이상해 슬쩍 그에게 눈길을 향했다. 대단히 억울하게도 유중혁은 키스하기 전이나 그다지 다름없이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표정이 더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시발. 내가 그렇게 못했나. 알고 있었을 거 아냐? 아니면 이제 와서 나랑 키스하기 싫었다고 할 셈인가? 먼저 들이댄 게 누군데? 억울했다. 하지만 기껏 결심했는데 이제와서 뺄 생각은 없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김독자는 다시 손을 뻗었다.

  "야, 유중혁……."

  하지만 뻗어진 손이 무색하도록 유중혁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을 돌리고선 옷을 찾아 입더니 문으로 향하기에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그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야, 어디 가?"
  "그만 자라."
  "뭐? 너 아까 분명히……"

  쾅. 순식간에 문이 닫히고 방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김독자는 닫힌 문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가만히 생각했다. 유중혁 이 개복치 자식이 대체 왜 이래? ……당황이 가시자 민망함이 속에서 치고 올라왔다. 아니, 시발……. 이 개자식이, 준비가 안 됐다느니 어쩌느니 하길래 기껏 용기를 냈더니 왜 저러는 거야? 내가 진짜 그 정도로 못했냐고? 아니면…….

  아니면, 막상 나랑 이런저런 일들을 하려고 하니, 싫어진 건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63번이나 회귀를 하면서 유중혁은 여러 번의 연애를 했다. 하지만, 그 어느 애인의 사례를 보더라도 지금과 같은 황당한 상황-시나리오에 의해 강제로 부부 행세를 해야 하는-은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김독자여서야.

  싫을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뭐, 나도 진심으로 부부 관계가 되고자 시나리오를 수락한 것도 아니고. 유중혁도 마찬가지겠지. 어디까지나 이해타산적으로 시작한 거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유중혁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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