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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트위터에 풀었던 것 복붙 및 약간 수정

2018.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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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1화 기준 날조가 심합니다... if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젠장. 김독자는 욕설을 지껄이며 숨을 골랐다. 아니 시발! 야! 대답 좀 해봐! 애타게 사벽이놈을 불렀으나 묵묵부답이었다. 평소에는 좀 다물라고 해도 계속 지껄이더니 왜 갑자기 사라진 거야?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아, 시발, 진짜 좆됐다……. 김독자는 조금 전 일을 떠올렸다.



    [아무리 구원의 마왕이라도 거신들을 설득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요?]

    페르세포네가 방긋 웃었다. 김독자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 당연히 무리가 있지. 사실상 미친 짓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미친 짓을 하면서 시나리오를 클리어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이번에도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그래서 농담을 건넸을 뿐이었다.

    “좀 도와주시기라도 하실 겁니까?”

    당연히 거절하겠거니 하고 던진 말이었는데. 페르세포네가 고개를 기울이며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듯한 미소가 얼굴에 퍼졌다. 우리엘 얼굴로 그러지 마시죠. 그 얼굴로 그러시면 자연스럽게 전우애가 떠올라버린단 말입니다. 무슨 말이 이어지려나 가만 바라보고 있으니 페르세포네가 손가락을 튕겼다.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조금 도와줄게요. 대신에 조만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어요?]

    무슨 부탁일지 대충 감이 잡혔다. 올림포스는 지금 내분이 심각하다. 그녀도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고민이 많겠지. 기간토마키아 이후의 무언가를 생각하는 말인가……. 신중히 대답해야 한다. 그래서 김독자는 물었다.

    “어떻게 도와주실 겁니까?”

    [역시나 경계가 심하군요. 그렇게 걱정되면 추가 조건이라도 달겠어요? 거신들의 설득에 실패한다면, 내 부탁은 들어주지 않아도 좋아요.]

    어라? 생각보다 꽤 세게 나온다. 대체 무슨 어려운 부탁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미미하게 찌푸려진 김독자의 미간을 바라본 페르세포네가 소리내어 웃었다.

    [그대에게 해가 될 부탁은 아니에요. 내 수식언을 걸고 맹세하겠어요.]

    “……더 걱정이 됩니다만.”

    조금 불만스럽게 답한 김독자는 이런저런 추가 조건들을 더 내걸었다. 약속의 이행에 관련된 까다로운 조건들. 불합리하다 느껴질 만한 것들도 섞여 있었으나 페르세포네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좋아요. 그럼 거래 성립. 자, 가봐요. 구원의 마왕. 거신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정말이지 수상한데. 혹시 부탁이라는 게 기간토마키아 이후의 세력다툼 얘기가 아닌 건가. 불안감이 등 뒤를 엄습했으나 이미 계약은 끝난 뒤였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긴 복도를 걸어가자 옆에서 유중혁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성좌들을 잘도 구워삶아대는군.”
    “칭찬으로 들으마.”
    “도대체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이 자식은 정말이지 성좌들이 죽도록 싫은 모양이다. 인마, 전략적 동맹이라는 게 있는 거다. 어차피 나중엔 다 쓸어버릴 거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런 생각을 하며 김독자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랬던 게 5일 전 일이다. 거신들을 설득하는 데 일주일 정도를 예상했던 터라 한수영에게도 그 기간동안 준비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온 참이었는데, 페르세포네가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그 거신들이 첫 만남 한 방에 제안을 수락해버렸다.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렸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 얼굴이 웃겼는지 거신들이 껄껄 웃어제꼈다. 옆에 서 있던 유중혁의 얼굴마저 충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이렇게 쉽게? 예에? 당신들 이걸로 정말 괜찮습니까? 되물을 뻔했으나 성사된 거래에 말을 얹어봤자 우리만 손해다. 김독자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고…….
    그래서, 덕분에 일주일간 타르타로스에 갇힌 채 백수 신세가 되었다. 젠장. 여기서 뭘 더 해야하지. 더 얻어갈 게 뭐가 있더라…….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차에 페르세포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성사 축하해요, 구원의 마왕.]

    “……도대체 무슨 수를 쓰신 거죠?”

    [그런 건 영업 비밀 아니겠어요.]

    생긋 웃는 얼굴은 여전히 우리엘의 그것이었다. 젠장. 어쨌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니 페르세포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내 부탁을 들어줄 차례군요?]

    벌써 얘기할 셈인가? 김독자는 조금 긴장하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이렇게 큰 도움을 줬으니 얼마나 거대한 걸 요구해 올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있는데 페르세포네가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뭡니까, 그건?”

    [그걸 벌써 알려주면 재미 없잖아요, 구원의 마왕.]

    분홍빛 액체가 들어 있는 두 개의 병이었다. 뭐지. 저 불길한 색깔은. 정말이지 불길하기 짝이 없다. 한 발짝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유중혁도 그것을 보고는 몸이 굳은 듯했다. 김독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부탁이라는 게. 그걸 마셔달라거나……?”

    [어머나. 얘기가 잘 통해서 좋다니까.]

    장난하십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간신히 눌러참았으나 표정만은 차마 관리되지 못했다. 페르세포네가 재밌다는 듯 맑게 소리내서 웃었다.

    [자아, 구원의 마왕. 재밌는 걸 보여주세요.]

    “아니, 잠시만요. 정말로 그딴 부탁을……”

    [그딴? 나에게는 꽤나 중요한 일인걸요.]

    다른 이들에게도, 말이에요. 의미심장한 목소리. 대체 뭔가. 침착하자, 김독자. 재빨리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을 뒤적였다. 올림포스에서 제공하는 분홍빛 액체에 대한 정보는…… 젠장, 아무리 뒤져도 한 가지 뿐이다.
    사랑의 묘약.
    사실 그리스 신화 내에서는 에로스의 화살로 훨씬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하지만 이런 형태도 분명히 있기는 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지금 여기서 나와? 예? 여기서요? 김독자는 어이가 없어 눈을 비볐으나 여전히 액체는 분홍빛이었다. 제발 다른 액체라고 해줘.

    “그게…… 제가 생각하는 그 액체가 맞습니까?”

    [아마도요?]

    “……다른 부탁으로 바꾸시는 건 어떻습니까?”

    [싫어요.]

    젠장.

    “하필이면 왜 그겁니까?”

    [그걸 설명해주면 의미가 없어져요. 자, 빨리. 그대에게 거부권은 없어요.]

    그러더니 손을 뻗어 강제로 병을 손에 쥐여준다. 유리가 맞부딪히며 까득 소리를 냈다. 김독자는 계약을 체결할 때 걸었던 조건들을 떠올렸다. 알력 다툼이나 폭력적인 상황의 발생을 염두에 둔 조건들이라 이런 상황에는 들어맞는 것이 없다. 젠장, 이건…… 아냐, 좋게 생각하자. 오히려 간단히 끝날 수도 있다.

    [뭘 생각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그건 사랑의 묘약과는 조금 달라요. 가령, 그걸 마시고 눈을 뜨면 처음 보는 상대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란 얘기예요.]

    당연하지. 그러면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건에 걸린다. 그럼 도대체 뭐란 말이냐……. 착잡한 기분이 들었으나 어쨌든 신체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제약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제4의 벽’도 있고. 그래서 김독자는 액체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하나는 누구 건지 알겠죠?]

    말하며 손가락으로 유중혁을 가리키더니, 살풋 웃고 우아한 걸음으로 사라져간다. 하아아……. 김독자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 뚱한 얼굴의 사내를 바라봤다.

    “야. 중혁아……”
    “안 마신다.”
    “아니, 야! 일단 좀 들어보고 대답해!”
    “내가 왜?”

    그렇게 말하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치켜든다. 김독자는 미간을 사정없이 좁혔다. 그래, 페르세포네와 계약한 건 나지. 그러니까 이 놈은 원칙상 이걸 마시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네가 이걸 안 먹으면 내가 계약을 깨는 게 된다고.”
    “그러게 누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하랬나?”

    이 자식이. 야, 이게 다 우리 잘 되자고 하는 일이라고! 김독자는 화를 눌러 참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일단 신체적으로 위해가 가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조건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싫다.”
    “야, 딱 한 번만 나 믿고 마셔줘라. 응?”
    “내가 네 녀석의 뭘 믿고?”

    그러더니 싸늘한 눈으로 노려본다. 야 인마! 형 못 믿냐! 라고 외칠 뻔했으나……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좀 믿음직스럽지 못할 법 하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젠장, 내가 죄인이지. 김독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이거 마시면.”
    “…….”
    “내가 다음에 어디로 사라질지 먼저 알려줄게.”

    유중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진심인가, 김독자.”
    “야, 내가 언제는 거짓말 한 적 있냐.”
    “…….”

    쏘아보는 눈빛에 김독자가 어깨를 움찔했다. 아, 아니, 난 거짓말은 안 했다. 진짜로…… 말 안 하고 숨긴 건 있어도……. 머뭇거리다가 다시 강하게 몰아붙였다.

    “진짜 약속.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줄게.”
    “…….”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 Lv. 5’를 사용합니다!]
    [전용 스킬, ‘포커페이스 Lv.5’를 발동합니다!]


    아니, 유중혁 인마 날 그렇게 못 믿냐! 억울함에 인상을 쓰자 유중혁이 똑같이 미간을 찌푸려댔다. 새끼,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 막 쓰네……. 눈싸움을 하듯 마주보고 있자니 유중혁이 먼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딱 한 번만 더 믿어보겠다.”

    새끼, 그럴 거면서. 김독자는 실실 웃으며 병 하나를 건넸다. 제 손에 남은 병 하나의 뚜껑을 뽁, 하고 따니 달착지근한 향이 올라온다. 엄청 맛있을 것 같은 달콤한 냄새. ……진짜 괜찮은 거 맞겠지?

    “자, 그럼 마신다…… 야!”

    유중혁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듯 이미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으나 일단은 김독자도 손에 들린 액체를 입에 털어넣었다. 향기만큼이나 달다. 너무 달아서 조금…… 쓰다고 느껴질 정도로. 파르르 떨며 눈을 꾸욱 감으니 옅은 오한이 들었다. ……뭐지?
    한쪽 눈만 살며시 떠 보자, 다행히도 시야에는 이상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보니…… 빈 병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뭐지. 왜 반응이 없지? 나도 딱히 변한 걸 못 느끼겠는데. 유중혁이 손 안에서 병을 굴리다가 고개를 돌려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이건 무슨 효과가 있는 약물이지? 변화를 모르겠군.”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새꺄. 그렇게 답하려고 했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이건…… 뭐지?

    「‘제4의 벽’이 말합니다. ‘김독 자 나 졸 려’」

    미친! 야! 뭔 소리야!

    「나 잠들 면 위 험」

    아는 놈이 왜 그래, 시발!

    「어디 가 지마 누 구만 나지 도 말 고」

    젠장, 이 와중에 맞는 말을……. 그 뒤로 몇 번이나 불렀으나 벽은 대답이 없었다. 씨발, 이게 뭔 상황이야! 김독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침착하자. 아직은 괜찮다. 주변엔 유중혁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고, 채널을 꺼둔 덕분에 들여다보려는 성좌들도 없다. ‘제4의 벽’이 없어도 잠깐 정도는……. 문제는 이 녀석이 얼마나 잠들어있을지 알 수 없다는 거다. 여왕님,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올림포스 반드시 쳐죽인다. 이딴 약물을 나한테…….
    정신이 없어 허둥거리고 있자니 어깨에 턱 얹어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른 감각이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나 온기, 그런 것들이…… 이전보다 훨씬 선연하다. 젠장, ‘제4의 벽’이 꺼져서인가? 갑작스레 주변의 공기가 피부에 닿는 감각까지 예민하게 와닿았다. 감옥 복도의 차가운 공기, 잿빛 돌벽의 광택. 몸을 지탱하는 서늘한 돌바닥의 요철. 그런 것들마저 너무나 선명하다.

    “왜 그러지? 김독자?”

    그리고, 이 목소리마저.
    김독자는 짧게 몸을 떨었다. 젠장……. 이 자식 목소리가 원래 이랬나? 이렇게…… 듣기 괜찮은 목소리였던가? 김독자는 주저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것이 더 이상했는지 유중혁이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을 가했다.

    “몸에 이상이라도 온 건가?”

    그러면서 허리를 숙여 얼굴을 확인하려 한다. 안 돼, 지금은……! 김독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유중혁의 인상이 찌푸려지는 것이 보지 않아도 훤히 느껴졌다.

    “김독자. 뭐 하자는 거지.”
    “그, 그러니까……”
    “이상이 있으면 해결해야 한다. 피해서 될 일이 아닌 걸 알 텐데.”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근데…… 이걸 뭘 어떻게 해결한다고? ‘제4의 벽’이 꺼져서 생긴 일인데 네가 뭘 어떻게 해결해?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봤다간…… 지금보다 더 큰일이 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하지만 물론, 유중혁은 김독자의 사정에 관심이 없었다. 기어이 고개를 숙여 그 얼굴을 들여다보기에 김독자는 속으로 욕지꺼리를 하며 눈을 꾹 감았다.

    “……김독자.”

    꽤나 화가 난 듯 바닥을 긁듯이 낮아진 저음이 귓가에 꽂혔다. 아, 시발……. 왜 저렇게 빡친 목소리까지 좋은지, 그걸 듣고 이렇게나 몸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독자는 손을 뻗어 유중혁의 어깨를 밀어냈다.

    “유중혁. 나…… 그…… 히든피스 좀 찾고 온다. 여기 가만 있어. 따라오지 마!”
    “뭐?”

    어처구니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으나 김독자는 무시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책갈피]를 열고 [바람의 길]을 활성화 해……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도망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김독자. 제가 생각해도 우스워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래, 지금 저 잘난 얼굴을 마주했다간 자신이 무슨 짓을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망친 지 5일째였다.

    [‘한낮의 밀회’에 부재중 메시지가 39통 있습니다.]

    아, 유중혁 미친 새끼. 작작 좀 보내! 계속해서 쌓이기에 대강 확인만 하고 닫아뒀는데 그새 또 저렇게 쌓였다. 존나 지가 무슨 그, 집착…… 뭐더라. 아무튼 그건 줄 알아? 김독자는 이마를 짚었다. 유중혁을 피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이 상황에서 다른 성좌나 화신을 만났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멸살법’을 뒤져가며 타르타로스의 구조를 완전히 파악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잡히거나 죽거나…… 뭐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놈의 ‘제4의 벽’은 아직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제 이틀 뒤면 원치 않아도 감옥에서 풀려나 기간토마키아에 참가하게 될 텐데 상황이 말이 아니다. 사실 여기에 온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래도 남는 시간을 이렇게 도망치는 데 쓰다니 아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김독자는 결국 마음을 다졌다. 시발…… 어쩔 수 없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약물을 먹었는데 유중혁에겐 아무 변화도 없고, 자신에겐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아마도 유중혁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진작에 내린 결론이었으나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을 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후우우…….

    ─야. 유중혁.
    ─김독자, 잡히면 죽는다.

 
    아, 미친 싸이코패스 새끼야! 아, 아니다. 침착해야 한다. 김독자는 다시 ‘한낮의 밀회’로 말을 걸었다.

    ─어디 있냐. 그 쪽으로 갈게. 대신 안 죽인다고 약속해.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이 자식, 진심으로 한 말이었냐.

    ─약속 안 하면 안 가.

    그러자 간신히 대답이 돌아왔다. 위치를 들은 김독자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유중혁이 있다는 곳 주변에는 빈 감옥들만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래도 내가 다른 놈들을 피해다니는 걸 알고 있었던 건가. 일부러 이런 곳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고개를 저으며 조금 더 걷자 검고 긴 인영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 실루엣을 보자마자 갑작스레 심박수가 올라갔다. 미친. 김독자 가만히 있어.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목소리가 들릴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유중혁.”

    조심스레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저벅저벅, 가까워져 왔을 뿐이었다. 몸이 굳었다. 젠장. 이게 뭐라고 갑자기 이렇게 긴장되는 거지. 맨날 보던 놈인데 도대체 왜. 김독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응시했다. 김독자의 눈 앞까지 걸어나온 유중혁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봤다.

    “죽기 전에 남길 말은 있나.”
    “미친, 안 죽인다고 했잖아!”
    “생각 좀 해보고.”

    한쪽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간다. 이 자식 왜 기분이 좋아보이지. 설마 아직도 생사여탈권에 미련이 남아 있었냐. 그런 생각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아주 잠시였다. 김독자는 다른 것에 시선을 온통 빼앗겼다. 유중혁 이 자식…… 원래 이렇게…… 잘생겼었나?
    아니, 잘생긴 거야 원래 알고 있었다. 무려 ‘멸살법’의 기준이 되는 미모. 저도 농담으로 ‘야 우리 중혁이 잘생겼다’ 따위의 소리를 몇 번이나 지껄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사실이 새삼스럽게 왜 이렇게 와닿는지 모를 일이다. 반듯한 이마, 짙은 눈썹. 시원하게 드러난 눈매와 콧날, 그런 것들. 어찌할 바 없이 심박이 빠르게 치솟았다. 아니, 미친, 나는 남자를 좋아한 적은 한 번도……. 뭐? 좋아해? 김독자 드디어 미친 건가? 숨이 턱 막힌 기분을 느끼며 올려다보자 유중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직도 상태가 그대로인 모양이군.”

    커다란 손이 뻗어온다. 김독자는 그대로 못박힌 듯 움직이지 못하고 그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손가락이 턱을 붙잡고, 살짝 들어올리더니 좌우로 이리저리 돌려본다.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휘둘리자 유중혁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해졌다.

    “김독자.”
    “…….”
    “대답해라.”

    손가락으로 두 뺨을 붙잡고 꾸욱 누른다. 야, 인마, 뭐 하는…….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그제야 만족한 듯한 얼굴을 하며 손을 떼어낸다. 젠장……. 유중혁은 제 입가를 매만지며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물었다.

    “너와 내가 먹은 게 같은 약물은 맞나?”
    “……아마도.”
    “그런데 나는 변화가 없고, 네 녀석은 이렇게 됐다 이거지.”

    김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증상을 설명해 봐라. 어떻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제4의 벽’이 꺼졌다고 곧이곧대로 설명할 수야 없는 노릇이다. 이걸 뭘 어째야 하나. 말이 없자 유중혁은 기다려주겠다는 듯 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아……. 김독자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증상이.”
    “말해봐.”
    “이전보다 감각이…… 선명해졌다고 해야 하나.”
    “…….”
    “보이는 거나 들리는 거, 그런 것들이 다…… 좀, 너무 진짜같아서.”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독자는 급격히 짧아진 자신의 언변에 속으로 한탄을 거듭했다. 왜 이렇게 말이 안 나오냐.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무슨 말을 하려기에 뜸을 들이냐.

    “이전보다 예민해졌다, 그런 거군?”

    뭐, 뭐, 미친……. 김독자는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그걸 그렇게 축약하니까 존나 이상하잖아……! 물론,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긴 손가락이 다시 한 번 제 얼굴을 붙잡았으니까.

    “그래서 이런 얼굴을 하는 건가, 김독자.”

    그러면서…… 씩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아, 시발. 김독자는 그만 눈을 꾹 감았다.
    유중혁은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하얀 피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눈가가 붉고, 닿은 손 끝이 뜨끈하다 느껴질 정도로. 귓가도…… 빨갛군. 오랫동안 시나리오를 진행하며 이 녀석을 봐왔지만 이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늘 자신만만해 보이면서도 때로 처연한 얼굴을 하곤 하던 녀석이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굴다가도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하기도 했다. 유중혁은 김독자라는 존재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야, 한 번도 그 입으로 직접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검을 맞대며, 등을 맞대며. 그 편린만을 알아갔을 뿐이다.
    그래서 유중혁은 웃었다. 김독자, 이번에는 내가 이겼군. 내가 너를 더 잘 알고 있다. 유중혁은 눈 앞의 사내와 같은 표정을 아주 잘 알았다.
    이건, 사랑에 빠진 얼굴이다.

    “김독자.”
    “……왜, 왜.”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한다. 열렸다 닫히는 입술을 빤히 응시하며 유중혁은 말했다.

    “내가 네 증상을 제대로 설명해 줄까.”
    “…….”

    엄지손가락 끝으로 뺨을 가볍게 쓸자 파드득 몸을 떤다.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굴을 마주하면 도망치고 싶고.”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그대로 손을 내려 목덜미를 쓸고, 가슴 위에 얹었다. 가볍게 가져다 댔을 뿐인데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듯 격렬하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윽. 야, 너…….”
 
    반사적으로 떠진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자 얼굴이 그보다 더 붉을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다. 제법…… 볼만하군. 유중혁은 눈을 휘어 웃었다. 손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가까이 붙였다. 놀란 듯 밀어내려 움직이던 두 손목을 붙잡자 금방 힘을 잃어버린다.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시선에 김독자는 눈도 감지 못한 채 그저 숨을 멈췄다.

    “초조해지고, 안절부절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겠고.”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뒷목이 짜릿하게 달궈진다. 붙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유중혁의 이런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곤…… 한 번도…… 젠장, 이건 반칙 아니냐. 김독자는 그저 열렸다 닫혔다 하는 그 모양 좋은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붙잡은 손목을 끌어당겨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얼떨결에 유중혁의 목을 끌어안은 자세가 된 김독자는 사고회로가 정지해버렸고. 그대로 얼굴이 가까워져왔다.

    “밀어낼 수 있으면 밀어내 봐.”

    마치 기회를 주려는 듯, 입술이 맞닿기 직전에 들려오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 피부에 전해져오는 따뜻한 숨결. 김독자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4의 벽’을 불러보았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아, 그래, 나도 안다고…… 이게, 진짜 현실이라는 걸. 그동안 어쩌면, 외면해 왔었다는 걸.
    김독자는 눈을 꾹 감았고, 이내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

    김독자는 표정을 잔뜩 구긴 채 눈 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페르세포네는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이래서야 정말 손 위에서 놀아난 기분만 든다. 그래서 조금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족하십니까.”

    [뭐, 일단은요.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요.]

    “도대체 그건 뭐였던 겁니까?”

    [흐음, 글쎄요. 뭐라고 할까…….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감정 증폭제같은 거라고 할까.]

    그러면 그렇지. 김독자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제대로 보지 못해서 너무나도 아쉽군요.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채널이 꺼져 있었다지만 이곳은 명계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손아귀 안이다. 이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녀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런 표정을 눈치챘는지 빙긋 웃은 페르세포네가 대답했다.

    [그대의 그 ‘벽’이 아주 열심히 일을 하는 모양이에요.]

    뭐라고? ……잠들어 있던 게 아니었나?

    [‘제4의 벽’이 히죽 웃습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다. 어쨌든 뭔가 하긴 한 모양인데. 김독자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자 페르세포네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물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뒷편에 서 있는 유중혁을 바라본다. 보지 않아도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쏘아볼 얼굴이 상상된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눌러 참으며 김독자가 말했다.

    “목적은 뭐였던 겁니까.”

    [구원의 마왕. 그대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모양이지만……. 사랑이란, 아주 강력한 동기이며 모든 원초적인 욕망의 근본이랍니다.]

    그놈의 사랑 타령. 올림포스 놈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랑놀음을 못 해서 난리냐. 아, 사랑이란 걸 원체 좋아하시는 분들이라 하반신이 자유분방하신 건지. 인상을 구기자 페르세포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아, 그럼…… 돌아가요, 구원의 마왕.]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예상한 상황이었으나 반사적으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젠장. 욕설을 주워섬기며 고개를 조금 돌리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명백히 불쾌해하는 기운도 함께.

    [다음엔 에로스의 화살이라도 준비해 둘게요.]

    “그만두시죠. 어차피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만 효과가 있는 기간제 아이템 아닙니까. 제 몸에 그렇게 오래 상처를 낼 수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이래봬도 설화급 성좌고, 마왕인 김독자였다. 페르세포네는 유중혁의 얼굴로 작별인사를 하듯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때로 어떤 상처는, 영구적인 흉터를 남기기도 한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두 발이 땅을 디뎠다. 제법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그래도 감옥 공기보단 낫군.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부터 다시 바빠질 것이다. 일단은 일행들부터 찾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돌아보자 옆에 유중혁이 서 있었다. ‘제4의 벽’이 돌아온 덕인지 그 얼굴을 봐도 이제는 괜찮은…… 괜…… 찮은…… 젠장. 빙긋 웃는 유중혁의 얼굴을 보고 김독자는 헛숨을 들이켰다. 다시 얼굴이 달아오를까 시선을 돌렸다.

    “뭐하나, 김독자. 갈 길이 멀다.”

    미친놈…… 누구 때문인데……. 억울함을 토로하려 고개를 들자 커다란 손이 뻗어와 목덜미와 뺨을 감쌌다. 그대로 훅 가까워지는 얼굴. 순식간에 입술에 말캉한 감촉이 닿았다.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틈새로 혀가 밀려들어와 장난치듯 안을 훑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아준다.

    “미, 친, 유중혁……”

    쿵. 쿵. 심장소리가 울렸다. 유중혁 미친 새끼야……! 어버버하고 있자 그 잘생긴 얼굴이 조금 기울어졌다. 눈을 접어 웃는 표정이 낯설다. 늘 서늘했던 그 눈매가 웃을 때는 보기 좋게 휘어진다는 걸…… 별로 알고 싶진 않았는데…… 아니, 알고 싶었나. 이젠 모르겠다.
    김독자는 후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과 사의 동료’가 이딴 식일줄은 몰랐다고, 시발……. 태연하게 걸음을 독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는 앞서가는 너른 등과 코트자락을 바라보며, 자꾸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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